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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애
30분이면 족했다. 30분만 집중한다면 감독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있을 것이라는 직원의 안내방송 말이 맞았다. 월요일 아침인데도 불구하고 전석매진이라는 말이 나를 의외의 기대감으로 몰아넣은 것이 얼마 지나지 않아 그 기대감은 실망감을 감추지 못하고 추락해버리고 말았다.

알프스의 깊숙한 산 속 고즈넉하게 있는 수도원은 그 주위의 풍경이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속세를 벗어난다는 것이 무엇인지 카메라는 말하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카메라는 수사들의 옷자락이나 창문으로 스며드는 햇살에 초점을 맞춰 클로즈업하는데, 보이는 먼지까지도 아름답게 느껴질 정도다. 딱 거기까지, 거기까지는 영화가 좋았더랬다.

영화의 큰 흐름은 수사들이 독방에서 성경말씀을 읽으며 절제된 생활을 하고, 자란 머리를 깎고, 새로운 수사들이 주님 앞에 당신의 제자가 되겠노라 맹세를 하는 등 수도원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미묘한 계절의 변화에 맞춰 겨울에서 봄을 거쳐 여름, 가을, 그리고 다시 겨울이 되는 모습을 담고 있다. 가장 먼저 영화를 보면서 계속 방해를 받은 것은 중간 중간에 반복적으로 삽입되는 성경말씀의 일부 글이었다.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버리지 않는 자는 나의 제자가 될 수 없느니"라는 말 등이 지나치게 자주 반복되고 있었다. 영화 자체는 상당히 절제된 내용을 담고 있지만, 그 표현 방법은 과하게 넘치고 있었다. 비슷한 장면이나 말의 반복으로 나는 마치 지하철에서 "예수천국, 불신지옥"을 외쳐대는 사람들과 이 영화가 다를 게 뭐가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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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과 여러 관객들이 이 영화를 호평하고 있다. 그렇지만 나는 그 호평이 정말 제대로 받아 마땅한 것인지 의문이 든다. 이유인즉슨, 이 영화는 자기만족에 빠졌기 때문이다. 엔딩부분에 눈 먼 수사가 이런 말을 한다. "내가 보지 못하게 된 것 또한 주님이 나를 배려해주셨기 때문이다. 내가 눈이 먼 것 또한 내가 감당할 수 있기 때문이며, 이로써 주의 사랑을 나로 하여금 세상에 보여줄 수 있다. 나는 죽음이 두렵지 않다. 주님께 가까이 갈수록 행복하다" 내가 느끼기엔 자기위안으로 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지인과 종교에 대한 얘기를 하다가 종교의 가장 큰 역할은 자기위안이라는 결론을 내린 적이 있다. 즉, 슬픔을 견디게 해준다는 것이다.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돌아가셔서 슬프기도 하겠지만, 하나님의 곁으로 간 것이기 때문에 기쁘다는 것이다. 그래서 슬픈게 슬픈게 아니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인간이 종교를 찾는 가장 큰 이유가 아닌가 싶다.

이 영화는 비슷한 위치에 있는, 그러니까 수녀, 스님, 기타 종교에 헌신하는 사람들을 위한 일종의 위로 차원으로 만든 영화라고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만큼 소통의 범주 또한 좁다. 나는 그 카테고리 안에 있는 사람이 아니어서 그런지 그 위로를 이해하기가 버거운 부분이 많았다. 찍는 사람, 찍히는 사람, 보는 사람이 그 '위대한'이란 말을 얼마나 이 영화에 맞고, 맞다고 생각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수사들은 자신의 절제를 통한 신과의 교섭이 얼마나 높아져가는지를, 감독은 16년을 기다려 앞으로도 없을 수도원의 모습을 담는 고귀한 일이라는 자기만족에 빠져서 한 것으로밖에 여겨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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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시원

1. 김미례 <외박>(2009)

김미례 감독의 <외박>은 510일간 이랜드 총파업을 이끈 비정규직과 정규직 여성노동자들간의 연대의 힘을 보여주는 영화였다. 이 영화는 당연히, 그들에게 돌아가야할 영화일 것이다. 이 공동체 의식은 아름다운 것이었다. 정규직과의 차별철폐를 외치는 비정규직 편에 정규직 여성노동자들이 나서 장기 투쟁을 이끌어나가는 모습은 낯설고도 감동적인 것이었다. 결국 정규직 지도부들의 일괄 총사표를 전제로 이들을 전원 복귀조치하게된 결말에 이르면 더욱 그러한 것이다. 영화는 초반, 막 투쟁을 위한 그녀들의 외박이 시작되는 시점의 막연한 흥분감들을 유쾌하게 스케치하며 곳곳 쉬어가는 틈을 이용해 정규직과 비정규직, 비정규직 180일 일수를 넘는 자들과 넘지 못하는 자 등 각각 다른 입장에 있는 그녀들의 사적인 속내들을 질문하는 인터뷰를 인서트하며 즐거움과 그 이면의 미세한 갈등들을 긴장감있게 교차시켜 나간다. 영화는 특별히 하루가 지나고 밤이 되었을 때, 이들이 투쟁(외박)을 결심하는데 있어 매일같이 결단을 해야하는 지점의 풍경을 인상깊게 보여준다. 마트에서 외박을 할 것인가, 남편과 아이들이 있는 가정으로 들어갈 것인가. 낮동안 지속되었던 공동 집회와는 또 다른 개인적 선택이 요구된다. 영화는 거의 대부분을 마트의 시멘트 바닥에 버티고 있는 여성들의 선택을 지지한다. 지금 하고 있는 일이 맞고, 지금이 아니면 안될 일이라는 서슬퍼런 결단임에도 겉핧기로 보면 그녀들의 활기찬 모습 때문에 마치 그녀들이 집안을 내팽개치고 될대로 되라, 여기까지 왔는데 포기할 수는 없다는 오기식으로 비취기도 한다. 하지만 영화의 중반부부터 이런 모습은 점점 사라진다. 투쟁이 장기화될 기조가 보이자 민주노총 지도부의 공식적 지원선언과 대선 당시 권영길 후보를 앞세운 민주노동당의 정치적 연대를 위한 개입이 본격화되고, 예상대로 공권력이 투입되면서 영화엔 불가피한 폭력적 요소들이 연출된다. 팔과 팔로 짜여서 누운 채 버티고 있는 여성들의 몸 위로 경찰들의 뜯어내기(?)가 시행된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여성 경찰들을 동원한 모습은 웃지못할 풍경을 연출한다. 그녀들은 끌려가며 '니들은 엄마도 없냐'는 말을 반복한다. 이 지점은 혼란스럽다. 후에 면목 홈에버 매장을 점거했을 때에도 한 전경과 대화하는 신을 통해 '엄마 보고 싶어?'란 말이 얼핏 들려온다. 그녀들은 지도부가 자신들을 '아줌마'라 부르는 것이 격노하지만 집회에서는 스스로 '아줌마'들이 이렇게 나섰다라고 말한다. 나는 영화가 이 점을 지목해서 보여주는 것을 생각해보았다. 그녀들은 분명 공적 노동자로서 집회에 나왔다. 하지만 그녀들은 여전히 가정주부라는 역할에 매여있다. 이 투쟁은 민주노총 지도부들의 싸움과는 달리, 그녀들에겐 완전히 공적인 싸움이 아닌 것이다. 그녀들은 마치 이 두가지의 역할론에 대해 함께 투쟁하고 있는 듯한 인상을 준다. 게다가 그녀들은 공적으로 노동자이면서 사적으로는 엄마일텐데, 이들이 결국 사회에서 불리는 말은 '아줌마'로 통일된다. 이 단어는 공적이지도 사적이지도 않은, 그 성격이 불분명한 특정 집단을 표현하는 익명성의 단어이다.


영화는 이 '아줌마'란 단어가 불편한 여성 노동자들이 자신들을 사회에 설득시켜야할 불가피한 때에 스스로 사용하는(인정하는) 모순을 보여줌으로 그녀들이 사회에 처한 모순적인 위치를 그대로 드러낸다. 영화의 후반부 물대포를 맞고 농성 천막이 부숴지고 지도부가 체포되는 모습들은 앞서 보여주었던 활기찬 풍경에 담긴 이상들을 조금씩 지워나간다. 투쟁이 장기화되면서 점차 생계유지에 지쳐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결국 몇몇은 떠밀리듯이 돌아가지만, 영화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남아있는 정규직, 비정규직 여성 노동자의 끈질긴 투쟁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들은 생계비 마련을 위해 물품 판매에 나서기도하면서 사측과의 협상의 시점을 기다리고 또 기다린다. 마침내 타결이 이뤄진다. 올림픽 매장을 점거한 지 정확히 510일만의 일이다. 정규직 지도부들의 결단을 요한 처사였다. 이 결말은 일반 관객에게 직접적인 감동을 준다기보다는, 끝까지 남아 싸운 사람들과 그들을 위해 자신을 희생한 지도부들의 희비 교차를 보여주며 어찌 보면 차가운 현실의 느낌을 전달하기도 한다. 하지만 자신의 이익을 대변하는데 치중하지 않고 보다 공공적으로 중요한 것의 가치를 믿고 선택한 자들에게만은 다 말할 수 없는 벅찬 감동을 선사할 것이다. <외박>은 여러 불리한 변수들 가운데서도 결국 불합리한 사측과의 투쟁을 결단했고 감당해냈던 그녀들, 공적, 사적 위치 어디에서도 온전히 자신만의 자리와 합당한 이름을 부여받지 못했던 그녀들의 소중한 일기이며, 결국 그녀들의 공동체를 위한 영화일 것이다. 활동하는 집단에 활동적으로 참여한, 연대하는 풍경에 동일하게 연대하여 들어간 카메라는 현실의 투쟁을 지속시키는 일에 기여한다. 여기에서 영화와 현실의 구분은 무해하다. 그녀들은 이 영화를 기뻐하고, 이 영화도 그런 그녀들을 기뻐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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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정재훈 <호수길>(2009)

이 다큐멘터리 영화는 전체가 완전한 공포(현실)영화이다. 초반부, 철거가 진행되기 이전의 마을의 고요하면서도 평화로운 풍경을 보여주다 후반에 이르러 시간이 어느정도 흐른 후 철거가 진행되면서부터의 황폐한 풍경을 보여 주지만, 내 느낌으로 이것은 대비적인 풍경이 결코 아니다. 초반부는 너무나 일상적이면서도 한적한 풍경 속에서 오히려 은밀한 암시들을 보여준다. 영화는 느리게 걸으며 이따금씩 먼산을 올려다보는, 근심을 다 헤아릴 수 없을 듯한 노인의 무표정과 골목을 밟고 뛰어다니며 서로 쫓고 쫓는 놀이에 치중하는, 근심이라고는 헤아릴 수조차 없는 어린아이들의 무동기적 흥분의 표정을 대비시킨다. 초반의 이러한 방식은 우리를 이상한 느낌으로 몰아간다. 노인의 기우뚱한 근심어린 뒷걸음과 카메라를 향해 돌진하는 어린아이들의 대단스런 앞걸음질, 완전한 정적을 연출하는 롱 테이크의 불길한 카메라와 귀를 째는듯한 비명과 이보다 더 의도가 없을 수 없는 날것의 표정에 거의 참여하는듯 이들과 마치 함께 뛰노는 듯한 정신없는 컷을 이어가는 카메라의 대비는 우리에게 지속적이고 자연적인 관찰에서 얻은 섬뜩한 지점들을 그대로 노출시킴으로 후반부 기계소리로 인한 공포감보다 외려 더 섬찟한 지점을 선사한다. 가히 일상(현실)의 스펙터클이라 불릴만한 것이다. 영화엔 낮과 밤의 이미지와 그 각각의 소리들이 대비적으로 연출된다. 낮의 빛과 밤의 어둠, 낮의 아이들의 소리와 밤의 개짓는 소리. 이것은 개발 이전과 이후 즉, 전반부와 후반부를 기이하게 연결짓는다. 전반부에서 동네의 건물을 쏘아대는 듯한 강렬한 낮의 빛은 후반부 포크레인이 철거를 위해 뿌려대는 강렬한 물줄기와 연결되고, 동네 전체를 깨어내듯 날카롭게 질러대는 아이들의 (즐겁고도 무서운)비명소리는 후반부 귀를 쨀듯한 포크레인 소리로 연결된다. 단순히 아름다움이 철거의 비극적 풍경으로 파괴되었다고 말하기에 이 두가지 이미지와 소리들은 현상적으로 사실 유사해서 약간 섬찟하다. 밤의 완전한 시각적 어둠 상태에선 저 멀리 작은 네모난 유리창문으로 비쳐 보이는 불빛이 존재한다. 이 불빛은 밤이 깊어가면서 점점 작아지거나 점차 어두워진다. 철거가 시작되면서 이 동네 주택들의 유리창은 완전히 사라진다. 빛을 반사시키던 유리가 없고, 완전히 뚫린 시멘트 창들이 그보다 더욱 어두운 내면을 드러내며 완전한 시각적 눈멀음의 상태로 우리를 안내한다. 여기가 주택의 안인지 바깥인지 우리는 감지할 수가 없다. 어느 순간 카메라가 꽝꽝 닫히는 문의 소리들을 들려주며 이곳이 사람이 사라진 집의 내부임을 드러낸다. 순간적으로 우리는 완전한 공포에 노출된다. 언제부터 카메라가 이 안에 들어와있었던 것일까. 우리가 지금까지 느낀 어둠과 정적이란 어떤 현상이었던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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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빛과 사람이 소멸한 밤에 자연발생적인 소리에 집중한다. 바람소리, 그리고 개짖는 소리. 개들은 한 곳에서 누군가 짖으면 여기저기서 따라 짖는다. 그들은 마치 교신하면서 서로의 존재감을 드러내며 소리로서 연대한다. 이 집단적인 짖음은 영화 전반부의 낮, 어린아이들이 놀이를 하며 질러대던 중첩된 소리들의 연결시킨다. 아이들이 떠난 자리를 대신하고 있는 개들의 함성. 영화엔 사람들이 나오지만 그들의 행동력은 등장하지 않는다(오히려 행동력은 개들로 인해 실천된다해도 과언은 아니다). 사람은 마을의 풍경의 하나로서 등장할 뿐 동네가 철거될 것을 알고는 있는지, 이들은 반대 투쟁을 했었는지조차 전혀 알길이 없다. 카메라는 '경축, 재개발'같은 플래카드만 무심하게 보여줄 뿐이다. 사람이 완전히 사라진 마을 안에 혼로 남아 마치 레지스탕스처럼 동네의 최후 풍경을 날것으로 담아내는 카메라는 완전한 매체 그대로의 느낌, 즉 사람이 없이도 여전히 그 자리에 남아있는 카메라의 느낌을 준다. 하지만 감독은 카메라를 세워둔 것이 아니라 늘 이 카메라와 함께 다녔다고 말했다. 즉 직접 체험한 풍경만 담겼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조차도 물질적인 느낌이 압도적이다. 여기엔 세상의 변화를 관찰하고도 참여하려는, 기록하면서도 연출하려는 카메라의 이중적 욕망의 경계가 그대로 노출되어있다. 시네마베리떼와 다이렉트시네마의 경계가 무너진, 아찔하면서도 통쾌한 미학이 드러나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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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bondage.dwc.cc BlogIcon bondage  수정/삭제  댓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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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1.08.09 0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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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종]_박성배

공중파에서 방송되는 내레이션의 친절함에 익숙하기 때문일까. 영화는 인디펜던트 다큐 특유의 불편함으로 첫 시작부터 한 남자가 언성을 높인다. 어딘가 이해관계가 심하게 어긋나 보이는 이들의 모습에서 대화의 내용은 뒷전이고, 소리치는 목소리가 먼저 뇌리에 박힌다. 이 시작이 앞으로 진행 될 이야기의 전체적인 톤을 설정한다.

사건의 발단이 된 5.18 광주 민주화 운동 관련 미신고자 385명의 처우에 대한 뉴스가 보도된다. “사망하였거나 행불되었으나 당국에 보상받지 못한 이들에 대해 5.18 기념재단과 유족회는 본인이나 가족이 연락해 올 경우 명예회복과 5차 보상을 돕겠다”고 한다. 하지만 뉴스에서 보도된 것과는 달리 실제 5.18 관련 단체들은 행방불명자들을 인정하는데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다.

명단에서 자신 아들의 이름을 찾은 위사요씨는 안도에 가슴을 쓸어내린다. 하지만 명단에 이름이 올라갔다고 해서 보상을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형 집행 정지.” 자료에 있는 그의 마지막 기록은 여기까지다. 그 후 그가 행방불명 된 상태다. 그러나 그의 실종은 5.18 운동 관련으로 인정되지 않고, 행불자 가족회는 기각된 사유와 관계 공무원 및 경찰 조사에 대해 열람할 수 있도록 해 달라고 요구했으나 심사위원들의 신원이나 심의에 대해서는 공개를 하지 않고 있다. 원인도 모른 채 “안 된다.”라고만 하니 이 억울함을 어디서부터 풀어나가야 할지 막막하기만 하다.

한 걸음도 물러설 수 없는 팽팽한 접전 속에서 현장의 말투를 알아듣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감독이 인물의 간단한 정보를 밝히는 것 이외에 자막을 쓰지 않았던 이유는 불가피하게 생기는 가치 개입을 막기 위함이다. 관객으로서 나는, 유족회들이 정의하는 ‘광주 민주화 항쟁의 시기와 관련이 없는’ 철저한 방관자이다. 최대한 이성적으로 행불자들의 상황을 대변하려는 김정길 회장과는 달리 5.18 관련 단체들은 격분해 있다. “5.18이 자선단체도 아니고, 그 당시 행불자면 다 5.18운동 관련 행불자인가?!”

광주는 특별한 곳이다. 그것은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모든 국민이 가슴속으로 조의를 표하고 있을 것이다. 국가 유공자들의 보상금으로 세워진 5.18 기념재단. 어쩌면 그 곳에 들어오려는 민주화 운동 시기에 행방불명된 피해자들에 대한 배타적인 태도는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5.18 기념재단을 비롯한 단체들의 지나친 피해의식은 오월정신을 변질시키고 있다.

왜 그렇게 명예회복을 원하는 행방불명자 가족회를 적대시하는가? 감독은 이 물음에서 민주화 운동 이후 방향을 잃은 광주의 고착된 시민의식에 대해 문제제기를 한다. 건드리면 맞아 죽을 것 같아 모두가 쉬쉬하는 분위기 속에서 관용의 자세는 찾아볼 수 없다. 그들은 지켜나가야 한다. 5.18로 희생된 그들의 가족과 자신의 인생에 떳떳하기 위해 민주화의 기상을 더욱 드높여야만 한다. 하지만 오늘날 그들의 고착된 태도와 숭고한 오월정신은 부조화를 이룬다. “광주인이라면 다 알죠~? 518 대리운전!” 명쾌한 결말이다! (관객심사단_ 황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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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를 키워봐서 알아요]_이우정

필름의 입자 속으로 부서지는 햇살이 포근하다. 그 속에서 한 여선생이 어린 소녀를 바라보고 있다. 금방이라도 울어버릴 것 같은 표정. 머리카락을 스치며 돌아보는 아이는 그녀를 보며 미소 짓는다.

영화는 두 자매를 주축으로 다른 이야기가 진행된다. 초등학교 교사인 다은은 맡은 반 학생인 아영에게서 유독 눈을 뗄 수가 없다. 아영에게 알 수 없는 감정을 느끼고 난 이후로, 그녀는 남자친구와의 관계에도 싫증이 나고 혼란스럽기만 하다. 한편, 다은의 동생 유은은 남자친구와의 이른 이별 후 공중에 붕 떠 버린 상태가 되어 어찌할 바를 모른다. 답답한 마음에 채팅으로 만난 남자와 모텔에 가 보기도 하지만, 무의미한 행동을 반복하는 자신의 모습에 화가 난다.

이 영화는 금단의 영역이 없다. 아영은 성적인 본능을 숨기지 않는다. 그 어린아이 특유의 천진함에 어른들은 할 말을 잃는다. 유은의 전 남자친구는 소파에 누워있는 다은에게 시선이 간다. 쓰러져 있던 유은은 자신을 깨운 언니의 남자친구에게 달려들어 키스를 한다. 아영은 화장실 창문에서 낯선 아저씨를 쳐다본다. 그리고 가장 강력해 보이는 영화의 메인 에피소드인 여선생과 여제자의 관계는 보는 것만으로도 야한 기분에 휩싸인다.
사람들은 자신의 발밑에 본능을 숨겨놓고 있다. 어느 날 내가 밟고 있던 것의 존재를 의식하게 될 때, 누구나 다은의 심정이 될 수 있다. 애들같이… 개를 키워 보지 않아도 그쯤은 알 수 있다. (관객심사단_ 황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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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율]_조태희


눈물 없는 이별. <조율>은 한 여자가 이별을 말하면서 시작한다. 그런데 이별선언을 하는 여자치고는 그 표정이 너무 평온하다. 사뭇 사랑하기 때문에 헤어진다는 통속소설의 공식을 깨달은 표정이다. 여자는 독백으로 과거 애인과 얽힌 추억을 풀어놓는다. 그녀가 기억하는 건 기승전결이 있는 서사가 아니라 이미지의 편린들이다. 끈적끈적한 여름, 건반이 망가진 피아노, <시네마 천국>의 메인테마, 그리고 첫 사랑은 나눴던 날 달뜬 애인의 얼굴과 그날의 창밖으로 떨어지던 빗방울과 낙엽들까지. 여자는 낙엽을 그러모으듯 지난날의 이미지를 떠올린다. 그녀에게 사랑은 동적인 것이 아니라 정적인 것에 가깝다.

흥미로운 것은 이 영화의 연출이다. 9분 동안 이어지는 여자의 독백을 원 씬 원 컷으로 찍었다. 한 번의 호흡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카메라는 자연스레 빛의 변화를 잡아내게 된다. 밝음과 어둠이 교차하는 실내는, 감귤 빛에서 짙은 녹색 계열로 바뀐다. 클라이맥스에 이르러서는 해사한 빛에 감싸인 여자의 화사한 얼굴이 드러난다. 그때의 여자 얼굴은, 베르메르의 회화에 소녀들에 버금갈 만큼 청초하다. 가만히 보면 원목가구로 구성된 실내장식과, 창에서 쏟아지는 햇살, 그 햇살을 받아 밝게 빛나는 여자의 옷과 얼굴은 베르메르의 회화를 쏙 빼닮았다. 분명 영화 제목 ‘조율’은 이별을 말하는 여인의 감정변화뿐만 아니라 빛을 '조율‘하는 카메라의 기교를 뜻할 것이다. (관객심사단_ 이도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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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사이?]_김조광수

서로의 애인을 만나러 가기 위해 버스에서 동행하는 석이와 어느 여자. 각자의 애인에게 줄 선물을 준비하고, 설레는 마음으로 같은 목적지로 향한다. 같은 공간에서 상반되는 장면이 연출되는 두 남녀의 모습이 보인다. 사랑이란 동일한 감정임에도 동성애와 이성애가 나타내는 심리적인 표현 방식은 서로 다르다. 여자는 애인을 만나 음식을 먹여주기도 하고, 다정한 모습으로 있었지만 석이의 모습은 다소 심각한 표정으로 무언가를 적고 있다. 석이는 관계를 적는 난에 애인이라고 써놓고도 무척 후회하는 듯, 면회 신청서 한 장을 더 요구한다. 하지만, 신청서가 얼마 남지 않은 이유로 거절당하고, 석이는 애인이란 단어를 가로로 두 줄을 그어 놓고 뒷면에 남아있는 글씨체까지 까맣게 지운다. 애인이지만, ‘애인’이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없는 동성애 커플이다.

그들은 호칭의 문제뿐 아니라, 동성애 커플로 커밍아웃하는 과정에서도 큰 충격과 변화의 과정을 맞이한다. 거리에서 다른 연인들처럼 손을 잡고 길을 걷거나, 사람들 앞에서 연인이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없는 민수와 석이. ‘친구사이’라고 생각했던 석이와 아들의 관계를 알게 되는 민수 어머니. 또한, 남자친구가 게이라고 고백하며, 자신이 남자가 아닌 것이 슬퍼하는 여자. 그 앞에서 자신은 여자가 되고 싶다고 말하는 석이. 상반되는 그들의 이해관계는 극으로 치닫는다.

“당신은 두 눈을 가졌지만, 만약 외눈박이들이 사는 세상에서 살아간다면, 사람들은 당신을 어떻게 생각할까?” 다수의 이성애자로 구성된 세상에서 살아가는 성적 소수자들의 모습을 되짚어 생각하는 물음이다. 이성애자와 동성애자 모두 사랑이라는 공통분모를 가졌다. “엄마, 난 남자가 좋아요. 그래도 난 웃을게요. 남들보다 조금은 힘들겠죠.”라고 말하는 민수의 고백처럼, 이 영화는 성적 소수자의 이야기를 다루었지만, 결국 인간 대 인간의 사랑으로 갈등을 이겨냈다. (관객심사단_ 박다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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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End]_백현진

각자의 에피소드에서 하나같이 곤란함에 처한 인물들. 누군가를 린치하는 꿈에 시달린다. 본인 또한 현실에서 린치 당한다(박해일). 뭐든 쉽게 되는 대로 생각하는 경솔한 세상에 "왜들 이러시는 거예요?"라고 묻는다(엄지원). '나는 나고 너는 너다.'라는 식으로 철저히 분리된 세상. 다름과 같음이 공존한다는 확신으로 그 세상을 버틴다(류승범). 정말로 용서했다는 데도 믿지 않는 세상에 성난 목소리로 자신을 변호한다(문소리).

그 곤란함 앞에서 보는 이 또한 난처하다. 인물이 그렇게 행동하는 이유를 명확하게 설명하는 장면이 부재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자신은 망각의 명수라며 소스라치게 외치는 문소리는 대체 지금 통화 중인 엄마와 어떤 사건을 겪은 것인지 알기 어렵다. 이 영화에서 서사는 안중에도 없다. 그러곤 대뜸 인물들의 얼굴로 바투 다가가는 카메라. 시선을 최대한 카메라에 고정한 인물들의 눈가가 점점 촉촉해진다. 번역되기 어려운 표정. 그 위로 타이틀 'The End'가 뜬다.

영화는 부러 슬픔의 맥락을 결여한 것처럼 보인다. 왜 하필 그 자리에 우리를 앉혀놓고는 난해함을 굳이 체험하게 하느냐고 따져보자. 그때 영화는 반문한다. "이해하면 안 되는 거 아닙니까?"(박해일) 더 자세히는, "이해하기가 그렇게 쉬워요?" 엄지원의 말이다. 그녀는 책을 읽다가 도저히 "모르겠다"라고 말한다. 그 말은 자백하는 투에 가깝다.

이해하기란 단번에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도 이해하는 덴 다들 능통하다. 그러나 그게 단지 이해한 척이라면? 무지라는 구멍을 메우기 위해 자신을 속인 것은 아닐까? 모르는 상태는 견딜 수 없이 불쾌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재빠르게 봉합하고는 마치 모든 걸 완료한 양 돌아보지 않는다. 영화는 두 번째 관람을 전제로 한 듯 시작한다. 모른다는 것을 인정하고 느긋해지자. 거푸 상상하고 생각하자. 그때 비로소 열릴 영화다. (관객심사단_ 정아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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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nippleplay.dwc.cc BlogIcon nipple play  수정/삭제  댓글쓰기

    좋은 물건 좋은

    2011.08.10 0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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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년간 죽을 힘을 다해 침묵 속에 살아남았고, 10년간 가슴을 쥐어짜며 떠들어댔지만 공식적으로 그녀가 얻은 것은 패소 판결이었다. 대법원의 패소 판결 직후 송신도 할머니는 말한다. 그래도 “나의 마음은 지지 않았다”고.

10년간의 투쟁 끝에 비공식적으로 그녀가 얻은 것은 ‘마음’이다. “신도 믿지 않고, 사람도 믿지 않는다”는 송신도 할머니를 사람들의 울타리 안에 자리 잡게 한 것은 ‘재일 위안부 재판을 지원하는 모임(이하 지원모임)’의 사람들이었다. “바늘로 찔러도 피한방울 안 나오게 생긴 사람”이었다고 송신도 할머니의 첫인상을 회상하는 지원모임의 사람들. 처음부터 그들에게 송신도 할머니가 요구한 것은 ‘마음’이었다. “너는 가정도 있고 새끼들도 있는데 자기 일처럼 내 일에 뛰어들 수 있겠느냐”고 다그치는 할머니에게 선뜻 약속의 손가락을 내어주던 그들은 약속대로 송신도 할머니에게 마음을 주었다. 그 마음은 하나의 파장이 되어 일본을 덮었고 이제 한국에 전해질 차례다.



너무 많다고? 아직 충분치 않다!

이 영화에 대해 말하고 싶은 것이 있냐는 관객의 질문에 안해룡 감독은 “많은 사람들이 이 영화를 봤으면 좋겠다. 주위 분들에게 일본에 계신 욕쟁이 할머니를 소개해 달라.”고 했다. “일본 위안부 문제는 3.1절이나 광복절 아이템”이지만 자신이 10년간의 지원모임의 영상기록물에서 찾은 것은 “할머니와 지원모임 사람들과의 관계”라고 짚어준 감독은 이 영화의 특별함에 대해 알리고 있다.

선생님의 손에 이끌려 극장을 찾은 지루함을 감추지 못한 몇몇 학생들의 말처럼 종군 위안부에 대한 영상물은 많다. 대중에게 알려진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변영주 감독의 <낮은 목소리>시리즈와 앤서니 길모어 감독의 <잊혀진 증인을 찾아서>, 김동완 감독의 <끝나지 않은 전쟁>이 있다. TV용 영상물과 대중에게 알려지지 않은 소규모 작업들까지 더한다면 그 양이 얼마가 될지 잘 모르겠다. (필자의 지인도 학교 과제물로 ‘나눔의 집’을 다룬 다큐멘터리를 만든 적이 있다.)


역사적 트라우마를 다루는 방식

작년 말, 미국의 박스오피스는 홀로코스트를 다룬 영화들로 채워졌다는 기사가 떴다. 톰 크루즈 주연의 <발키리>를 비롯해, <줄무늬 잠옷을 입은 소년>, <아담 레저렉티드(Adam Resurrected)>, <더 리더(The Reader)>,<디파이언스>등의 작품들을 소개하는 기사였다.

이미 여기저기서 논의된 대로 21세기는 홀로코스트 문학과 홀로코스트 산업이 홍수를 이루고 있다. 네오이마주에 개재된 <부재, 상실, 그리고 1980년 5월 18일 광주: 5.18의 영화적 재현과 그 한계>라는 글에서 임경규 교수는 “홀로코스트 문학의 홍수와 그에 따른 적절한 재현 방식의 모색은 상징적인 차원에서 볼 때 아우슈비츠 희생자들을 애도하고 그들을 양지바른 곳에 묻어주고자 하는 사회적 의식(ritual)이라 할 수 있다. 이 사회적 추모의 과정 속에서 폭력적 과거는 현재형의 언어로 수없이 반복된다. 역사적 트라우마는 과거형으로 기억될 수 있는 현상적 경험의 영역을 초과하는 리얼의 침전물이기 때문이다. 이 반복은 기억 주체의 의지적 반복과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기억이 주체를 압도한다. 기억의 반복적 침략은 주체를 과거 속에 함몰시키기도 하지만 그것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해주기도 한다. 그러기에 과거에 대한 추도와 장례식이 가능한 것이다.”라고 쓰고 있다.


투쟁과 치유의 시간들의 기록

홀로코스트를 다룬 문학을 비롯한 예술 작품은 해마다 전 세계적으로 끊임없이 나오고 있다고 한다. 역사적 트라우마를 반복해서 복기함으로써 세계는 망각을 통한 기억을 하고 있는 듯하다. 우리나라에서 종군 위안부를 다룬 작품들의 시선들 또한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변화해왔다. 95년 변영주 감독의 <낮은 목소리>가 ‘나눔의 집’에 모여 사는 위안부 할머니들의 현재와, 이들의 증언을 통해 처참한 과거의 역사를 복원하는데 집중했다면, 2008년 김동원 감독 <끝나지 않은 전쟁>은 세계 각지의 일본군 위안부에 대한 역사적 고증을 담은 다큐멘터리로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아시아를 넘어선 세계의 문제로 각성시키고 있다. 그리고 2009년 안해룡 감독의 <나의 마음은 지지 않았다>는 10년이 넘는 투쟁의 시간이 송신도 할머니에게 자신을 이해해주는 사람들로 인해 마음의 상처가 치유되는 시간이 되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물론 “겁나게 씩씩한 욕쟁이 송신도 할머니”의 모습과 환하게 웃으며 일본 노래와 한국 노래를 섞어 부르는 ‘나눔의 집’ 할머니들의 모습은 아픈 역사를 간접 경험한 세대에게 마음의 빚을 조금이나마 덜어주는 면죄부가 될지도 모르고, 어떤 비극들은 ‘홀로코스트 산업’이라 일컬어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상업적인 이익을 위해 이용될지도 모른다. 2007년 <화려한 휴가>가 개봉했을 때 5.18에 대해 논의되던 것들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그에 따른 적절한 재현 방식의 고민과 모색은 필요하겠지만 오늘 다시 종군 위안부에 대한 또 다른 시선을 만나는 일은 반갑기 그지없다.

16세에 종군 위안부에 끌려간 송신도 할머니는 일본의 여고생들 앞에서 증언하던 날 유난히 눈물을 참지 못하고 목이 매여 말을 잇지 못했다. 그녀가 힘겹게 내뱉은 말은 “다시는 나와 같은 일을 겪는 아이들이 없기를 바란다”는 것이었다. 여러 집회를 통해 “전쟁을 하지 말라”는 메시지를 전해 온 송신도 할머니. 그녀는 결코 지지 않았다. 그녀는 잊지 않았고, 살아남았고, 이야기를 전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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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연하


<24시티>는 <소무> <플랫폼> <세계> <스틸라이프> 등을 만든 지아장커의, 다큐멘터리 형식을 띤 영화이다. 나는 이 영화를 작년 시네마 디지털 서울 영화제에서 처음 관람했다. 이쯤에서 고백할 것 한가지. 나는 지아장커의 영화들을 정말 좋아하고 존경하며, 그가 각종 비평에서 받는 대단한 찬사들에도 크게 동의하고 있다. 그런데 <24시티>는......보고 나서 잘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 솔직해지자면 좀 지루했다. 다큐와 극영화의 경계를 허물고 유명한 배우들을 마치 청두의 노동자들처럼 연기시켜 인터뷰를 한 작업에 대한 놀라움은 있었지만, 그래서 무엇을 위해 앞서 말한 작업들을 한 거지? 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렇게 찜찜한 마음을 영화에 갖고 있던 중 다시 영화를 보았다. 두 번째 관람 후 나는 '아, 두 번 봐야 할 영화였구나.' 라고 직관적으로 생각했다. 여전히 모호했고, 그러나 감동적이었다. 영화는 과거 찬란했던 때 청두에 몸담고 노동했던 다수의 노동자들과, 그들의 자식으로 태어나 현재의 중국을 살아가는 젊은 세대의 사람을 인터뷰한다. 이 중엔 진짜 노동자도 있고 (<색, 계>의)조안 첸, (지아장커의 전작 대부분에 나온)자오타오와 같은 배우들도 있다. 이 지점에서 다큐와 극영화는 기묘하게 서로의 몸을 합친다. 그리고 그 몸에 내러티브의 전개에 분열을 내고 모호함을 더하는 장면들까지 겹쳐진다. 노동자들은 쑥스런 얼굴로 카메라와 눈을 맞추며 오래도록 서 있고, 어릴 적부터 여기서 컸다는 어린 여자아이는 밤거리가 내려다보이는 옥상에서 롤러스케이트를 탄다. 조용히 응시하는 사람들과 끊임없이 말을 뱉어내는 인터뷰이들과 아련함을 자아내는 시들과 또 다른 영상들이 합쳐질 때, 영화는 그만의 리듬감을 갖고 움직인다.

하지만 지아장커는 '영화적 형식'을 혁신하는 데서 멈추는 감독이 아니다. 그에게는 영화만큼 윤리와 예의가 중요하다. 24시티는 우리가 쉽게, 혹은 함부로 영화 속 대상들에게 감정이입하게 하지 않는다. 나는 현실을 담는 다큐멘터리가 가져야 할 가장 진정한 자세는 바로 이런 것이라 생각한다. 관객은 참을성 있게 그들의 쉼없이 이어지는 말을 들어야 하고, 때론 흐름을 깨는 여러 장면들에 몸을 맡겨야 한다. 인내심 없는 관객이었던 나는, 첫 관람 때 아마 '듣기'에 실패했을 것이다.

또 하나 인상 깊게 느꼈던 것은, 과거를 노스탤지어의 감정(만)으로 바라보지 않는 영화의 시선이었다. 과거를 떠올려 재구성하고 추억하는 영화들은 필연적으로 그 시간에게 향수를 가질 수 밖에 없다. 잊혀져 가는 것들에 대한 향수병을 앓고 그를 불러내어 오는 것은 예술가의 숙명이라고도 생각한다. 하지만, 때로 그 병은 영화가 더 나아가지 못하는 독이 된다. 영화가 존재하는 시점은 '지금 여기', 즉 현재다. 무턱대고 과거를 그리워하고 현재를 지탄할 때 그 영화는 자기부정의 함정에 빠지기 쉽다.


지아장커는, 분명 과거를 생각하나 '그래. 그 때가 좋았어.' 식의 단순한 노스탤지어적인 생각으로 끝맺지 않는다. 다만 그는 안타까운 마음으로 노동이 그만큼의 가치를 지니고 있던 시대를, 시간을 추억하고, 현재의 시점에서 재구성한다. 그리고 이제 과거와는 다른, 나름의 방식을 가지고 현재를 살아가는 젊은 세대들을 중립에 가까운 시선으로 바라본다. 그 세대는 "저는 노동자의 딸이니까요" 라고 말하면서, 청두를 허물고 들어서는 최신식 단지 24시티에 부모님을 모실 거라 말하는 세대다. 영화는 이 앞뒤 모호한 발언에 대해 가치판단을 내리지 않는다. 청두의 노동자들을 찍던 것과 마찬가지로 어느 정도 거리를 유지한 채 조용히 응시한다. 영화의 시선은 현재진행형의 시선임과 동시에, 스러져 가는 과거의 시간들을 찬란한 생명의 시간으로 되돌려 기억하는 성숙한 향수의 시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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