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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태균


어느 정도 나이를 먹은 사람은 자신이 살고 있는 이 세상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이야기가 있다. 옳으신 말씀이다. 사람이 언제까지 질풍노도의 시기를 보내는 반항아일 수는 없는 노릇이다. 때가 되면 나 자신도 이 세상을 이루고 있는 구성원 중의 하나임을 깨닫고, 우리 모두가 함께 만든 이 세상에 책임의식을 가져야 한다는 건 매우 당연한 이야기라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저 말을 실제로 행동에 옮기며 살아가는 사람은 과연 얼마나 될까? 주위를 둘러보면 연륜과 권위를 내세우는 사람은 많은데 정작 스스로 책임을 지려 하는 이는 드물다. 나이만 먹었다고 어른은 아닐 것이다. 적당히 떠넘기고 회피하며 자리 보전하기에만 급급한 이들에게 어른이란 호칭은 어울리지 않는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이토록 우울한 건 보수주의자가 많아서도 아니고, 진보주의자들이 나약해서도 아니다. 그건 아마도 책임 질 줄 아는 진짜 어른이 드물기 때문일 것이다.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그랜 토리노]를 보았다. 이 영화가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영화 세계를 집대성한 작품인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누군가 나에게 [그랜 토리노]가 어떤 영화냐고 물었을 때 이렇게 답해줄 수는 있을 것 같다. 이 영화가 담고 있는 것은 세상에 대해 분명한 책임의식을 갖고, 후세에게 더 좋은 세상을 만들어 주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 고심해온 어느 노인의 최종 선택과 행동에 대한 이야기라고 말이다. [그랜 토리노] 이전에도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영화에선 종종 선택의 문제가 중요한 화두로 등장했었다. 직접 메가폰을 잡은 [더티해리] 시리즈의 4편 [서든 임팩트]에서 그는 냉정한 법의 집행관 해리 캘러한 답지 않은 의외의 선택을 보여준다. 10년 전 자매가 집단 폭행을 당하고 그 충격으로 동생은 실어증에 걸렸으나 정작 가해자들은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자 그 언니가 직접 복수에 나서는데 해리는 그녀가 범인임을 알면서도 체포하지 않는다.




애초에 법이 제대로 집행되었다면 그녀도 범죄자가 되진 않았을 터. 그의 행동은 법에 따라 움직이는 경관으로서 법의 맹점에 대한 책임을 통감한 결과인 듯 하다. 이 때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나이가 50을 훌쩍 넘긴 시점이었으니, 시간은 더티 해리에게도 법 보다 사람을 먼저 보게 하는 심안을 선물해 주었나 보다. 긴 세월, 물살에 깊이 패여 굵은 주름을 갖게 된 바윗돌처럼 그의 변화는 그렇게 묵직하게 시작되었다. [퍼펙트 월드]에서도 그는 모두가 흉악범으로 단정지은 어느 탈옥수의 내면을 꿰뚫어 본 유일한 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모두가 ‘예’라고 말할 때 좀 더 강하게 “아니오”라고 외치지 못한 나약한 노인이기도 했다. 통찰은 할 수 있으되 상황은 바꿀 수 없다. 살아온 세월만큼 깊어진 지혜와 그만큼의 책임의식을 통감하는 노인 앞에 놓여진 딜레마는 바로 저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이것이 일생에 단 한번뿐인 기회요 사랑이라고 간절히 애원하면서도 장대비를 맞으며 우두커니 서 있다가 메디슨 카운티 다리 위를 떠나고 만다. 초로의 복싱 트레이너이자 컷맨으로 분한 [밀리언 달러 베이비]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는 조언을 해주고 상처를 봉합할 뿐 자신의 선수에게 갑작스레 힘을 불어 넣어줄 수도, 대신 링에 올라 싸워줄 수도 없는 입장이다. 결국 그가 할 수 있는 건 상대방이 스스로의 의지에 따라 인생을 결정짓도록 그 선택을 돕는 일뿐이다. 성당의 신부는 신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빠지라 하지만 그는 그럴 수 없다. 신은 세상의 비극을 방관하는 무책임한 존재, 그러나 그는 무책임할 수도, 방관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세상을 오래 살고, 이만큼 꾸려 왔으며 그 일부를 후세들에게 물려준 어른이자 아버지인 스스로의 위치와, 세상 속에서 부대끼며 상처 입은 자식들의 아픔을 뼈에 사무치도록 절감하기에 그는 무엇이든 선택을 해야만 한다.



개봉 당시 어느 평론가가 달았던 코멘트처럼 [밀리언 달러 베이비]는 가장 보수적인 아버지의 가장 급진적인 선택을 보여주는 영화이다. 그리고 이것은 어느 경지에 오른 이후,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영화세계에 지속적으로 나타나는 성향이기도 하다. 배우로서 마지막 출연작임을 선언한 [그랜 토리노]에서도 그의 근심은 여전히 유효하다. 어쩌면 잔뜩 주름지고 백발이 성성한 모습으로 직접 스크린에 등장하는 것이 마지막이기에 더더욱 뭔가 확실한 결론을 내리기로 결심한 것 같기도 하다. 그 때문일까? [그랜 토리노]는 전작들 보다 더욱 극단적인 선택을 보여준다. [체인질링]이 ‘먼저 싸움을 걸진 않되 이미 시작된 싸움은 네가 마무리 지어라’라는 전언을 던져 놓고 그야말로 끝까지 가는 모습을 보여주었던 것처럼, [그랜 토리노]의 월트 코왈스키도 끝까지 간다. 다른 점이 있다면 이번엔 클린트 이스트우드 본인이 직접 싸움의 마무리를 짓는 다는 점이랄까?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연기하는 월트 코왈스키가 몽족 소년 타오에게 인생에 대해 한 수 가르쳐주고 유사 가족의 관계를 형성하며,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이 아이를 보호하기 위해 간만의 실력행사에 나서는 것은 어느 마초가 자신의 후계자를 키워내는 과정과 대동소이하지만 그로 인한 후폭풍을 묘사하는 것만큼은 예전처럼 단순하지가 않다. [더티 해리] 시절만 같았어도 매그넘 몇 방으로 상황을 깔끔하게 정리했을지도 모를 일, 그러나 노인이 된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돌고 도는 세상 일이 생각처럼 쉽지가 않다는 것을 깨달은 지 오래다. 이는 매우 보편적인 깨우침이기도 하다. 한번쯤 겪어 보았을 법한 어린 시절의 한 장면을 떠올려 보도록 하자. 누가 날 괴롭힌다. 그럼 난 덩치 크고 싸움 잘하는 친구, 혹은 형을 데리고 가서 복수한다. 그런데 과연 여기서 끝나는가? 천만의 말씀. 상대방 역시 더 많은 머릿수를 이끌고 와 응수하기 마련이다. 동네 꼬맹이들 싸움만 봐도 알 수 있는 자명한 진리, 폭력은 결국 더 큰 폭력을 부른다.


점점 덩치를 불려 오는 폭력 앞에서는 누군가가 날 지켜준다는 것도, 스스로를 지켜나간다는 것에도 한계가 드러날 수 밖에 없는 법. 코왈스키 영감이 자책하는 것도 바로 이 부분에서이다. 비록 나이가 들긴 했지만 멋지게 컴백한 카우보이처럼 자신이 쳐놓은 울타리를 지켜냈다고 여겼는데 자식들 앞에 되돌아오는 건 가속화 되는 폭력의 순환 구조이다. 설령 좋은 의도에서 시작된 일이라 해도 코왈스키는 자책할 수 밖에 없다. 그것이 곧 세상을 살만큼 살아온 어른으로서의 책임의식이기 때문이다. [밀리언 달러 베이비]에서와 마찬가지로 그의 앞에 사제복을 입은 신부님이 등장하지만 그때와 달리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신 앞에서 고민을 털어놓고 머리카락을 움켜쥐는 짓 따윈 하지 않는다. 한 세상 제대로 살아왔다는 자부심만큼이나 강한 그의 책임감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명확하게 선을 그어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가 눈물을 흘린다면 그건 신 앞에서 지난 날을 참회하는 때가 아니라 홀로 어두운 방 안에 앉아 아버지가 만든 세상에서 상처 입은 자식의 아픔을 곱씹는 순간일 것이다. 그가 고해성사를 하고 용서를 비는 대상 역시 신이 아니라 자식들이어야 할 것이다. 거창하게 사내임을 자부하는 남자들은 웬만해선 잘 울지 않는다. 특히 스스로 제법 강하다고 여기며 살아온 남자들은 더더욱 울지 않는다. 그러나 아버지는 운다. 자식들의 아픔 때문에 울고 그들이 아픈 것이 자신이 쌓은 세상의 업보 탓인 것 같아서, 그 죄의식 때문에 운다. 참고 참고 또 참다가 우는 방법 조차 잊을 무렵에 간신히 터뜨리는 울음이기에 그 눈물의 양은 적으면서도 염도는 지독히 높다. 짜다 못해 쓰디 쓸 만큼.

영화의 마지막, 코왈스키가 몽족 갱들의 아지트를 향해 느릿느릿 걸어가며 어둠 속에서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는 장면은 [서든 임팩트]에서 악당들과의 결전을 준비하던 그때와 판박이처럼 닮았다. 20여 년의 시간 차이에도 불구하고 생생히 느껴질 수 밖에 없는 이 기시감. 그때나 지금이나,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여전히 고집불통이다. 딱히 변하려고도 하지 않는다. 그가 믿는 것은 신의 계시 따위가 아니라 수십 년에 걸쳐 고수해온 자기만의 방식이다. 앞을 가로 막고 있는 것이 있다면 기꺼이 부딪힌다. 지켜야 할 건 반드시 지켜 낸다. 쏘면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좀 더 적극적으로 발포명령을 저지하지 못했던, 그리고 이것이 일생에 단 한번뿐인 기회임을 알면서도 쓸쓸히 돌아서야 했던 과거의 그 노인은 이제 확실한 스스로의 선택에 의해 느릿느릿 발걸음을 옮긴다. 물론 외골수 노인네의 선택에 동조하지 않을 수도 있다. 왜 그렇게 고집불통이냐고, 왜 그리도 유연하지 못하냐고 책망할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필요한 것은 막힘 없이 전능한 ‘모든’ 아버지가 아니라 그저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하며 책임을 다 하는 ‘어떤’ 아버지이다. 코왈스키가 타오에게 해주는 것도 벗어날 수 없을 것만 같았던 길을 벗어나 시원하게 내달리게 만드는 정도일 뿐. 그러나 진정 위대한 카우보이라면 총 대신 애마를 유산으로 남기지 않을까? 자신의 업과 함께 총성마저 거둬간 거리를 자식들이 좀 더 편하게 활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말이다. 누군가 머물렀던 자리엔 그 사람의 흔적이 남게 된다. 그리고 소임을 다한 자가 남긴 그 흔적은 후세들에게 유전자처럼 각인되어 낮고 묵직한 진동음과 함께 쉼 없이 박동할 것이다. 낡고 오래되었으나 여전히 그르렁대며 힘 차게 나아가는 차, 그랜 토리노처럼. 클린트 이스트우드 할아버지, 브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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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용진

[그랜 토리노]에 대한 백건영 편집장님, 신은영님, 류태희님의 글을 읽었다. 한결같이 너무 좋은 글들이었다. 좋은 영화에 좋은 글들을 읽을 수 있어서 기뻤다. 비단 이곳 네오이마주뿐 아니라 다른 비평 사이트에서도 [그랜 토리노]에 대한 좋은 평들은 쉬이 찾아볼 수가 있었다. 그래서 나는 먼저 좋은 평들을 써주신 분들께 감사함을 느끼면서, 한결 가벼운 맘으로, 비겁하게 살짝 묻어가는 느낌으로 시시콜콜한 감상평을 적기로 했다. 굳이 필요가 없는 조악한 글임에도 불구하고 꼭 몇 자 끄적이고 싶은 것은, 좋은 영화를 보면 늘 그렇듯 무언가 글로 작게나마 화답하고 싶은 경외감의 욕구일 것이다.


엔터테인먼트

클린트 이스트우드 영화의 미덕은 일단 재미있다는 데에 있다. 나는 [체인질링]을 보는 내내 울었다. 아이를 찾으려는 어머니의 눈물겨운 모정에도 그랬지만, 국가와 기관이 한 개인에게 가하는 지극히 촉각적인 폭력을 보면서 눈물을 참기 어려웠다. 그러나 [그랜 토리노]를 보면서는 시종일관 웃음을 멈출 수 없었다. 마지막 숭고한 죽음 장면에 이르기 전까지 나는 관객도 몇 없는 극장에서 민망하게 큰 소리로 웃어댔다. 불과 몇 달 사이에 같은 감독의 영화를 보면서 일어난 일이다. 이러한 사례는 전에는 없었다.

류태희님의 말대로 컨벤션의 집합이면서도, 또는 장르에서 쉽게 찾기 어려운 내러티브의 지연이 일어나면서도 너무 재미있는 이유는 뭘까? 같은 감독의 영화를 보며 마치 민망한 부위에 털이 무성하게 솟아날 만큼 울었다 웃었다 할 수 있는 건 왜일까? 실제로 대부분 워너의 협력을 받으며 멜파소에서 고집 있게 만든 클린트 옹의 영화들은 한결같이 섭섭하지 않은 수익을 올렸다고 한다. 일일이 언급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그의 수많은 영화들. 언뜻 떠올려봐도 다들 너무 재미있었다.



아우라

발터 벤야민은 기술복제시대에는 아우라의 파괴가 일어난다고 했다. 그는 이러한 현상을 근대 예술에 대한 새로운 대안으로 여기는, 매우 낙관적인 시각을 유지했다. 그는 영화가 이런 아우라의 파괴에 한 몫을 단단히 할 것이라고 기대했다. 영화는 대단히 불연속적인 제작 단계를 거치는 예술이기 때문이리라. 실례로 연극에서 지녔던 배우의 아우라는 영화에서 모두 걷히게 되었다. 관객이 없는 세트장에서 거듭되는 테이크를 찍으며 배우가 가진 아우라는 상실되고 배우는 무언가 자기가 아닌 다른 사람을 보는 듯한 착각마저 들게 된다.

그러나 벤야민도 그 파괴된 배우의 아우라가 다시 쌓여가게 되는 현상에 대해선 미처 예측하지 못했나 보다. [그랜 토리노]를 보면 클린트 옹의 아우라가 철철 넘치는 것을 목격할 수 있다. [더티 해리]의 클린트 옹, 그보다 앞서 황야를 누비던 카우보이로서의 클린트 옹의 아우라. 신은영님의 글에 의하면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애초에 출연까지 할 생각은 없었으나, 자기 연령대의 인물을 다룬 작품이고 해서 주연을 맡을 결심을 했다고 한다. 잘한 결심이다. 클린트 옹의 아우라가 없는 [그랜 토리노]는 상상할 수도 없다.



카우보이

존 포드 시대의 서부극에서는 주인공이 마을을 위협하는 외부의 세력과 대치한다. 적은 늘 마을 외부에 있다. 이는 분명 20세기 초반 미국에서 일어났던 골드러시와 무관하지 않을 게다. 서부를 차지하기 위해 동부인들은 토착민들(인디언족)을 몰아내야만 했고, 그렇게 차지한 마을을 지키기 위해 외부의 적들과 끊임 없는 사투를 벌여야만 했다. 그래서 그들의 적은 보통 백인이 아니었다.

그러나 언제부턴가 악은 외부가 아닌 마을 내부에 존재하게 된다. 서부극의 주인공은 방랑자이며 우연히 마을에 머물게 되었다가 악의 세력을 접하게 된다. 이윽고 외로운 카우보이는 마을의 문제를 해결하고 홀연히 마을을 떠난다. 서부극이 기존 서부극을 패러디하던 이 시기,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그 시대 서부극의 둘도 없는 아이콘이었다.

[그랜 토리노]에서 이런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카우보이 아우라를 발견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백건영 편집장님이 [체인질링]에서 수사관들이 살인범의 집으로 조사를 나가는 장면에서 서부극의 진한 징조를 느꼈듯이, [그랜 토리노]에서 수를 구하려는 월터의 모습은 숨막힐 정도로 서부극 시대의 클린트 옹을 떠올리게 한다. 주머니에서 손가락 총을 꺼내어 놈들을 차례로 겨누는 장면은 상투적이기는 하나, 바로 그런 이유로 인해 동시에 전율적이다.

이 영화를 클린트 서부극의 확장판이나 완결판으로 본다면 마을 내부에 존재하는 문제를 해결하고 마을을 떠난다는 식의 도식 또한 고찰할 여지를 남긴다. 월터가 직면한 문제는 표면적으론 기존 서부극에서처럼 한 마을 안에서 일어난 일이긴 하다. 그러나 비단 한 마을만의 국지적 문제로 치부하기엔 사안이 만만치 않다. 그래서일까. 그는 싹 쓸어버리고 떠나는 대신 희생적인 죽음을 택하게 된다. 그 죽음은 방법론적인 타당함을 떠나서 숭고하게 느껴진다.




 

숭고

숭고는 가늠할 수 없는 압도적인 것을 맞닥뜨렸을 때 발생하는 감정이다. 신이나 자연 앞에 섰을 때 느끼는 경외감 같은 것 말이다. (이러한 아우라는 벤야민도 깨지길 원치 않았다.) 월터의 죽음에선 숭고가 느껴진다. 우선 그가 영웅적인 행동을 보였기 때문이다. 극에서 수는 성조기를 집 앞에 버젓이 걸어놓은 마초 참전 용사에게 영웅이라고 말하는 것을 서슴지 않는다. 미국, 영웅, 성조기. 이것들은 미국 수퍼히어로물에 물리게 등장하는 요소들이다.

그러나 클린트 옹의 히어로는 수퍼히어로와는 다르다. 히어로긴 히어로인데 ‘수퍼’가 빠져있다. 앞에 수퍼-가 붙은 히어로는 전인류를 구원한다. 미국으로 치환되는 한 영웅이 전인류를 구하기 때문에 역겹다. 하지만 클린트의 히어로는 대상부터가 다르다. 적은 아랍이 아니라 미국 내부에 있다. 월터가 구하는 것은 고작해야 옆집 몽족 식구들뿐이다. 그것을 위해 선택한 방법은 희생 제의로 여겨지는 죽음이다. 성조기를 꽂은 폴란드계 이민자의 영웅적 모습에선 진솔한 감동이 밀려온다.

또 한가지. 구약 시대 희생 제물은 주로 흠 없는 어린 양이었다. 신약 시대에 이르러 예수의 희생 역시 흠 없는 신의 아들의 희생 제의였다. 이것은 숭고한 의식이다. 죄가 없는 제물이 죄를 지은 인간의 죄를 대속하기 때문에 그렇다. 그러나 극 중 월터는 흠 없는 희생양이 아니다. 그는 과거 한국전에서 어린 아이를 포함한 많은 사람을 죽였고, 현재 여전히 인종 차별과 마초적인 남성상, 배타적인 성향을 간직하고 있는 외로운 늙은 인간일 뿐이다. 온갖 정비 도구를 수집하여 수많은 다른 사물은 척척 고쳐도 정작 자신의 죄의식은 손을 대지 못하는 나약한 인간에 지나지 않는다. 이렇듯 완전치는 못하지만 희생 제물로 자기를 기꺼이 바치는 그의 마지막 선택에선 여느 희생 제의와 마찬가지로 경외감이 느껴진다. 아니, 오히려 흠 없지 않기에 더욱 숭고하게 느껴진다. 그는 장례식에서 신부가 말했던 것처럼 삶과 죽음을 누구보다도 더 잘 이해하게 되었고 마침내 신부도 하지 못한 희생을 위해 몸을 던진다. 그렇기에 그의 죽음엔 엄숙함과 비애감이 동시에 담겨있다.



보수

세상엔 변해야 할 것과 변하지 말아야 할 것, 그리고 변할 수 없는 것이 있다. 사실 변할 수 없는 것, 이른바 절대 진리가 과연 존재하느냐의 여부는 여간 골치 아픈 문제가 아니다. 진리 개념은 철학을 뛰어넘어 종교적인 문제이기도 한 연유이다. 기독교의 유일신, 플라톤의 이데아 개념 등, 서양사상사는 불변의 진리에 대한 철학적, 종교적 탐구의 역사이기도 하다. 그러나 동양에선 얘기가 다르다. 불교의 핵심 사상인 연기법은 절대적인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데서 출발한다. 이것이 생겨날 때 저것이 생겨나고 이것이 없어질 때 저것이 없어진다는 연기법의 관점에서 만물은 상대적인 우연의 법칙에 의해 생성되고 영겁한다.

이렇듯 진리에 대한 개념은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이다. 그 자체로는 변할 수가 없는 지극히 자명한 개념인 것이다. 이는 어느 정도 학문을 뛰어넘는 믿음의 문제라고 볼 수도 있다. 문제는 변해야 할 것과 변하지 말아야 할 것에 있다. 흔히 변하지 말아야 할 것을 지키려는 걸 일컬어 보수라고 한다. 보수는 본래 더 없이 아름다운 단어이다. 단지 마땅히 변해야 할 것을 변치 않아야 한다고 고집하니까 문제가 되는 것이다. 물론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변치 말아야 할 것을 변해야 한다고 고집한다면 그 또한 문제가 될 것이다.

클린트 옹의 보수는 아름답다. 그는 마땅히 변하지 말아야 할 것을 지키려는 보수주의자이다. 이를테면 사랑 같은 것 말이다. 그것이 아가페적이든 에로스적이든 어떤 형태가 되었든 간에 소중히 지키려는 행위는 아름답기 그지없다. 그래서 [그랜 토리노]는 아름답다. 이 영화는 타 문화에 대한 극진한 경외심을 잃지 않는 반면, 미국 내의 문제를 피해가지도 않는다. 변해야 할 것과 변하지 말아야 할 것을 정확히 구분하며, 그 안에서 자신이 죽음과 바꿔서라도 지켜야 할 것이 있음을 눈물 나게 고백하는 진중한 영화이다.


씨네 21의 20자평에 어떤 평론가가 클린트 할아버지 제발 무병장수하시라고 적은 걸 보았다. 전적으로 공감한다. 류태희님의 말처럼 클린트 옹과 동시대에 살고 있다는 것 자체가 감사한 일이다. 영화를 보고 나와서 다소 격한 감정으로 친구에게 문자를 보냈다. “살아서 이런 영화를 볼 수 있다는 사실이 행운이다.” 클린트 옹이 너무 좋아서 이런 살가운 문자도 아깝지 않을 지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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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건영

집근처 위치한 롯데시네마에서 <그랜 토리노>를 보던 지난 일요일의 일이다. 관객이 별로 없을 것이라는 예상을 비웃기라도 하듯 두 번째로 큰 상영관의 70%이상 들어찬 관객을 보면서 나는 고개를 갸우뚱할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의 영화는 이름값이 무색할 정도로 국내 흥행에서 재미를 보지 못한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체인질링>이 그랬고 <아버지의 깃발>도 마찬가지였으며,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는 아예 개봉조차 되지 않았으니,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영화를 보러온 젊은 관객이 이토록 많을 줄 누가 알았겠는가. 더욱 흥미로웠던 것은 (물론 영화가 그러했지만) 러닝타임 내내 관객들은 즐거워 웃고 뒤집어졌다는 점이다. 몇 장면에서 키득거리는 것에 그친 나와는 달리 분명하게 감정을 표현하는 그들. 아마도 이런 내 모습을 보고 내 옆자리의 앉았던 커플은 나를 ‘월터 코왈스키’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런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가 웃지 않은 것은 이유가 있었다. 다름 아닌 코왈스키의 모습에서 오래전 작고하신 내 아버지를 떠올렸기 때문이다. 실향민이었던 내 아버지 역시 극우의 보수주의자였고 전쟁으로 고향을 등진 탓인지 몰라도 소위 빨갱이라면 치를 떨었으며 타인의 이유 없는 친절을 경계하면서 극도로 축소된 공간 안에서 평생을 머무르셨다. 그에 반해 극장을 찾은 젊은 커플들의 아버지는 아마도 코왈스키보다는 한참 젊은 세대일 것이고 때문에 그의 고약하고 위험천만한 행동이 단순히 우스꽝스럽게만 느껴졌을 것이다.

그럼에도 의문은 가시질 않았다. 대체 이 많은 관객은 뭐고 이들이 합심해서 영화에 몰입하고 정서적으로 동참하게 된 까닭은 무엇인가. 홍보를 많이 했던가? 아니면 입소문이 났나. 이도저도 아니면 평단의 반응이 좋았기 때문일까? 정작 놀라운 장면은 영화가 끝나고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갈 때로 이어졌다. 그러니까 거의 대부분의 관객이 조용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는 것인데, 1972년형 그랜 토리노가 해변도로에서 멀어질 때 즈음 이미 불이 켜졌는데도 그러했다. 그날의 관객을 무시하거나 폄훼할 의도는 없지만 정말로 이건 상상하기 힘든 장면이었다. 멀티플렉스에서 이런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니.

후배평론가는 이 영화를 보면서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죽음이 임박했음을 감지했다고 말했다. 코왈스키에게서 영기(靈氣)가 느껴졌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평생을 죄책감에 사로잡혀 살다 생의 마지막 날에서야 고해성사를 한 국수주의자의 주검은 스스로를 못 박아 인류를 대속한 예수처럼 온전히 십자가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한편 박해를 피해 미국으로 온 몽족과 그 옛날 유럽에서 건너온 코왈스키의 선조가 겪었던 처지가 다를 바 없다는 점에서 두 후손의 화해는 지극히 당연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이처럼 드라마틱한 장면 하나 없이도 허허실실 감정의 파동을 쥐락펴락해대니 어느 관객이라고 매료되지 않을 것인가. 과연 몽족의 거처가 되어버린 도시에 남아 팍스아메리카나의 보안관을 자청한 코왈스키의 처연하지만 감동적인 최후가 클린트 이스트우드 자신의 고해성사로 치환되는 순간, 젊은 시절 허리춤에서 신속하게 뽑아들던 총을 버리고 자신의 피로 일그러진 아메리카의 초상을 지우려는 노거장의 진심이 관객에게 전달된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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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에드몽단테스  수정/삭제  댓글쓰기

    개봉 이틀째 날에 보았습니다.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생애와 사상이 정리된 느낌이었습니다. 손으로 총을 쏘는 흉내내는 장면에서 옛날 마카로니 서부영화의 주인공 장고의 모습이 머리속에 오버랩되더군요.

    2009.03.25 18:44
    • 100살하고도10년더  수정/삭제

      마카로니 웨스턴 '장고'의 주인공은 프랑코 네로 라는 이태리 배우입니다.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무법자 3부작에서 한 번도 장고 라는 이름으로 출연한 적이 없습니다. 혹시 영화 '장고'에서 프랑코 네로가 손가락 총을 쏘는 장면이 있었나요? 그렇지 않다면 클린트 이스트우드 영화에서 왜 장고가 오버랩 되었는지 궁금합니다.

      *아래는 무법자 3부작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맡은 배역

      황야의 무법자- 죠
      석양의 건맨- 몽코
      석양의 무법자(극장명:석양에 돌아오다)- 블론디

      2009.03.31 14:40
  2. Favicon of https://freesopher.tistory.com BlogIcon freesopher™  수정/삭제  댓글쓰기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죽음을 감지했다, 는 말이 인상깊게 남는 평이었습니다. 저도 <그랜토리노>에 대해 쓴 글이 있는데, 트랙백으로 걸어둡니다 :) 잘 읽었습니다.

    2009.03.25 20:30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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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오이마주(neoimages)와 영화 깊게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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