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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인용식탁]에서 연이 말했던 것처럼 사람들은 무조건적인 진실을 원하지 않는다. 그들이 받아들이기를 원하는 진실이란 그들이 감당할 수 있는 것들에 국한된다. 왜? 진실을 정면으로 응대하는 것은 심각한 고통을 수반하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무언가를 말하고 싶은 이가 진실을 직선적으로 드러내는 것은 최선의 선택이 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런 경우 가장 손쉽게 사용될 수 있는 방법은 판타지이며, 이는 판타지가 늘 가장 잔혹한 이야기로 귀결될 수 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미스테리 멜로라는 정체를 알기 어려운 수식어로 치장된 이 영화의 실상은 멜로영화가 아니다. [별빛속으로]라는 영화는 판타지라는 세련된 화법으로 우리가 겪어온 것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혼란스러운 이 세상에 대한 경각심을 유발시키기 위한 작품이다. 내 정서가 메말라 있다고? 뭐, 그렇게 받아들여도 좋다. 어쨌거나 운을 뗀 이상 나름대로 내가 본 것에 대해 이야기해보도록 하자.


그들은 어떻게 죽었는가?

하늘에 대공사격을 행했을 때 사람들은 그것이 불꽃놀이인줄 알고 구경을 나갔다고 한다. 세상은 눈에 보이는 것과는 이다지도 다를 수 있는 것이다. 시민들이 받아들인 아름다움에 비교할 때 그것의 실체는 한참이나 거리가 먼 것이 아닌가. 이 대공사격 중의 총탄 하나가 노란샤쓰(수영, 김C분, 주인공과 구분하기 위해 노란샤쓰로 언급할 것이다)의 몸을 파고 들었다. 그는 죽었다. 군부의 총질이 무엇을 향했는가는 상상에 맡긴다고 하더라도(대충은 짐작 가능하리라 믿는다만), 확실한 것은 그가 억울하게 죽었다는 사실이다. 정부에 의해서.


노란샤쓰의 연인이었던 삐삐소녀는 그의 죽음 이후 줄곧 방황한다. 그러고는 죽은 연인의 이름과 같은 수영을 만나고 마음의 결심을 내린다. 진정한 사랑이란 죽음까지 쫓아가는 것. 그녀는 자신의 연인을 죽음에 이르게 한 국가에 야유를 하고 반항하다 투신한다. (그렇다고 노란샤쓰가 민주화운동에 적극적으로 가담한 인물이라는 뜻은 아니다. 그는 오히려 히피적인 인물이고, 시대와는 조금 벗어난 듯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하필 그런 노란샤쓰가 시대에 의해 희생된다는 것도 아이러니하다.) 하지만 그 죽음이란 거기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전태일의 분신이 세상을 조금 정도는 바꿀 수 있었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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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수영에게 죽은 이들이 나타나는가?

삐삐소녀가 죽고 난 후에 수영에게 이상한 일들이 생기기 시작한다. 죽었을 것이 분명한 삐삐소녀가 자꾸 그에게 나타나는 것. 왜 하필 귀신들이 수영에게 나타나는 것일까? 그것은 수영이 삐삐소녀의 죽음을 보았기 때문이다. 삐삐소녀의 죽음은 수영에게 하나의 트라우마가 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며, 그 이후로도 그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물론 생전의 그녀와의 경험들도 수영이 조금씩 세상에 눈뜨도록 만들어가는 무엇이었다. 아름다운 연애질 같아 보였던 비밀의 공간에서의 장면. 실은 그 곳은 그녀가 죽기 전에 뿌려댔던 삐라를 만들었던 장소였을 것이다. 그래서 그 장면은 그가 시위로부터 자유롭지 않았다는 암시였으리라 생각한다. 그녀는 죽기 전 그에게 진실한 사랑은 죽음까지 쫓아가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 말은 실제로 자신을 따라 죽어줄 것을 부탁하는 것이 아니라, 그녀를 죽음으로 이끌었던 의지를 계승해 달라는 의미로 탈바꿈한다. 그녀는 자신의 뜻을 이을 사람으로 수영을 택했던 것이지, 그를 사랑하는 연인 대신으로 삼았던 것이 아니다. 그가 맺어진 사람은 노란샤쓰의 동생이며, 삐삐소녀의 귀신은 항상 노란샤쓰와 함께 한다. 또한 삐삐소녀는 계속하여 시골쥐 수영에게 각성할 것을 재촉한다.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다고.


왜 그들은 수영에게 여동생을 부탁하는가?

꿈을 꾼 후 무턱대고 수지를 찾아간 수영은 흡사 시월애에서의 한 장면처럼 이렇게 말을 던진다. 긴 이야기가 될 것 같다고. 하지만 영화의 말미에 그는 자신이 겪은 그 비밀에 대해 자신의 아내와도 제대로 소통하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누군가가 함께 있는 것 같다고 말하자, 당연히 오빠의 이야기일 것임에도 - 관객이 보기에는 - 그녀는 더 이상 말하지 못하게 그의 말을 막는다. 그의 경험은 단지 그녀를 만날 수 있도록 한 매개였을 뿐이다. 그런데 왜 귀신들이 수영에게 동생을 부탁하는가?


동생의 의미를 생각해보자. 꿈을 통해 삐삐소녀의 49제를 함께 경험한 수영은 그 환상 속에서 오빠가 아니라 똑같은 방식으로 죽어버린 그녀의 모습을 보게 된다. 어째서? 아무 것도 변하지 않는다면 억울하게 죽은 선배들처럼 역시 이 세상에 의해 또다시 희생될지도 모르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수지는 자신들의 죽음으로 인해 차마 지켜지지 못하고 남겨진 무언가를 상징하게 된다. 이런한 맥락에서 귀신들이 수영에게 나타난 목적은 의지의 계승, 그러니까 쉽게 말해 자신들이 지켜주고 싶었던 무엇을 대신 보호해주는 것임을 확신하게끔 만든다.


현실과 꿈, 그리고 경계

삐삐소녀의 죽음을 함께 경험했던 마지막날, 수지는 하늘에 당구공을 던지며 "이 나쁜 놈들"이라고 외친다. 그러자 하늘에 별이 환하게 나타난다. 그러나 잠시 후 무수히 쏟아진 대공사격은 그 별빛을 가려버린다. 70년대, 아니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우리가 살고 있는 곳은 그런 곳이다. 교묘한 폭력이 언제라도 별빛(진실)을 가려버릴 수 있는 곳. 너무나도 교묘해서 보는 이가 오히려 그 폭력에 동조하게끔 만들어버릴 수도 있는 곳. 이렇게 혼란스러운 곳을 살아가고 있는 한, 우리의 삶이라는 것도 마찬가지로 애매할 수 있다. 달리 말하면 사람들은 현실 속에서도 꿈 속처럼 헤맬 수 있다. 70년대를 재현하기 위해 주도적으로 사용되었던 조명들은, 플롯과 함께 이 영화를 좀 더 몽롱하게 느껴지게끔 만들고 있다. 삶의 실체가 무엇이냐에 대한 질문은 결국 자신이 죽었다라는 사실을 인지하는 것과 동일한 문제이다. 물론 삶과 죽음의 이분법이란 너무 순진한 것임을 모르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우리가 봐야할 진정한 현실이란 존재하기 마련이다. 영화의 제목 '별빛속으로'가 결국은 그러한 진실에의 접근을 의미하는 것 아니겠는가.


점차 자신의 흔적이 사라지기 시작하자 수영은 스스로가 죽어있음을 알게된다. 영화에서 경계를 헤매는 것은 수영 뿐이지만,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있는 곳이 어디인지 알지 못한다. [영혼의 카니발]을 떠올릴 법한 공중전화부쓰씬. 사람들은 아무런 생각없이 그저 사전적으로 살아 있을 뿐이다.


영화가 요구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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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에서 깨어난 수영이 시를 쓰게 되었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영화에서 수영은 주위의 운명에 이끌리듯 수동적인 형태로 각성을 요구받는 대학생 캐릭터로 읽힌다. 그가 시를 쓰는 행위, 즉 창조적이고도 주도적으로 말을 할 수 있도록 변했다는 사실은 바로 수영이 세상에 대한 눈을 깨우쳤다는 각성의 증거이다. 어른이 된 수영. 그가 하는 일이 무엇인가? 생과 사의 기로에서 헤매고 있는 학생들 - 교통사고로 죽기 직전인 청년들 - 에게 이러고 있을 틈이 없다며, 진실한 현실로 귀환하기를 요구하는 것 아닌가.


그가 지식인이라 말할 수 있는 직업을 가졌다는 것은 정말 희망적인 설정이다. 자본과 권력에 휘둘리지 않는 진정한 삶을 가르치는 선생이 얼마나 있던가? 영화는 어른이 된 수영의 입을 빌어 교통사고를 겪은 그들과 마찬가지로 우리에게도 눈을 뜰 것을 요구한다. 최근의 많은 한국영화들이 응석부리는 남자들을 그려놓고 자신들은 이 험한 세상에는 아무런 책임이 없다는 식으로 회피하는 것을 감안하면, 이 영화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그보다 서너발짝은 앞서 나간 것이다. 젊은 자들에게 일깨워줄 의무. 그것을 이행하지 못하는 기성세대의 반성 역시 이루어져야 함을 영화는 느끼게끔 한다. 동시에 우리는 이름을 알지 못하는 과거의 인물들에 대해 감사함을 느껴야 한다. 합당한 역사 없이 세상이 갑자기 우리에게 무언가를 던져주는 경우는 드물다. 귀신들의 가호는 우리들에게도 미치고 있는 것이다. 이제는 우리 차례다. 의지는 이어져 왔고, 또 이어져야 한다. 모른 척하거나, 징징거리고만 있을만큼 시간이 넉넉한게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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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여기, 내 방 한쪽 벽에는 언제부터 거기에 존재했는지 모를 액자 하나가 걸려있다. 검푸른 색채로 넓게 펼쳐진 우주공간과 그 구석구석을 누비는 사이좋은 나비 한 쌍, 그리고 위쪽으로 무수히 박힌 반짝거리는 작은 별들이 그려진 그림. 나비들은 어두운 공간에 놓여있지만, 그들을 향해 꾸준히 내려오는 별빛 덕에 길을 잃어버리지는 않을 듯하다. 게다가 그들에게는 빛의 입자를 잔뜩 머금은 채 그 푸르름을 과시중인 날개가 있지 않은가. 둘이 함께하니 외롭지 않아 좋을 것이고, 노닐기 알맞은 조명이 비춰주니 지루할 틈도 없을 테다.

그런데 놀랍게도, 지금 막 그림으로부터 어떤 강렬한 시선이 내게 건네지기 시작했다. 그림이 제 몸을 액자 너머로 흘려보내기 시작한 것이다. 마치 기체가 된 듯 내 방 곳곳으로 스며들어오는, 그림의 선명한 잔상들. 내 몸을 살짝 보듬은 별빛이 바닥으로 유유히 떨어지고, 춤추던 나비들은 속삭이듯 내게 말을 건네고는 이내 다시 자유로운 궤적을 그린다. 액자와 방 사이의 물리적 경계는 그렇게 지워졌다. 나는 지금, 그림이 쳐놓은 어떤 마법적 자장 안에 놓인 셈이다.

때마침 나비 한 마리가 내려와 내 어깨 위에 살며시 앉는다. 그러더니 이 녀석, 내 눈을 뚫어져라 쳐다본다. 나도 따라 고개를 돌려 녀석을 쳐다보기로 한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나비의 얼굴이 어쩐지 낯익다. 녀석의 얼굴, 내 얼굴과 닮았다. 아니 얼굴만이 아닌 모든 부분이 나와 같지 않은가. 이 나비는 지금, 곧 나다. 그렇다면 내가 바로, 나비였던가. 앗! 눈이 떠진다. 방금 전의 마법 같은 공간이, 나비가, 별빛이, 스르르 사라진다. 벽에 걸린 그림은 묵묵함으로 일관한다. 나는 그저 낮잠을 즐기고 있었을 뿐이다. 모든 게 꿈이었나. 하지만 꿈치고는, 너무도 선명한 꿈.

이상. [별빛 속으로]를 본 후 몹시도 ‘꾸고 싶어진’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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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속 이야기, 그리고 그 속이야기 속 이야기. 또 다시 그 속으로의 이야기. 그렇다. [별빛 속으로]는 명백히 중층의 액자구조로 이루어진 영화다. 여기서 꼭 짚고 넘어가야 할 점. 이 영화에 등장하는 액자 안 그림들(각 이야기들, 또는 꿈, 초현실)은 방 한쪽에 걸린 채 감상되기만을 기다리는 그런 종류의 그림이 아니라는 것. 대신에 [별빛 속으로]는 ‘감상되기’라는 경로를 거스르는 역동적 틀 안에서 그림들을 이해하려 한다. 자체적인 시선을 지녔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바깥으로 자유롭게 흩날릴 줄도 아는, 일종의 살아있는 존재로 말이다.

이를 통해 [별빛 속으로]가 드러내고자 하는 것은 초현실과 현실 사이의 쌍방향적 소통 가능성이다. 물론 관건은 소통을 대하는 개인의 태도에 있다. 가상세계가 침투할 만한 공간을 내 안에 마련하면 할수록, 이른바 ‘꿈과의 대화’가 실현될 가능성은 더욱 커지는 셈이다. 초현실적 상상과의 부단한 만남이 삶 속에서 어떤 유연한 리듬으로 환원될 수 있다고 믿는다면, 그렇다면 내 몸에 ‘틈’을 열어두는 데 보다 관대해지자. [별빛 속으로]에서처럼, 꿈은 스며들만한 틈이 있는 곳을 향하기 마련이니까.

꿈과 나와의 은밀하되 즐거운 동거. 기적을 피워 올리기 위한 첫 단추는 거기서부터 꿰인다. 예컨대 죽음마저 함께한 사랑이야기가 한 남자의 잠재된 정념을 흔들어 깨우고, 그 깨워진 정념이 시와 사랑의 긍정적 역량을 믿게끔 해주며, 이 일련의 과정이 나아가 실재적 구원으로까지 이어지게 되는, [별빛 속으로]의 마법들처럼 말이다. 자, 이제 이 모든 것을 ‘영화’라는 액자 안에 담아두게 된 당신에게 기적이 찾아올 차례다. 시멘트를 비집고 땅 위로 기어이 올라선 한 송이 꽃의 힘을, 당신이 믿는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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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9.17


[별빛속으로]를 굳이 장르로 분류하자면 ‘판타지 멜로’ 정도 될 것이다. 그렇지만 이 영화는 판타지 장르로 규정되는 어느 영화와도 비슷하지 않다. 이 영화를 두고 이상용 평론가는 “감독의 자전적 체험에서 발로된 과거의 사연이 현재에 대한 전망으로 이어지고 있다”고 평하면서 [별빛속으로]는 황규덕 감독이 제공하는 ‘환상’이라고 말한다. 또한 김영진 평론가는 “무공해 상상력의 징표”라고 표현하면서 이 영화가 가지는 현재형의 상상력을 예찬하고 있다. 또한 필자가 아는 지인은 이 영화를 올해 발견할만한 중요한 한국영화로 꼽고 있다.
이 영화를 보고 난 직후, 아리송했다. 뭐가 좋다는 걸까. 아주 좋다고 하기에는 무언가 엉성하다. 두 번의 반전, 내러티브가 주는 쾌감은 있다. 그렇지만 주인공 수영이 신고 있는 신발은 뭐야, 그런 캔버스화가 그때도 있었단 말이야? 김씨가 타던 오토바이는 어떻고, 삐삐의 의상하며, 어쨌거나 러브 스토리 아니야? 죽은 이들이 맺어준 사랑, 죽음까지 사랑할 수 있는가의 시험? “귀신에 홀리는 듯한 사랑”을 내세우는 이 영화에서 그 시대의 무엇을 볼 수 있다는 것일까. 죽음에서 학생들을 구해낸 교수의 능력은 또 뭐냐, 생각할수록 머릿속을 파고드는 분명치 않은 이 영화 때문에 몇일째 기분좋은 두통이 계속 되고 있다.

경계의 남자

푸른빛 날갯짓을 하는 두 마리의 나비에서 시작되는 이 영화가 주는 쾌락은 분명 판타지에 있다. 더불어 내용 전개상 두 번의 반전(?)에 따라 밝혀지는 대담한 현실과 환상의 교차, 또는 그 경계에 있는 주인공의 시점은 강한 흡입력을 갖는다. “교수님! 작가의 상상력은 현실에 대한 일루전에서 시작된다는 니체의 말이 거꾸로 적용될 수 있나요? ‘작가의 상상력이 현실을 만든다’라고요.”라는 질문을 하는 주인공 수영은 환상과 현실의 경계에 있는 사람이다. 영화 속에서 현실과 환상 사이를 헤매는 인물들은 얼핏 떠올려봐도 수도 없이 많다.([수면의 과학]의 엉뚱한 몽상가 스테판, 환상을 보는 그 많은 공포영화의 캐릭터들, 그리고 현실과 환상의 경계가 없는 데이비드 린치의 영화!)

[별빛속으로]의 수영이 위치한 경계가 특별한 이유는 주인공의 현실과 환상이 삶과 죽음과 겹쳐있기 때문이다. 그는 실제와 같은 꿈을 꾸지만 그에게 그것은 한낱 꿈으로 규정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관객들에게도 그 꿈은 단지 꿈이 아니다. 영화 안에서 그 꿈은 진행형이기 때문이다. 그는 아내에게 말한다. “사는 게 꼭 꿈같지? 꿈이 아니라 거짓말 같아. 거짓말.” 그에게 진실은 ‘말할 수 없는 것’이다.

떨어지지 않는 공

79년 9월, 한 여대생이 학교에서 투신자살을 한다. 모나미 볼펜을 색깔별로 묶어서 열심히 필기를 하고, 여자와 경험도 없는, 교련복을 잘 입고 다니는 독문과 학생 수영을 존재하지 않는 공간으로 데려가던 그 여자는 노래를 부르면서 하늘을 날았다. 그리고 난 후, ‘죽었다고 규정된’ 그 여자가 자꾸 수영 앞에 나타난다. 여자의 지시에 따라 얻게 된 과외 아르바이트를 위해 만난 남자. 밤 열시에 테니스를 치던 그 남자는 자신에 대해서 ‘말하지 말 것’을 당부하면서 검은 오토바이 군단의 선두를 이끌면서 사라진다.

검은 오토바이 군단은 흡사 장례행렬이나 사신의 행렬같다. 그 운동장에서 수영이 하늘로 날려 보낸 공, 떨어지지 않는다. 시간에 구멍이 뚫렸다. 이제 영화의 시공간은 삶과 죽음, 그리고 현재와 과거사이로 무한히 확장한다. 현실에서 시작한 영화는 과거로 갔다가 죽음 안의 꿈속으로 갔다가 과거의 현실로 돌아왔다가 다시 현실안의 죽음의 환상으로 이어진다. 수영과 수지가 죽어가던 밤에 수지는 당구공을 하늘로 던진다. 다시 시작되는 폭격. 공은 땅으로 떨어지지 않고 꿈은 끝이 난다. 혹은 그들이 죽는다.

말할 수 없는 진실

수영이 과외하는 집을 처음 찾아가던 날, 하늘에서는 불꽃놀이가 벌어졌다고 라디오 방송의 아나운서가 말한다. 하늘을 감시하는 불빛으로 별을 볼 수 없던 시대, 말 한마디 잘못하면 잡혀가던 시대, 죽음의 깊은 그림자가 드리워져있던 시대. 진실은 죽음과 연결되어 있었다. 감독은 그 분위기를 현재형으로 확장시킨다. 시집을 낸 독문과 교수가 된 주인공이 아내에게 말할 수 없는 진실은 그 시대를 지나서도 유효한 죽음이라는 터부, 혹은 직면하고 싶지 않은 현실로 이어지고 있다. 사고로 매몰된 아이들은 왜 수영을 찾아왔는가, 수영은 왜 그들에게 그들의 죽음을 알려주기 전에 사랑 이야기를 시작하는가. 수영은 죽음을 경험했고 그 후로 시를 쓰게 됐다. 그리고 그 때부터 그는 쭉 죽음과 삶의 경계에 있었다는 이야기. 그것이 그의 말할 수 없는 진실이다.

같은 이름, 다른 사람

삐삐는 왜 자신의 이름은 버리고서 안타깝게 죽어버린 연인과 같은 이름을 가진 수영을 선택했을까. 현실에서 수지를 만났을 때 수영은 무슨 얘기를 했을까. 죽은 자들이 맺어준 그들은 왜 소통하지 못했을까. 그렇다면 꿈에서 수영이 사랑한 수지는 현실의 수지와 같은 사람일까, 다른 사람일까. 수영은 왜 오빠가 죽은 방식으로 죽어있는 수지를 본 걸까. 이 영화를 추천한 친구가 말했다. “국기에 대한 경례할 때 죽은 사람들만 움직이는 게 인상적이었어. 죽은 사람들만 살아 움직이고, 살아있는 사람이 꼭 죽은 것 같잖아.” 사는 게 죽은 것과 같았던 시대. 한없이 반복되는 질문. 분명하지 않은 영화.

이 영화를 본 몇 안되는 사람들의 평은 대체로 ‘느낌이 좋다’, 또는 '어떤 감정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이다. 첫사랑, 어떤 기억, 어떤 시간, 어떤 추억, 어떤 사람, 어떤 죽음, 어떤 사랑에 대한 어떤 느낌. 호러로 홍보해놓고 속였다는 사람도 있지만, 어떤 감흥을 주는 영화임은 분명한 것 같다. 일단, 여기까지. 그럼 이제 나의 일루전의 현시성에 대해 말해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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