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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40년을 함께 한 오래된 파트너가 있다. 한 평생을 ‘농군’으로 살아온 할아버지와 그의 발이자 충직한 일꾼이 되어 준 한 마리 늙은 소. <워낭소리>는 정직한 카메라와 시종일관 툴툴대면서도 이 둘의 관계를 이해할 수밖에 없는 할머니의 목소리를 빌려 우리네 소소한 삶의 위대함을 노래한다. 특히나 문자 그대로 ‘묵묵히’ 일에만 매진하는 아버지, 그리고 그 옆에서 또한 말없이 제 몫을 다하는 소의 이미지가 묘하게 겹쳐지며 여러 해석의 차원과 큰 울림을 가져다주는 작품이다. 특히나 속도전의 가치를 강요하는 이 시대에 할아버지와 소의 느릿하지만 묵직한 진정성은 아릿한 감동을 주기에 충분하다. 방송 다큐멘터리로 잔뼈가 굵은 이충렬 감독이 3년 넘게 할아버지의 삶을 기록한 <워낭소리>는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 최우수다큐멘터리 상을 수상한데 이어 2009 선댄스영화제 다큐멘터리 부문 경쟁부문에 진출해 있다. 이제 우리는 검증된 양질의 다큐멘터리를 직접 스크린으로 만날 일만 남았다. 그 전에 이충렬 감독이 직접 들려주는 작품의 뒷얘기에 귀 기울여 보자.


하성태: 곧 선댄스영화제에 참석한다고 들었는데, 요즘 인터뷰 때문에 정신없겠어요.

이충렬: 살다보니까 선댄스도 가고, 미국도 가보고. 20일에 가서 한 폐막에 맞춰 26일까지 있을 거예요. 제 선택이라기보다 선택을 받은 거라 모든 것이 당황스럽고 반신반의해요. 실감도 나지 않고요. 영화에 대한 열망이 없던 방송 PD였기 때문에 더 더욱 그렇고요. 가보면 또 달라지겠지만 지금은 생소하고 상당히 부담스러울 뿐이죠. 다만 <워낭소리>를 사람들이 좋아하고 호감을 가져주니까 좋긴 한데. 어떻게 표현을 못하겠어요.


할아버지는 건강하세요?

옛날보다 안 좋으시죠. 나이가 들어가시니까. 노환이라는 게 그렇잖아요, 치료가 되는 것이 아니니까. 일은 계속 지금도 하세요. 할머니가 건강이 좀 안 좋으신 거 같고. 젊은 소가 이명박씨를 닮은 것 같아요. 엄청난 속도전에 대단히 빨라요, 무식하고.


어린 소들이 일반적으로 그런 줄 알았는데 그 소 성격이 좀 더 그런가 봐요?

그 소가 성격이 그래요. 그래서 할아버지랑 잘 안 어울리죠. 할아버지는 소를 타고 간다는 느낌이 들었는데 지금은 배달된다는 느낌이 드니까. 역시 파트너는 정해지는 거 같아요. 그 할아버지와 소와 관계가 깨져버렸으니까. 영혼이 죽어버리면 육신이 남더라도 결과적으로 오래가지 못하겠죠.


영화 속에서 제일 짠한 장면이 할아버지가 술 한 잔 걸치시고 (늙은 소와)같이 죽고 싶다고 말할 때였는데요.

그 양반은 이렇게 보면 되요. 그 분을 신성화하거나 천연기념물로 볼 소지가 있어요. 농약을 치지 않고 사료를 안 쓰는 농법이 대단한 철학에서 나온 걸로 볼 수 있는데 그게 절대 아니에요. 불편한 다리를 가진 할아버지가 자기 일부이던 소가 없어지면 더 이상 살 수 없다는 걸 알기 때문에 본능적으로 매달리는 거죠. 그렇게 미화하면 안돼요. 제가 그 분들 삶을 ‘오픈’시키지 않은 것도 마찬가지 이유고.


아, 맞아요. 그랬다간 ‘기봉씨’처럼….

어휴. 기봉이 전에 <그 곳에 가면 영자가 산다>는 인간극장이 있었어요. 아버지는 피살됐고, 영자는 절로 들어가 비구니가 됐어요. 그럼 안 된다는 거죠.


다큐멘터리가 무서운 부분 중 하나가 그런 점 인 것 같아요.

조선일보에서 그 쪽에 사진을 찍으러 가겠다고 하더라고요. 왜 이렇게 사람들을 특화시키려고 하는지. 전 할아버지를 특화시키려고 한 적이 없거든요. 제가 오랫동안 할아버지를 괴롭혀 드렸잖아요. 저 때문에 소가 죽었을 수도 있었다고 생각하고요. 그 분 삶은 자신 뜻대로 가야지 구경거리가 되면 안 되잖아요. 그렇게 된다면 모든 원인은 저한테 있는 거고요. 아드님한테도 알려지게 하지 말라고 부탁드렸어요. 그런데 SBS에서는 벌써 내려갔다 왔다고 하더라고요.


다큐멘터리 작가들의 딜레마가 그런 부분 아닐까요? 카메라와 대상과의 거리 설정 문제랄까. 시간도 시간이고 얼마나 대상과 관계를 잘 맺는가도 문제고요.

제가 원래 방송으로 시작했는데, 방송 시스템은 작가들이 리서치를 많이 하고 PD들이 현장에서 찍은 걸로 협의해서 편집을 해요. 저는 사실 그런 시스템이나 제도에서 실패한 사람이에요. 그래서 혼자 작업을 하면서 실패도 많이 했어요. 방법은 깨지고 실패하면서 배우는 거 밖에 없어요. 그래서 더 많은 시간이 필요했고. <워낭소리>를 시작하던 당시는 멋있게 얘기해면 비장하고, 그대로 얘기하면 마지막 선택이었어요. 실패를 거듭하면서 돈도 많이 깨지고 울화병으로 얻은 공황장애 때문에 일상생활이 힘들었거든요. 그렇게 황폐해진 순간에 마지막 승부수를 건 거죠. 이전의 문법이나 화법으로는 안 되는구나 싶어서 과감히 방향을 틀었는데 다행히 성공을 한 것 같아요. 모든 감독들이 자기만의 세계에 매몰되는 경험을 한 번은 다 하거든요. <워낭소리>는 철저하게 나보다 관객들이 볼 때 어떤 작품이 될까를 염두에 뒀어요.


그럼 극영화 같다는 의견에 대해서는 조금 황당하겠어요. 어차피 다큐멘터리도 편집이 개입할 수밖에 없는데 말이죠.

우리가 말하는 독립이라는 것이 확고한 테두리를 가지고 있는 거잖아요. 원래 자기 땅이 있었는데 뺏겼으니 나라를 찾아 독립 운동을 하는 거고(웃음). 다큐 정신이라는 걸 잘 알고 거기에 충분히 동의해요. 그런데 다큐라는 이름으로 다 용서되고 재미없어도 된다는 건 아닌 거 같아요(웃음). 그렇다고 해서 ‘대중 추수적’으로 천박하게 기생하면서 비유를 맞추는 건 문제가 있겠지만. 날것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 다큐 본연에 맞을지 모르지만 ‘리얼’이라는 것에 대해 늘 고민을 많이 했어요. 있는 그대로 기록하는 것이 선택사항인지 의무사항인지 말이죠. 결국 삶을 훼손했느냐 조장했느냐의 문제겠죠. 있는 그대로의 원형질을 가지고 편집해도 날 것은 있는 그대로기 때문에 감흥이 없어요. 악센트도 없고. 전 표현하는 방식에 있어 내 문법이나 화법을 썼을 뿐이지 본질적으로 드라마다, 아니다 하는 건 아니라는 거죠. <워낭소리>의 포인트가 일하고 늙고 사라진다는 존재론적인 의미를 반추했다면, 근본적으로 사라짐에 모든 것이 걸려 있어요. 그래서 정서를 차근차근 단층들로 쌓아 올린 거죠. 할아버지와 늙은 소, 할아버지와 젊은 소, 젊은 소와 늙은 소,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관계, 할머니와 늙은 소, 젊은 소의 관계들을요. 그래서 촬영도 카메라 두 대를 가지고 리액션을 다 찍었어요. 계절도 그래요. 그저 관계에 집중하다 보니 봄이 가고, 여름이 가고, 가을이 오고, 겨울이 온 거에요. 그저 계절을 찍는 것과는 접근 방식이 좀 달라요. 그래서 좋은 풍경도 뺐어요. 단지 기계적으로 계절을 기록한 것처럼 보이기 싫어서요.


인물들의 감정을 자연스럽게 담는 것이 중요했다는 얘기로 들려요.

미디엄 숏, 롱 숏이 많은 이유도 딱 하나에요. 할아버지와 소의 걸음처럼 내가 그들의 일상에 템포를 맞춰야지 내가 빠르거나 느려버리면 이미 마찰음이 나고 자연스럽지 못한 거죠. 그래서 자연스럽게 카메라워크가 결정이 났고 그 형식이 최적의 작법이었던 거죠. 이야기를 가장 전달할 수 있는 방식을 택하다 보니 그렇게 편집을 한 건데 그게 죄라면…(웃음).


아버지와 소라는 주제 자체가 굉장히 설득력 있어요. 그 아이템을 잡은 시기가 2000년이라고 들었는데 꽤나 오래됐네요.

독립 방송PD들은 소재에 굉장히 민감해요. 방송은 아이템을 어떤 걸 잡느냐에 따라서 반은 승부가 갈리니까. IMF 시기에 가부장이 붕괴되면서 수난을 당하는 고개 숙인 가장의 이미지가 많았잖아요. 그래서 저 또한 아버지에 관심을 가졌고요. 전 세상에서 가장 슬픈 것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고 잊혀 지는 거라는 걸 독립 PD생활을 하면서 직감했어요. 꿈과 현실이란 부분에서 괴로워하며 줄타기를 했던 시기였거든요. 그러면서 고개 숙인 아버지와 그 슬픈 사라지는 일을 매치시킬 수 있었죠. 이충렬이란 사람이 꿈을 가졌지만 별 볼일 없이 명함도 못 꺼내고, 결혼도 못하고 있었는데, 그런 잊혀 진다는 위기감이 아버지에 대해 너무 이기적으로 살았다는 느낌과 맞물린 거죠. 전 무언가를 대비시킬 때, 가장 최악일 때 반대로 가장 최고였던 걸 보여주면 그 간극들이 이상하게 마찰을 일으킨다는 느낌이 들거든요. 그래서 유년 기억 속에 봉인되어 있던 아버지와 소, 그들의 전성기를 되살려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때 아버지의 느낌이 사금파리 같았거든요. 사금파리는 깨어진 그릇의 파편들이잖아요. 한때는 빛났으나 지금은 필요 없어진 사금파리와 같은 존재들이 아버지와 소라는 느낌이 들었던 거죠.


그럼 점에서 캐스팅이 정말 탁월하단 생각이 들어요.

그들의 교감과 헌신을 통해 소위 일한다는 것, 나이 든다는 것, 병든다는 것, 사라진다는 것의 존재론적인 의미들을 곱씹어 보자, 되씹어 보자는 측면으로 기획을 했어요. 그래서 바로 2000년도에 캐릭터를 찾아 나섰는데 조건이 필요했죠. 그 대상이 좀 ‘올드’해야겠다, 정상적인 거 보다 핸디캡이 있어야겠다. 그래야만 그들의 고난과 헌신이 빛을 발하고 사람들이 절실하게 느낄 것 같았어요. 쇠락한 고향에, 그 고향을 닮은 아버지와 그 아버지를 닮은 소. 그리고 불굴의 의지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제가 방송 출신이다 보니 뿌려놓은 곳이 많잖아요. 예전에 일했던 이장님, 농협, 우시장 이런 대 개인적으로 전화를 드려서 연락망을 확보하고 수시로 연락을 드렸죠.


그렇게 몇 년이 걸린 거죠?

2005년도에 봉화 쪽에서 연락이 왔어요. 대상에 대한 감은 왔지만 이 할아버지가, 할머니가 어떤 사람이고 소가 어떤지 몰라 정보를 리서치 할 시간이 필요했어요. 중요사항을 찍으며 생활해 보니 그 분의 일상이 보이고, 동선이 보이더라고요. 2005년 겨울에 젊은 소가 들어오면서 대결 구도가 보였고요. 그 관계들이 보이니까 밀어붙였죠. 2006년 12월에 소가 죽었는데 2007년 4월까지 젊은 소를 찍었어요. 햇수로 3년이 걸린 거죠.


촬영이 힘들었다는 것이 짐작이 가는 이유 중 하나가 촬영감독이 여러 명이더라고요.

더 많았는데 뺀 거예요, 너무 많아서(웃음). 제 돈으로 완성한 것이 아니니 그 사람들이 저를 기다려 주지 않잖아요. 한두 달 외국 나가는 것이 돈 더 되고 하는데 무작정 기다려줄 수는 없으니까요. 전체적인 기조는 명확했어요. 핸드핼드는 일체 말고 죽든 살든 지켜봐라! 특히 비디오는 못 찍어도 좋으니 오디오는 찍어라. 왜냐하면 카메라를 들이 대면 원형질이 안 나와요. 할아버지가 자꾸 의식하고 다른 말을 하니까. 그래서 “그림은 눈에 보이는 허상일 수 있다, 차라리 소리에 집중해라”고 했죠. 소리가 좋으면 그림은 별로 중요하지 않거든요.


제목도 워낭 ‘소리’잖아요. 자연의 소리와 화면이 매치되면서 사색의 순간을 제공한다는 점이 매력 있었어요.

그림은 다 똑같아요. 일상은 반복되니까. 아무리 예쁜 그림을 넣어도 사람들이 정작 느끼는 것은 자기 유년의 기억이나 아버지를 떠올릴 수 있는 소리에요. 주술 같은 거죠. 새소리, 소 울음소리, 아버지 헛기침, 신음 소리. 보는 것은 큰 감흥이 없어요. 눈 먼 사람이나 귀 먹은 사람이나 다 똑같이 진정성을 느낄 수 있는 것이 리얼리티라고 생각하거든요.


반면 촬영으로 강세를 준 부분도 있잖아요. 우시장에서 고속촬영으로 찍었다거나….

아, (우시장에서 소를 팔러 갔을 때)집으로 가라고 하는 장면이요? 그건 그렇게 생각했어요. 어떤 순간보다 당황스러울 때 귀가 먹먹하고 정지된 것 같잖아요. 그 땐 할아버지 생에 있어 가장 치욕적인 순간일 수 있어요. 소도 두 번 눈물을 흘리는데, 처음이 헤어짐의 눈물이라면 두 번째는 자존심의 눈물이죠. 그 장면은 그냥 기법이라기보다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예를 들어 젊은 소가 할아버지가 쳐서 쓰러뜨리는 장면에서 정지 컷이 있잖아요. 그건 제가 (화면 안으로) 뛰어 들어가서 제가 잡혔기 때문이에요. 그걸 잘라내기 위해서 정지 처리 한 거고요. 처음부터 지켜보는 것이 의도였기 때문에 과감하게 스틸을 걸었던 거지 다른 의도는 없어요.


하하. 저도 그렇고 관객들도 굉장히 놀랐는데 그런 사연이 있네요. 사실 그런 얘기들 있잖아요. 종군 사진기자가 급박한 상황에서 사진을 찍어야 하느냐, 사람을 구해야 하느냐 하는, 직업 정신에 관한.

위험할 때 사람을 구하는 게 우선이지, 아무리 직업이 좋아도 그건 나쁜 놈들이죠. 직업 정신은 무슨. 자기가 총 맞았을 때 카메라를 안 놓으면 직업 정신인데 남 죽을 때 좋은 장면 찍으려고 하면 나쁜 놈들이죠.


내레이션은 할머니 목소리로 대체했잖아요. 그건 할머니의 인터뷰 부분과 실제 화면과 겹쳐 놓은 목소리를 모두 사용한 거죠?

두 가지를 생각했어요. 할머니를 내레이터처럼 보이게 하자는 것도 있었고,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서로 대화하는 것처럼 보이려고 그런 기법을 쓴 거죠. 인터뷰 같지만 서로 주고받는 대화처럼 보일 수 있게.




개인적으로 욕심이 났던 장면은 없었나요? 이런 건 꼭 찍고 싶었다 하는.

초반엔 임팩트 있는 장면을 잡고 싶었어요. 송아지 낳는 장면도 그렇고. 그런데 며칠을 기다려도 안 나와서 출발했더니 3시간 있다 낳았다고 하더라고요. 외양간이 무너졌다고 해서 달려갔더니 불도저가 밀어버리고. 솔직하게 길 위에서 소가 쓰러져 죽기를 바랐던 마음도 있었어요. 일 하다가 처참하게 죽었으면, 하는 사악한 마음도 가졌었고.


다큐멘터리 작가라면 충분히 그런 욕심을 가질 수 있잖아요.

그런데 편집하고 관객 반응을 보면서 큰일 날 뻔 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 장면을 포착해서 넣었다면 영화가 잘 되지 않았겠다 싶어서. 예를 들어 늙은 소가 죽을 땐 제가 찍었더니 더 비장한 마음으로 거칠게 찍었어요. 그런데 그 부분 첫 장면이 할아버지가 넘어 진 늙은 소에게 일어나라고 욕하는 거잖아요. 사실 소가 넘어지는 장면이 있었다면 관객들이 저 할아버지 정말 잔인한 사람이다, 어떻게 소가 쓰러져 죽을 때까지 가혹하고 노동을 시키느냐고 했을 거예요. 뒤에 감동이 전혀 살아날 수 없다는 말이죠. 차라리 못 찍은 것이 더 좋은 효과를 내지 않았나 싶어요. 사람들은 매번 센 걸 원하지만 그것이 능사가 아니라는 걸 느꼈죠. 또 그런 쪽으로 승부하면 안 되겠구나, 쓸 때 없이 욕심내지 말고 있는 그대로 해야겠다는 교훈을 얻었어요.


굳이 소가 쓰러지지 않아도 그간 할아버지의 감정이 켜켜이 쌓여있고 전달이 된 거 같아요.

딱 하나에요. 감정을 켜켜이 단층처럼 쌓아갔잖아요. 지금 얘기한 부분들이 그걸 허무는 작업이었고, 그것이 관객들의 가슴을 치는 걸 원했죠. 그건 철저히 (카메라가) 관계 속에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 같아요.


그래도 놓친 장면 중에 아쉬운 장면이 있다면요.

할아버지와 소의 관계겠죠. 더 좋은 장면이 많았어요. 서로 교감하는 장면도 그렇고. 제가 상주하면 더 찍을 수 있었겠죠. 근데 또 너무 많으면 도식적일 수 있어요. 적당한 게 좋죠. 전반적으로 충만한 거 보다는 조금 허하게 비쳐졌으면 싶었어요. 커트도 너무 넉넉하면 사람들이 배부를 거 같아서, 간질간질한 상태에서 끊어버렸어요. 보여줄 때는 확실하게 보여줬지만. 머리로 인식하기보다 가슴으로 인식하는 것이 쉽지 않더라고요. 그래서 철저하게 어린 시절에 느꼈던 정서를 가지고 진행했죠.


그 장면은 일부러 연출한 건가요? 읍내에서 농민들이 FTA 관련 시위를 하잖아요. 그 앞에서 할아버지와 달구지를 끄는 소가 딱 멈춰 서자 관객들이 자지러지던데.

자기 고집대로 사는 할아버지가 세상에 나가 달구지를 탄다는 것 자체로 구경거리가 된다는 걸 알고 있었어요. 구시대의 질서와 새 시대의 질서나 풍경들이 부딪칠 때 어떤 문제가 나올까 고민했죠. 연출한 것이 아니에요. 할아버지와 어디서 만나자고 약속하고 전 차를 타고 와서 먼저 동선을 잡았죠. 시위를 하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그때 바로 저거다, 저 앞을 지나면 그림이다 하는 감이 왔는데 다행히 (소가) 서는 거예요. 게다가 카메라가 두 대였으니 너무 쉽게, 너무 자연스럽게 찍었죠. 감독의 정치적인 의도라기보다 할아버지가 스쳐지나가는 풍경이고 삶을 구성하는 요소라고 봐줬으면 좋겠어요. 관점에 따라 사람마다 다르게 봐야할 부분이고, 또 웃기려고 한 것도 아니고요.


만약 소가 안 죽었다면 영화가 어떻게 바뀌었을까요?

그랬다면 계속 찍었겠죠. 원래 의도한 것이 사라지고 늙는 것에 대한 기록이었으니까. 또 제가 방송 몇 년인데요. 소를 보니까 딱 심난한 거예요. 걸어가는 것 보니까 이미 다 죽어가요(웃음). 또 자주 넘어지기도 했었고. 중요한 건 그렇게 넘어지고 나서 소 얘기만 나오면 할아버지 얼굴이 진지해지는 거예요. 그때 갈 때까지 가도 되겠다 싶었죠.


가족들이 모두 모이는 추석 장면은 여러 감정들이 들더라고요.

부산국제영화제 버전은 좀 악의적인 편집을 했었어요. 자식들이 나쁘다는 걸 떠나서 할아버지 뜻 말고 자식들끼리 의사결정을 해서 소를 팔자고 하는 모습이 안 좋게 보였어요. 사실 모든 자식들이 그렇잖아요. 나도 저러는 구나 싶기도 하고. 우리 자식들의 모습을 초상해서 보여주고 싶었어요. <워낭소리>가 부모에 대한 헌사이기도 하지만 나에 대한 반성문이기도 해요. 할아버지가 쓰러졌다 일어나는 장면도 그래요. 우리네 아버지들은 저렇게 쓰러지면서도 고난을 딛고 꿋꿋하게 일어서는데 우리 자식들은 안 그러거든요. 그런 모습을 보면 자기가 부모님한테 무얼 했나 생각하게 되잖아요. 그런 느낌들을 바랐죠.


저도 많이 찔렸어요(웃음). 퓨전국악 그룹 ‘아나야’의 음악은 많이 쓰인 편은 아니지만 울림이 있더라고요.

오리지널 스코어하고 라디오 소리, 또 현장음이 있잖아요. 원래 라디오 소리로 음악이 많이 들어가는데 저작권 때문에 부득이하게 다 편집을 했죠. 의도와 다르게 뉴스 소리로 시사적인 내용을 넣을 수밖에 없었고요. 음악은 피아노와 대금 위주로 갔어요. 신파가 될 것 같아 이 친구들이 만들어 온 음악을 많이 잘라 냈어요. 그 보다 아쉬운 건 타이틀이 뜨고 소가 걸어갈 때 ‘봄날은 간다’란 노래를 쓰고 싶었거든요. 그 가사가 소의 인생을 표현한다고 생각했는데 현실적인 부분 때문에 쓸 수 없어 아쉬웠죠.


확실히 <봄날은 간다>가 대중적으로 명확하게 의도를 드러낼 수 있었을 것 같아요.

나중에 음악다큐를 해 보려고 했는데 안 되겠더라고요. 돈이 너무 많이 들어서. 안 되는 건 하지 말자 싶었죠(웃음)





좀 큰 얘기 해 보자면, 방송이지만 다큐멘터리 활동을 오래 해 왔습니다. 다큐멘터리에 대한 본인만의 자의식이 있다면요.


참 조심스러운 부분인거 같아요. 꾸준히 영화 쪽에서 다큐멘터리 활동을 해 왔던 감독도 아니고. 다큐의 본질은 같지만 역시나 표현 방법이 다른 거 같아요. 좀 더 원칙이나 본질을 확보하려는 쪽이 독립영화 진영이고, 좀 더 엄격하고 민감해 하는 것 같고요. 방송은 다큐라고 하지만 온갖 잡것이 다 들어가 있는, 돈으로 뿌려대는 테크닉이라고 할까요? 드라마 형식으로 촬영한다거나 CG를 쳐 바른다거나, 절대 그러면서 유익하지도 않고 재미도 없는. 그건 현상적인 측면일 수도 있겠죠. 전 실패를 하면서 그간 가져왔던 생각을 바꿔왔어요. 저도 운동을 했기 때문에 그 연장선상에서 다큐를 도구로 봤어요. 다큐가 보통 시대적인 요구에 의해서 프로파간다로 시작됐음은 분명하지만 세상은 변해 가는데 자꾸 칼이나 총으로만 쓰려고 하는, 변혁이나 비판으로만 편식을 하려는 부분이 없지 않아 있었어요. 저 개인적으로 그런 부분에 집착하다보니 실패했던 거 같고. 또 다큐는 치외법권 같았어요. 재미는 없어도 의미만 있으면 된다는. 그래서 특별히 관심이 없는 사람들한테서는 점점 멀어진 것 같고요. 너무 창작자만을 위한, 연출자만을 위한 다큐라서 그런 건 아닌가 싶고. 문제의식이 있고 철학이 잇는 건 좋지만, 관객들과 소통도 못하고 피드백이 없으면 안 돼요. 음식으로 비유하자면, 조리사가 이 음식이 건강에 좋으니까 맛이 없어도 일방적으로 먹으라고 편식을 시키는 건 안 되죠. 원형질이 보존되고 원재료에 리얼리티가 확보된다면 조미료를 뿌리더라도 사람들이 맛있게 먹어야 되는 거 아니에요? 저는 그것이 리얼리티를 손상시킨다고 보지 않아요. 원형질의 문제가 아니라 표현 방식의 문제죠. 우리 일상은 판타지가 없나요? 우리가 꾸는 꿈이나 상상은요. 눈에 보이는 것만을 리얼리티라고 규정해버리니까 그런 문제가 발생하는 거죠. 다큐멘터리도 판타지가 가능하다고 보거든요. 지금은 분명 다양성이 존재하잖아요. 저도 살아보니 구호나 이슈보다 나이 먹을수록 모든 게 내 마음으로 향하는 거 같아요. 자기성찰이라고 해야 하나? 일상으로 들어와서 내면으로 천착하는. 전 소소함의 위대함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할아버지나 소와 같은 무명씨들의 소소함, 위대함을 보여주는 것이 제가 앞으로 하고 싶은 다큐멘터리에요.


정리를 하자면 사적인 거에서 보편적으로 확장될 수 있는 그런 주제들 말인가요?

왜냐하면 저도 사적이지 않은 것들을 많이 고민해 봤지만 우리 사회는 운동가들도 그렇고 그런 분들이 너무 과잉이에요. 그래서 나 같은 사람들은 일정정도 사적인 부분을 긁어주면 더 좋겠다 싶은 거죠. 어떤 사람들은 다큐를 혁명이라는 마음으로 하는 사람도 있지만, 전 시인이라고 봐요, 사람들 마음을 바꾸는. 제가 하는 작업이 대단하지 않고 작은 부분이지만 인생을 살면서 사소한 것이 더 중요하다는 점이 눈에 들어왔어요. 일상을 가장 잘 전달하는 방법이 있다면 그게 극형식이어도 상관없을 것 같고요.


많은 분야를 섭렵하다가 내가 정말 하고 싶은 얘기를 해 봐야겠다 싶었던 건 언제인가요?

처음엔 애니메이션을 했는데 그림이라는 작업이 완전히 단순 작업공이에요. 그래서 내가 생각하는 세상을 만들어야겠다 싶어 연출 쪽으로 방향을 틀었죠. 일본에 가고 싶었는데 돈이 없어서 좌절되면서 그냥 사람 사는 이야기를 그리면 되겠지 싶었어요. 이것저것 다 해 보다 마지막에 만난 것이 다큐멘터리였어요. 전 비전향 장기수, 동성애자, 무당 같이 센 얘기를 주로 했었어요. <사이에서>가 나오지 않았다면 무당 이야기를 먼저 했을 텐데.


선댄스도 다녀와야 하고, 정신없겠지만 혹시 다음 작품을 구상하고 있다면요.

<워낭소리>보다 좋은 작품을 해야겠다는 생각밖에 없어요. 근데 사람이 간사해지더라고요. 이전 아이템들 다 파기해버렸어요. 당장 죽을 거 같았는데 살아나니까 예전 아이템들은 할 수 없더라고요. 사람들 잣대가 일단 <워낭소리>가 될 테니까 더 조심스러워지는 거 같아요.



진행.정리 : 하성태(편집스태프)
사진: 강연하(편집스태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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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장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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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비극이어라

사랑은 비극이다. 비극이기에 아름다울 수 있으며 눈물 흘릴 수 있는 것이다. <로미오와 줄리엣>은 비극으로 시작해 비극으로 결말 맺는 참으로도 몹쓸 사랑이야기다. 로미오와 줄리엣의 만남 자체가 비극이었듯, 그들의 사랑 또한 죽음으로마무리된다. 하지만 그 누구도 둘의 사랑을 아름답지 않았노라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송희일의 장편 데뷔작 <후회하지 않아>의 두 주인공은 서로를 만난 것에 대해 한 순간의 후회가 없다. 사회라는 거대한 통념아래에서 인정받지 못하는 사랑을 나누는 그들의 만남 또한 로미오와 줄리엣의 그것과 전혀 다르지 않다. 이렇게 사랑이란 고통받고 슬퍼해야하며 죽음마저 감당해야 한다. 사랑은 비극이기 때문이다.


 

유사 관계망을 지닌<워낭소리>와 <쌍화점>

비슷한 시기에 본 <워낭소리>와 <쌍화점>은 장르는 분명 다르지만 너무나도 유사한 관계망을 가지고 있는 작품이다. 그런데 두 영화에 나오는 삼각관계망은 기존 우리가 익히 보았던 것과 조금씩 틀려 오히려 매력있다. <워낭소리>의 할아버지의 애정의 집착은 그와 더 오랜 세월을 함께 했던 할머니가 아니라 그가 부리는 소이다. 할머니는 매일 소만 생각하는 남편을 원망하며 자신의 인생을 한탄한다. 그도 그럴 것이 할머니 고생하는 건 생각지도 않으시고 소의 곁에서 떠나지 않는다.

캐릭터가 다를 뿐 <쌍화점>의 구조 또한 비슷하다. 왕의 집착의 대상은 그를 보위하는 무사 홍림이다. 본연히 어여쁜 왕후가 곁에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남자를 사랑하는 운명을 안고 태어난 왕은 왕후보다 홍림을 먼저 생각한다. 그런 왕후는 왕과 홍림의 관계를 맹렬히 비판하고 집착해야 당연하건만 별로 그런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왜냐하면 홍림과 세자 만들기를 위한 합궁 후에 그를 사랑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음과 양이라는 육체는 속임도 없이 솔직하게 본연의 모습을 드러내고 둘을 사랑하게끔 만든다. 그로인해 오히려 질투하는 사람은 왕이다. 왕은 어쩌면 <워낭소리>의 할머니와 닮아 있다. 오래송안 사랑했건만 사랑한 대상은 자신을 돌보지 않고 다른 곳만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누구나 질투할 수 밖에 없는, 소를 바라보는 할아버지의 눈망울

<워낭소리>와 <쌍화점>은 그래서 비극적인 로맨스다. 이런 관계망 자체뿐 아니라 그들의 사랑이 죽음으로 귀결된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왕과 홍림의 처절한 최후는 마치 로미오와 줄리엣의 죽음처럼 처참하다. 하지만 난 그들의 죽음을 바라보다 왕후이 눈물보다 <워낭소리>에서 늙어 죽어가는 소를 바라보는 할아버지의 눈망울이 더 애잔하게 느껴졌다. 말도 못하는 소 앞에서 할아버지 또한 아무말 없이 바라볼 뿐이다. 그러니 불만 가득 넋두리를 늘어 놓는 할머니의 함숨이 왕이 왕후와 홍림의 관계를 향한 질투보다 더욱더 강하게 와 닿는다. 자신보다 더 낭만적인 로맨스를 즐기는 모습을 곁에서 지켜본다는 것이 얼마나 마음 아플까?



지독히도 비극적인, 그래서 아름다운 로맨스

소는 당연히 죽고, 남는 것은 할아버지의 사랑이다. 이 세상 어느 남녀, 불행하겠지만 어느 동성간의 사랑이 이보다 더 간절할 수 있을까? 할아버지는 '소가 죽으면 나도 따라 죽어야지'라고 말한다. 물론 그 말이 현실화되진 않는다. 현실은 현실이니까. 그래도 육은 살았지만 영은 죽어있으리라. 할아버지의 영혼은 소를 따라 저 세상으로 긴 여행을 떠났는지도 모른다. 소가 죽으면 나도 따라 죽겠다니? 생각해 보면 이 말은 멜로 영화 속에서 사랑하는 여인이 죽을 때 하는 대사다. 그것도 할아버지는 서스럼없이 진짜 사랑하는 사람을 생각하며 말하듯이 말하고 있지 않은가? 마치 로미오의 죽음을 보고 자신도 생을 마감하는 줄리엣처럼. 사랑은 이런 것이다. 그로 인해 아파하는 사람이 있고 설레여하는 사람이 있으며 종국엔 죽음도 있다. <워낭소리>는 감동을 주려는 다큐가 아니다. 인생을 보여주는 작품 또한 분명 아니다. 이것은 멜로 영화다. 지독히도 비극적인, 그래서 아름다운 로맨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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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낭소리

필진 리뷰 2009.01.09 15:38 Posted by woodyh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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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낭소리>의 힘은 단연 토픽의 선정에 있다. 신산한 삶을 함께 해 온 팔순 노인과 그의 마흔 살 먹은 소. 논과 밭을 가는 것은 물론이요, 다리가 부실한 할아버지의 달구지가 되어주는 이 소의 일상을 고정된 카메라로 잡아내는 것만으로 <워낭소리>는 단단하고 뭉클한 드라마를 만들어 낸다. 일중독에 가까운 할아버지와 그를 위해 평생을 소답게(?) 일 해 온 중년의 소, 그리고 이 두 사람을 애증(?)에 가깝게 지켜봐야 하는 할머니의 사연이 속도전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삶이란 무엇인가, 아버지의 존재란 무엇인가에 대한 묵직한
성찰을 유도해 낸다. 혹자는 너무 드라마틱하다고, 연출이 지나치다 타박할지 모르지만, 언제나 리얼리즘을 길어내는 다큐멘터리란 장르야 말로 편집의 미학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잊지 말도록 하자. 이충렬 감독의 <워낭소리>는 그러한 다큐멘터리의 장점이자 약점을 까맣게 잊게 하는 이야기와 영상미학의 결합을 시종일관 자랑하고 있다. 잠깐 동안의 휴식 동안에 담배를 물고 논을 바라보는 할아버지와 역시나 그렁그렁한 눈을 드러낸채 꼴을 먹는 소. 상징적인 이 컷만으로도 <워낭소리>의 가치는 차고도 넘쳐 보인다. 1월 15일 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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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건영


지난 8월 31일은 독일이 낳은 전설적 클라이머 볼프강 귈리히 Wolfgang Gullich 가 아우토반에서 사망한지 16주기가 되는 날이었다. 우연의 일치인지 몰라도 <우린 액션배우다>를 관람한 것 역시 이 날이었다.

볼프강 귈리히란 이름이 금시초문인 사람을 위해 간략하게 설명하자면, 당시로는 불가능하다 여겨졌던 5.41d라는 최고등급의 암벽등반을 최초로 이룬 인물이었고, 벽 등반에 관한한 기존의 모든 기록을 갈아치운 불세출의 등반가였다. 귈리히는 1960년에 태어나 열네 살부터 암벽등반을 시작해 이룰 수 있는 모든 것을 성취하고는 불과 31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 전설로 남겨졌다. 난데없이 웬 암벽등반가냐고? <클리프 행어>에서 터질 듯한 근육으로 멋지게 등반하던 실버스타 스탤론을 기억하는가? 스탤론 정도의 인물이라면 약간의 훈련을 거쳐 충분히 해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이들도 있겠지만, 천만에! 영화 속 등반은 그냥 저냥 연습으로 해낼 수준의 것이 아니다. 그러니 대역을 써야 할 밖에. 이 영화의 암벽등반 장면 대역을 한 인물이 바로 볼프강 귈리히이다. 영화촬영을 성공적으로 끝낸 귈리히는 1992년 8월 31일 뮌헨의 한 라디오방송국과의 인터뷰를 마치고 뉘른베르크의 집으로 귀가하던 중 아우토반에서 사망하고 만다. 당시의 이야기를 기억해보면, 여느 암벽등반보다 어려웠던 여러 가지 주문에도 귈리히는 눈 하나 깜짝 안하고 해치웠다고 한다. 귈리히가 있었기에 등반장면의 사실감이 배가 되었고 극적 긴장감은 최고조에 달했으니,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기억할 만한 명장면들이 사실은 귈리히의 손과 발을 통해 탄생한 셈이다. 유사한 예로 <미션 임파서블2>의 오프닝에도 아찔한 암벽등반장면이 나오는데, 당시 이 장면을 톰 크루즈가 실제로 연기했다는 식의 보도 자료를 옮겨 실은 홍보성 기사가 쏟아진 일이 있으나, 암벽등반을 조금이라도 해본 사람이라면 실제 등반장면이 아님을 단박에 알 수 있을 정도로 기술상 오류가 수두룩하다. 한 마디로 CG라는 것이다.

다시 <클리프 행어>로 돌아가서, 그렇다고 귈리히의 대역이 회자되었느냐하면 그것도 아니다. 귈리히가 죽고 나서야 산악인들의 입을 통해 이 사실이 널리 알려졌고, 월드프리미어 이후 <클리프 행어>의 해외 개봉판에는 귈리히를 추모하는 크레딧이 올려 진 것으로 알려졌으나, 당시 국내에서 영화를 본 내 기억으로는 이를 확인하지 못했다. 등반계의 월드스타인 귈리히도 영화에서는 대역에 불과했고 그 죽음조차 영화역사 위에 기록되지 못했을 진대, 하물며 우리나라 액션 전문(대역)배우들의 삶이야 오죽할라고. 그런 점에서 정병길 감독이 연출한 <우린 액션배우다>는 액션배우들 스스로가 써내려간 치열한 삶의 보고서이자 소중한 기록물이다.

서울액션스쿨 8기의 액션배우에의 열정과 삶과 애환을 고스란히 담아낸 이 영화에서 그들은 처음이자 마지막일지도 모를 주연배우가 되어 스크린을 맘껏 활보한다. 비록 다큐멘터리의 형식을 빌렸다고는 하나 영화적 구성 또한 만만치가 않다. 유머와 감동을 뒤섞어가면서 영화의 한 장면이 개인의 역사가 되기까지의 과정을 속도감 넘치게 보여주는 까닭이다. 가족들조차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영화 속 귀퉁이에 자리한 얼굴 없는 배우들의 이야기가 이토록 가슴에 와 닿는 것은 코미디와 감동이 조화롭게 배합되었기 때문만이 아니다. 이를테면 승자와 성공한 자에 모든 가치를 부여하는 동시대 사회상과도 맞물려 있기 때문이라는 말이다. 한마디로 ‘이긴 자가 모든 것을 차지한다. The Winner Takes It All’는 지금의 세상. 계량화된 실적과 숫자와 자산 가치가 한 인간을 판단하는 잣대가 되어버린 지독한 실용의 시대이기에, 무대의 주역이 아닌 위험한 대역을 자청한 이들의 삶 자체는 <우린 액션배우다>가 심금을 울리는 까닭이 되고도 남는다.

알려진 바에 의하면 2008년 전주국제영화제 상영당시 엔딩 크레딧이 끝날 때까지 관객의 박수가 이어졌다고 한다. 영화를 보는 내내 무엇이 열광적 환호를 이끌어냈을까 의아해 하던 중, 한 장면을 만나게 되었다. 그러니까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의 중국 로케이션 현장에서 날아온 무술배우들의 귀국과 지중현 무술감독의 사망소식이 전해지는 대목이다. 로케이션 현장에서 사망한 선배의 장례식 장면이 특별한 이유는 때론 우스꽝스럽고 또 때론 감동적으로 영화적 스토리텔링에 치중하던 이 영화가 비로소 현실로 돌아와 영화의 외부에서 관객에게 자신들의 진심을 드러내는 지점이기 때문이다. 이는 영화 같은 삶을 불꽃처럼 살다간 선배의 모습을 통해 자신들이 무대의 주인공이 될 수 없음을 절감하는 순간이기도 하다. 액션배우들의 뒷모습이 이토록 쓸쓸하고 절절하게 보여 진 적이 또 있었을까? 그러므로 엄숙하고 처연한 운구과정에 이어지는 짤막한 회고장면은 이름 없이 살았으되 무수한 톱스타의 몸 위에 자신의 모습을 아로새겼던 세상의 모든 액션배우에 바치는 헌사에 다름 아니다. 또한 이것은 세상을 향한 <우린 액션배우다>의 외침이자 인정투쟁이기도 하다.

영화의 끝에 이르러 인천의 모 정보고등학교에서 여학생들을 상대로 펼친 특강을 통해 그들은 무대의 주인공이 되지만 다시 이런 날이 올지는 아무도 모른다. 36명으로 시작된 서울액션스쿨 8기가 이제는 권기덕 단 한명만 남아있기 때문이다. 제 아무리 열정이 크다 한 들 현실을 이길 수는 없는 법이고,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되는 일이 분명 있기 마련이다. 그런 점에서 다른 길을 걷고 있는 나머지 액션배우들의 결단에도 박수를 보내야 한다. 요컨대 <우린 액션배우다>는 액션에 미친 젊은이들의 신명나는 현장보고서가 아니다. 그것은 차라리 우리에게 실패에 대처하는 방법을 알려주는 잠언에 가깝다.

(추신) 故 지중현 무술감독의 정보를 확인하던 중 발견한 전자신문의 8월 29일자 인터넷 포털제공 판에는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의 제작사인 바른손엔터테인먼트의 최재원 대표와의 인터뷰가 실렸는데, 「하지만 중국 현지 촬영 일정 지연으로 제작비가 증가하고 촬영 중간에 지중현 무술감독이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하는 등 악재가 겹치면서 영화의 성공 여부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는 상식 이하의 내용이 담겨 있었다. 논란을 우려한 탓인지 본판에서는 이 부분을 삭제하고 재편집해버렸다. 무술감독의 사망을 영화의 악재로 바라본 것이 최재원 대표의 시각인지 기자의 자의적 해석인지 몰라도, (맥락을 짚어보면 누구의 생각인지 단박에 드러난다마는) 이러한 자들이 버젓이 한국영화계의 중심인양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는 점은 한심스럽다. 어쩌면 그래서 <우린 액션배우다>가 더욱 빛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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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민영


<샤인 어 라이트>는 명쾌하게 두 가지 반응으로 나뉘는 영화다. 좋거나, 혹은 나쁘거나. 관심이 넘치거나, 혹은 관심이 손톱만큼도 없거나. 보통의 뮤지션을 다룬 영화들은 으레 그렇듯, 상반된 두 개의 클리셰로 구분된다. 가장 관습적인 방법은 뮤지션(혹은 뮤지션들)의 일대기를 그리는 것이다. 어린 시절부터 청소년기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통틀어 하나로 엮는 ‘전기적’ 구조는 이후 신화가 되거나 패배자가 되어버린 무대 위의 한 인간을 그리기 안성맞춤인 방법이다. 보통 이런 형식으로 음악가를 다룬 영화들은, 극적인 기승전결을 연출해야하므로 90퍼센트의 픽션에 10퍼센트의 논픽션을 섞는다. 때문에 어떤 때는 실제의 인물과 전혀 다르게 이야기가 진행되기도 한다. 하지만 현실과 허구의 정당성을 떠나 픽션과 배우의 적당한 연기가 섞인 뮤지션 영화들은, 대상을 신격화하는 동시에 인간 승리 혹은 극복 가능성이라는 거창한 문구로 관객을 사로잡기 더할 나위 없이 적합하다. 그리고 대부분의 관객은 영화가 창조한 또 하나의 스타에 열광한다.

뮤지션 영화가 픽션을 넘어 두 번째로 차용하게 되는 방법은 ‘다큐멘터리’다. 감독은 카메라를 들고 시종일관 주인공들에게 말을 걸거나 몸짓을 건네며 그들과 함께 영화를 꾸려간다. 카메라와 주인공들이 나누는 대화는 지극히 한정적이다. 뮤지션으로의 사생활, 혹은 그들이 가져다 준 열정 이상의 감정적인 것들. 거기에 크고 작은 규모의 콘서트가 더해지고, 영화 속의 주인공들은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 아닌 일정 수준의 작위적 태도를 가지게 될 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딜레마를 겪는다. 여과 없이 카메라는 돌아가므로, 필름에 담겨진 주인공들의 모습은 노래하거나 춤을 추는 8할의 성과를 이룬다. 그리고 여기서 다큐멘터리는 주인공과 감독(혹은 카메라)의 관계가 아닌, 카메라와 주인공의 종속관계에 놓인다.

영화가 음성, 혹은 악기로 대변되는 어떤 대상을 담고자 할 때, 군더더기 없이 온전히 카메라 안에 대상을 담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공연 실황’을 기록하는 것이다. 노래를 부르고 연주를 하는 것은 뮤지션들에게는 일상인 동시에 또 하나의 가면놀이를 가능케 할 수 있는 천의 얼굴과도 같다. 땀으로 범벅이 된 그들을 잡는 현란한 카메라와 관중들의 함성소리는 모든 것을 떠나 주인공이 존재해야만 하는 공간의 가치를 가장 잘 나타내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기엔 픽션과 논픽션의 갈등보다 큰 제약이 따른다. 카메라는 뮤지션을 잡기 시작할 때부터 ‘연출’과 ‘상황 전개’라는 두 평행선 사이에서 고민하게 된다. 두 가지로 분리된 카메라는 음악에 심취한 그들을 ‘극’으로 담아야 할지, 혹은 적나라하게 ‘나열’해야 할지에 대해 생각할 수밖에 없다. 또 다른 주종관계가 성립하는 순간이다.

뮤지션 영화에서 두 마리의 토끼를 잡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자칫하다가는 진부한 획을 한 줄 더 그을 수도 있는 인간극장식 테마로 치장될 것이 뻔하고, 그와 반대의 경우에는 너무 편협한 내러티브로 놀이판을 벌인다는 말을 듣기 일쑤이니 말이다. 특정 인물을 음악으로 소화해낸 ‘잘 빠진’ 영화를 찾아내기는 하늘에 별 따기 수준이다. 하지만 스콜세지의 ‘롤링 스톤즈’에 대한 다큐멘터리 <샤인 어 라이트>는, 이들 사이에서 힘들고도 경이롭게 ‘다중 토끼 사냥’에 성공한 영화다.

<샤인 어 라이트>는 롤링 스톤즈의 현실에서 시작한다. 마틴 스콜세지는 롤링 스톤즈의 공연을 담기 위해 과거를 비추는 대신 현재를 직시한다. 나이든 믹 재거와 아련하게 롤링 스톤즈의 음악이 깔리려는 찰나, 스콜세지의 카메라는 그들을 가로막는다. 요란하게 움직이는 그의 워킹은 롤링 스톤즈 멤버들 간의 단절을 낳고, 나아가 관객과 롤링 스톤즈라는 뮤지션 사이에서 제 2, 제 3의 간극을 형성한다. <샤인 어 라이트>는 롤링 스톤즈를 신격화, 혹은 영웅화 하는 대신에, 스크린 속의 배우들과 크게 다를 바 없는 ‘움직임’을 통해 뮤지션 영화가 가진 한계를 지나친 상태에서 출발점을 잡는다.

영화는 2006년 롤링 스톤즈가 기네스 기록을 갈아치운 자선 공연인 ‘비거 뱅뱅(Bigger bang)투어의 일부였던 뉴욕 비콘 콘서트의 실황을 다룬다. 약 두 시간 동안 <샤인 어 라이트>는 원활한 플롯을 제공하는 대신 롤링 스톤즈를 코앞에서 만날 수 있는 일생일대의 기회를 관객에게 부여하는 데 모든 것을 바쳐 심혈을 기울인다. 잘 빠진 라이브 무비를 위해 엄청난 와트의 조명을 설치하고, 총 16대의 카메라가 바쁘게 움직이며, 이 모든 상황을 스콜세지는 무대의 한 구석에서 숨을 죽이며 바라보고 있다. 믹 재거와 키스 리차드는 감독의 뒤에서 카메라와 서로를 번갈아 보며 장난을 치고, 필름에 완벽한 롤링 스톤즈를 담아내기 위해 감독은 온몸의 신경이 곤두서있는 상태다. 숨 가쁘게 울리는 전화벨, 무심하지만 폭발하기 직전인 스콜세지의 표정은 공연을 몇 시간 앞둔 롤링 스톤즈의 멤버들과 대비된다. 공연 시간이 다가올수록 카메라는 바쁘게 움직이고, 스탭들은 초조하게 스콜세지의 지시를 기다린다.

<샤인 어 라이트>에서 롤링 스톤즈의 비하인드 스토리를 원했다면 당신은 스콜세지의 카메라에 적잖이 실망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와 반대로 온전히 롤링 스톤즈와 소통하기를 원했다면, 이 영화는 당신에게 지상 최고의 콘서트를 보는 감격을 알려줄 지도 모른다. 롤링 스톤즈의 공연이 시작되고 믹 재거의 음성이 공연장 높이 울려 퍼질 때, 스콜세지는 비로소 공연에서 그들이 부를 노래의 목록을 받아든다. 숨 가쁜 목소리로 스콜세지는 ‘액션’을 지시하고, 모든 음향과 조명, 그리고 카메라가 순조롭게 준비된 상태에서 롤링 스톤즈의 공연은 시작된다. 바로 이때부터 한 시간 반을 훌쩍 넘기는 나머지 시간을 달려 마지막 바로 직전까지, <샤인 어 라이트>의 카메라는 마틴 스콜세지라는 감독의 손에서 완전히 벗어난다. 다시 말해 영화는 롤링 스톤즈의 연주에 귀를 가누기 힘든 공간, 즉 현실의 시간을 완벽하게 포장해 자기 것으로 만들어낸다.

<샤인 어 라이트>는 뮤지션 영화에 대한 괴리와 고민을 인정하지 않는 영화다. 카메라가 관객에게 대화를 건네는 유일한 의도는, 조금 더 가까이에서 롤링 스톤즈의 노래를 듣는 경험을 안겨주기 위함이다.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한 순간도 호흡을 잃지 않고 공연에 매진하는 백전노장들의 쾌활한 에너지를 화면 가득히 보는 순간, 왜 ‘롤링 스톤즈’가 아직까지 거론되느냐에 대한 의문은 명쾌하게 사라진다. 현란하게 움직이는 십 수 대의 카메라들은 믹 재거, 론 우드, 키스 리차드, 찰리 워츠를 중심으로 한 편의 흥미진진한 ‘서바이벌 무비’를 만들어낸다. 여기에 가시성을 확고하게 지켜내기 위해, 롤링 스톤즈가 젊은 시절에 녹화되었던 인터뷰를 적재적소에 배치한다. 군더더기 없이 매끈하게 짜여진 <샤인 어 라이트>라는 라이브 무비는, 완전히 관객의 눈과 귀에 목적을 둔 영화인 동시에 아무런 작위적 장치없이 롤링 스톤즈라는 뮤지션을 소개한다. 때문에 설사 롤링 스톤즈를 ‘모른다’해도 상관없다. <샤인 어 라이트>는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즐길만한 재미가 넘실대는 영화다.


<샤인 어 라이트>가 내러티브를 토해내기를 포기한 채 롤링 스톤즈의 모든 것을 보여주고자 했음을 알게 된 바로 그 시점에서부터 나는 조바심이 생기기 시작했다. 첫 번째 걱정은 스콜세지의 모습이 느닷없이 나타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었고, 두 번째 걱정은 카메라가 갑자기 열광하는 관중을 비출지도 모른다는 무서움이었다. 롤링 스톤즈에게 모든 것을 맡긴 스콜세지가 주인공을 자처해 극 속에 등장한다는 것은 그렇다 쳐도, 후자의 경우는 좀처럼 납득할 수 없고 그럴만한 가치도 없는 것임이 분명했다. <샤인 어 라이트>에서 롤링 스톤즈가 ‘Sympathy for the devil’을 부를 때 나의 긴장감은 최고조에 달했다. 끊임없이 돌아가는 모든 카메라가 전적으로 무대 위의 악동들에게 치중하길 간절히 기도했다. 스콜세지의 농밀한 카메라 놀이는 이러한 ‘피 말리는’ 바람을 고스란히 담아냈다.


<샤인 어 라이트>의 카메라가 마이크에서 베이스로, 베이스에서 드럼과 키보드로 넘어갈 때 불현듯 든 생각의 초점은 그들을 바라보고 있는 영화 속의 관중들이었다. 엄청난 소리로 롤링 스톤즈의 노래를 따라 부르는 관중들의 표정은 분명 가슴 벅찬 표정을 짓고 있을 것이 뻔했다. 그들의 표정이 롤링 스톤즈가 존재하는 가장 타당한 이유라는 것은 두 말 하면 잔소리다. 하지만 <샤인 어 라이트>에서 단 한 순간이라도 이런 관객들의 클로즈 샷이 나온다면 이 영화는 ‘망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땀을 흘리며 노래하는 주인공들 뒤로, 그들에게 화답하듯 엄지손가락을 추켜세우는 관중들의 모습이 갑작스럽게 잡힐 때, 영화는 평범하기 그지없는 단순한 ‘동영상’으로 전락해버린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샤인 어 라이트>의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까지 스콜세지는 한 번도 관객의 흥분한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지 않았다. 나는 <샤인 어 라이트>가 가지고 있는 가장 큰 장점이자, 심지어 스콜세지가 ‘위대하게’ 보이는 순간이 바로 이것에 작용한다고 생각한다. 한정된 공간 안에서 주인공들의 목소리가 얼마나 높고 크게 울리는 지를 측정하기 위해서 관객들의 모습을 카메라로 잡는 것은 결코 넘겨짚을 수 없는 달콤한 유혹과도 같다. 무아지경인 가수와 그를 바라보며 눈물 흘리는 팬의 장면은 주인공에게 동등한 위치가 아닌 신격화 된 작위를 수여하는 가장 손쉬운 방법이다. 그러나 이 완벽한, 그리고 뮤지션 영화에서 피해야만 하는 샷 리버스 샷이 작용하는 순간, 영화는 ‘극’이 아닌 ‘실황 중계’라는 탈을 벗어낼 수 없다. 스콜세지는 1인칭의 시점으로, 철저히 관객 대 뮤지션의 역할을 카메라가 해주기를 원했고 그것을 실행에 옮겼다. 실제로 모든 콘서트에서, 누가 다른 사람이 무대 위의 인물에게 열광하는 모습을 넋이 나간 채 바라보며 옹호하고 있느냔 말이다. 노래가 귓속으로 파고드는 순간만큼은 양 옆에 아무도 존재하지 않고 오로지 자신과 뮤지션만 남게 된다. 만약 뮤지션 영화에서 관중 하나가 고개를 돌려 자신과 같은 처지인 다른 관중을 보고 그를 얼싸안는다면, 이것은 분명 지독히 간지러운 휴먼 드라마로 내동댕이쳐지고 말 것이다. 가장 쉬운 공식이지만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이와 같은 단순한 방법을 간파하지 못한다. <샤인 어 라이트>가 아름다운 것은 어줍잖은 지름길로 달려가지 않고 올곧게 바닥에서부터 최정상으로 끌어가는 기본을 지키기 때문이다.

마틴 스콜세지가 롤링 스톤즈를 담는다고 했을 때 기대만큼 많은 기우가 앞섰다. 하지만 <샤인 어 라이트>를 보고 난 지금, 사상 최고의 악동들의 조우에 ‘기우’라는 단어 자체를 걸었던 것을 완벽하게 후회한다. 스콜세지의 감질나는 라이브 무비 <샤인 어 라이트>는, 8월 20일부터 열리는 신디영화제의 ‘심야 섹션’을 통해 관객 앞에 처음으로 선을 보인다. 밤새도록 신명나는 놀이판을 크게 벌려보고 싶은 락키드들에게 <샤인 어 라이트>는 엄청난 만족감을 선사하기에 충분한 영화라는 것을 ‘절대’ 부인하고 싶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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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오이마주(neoimages)와 영화 깊게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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