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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희


데이비드 핀처의 영화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이하 <벤자민 버튼>)는 80세 노인으로 태어나 시간이 흐를수록 젊어지는 괴이한 운명을 타고난 한 남자의 인생을 다룬 다. 이 비현실적이고 요상한 이야기는 <위대한 개츠비(The Great Gatsby)>로 잘 알려진 미국 작가 F. 스콧 피츠제럴드의 단편소설 <벤저민 버튼의 기이한 사건>(The Curious Case of Benjamin Button)이 그 원작이다.

1922년에 발표된 이 초자연적인 단편은 그 당시 잡지사에 판매하기조차 어려운 글이었다고 한다. 작가 피츠제럴드는 ‘낭만적 상상력’이라는 발군의 재능을 통해 있을법하지 않은 사건에 설득력을 부여하고자 시도했다. 이처럼 현실적이면서도 판타지에 가까운 이야기, 그것도 단편소설을 3시간여에 이르는 장편영화로 옮기는 일은 만만치 않은 작업이었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이 영화의 감독이 <세븐> <파이터 클럽> <조디악>등의 센 영화를 만든 데이비드 핀처라는 점은 의외이면서도 한편으로는 고개를 끄덕이게 한다. 그의 유명한 전작들이 스릴러, 선과 악의 대립, 복수라는 표피 이면에 인생에 대한 진지한 고찰과 존재의 외로움을 잘 포착하고 있기 때문이다.

외양은 다르지만 영화 <벤자민 버튼>이 인생에 대한 성찰과 관계에 대한 정서적 울림을 품고 있다는 점에서 데이비드 핀처의 전작들과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친 남자들의 땀과 핏방울의 이미지로 기억되는 감독의 작품치고는 너무도 결이 고운, 따뜻한 한 편의 동화같은 느낌을 주는 <벤자민 버튼>은 여전히 낯설다.


시간을 거꾸로 사는 남자

1918년 여름, 미국의 뉴올리언즈. 대를 이어 단추공장을 경영하는 토마스 버튼(제이슨 플레밍)은 아내의 출산 소식에 부랴부랴 집으로 뛰어 들어간다. 하지만 아들을 얻은 기쁨도 잠시, 아내는 출산직후 숨을 거두고 담요에 싸인 갓난아기의 얼굴엔 주름이 자글자글하다. 충격을 받은 아버지는 80세 노인의 얼굴을 갖고 태어난 아들 벤자민을 어느 양로원 앞에 버린다. 마침 아기를 발견한 양로원 직원 퀴니(타라지 헨슨)는 벤자민(브래드 피트)을 친자식처럼 키운다. 독실한 크리스천인 퀴니는 아이를 낳지 못하는 처지라 벤자민을 하늘이 내린 선물로 받아들인다.

벤자민이 버려진 '양로원'이라는 공간은 주인공의 외로운 삶을 지탱해주는 보금자리인 동시에 영화에 특정한 정서를 불어넣는 역할을 한다. 매일 늙고 병든 이들이 저 세상으로 떠나면 또 다른 노인들이 여생을 보내기 위해 찾아오는 곳. 양로원이란 곳은 그렇게 조금은 특별한, 비일상적인 장소이다. 늙고 병드는 것, 삶과 죽음을 동시다발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영화 속 양로원에 등장하는 무명의 노인들에겐 극적인 사건보다 오늘의 식사 메뉴와 날씨 같은 소소한 일상이 주요한 화제가 된다. 열정과 갈등으로 출렁이는 인생의 정점을 보내고 이제 황혼인 그들은 매일 해가 뜨고 지는 것에도 감사한다. 삶의 고비들을 넘기고 여전히 생명을 유지하고 있는 노인들이 인생에 관조적인 건 당연한 일일 것이다. 환희나 유난법석이 아닌 차분함과 포용이 머물고 있는 곳. 가장 극적인 사건인 죽음마저 자연스러운 일상이 되어버린 곳이 바로 양로원이다. 그래서 남다른 병을 가진 벤자민을 기이한 괴물이 아니라 연민의 대상으로 바라볼수 있었을 것이다. 늙은이들로 가득했던 양로원에 갓 태어난 아기의 존재란 오히려 생기와 활력을 제공한다. 어린 벤자민을 옆에 앉혀놓고 피아노를 쳐주는 할머니와 일곱 번이나 번개를 맞고도 살아남은 이야기를 반복하는 할아버지. 그렇게 새로운 가족들 사이에서 벤자민은 평화로운 일상을 영위해간다.

피츠제럴드의 원작 소설에서는 양로원 이야기가 없다. 단편의 뼈대에 살을 붙이는 과정에서 바뀐 설정이겠지만 벤자민의 삶에 큰 영향을 미쳤다는 점에서 의미있는 각색이라는 생각이다. 양로원이란 공간만큼 노인의 외모를 한 아기가 자연스러운 존재로 받아들여질만 곳이 또 있을까. 하루하루 죽음을 기다리는 노인들 속에서 나이를 먹을수록 점점 젊어지고 건강해지는 아이 벤자민은, 축복받은 존재로 사랑을 받으며 자라난다.




사랑과 상실에 대한 성찰

12살이 된 벤자민은 할머니를 만나러온 어린 소녀 데이지를 만나게 되고, 첫눈에 호감을 느낀다. 잔잔한 일상이 이어지고 어느덧 17살의 청년으로 성장한 벤자민은 독립하기로 마음먹고 우연히 배를 타게 된다. 그는 망망대해를 떠돌며 새로운 여자도 만나고 2차 대전에 참전하는 등 다양한 경험을 하면서 진정한 남자가 되어간다. 벤자민은 선원으로 세상을 떠돌면서도 데이지(케이트 블란쳇)에게 지속적으로 편지를 띄운다. 데이지는 무용을 배우면서 활달하고 자유로운 영혼을 지닌 숙녀로 성장해간다. 전쟁이 끝난 후 집으로 돌아온 50대 외모의 벤자민은 어느새 성숙한 처녀가 된 데이지와 재회한다.

그러나 특별한 운명을 타고난 벤자민의 콤플렉스가 데이지를 밀어낸다. 그러던 어느 날, 각각 사십대 후반과 사십대 초반이 되어 다시 만난 벤자민과 데이지. 건장한 육체를 가진 청년과 아름답고 성숙한 아가씨로 만난 그들은 열정적인 사랑을 나눈다. 하지만 자신의 운명이 사랑하는 이들에게 걸림돌이 될 것이라 판단한 벤자민은 데이지의 곁을 떠난다.

벤자민을 양로원에 버린 후 먼 발치서 아들이 성장하는 모습을 지켜보던 토마스는 결국 자신의 죽음을 앞두고 아들을 찾아와 용서를 빈다. 그렇게 벤자민은 자신이 사랑했던 데이지와 어머니 퀴니, 친아버지와 양로원의 가족들을 차례차례 떠나보낸다. 나이를 거꾸로 먹으며 점점 젊어지는 그도 세월이 몰고오는 이별 앞에서는 속수무책이다.

영화 <벤자민 버튼>은 벤자민이라는 한 남자의 삶을 통해 사랑과 상실에 대한 묵직한 여운을 남긴다.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떠나고 헤어지고 죽음을 맞는 인생. 때때로 가장 소중한 것을 잃기도 하지만, 그것이 인생의 공평한 본질이란 걸 깨닫는다면 조금은 더 담담하게 그 모든 것들과 조우하게 될까.




아이러니한 인생, 세월의 딜레마

벤자민과 데이지,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은 짧았지만 인생의 정점에 강렬한 기억 한 점 남기고 각자의 삶으로 돌아간 것처럼, 소중한 순간을 같이 보낼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한 인생도 있을 것이다. 그 때 그 곳에서 내 곁에 있는 이에게 진심을 보여준다면 누구보다도 벅찬, 황홀한 삶을 살았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설령 어쩔수없이 나의 진심을 보여주지 못했을 지라도, 너무 상심하지 말기를…. 그것 또한 당신의 본질이자 한계일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 순간 딱 그 만큼만 성숙했을 뿐이고, 그 세월들을 겪고 난 우리는 이제 한 뼘 더 성장해서 다시 그 시절을 아름답게, 혹은 아프게 회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모든 것들을 끌어안기에 인생은 참으로 짧으니 후회 없이 그 순간을 보냈노라고, 담담히 말할 수 있게 되길 바랄 뿐이다.

느리고 우아한 클래식같은 영화 <벤자민 버튼>은 그저 흘러간다고 생각한 인생에 대해 거꾸로 가는 시계처럼 질문을 던진다. 당신의 인생의 바늘은 몇 시에 머물러 있는지? 이 영화가 던지는 진지한 화두에 우리는 어떤 대답을 들려줘야 할까. 마음은 청춘인데 몸은 늙고, 마음은 늙었는데 몸은 젊은, 이 아이러니한 벤자민의 삶이 우리네 인생과 별반 다르지 않다면, 그 딜레마에서 벗어날 수 있는 지혜를 어디서 찾아야 할까.

시계바늘을 거꾸로 돌릴 수 없는 것처럼 세월의 흐름을 거스를 수는 없지만, 내가 살고 있는 현재와 좀 더 당당하게 맞서고 지난 시간들과는 화해할 수 있기를. 그래서 좀 더 지혜롭게 어른이 되어 가고 멋지게 늙어간다면, 실수와 오해와 이별을 잠잠히 받아 안을수 있게 된다면, 그것이야말로 세월이 당신에게 주는 가장 귀한 선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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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닉 룸] 연속된 아이러니와 냉소

필진 리뷰 2007.08.26 21:04 Posted by woodyh98
2007.08.26



이 방에 들어 갈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이 안에 있는 사람들을 없애기 위해서는 오히려 밖으로 나오게 해야 한다. 쫓는 자가 쫓지 않고 오히려 밖으로 쫓기는 자를 끌어내고 있다. 시간이 흘러 오히려 쫓는 자가 방안에 갇히고 쫓기는 자가 쫓는 자들을 없애려 한다. 폐쇄된 공간 안에 더욱 폐쇄된 공간이 있다. 이런 아이러니한 상황이 연속적으로 등장하는 영화, 이것이 데이빗 핀처의 [패닉 룸]이다.

영화의 주무대가 되는 뉴욕 맨하탄 가의 고풍스런 집, 벽돌로 지어진 오래 된 집에 두 모녀가 새로 이사를 온다. 이 집은 집밖과 비교해 어둡고 음침한 공간이다. 밝은 외부에서 어둡고 음침한 공간으로 들어온 주인공 모녀. 그러나 이들이 이 집에 머무르게 되는 것도 잠시, 그들은 뜻하지 않은 삼인조 강도의 침입에 이른바 '패닉 룸'이라는 공간으로 피하게 된다. 이 패닉 룸은 가장 안전한 곳이라는 이미지에 -패닉 룸이 집 안방에 위치하고 있다는 것은 그래서 의미 심장하다- 지극히 밀폐된 공간이라는 이미지가 더해진다. 이 방은 외부에서는 절대 침입할 수 없는 그리고 이 방안에서는 집안의 모든 곳을 지켜 볼 수 있는 모니터 시스템이 갖춰져 있다. 바꾸어 말하면 이 집에서 가장 밀폐된 공간이 오히려 가장 확장적일 수 있다는 이야기다. 아이러니는 바로 이런 이미지에서 발생한다.

좀 더 이 아이러니에 대해 살펴보자. 삼인조 강도가 처음 집으로 들어 왔을 때 버냄(포레스트 휘태커)은 잠든 딸과 주인공 멕(조디 포스터)을 본다. 아무도 없을 것이라는 버냄의 기대는 이 때 물거품이 되고 이 순간 멕과 딸, 그리고 강도들은 모두 집안이라는 공통된 공간에 위치한다. 두 그룹이 공통된 공간에 있을 때는 아직 사건이 일어나지 않는다. 강도들이 자신들의 계획에 대해 가벼운 말다툼을 하고 난 후 강도들의 침입을 눈치 챈 멕과 딸은 가까스로 패닉 룸으로 피신한다. 한 공간 안에 있던 두 그룹, 아직 쫓고 쫓기는 것이 아닌 상태에서 이제 쫓는 자와 쫓기는 자의 두 그룹으로 갈려지는 순간이기도 하다. 여기서 상황은 묘하게 돌아가는 것이다. 쫓는 자들이 오히려 쫓기는 자들을 자기 쪽으로 불러내려 하는 것이다. 여기서 패닉 룸이라는 이미지가 등장한다. 가장 안전하기 때문에 오히려 가장 밀폐되면서 확장적이 되는 공간, 모든 것을 지켜 볼 수 있는 공간, 그래서 쫓는 자들이 감히 어쩔 수 없는 아이러니가 발생하는 것이다. 이런 아이러니는 뒷받침 해 줄 수 잇는 증거가 있다. 그것은 바로 멕이 핸드폰으로 이혼한 전 남편에게 연락하려던 순간이다. 후에, 이 일은 사태를 악화시키는 단초가 되는데 여기서 한가지 가정을 해 볼 수 있다. 만약 멕이 남편과 통화를 하지 않았으면 어땠을까 하는 점이다. 그렇다면 강도들은 별다른 수를 찾지 못했을 것이다. -패닉 룸이 불가침의 공간이라는 전제가 깔려 있는 가정이기도 하다- 이 가정은 결국 집보다는 패닉룸이 더욱 확장적인 공간이라는 아이러니에 대한 반증이기도 하다.

ⓒneoimage핀처의 영화에서 이런 밀폐된 공간과 아이러니는 흔히 나오는 것이기도 하다. 멕의, 새로 이사온 집은 [에일리언3]의 감옥 행성과 맞닿아있고 거기에 [세븐]의 이름 모를 도시, [더 게임]의 주인공이 결코 빠져나갈 수 없는 덫과 같은 게임과 같다. 이런 밀폐된 공간은 영화 안에서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주며 얽히게 되는 단초가 된다. 핀처가 자신의 영화에서 주된 설정으로 다루고 있는 것은 바로 이런 것들이다. 한정된 공간으로 밀려진 인물들이 거기서 어떻게 해쳐 나오나 하는 것이다. 이들을 서로 구원받거나 얽혀 있게 만드는 것은 모성애([에일리언3])일 수도 있고, 말 그대로 꿈같은 게임일수도 있고([더 게임]) 선과 악의 뫼비우스의 띠 같은 알레고리([세븐]) 일 수도 있다. 그리고 결코 인물들이 여기에서 빠져나갈 수 없고 빠져나가려 하지 않는 다는 점에서 아이러니가 발생하는 것이다. ([파이트 클럽]에서 주인공의 이중인격은 이런 아이러니의 대변이다)

핀처는 이렇게 자신의 영화에 전반적으로 흐르는 아이러니를 아우르는 힘을 놀랍게도 내러티브나 혹은 사건의 리듬에서 찾지 않는다. 바로 카메라에서 찾는다. 한 프레임 속의 미쟝센을 뜻하는 게 아니다. [패닉 룸]에서의 카메라는 도무지 거칠 것이 없어 보인다. [파이트 클럽]의 첫 장면을 기억한다면 [패닉 룸]에서의 카메라는 [파이트 클럽]의 버전 업으로 느껴진다. 카메라가 강도들이 처음 집으로 침입을 시도 할 때 종횡 무진 움직이는 모습은 마치 영화에 나올 수 있는 모든 샷의 각도를 보여 주는 듯 하다. 거기에 카메라는 장애물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 마구 뚫고 지나간다. 방과 방 사이, 부엌의 의자 사이, 창살 사이, 조그만 구멍 사이에서도 카메라는 질주한다. 패닉 룸과 안방(혹은 집 전체)의 경계, 바로 아이러니가 발생하게 되는 그 기묘한 시점에서 카메라는 양방향을 마구 넘나드는 것이다. 그러므로 영화는 이러한 카메라에 의해 그 스스로 아이러니의 해결을 보고자 하는 듯 하다. 그리고 이런 아이러니들이 영화의 내러티브가 된다.

아무튼 이런 아이러니를 아우르는 속에서 인물들은 방과 방 사이에서 각각의 성격대로 아이러니를 해소하려 한다. 버냄은 자신의 양심에 때라 행동하고, 주니어는 그 스스로의 약한 성격이 그대로 도출되며 라울은 자신의 포악한 면을 여과 없이 드러내게 된다. 그러나 이 해소의 차원에서 이 삼인조 강도 중에 미묘한 위치에 걸쳐있던 버냄만 살아 남는 다는 사실은 자신의 아이러니가 곧 패닉 룸과 집과의 아이러니의 충실히 따른 결과물로 보인다. 결국 [패닉 룸]은 연속되는 아이러니의 결과물이며 이는 핀처가 그 동안 보여주었던 현대 미국 사회에 대한 하나의 가치 판단이라고 볼 수 있다. 그는 [세븐]에서 보여주었던 절망적인 대도시의 풍경을 뉴욕이라는 그리고 뉴욕에 있는 한 고풍스런 아파트로 옮겨와 더욱 세밀하고 축소 시켜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런 연속되는 아이러니들이 결국 말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

9.11 테러 이후 미국인들에게 엄청난 충격과 안전에 대한 각별한 관심을 가지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이 테러는 [패닉 룸]에 그대로 적용될 수 있어 보인다. 아무런 이해 관계에 얽혀있지 않은 주인공과 딸은 갑작스런 테러에 패닉 룸으로 피신하지만 결국 그들은 테러를 온전하게 피해 가지는 못한다. 그들은 이 테러를 이기기 위해 나름대로 정신적 육체적 피해를 입고 여기에 덧붙여 이혼이라는, 가정의 분열 또한 극복하지 못한다. 즉, 가장 안전한 공간이라는 패닉 룸조차 모든 것을 피해 갈 수는 없다는 반증인 셈이다. 이거야말로 정말 아이러니컬하지 않은가. [세븐]에서 끝없는 악의 구렁텅이와 한없는 도시의 절망을 보여주었던 감독은 결국 [패닉 룸]을 통하여 감독은 세상에 대해, 또 지금의 미국 사회에 대해 더 이상 숨을 곳이 없다라는 끝없는 냉소를 던지고 있으며 또한 [세븐]에서 시작하여 [파이트 클럽]에서 심화된 이런 냉소는 마침내 현실 사회와 현실의 인간들에게로 안착한다. 결국 그렇지 않은가? 숨을 곳 하나 없는 세상에서 우리는 어떻게든 살려고 발버둥치고 있으니. 이거야말로 정말 지독하고 절망적인 냉소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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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8.24


잊지 말아야 할 것들이 있다. 밝혀지지 않은 미궁 속에 빠진 사건들. 그로 인해 가장 아파하는 것은 피해자들 혹은 그의 가족들이지만 사건에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우리 역시 그것을 기억해야만 한다. 사람들은 쉽게 잊으려고 한다. 그래서 때로는 사건들이 방치되고 숨겨지기도 한다. 진실을 왜곡하는 사람들이 우리 곁에는 항상 존재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 진실 규명을 위해서라도 ‘꼭’ 미궁의 사건을 밝혀내야 하는 것이다.

<조디악>은 얼핏 봉준호 감독의 <살인의 추억>을 연상케 한다. 음흉했던 시기, 갑작스레 연쇄살인사건이 일어나고, 이유 없이 사람들이 죽어가지만 형사들은 허둥되기만 한다. 범인은 보이지 않는다. 안개 속 연기처럼 나타났다 사라지고를 반복하는 범인은 주인공들의 내면을 괴롭게 한다. 그래도 두 영화의 주인공들은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범죄자의 뒤를 쫒는다. 비슷하게 보이는 두 영화지만 차이점이 존재한다. 두 영화의 결정적 차이점은 <살인의 추억>이 피해자 중 살아남은 자를 추적해 나갔다면, <조디악>은 철저하게 용의자와 사건들을 객관적으로 파악하고 따라갈 뿐 마지막까지 사건의 가장 핵심을 가지고 있는 ‘살아남은 자’를 만나지 않는 것이다. 관객은 오히려 그 ‘살아남은 자’의 기억을 듣고 싶어 하지만 영화는 그의 한마디조차 드러내려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관객은 끝까지 숨죽이며 사건을 바라보아야 한다. 어쩌면 이 영화에서 중요한 것은 ‘범인이 누구냐?’라는 것이 아니라, ‘이 사건을 과연 포기하지 않고 달려들 사람이 존재할 것인가?’일 것이다. ‘조디악’사건 해결의 일련에 서 있던 사람들이 하나 둘씩 물러나고 이제 오로지 남은 것은 삽화가 그레이스미스. 그는 신문사의 삽화를 그리며 가족과 살아가는 지극히 평범한 시민이지만, ‘조디악’사건에 대해서 대단한 관심을 보인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모두가 포기하는 이 사건에 대해서 그는 끊임없이 파고든다. 무식하리만치 사건에 달려드는 그를 보며 주변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한다. 경찰과 형사들과 같은 전문가들도 해결하지 못하는 이 사건에 대해서 그와 전혀 관련이 없어 보이는 소시민이 죽기 살기로 달려드니 말이다.

ⓒParamount Pictures and Warner Bros. Pictures Present이것은 ‘진실’에 대해서 데이비드 핀처가 바라보는 은유의 시선일지도 모른다. 공권력을 가지고 있는 형사들과 그 공권력을 좌지우지하는 신문사. 그 누구도 ‘진실’을 규명해 내지 못한다. 오히려 모두가 알고 싶어 하는 그 ‘진실’ 규명을 목전에 두고 방관하거나 다른 길로 간다. 하지만 그레이스미스는 자신의 일도 아닌 그 ‘진실’ 규명을 위해서 자신의 직업과 가족마저 뒤로 한 채 몸을 던진다. 그러니 어쩌면 ‘그레이스미스’라는 인물은 사건의 ‘진실’을 알고 싶어 하는 대중들의 내적 심리의 최대한의 적극적 표현인 것이다. 해결하지 못한 지나간 사건들은 그저 ‘사건’일뿐 다른 말로 명명할 수 없다. 그것은 ‘진실’ 혹은 ‘거짓’으로 이야기될 수 있겠지만 그 누구도 알 수는 없다. 하지만 그 사건을 해결했을 경우에는 우리는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거짓’임을 알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 ‘진실’과 ‘거짓’ 사이에서 그 정체를 분명하게 밝히려는 마음가짐을 소시민에 불과한 그레이스미스를 통해서 핀처는 드러내려 한 것이다. 그래서일까? 한번도 피해자의 진술을 듣지 않았던 감독은 마지막 장면에서 ‘조디악’ 사건에서 살아남은 자가 실제 범인을 지목하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소시민의 무모하리만치 적극적인 노력이 헛되지 않았음을 알게 해준다. 그래서 더욱더 감동적으로 다가온다.

오랜만에 들고 온 핀처의 <조디악>은 그의 전작들을 다시 한번 바라보게끔 한다. 더불어 무수히 많이 만들어지고 있는 그저그러한 할리우드 영화 속에서 우리가 지나치기 쉬운 <조디악>과 같은 가치 있는 작품을 발견할 수 있는 재미도 느낄 수 있게 해준다. 아무 이유 없이 살인을 저지르는 연쇄살인마의 범죄 앞에서 속수무책인 우리들이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 지에 대한 윤리적인 대응에 대한 교훈은 보너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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