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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건영

한 여자가 빨래를 넌다. 옥상 위로 펼쳐진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고 화창하다. 탁탁 털어 가지런히 줄에 걸고는 하나씩 집게를 꽂는 여자의 얼굴이 클로즈업되면서 영화는 끝이 난다. 바로 전 장면, 극중 처음으로 딸아이에게 밥을 차려주고는 같이 밥을 먹는 그녀, 그리고는 딸아이를 꼭 끌어안는 그녀는 지방강연을 마치고 막 집으로 돌아왔다. 거꾸로 재구성한 <어떤 개인 날>의 마지막 시퀀스다.
 

이숙경 감독의 <어떤 개인 날>은 이혼 1년차인 작가 ‘보영’의 일상을 따라가면서 여성의 고립과 상처를 보듬어주는 영화다. 감독은 보영이라는 여자의 며칠간의 행적을 지근거리에서 지켜보는 동안 싱글맘의 불안과 여성의 근원적 문제에 이르기까지 속 깊은 통찰을 보여주고 있는데, 철저하게 여성의 시각에서 그려낸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폐쇄적이지 않은 접근방식은 주목할 만하다. 말하자면 고립의 연원을 찾아내되 굳이 상처를 치유하고자 무리수를 두지 않음으로써 열린 결말을 지향한다는 것이다.



그동안 많은 여성영화들이 담으려 애썼던 자주적이고 주체적인 여성상은 곧잘 현실과의 괴리감을 매우지 못한 채 충돌을 일으키곤 했다. 여성영화가 소수영화의 범주에 머물러왔던 것도 이와 무관치 않을 것인데, 그에 반해 여성운동가 출신이라는 이력이 무색할 정도로 <어떤 개인 날>이 보여주는 여성상은 한결 현실적이면서 인간적이다. 이를테면 보영은 구차스런 감정에 얽매이지 않는 쿨 한 성격의 소유자처럼 보이지만 재혼을 앞둔 전 남편에 대한 감정의 찌꺼기는 여전히 남아 있고, 아이와 가정보다 사회활동에 더 열성적인 듯해도 실은 딸아이에 대한 애정이 차고 넘치며, 혼자서도 굳세게 살 것 같지만 사소한 일로도 친구에게 섭섭함을 토로하는 보편적인 여성이다. 따라서 이 영화의 미덕은 오로지 자연인인 여성에 집중해 이야기를 풀어나간다는 점에 있다. 이를 위해 감독은 인물들의 역할이 분산되지 않도록 지혜를 발휘하고 있는데, 보영 뿐 아니라 그녀와 대구를 이루는 상대방의 목소리까지 귀에 쏙쏙 박히는 것은 (가령 연수원 숙소 장면을 보면, 보영은 이미지로 정남은 사운드로 인물의 특징을 표현해낸다) 이 때문일 것이다.

강연을 맡아 지방의 연수원으로 간 보영은 같은 처지의 이혼녀 ‘정남’과 한 방을 쓰게 된다. 이때 두 여자가 밤을 가로지르며 술을 마시면서 속내를 털어놓는 긴긴 밤의 이야기는 여성감독이 아니면 도저히 뽑아내지 못할 흥미로운 장면의 연속이다. 그녀들의 속사정과 신변잡담 유의 수다가 뒤엉켜 난무하고 있음에도 보영과 정남이 주고받는 대사는 리듬감을 동반하면서 자칫 지루해질 여지마저 차단시킨다. 이처럼 낯선 곳에서의 하룻밤을 같이 지낼 동료이자 같은 처지인 두 여성이 경계하듯 마음을 조금씩 내보이고 교감하다가 누구는 이내 심사가 뒤틀리고 또 다른 이는 흐느껴 울기까지, 감독은 김보영과 지정남이라는 뜻밖의 배우의 걸쭉하고 재기 넘치는 연기를 통해 무겁지 않게 끌어간다. 오랜만에 맛본 대사의 찰기. 그것은 신인답지 않은 과감성과 뚝심으로 마치 연극의 한 장면처럼 연수원 시퀀스를 구성한 이숙경 감독의 공으로 돌려야 맞다.




보영은 그날 밤 이혼 후 처음으로 울었을 것이다. 자신의 마음을 간파한 정남의 충고가 마치 상처에 뿌려진 소금처럼 느껴졌을 테지만, 따지고 보면 그녀는 타인과 소통하는 데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었다. 전 남편을 만나도 오랜 친구를 만나도 하다못해 딸아이에게 조차도 그녀의 의사는 즉각적으로 상대에게 전달되는 법이 없었다. 아마도 오프닝에서처럼 거침없이 악다구니를 쓰는 이혼한 아줌마의 형상이야말로 최선의 방어책이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게다가 감독은 전 남편이 떠난 벤치에 홀로 앉은 보영을 롱테이크로 잡은 화면과, 유리창에 비친 정남과 함께 보여 지는 보영의 모습을 통해 여성의 고립과 상처와 소통의 어려움을 보여주고는 있지만, 그렇다고 명쾌한 해답까지 내놓지는 않는다. 그러나 바로! 이점, 같은 처지라는 이유만으로 상처받은 여성이라는 유사성만으로 동질감을 형성하고 느닷없이 속살거리며 연대하거나, 삶의 희망을 품고 쉼 없이 살아간다는 식의 억지스런 설정을 택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어떤 개인 날>은 의미를 성취한다. 한마디로 <잘 알지도 못하면서> <안다고 말하지 마라>는 것이다.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기만 해도 이토록 여성의 상처를 잘 그려낼 수 있는 것을.

다시 마지막으로 돌아가면, 긴 밤의 여로에서 돌아온 보영은 딸아이에게 “안전벨트”라고 속삭이며 행복해한다. 영화 내내 자신의 목소리를 높이지 않던 감독의 나지막한 전언에 다름 아닌 가장 빛나는 장면. 어쩌면 이제껏 그녀는 딸아이를 나의 안전벨트가 되어주는 존재로 인식하면서 스스로를 수동적 위치에 놓아버렸는지도, 또 여느 부모들과 마찬가지로 ‘아이 때문에 산다’는 식으로 숙명의 굴레에 갇힌 고달픈 삶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제는 자신 또한 아이의 안전벨트가 되겠다는 다짐인양 (마치 안전벨트를 채워주는 것처럼) 뒤에서 아이를 감싸 안은 보영의 표정이 한 없이 평화롭다.

‘어떤 개인 날’처럼 화창할 그녀와 이 땅 모든 여성의 삶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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