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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8.01.01 [그림자 군단] 그림자를 판 사람들

[그림자 군단] 그림자를 판 사람들

필진 리뷰 2008.01.01 23:02 Posted by woodyh98


자신이 영화 애호가였으면 하는 그를 적당히 L군이라고 하자. 오늘도 어김없이 L군은 먹잇감을 찾는 승냥이 마냥 아끼듯이 계단을 올라 그곳에 도착한다. 굶주린 개나 늑대는 앞다리로 땅을 파헤치는 헛짓을 한다. L군도 이미 주린 상태이기 때문에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헛짓을 해야만 한다. 그는 자신이 살아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싶고, 신진대사를 원활히 하기 위해서라도 영양분을 섭취해야 한다. 으슥한 저녁. L군은 꽁무니에 국밥 냄새를 묻힌 채 그곳으로 향한다. 그를 보고 있노라면 몽유병 환자처럼 보인다. 눈은 흐리멍텅하고 손은 극장으로 향하고 다리는 파르르 떨고 있다. 그래도 그는 추레한 상가 계단을 올라 그 곳으로 간다. L군과 비슷한 부류의 동물들은 그곳을 ‘씨네마테크’라고 불러왔다. 씨네마테크라는 곳에 가면 굶주린 영화 애호가들이 새로운 영화를 찾기 위해서 어슬렁거리고 있다. 두리번 두리번. 그들은 새로운 영화, 더 숭배할 만한 영화를 찾기 위해서 영혼까지라도 팔아버릴 작정인 것 같다.

그곳은 비가 어울리는 곳 같다. 추척추적 비가 내리고, 바바리 코트를 걸치고 중절모를 눈썹 위까지 눌러 쓴 남정네들이 와야 할 것만같은 극장. 실제로 '씨네마테크‘를 지키는 주인장은 사시사철 트렌치 코트를 고집해왔다. 그는 흡사 장피에르 멜빌에 대한 로망을 가지고 있는 듯하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그는 스스로를 ’윌로씨‘라고 부른다는데.. 아마도 자크 따띠의 영화 <윌로씨의 휴가>에 나오는 윌로씨가 아닐까? 무슨 말인고 하니, 친구들 따라 영화관으로 휴가를 보내러 왔다가, 친구들이 집으로 돌아간 사이 자기만 돌아가지 못하고 극장에 눌러 앉아버린거다. 뭔가 쌈마이 틱하다. 그에게 극장은 운명이었고, 이왕 이렇게 극장에 눌러 앉게 된거. 후배들에게 자신이 영화에서 받은 기운을 전수할 모양인가보다. 뭔가 낭만적이다. 말해 놓고 보니 이거 웬지... ’씨네마테크‘라는 곳은 장 피에르 멜빌의 영화 분위기와 어울린다. 음습하고 칙칙하지만 나름의 법칙과 질서가 있고 숙명론이 감도는 곳.

옛날 영화를 본다는 건 뭔가 의식이 필요한 일일지도 모른다. 원시 부족들이 사냥을 하고 와서도 먹이를 성급히 먹지 않고, 의식을 치룬히 경건한 상태로 식사를 하듯이 말이다. 니콜라스 레이의 영화 <야생의 순수>에서 에스키모인들이 사냥을 하고 의식을 치루듯이 극장에 출몰하는 영화관객들도 일종의 의식을 치루듯이 나타난다. 극장에 모인 관객들은 서로를 경계한다. L군이 보기에 그네들은 뭔가 특별한 게 있어보인다. 그네들은 고개를 숙인채 극장을 서성이거나, 아무말없이 담배를 태우다가 먼 발치에 있는 종로 타워를 바라보면서 시간을 태운다. 그들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다음 의식을 기다리는 초조함? L군은 자신처럼 하릴없이 극장을 배회하는 그들이 반갑기도 하지만, 반대로 그들에게 적계심도 가지고 있다. 저들이 나보다 먼저 먹잇감을 발견하는 게 영 마땅치 않은거다. 나혼자 맛보아야 할 영화를 이름도 모르는 누군가와 함께보다니... 저들이 자신의 기쁨과 쾌락을 빼앗아 가버릴까봐 겁이 난다.

어찌되었건 영화는 시작된다. 암흑천지의 극장에서는 옛날 영화들이 상영된다. 옛날 영화 속 여주인공은 항상 금발이었고, 남자들은 항상 말쑥한 정장차림을 한 모던보이들이었다. 옛날 영화 속 남자들은 성냥으로 불을 붙여 시가를 태우고, 여자들은 와인을 홀짝이면서 파리한 입술로 남정네들의 욕정을 부채질 한다. 고다르라는 감독은 권총과 여자만 있으면 영화를 만들 수 있다고 했고, L군은 씨네마테크에서 그의 말을 확인했다. 고다르란 아저씨가 미사여구를 동원해 영화를 해석해줄 때, 이미 그에게 영화는 범접할 수 없는 세계가 되어 있었다. 차르르~ 소리를 내면서 영사기가 돌아갈 때, 백색 천 위에는 천상의 세계가 나타났다. 구로사와 아키라, 오즈야스지로, 미조구치 겐지, 고다르와 트뤼포의 친구들이 만든 누벨바그,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 소비에트 영화, 그리피스의 영화에서 존 포드를 거쳐 혹스와 히치콕... 여기까지 온 후 소쿠로프를 만나면 오컬트적인 현상이 나타난다.

L군은 이쯤되면 자신의 영혼을 극장에 헌납하고 영화라는 세계에 풍덩빠져버린다. 주변에서 누가 연애짓을 하건, 과자를 우걱우걱 씹어대건 상관없다. 이미 그는 영화 관객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극장은 관객들의 그림자를 훔쳐간다. 관객들은 기꺼이 그 의식에 동참하면서 자신의 그림자를 극장안에 두고 온다. 그림자를 저당잡히는 대가로 관객들은 새로운 영화를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아! 위대한 오즈여! 아 황홀한 고다르여~! 이 얼마나 숭고하고 쌈마이 같으며, 말도 안되는 이야기인가? <파우스트>처럼 영혼을 맞거래 하다니...

L군은 그렇게 씨네마테크에서 오컬트적인 의식을 치룬다. 그는 영화를 사랑한다고 믿지 않는다. 하물며 그는 극장을 서성이는 자신의 친구들이 영화를 사랑한다고 해도 믿지도 않는다. 하지만 알게 뭐람. L군은 자신이 영화를 믿는 마음과 씨네마테크 친구들이 영화를 사랑하는 마음을 의심하지 않기로 한다. 극장안 어둠 뒤편에 뭐가 있든 알게 뭐람. 내일도 L군은 몽유병 환자처럼 극장으로 향하는 계단을 아끼듯이 오를 것이다. 어쨋든 영화를 봐야지 살아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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