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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흥기


어떤 한 씬이 영화 전체를 함축하는 경우가 있다. 또 어떤 경우에는 결정적 한 장면이 조망한 영화를 졸작에서 건져 올리는 경우도 있다. 많진 않지만 적어도 나의 경우에는 이런 영화를 보고 나면, 강렬했던 장면이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아 글을 쓰는 동안 도무지 다른 것에 집중할 수 가 없어서 오래도록 나를 무척 힘들게 한다. 이럴 땐 그냥 그 씬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쓰는 편이 속편하다. 그것이 그 영화를 설명하기에 좀 더 진솔하고 합리적인 방법이 되기 때문이다. 오늘 난 <경축! 우리사랑>의 어떤 씬에 대해서만 이야기 할까 한다.


이 영화는 두 개의 위대한 씬이 존재하며, 그것은 바로 극중 아줌마라는 이름으로 우리들의 어머니 모습을 연기한 김해숙씨의 얼굴이다. 그 첫 번째, 낮에는 하숙집을 관리하고, 밤이면 노래방도 같이 건사해야 하는 억척스러운 봉순-흔히들 아줌마 혹은 누구의 엄마로 불리는 그녀. 하지만 그녀는 봉순이란 이름으로 불려야 한다. 이것이 이 영화의 핵심이기 때문이다-씨. 영화 초반, 점점 줄어만 가는 하숙생에 모집 전단을 붙이러 이 골목 저 골목을 서성이다 세탁소에서 일하는 하숙생 청년을 만나는 장면이 있다. 이 장면에서 청년은 봉순씨가 창피하지 않도록, 전단지에 적힌 오탈자를 최대한 조심스럽게 지적해준다. 이 때 카메라는 봉순이라는 인물의 얼굴을 고집스럽게도 화면 안에서 놓아주지 않는다. 거의 4~5초간을 미동도 없이 카메라는 인물의 표정을 단 하나라도 놓치지 않을 마냥 이상 하리 만치 오래도록 그 얼굴을 응시하고 있다.


두 번째 씬. 봉순에게는 이제 제법 처녀티가 나는 외동딸이 하나있다. 잘생긴 하숙생은 언제나 주인집 딸의 선망의 대상이자, 유혹의 대상 아닌가. 이 집도 별반 다르지 않는듯하다. 봉순의 딸 역시 제법 반반하게 생긴 세탁소 청년과 잠깐의 열애에 빠져든다. 부모의 노래방에서 불같은 성애를 표현하다 엄마인 봉순에게 걸린 딸은 마땅한 변명거리를 찾지 못하자, 급기야 “나 오빠랑 결혼할래.” 라고 폭탄선언한다. 그러나 취직이 되어버린 봉순의 딸은 면피용 폭탄선언을 철회해야만 했다. 그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세탁소 청년은 자신의 아픔을 표현하기에 여념이 없고, 이 때 맨 처음 세탁소 청년을 우연히 만난 것처럼 그 자리에 홀연히 나타난 봉선은 사위가 될 뻔 했던 청년을 이내 등에 들쳐 업고 선 하숙방으로 청년을 옮겨 놓는다. 얼굴과 옷가지에 뭍은 토사물을 치우면서 외간 사내의 상체를 훔쳐보게 된 그녀는 왠지 모를 뜨거운 감정에 이끌리게 되고, 본능적으로 한 남자의 상체를 쓰다듬게 된다. 여기서 다시 카메라는 봉선의 얼굴을 비춘다. 첫 번째보다 더 길게 더 집요하게.......

이제 나는 이 두 개의 씬을 집중 분석하려고 한다. 이 두 개의 씬은 클로즈 업이며, 프리즈 프레임(고정 화면)치고 상당히 긴 테이크-두 번째 씬은 거의 40초간을 아무 미동도 없이 한 장면을 촬영했다-라는 점에서 기존에 우리가 자주 접해보지 못했던 방식의 장면을 봤을 때 느끼는 일종의 이질감을 형성한다. 그런대 이 영상은 이질감이 부여하는 어색한 느낌에서 더 나아가 이상하게도 피하고 싶다는 마음이 들게끔 한다. 잔인한 장면도 아니요, 야한 장면도 아니요, 그렇다고 지루한 장면이 몇 십분 동안 지속된 것도 아닐 터인데, 이 작은 표정 변화를 집요하게 응대하고 있는 우리는 왜 이토록 심한 이질감에 휩싸이는 것일까. 그것은 우리가 지금까지 아줌마라는 대상을 현실에서건 미디어에서건 이토록 가까이 오래도록 마주 대해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영화 오프닝 시퀀스에서 보여준 독특한 애니메이션은 여성의 일생이 아줌마라는 단계에 접어들었을 때, 어디로 가야 할지 그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여성은 아줌마에 이르러 사회적 무용성에 휩싸인다. 특히 외모적 가치로 여성을 평가하는 사회에서는 아줌마란, 가치를 매길 수 없는 한없이 보잘것없는 존재로 추락한다. 그 단적인 표현은 영화에서도 더할 나위 없이 잘 들어난다.


영화 초반 봉순의 남편 친구들이 봉순이 바로 옆에 있는데도 불구하고, 노래방에서 도우미들이 없어서 재미있게 놀지 못했다고 투정하는 장면은 그녀가 여성으로서 전혀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뜻을 숨겨 말하는 일종의 공격이다. 봉순의 남편 하씨와 그의 불륜 상대 역시 봉순이 남편과 성관계를 가지지 않았다는 점을 증명하여, 그녀에게 섹슈얼리티적인 여성성이 없다는 것을 인정시키고 싶어 한다. 이러한 상태가 지속되면서 도리어 중년의 여성은 자신 스스로를 방어하기에 이른다. 그래야만 한국 사회에서 겪어야 하는 무시무시한 폭언들에게서 살아남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줌마란 존재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한 사람의 어머니로서 또 다른 희생에 당도한다. 결국 다시 돌아온 봉순의 딸이 우선 가족의 화목이라는 이유로 봉순의 사랑을 포기하기를 제안하지만, 이에 실패하자 꺼내드는 카드는 ‘자신도 그 남자의 아이를 가졌다’고 협박하며 뱃속의 아이를 지우길 강요한다. 이마저도 거부당하자 그녀는 이렇게 소리친다. “정말 싫다. 엄마가 모 이래? 엄마가 모이래!!” 이것은 왜 엄마가 먼저 포기하지 않느냐는 것인데, 그녀의 입장에서는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사실 봉순의 입장에서는 전혀 당연하지 않은 문제이다. 이것이 바로 어머니라는 이름의 또 다른 아줌마의 초상이다. 항상 먼저 포기해야 하는 쪽은 그들이다. 그래서 아줌마라는 대상은 이제 ‘존재’자체에 의문을 가져야 할 지경에 이른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아줌마라는 존재는 사회적 비인식적 대상(인식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대상)에 가깝다. 이 사실은 여성성의 포기와 어머니라는 이름으로 강요하는 비주체적 행동 양식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발생한다. 여성으로서의 자리를 잃고, 자립적인 행위 주체를 잃은 객체는 이제 존재 자체에 대한 위협에 이른다. 여기서 아줌마는 더 이상 관심의 대상도 인지의 대상도 아니다. 한국 사회 안에서 아줌마는 제 3의 성이 아닌 아예 존재하지 않는 대상에 가깝다. 

그런대, 놀랍게도 이 영화의 앞서 말한 두 씬은 이런 존재에 생명력을 불어 넣고 있다. 우리가 인지하지 못한 존재를 집요하게 시각적으로 인지하도록 강요하며, 우리가 인지하지 못한 어떤 것에 대하여 비판적 의문을 들게 만든다. 그것이 무의식적으로 거부되어졌던 존재에서 실체로 파악되어지게 되면 관성적 거부감이 작동한다. 그러나 화면은 이런 과정 중에서도 절대 이 거부된 대상을 회피하지 않는다. 우리는 이제 서서히 아줌마라는 존재에 대하여 다가가게 될 것이다. 그것이 존재로서 발견되어지는 순간 ‘그것은 어떤 존재인가?’에 대한 질문에 당도하게 될 것이다. 이 자체가 관객의 무의식에 대단한 혼란과 파괴를 야기 시킨다. 기존의 아줌마라는 존재에 대한 비인식적 태도가 일순간에 존재론적 고민에 부딪치게 되면, 우리는 인식의 사고 순간에서 사회적 강박의 틀을 깨고 원론적인 존재 해석에 다가가게 된다. 그래서 첫 번째 씬은 존재에 대한 각성과 동시에 보여 지는 미세한 표정 변화를 통해 그녀에게 실존적 위치를 부여한다. 어떤 무시무시한 폭압적인 의식으로부터 해방된 인식은 빠르게 변화하여 곧 두 번째 씬에 당도하게 되는데, 여기서 화면은 존재론적 주체와 여성적 이미지 사이를 왔다 갔다 하면서 봉순이라는 아줌마가 주체적 위치에 서도록 만든다.


사실 나는 지금 너무 말도 안 되는 단어들을 열거하면서 되도 안한 소리를 나불대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분명 첫 번째 씬에서 봉순의 얼굴을 클로즈 업으로 꽤 오랫동안 잡았을 때, 난 나도 모르게 상당히 불편했었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아니 아줌마 주제에 왜 부끄러워하지?’라는 못 된 생각이 든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난 충격을 받았다. 그런 생각이 들고 나는 감독이 이런 생각을 무마시키기 위해 화면이 곧 다른 화면으로 이동할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화면은 멈추어 서서 고집스럽게 그녀의 얼굴을 응시했다. 마치 내가 틀렸다는 투로 화면은 내게 조롱의 눈빛을 보내는 기분이었다. 그제야 나는 화면 속에 있는 사람이 누군지 보이기 시작했다. 아줌마라는 세 글자로 모든 게 감추어지는 대상이 아닌 한 사람의 여자로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그 대상이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두 번째 씬에서는 이제 그녀의 그런 행동에 의해 내 관념은 성큼 더 전진하였다. 그녀도 인간이다. 누구나 그런 어리석은 사랑에 빠질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을 더욱 인간답게 만드는 건 실수와 실패이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어리석은 실수를 통해 무엇보다도 봉순은 인간다워진다.


나는 지금 불륜을 찬양하는 것이 아니다. 실수조차 용납되어지지 않고, 더욱이 여성성을 말살시켜 사회 계약상의 혼인 관계에게도 공공연하게 사랑받는 것이 불가능한 대상이 사랑의 실수를 저지를 수 있다는 점은 분명히 이 영화가 말할 고자 하는 지점의 극단에 위치한 지점이다. 이 영화는 일종의 충격 치료 같은 면이 있다. 영화 가장 마지막 봉순이 여성으로서 가질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순간에 당도할 때 영화는 마술적 리얼리즘으로 인하여 마을 사람들에게 봉순의 신음 소리를 모두들 듣게끔 만들고 한바탕 신나는 여흥에 도취시킨다. 이 장면에서 과연 우리는 아줌마라는 대상의 이야기를 얼마나 귀담아 들었는가 또 그것이 주는 진정한 의미는 무엇인가에 대하여 사려 깊게 생각해보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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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난 봉순씨는 행복할까?

필진 리뷰 2008.05.16 13:11 Posted by woodyh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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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비평 매거진 '네오이마주' http://neoimages.co.kr 의 공식블로그입니다.)


<경축! 우리 사랑>과 여성의 불륜을 다룬 21세기 한국영화들

엄마는 뿔났지만, 이 아줌마는 바람났다. 줄잡아 30여 년을 함께 산 남편을 옆에 두고 "나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어"라며 옆방으로 뛰어가는 아줌마 봉순씨(김해숙). 설상가상 그 상대는 딸의 남자친구인 하숙생 총각이다. 그렇다. 이 아줌마, 단단히 바람났다.

 <사랑과 전쟁>의 한 시리즈 아니냐고? 그런데 이게 그리 단순치 않다. 이 아줌마의 바람은 인간의 능동적 삶에 대한 욕구를 온 몸으로 긍정하고 있다. 오점균 감독의 <경축! 우리 사랑> 이야기다.

사실 불륜과 바람은 이제 이 시대 대중문화의 없어서는 안 될 주요 소재다. 지금도 TV를 틀어보면 아침 드라마를 제외하고도 불륜을 소재로 한 드라마는 차고 넘친다. <조강지처클럽>은 남편들의 바람에 맞바람으로 맞서는 '조강지처'의 모습을 그리며 인기리에 100회 연장이 결정됐고, 지난 3일 첫 방송을 시작한 <달콤한 인생> 역시 결혼과 불륜이란 소재를 가져온 정통 멜로드라마다. 그만큼 전통적인 TV 소비층에게 먹힌다는 반증이다.

대중문화가 그런 사회적 분위기를 조장한다는 비판에도 1953년에 제정된 간통제가 여전히 유지되고 있는 나라 대한민국. '심부름센터가 바라본 대한민국은 불륜공화국' 따위의 기사가 음지의 현실을 자극적으로 다룬다면 한국 영화가 그리는 여성들의 바람에는 무언가 특별한 것이 있다.

 그리고 50대 아줌마의 바람이란 범상치 않은 소재를 취한 <경축! 우리 사랑>. 이 영화의 파격과 가치는 어디서 연원하나. 또 한국 영화 속 여성의 바람과 불륜은 또 어떻게 변모해왔는가.

 우리 시대 아줌마 봉순씨는 어찌하여 불륜을 저질렀나

 "20년, 30년 동안 그 아줌마 이름이 봉순이라는 건 모른 거예요. 누구 엄마, 누구 여편네, 노래방, 하숙집 아줌마로만 불렀던 거죠."

MBC <뉴스데스크>에 출연한 배우 김해숙의 말이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는 건 김춘수의 <꽃>이 전부가 아니다. 결혼과 동시에 이름을 잃고, '제 3의 성'이라고 비하되는 아줌마 봉순씨도 마찬가지다. 그러니까 쉰 살 봉순씨가 온전히 그 이름으로 불렸을 때 그녀는 잊혀졌던 자기 정체성에 눈을 뜨게 되는 것이다. 

물론 그 길이 순탄하지 만은 않다. 집에서 빈둥거리던 딸 정윤(김혜나)이 눈이 맞아 결혼을 선언한 하숙집 총각 구상(김영민)은 처음에는 그저 순둥이 아들 같은 한 존재였다. 하지만 취직이 결정되고는 쪽지 한 장 달랑 남겨놓고 딸이 가출을 감행하자 상황이 반전된다. 홀로 눈물을 훔치고,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이 순수 청년이 애처롭게 보이기 시작한 것. 출발은 술에 취한 구상과의 하룻밤 해프닝이었지만 덜컥 임신을 하게 된 봉순씨의 일상은 변화가 찾아온다.

사실 남편(기주봉)은 진작에 동네 미용실 처자랑 바람이 난 상태였다. 그 와중에 봉순씨는 하숙집을 건사하고, 노래방을 지키며, 동네 아낙들을 데리고 봉투 붙이는 부업을 꾸릴 정도로 생활력이 강한 아줌마다. 돌아온 딸이 엄마를 조롱하고, 가정을 지켜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는 남편이 회유도 해 보지만 봉순씨의 뒤늦게 눈 뜬 사랑에 대한 감정은 견고하다. 더욱이 구상마저 "아줌마가 좋아요"라며 수줍은 미소를 건네는 중이다.

여기서 중요한 건 봉순씨의 자세다. 일생일대의 사건을 맞았지만 봉순씨는 무척이나 담담하다. 그저 처음으로 느끼는 이 소중한 감정을 놓치고 싶지 않을 뿐이다. 게다가 내 안에서 숨쉬고 있는, 신이 내려 준 새 생명을 버리고 싶지 않단 생각이 간절하다. 단순한 바람이나 불륜으로 치부될 수 없는 일종의 신의 섭리 혹은 순리. 그건 봉순씨와 가족, 그리고 마을 주민들을 그리는 감독의 태도와 결부되어 있다.

2000년대 한국 영화가 주목한 여성의 일탈

사실 바람 난 여성을 그린 영화의 시작은 195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정비석의 소설을 영화화한 정형모 감독의 <자유부인>이 큰 사회적 파장을 불러온 때가 무려 1956년. 평범한 대학 교수의 사모님이 양품점에서 일을 하다 바람이 나고, 종국에는 가족에게 용서를 빈다는 이 영화는 50년대 우리 사회의 근대성을 드러내는 작품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간통죄가 이미 발효된 그 시기, 주인공을 타락한 여성으로 묘사하고 종국에 용서를 구하는 서사구조는 가부장제 이데올로기를 더욱 공고히 하는 계몽적 성격이 두드러졌다.

그 후로 50년이 흐른 2000년대의 한국 영화들은 좀 더 다변화된 시선을 보여준다. 여성 감독 변영주의 <밀애>에서 미흔(김윤진)은 남편의 불륜에 맞바람으로 대응하지만 상처받은 여성의 이미지가 강했다. 더욱이 결말에 다다르면 사고로 인해 애인도 잃고 가정도 잃고 홀로 남겨진다. 변영주 감독이 2002년에 바라 본 30대 기혼 여성의 욕망은 여전히 용인될 수 없는 사회적 금기였다.

2003년 나온 임상수 감독의 문제작 <바람난 가족>은 좀 더 솔직하면서 남성 중심적 역사에 대한 반발이 두드러진다. "개인을 다루고 한 가족을 다루는 영화지만 가족사라는 건 그 가족이 속해 있는 사회의 역사일 수밖에 없다"는 임상수 감독의 표현대로 영화는 평생을 한량으로 살아온 실향민 출신 아버지의 죽음과 위선적인 인권변호사 영작(황정민)의 반대급부로 바람난 여자들을 내세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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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요즘에야 내가 진짜 어른이 된 거 같다. 얘, 인생 솔직하게 살아야 되는 거 드라, 내 내 느낌대로"라고 충고하는 어머니(윤여정)는 봉순씨와 계급적인 대비될 수 있는 캐릭터다. 한국 사회의 모순을 상징하는 아버지의 장례를 치른 뒤, 초등학교 동창생 애인과 외국으로 떠나버리는 어머니는 다소 급진적이긴 하지만 분명 한국 영화에 처음 등장한 당혹스런 어머니 상이다.

여주인공 호정(문소리) 또한 당당하긴 마찬가지다. 옆집 고등학생과의 불장난으로 아이를 임신하고 이혼을 감행하는 그녀는 끝까지 위선적인 영작에 비해 훨씬 더 성숙한 인간형이다. <바람난 가족>은 이 도발적인 캐릭터들과 함께 임상수 감독이 견지한 '쿨한' 태도로 인해 그 해의 문제작으로 꼽히기에 손색이 없는 작품으로 남아 있다.

2007년에 개봉한 <바람피기 좋은 날>의 경우는 좀 더 가볍고 자유로운 시선으로 바람을 다룬다. 시작은 역시나 남편들의 무관심이나 외도지만 주인공 20~30대 주부 이슬(김혜수)과 작은새(윤진서)의 일탈은 따뜻하고 밝게 묘사된다. "여자만이 지닌 시선과 아름다움이 세계의 부정적인 것들을 해결하고 극복해 나가는 힘"을 강조하고 싶었다는 장문일 감독의 태도는 꽃이나 나무를 강조하는 화면에서도 보여지 듯 좀 더 생태주의적 관점과 맞닿아 있다.

어찌됐건 남성의 시선에서 처벌이나 간통죄와 같은 획일적인 시선에서의 탈피, 2000년대 한국영화가 여성의 일탈을 견지하는 시선은 분명 다분화됐다. 그리고 어떤 작품보다 소탈하지만 급진적인 <경축! 우리 사랑>이 2008년 등장했다.

우주와 인간은 하나다, 자연주의적 관점과 판타지

전작 <생산적 활동>에서 섹스라는 매개로 인간의 솔직한 욕망을 긍정했던 오점균 감독은 가부장적 한국 사회를 공격하지도, 섹스를 소재주의로 활용하지도, 불륜을 저지르는 인물들을 단죄하지도 않는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시대의 보통 아줌마 봉순씨를 바라보는 관점이다.

우리 대중문화나 예술 전반에서 주변부에 자리했던 아줌마라는 존재를 조명하는 것 못지않게 <경축! 우리 사랑>은 그녀가 세상의 일부이자 자연의 일부라는 점을 명시한다. 간간이 등장하는 곤충이나 식물들의 클로즈업은 장면들은 전체 맥락과는 동떨어져 있을지 모르지만 인간 또한 우주 만물이 일부임을 드러내는 의도다. 이러한 사상은 마치 인간과 우주와 자연의 일체성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일군의 몸철학을 닮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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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어떤 인위나 통념에 대한 배제보다는 세상의 일부로서 인간을 껴안으려는 제스처, 그래서 감독은 무심한 봉순씨의 남편이나 동네 남자들을 부정적인 가부장으로 몰아세울 생각도 없다. 부정은 반목을 낳고 갈등을 낳는 법. 순수하게 마음과 몸이 가는대로 자연의 섭리와 순리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태도가 봉순씨의 일탈을 긍정할 수 있게 하는 힘이 되어준다. 어쩌면 이건 이분법적으로 남성과 여성을 나누려는 시선에 대한 부정이기도 하다.

 어찌 보면 그 자체로 '파격'일 수 있는 이러한 세계관을 지탱하기 위해 영화는 판타지를 끌어들인다. 봉순씨의 임신 사실을 알게 된 마을 아낙들과 남자들이 모두 모여 한 바탕 잔치를 벌이고, 일치 단결해 부부애를 확인하는 장면을 다소 익살스럽고 비현실적인 분위기로 묘사한다.  

 성욕과 식욕, 그 일차적인 인간의 욕망을 부인하지 않으며 자신의 울타리를 지켜나가는 것, 봉순씨와 구상이 데이트를 하는 청계천을 제외하고 단 한번도 봉순씨네 마을을 벗어나지 않는 이 소박한 영화는 현대인의 유목민적 삶 보과는 동떨어진 인간형들에 더 친숙하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온 딸이 봉순씨의 아이를 돌보는 모습에서 젊은 세대에까지 자연주의적이고 목가적인 삶의 형태에 동참하자고 권유한다. 그게 더 인간 본연의 모습에 가깝지 않느냐고 넌지시 말을 건네는 것 처럼. 

 현실의 봉순씨는 행복할 수 있을까?

다시 봉순씨로 돌아와 보자. 20년의 나이 차이를 극복한 이 연상연하 커플은 행복할 수 있을까. 바람이고 불륜임이 분명한 봉순씨의 파격을 <경축! 우리 사랑>은 판타지와 자연주의적 관점으로 극복해 냈다. 그것이 또한 아직까지 간통제가 굳건한 한국 사회에서 리얼리티를 훼손하지 않는 선에서 영화적인 주제를 드러내려는 오점균 감독만의 방법론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다르다. 간통죄가 성적 자기결정권 침해한다며 간통죄 위헌 심판을 제청한 옥소리의 미니홈피가 악플러들의 무차별적인 공격을 받고 있다. 아직까지 우리 사회는 개인의 이불 속 사연을 국가가 관리하고 더욱이 피의자가 여성일 경우 그 비난의 수위는 더 높다. 마치 '자유부인'이 처벌을 당하고 용서를 빌어야 했던 1950년대처럼.

한국 영화는 좀 더 이러한 이슈에 주목하고 다양한 목소리를 내야 한다. 물론 아침 드라마처럼 불륜 남편과 핍박 받는 아내라는 공식은 간통제가 피해자를 위해 존속해야 한다는 토픽만큼이나 식상하기 그지없다. 그런 점에서 전통적인 어머니 봉순씨의 욕망을 좀 더 근원적이고 따뜻한 시선으로 성찰한 <경축! 우리 사랑>은 용감한 기획임에 틀림없다.

마지막으로 이 영화를 관람한 관객은 봉순씨의 사랑과 일탈을 긍정할까 아니면 영화이니 가능한 설정이라고 웃어넘기고 말까. 극장의 절반을 넘게 차지하고 있던 중년 관객들의 목소리가 궁금해진다. 더불어 그 각기 다를 목소리들은 더 높고 넓게 울려 퍼져야 한다. 이 땅의 봉순씨들이 사회적 통념 때문에 좌절하고 손가락질을 받는 일이 없어질 그날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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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저는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 영화가 망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냥 불륜..혹은 성적자유의표현이라하는 것에 대한 파장이 스스로의 자유표현일뿐이라지만 결혼한상대자에게, 그리고 아이들에게, 공동체에게 얼마나 큰 상처와 불안으로 남게 될지 알수있으니까요... 사람들은 올바로 살려하는데 매체들이 그렇지 못하도록 조장하고, 포장하여 별것아닌것처럼 만들어 구렁텅이로 밀어버리려하네요... 그래요..저 드라마 안봅니다... 자신의 성적자유의 표현하고 싶으면.. 그냥 독신으로 살면서 같은 마인드의 독신들과 하세요..(돌싱으로 돌아오셔서 돌싱,독신을 만나시던가) 불륜조장하는 것이 용감한기획입니까?

    2008.05.16 16:44
  2. Favicon of http://cha66wk@hanmail BlogIcon  수정/삭제  댓글쓰기

    살아보니 사는게 별거아니더라. 이런 이야기를하는데 무슨말이 더 필요할까요. 사는데 정답이 없다면 봉순씨도 행복하겠지요.사람이 사랑하는게 온전히 몇시간 몇년을 가지는거라면 평생을 살아도 며칠을 저 사람 마음에 들어 있었나를 고민하지않고 살면 며칠이 중요할가요.전 행복햇을거라고 믿어요.한시간이라도 온통자신이 그사람의 시간을갖는다는 확신을가지고 살수있다는건 아무나할수잇는게 아니지요, 비록환상이라해도,내세계안에 존재하면 세상이야 어떻게되든 상관없는게 아닐까요.세상이 어떻게되어도 난이 사랑만 중요해요하던 에디트삐아프처럼.사랑지상주의가 아니라 그것밖에 할수있는게 없다고하면 용서가 될까요

    2008.05.16 18:19
  3. 참나  수정/삭제  댓글쓰기

    어이가 없네요.. 간통?? 그거 하기 싫으면 동거 하면 됩니다.

    왜 법적으로 혼인신고해서 간통이 잘못 된거라고이야기 하는지...


    동거 한다고 해서 경찰에서 잡아가나요? 동거해서 아이 낳으면

    경찰에서 잡아가나요? 아니잖아요..동거해도 자식 낳아도..

    도 호적에 올릴수 있습니다. ㅡ.ㅡ 좀 개념을...


    요즘 개나 소나 불륜 조장하지를 한나... 사회가 참 더럽게 돌아가네요..

    이런글 올리면 글쓴이가 뭔가 선각자라도 되는것 같아요?

    2008.05.17 04:36





오점균 감독의 [경축! 우리사랑]에 대한 글을 한 편 쓰고 난 후에도 마음 한 구석이 허전했다. 설명이 부족했던 탓일까? 나는 봉순씨(김해숙 분)가 구상(김영민 분)에게 마음이 동한 이유로 구상이 생산적 활동에 동참한 유일한 사내라는 점을 든 바 있다. 그럼에도 이 영화에 대하여 조금 더 이야기할 필요성을 느낀다. 다름 아닌 감독이 지시하는 (적절한 표현인지는 모르겠으나) ‘생산적 활동’과 ‘생산적 활동에의 편입’이 그것이다. 이는 봉순의 로맨스가 정당성을 얻는 방법과 직결된다.

전작에서도 한 결 같이 드러낸 바 있듯이 오점균은 여성의 잠재된 욕망이 섹스를 통해 해갈된다고 믿는 듯하다. 게다가 섹스를 하나의 ‘생산적 활동’이라고 규정하고 있는데, 이는 [경축! 우리사랑]에서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음이 감지된다. 즉 감독은 봉순의 로맨스 역시 생산적 활동의 일부로 규정하고는 이를 보충 설명하는 방식으로 영화를 진행시키고 있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제 아무리 봉순이 순수한 사랑을 외쳐봐야 주위의 협조가 없으면 무용지물일 터. 때문에 그의 로맨스가 정당화될 수 있는 장치가 필요한 데, 이때 감독이 선택한 것은 생산적 활동에의 편입이다. 이를테면 그간 생산적 활동에서 소외된 아내들과 이를 방기해온 남성들에게서 잠재된 욕망을 끄집어냄으로써, 봉순의 파격적 로맨스와 부부간의 사랑이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음을 알린다는 것이다. 당연히 이 두 가지는 영화의 끝에 이르러 하나로 융합된다. 요컨대 [경축! 우리사랑]에서 봉순의 로맨스는, 어느 중년여성의 욕망적 일탈이라는 일회성 해프닝에 머물지 않고 비생산적활동에 몰두하던 남성들로 하여금 생산적 활동에 동참하도록 추동하는 기제가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나는 이 영화가 봉순의 로맨스를 정당화시키는 과정을 탐색하면서 여전히 남아있는 한계를 찾고자 한다.


생산적 활동 : "도우미 없으니까 맛이 나질 않아"

영화는 시작부터 대극의 두 장면을 보여준다. 즉 하숙생을 구하는 전단지를 붙이는 봉순과, 노래방에서 ‘사랑은 연필로 쓰세요’를 목청 높여 부르는 봉순의 남편(기주봉 분)과 동네 남자들의 아우성. “도우미 없이 노래 부르니까 맛이 나지 않는다”는 푸념처럼 그들은 무료한 날들에 지쳐 뭔가 화끈하고 재미있는 일을 찾는데 골몰인 사내들이다. 그들은 말할 지도 모른다. 하루의 피로를 풀고 다음날을 위한 재충전으로써 적당한 유흥이 필요하다고. 술과 노래와 여자로 이어지는 짜릿한 일탈의 기운이 각자의 심장을 데우지만 정작 남자들에게 돌아갈 몫은 없어 보인다. 그들은 생산적 활동에서 멀어진 자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철저하게 지금 여기의 모습에 집중하여 논의하기로 하자.

물론 봉순의 남편 역시 영화 속 현재보다 과거에는 가족부양을 위해 죽도록 일했을 것이다. 하숙을 칠 만한 자기 집이 있고 노래방도 가지고 있으니 말이다. 또 정윤을 낳았으니 분명 생산적 활동에 열심인 시절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지금, 여기의 모습이다. 어차피 봉순도 가족을 위해 젊은 시절을 희생했을 테고 지금도 일하고 있지 않은가. 다른 글에서 언급했듯이 봉순이 구상에게 연정을 품는 행위를, 하룻밤 일탈이 불러온 단순한 결과로 봐서는 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러므로 나는 딸의 결혼선언과 돌연한 가출에도 무책임으로 일관하면서 바깥으로만 돌려는 중년남성의 모습을 봉순의 남편에게서 발견한다. 겉은 무료한 삶에 지친 허허실실 중년의 모습이지만 사실 그는 우리사회의 가부장을 대리하는 상징물이다. 이를테면 내연녀를 동네로 불러들여 두 집 살림을 하면서도 봉순의 로맨스를 확인하고는 가족지킴이로 돌변하는 모습은 우리사회의 견고한 가부장제에 다름 아니라는 것이다. 특히 (정말로 오버스럽기 짝이 없지만) 내연녀 앞에서 밥상을 엎는 장면에서, 구상을 불러 집단린치를 가하는 장면에서, 모든 상황이 종료된 후 다시금 내연녀의 방을 찾는 장면에서 그의 남성성은 극대화된다. 이처럼 시종일관 무기력하고 희화화되어 보여 지던 봉순의 남편과 주변인들의 잠재된 폭력이 드러나는 순간 우리는 견고하게 다져진 남성중심사회의 단면을 목도하게 되는 것이다.

반면 동네 여자들은 경제활동에 중심에 서있는 이들이다. 하숙을 치고 노래방을 운영하는 와중에도 봉투붙이는 부업을 마다않는 봉순은 물론이고 정육점과 슈퍼의 여주인들도 이 부업에 동참하고 있다. 물론 동네의 대소사를 주전부리삼아 올려놓고 수다에 더 열심인지는 모르겠으나 그녀들이 경제의 중심이라는 것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 영화 초반 철없고 무책임하기 짝이 없던 봉순의 딸 정윤(김혜나 분)이 중반이후 기세등등하게 자기 목소리를 내는 데는 단지 엄마와 구상사이의 부적절한 관계 때문만 아니라, 그녀 역시 제 밥벌이를 하고 있다는 점도 작용했을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몇 년 만 모으면 작은 전세방도 얻을 수 있다”며 구상을 설득하는 제법 어른스럽기까지 한 정윤의 모습.

그런데, 여기서 이상한 점이 발견된다. 봉순의 가족을 제외하고 다른 이들은 자녀가 없는 것처럼 그려진다는 것이다. 자식에 대한 언급조차 나오지 않는다. 다시 확인하자. 오점균은 전작 [생산적 활동]을 통해 여성과 남성이 섹스하고 (불륜이건 아니건)아이를 낳는 것을 생산적 활동으로 내세운 바 있다. 물론 논리의 정당성을 확보하는 데는 실패했다고 보여 지지만. 이런 때문인지 [경축! 우리사랑]에서는 생산적 활동에 집단을 동원함으로써 봉순의 행위를 정당화시킴과 동시에 남성들을 포용하는 양동작전을 사용한다.


생산적 활동에의 편입 : "난 언제인지 기억도 안 나네"

봉순의 임신 소식을 들은 남편의 친구들은 한껏 부러워한다. 늘그막에 아이를 얻을 정도로 힘이 있다는 사실이 부러웠을 테고 부부의 금슬이 샘났을 것이다. 하나 같이 아내에게 경제권을 내어준 채 사랑타령과 술타령에 하루를 소진하는 자신들의 처지를 감안할 때, 봉순의 남편은 내연녀인 미용실 여자를 동네로 들여놓고도 아내를 임신시켰으니 어찌 부럽지 않겠는가. 이처럼 무기력한 남성의 모습은 “일 주일에 한 번이나 할까?” “난 언제인지 기억도 안 나네”라며 봉순의 임신을 부러워하는 여자들의 쑥덕공론에서도 잘 드러나고 있다. 이제 감독은 남성들의 모습을 의도적이리만치 축소시키고 희화화해버린 후 그들을 가족의 이름으로 재 편입시키는 작업을 준비한다.

사실 봉순의 임신은 논의대상이 아니다. 또한 구상이 스무 살 어린 남자인 것도 마찬가지다. 즉 [경축! 우리사랑]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중년여성이 누구와 로맨스를 벌이느냐가 아니고 봉순이 아이를 낳을 것인지 아닌지에 대한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봉순의 욕망'은 감독이 쥔 조커(Jocker)에 다름 아니다. 감독이 하고 싶은 얘기에 따라서 이리저리 사용할 수 있는 만능의 존재. 그것이 '봉순의 욕망'에게 안겨진 영화 속 역할이다. 남편의 뜻대로 아이를 지운다면 남성가부장이 견고해질 것이고 아이를 낳는 다면 여성욕망이 힘을 받을 것인즉, 만약 봉순이 아이를 낳고 로맨스의 정당성까지 확보할 수 있다면 게다가 추레한 남자들에게 생산적 활동의 기회까지 안겨준다면 그야말로 금상첨화일 터이다. 앞서 말한 양동작전이 설득력을 얻는 지점이다.

혼자하면 부끄럽고 벌쭘한 일도 단체로 하면 별로 창피하지 않았던 경험이 누구나 있을 것이다. 통일성과 집단성의 힘 때문이다. 어떤 행위가 하나의 현상으로 변할 때 그것은 이데올로기가 된다. 따라서 영화의 후반, 동네 여자들이 단체로 임신한 모습은 여성욕망을 판타지로 처리한 장면이 아니다. 여성의 생산적 활동에 일조함으로써 구성원의 자격을 재획득을 위함이며(임신한 아내와 다정하게 포즈를 취한 남편들의 모습들을 기억하자) 감독 자신이 집요하게 주장해온 생산적 활동을 완곡하게 설파하는 다른 화법이다.


판타지와 이데올로기 사이에서 : "엄마가 뭐 이래?"

판타지의 속성은 개인적인데 반해 이데올로기는 집단성을 지닌다. 판타지에서 시작된 이데올로기는 종국에 판타지를 지배하기 마련이다. 대중은 특정한 사건이 벌어졌을 때, 본질 이외의 것에 더 열광하고 호기심을 품기 마련이다. 신정아 변양균 사건에서 볼 수 있듯이 학력위조로 불거진 개인적 사건이 고위공직자와의 부도덕한 관계를 통한 권력형 비리까지 이르는 과정에서 황색저널리즘과 대중이 집착한 것은 섹스스캔들이었다. 그러므로 현상적으로 부각된 것은 고위공직자의 부도덕함과 위선, 이를 매개로 입신양명을 이루려했던 한 여자의 빗나간 욕망이었다. 그들의 스캔들을 바라보는 가운데 사람들 마음 한켠에 자리 잡는 것은 욕망이 우회로 표현된 판타지다.

영화에서 봉순이 남편 아닌 남자와 사랑에 빠졌다는 사실을 알게 된 동네 사람들은 봉순의 남편에게 “보기보다 재주가 좋네”라고 비아냥거린다. 또 구상에게는 “동네 아줌마들 다 후리겠네”라며 “이 동네를 떠나라”고 말하기까지 하는데, 당연히 봉순과 구상 사이에서 사랑을 보기보다는 추잡한 이면을 찾아내려 들어 본질을 왜곡시키려는 심리에서 비롯된 것이다. 봉순의 가족 입장에서 볼 때 그의 로맨스는 부도덕한 행위이며 가족구성원에 대한 배신에 다름 아니었다. 그러므로 봉순의 딸은 말한다. “엄마가 뭐 이래?” 엄마는 어때야 하는 것일까. 여자는 어때야 하는 것일까. 내연녀에게 초밥을 사다 바치고 아내의 잠을 틈타 미용실로 달려가는 남편의 아내는 엄마의 이름으로 무엇을 더 해야 한다는 말인가? 이 모든 것은 가족이데올로기에 저당 잡힌 한국사회의 정서 탓이고 봉순이 유부녀라는 사실에 기인한다. 이는 [경축! 우리사랑]을 비롯한 유사한 영화의 마케팅에서도 발견된다. 이를테면 봉순이 스무 살이나 어린, 그것도 사위가 될 뻔 했던 남자와 사랑에 빠졌다는 데 초점을 맞추고는, ‘딸의 남친을 탐한 엄마’ ‘부도덕한 로맨스’라는 자극적 문구로 관객을 끌어 모르려는 행위가 그것이다. 이때 규정되고 차단된 담론은 영화에 대한 다양한 논의를 원천봉쇄하는 결과를 낳기 마련이고 결국 그 피해는 고스란히 영화가 떠안게 된다는 점에서 신중을 기해야 할 일이다.

비록 봉순의 행위에 대한 남편과 딸, 동네사람들의 암묵적 인정절차를 마쳤다고는 하나 여전히 문제는 남아 있다. 개별적 주체인 여성 스스로 자신의 욕망을 정당화시키기 힘든 현실과 남성에 의해 유보되고 억압된 욕망의 해소를 위해 결국 남성을 동원할 수밖에 없는 담론의 한계가 그것이다.


"봉순이가 누구야?"

영화의 후반, 봉순이 생산한 잉여물을 소비하던 남편과 딸은 “우리가 엄마를 이해해야”한다며 현실을 받아들이기로 한다. 다수의 관객이 헛웃음을 지은 이 장면은 사뭇 시사적인데, 봉순을 흡혈하던 사람들이 졸지에 피해자로 둔갑하기 때문이다. 추락한 비생산자의 처량한 처지를 그려낸 듯 보이는 이 장면이 사실은 여성주체가 넘어야할 견고한 가정의 벽을 명징하게 드러낸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이는 여성의 외도나 불륜을 그린 많은 영화들이 여성 쪽만을 단죄함으로써 남성가부장을 강화시켜왔다는 것과 무관치 않다.

봉순의 집 앞에는 사육제를 방불케 하는 상이 차려지고 온갖 기름진 음식과 술이 목을 타고 넘어가 욕정을 도리질 하는 그 밤하늘로 봉순과 구상의 교성이 메아리친다. 성욕과 식욕의 과장되어 판타지를 불러내는 이 장면을 통과하면서 영화는 해피엔딩을 향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경축! 우리사랑]이 페미니즘을 표방한 영화가 아니라고 해도, 중년 여성의 사랑이 제 아무리 진실하다고 해도 결국 봉순이 안착한 대상은 남성이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여전히 남성에 의해 호명되기 전까지는 아내와 주부로 통칭되는 여성의 이름. 노래방에 모여 구상을 린치하던 남자들은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자문한다. “봉순이가 누구야?” 그들은 정말로 봉순의 이름을 알지도 못하고 알려고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친구의 ‘마누라’나 ‘정윤이 엄마’면 충분했을 테니까 말이다.


남겨진 것들

아내의 이름으로 어머니의 이름으로 살아온 여성이 뒤늦게 자신을 찾으려는 움직임은 영화를 비롯한 다양한 재현방식을 통해 시도되어 왔다. 그것은 페미니즘의 틀을 빌리거나 또는 가족의 재구성을 통해서 여성의 역할과 위상을 재정립하였고, 멀리는 남성가부장의 전복을 도모하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아직 우리사회에서 여성의 욕망이 설 땅은 좁기만 하다. [경축! 우리사랑] 역시 마찬가지다. 봉순이라는 중년여성의 로맨스를 통해 욕망의 연대가능성을 타진하는 데는 성공한 듯 보이나, 그럼에도 여성욕망의 귀착점이 남성 또는 남성의 변화에 한정되고 있음을 자인하는데 그치고 말았다는 것이다.

온 동네 아낙을 동원해 남편들을 생산적 활동에 편입시키고서야 비로소 봉순의 로맨스가 정당성을 확보하고 개인적 욕망이 성취되는 현실, 한국사회에서 여성의 욕망이 자리한 방은 여전히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이다.


(추신) 사실 이 장황한 글이 앞으로 영화를 볼 사람에게는 치명적일지 몰라도, 그렇다고 영화의 행간을 읽는데 까지 방해하지는 않을 것이란 생각이다. 바람이 있다면 이미 영화를 본 사람들과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마음이다. 부디, 견고한 나의 규준을 해체시키는 날선 비판이 봇물처럼 올라오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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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윤성민  수정/삭제  댓글쓰기

    영화에 대해 할 말은 없는데, 글을 좀 다듬어서 쓰셔야겠네. 내용이 뒤죽박죽이고, 논점도 분명치 않네요.

    2008.04.20 2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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