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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8.04.19 [경축! 우리사랑] 영화가 여성의 욕망을 정당화시키는 방법 (1)





오점균 감독의 [경축! 우리사랑]에 대한 글을 한 편 쓰고 난 후에도 마음 한 구석이 허전했다. 설명이 부족했던 탓일까? 나는 봉순씨(김해숙 분)가 구상(김영민 분)에게 마음이 동한 이유로 구상이 생산적 활동에 동참한 유일한 사내라는 점을 든 바 있다. 그럼에도 이 영화에 대하여 조금 더 이야기할 필요성을 느낀다. 다름 아닌 감독이 지시하는 (적절한 표현인지는 모르겠으나) ‘생산적 활동’과 ‘생산적 활동에의 편입’이 그것이다. 이는 봉순의 로맨스가 정당성을 얻는 방법과 직결된다.

전작에서도 한 결 같이 드러낸 바 있듯이 오점균은 여성의 잠재된 욕망이 섹스를 통해 해갈된다고 믿는 듯하다. 게다가 섹스를 하나의 ‘생산적 활동’이라고 규정하고 있는데, 이는 [경축! 우리사랑]에서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음이 감지된다. 즉 감독은 봉순의 로맨스 역시 생산적 활동의 일부로 규정하고는 이를 보충 설명하는 방식으로 영화를 진행시키고 있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제 아무리 봉순이 순수한 사랑을 외쳐봐야 주위의 협조가 없으면 무용지물일 터. 때문에 그의 로맨스가 정당화될 수 있는 장치가 필요한 데, 이때 감독이 선택한 것은 생산적 활동에의 편입이다. 이를테면 그간 생산적 활동에서 소외된 아내들과 이를 방기해온 남성들에게서 잠재된 욕망을 끄집어냄으로써, 봉순의 파격적 로맨스와 부부간의 사랑이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음을 알린다는 것이다. 당연히 이 두 가지는 영화의 끝에 이르러 하나로 융합된다. 요컨대 [경축! 우리사랑]에서 봉순의 로맨스는, 어느 중년여성의 욕망적 일탈이라는 일회성 해프닝에 머물지 않고 비생산적활동에 몰두하던 남성들로 하여금 생산적 활동에 동참하도록 추동하는 기제가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나는 이 영화가 봉순의 로맨스를 정당화시키는 과정을 탐색하면서 여전히 남아있는 한계를 찾고자 한다.


생산적 활동 : "도우미 없으니까 맛이 나질 않아"

영화는 시작부터 대극의 두 장면을 보여준다. 즉 하숙생을 구하는 전단지를 붙이는 봉순과, 노래방에서 ‘사랑은 연필로 쓰세요’를 목청 높여 부르는 봉순의 남편(기주봉 분)과 동네 남자들의 아우성. “도우미 없이 노래 부르니까 맛이 나지 않는다”는 푸념처럼 그들은 무료한 날들에 지쳐 뭔가 화끈하고 재미있는 일을 찾는데 골몰인 사내들이다. 그들은 말할 지도 모른다. 하루의 피로를 풀고 다음날을 위한 재충전으로써 적당한 유흥이 필요하다고. 술과 노래와 여자로 이어지는 짜릿한 일탈의 기운이 각자의 심장을 데우지만 정작 남자들에게 돌아갈 몫은 없어 보인다. 그들은 생산적 활동에서 멀어진 자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철저하게 지금 여기의 모습에 집중하여 논의하기로 하자.

물론 봉순의 남편 역시 영화 속 현재보다 과거에는 가족부양을 위해 죽도록 일했을 것이다. 하숙을 칠 만한 자기 집이 있고 노래방도 가지고 있으니 말이다. 또 정윤을 낳았으니 분명 생산적 활동에 열심인 시절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지금, 여기의 모습이다. 어차피 봉순도 가족을 위해 젊은 시절을 희생했을 테고 지금도 일하고 있지 않은가. 다른 글에서 언급했듯이 봉순이 구상에게 연정을 품는 행위를, 하룻밤 일탈이 불러온 단순한 결과로 봐서는 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러므로 나는 딸의 결혼선언과 돌연한 가출에도 무책임으로 일관하면서 바깥으로만 돌려는 중년남성의 모습을 봉순의 남편에게서 발견한다. 겉은 무료한 삶에 지친 허허실실 중년의 모습이지만 사실 그는 우리사회의 가부장을 대리하는 상징물이다. 이를테면 내연녀를 동네로 불러들여 두 집 살림을 하면서도 봉순의 로맨스를 확인하고는 가족지킴이로 돌변하는 모습은 우리사회의 견고한 가부장제에 다름 아니라는 것이다. 특히 (정말로 오버스럽기 짝이 없지만) 내연녀 앞에서 밥상을 엎는 장면에서, 구상을 불러 집단린치를 가하는 장면에서, 모든 상황이 종료된 후 다시금 내연녀의 방을 찾는 장면에서 그의 남성성은 극대화된다. 이처럼 시종일관 무기력하고 희화화되어 보여 지던 봉순의 남편과 주변인들의 잠재된 폭력이 드러나는 순간 우리는 견고하게 다져진 남성중심사회의 단면을 목도하게 되는 것이다.

반면 동네 여자들은 경제활동에 중심에 서있는 이들이다. 하숙을 치고 노래방을 운영하는 와중에도 봉투붙이는 부업을 마다않는 봉순은 물론이고 정육점과 슈퍼의 여주인들도 이 부업에 동참하고 있다. 물론 동네의 대소사를 주전부리삼아 올려놓고 수다에 더 열심인지는 모르겠으나 그녀들이 경제의 중심이라는 것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 영화 초반 철없고 무책임하기 짝이 없던 봉순의 딸 정윤(김혜나 분)이 중반이후 기세등등하게 자기 목소리를 내는 데는 단지 엄마와 구상사이의 부적절한 관계 때문만 아니라, 그녀 역시 제 밥벌이를 하고 있다는 점도 작용했을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몇 년 만 모으면 작은 전세방도 얻을 수 있다”며 구상을 설득하는 제법 어른스럽기까지 한 정윤의 모습.

그런데, 여기서 이상한 점이 발견된다. 봉순의 가족을 제외하고 다른 이들은 자녀가 없는 것처럼 그려진다는 것이다. 자식에 대한 언급조차 나오지 않는다. 다시 확인하자. 오점균은 전작 [생산적 활동]을 통해 여성과 남성이 섹스하고 (불륜이건 아니건)아이를 낳는 것을 생산적 활동으로 내세운 바 있다. 물론 논리의 정당성을 확보하는 데는 실패했다고 보여 지지만. 이런 때문인지 [경축! 우리사랑]에서는 생산적 활동에 집단을 동원함으로써 봉순의 행위를 정당화시킴과 동시에 남성들을 포용하는 양동작전을 사용한다.


생산적 활동에의 편입 : "난 언제인지 기억도 안 나네"

봉순의 임신 소식을 들은 남편의 친구들은 한껏 부러워한다. 늘그막에 아이를 얻을 정도로 힘이 있다는 사실이 부러웠을 테고 부부의 금슬이 샘났을 것이다. 하나 같이 아내에게 경제권을 내어준 채 사랑타령과 술타령에 하루를 소진하는 자신들의 처지를 감안할 때, 봉순의 남편은 내연녀인 미용실 여자를 동네로 들여놓고도 아내를 임신시켰으니 어찌 부럽지 않겠는가. 이처럼 무기력한 남성의 모습은 “일 주일에 한 번이나 할까?” “난 언제인지 기억도 안 나네”라며 봉순의 임신을 부러워하는 여자들의 쑥덕공론에서도 잘 드러나고 있다. 이제 감독은 남성들의 모습을 의도적이리만치 축소시키고 희화화해버린 후 그들을 가족의 이름으로 재 편입시키는 작업을 준비한다.

사실 봉순의 임신은 논의대상이 아니다. 또한 구상이 스무 살 어린 남자인 것도 마찬가지다. 즉 [경축! 우리사랑]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중년여성이 누구와 로맨스를 벌이느냐가 아니고 봉순이 아이를 낳을 것인지 아닌지에 대한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봉순의 욕망'은 감독이 쥔 조커(Jocker)에 다름 아니다. 감독이 하고 싶은 얘기에 따라서 이리저리 사용할 수 있는 만능의 존재. 그것이 '봉순의 욕망'에게 안겨진 영화 속 역할이다. 남편의 뜻대로 아이를 지운다면 남성가부장이 견고해질 것이고 아이를 낳는 다면 여성욕망이 힘을 받을 것인즉, 만약 봉순이 아이를 낳고 로맨스의 정당성까지 확보할 수 있다면 게다가 추레한 남자들에게 생산적 활동의 기회까지 안겨준다면 그야말로 금상첨화일 터이다. 앞서 말한 양동작전이 설득력을 얻는 지점이다.

혼자하면 부끄럽고 벌쭘한 일도 단체로 하면 별로 창피하지 않았던 경험이 누구나 있을 것이다. 통일성과 집단성의 힘 때문이다. 어떤 행위가 하나의 현상으로 변할 때 그것은 이데올로기가 된다. 따라서 영화의 후반, 동네 여자들이 단체로 임신한 모습은 여성욕망을 판타지로 처리한 장면이 아니다. 여성의 생산적 활동에 일조함으로써 구성원의 자격을 재획득을 위함이며(임신한 아내와 다정하게 포즈를 취한 남편들의 모습들을 기억하자) 감독 자신이 집요하게 주장해온 생산적 활동을 완곡하게 설파하는 다른 화법이다.


판타지와 이데올로기 사이에서 : "엄마가 뭐 이래?"

판타지의 속성은 개인적인데 반해 이데올로기는 집단성을 지닌다. 판타지에서 시작된 이데올로기는 종국에 판타지를 지배하기 마련이다. 대중은 특정한 사건이 벌어졌을 때, 본질 이외의 것에 더 열광하고 호기심을 품기 마련이다. 신정아 변양균 사건에서 볼 수 있듯이 학력위조로 불거진 개인적 사건이 고위공직자와의 부도덕한 관계를 통한 권력형 비리까지 이르는 과정에서 황색저널리즘과 대중이 집착한 것은 섹스스캔들이었다. 그러므로 현상적으로 부각된 것은 고위공직자의 부도덕함과 위선, 이를 매개로 입신양명을 이루려했던 한 여자의 빗나간 욕망이었다. 그들의 스캔들을 바라보는 가운데 사람들 마음 한켠에 자리 잡는 것은 욕망이 우회로 표현된 판타지다.

영화에서 봉순이 남편 아닌 남자와 사랑에 빠졌다는 사실을 알게 된 동네 사람들은 봉순의 남편에게 “보기보다 재주가 좋네”라고 비아냥거린다. 또 구상에게는 “동네 아줌마들 다 후리겠네”라며 “이 동네를 떠나라”고 말하기까지 하는데, 당연히 봉순과 구상 사이에서 사랑을 보기보다는 추잡한 이면을 찾아내려 들어 본질을 왜곡시키려는 심리에서 비롯된 것이다. 봉순의 가족 입장에서 볼 때 그의 로맨스는 부도덕한 행위이며 가족구성원에 대한 배신에 다름 아니었다. 그러므로 봉순의 딸은 말한다. “엄마가 뭐 이래?” 엄마는 어때야 하는 것일까. 여자는 어때야 하는 것일까. 내연녀에게 초밥을 사다 바치고 아내의 잠을 틈타 미용실로 달려가는 남편의 아내는 엄마의 이름으로 무엇을 더 해야 한다는 말인가? 이 모든 것은 가족이데올로기에 저당 잡힌 한국사회의 정서 탓이고 봉순이 유부녀라는 사실에 기인한다. 이는 [경축! 우리사랑]을 비롯한 유사한 영화의 마케팅에서도 발견된다. 이를테면 봉순이 스무 살이나 어린, 그것도 사위가 될 뻔 했던 남자와 사랑에 빠졌다는 데 초점을 맞추고는, ‘딸의 남친을 탐한 엄마’ ‘부도덕한 로맨스’라는 자극적 문구로 관객을 끌어 모르려는 행위가 그것이다. 이때 규정되고 차단된 담론은 영화에 대한 다양한 논의를 원천봉쇄하는 결과를 낳기 마련이고 결국 그 피해는 고스란히 영화가 떠안게 된다는 점에서 신중을 기해야 할 일이다.

비록 봉순의 행위에 대한 남편과 딸, 동네사람들의 암묵적 인정절차를 마쳤다고는 하나 여전히 문제는 남아 있다. 개별적 주체인 여성 스스로 자신의 욕망을 정당화시키기 힘든 현실과 남성에 의해 유보되고 억압된 욕망의 해소를 위해 결국 남성을 동원할 수밖에 없는 담론의 한계가 그것이다.


"봉순이가 누구야?"

영화의 후반, 봉순이 생산한 잉여물을 소비하던 남편과 딸은 “우리가 엄마를 이해해야”한다며 현실을 받아들이기로 한다. 다수의 관객이 헛웃음을 지은 이 장면은 사뭇 시사적인데, 봉순을 흡혈하던 사람들이 졸지에 피해자로 둔갑하기 때문이다. 추락한 비생산자의 처량한 처지를 그려낸 듯 보이는 이 장면이 사실은 여성주체가 넘어야할 견고한 가정의 벽을 명징하게 드러낸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이는 여성의 외도나 불륜을 그린 많은 영화들이 여성 쪽만을 단죄함으로써 남성가부장을 강화시켜왔다는 것과 무관치 않다.

봉순의 집 앞에는 사육제를 방불케 하는 상이 차려지고 온갖 기름진 음식과 술이 목을 타고 넘어가 욕정을 도리질 하는 그 밤하늘로 봉순과 구상의 교성이 메아리친다. 성욕과 식욕의 과장되어 판타지를 불러내는 이 장면을 통과하면서 영화는 해피엔딩을 향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경축! 우리사랑]이 페미니즘을 표방한 영화가 아니라고 해도, 중년 여성의 사랑이 제 아무리 진실하다고 해도 결국 봉순이 안착한 대상은 남성이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여전히 남성에 의해 호명되기 전까지는 아내와 주부로 통칭되는 여성의 이름. 노래방에 모여 구상을 린치하던 남자들은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자문한다. “봉순이가 누구야?” 그들은 정말로 봉순의 이름을 알지도 못하고 알려고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친구의 ‘마누라’나 ‘정윤이 엄마’면 충분했을 테니까 말이다.


남겨진 것들

아내의 이름으로 어머니의 이름으로 살아온 여성이 뒤늦게 자신을 찾으려는 움직임은 영화를 비롯한 다양한 재현방식을 통해 시도되어 왔다. 그것은 페미니즘의 틀을 빌리거나 또는 가족의 재구성을 통해서 여성의 역할과 위상을 재정립하였고, 멀리는 남성가부장의 전복을 도모하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아직 우리사회에서 여성의 욕망이 설 땅은 좁기만 하다. [경축! 우리사랑] 역시 마찬가지다. 봉순이라는 중년여성의 로맨스를 통해 욕망의 연대가능성을 타진하는 데는 성공한 듯 보이나, 그럼에도 여성욕망의 귀착점이 남성 또는 남성의 변화에 한정되고 있음을 자인하는데 그치고 말았다는 것이다.

온 동네 아낙을 동원해 남편들을 생산적 활동에 편입시키고서야 비로소 봉순의 로맨스가 정당성을 확보하고 개인적 욕망이 성취되는 현실, 한국사회에서 여성의 욕망이 자리한 방은 여전히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이다.


(추신) 사실 이 장황한 글이 앞으로 영화를 볼 사람에게는 치명적일지 몰라도, 그렇다고 영화의 행간을 읽는데 까지 방해하지는 않을 것이란 생각이다. 바람이 있다면 이미 영화를 본 사람들과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마음이다. 부디, 견고한 나의 규준을 해체시키는 날선 비판이 봇물처럼 올라오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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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윤성민  수정/삭제  댓글쓰기

    영화에 대해 할 말은 없는데, 글을 좀 다듬어서 쓰셔야겠네. 내용이 뒤죽박죽이고, 논점도 분명치 않네요.

    2008.04.20 2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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