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터데스크 관리자

도움말
닫기
적용하기   첫페이지 만들기

태터데스크 메시지

저장하였습니다.

'다큐멘터리'에 해당되는 글 12건

  1. 2008.04.04 악동 마이클 무어, <식코>로 진중해지다 (2)
  2. 2008.01.16 한국 다큐멘터리의 진정성: 김동원 감독
하성태



“Ask not what your country can do for you, ask what you can do for your country.”

그러니까 마이클 무어가 닉슨을 소환하지 않았으면 ‘국가와 나와의 관계’를 의미심장하게 정의해 준 이 경구가 생각날 일도 없었을 거다. 초등학생들도 들어봤을 이 케네디의 명언(?)을 <식코 Sicko>에 출연한 이들이 되새김질 한다면 분노할까, 허탈할까.

뻔한 얘기 하나 더 해 보자. 역시 인간은 누구에게나 행복을 추구할 권리가 있다. 물론 헌법 소원을 제기하는 이들에게나 피부로 와 닿는 말일지 모르겠으나 어쨌건 대한민국 헌법 10조에 명시된 명문법이다. 또 여유 있는 이가 그렇지 못한 사람을 도와주는 건 예로부터 ‘인지상정’이라 했다. 고사를 들먹이지 않아도, 굳이 ‘평등’의 개념을 끌어들이지 않아도 충분하다. 물고기 두 마리와 빵 다섯 개로 5천명을 공평히 먹였던 예수의 기적. 대한민국의 수많은 교회가 무용지물이 아니라면 ‘오병이어’의 현재적 가르침은 바로 저 ‘행복 추구권’과 ‘평등’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이 모든 잔소리들을 늘어놓은 건 마이클 무어의 다큐멘터리 <식코> 때문이다. ‘환자, 앓는 이’란 뜻의 <식코>는 좌파 선동가이자 다큐멘터리 감독 마이클 무어가 지난해 칸 국제영화제에 선보인 작품이다. 미국에서의 흥행 성적이야 일각에서 선동이라 욕먹었던 <화씨 9/11>에 터무니없이 못 미쳤는데 다 그럴 이유가 있어 보인다. 이번에도 총기사건이나 부시 행정부, 9/11 테러 이야기냐고? 그럴 리가, 마이클 무어는 자신의 반대파를 끌어들일 정도로 영악한 감독이다. 그건 <식코> 의 말미, 자신의 최대 안티사이트 ‘Moore Watch.com’의 운영자 아내가 병에 걸렸고, 보험료가 없어 사이트가 폐쇄될 지경에 이르자 보험료를 대신 내줬다고 밝힌 대목에서도 알 수 있다. 안티팬의 보험료를 대신 내주는 이 아이러니, <식코>는 이렇게 미국의 기형적인 건강보험 체계를 정면으로 겨냥하고 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오바마와 힐러리의 대결이 연일 재미를 더해 가는 올 미국 대선에서도 의료보험체계는 최대 화두 중 하나로 떠올랐다. 경제와 이라크 문제와 더불어 오랫동안 대기업 중심으로 민영화되어 있는 의료보험 시스템에 미국 국민들이 의혹의 눈초리를 보내고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마이클 무어는 확실히 좋게 말하면 선견지명을, 나쁘게 말하면 약삭빠른 감독이라 볼 수 있다. <식코>에서 마이클 무어는 ‘섹시한’ 힐러리가 클린턴 시절 ‘건강보험계획’의 입안을 추진하다 공화당과 제약, 보험 업계의 반대와 로비에 밀려 좌초한 과거를 여지없이 들춰내고 있으니까. 제약회사와 보험업계, 그리고 이들의 로비를 받은 정치인들이 굳건히 버티고 있는 미 의료보험제도의 역사는 사실 닉슨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1971년 2월 17일, “그딴 의료 정책에 관심도 없던” 부통령 닉슨은 카이저 종신 보험의 “적은 돈의 지출로 더 많은 돈의 수입”을 모토로 하는 기업화 정책 제안을 받아들인다. 물론 그 다음날 공식 발표에서는 “세계 최상의 보건 정책”으로 둔갑해 버리지만. ‘악동’ 무어는 이를 놓치지 않고 녹취 테잎과 흑백의 뉴스릴을 통해 생생하게 까발린다.

단도직입적으로 미 건강보험 제도의 문제점이 무엇인가. 무어는 <식코>가 대략 3억의 인구 중 보험에 들었기에 안전하다고 느끼는 2억 5천만 미 국민들을 위한 영화라 주장한다. 국가가 개입하는 정책은 ‘사회주의적’이라고 교육받고, 공교육은 당연하지만 생명과 직결된 의료 행위는 개인의 능력으로 해결해야 한다고 믿어온, 민주주의 국가 미국이 자신들을 버릴리 없다고 자부해 온 바로 그들 말이다.

‘이 죽일 놈의 보험’이 국민들을 진짜 죽인다!

마이클 무어의 화법은 여전하다. 때로는 유머러스하고, 때로는 과도하다 싶을 정도로 직설적이고, 종국에 가서는 눈물샘을 자극하는 편집의 제왕 말이다. 어찌 보면 그가 매달려온 화두였던 국가와 나, 사회와 개인의 문제 또한 그대로다. 이번 <식코>가 두들겨 패는 미국의 이면은 전국민 대상 의료보험제도의 부재다. 영화의 오프닝에 등장하는 두 손가락이 잘린 릭이란 사내는 6만 달러짜리 중지와 만 2천만 달러짜리 약지 중 ‘더 값싼’ 약지를 선택해야 한다. 보험회사에 신체와 목숨을 담보로 잡고, 값비싼 로비 앞에 정부와 국회의원들이 짜고 치는 고스톱을 하는 이 모든 것이 ‘이 죽일 놈의 보험’ 때문이다. 노모를 들먹이며 보험업계를 대변하던 상원의원이 보험회사 CEO로 발 빠르게 변신하는 현실. 이를 조롱하는 무어의 화법에 문제를 제기하는 건 지나치게 무력한 패배주의가 아닐까.

돈과 보험이 있어도 하이에나와 같은 보험회사의 승인 거부로 치료를 받지 못하고, ‘more money’를 부르는 보험 회사는 수술 지연작전을 펼쳐 환자를 송장으로 만들고, 보험이 지정하지 않은 신약 사용은 엄금하는 행태. “이 환자로 돈을 벌 수 있을 까가 아니라 어떻게 환자를 낫게 해주냐를 먼저 생각해야 한다. 응급실에 들어갔을 때 ‘잠깐, 누가 이 돈을 내지’를 먼저 생각하고, ‘보험카드는요? 누가 데려왔죠?’를 첫 질문으로 듣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도와드릴까요?’가 되어야한다”는 마이클 무어 말은 <식코>를 지배하는 세계관이다. 똑같은 민주주의, 자본주의를 사는 세계인으로서의 미국인이 지금, 여기서 왜 이런 취급을 받아야 하나? ‘평등’하게 ‘행복을 추구할 권리’가 미국에서 소원한 일인가?

물론 영민한 무어는 피해자들의 눈물나는 사연을 구구절절이 늘어놓을 생각이 없다. 눈물을 머금고 보험이 승인되지 않았단 사실을 전해야하는 보험회사 직원, 막다른 순간에 보험 계약서의 허점과 피보험자의 과거 병력을 들춰내는 청부업자, 휴매나 생명의 의학전문 고문 일을 하다 양심선언을 한 의학 박사의 이야기는 비인간적인 보험 업계의 폐단을 다각적으로 드러내기에 충분하다. 이런 업계의 이윤추구와 함께 국가의 개입이 사회주의 정책과 등가라고 국민들을 길들여온 공포 정치가 90%의 미국인들이 근본적인 변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의료보험제도를 지탱해 온 힘이었다는 사실도 곁들여진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이를 위해 마이클 무어는 130일의 촬영 기간 중 캐나다와 영국, 프랑스를 둘러보는 수고도 마다하지 않는다. 미국보다 평균수명이 3년이나 긴 캐나다는 미국인들이 의료보험을 위해 결혼할 사람을 찾는 사이트가 운영중일 정도다(우리의 ‘베트남 처녀와 결혼하세요’와 비교해 보라. 그리고 친절하게도(?) 무어는 이 사이트의 주소를 엔딩 크레딧 중간에 실어 놓았다.) 더불어 사민주의=사회주의라는 의식이 팽배한 우리 사회에서는 당연히 언감생심인 영국과 프랑스의 전국민 무료 의료보험보장 제도와 복지시스템. 미국인 마이클 무어 또한 이를 극심하게 질투한다니, 이것이 바로 대한민국과 미국이 혈맹이라는 반증이지 아니한가.

좀 더 진중해진 마이클 무어의 직설화법

다시한번, 마이클 무어가 매달려온 화두는 언제나 시스템과 개인의 관계였다. 그를 스타로 만들어 준 <로저와 나>가 GM의 로저 스미스 회장과 고향 플린트, 그리고 자신을 반영한 작품이었다면, 미시적인 사회고발 프로그램 방송 <TV 네이션>, 대기업의 인원 감축과 정리 해고를 고발한 <빅원> 또한 크게 다르지 않다. <볼링 포 콜럼바인>의 콜럼바인 총기사건을 군수산업에 연결시키는 작업과 부시의 이라크 침공을 신랄하게 비판한 <화씨 9/11>은 그런 문제의식의 국가로의 확장이라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물론 그의 의도가 모두에게 지지를 받았던 것은 아니고 또한 그럴 수도 없다. <마이클 무어 뒤집어보기>라는 다큐멘터리가 반대의 목소리를 냈던 것처럼, 직설화법을 내기 위한 과도한 편집행위와 의도적인 왜곡은 <화씨 9/11>에 이르러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이란 프리미엄과 과도한 정치성과 결합되어 적지 않은 안티를 불러왔었다.

하지만 <식코>는 <마이클 무어 뒤짚어보기>라는 안티 다큐멘터리가 나올 정도였던 그가 변화하고 있음을, 그리고 앞으로의 행보도 믿어 의심치 않게 만드는 힘을 발휘한다. 독설과 비아냥은 줄었고, 뉴스릴의 사용 또한 현저히 줄었으며, 무엇보다 좀 더 적확하고 폭넓은 인터뷰 등을 통해 대상에 진실하게 접근하자고 하는 노력이 도드라진다. 그럼에도 왜 여전히 부시가 등장해야 하느냐고? 다큐멘터리라는 장르가 현재와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했을 때, 폭압적인 의료보험 정책을 변화시킬 지금의 수장이 부시이며, 또 그가 로비의 가장 큰 수혜자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 의료보험은 좀 더 큰 것들을 이야기하기 위한 하나의 도구다. 우린 인간으로서 도대체 누구인가. 왜 서구사회에서 우리만 무료 의료보장제도가 없는가. 이건 남에게 자비를 베푸는 거 아니라 자신과 우리 아이들을 위한 거다.”

이러한 목소리는 영화의 말미, 그가 취재했던 환자들을 데리고 쿠바로 향할 때 극에 달한다. 사실 시작은 전례가 없는 최고의 무상 의료서비스가 제공된다는, 빈 라덴의 수하 등 테러리스트들을 수용하는 관타나모 만 해군기지로 향할 생각이었다. “악당들과 똑같이만 해 달라”는 외침, 이건 지극히 ‘쇼’를 의식하는 무어다운 발상이다.

하지만 당연하게 쇼는 거절당하고 무어는 일행을 데리고 쿠바로 향한다. 혹시나 찾아간 약국에서 미국에서는 120달러인 흡입기를 5센트에 살 수 있는 아이러니. 악마 ‘카스트로’가 살고 있다고 교육받은 쿠바에서 일행은 고향에서는 꿈도 못 꿨을 친절한 서비스를 무상으로 제공받고 눈물을 흘린다. (쿠바로 넘어간 행위가 즉흥적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이것이 무어의 영화를 위한 계산일지라도 보는 이의 심금을 울릴 때, <식코>의 주제의식은 그 어떤 형식과 수단을 이겨낼 힘을 지닌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기존의 다큐는 대상을 끊임없이 관찰하고 대상과 자신과의 거리를 유지하며 그 시간 동안 발생하는 변화를 담는 과정이 주를 이룬다. 하지만 2000년 이후 만들어진 세 작품은 모두 이슈 혹은 거대담론이라는 무형질의 것을 대상으로 삼았다. 게다가 그의 화법과 형식은 그를 스타로 만들어 준 것은 물론 하고 싶은 이야기를 자유롭게 펼쳐낼 일종의 권력을 부여하기도 했다. 화법과 형식에 대한 호불호는 분명 각자의 몫이다. 또한 여러 인터뷰이들의 발언은 ‘여전히’ 편집했을 것이지만 언제나 다큐멘터리는 수많은 촬영 분 중 취사선택해야 하는 편집 행위가 필수불가결하다는 점을 잊지 말도록 하자. 그럼에도 <식코>가 미국의 한 국민으로서 비이성적인 제도를 돌아보는 성찰이 좀 더 무거워졌다는 사실은 부인하기 힘들어 보인다. “이 영화로 작은 불씨를 태워서 실제로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이야기를 나누고 실천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는 인터뷰가 ‘구라’가 아님을 납득시킬 만큼.

그리고 <식코>의 한국 개봉에 부쳐

<식코>의 국내 시사 직후, 진단검사의학 전문의 출신 영화평론가 황진미는 영화주간지 ‘씨네21’에 이례적으로 긴 단평을 실었다. “하지만 <식코>가 그저 미국 국내용 영화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공적의료보험이 실시된 지 30년(전국민의료보험으로 확대된 지 20년)이 한국에서도 '의료 사회주의' Vs. '의료 자본주의'의 논쟁은 여전히 유효하며, 새정부의 의료제도가 '당연지정제 폐지+민간의료보험 확대+영리법인화 추진' 으로 갈 것이 거의 확실해 보이기 때문이다”라며 관객들에게 “의료소비자이자 유권자인 관객의 눈이 밝아져야 한다”고 주문하고 있다.

영화 전문지의 단평 치고는 미 대선과 총선을 앞두고 또 한번 마이클 무어의 선동에 넘어간 평 아니냐고?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마이클 무어의 모든 다큐멘터리는 항상 한국 사회를 떠올리게 했다. 좋은 다큐멘터리가 미시사와 비정치적인 것을 통해 역사와 정치를 이끌어낸다는 점을 상기해 본다면 <식코>는 우리에게 더더욱 필요하다. 더욱이 이라크 파병이 국민 개개인과 상관없다고, 오히려 국익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던 이들이라면 <식코>는 거의 공포영화 수준일 게다.

개인적으로야 더 많은 관객들이 이 다큐를 보고 우리의 현실과 연결시켰으면 하는 바람이지만, 그것을 넘어 <식코>는 점점 더 동시대성을 잃어버리고 있는 우리 영화들에 대한 소중한 만면교사다. 그건 꼭 마이클 무어가 극영화 같은 다큐를 만들어서가 아니며 무어의 작업이 고매한 예술이라고 말하기도 조금은 머쓱하다. 그럼에도 <식코>는 자신의 땅에 굳건히 발을 디디고 세상의 공기를 느끼게 해줄 때야 말로 영화라는 예술의 가치가 더욱 빛을 발한다는, 오래 묵었지만 변치 않는 진리를 환기시켜준 것만큼은 틀림없어 보인다.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Favicon of http://dduckbae2.tistory.com BlogIcon Malick™  수정/삭제  댓글쓰기

    글 참 좋네요. 잘 읽고 갑니다.

    2008.04.04 18:30 신고
  2. 극장가서 볼래요  수정/삭제  댓글쓰기

    볼링, 화씨는 비디오로 봤는데 이건 극장에서 보고 싶네요

    2008.04.05 11:18




<상계동 올림픽>의 한 장면. 철거에 반대하던 한 남자가 땅바닥에 털썩 주저앉더니 엉엉 울기 시작한다. 그 남자는 큰 소리로 뭔가를 외치지만 마이크도 없는 상태에서 촬영된 영상인지라 무슨 소리인지 알아들을 수 없다. 김동원 감독의 다큐에는 말 못할 사연을 가진 사람들이 참 많다. 영화 속 시민들은 땅바닥에 주저앉거나, 세상에 등 돌리거나, 눈물을 쏟는다. 김동원 감독의 작품 속 사람들을 보고 있으면 자연스레 물음표가 따라붙는다. 그들은 누구일까? 그들의 삶에는 어떤 사연이 있는 걸까?

한국 다큐멘터리 영화계의 대들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김동원 감독. 한국 다큐멘터리의 존재는 그의 이름만으로도 커 보인다. 김동원 감독의 첫 작품은 <상계동 올림픽>(1988)이다. 변영주 감독은 이 영화에서 다큐멘터리와 카메라의 진정성을 발견했다고 한다. <상계동 올림픽>은 88올림픽을 준비하던 정부에서 도시 미관상의 이유로 빈민촌을 강제철거하고, 거기에 재개발 아파트를 세우는 계획을 추진하면서 시작되었다. 1987년 4월, 상계동 주민들은 기어이 동네에서 쫓겨난다. 갈 곳 없는 주민들은 “가난한 사람의 인권도 보장하라”고 외치지만, 그들에게 돌아온 것은 뚜렷한 대책이 없다는 관료들의 무책임한 답변뿐이다. 민족의 영광인 올림픽을 위해서 일부는 희생해도 된다는 막가파식 개발주의. 이처럼 비인간적인 대우에 상계동 주민들은 집을 잃고, 훈훈했던 이웃의 인심마저 잃는다. 주택재개발 사업의 일환으로 철거지역 주민들은 정들었던 집을 잃었을 뿐만 아니라, 임대 아파트를 준다는 보장도 받지 못한 채 길거리에 나앉아야 했다. 주민들 뒤로는 부동산 투기를 노리는 사람들의 검은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이 영화는 상계동이라는 철거지역과 올림픽의 이미지를 충돌시킨다. <상계동 올림픽>은 첫 장면에서 88 올림픽의 광고 영상을 보여주면서 동시에 철거촌의 흙먼지 날리는 이미지를 몽타주시킨다. 전경들과 철거 깡패가 들이닥친 현장에서 주민들은 땅바닥에 주저앉아 이렇게는 살 수 없다고, 우리가 인간이라면 이런 대우를 받을 수는 없다고 목 놓아 울어댄다. 김동원 감독은 주관적인 개입을 최소화하는 대신 카메라를 들고 현장에 뛰어든다. 그 과정은 치열하다. 흔들릴 수밖에 없는 카메라는 이 땅의 천박한 민주주의를 고발하겠다는 결의를 다진다.

김동원 감독이 철거지역 주민들에게 보인 관심은 <행당동 사람들>(2001)로 옮겨진다. 이 작품은 <상계동 올림픽>보다 현장성은 떨어지지만 감독이 고민하는 지점은 맞닿아 있다. 행당동에는 350세대가 모여 살고 있었고, 가난해도 전세금 500만원이면 온 가족이 한 지붕 아래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곳이었다. 이웃집 숟가락 개수까지 알 정도로 훈훈한 정이 넘치던 상계동. 이곳에 철거 깡패들이 들이닥치며 주민들에게 집을 비우라고 한다. 이 다큐멘터리는 주민들의 목소리를 옮기는 일과 더불어 전문가들의 인터뷰에서 철거지역의 문제점과 해결책을 제시하는 데에도 골몰한다. 행당동 사람들에게 시급한 해결이 필요한 문제는 ‘세입자 영구 임대 아파트 문제’이다. 영구아파트가 보장된다 해도 집이 철거되는 동안 주민들이 머물 수 있는 임시주거지가 있어야 한다. <행당동 사람들>은 두 편으로 만들어진 연작이다. 1편은 철거 깡패들과 대립하는 주민들의 투쟁의 역사이며, 2편은 행당동 주민들이 ‘공동체’를 결성해 임시주거지를 얻는 과정과, 그 곳에서 가난하지만 서로 돕고 살아가는 주민들의 일상을 담는다. 김동원 감독의 작품 속 사람들은 공동체를 통해서 ‘우리’의 문제를 함께 해결하고자 한다. 이는 한국 다큐멘터리 영화의 스테레오 타입이라고 볼 수 있다. 대부분의 한국 다큐들은 투쟁의 역사를 기록했고, 투쟁과정에서 연대를 통해 공동체를 이루는 모습을 담아왔다.

<행당동 사람들>에서 중요한 것은 카메라의 존재이다. 영화란 결국 카메라의 윤리와 태도로 존재하는 것 아니겠는가? 이 영화 안에서 김동원 감독이 들고 있는 카메라는 주민들과 하나가 된다. 감독-카메라-주민들이 영화 내에서 하나가 되는 순간, 카메라의 존재는 관객에게 잊혀 진다. 영화가 3인칭 내레이션으로 진행되기 때문에, 관객과 영화 사이에 거리두기가 생긴다. 다소 감상적이고 선동적인 내레이션은 휴머니즘을 자극한다. 하지만 내레이션이 개입하지 않는 유일한 장면인 철거 깡패들과의 싸움에서 존재하는 것은 카메라뿐이다. 이 때 카메라는 싸움 현장에서 뒤로 물러서지 않는 과감함을 보여준다.

김동원 감독의 카메라는 종종 윤리적인 태도를 보여준다. 비전향장기수들을 12년 동안 기록한 <송환>에는 한 다큐멘터리 감독의 윤리적이고 인간적인 태도를 볼 수 있는 장면들이 있다. 우연한 기회로 촬영을 시작했다는 김동원 감독은 비전향장기수들과의 첫 만남에서 어색함을 감추지 못한다. 그리고 조심스럽다. 영화 초반부에 김동원 감독은 비전향장기수들에게 이데올로기적이고 개인적인 상처를 건드리는 질문을 선뜻 하지 못한다. 또 영화 후반부에 비전향장기수와 그 가족들 사이에서 말다툼이 벌어지자 감독은 카메라를 든 채 집밖으로 나온다. 김동원 감독의 다큐 속에는 카메라가 촬영해야 할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의 구분이 명확하며, 상대방에게 불쾌감을 준다고 생각되는 장면에서는 카메라를 끄거나 마이크를 내밀지 않는다. 김동원 감독은 대화 장면에서도 카메라가 제3자라고 인식되면, 그래서 상대방이 불쾌하다고 느낄 수 있다면 카메라를 들고 자리에서 슬며시 일어난다. 김동원 감독은 작품에 현실을 기록해야 한다는 사명감이 앞서있지만, 때론 그 사명감보다 개인의 윤리적인 잣대를 먼저 세우기도 한다. <송환>이 비전향장기수라는 다소 민감한 사안을 건드리면서도 좌파적이지 않은 이유, 혹은 이 영화를 두고 감독의 이데올로기를 물을 수 없는 이유 역시 감독이 비전향장기수들을 인격체로 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송환>은 휴머니즘을 앞세우는 다큐다. 김동원 감독의 전작들이 그러하듯이 이 작품에서도 인간이 가지고 있는 웃음의 미덕과 눈물의 비애를 동시에 느낄 수 있다. 김동원 감독은 김영식 씨를 통해 가장 순박한 인간의 모습을 보았다고 한다. 그리고 그 속에서 인간이 선한 존재라는 걸 알았다고 한다. 비전향장기수들의 순박한 모습 뒤에는 전향의 상처가 있다. 0.75평의 독방에서 갖은 고문과 외로움을 참아가며 그들이 지키려했던 것은 무엇일까?

김동원 감독이 작품에서 공통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당대의 폭력성이다. 인간의 주거권을 말살하고, 인권과 자유의 가치가 무너지던 곳에는 어김없이 폭력이 존재했다. 혹은 폭력의 그림자가 버티고 있었다. <송환>은 비전향장기수들의 이데올로기를 묻기 이전에, 폭력에 저항하며 인간의 가치를 찾고자 했던 그들의 신념에 대하여 묻는다. 폭력 앞에 길들여지고 순종하는 것은 짐승뿐이다. 그들은 인간이기에 부당한 폭력에 저항한다. 폭력에 저항하는 자들은 인간의 마지막 남은 가치를 지키려 했던 것이다. 그 저항은 무의미하지 않았다.

<명성, 그 6일의 기록>은 6.29선언을 가능하게 했던 명동 성당에서 벌어진 6일간의 투쟁을 다루고 있다. 학생과 시민들은 자발적으로 명동에 집결했고, 그 곳에 미처 들어갈 수 없었던 넥타이 부대는 먼발치에서 “호헌철폐 독재타도”를 외친다. 이 작품만 보아도 폭력이 민주주의를 포박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6일간의 치열한 전투 속에는 화염병과 최류탄이 있으며, 학생들과 시민들은 독재정권에 온몸으로 저항하고 있었다. 이처럼 김동원 감독이 기록한 8 ․ 90년대는 저항의 역사이다. 그의 영화 속 사람들은 굳은 신념과 결의를 가지고 있었다. 이들을 담아온 감독에게도 다큐멘터리가 세상의 진실을 보여주는 창이라는 신념이 있었을 것이다. 김동원 감독의 작품은 어두웠던 시대를 밝게 비추어온 등대와도 같다.

댓글을 달아 주세요

BLOG main image
네오이마주(neoimages)와 영화 깊게 읽기
영화 비평 매거진 '네오이마주'의 공식블로그입니다. 더 많은 글은 http://neoimages.co.kr 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by woodyh98

카테고리

분류 전체보기 (521)
필진 리뷰 (260)
필진 칼럼 (149)
사람과 사람들 (55)
문화와 세상 엿보기 (10)
그리고... (41)

달력

«   2019/12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 3,158,893
  • 06

네오이마주(neoimages)와 영화 깊게 읽기

woodyh98's Blog is powered by Tattertools.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