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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사'로 이야기하는 '아름답다'

'아름답다'는 동사가 아니라 형용사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영화 제목은 '동사'의 느낌이 든다. 그래서 '아름답다'라는 제목은 동사의 특징을 그대로 가져와 단정적이라는 느낌이 든다. 영화 역시 품사로 말하자면 '동사'의 옷을 입고 있다. 비유와 상징적인 표현이 더러 있지만 너무나 직접적이어서 낯설어 보이기까지 한다. 그렇기에 <아름답다>는 '형용사'처럼 수식이 강한 영화가 아니다. 원작이 김기덕인만큼 <아름답다>의 시놉시스는 김기덕 작품을 닮아 있다. 아마도 먼저 아름다움이 독이 되는 여자를 생각했을 것이고, 그 다음에 그로 인해 처절하게 파멸되어 가는 과정을 떠올렸을 것이다. 그러니 영화는 미처 완성하지 못한 여인의 마네킨고 같다. 탐스럽고 우아한 몸을 가졌지만 옷을 입지 못한채 제 구실을 못하는. 그러므로 당연히 이야기가 위태로울 수밖에 없다. 모든 이들이 동경하는 '아름다움'을 역으로 이용할 줄 아는 소재나 파격적인 엔딩이 인상적이긴 하다. 하지만 그게 다라는 것이 문제다. 그것을 더 풍성하게 해줄 수 있는 최소한의 '수식'도 이 영화엔 없다.


 

스타일 없는 답습

다른 무엇보다 이 영화의 맹점은 신인 감독 전재홍의 스타일이 부재하다라는 것이다. 영화를 보고 글을 쓰기 전, 어떠한 일이 있어도 '김기덕'의 이야기는 배제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기덕'을 이야기할 수 밖에 없는 것은 이 영화에서 아직은 서툰 감독 '김기덕'의 흔적이 고스란히 베어 있기 때문이다. 순간, 난 이 영화를 전재홍에게 물려주지 않고 김기덕 자신이 찍었으면 어떠했을까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잠시 동안 어지러웠고 나의 결론은 '김기덕이 찍지 않았기 때문에 다행이다'였다. 감독보다 먼저 더 나아가는 관객이 되어서는 안되겠지만 <아름답다>는 기대를 철저히, 쉽게 제어할만큼 김기덕에게는 새로운 면이 없기 때문이다.


 

육지로의 착지가 불가능한 세련된 여성

그의 최근 작품을 난 전혀 폄하하지 않으며 그런 적도 없다. 하지만 <아름답다>의 은영이 <빈집>, <시간>,<숨> 등에 등장하는 부유한 집에 사는 세련된 여인의 이미지를 그대로 이어 받고 있다는 점에서 별다른 매력을 못 느꼈다. 물론 여성 캐릭터 구축이 워낙 약한 감독이기 때문에 이해가 되지만, 오히려 난 그의 최근작에 등장하는 그런 세련된 여인들의 모습이 <야생동물 보호구역>,<파란대문>,<나쁜남자>등의 초기작에 나타난 여성들만큼 생동감이 없다고 단정지어 말할 수 있다. 캐릭터가 비현실적이기 때문에 다분히 '은영'이라는 인물도 공중에 붕 떠서 육지에는 도무지 착지할 수 없을 것만 같다. 더불어 김기덕이 최근 이용하는 로케이션 장소인(물론 제작비 절감 차원에서 사무실이 가깝다라는 장점을 이용한 것일테지만) 도시적 이미지가 강한 '일산'이라는 배경도 매마른 이미지를 부각시켜 줄 지는 몰라도 어색하게 느껴지는 것이 사실이다. 장소 활용에 있어서도 김기덕만큼 전재홍 또한 정성을 보이지 않고 있는듯 하다. 같은 비현실적인 공간이지만 <아름답다>의 은영이 사는 오피스텔과 <파란대문>의 '새장여인숙'이 주는 느낌이 차이는 엄청나 보인다. 살아있고 현실적인 공간에 환상으로 붓칠을 하는 김기덕이 요샌 가끔 그립다.


 

다행 그리고 기다림

다시 돌아와서, 그리고 한번 더 말하지만 <아름답다>는 김기덕이 직접 찍지 않았기에 다행이다. 생산적인 감독답게 그는 주머니 속에서 아직 꺼내지 못한 작품들이 많다. 그가 가진 많은 시놉시스 중에 '권총'을 주인공으로 한 이야기나 유럽으로 입양된 캐릭터가 등장하는 이야기와 같은 여러 편의 작품이 있을 것이다. 더러는 포기한 작품도 있을 것이고. 제작일을 하고 있으므로 앞으로 더러 몇 작품은 다른 사람의 손을 거쳐 재생산될 수도 있다. 하지만 난 그 조차도 별반 바라지 않는다. 그것은 <아름답다>가 그 이유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단지 조금 궁금한건 많은 작품 중에서 왜 <아름답다>를 수제자 전재홍에게 주었을까 하는것이다. 이제 기다려야 할 일은 두가지. 처음은 김기덕의 자장에서 벗어나 '전재홍'이라는 이름을 확실히 각인시켜주어야 하는 전재홍이 조만간 촬영할 <인형>이라는 작품. 그리고 톱스타를 말 그대로 '이용'해서 철저히 자기 스타일로 변주할, 하지만 조금은 변화의 기대가 되는 김기덕의 15째 작품 <비몽>의 개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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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8.21


 우리는 신분과 계급을 초월한 사랑과 헌신에 대하여 갖은 수사로 찬사를 보내면서 오랫동안 기억해왔다. 사랑 때문에 왕위마저 포기한 에드워드 8세의 행각을 세기의 로맨스라 칭송했고, 소작농의 세금 경감을 위해 옷을 벗어던진 코벤트리 영주의 부인 고다이버의 이야기를 회자한다. 또한 16세기 프랑스 신구교도 갈등의 격변을 온 몸으로 막아낸 왕비 마그리트의 일상사는 창녀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으며, 16세기 오스만트루크의 침공에서 베니스를 구하기 위해 프랑스 국왕에게 몸을 바친 고급 창녀 베로니카의 이야기도 알고 있다. 이렇듯 거룩한 희생과 대중 다수를 위한 일에 바쳐진 행위는 그 양태를 떠나 결과에 따른 합당한 대접을 받아왔다. 면밀하게 따져보면, 이러한 사건 이면에는 자신의 신분을 낮춰 바닥으로의 하강을 감수하는 삶의 양식적 변화가 발견된다. 숭고한 대상을 위해 기꺼운 몸 낮춤은 기실 우정과 사랑과 박애와 동지애를 비롯한 다양한 모습으로 우리 앞에 다가온다. 여기에 신분과 대상의 차별과 구분과 경계가 있을 수 없음은 자명한 일이다.


김기덕 영화에 관한한 무한 애정을 가진 내가 그의 모든 작품을 통틀어 첫 손에 꼽는 것은 단연, [파란대문_ Birdcage Inn](1998)이다. 한국영화감독에게 있어 세 번째 작품이 고비라는 인식이 팽배한 가운데, 실제로도 세 번째 연출작에서 쓰라린 패배를 맛본 경우가 허다했음에 반해, 김기덕의 경우는 평단의 가혹한 시선을 자양분 삼아 흔쾌히 딛고 전진한 흔치 않은 사례라 할 수 있다. 사실, 김기덕의 영화가 평단, 특히 여성평론가들을 불쾌하게 만듦으로써 무차별 십자포화의 단초를 제공한 것은 [파란대문]에서 부터였다. 그만큼 이 영화는 논란의 여지를 담고 있으며 보편적 사고방식으로는 용인하기 힘든 화법으로 가득하다. 그것은 고결한 정신과 더러운 육체, 창녀와 여대생, 남성과 여성, 포주와 창녀, 욕망하는 주체와 욕망의 대상으로 구분지어진 이항대립의 세계에 대한 낯설음에 기인한다. 그러므로 이를 분절하고 봉합해온 김기덕의 의도는 명백해 보인다. 즉, 사회규범과 통념을 초월하여 알몸으로 내면의 욕망과 마주해보자는 것이다.

대학생인 여성이 아르바이트로 술집 여급이 되었다고 했을 때, 우리는 대학생이 술집에서 일한다는 관점에서만 주목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반대로 보자면, 술집 여급이 낮에 대학까지 다닌 다는 다소 황당한 논리를 전개시켜도 특별히 무리가 따르지 않는다. 물론 우스개 소리다. 하지만 아직도 이러한 얘기가 불편하게 들린다면 당신은 필시 김기덕 영화를 끝까지 보아내지 못할지도 모른다. 술집 여급이 된 대학생에 대한 부정적 사고와 도덕률은 결국 김기덕의 세계관과 배치되기 때문이다. 영화로 돌아가 보자.


진아는 오늘, 조국근대화의 상징인 포항제철이 코앞에 보이는 새장여인숙으로 왔다. 그녀의 직업은 여관에 방 한 칸을 빌려 기거하면서 투숙한 손님의 객고를 풀어주는 떠돌이 매춘부다. 사실 새장여인숙은 말이 숙박업소지 매춘업소와 하나도 다를 것이 없다. 이곳을 찾는 남성치고 진아의 몸을 거쳐 가지 않는 경우가 없기 때문이다. 또 다른 여성인 주인집 딸 혜미는 진아와 동갑내기 대학생이다. 사랑하는 남자가 있지만 성적으로 솔직하지 못할뿐더러 결혼을 약속한 사이임에도 그를 집으로 초대할 수 도 없다. 매춘업소와 다름없는 여인숙을 운영하는 가정사가 창피하기 때문이다. 당연히 자신을 옭아맨 공간이 원망스럽고 지긋지긋할 터이다. 이런 와중에 떠난 창녀를 대신해 진아가 그곳에 온 것이다. 그러니 선머슴 같은 자신과는 달리 여성적 매력을 지닌 진아가, 아무 남자하고나 몸을 섞는 진아의 삶이, 밤낮 할 것 없이 그녀 방에서 새어나오는 교성이 어찌 탐탁할 수 있겠는가. 따라서 주인집 딸 혜미에게 진아가 눈엣가시 같은 존재인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렇게 김기덕은 순수의 상징인 여대생과 타락한 육체를 가진 창녀를 한 공간에 몰아넣고는 두 세계의 융합을 시도한다. 그것은 대립하는 두 세계의 동질성을 부각시키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영화는 몇 개의 인상적 장면을 통해 진아와 혜미 사이의 화해가능성을 타진하며 동질성을 불어넣고 있다. 이를테면 새장여인숙에서 바다를 향한 두 개의 창문을 통해 나란히 한 두 여자를 한 프레임에 잡은 신이 대표적인데, 이는 두 세계가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유사하다는 것, 즉 동질임을 알려주고 있다. 과연 영화의 후반 여름에 내리는 눈을 통해서, 두 여성이 함께한 장면 위로 꽃이 흩날리면서 두 세계는 화해를 하게 된다.

진아 방에 놓인 어항 속의 금붕어, 물고기는 욕망을 상징한다. 금붕어는 뭍에서 살 수 없다. 그렇다고 아무 물에서나 살 수 있는 것 또한 아닌 금붕어가 포항 바닷가에 여인숙 방 한쪽에서 유영한다. 오프닝에 등장하는 거북이 물과 뭍을 오가며 살아간다면, 금붕어는 철저하게 물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다. 양서류와 어류의 본질적 숙명은 진아와 혜미의 그것과 절묘하게 병치된다. 진아가 새장여인숙으로 오던 날, 길목에서 만난 (바로 진아의 방을 사용했던) 여자가 금붕어를 들고 있던 까닭이 여기에 있다. 그러므로 새장여인숙을 떠나던 창녀와 몸이 부딪혀 떨어진 금붕어를 담아 주던 진아의 모습은, 불완전한 혜미의 욕망이 진아를 통해서 지속될 것임을 암시하는 장면이다. 과연 새장여인숙을 찾은 남성들이 동물적 본능을 해소하는 동안, 혜미의 감춰진 욕망은 점차로 눈을 뜨게 된다. 여성이면서도 남성에 가깝게 그려지고 남성적 권위와 행동양식을 보여 왔던 혜미였다. 순진한 줄만 알았던 동생의 음흉한 도청장치를 발견했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애인이 매매춘을 하려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자신이 갖고 싶었던 워크 맨이 진아로부터 나왔음을 알았고, 그녀의 삶이 자신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혜미의 가치관은 변화될 수밖에 없다. 때문에 영화의 마지막 다이빙대 위에 나란히 앉은 진아와 혜미와 수족관에서 금붕어가 노니는 장면의 오버랩을 통해 감독은 혜미의 성적 욕망이 자유로워졌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물고기의 상징성은, 담에 물고기를 그리던 주인아저씨의 돌발적 욕망분출에서도 드러난다.)


거의 섹스로 시작해서 섹스로 끝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이 영화에서 김기덕은 두 여성을 통해 사회적 통념에 대한 전복을 시도한다. 그것은 언제라도 창녀가 될 수 있는 여성의 삶을 말하고자 함이 아니다. 또한 여대생이 창녀가 되는 것이 비참한 삶에 노출된 동성에 대한 막연한 연민과 동질감의 표시라고 말하는 것도 아니다. 이를테면 남성사회가 만들어놓은 엄숙주의와 도덕적 세계관에 대한 위험한 도발로 보아야한다. 대학생인 혜미는 여성이라기보다는 남성에 가까운 외모를 지니고 있음을 기억하자. 긴 머리에 부드럽고 다소곳한 이미지를 지닌 진아와는 달리, 혜미는 짧은 머리에 탄탄한 몸매와 신경질적이고 다소 거칠어 보이는 언행 등에서 남성의 그것과 닮아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정작 성에 관해서는 정반대의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진아가 남성을 받아들일 때 마다 보여주는 완숙함과는 달리, 혜미는 결혼을 약속한 남자와의 잠자리조차 강박적으로 외면하기 일쑤다. 혜미의 외모가 남성에 가깝게 그려진 이유도 이와 무관치 않다. 대학생이라는 신분과 체면과 순결을 목숨보다 소중히 여기면서 도덕지상주의로 꽁꽁 무장한 그녀가 동시대의 남성들과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더불어 주체적 여성상을 외치면서도 방법과 행동양식에 있어 남성들의 그것을 고스란히 답습하는 어설픈 페미니스트와도 상통한다.

때문인지 영화에서 남성성을 획득한 이들은 더할 나위 없이 무기력하고 비겁하다. 이들 모두는 진아라는 한 창녀를 숙주삼아 기생하는 자들에 다름 아니다. 여인숙의 주인 내외는 물론이고, 그들의 자식들 또한 진아의 몸이 만들어내는 부가가치를 통해 학교를 다니는 존재이다. 세밀하게 보자면, 새장여인숙의 주인은 한 때 주먹 꽤나 썼을 법한 은둔자처럼 보이지만 기껏해야 마당을 쓸고 휴지를 태우는 것이 전부이고, 그의 아들은 사진을 빌미로 진아와 가까워지려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래봐야 결국 진아와의 섹스가 궁금할 뿐인 어수룩한 학생이다. 진아의 기둥서방의 경우는 또 어떤가. 폭력과 억압으로 여성을 제압하여 지배하고 착취하는 남성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으며, 진아의 몸을 거쳐 간 남성들(맥주 값을 속이려 들거나, 변태거나)은 물론이고 혜미의 애인마저 욕정과 도덕적 고민 사이에서 갈등하다 실행하지 못하는 소심한 남자를 대리하고 있지 않던가. 다만 무능하고 비겁하며 소심한 남성들의 세계에 둘러싸인 진아만이 묵묵히 자기 일을 감당하면서 헛된 꿈을 꾸지 않고 하루를 살아갈 따름이다. 따지고 보면 누구하나 진아에게 빚지지 않은 이가 없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렇듯 김기덕은 남성중심이 작동하는 여인숙 공간 속에 연루된 남성들을 한껏 조롱한다. 그것은 곧 학연(대학생), 지연(경찰도 건드리지 않는 토박이), 혈연(유사 가족관계인 기둥서방의 전횡) 등이 지배하는 한국사회에 대한 조롱이다. 그리고는 끝내 그들의 믿음을 패배하도록 만들면서 완전한 전복을 꾀하게 된다. 그 전복이란 남성중심의 핵심을 제거시키거나 분열을 도모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당신이 감독이라면 과연 누구의 정체성을 혼란스럽게 만들어 진아에게 편입시킬 텐가? 순수하고 다정한, 게다가 미술적 재능까지 가진 진아와 등가를 이룰 만한 극중인물로 동갑내기면서 모방욕망에 가장 근접해 있는 혜미 말고 누가 또 있겠는가.


그렇다면, 비평가들은 도대체 왜 이 영화를 그토록 가혹하게 비판했을까? 무엇보다, 기존의 가치관을 완전하게 전복시키는 서사구조를 꼽아야 할 것이다. 그것은 혜미와 진아가 화해하고 동질성을 이루게 된다는 것과는 무관하다. 오히려 여대생이 창녀와 친구가 된다는 것을 여대생이 창녀가 됨으로써만 가능해 진다고 단정 지음으로써 발생하는 문제인 것이다. 물론 여대생과 창녀가 친구가 되기 위해서는 여대생이 창녀가 되는 쪽이 한결 간편하긴 하다. 가령 어느 창녀가 다른 창녀를 위해 대신 일을 하는 것은 당연시 하면서도, 여대생이 그 일을 대신 할 때, 우리는 불쾌해하고 부도덕한 일이라 여기기 마련이다. 따지고 보면 이러한 생각은 창녀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에서부터 출발한다. 아니, 여대생은 창녀보다는 몇 단계 위에 위치한 인간이라는 지적 사회적 우월감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다. 여대생이 창녀가 된다니! 그러하기에 김기덕의 [파란대문]이 불편하고 참기 힘든 것이다.

또한 일군의 여성비평가들은 명백하게 김기덕의 여성관이 부도덕하다고 간주하는 지점으로부터 비평의 붓을 놀리기 시작했다. 결국 페미니스트들이 쌍심지를 켜고 이 영화를 도리질 해 댄 표면적 이유는, 모든 여성을 창녀로 취급하면서 성과 속의 이분법 속에 가둬놓았다는 것이었다. 여대생과 창녀인 등장인물 때문이 아닌, 여성을 성적 대상으로 폄하한 작법과 과도한 폭력성의 문제라고 말이다. 이는 그네들이 혐오하는 김기덕 영화의 클리셰 만큼이나 진부한 비평무기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정말로 그럴까? 나는 그들의 말에 동의할 수 없다. 그녀들이 분개했던 것은, 제대로 교육받은 자가 낮고 천한 일에 종사하는 사람과 섞이고 통하더니 기어이 몸을 함부로 굴리는 지경에 이르렀기 때문일 것이다. 게다가 김기덕은 그것을 화합과 동질성의 범주에 넣으면서 먹물들의 자존심에 상처를 입혀버렸다. 이런 와중에 약속이나 한 듯이 영화를 난도질 해댄 페미니스트 비평가들의 모습이란 한마디로, [파란대문]앞에 서성대다가 호기심에 겨우 발은 떼었지만, 진아의 방에는 들어갈 엄두도 못 낸 채 기웃거리더니 더럽다고 욕하고 돌아서는 꼴에 다름 아닌 것이다. 자신들의 내제된 욕망이 발가벗겨져 무방비상태로 노출되어 있음을 수치스럽게 여기기 때문이다. 그들 입장에서 보면 도저히 용납할 수 없을뿐더러 상상조차 안 될 말이다. 여성의 자주성과 주체의식이 한갓 남성의 노리개로 전락하고 더러운 욕망의 대상이 되어 헐떡거리는 것을 두고 볼 수는 없었을 뿐 아니라, 새장여인숙을 찾은 남성들이 혜미의 몸을 훑어보는 시선조차 기분이 나쁘고 불쾌했을 것이다. 어디라고 내 몸을 엿봐! 어차피 유유상종인 진아와 한 바탕 뒹굴다 가버릴 잡놈들 이라고 말이다.


이 영화가 나온 지도 10년이 흘렀고, 그렇게도 혹독한 비평세례를 받은 [파란대문]은 뒤늦게 많은 이들의 공감과 재평가의 대상으로 격상되기 이르렀다. 세상이 변한 탓일까? 비평가들의 시각이 전환될 것일까? 아니면 여대생이 창녀가 되는 일이 이전에 비해 유별나지 않은 사회 탓일까. 아마도 김기덕의 영화세계가 조금 부드러워지고 세상과의 접점을 찾으려는 노력이 더해진 탓일 런지도 모른다. 혹은 유수의 영화제에서 상을 받음에 고무된 평단이 이전의 평가에 대한 복기차원에서 슬그머니 칼날을 집어넣은 것인지도 모른다. 그 어느 쪽이던, 김기덕의 영화가 보여준 날것과 통념의 전복은 지금도 크게 변하지 않고 있다. 대학생이 창녀가 되는 것은 이후 [나쁜 남자]에서도 복제한 바 있고, 여고생이 매춘을 하거나, 상류층 부인이 떠돌이 청년과 통정하거나, 인텔리인 젊은 유부녀가 사형수와 교감하는 이야기를 통해 김기덕은 변함없이 자신의 세계관을 설파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달라진 것이 있다면, 확성기로 불특정 다수를 향해 선포한 이전과는 달리, 세상과 소통하려는 변화에서 비롯된 귀엣말이어가기 식의 조용하면서도 친절한 전달방식이라 하겠다. 그렇다고 한들 감독의 세계관 자체가 달라지지 않을 것임은 명백해 보인다. 괜히 김기덕이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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