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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7.08.02 소외의 영상화가,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를 기억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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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8.02


오래전 지인들과의 술자리에서 오간 얘기 중 하나가 “외국 감독들은 이름이 참 멋지지 않냐”는 것이었다. 문화사대주의라고 욕해댈 사람이 있을 런지 모르겠으나 아무튼 그 자리에서 나온 이름들은 좌중의 동의를 얻기에 충분했다. 이를테면,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장 피에르 멜빌, 마르셀 까르네, 장 르누아르,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 등등 주로 유럽 감독의 이름이 거명되었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우아하고 예술적 향취가 물씬 풍기는 이름으로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가 뽑힌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닌 듯싶다.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 Michelangelo Antonioni 와 잉마르 베리만 Ingmar Bergman이 각각 95세와 89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어찌하여 같은 날 떠났을까. 홀로 가기 외로워 길 동무삼아 손잡고 가시려했던 것은 아닐까? 에드워드 양이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상황에서 다시 타전된 두 거장의 타계 소식은, 그들의 영화를 한 번이라도 보았거나 혹은 본 적은 없었을지라도 [정사] [욕망] [붉은 사막]그리고 [산딸기] [화니와 알렉산더] [처녀의 샘] [제 7의 봉인] 등 영화제목만이라도 들어본 이들에게는 무덤덤하게 넘어갈 이야기가 아닌 것이다. 어쨌든 이제 나이 든 감독들이 하나 둘 씩 떠나가고 있다. 세월의 무게를 이길 수 없는 인간의 존재란 얼마나 나약한가. 이제 누가 남았지? 현역 최고령 감독인 마누엘 데 올리베이라를 비롯한 리베트, 고다르, 이스트우드, 니콜스 등등. 기타 등등.

안토니오니의 영화를 떠올릴 때 빼놓을 수 없는 배우가 있다면 단연 모니카 비티 Monica Vitti일 것이다. 일련의 작품 속에서 발견되는 그 건조한 표정과 불안한 시선을,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는 듯이 던지는 야릇한 체념의 미소를 어찌 잊을 수 있을까. 안토니오니의 페르소나이자 그의 영화적 아이콘이고 영화를 이야기하는 얼굴로 이만한 배우가 또 있을까 싶다. 이러한 모니카 비티를 가리켜 잉마르 베리만은 “형편없는 배우”라는 독설을 펼친 바 있다. (잉마르 베리만에게도 리브 울만 Liv Ullmann 이라는 페르소나가 있다) 물론 특정영화에서의 연기에 대한 평가였지만, 적어도 안토니오니와 함께 했을 때, 모니카 비티는 최고였다. 아니, 최고일 수밖에 없었다.

한편 그가 남긴 걸작들 중에서 [밤_ La Nuit](1960)은 사적으로 특별하다. 이 영화에 움베르토 에코 Umberto Eco가 출연했다는 사실을 아는가? 간간히 스크린에서 만날 수 있는 잔느 모로 Jeanne Moreau와 마르첼로 마스트로얀니 Marcello Mastroianni의 고고한 고독과 엔딩이 보여주는 황량한 숲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는다. [붉은 사막_ Il Deserto Rosso](1964)의 이미지가 주는 숨 막히는 상실감 또한 아직도 절절하다. [일식_ The Eclipse](1962)의 엔딩이 보여주는 공무(空無)의 롱 테이크는 얼마나 멋졌던가.


‘신자가 아닌 거의 유일한 이탈리아 영화감독’ 안토니오니의 영화는 정말로 건조하다. 달리 보자면 지루하고 어렵고 현학적이기까지 하다. 사막의 한가운데, 아님 복잡한 도시 속에 있더라도 그의 영화의 주인공은 버려져서 고독에 사로잡혀 있다. 인물들을 감싸는 풍경과 건물과 보도블록에 비추인 그림자마저 차갑다. 삶이 편재된 공간을 바라보는 안토니오니와 관객 사이의 거리감이란 이런 것일까? 그러므로 어떤 경우에도 그의 영화 속 건물은 단순한 건축물이 아니다. 개인과 다른 개인들, 자기 자신, 환경과의 관계의 비인간화로 상징되는 ‘고독과 소외’의 용법이 상징적으로 드러나는 공간이다. 그는 스스로 “인간관계의 허약함, 물리학이 형이상학으로 되어 버리는 현대 세계의 물리적인, 정치적이고도 도덕적인 불안정성에 충격을 받았다”고 말 한 바 있다. 비선형적 내러티브 구조를 지향하되 부차적 에피소드가 느닷없이 끼어드는 모더니티의 규범적 사용을 통해 장르를 해체하고 규칙을 깨면서 64년간의 영화인생을 이어왔던 그였다. ‘소통되어 질 수 없는 무엇’을 집요하게 붙잡으려 애썼고 파열과 균열, 불균형의 낯설음을 가장 조용하고 건조하게 그려냈던 영상화가,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 이제 그는 떠나고 없지만, 고독한 현대인의 초상이 회색 콘크리트에 또는 어느 막다른 골목에 드리운 그림자처럼 기대어 서 있는 한, 안토니오니의 영화 또한 영원하리라.


* 안토니오니의 많은 작품 가운데서 최근작이라 할 수 있는 1995년도 작 [구름 저편에]를 이야기함으로써 그의 영화세계를 단편적이나마 살펴보고자 한다.



[구름 저편에_ Beyond The Clouds](1995)

안토니오니와 벤더스가 만났을 때

1995년 안토니오니와 공동으로 [구름 저편에]를 연출했고 시나리오 작업에도 직접 참여한 빔 벤더스 Wim Wenders는 그와 함께한 촬영경험에 대하여 “나는 줌을 절대로 쓰지 않으려고 했으나, 안토니오니는 모든 것을 줌으로 찍었다. 그리고 그 결과물에 때로 나는 감동했다”고 말한다. 또한 그는 “감독이라면, 똑 같은 신을 다른 감독은 어떻게 찍는지 옆에서 보는 경험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경험은 자신의 지평을 넓히며 새로운 선택을 제공한다”는 말로 안토니오니의 연출방식에서 얻은 영화적 자산을 공개하고 있다. 이런 내용의 맥락에서, 영화 [구름 저편에]에는 영화의 메시지보다 더욱 강렬한 영화의 제작 이야기가 숨겨져 있다는 점도 결코 놓칠 수가 없다. 이 영화의 제작 당시 80대에 접어들었던 안토니오니는 지병으로 인해 지난 10년 이상 거동이 불편하고 말을 제대로 할 수 없어서 영화 제작을 거의 포기하고 있는 상태였었는데, 독일의 빔 벤더스는 이런 상태의 안토니오니를 만나 그로 하여금 다시 영화 제작의 열정을 불러일으키도록 만들었다. 결국 영화 촬영현장에서 안토니오니가 눈빛과 손짓으로 지시하면, 그의 아내 엔리카와 빔 벤더스가 스텝들에게 이를 전달하는 방식으로 이 영화는 만들어졌다. 영화의 제작 역시 이미지 저편에서 저편으로 전달되는 방식이었던 것이다. 빔 벤더스는 [구름 저편에]의 제작을 마친 후, 이 영화의 촬영과정을 소재로 한 「한 영화의 연대기」라는 사진집을 발간했으며, 안토니오니의 아내 엔리카는 이 영화의 촬영과정을 비디오카메라로 찍어 <나에게 영화를 만드는 것은 삶과 같다>라는 50분 분량의 다큐멘터리를 만들어 냈다.


안토니오니가 세잔을 만났을 때

후기 인상파 화가 세잔 Paul Cezanne은 초년엔 검정과 고동색과 같은 무거운 색을 뺀 채 밝은 색채를 사용하고 강한 질서의 구성을 선호했지만, 말년에 이르면, 인상주의적 색채인 밝은 빛과 색채를 그리지 않고 오히려 무겁고 어두운 색감을 선호하게 된다. 결국 그는 물체의 고유색을 인정했고 자연을 구조적으로 파악했으면서도 형체 표현에 있어서는 일상보다 더욱 실감을 무겁게 보았으며, 깊이 있고 무게감을 느끼는 그림을 추구했다 또한, 그는 전통적 투시도법에서 탈피하여 한 물체를 한 시점에서 보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각도에서 보았다. 이런 세잔의 화법처럼, 영화 [구름 저편에_ Beyond The Clouds](1995)]는 밝은 빛과 색채, 강한 구성에서 시작해서 점차 어둡고 무거운 색으로 향한다. 마지막 에피소드에 이르면, 영화의 배경은 아예 비가 오는 밤이며, 내용은 사랑, 그리고 삶과 죽음이다. 또한, 네 개의 에피소드에 그려진 인간 군상들의 다양한 삶과 그런 그들의 인생 속 내용들은 하나하나가 깊이 있고 무게감이 있는, 그리고 사랑이란 피사체를 여러 각도와 시점에서 보았다는 데에서, 세잔 그림의 형태와 유사하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면, 세잔 그림의 복사본이다. 영화이기 때문에.


네 개의 에피소드에 대한 가벼운 단상

이 영화는 네 개의 에피소드로 이루어진 옴니버스 형식이며, 각각의 에피소드에는 ‘사랑’에 대한 일반적 정의를 거부하는 내용이 들어있다. 첫 번째 에피소드 ‘존재하지 않았던 사랑의 연대기’에는 남녀간 성욕의 충족을 끝까지 유보하는 남녀가 등장한다. 여자는 몸을 허락하지만 여자에 대해 확신하지 못했던 남자는 그냥 떠나 버린다. 3년 후 영화관에서 그들은 다시 만나게 되지만, 그들은 애무만을 할뿐 결코 섹스에 도달하지 못한다. 이윽고 남자가 방에서 나가는 문소리를 들은 여자는 창가로 다가가서 그 남자가 떠나가는 모습을 지켜본다. 이것은 무언가에 대한 동경의 모습일까? 아니면, 무언가에 대한 갈망의 모습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여자를 갖고 논 남자의 장난의 결과였을까?

두 번째 에피소드 ‘소녀와 범죄’는 자신의 영화 속 주인공과 사랑을 나누고 싶어 하는 감독의 내밀한 욕망에 대한 이야기이다. 영화를 구상하려고 한 해변마을에 여행을 온 감독(<구름 저편에>의 내레이터이기도 하다)은 우연히 만난 젊은 여자에게 끌려 그녀가 일하는 의상실까지 따라간다. 육체관계가 끝난 후, 집 밖으로 나간 남자는 여자가 서 있는 창을 바라보고, 나신의 여자도 창 앞으로 다가가 그 남자를 바라본다. 이윽고 남자는 사라지고 다시 독백이 이어지지만, 내레이터의 입장이 아닌 한 남자의 입장에서의 독백이다. “그 여자가 아버지를 서 너 번 찔렀다고 하는 것 보다, 12번 찔렀다고 말한 것이 이제 나에게는 더 친밀하구 정감이 있군.” 과연 친밀하고 정감이 있다는 것은 무엇일까?

세 번째 에피소드 ‘나를 찾지마세요’에는 깨지고 새롭게 엉겨 붙는 사랑들이 그려지고 있다. 한 여인이 3년 동안 바람을 피우는 남편에게 실망하여 집을 떠나는 것으로부터 이야기는 시작된다. 그녀는 새로 얻은 아파트에서 부인에게 버림받은 또 다른 남자와 마주치게 되고, 남편의 우유부단함에 지쳤다는 자신의 심정을 그 남자에게 고백하면서 새로운 사랑의 가능성에 희망을 건다. 그리고 남편이 아닌 그 남자의 손이 그녀를 쓰다듬지만 그녀는 저항할 수가 없다. 마치 이 에피소드는 첫 부분에 나오는 잉카유적 탐사대의 짐꾼에 대한 옛날이야기의 연장선에 있는 것 같다. 그 이야기는 이러하다. “남아메리카의 잉카유적을 탐사하는 도중, 짐꾼들이 갑자기 걷지 않고 땅바닥에 주저앉았는데, 그 모습을 보고 궁금하게 여긴 탐사팀원들 중 한 명이 짐꾼들 중 한 명에게 그 이유를 물어보았답니다. 그랬더니, 그 짐꾼은 이렇게 말했다고 해요. ‘우리가 너무 빨리 걸어서 우리 영혼이 우리를 못 쫓아오는 것 같아요.’” 지금 우리들 각자 삶의 행위와 우리들의 영혼은 보조를 맞추어 잘 가고 있을까?

네 번째 에피소드 ‘타락한 육체’는 욕정 만으로서의 사랑이 그려진다. 한 남자가 아파트 건물에서 나오다가 우연히 한 여인과 마주치게 된다. 이내 그는 그녀를 치근덕거리면서 동행하게 된다. 시간이 흐른 뒤, 그는 잠을 깨고 성당 근처 분수대 앞에서 그를 기다리던 그녀와 다음과 같은 대화를 한다. “모든 생명에는 죽음이 있어요. 어떤 사람들은 꽃이 시들어 죽는 게 안타까워 꽃을 꺾어서 집에 두지 않는다고 하더군요.” “이봐요. 당신은 죽음을 두려워하는군요. 저는 삶이 더 겁나요.” “당신 같은 젊은 아가씨가 삶을 겁내다니 우습군요.” “사람들이 마구 이끌어가는 세상의 삶이 두려워요.” 이들 둘은 빗속을 함께 대화하면서 걸어, 그녀가 묵고 있는 모텔 앞에 도착하였다. 집 앞에 도착한 그녀는 욕정이 가득한 그 남자의 눈길을 주시한다. “내일 또 만날 수 있을까요”라는 그 남자의 질문에, 그녀는 “내일 저는 수녀원에 들어가요”라는 대답을 남길 따름이다. 인간의 육체는 욕정에 끌려 타락하기 쉬운 듯 하다! 그런데, 타락이란 반드시 욕정에 끌리는 것이기만 할까?


진정한 실재, 그리고 영화에 대한 영화

영화 속의 내레이터는 이렇게 말한다. “모든 보여 지는 현상의 이미지 배후에는 진정한 이미지가 있어요. 그리고 그 이미지의 배후에는 다시 더 진정한 이미지가 있고요. 그리고 다시 더 진정한 이미지의 배후에는 그 보다 더 진정한 이미지가 계속 무한하게 있지요. 마침내 우리는 누구도 볼 수 없는 불가사의한 이미지라는 실재의 마지막에 도달하고 나서야 비로소 그 이미지 뒤에 더욱 신뢰할 만한 실재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게 됩니다.” 또한, 감독 안토니오니는 이 영화를 다음과 같이 평한다. “아무도 볼 수 없는 절대적이고 신비한 ‘진정한 실재’의 이미지를 향하여”라고. 이 언급으로 미루어 볼 때, 그는 결국 플라톤주의자인 셈이다.

그래서 영화의 제목인 ‘구름 저편에’는 ‘눈으로 보이는 현상의 이미지 저편에’의 은유적 표현이라 말할 수 있겠다. 구름은 우리가 손으로 잡을 수도 없는 것이며, 우리 눈에만 이미지로 보이는 허상으로서의 실재이기 때문이다. 이 같은 면에서, 이 영화는 플라톤주의적 시각(‘이데아계’-‘현상계’라는 이분법적인 형이상학/인식론적 시각)에서의 영화에 대한 영화이기도 하다.


안토니오니의 마지막 작품이 될 것만 같았던 이 영화 이후에도 그는 노쇠한 몸을 이끌고 영화 [에로스_ Eros](2004)를 완성시켰다. 끝없는 창작에의 열정을 불태우는 노 감독의 분투에 경의에 찬사를 보낸 것이 불과 몇 해 전 일인데, 이제 그는 가고 여기에 없다. 부디 고인의 명복을 빌며, 우리는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를 오래도록 기억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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