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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보고 쓴 디워 이야기

필진 리뷰 2007.09.10 07:59 Posted by woodyh98

2007.09.09


* 보지 않고 쓴 글이므로 당연히 스포일러 없음.
* 주(註)가 많으므로 참을성이 없는 분은 읽지 않아도 무방함.

많은 사람들이 스토리의 개연성 부재를 들어 ‘디 워’를 낮게 평가하지만 사실 스토리는 영화를 이루는 하나의 요소일 뿐이다. 스토리가 극적 긴장을 유발하지 않음에도 높은 평가를 받는 영화는 손에 꼽을 수 없을 만큼 많다. 유리 놀슈타인의 ‘이야기 속의 이야기’는 그 제목이 주는 기대와 달리 거의 요약이 불가능하거나 무의미할 만큼 스토리가 분절되어있지만 애니메이션 사상 최고 걸작으로 꼽히며1) 고다르와 타르코프스키 영화의 가치는 결코 스토리로 설명되지 않는다. 오히려 평론가들이 선호하는 예술 영화일수록 스토리가 느슨한 경우가 많은 점을 볼 때 스토리가 부실하다는 ‘디워’의 혹평은 아이러니컬하기도 하다.

물론, 느슨한 스토리가 바로 예술 영화를 의미하진 않는다. ‘이야기 속의 이야기’는 프레임 안에 담긴 풍부한 상징과 표현이, 그리고 고다르와 타르코프스키의 영화들에겐 다른 형태의 정교한 내러티브가 존재한다. 그런데, 이 지점에서 묘한 착시현상이 일어난다. 그건 관객의 감정 이입을 목표로 하는 대중영화에선 스토리가 중요한 반면 작가의 스타일이 우선시되는 예술 영화에선 스토리보다 이미지나 대안적인 내러티브 구조가 더 중요하다고 보는 이분법이다.2)

그렇지만 대중영화를 스토리 중심으로 이해하는 것은 1914년 그리피스의 ‘국가의 탄생’이 등장한 이후 형성된 하나의 관습일 뿐이다. 그 이전의 영화와 관람 형태를 보면 전혀 다른 양상을 발견할 수 있다. 이는 ‘디워’와 둘러싼 현상을 이해하는데 어떤 시사점을 준다.

가령 1895년 그랑 카페에서 영화 상영을 기다리던 관객들이 기대했던 것은 감동적인 스토리가 아니라 첨단 테크놀로지가 보여줄 충격이었다. 사실 뤼미에르의 영화 뿐만 아니라 초기 영화의 스토리를 현대 영화와 같은 맥락에서 논할 수 있는 지조차 의심스럽다. 우리는 특정 시간대에 상영되는 단일한 프로그램의 영화(가령 ‘디워’)에 익숙하지만 초기 영화에선 전혀 사정이 달랐기 때문이다. 그랑 카페에서 상영된 영화는 ‘뤼미에르 영화 묶음’이었지 개별 영화의 연속 상영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억지로 스토리를 요약하면 이렇게 된다. ‘기차가 도착했다 떠난다-공장문이 열리고 노동자들이 퇴근한다-기마대가 파리를 행진한다-뤼미에르가 아이에게 우유를 먹이고 있다....’ ‘기차의 도착’과 ‘뤼미에르 공장 노동자의 퇴근’등을 개별적인 영화로 이해하는건 현대의 관습을 따른 것일 뿐이다.

이후 영화가 널리 보급되면서 첨단 테크놀로지에 대한 호기심은 사라졌지만 초기 영화의 위와 같은 특징은 오랫동안 이어졌다. 영사기사들은 창고에 쌓여있는 개별 필름들을 편집해서 새로운 영화를 창조(?)했고 극장주는 그렇게 창조된 영화뿐만 아니라 만담, 짧은 연극 공연등이 한 세트로 묶인 프로그램을 진행하곤 했다.3)

그러므로 이 당시 관객들이 영화에 기대한 것은 스토리보다 직접적이고 감각적인 쾌락이었다는 사실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쾌락은 오케스트라의 연주거나 변사의 유머섞인 설명이기도 했고(유성영화가 도입된 후 이 둘은 빠르게 사라졌다) 멜리에스가 선보인 마술적 효과거나 뤼미에르의 조수들이 오지에서 찍어온 이국적 풍경이기도 했다. 때론 애국심도 한 몫을 차지했다. 미국-스페인 전쟁은 당시 침체기에 접어들었던 미국 영화계를 되살린 일등공신이었다. 전쟁이 터지자 극장은 전쟁 뉴스를 보려는 애국적인 관객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4)

물론, ‘디 워’는 스토리를 갖고 있는 장편 영화라는 점에서 ‘초기 영화’와 구별된다. 그러면 관객의 쾌락이 아니라 영화의 미학적 구성을 놓고 ‘디 워’를 평가하면 어떨까? 앞에서 밝혔듯 영화를 보지 않은 사람으로서 뭐라 이야기하기 어렵다. 다만, 심형래 감독이 초기 영화처럼 종종 영화 외적인 텍스트를 영화 안으로 끌어들이거나 디에제시스의 환상을 깨곤 했다는 점만큼은 흥미롭다.5)

가령 ‘영구와 땡칠이’는 ‘어린이 여러분, 영구를 불러보세요.’라는 나레이션으로 시작하고 어린 관객들이 영구를 부르자마자 ‘영구, 없다’고 외치는 심형래의 등장으로 이어진다. 이는 ‘영구’에 대한 영화외적인 지식 없이는 이해할 수 없을뿐더러 관객에 대한 직접적 호명이 영화적 쾌락을 선사한다는 점에서 대개의 대중영화와는 다른 독법을 필요로 한다. 보진 않았지만 ‘디 워’ 후반부의 심형래 내레이션 또한 이러한 심형래 영화의 전통을 이어받고 있는 듯 하다.

물론, ‘다름’이 바로 미학적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거기에 관객에 대한 직접적 호명이나 다큐멘터리적 요소의 삽입이 기왕의 예술 영화, 특히 고다르 영화에서 이미 풍부하게 나타났으며 문제는 그 의미와 일관성이라는 반론 또한 충분히 가능하다.6) 다만 심형래 영화에 대한 평가와 분석, 이해가 그 ‘다름’을 무시하고 이뤄질 수 없다는 점만큼은 분명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디 워’의 스토리가 부실하다는 지적은 있을 수 있지만 영화도 아니라는 식의 평가는 과도하다. 아울러 그 ‘다름’이 호불호를 떠나 거의 언급되지 조차 않고 있다는 사실 또한 유감스럽다.7)

그렇지만, 보다 근본적인 질문 앞에 이러한 유감도 초라해진다는 점을 고백해야겠다. 그 ‘다름’이 지금 얼마나 중요하냐는 것이다. 디 워의 형식이 다른 대중 영화와 얼마나 다른지를 아무리 밝혀낸들 과연 디 워를 둘러싼 수많은 소동을 설명할 수 있을까?

영화는 영화만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순수론자들이 있지만 사실 이는 현실에서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영화를 둘러싼 사회적 담론과 실천은 끊임없이 개별 영화에 대한 우리의 기억에 침투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떤 영화에 대해 정보를 얻은 뒤 표를 구매하거나 시사회에 참석하고 극장 안을 구경한 뒤 영화를 보고 나와 누군가와 그 영화에 대해 이야기를 한다. 이러한 각각의 행위는 영화에 대한 우리의 기억을 구성하고 재창조한다. 우리는 자신이 본 영화에 대해 ‘순수하게 판단’했다고 착각하지만 사실 그 판단은 ‘시사회’에서 보았는지(이 경우 대개는 더 너그러워진다. 공짜니까.) 제 값 다 내고 극장에서 보았는지(이땐 반대로 스크린 구석구석 값을 하는지 따지기 십상이다) 또, 에어컨이 빵빵했는지, 다리 밑에서 쥐가 돌아다니는지에 따라 달라진다. 그 뿐인가. 흔히 이야기하듯 영화 보기 전의 기대치에 따라 달라지고(생각보다 괜찮네, 또는 후지네) 본 이후엔 같이 본 사람과 이야기하며 다시 기억을 재구성한다.(아, 그 장면이 그런 거였어? 몰랐네.) 심지어 영화를 분석하는 이들조차 이는 예외가 아니다. 고다르와 베르히만의 여성 편력이 이들 영화에 대한 페미니스트들의 평가에 전혀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고 난 믿지 않는다.

결국, ‘디 워’에 대한 논란은 가장 근원적인 질문으로 돌아온다. ‘영화란 무엇인가.’ 당신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왜 디 워는 영화인가(혹은 아닌가). 당신의 머릿 속에 있는 영화는 무엇으로 구성되었는가.

답은 각자의 몫이겠지만 나는 ‘영화는 너무 이해하기 쉬워서 영화만으론 설명할 수 없다’는 점을 이야기하고 싶다.8) 가령 ‘디 워 현상’은 파시즘의 징조인가.(그렇다면 한국의 지식인이여, 총 궐기하라!) 영국의 훌리건처럼 양극화 시대를 살고 있는 대중들의 일탈인가.(한국의 지식인이여. 궐기하지 말고 디워 팬들을 따스하게 감싸 안자.) 우리 민족에게 유전적으로 각인된 민족주의적 요소의 발현인가.(시간이 지나길 기다리자) 그냥 일부 네티즌의 놀이와 소동에 불과한가?(난 지금까지 헛고생했네.)

註:
1) 개인적으로 국한된 경험에 따르면 ‘이야기 속의 이야기’는 ‘디 워’처럼 정규 교육을 마친 사람들보다 아이들이 더 좋아하는 경향을 보인다. 과연 스토리 위주의 이해는 교육의 산물일까?

말 나온 김에 한마디 더. 난 ‘이야기 속의 이야기’같은 걸작 애니메이션을 상설 상영하는 아동 전용 극장 하나 없는 나라에 살고 있다는 사실이 슬프다.

2) 이러한 이분법은 종종 시나리오와 감독의 관계로도 표현된다. 대중영화에선 무엇보다 ‘시나리오’가 중요하지만 작가 영화에선 ‘감독’의 독창성을 중시한다.

3) 초기 영화의 형태에 대한 설명은 크게 두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현대 영화의 맹아적 형태로 보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현대와는 다른 종류의 영화로 보는 것이다. 이러한 입장 차이는 ‘초기’를 뜻하는 용어 선택에서도 드러난다. 전자의 사람들은 종종 primitive를, 후자는 early를 선호한다. 후자의 학자 중에선 초기 영화의 상영 형태에 대해 오늘날의 멀티미디어와 흡사하다는 주장을 내놓기도 한다. 더 자세한 설명이 필요하면 알아서 공부하시라.

4) 초기 영화가 구현했던 ‘직접적인 감각적 쾌감’은 대중영화가 스토리 중심의 장편영화로 재편된 이후에도 슬랩스틱, S.F.의 현란한 특수 효과, 뮤지컬 영화의 안무 등 다양한 형태로 존재해왔다.

5) 디에제시스의 환상을 지키기 위해 배우가 자신을 쳐다보는 관객이 없다고 가정한 채 연기해야 한다는 절대 법칙은 (그래서 배우는 절대 카메라를 쳐다보지 않는다) 초기 영화에서 종종 무시되곤 했다. 배우들은 직접 관객에게 웃거나 손을 흔들며 인사를 하기도 했다. 또, 초기 영화는 영화외적인 텍스트를 전제한 채 제작되기도 했다. 예를 들어 같은 고전을 극화할 경우 초기 영화는 ‘이미 관객들이 이 고전에 대해 잘 알고 있다’는 가정하에 스토리가 구성되곤 했다.

6) 내가 아는 어느 대학 영화과 교수는 심형래 영화의 이런 특징을 놓고 ‘포스트 모더니즘’으로 칭하기도 했다. 누군지는 안가르쳐 준다. 그리고 그 말이 농담인지, 진지한 학문적 결론인지는 각자의 판단에 맡기겠다.

7) 심지어 ‘디 워’의 열혈 옹호자들 조차 이 점에 대해선 거의 관심이 없는 것 같다. 누가 내게 돈을 준다면 해보겠다. 진담이다.

8) 따옴표 안의 말을 누구로부터 훔쳤는지는 가르쳐주겠다. ‘영화는 너무 이해하기 쉬워서 오히려 분석하기 어렵다’ 프랑스의 영화 기호학자 메츠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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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명운동까지 해야 하는 시대

필진 칼럼 2007.09.06 10:03 Posted by woodyh98
2007.09.05


"관객들이 5편의 영화를 비교 감상할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며 관람 시기를 놓친 관객들과 다시 한 번 극장에서 관람하고 싶었던 관객들에게 이번 행사가 큰 선물이 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조기 종영된 영화들의 재개봉을 결정한 CGV의 어느 관계자의 말이다. 앞뒤 잘라내고 액면 그대로 이해한다면 관객을 위한 극장 측의 사려 깊은 결정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언사는 영화의 조기종영사태와 관련해 일정부분의 책임이 극장 측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큰 선심을 베푸는 것인 양 본질을 호도하려는 태도에 다름 아니며, 극장과 배급사의 현주소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라 하겠다. 대체 무슨 영문이란 말인가. 그러니까 얘기는 몇 주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모 포털 사이트 네티즌 청원란에는, 스크린 감소와 교차상영 상황에 놓인 <기담>과 <리턴>의 장기상영을 촉구하는, 관객의 서명운동이 벌어졌다. 관객들이 서명운동에 참여한 이유는, 이러한 극장들의 무리한 교차상영으로 인해 겪은 불편 때문이라 할 수 있는데,

가령 “<기담>을 보고 싶어서 갔더니 새벽 1시에 딱 한 번 상영 하더라” “관객이 영화를 선택한다기보다는, 제작사와 배급사의 돈벌이에 이용당하는 느낌이었다”는 것이 이들의 주장이다. 보고 싶은 영화를 보기 위해 관객 스스로 서명운동까지 해야 하는 시대라니. 다른 나라에서도 유사한 예가 있는지 모르겠으나, 한국영화 팬들의 응집력과 힘을 느낄 수 있는 사건이 아닐 수 없다.

사실, 이러한 서명운동이 벌어진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관객이 나서서 영화의 장기상영을 촉구한다는 점에서 볼 때 <기담>과 <리턴>의 사례는, 지난 2001년에 있었던 '와라나고' 운동을 떠올리게 한다. 그러니까 ‘와라나고’ 운동은 2001년 10월부터 잇따라 개봉했던 <와이키키 브라더스> <라이방> <나비> <고양이를 부탁해> 등의 영화들에 대하여, 상영 공간 확보를 목표로 관람운동을 벌였던 사례를 말하는데, 당시의 노력으로 <고양이를 부탁해>는 영화의 주무대인 인천에서 재개봉됐고, <와이키키 브라더스>는 연장상영에 들어갔던 전례가 있다.

다만 이전 ‘와라나고’ 운동이 애초부터 극장을 잡기 힘들었던 영화를 대상으로 벌인 개봉관 확보 운동이었다면, 이번의 <기담>과 <리턴>의 경우는 CJ를 비롯한 대형배급망을 등에 업고도 흥행대작에 밀려 교차상영과 조기 종영될 수밖에 없는 현실에 대항하는 관객운동이라는 것에 차이가 있을 따름이다. 사안은 다르지만 작년 5월에는 국내개봉을 거부했던 김기덕 감독의 <시간>의 국내 개봉을 위한 관객 서명운동이 벌어진 바 있기도 하다.

따지고 보면 이러한 일부 영화의 소외현상은 해묵은 이야기일 따름이다. 비대하게 늘어난 스크린 수가 무색할 정도로 돈 되는 작품에만 눈길을 주는 흥행만능주의가 영화산업을 왜곡시켜온 것이 어제 오늘의 일이던가.

관객들이라면 누구나 한국영화나 할리우드영화를 막론하고 대형흥행작이 아니면 좀처럼 극장에서 원하는 시간에 만날 수 없었던 경험이 있을 터이다. 특히 지난 3월 이후 <300> <스파이더 맨 3> <캐리비언의 해적: 세상의 끝에서> <해리포터와 불사조 기사단> <트랜스포머>로 이어지는 할리우드의 총공세 동안 한국영화는 숨을 죽이고 때를 기다려야 했다. 개봉하는 영화도 부족했고 설사 힘들게 개봉하더라도 일주일을 채 못 넘기고 간판이 내려가기 일쑤인 시절이었다.

그리고 7월을 기점으로 <화려한 휴가>와 <디 워>를 내세운 한국영화의 대반격이 시작된다. 이런 와중에 전체 스크린(현재 영화진흥위원회 통합전산망에 등록된 스크린 수는 1867개 정도다)의 반 이상을 두 영화가 차지하면서 나머지 영화의 소외현상이 심화되어버린 것이다. 특히 <리턴>의 경우는 <화려한 휴가>의 배급사인 CJ엔터테인먼트의 배급망을 업고도 교차상영에 이어 조기종영이 되어버리는 이중소외를 감수해야 했다.

특정배급사가 동시에 여러 작품을 배급하는 경우 경쟁력이 떨어지는 영화는 당연히 외면당하기 마련이다. 이것이 극장의 현실이고 영화산업의 생리다. 문제는 그것이 관객의 선택이냐, 아니면 배급과 홍보의 전략적 희생양이냐 라는 것인데, 이와 관련하여 계량화된 수치를 통해 명확하게 입증할 근거가 빈약하다는 것은 한국영화의 산업구조를 연구하고 입안하는 이들의 한결 같은 고민일 터이다.

사실이지, 관객이 많이 찾는 영화를 더 많이 더 오래 상영하겠다는 주장을 반박할 만한 논리가 있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근자에 빚어진 일련의 사건들, 이를테면 작은 영화의 조기종영과 교차상영 사례들은 대부분이 배급사와 극장주 사이의 이해관계에 따라 합의 도출된 결과물이라고 밖에는 이해할 방법이 없다. 결국 돈 되는 영화에 올-인하는 극장과 배급체계를 근본적으로 손보지 않고서는 해마다 계속되는 악순환의 고리를 풀 방법이 묘연하다고 하겠다.

다만, 서명운동 때문인지 몰라도, 현재 <기담>은 지난 8월 27일부터 스폰지하우스와 필름포럼에서 추가상영 중이고, <리턴>과 <므이> <해부학교실> <검은 집> 등, 조기 종영된 영화들도 9월 6일부터 12일까지 CGV 산하 극장에서 재 상영에 들어갈 예정이다. 앞서 필자가 극장 관계자의 말에 딴죽을 걸긴 했어도 관객 입장에서는 다행스런 일이라 하겠다. 또한, 영화진흥위원회에서도, 스크린 독과점과 교차상영, 조기종영 등 영화계 폐단들을 바로잡고자, '공정경쟁 환경조성 특별위원회'를 만든다고 발표한 바 있다.

이 위원회는, 9월 초 영화전문가들로 구성된 공정특위 임원 5명을 구성해 9월 중순부터 활동을 시작하게 되는데, 특히 스크린 독과점 문제에 대해 집중, 조사할 예정이라고 하니 지켜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바야흐로 영화 한편을 보기 위해 서명운동까지 해야 하는 시대이다. 무수히 쏟아지는 영화들 속에서 길을 잃지 않고 좋은 영화를 찾아 볼 수 있는 지혜와 감식안을 가져야 할 때다. 그러니 관객들이여 명심하자! 선택의 표를 쥔 사람은 자신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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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슨과 심형래 그리고 한단지보

필진 칼럼 2007.08.28 17:19 Posted by woodyh98
2007.08.27


평단의 편견으로 인한 피해자인 양 읍소하는 자의 콤플렉스가 극에 치달았음을 확인시켜주는 불편하고 왜곡된 진실을, 저잣거리에서 만나는 것은 정말 불쾌하다. 인터넷 공간도 모자라 극장에서까지 이런 이야기를 쏟아낸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도를 넘어섰다는 생각이다. 도대체 어쩌자는 것인가!

얘기인 즉은 이렇다. 지난 주말, 오랜 만에 극장을 찾았다. 멀티플렉스의 상영순서가 의례 그렇듯이, 영화 시작 전에는 몇 편의 현란하고 감각적인 CF가 이어진 다음, 예고편과 재난 시 대피요령을 알려주는 리더필름이 나오기 마련이다.

그런데 필자가 찾았던 메가박스 신촌점에서는 흥미롭게도 영화 상영 전, 심형래 감독의 (마치 모 스포츠용품 업체의 연속 기획물인 "내 얘기 좀 들어볼래?"와 흡사한) UCC를 보여주고 있었다. 내용인 즉은, [영구와 공룡 쭈쭈]가 [주라기 공원]에 패하면서부터 할리우드 정복의 꿈을 꾸었고, [용가리]이후 6년을 기다려 [디 워]를 만들었지만, 여전히 사람들의 편견은 변하지 않았다. 라는 것이다.

이 동영상은 영화가 천 만 관객을 달성하는 날, 할리우드에서 성공을 거두는 날을 위해 한 면을 비워 두겠다는 식의 다짐으로 끝맺고 있다. 대놓고 밀어주기 혐의가 짙은 발상이지만 메가박스가 쇼 박스와 한 몸이라는 점에서 그럴 수 있다고 치자.

그러나 이 홍보영상 속에 한국영화계와 영화를 바라보는 심형래의 치명적인 오류가 발견된다는 점은 지적하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이를테면, 아직도 비평가들의 혹평이 전작실패나 코미디언이라는 감독의 전력에서 비롯되었다는 식으로 (순진한 관객을 대상으로) 본질을 호도하는데 몰두한다는 것이고, 천만 관객을 달성하면 즉, 관객만 많이 들면 성공한 영화이며 그때 평단의 평가도 달라질 것이라는 흥행만능주의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 그것이다.

그러나 더욱 실소를 자아내게 만드는 것은, 할리우드를 정복하겠다는 일념으로 6년 세월을 보낸 사람의 UCC를, 최첨단 컴퓨터 그래픽의 효능과 환상을 일거에 부숴버린 평면 애니메이션 [심슨가족, 더 무비]의 상영 전에 보여주었다는 사실이다.

[심슨가족, 더 무비]의 내용은 특별할 것이 없었다. 주인공 호머 심슨이 우여곡절 끝에 가족을 복원하고 마을 스프링필드도 구하는 메시아적 임무를 훌륭히 수행해낸다는 것이 전부이다. 그렇다고 첨단 그래픽이나 신무기가 나오는 것도 아니요, 애절한 로맨스와 감동적인 인간애가 펼쳐지는 것도 아니다.

게다가 심슨의 임무가 종료되고 가족간 화해가 이뤄졌다고 해서 이전과 달라진 것도 없다. 여전히 아들과 말 안 되는 장난에 소일하는 냉소적이고 무정부주의자인 삐딱한 가장의 모습 그대로다. 그럼에도 몰입도와 오락성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재미가 있다.

덧붙여 생각할 점은, 3D와 4D가 점령한 시대에 도대체 평면적 캐릭터들이 관객들에게 어필할 것이라는 믿음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느냐는 것이다. 아마도 과학은 이성의 실천과 생활의 편리를 위해 존재하기에, 삶의 실용적 지혜는 과학과 이성을 앞선다는 선험성으로 이를 설명할 수 있을 터이다. 달리 말하면, 기술의 발전이 영화에 미치는 영향이란 생각보다 크지 않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실감나는 장면을 통해 드라마적 이해를 돕기 위함이거나, 테크놀로지의 성과를 전적으로 과시하려는 명백한 의도가 있을 경우에 국한된다고 봐도 무방하다는 것. 첨단 컴퓨터 그래픽으로 무장한 영화들을 보라. 그것은 '영화가 무엇까지 보여 줄 수 있는가'라는 명제에서 멈춰 서 있지 않던가.

요컨대 장수 TV시리즈를 영화로 만든 [심슨 가족, 더 무비]는 이야기가 영화에서 자리하는 비중이 얼마나 큰가를, 입체와 평면의 우위 비교자체가 모순임을, 형식이 소재를 누를 때 볼 만 한 작품이 탄생하고 있음, 무엇보다 첨단 기술이라도 인간의 정서까지 지배할 수는 없음을 여실히 일깨워주고 있다. 이렇듯 86분간을 실컷 웃고 난 후 느끼는 감정이 유쾌 상쾌 통쾌 그 자체라면, 돈 아깝지 않은 영화 한 편 보았음 말고 더 필요한 것이 뭐가 있을까.

세상은 첨단 디지털 시대인데 여전히 아날로그적 사고로 사는 이들이 있다. 현실과 동떨어진 이들은 현실감각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세인의 비웃음거리가 되기도 한다. 영화만 봐도 그렇다. 화면가득 채워진 첨단 그래픽과 판타지로 덧칠한 블록버스터에 익숙한 관객에게 평범한 영상이나 예상을 깨버린 현실적 스토리텔링이 외면 받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지만, 때로는 좀 더 깊게 성찰하고 진실에 가까운 이야기에 귀 기울일 줄 아는 법도 배워야 한다.

서부개척 시대가 끝났음에도 목가적 낭만을 꿈꿨던 개츠비와 사회와 인간의 기본 규칙을 중요시 여기며 살아가는, 평범하지만 특별했던 레보스키 앞에 '위대한' 이란 수식어가 붙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런 이유로 호머 심슨 역시 위대한 이란 수식어를 얻을 만 하다. 80년 대 말 태어나 TV에서는 미국적 가치로 상징되는 가족주의를 한껏 조롱했고 한 발 더 나가 정치 사회를 패러디함으로써 전 세계인의 사랑을 받았으며, [트랜스포머]류의 영화가 지배하는 세상에서도 배짱하나로 스크린 데뷔를 성공적으로 이뤄냈으니, 왜 안 그렇겠는가.

심형래와 관련한 기사를 접할 때 마다, 조나라 사람의 씩씩한 걸음걸이를 배우려고 한단 땅으로 가서 열심히 배웠으나 익히지 못한 채 고향으로 돌아가려 하니, 이번에는 본래의 제 걸음걸이를 잊었기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엉금엉금 기어서 고향으로 돌아갔다는 연나라 소년의 이야기인, 이른바 한단지보(邯鄲之步)의 고사가 자꾸 생각나는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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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티글정신  수정/삭제  댓글쓰기

    오락 영화에서 바라는 게 뭡니까? 영화도 장사인데.......

    2007.08.28 18:22
  2. 문외한  수정/삭제  댓글쓰기

    말들이 너무 어렵고 아는 사람 이름이 하나도 없어 무슨 말을 하는지 몰르것네요..쩝..ㅠㅠ; 평론도 좀 대중이 알아들수 있게 좀 쉽게 쓰면 안되겠는지요..ㅠㅠ; 쩝..

    2007.08.29 00:02
  3. 이래서 평론가들이 싫어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나로그적인 심슨은 풍자성과 패러디와 유모가 좋아 잼난거고, 현란한 CG를 강조하는 디워는 로러코스트 같은 재미에 즐겨서 보는거지 뭔 쓰잘대기 없는 소리를 해쳐대는지, 우리도 다 알거든요.
    이런식으로 유식한척좀 하지 않았음 좋겄어, 무슨 한단지보까지,저 한자 집어 넣을때 한자 사전 보고 집어 넣었다는데 만원 건다. 정말 심슨이 웃어요, Doh~

    2007.08.29 03:03
  4. 한심한 사람들  수정/삭제  댓글쓰기

    나는 위의 당신이 저 한자에 한글표기 없으면 두 글자 이상 읽을 수 없다는 것에 만원 건다. <디 워>가 롤러코스터 같은 재미가 있다는 사람에게 무슨 얘기를 하나. 글 쓴이의 유식을 논하기 앞서 철자법이라도 제대로 배우고 쓰시길. 평론이 친절하고 쉽게 쓰여 져야 한다는 것에는 동의 하지만, 최소한의 양식과 지식도 없는 대중까지 고려하면서 쓰는 것이 아니라는 것.

    2007.08.29 11:44
    • 당신이 더 한심한girl  수정/삭제

      나도 디워 잼나게 보았는데,디워를 롤러코스트 타듯 잼나게 봤다고 애기하면 최소한의 양식과 지식도 없는 대중이 되는거야 흉아? 너 그런식으로 애기하면 싱하형한데 졸라 얻어 맞는다.

      2007.08.29 16:05
  5. 한단학보  수정/삭제  댓글쓰기

    내가 보기엔 현재 상황을 아주 콕 찝어서 잘 쓰셨네요.
    자신이 읽기 힘들면 유식한 척 한다는 식으로 까내리려는 콤플렉스, 심형래도 바로 그 콤플렉스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것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겁니다. 할리우드를 까면서 할리우드를 따라가려다가 결국 CG만 남은 엉성한 영화가 나온 것을 빗대어 한단지보라고 한 겁니다. 거기에 한자 사전 얘기가 왜 나옵니까. 참 답답하시네요.

    2007.08.29 12:12
    • 이보세요  수정/삭제

      읽기 힘들어서 뭐라는게 아니고요. 위에 적은글 뭐라고 하는지 다 이해하는데요, 쉽게 쓸수 있는 애기를 한자성어까지 넣어서 쓰는 그 글의 분위기가 역겨워서 그런답니다.

      2007.08.29 16:10
  6. 디워와 심슨  수정/삭제  댓글쓰기

    거의 10년동안 매일 티비에서 심슨 저녁마다 해주는거 보고 사는 교포인데여. 디워는 CG가 있어야 그 맛이 제대로 나는 판타지물이고 심슨은 20년동안의 2D 애니 티비 시리즈의 아우라를 가지고 만들어진 영화인데 그럼 심슨이 CG가 화려한 영화로 만들면 그 맛이 나겠어요? 그리고 이번에 한국갔다가 디워 봤는데요. 심형래를 컴플렉스로 읍소한다는 저 글, 디워를 그리 까대면서 심슨은 그리 칭찬하는 정말 답답해요. 왜 심슨의 장점은 그리 잘보면서 디워의 장점은 못보시는지. 문화 사대주의의 전형이예요.

    2007.08.30 03:25



1. 때 아닌 황사에 당황하다.

- <스파이더 맨3> <트랜스포머> <다이하드 4.0> : 모래의 제국

극장가에 때 아닌 황사가 불었다. 황사는 중국이 아닌 미국에서 왔다. 도심에 뭔 모래 바람이 부냐고 질문할 수 있지만, 올 여름 헐리우드 영화들은 도심 속에서 ‘모래 폭풍’을 일으키고 있었다. <스파이더맨 3>는 전작들과 달리 ‘악의 축’과 비슷한 세 명의 악당을 등장시켰다. 이 영화에는 아버지의 복수를 위해 ‘뉴 고블린’이 된 해리(북한?), 세포 하나하나가 모래 알갱이로 구성된 ‘샌드맨’(이라크?), 심비오트에 감염된 ‘베놈’(이란?)이라는 세 악당이 등장한다. 스파이더맨은 ‘심비오트’라는 외계 생물체에 감염되어 블랙슈트를 입게 된다. 일부 평자들은 여기에 주목했다. 스파이더맨이 블랙슈트를 입었을 때, 기존의 선한 이미지는 사라진다. 영화 홍보에 사용된 포스터 속에는 빌딩에 매달려 건물 유리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는 스파이더맨이 있다. 쇼윈도 밖의 스파이더맨은 붉은 슈트 차림이지만, 쇼윈도에 비친 스파이더맨은 검은 슈트를 입고 있다. 이처럼 이 영화는 선-악의 대립이 명확하다.



스파이더맨이 등장할 때, 성조기가 펄럭인다. 좀 심하다 싶지만, 슈퍼 영웅을 절실히 원하는 부시 휘하의 미국을 ‘애쓴다. 애써!’ 하면서 너그러이 봐줄 수 있다. 반면 ‘샌드맨’은 가치 판단이 어려운 캐릭터다. 샌드맨이란 악당은 동정심을 유발한다. 그는 피터(스파이더맨)의 삼촌을 죽인 악한으로 등장한다. 샌드맨은 딸과 아내에게 하소연한다. 자기는 그렇게 나쁜 녀석이 아니라고. 영화도 샌드맨의 본성은 착하다는 것을 플래시백으로 보여준다.

‘샌드맨’은 악당인가, 아니면 그저 운이 나빠 악인으로 낙인찍힌 평범한 시민인가? 샌드맨이 흥미로운 건, 슈퍼 영웅이 되어가는 ‘스파이더맨’과 대조되기 때문이다. 미국의 양면은 스파이더맨의 자아 분열된 두 가지 모습이 아니라, 스파이더맨과 샌드맨의 대립으로 보는 편이 더 적절할 듯하다. 스파이더맨은 가정을 이루고 싶어 하고, 시민들을 지키려 한다. 샌드맨은 기존의 가치와 질서에 저항한다. 샌드맨의 딸은 병으로 죽어가지만, 돈이 없어 수술을 못하고 있다. 샌드맨은 자신의 불행을 사회의 탓으로 돌리고, 불만을 표한다. 이 때 스파이더맨은 샌드맨에게 화해의 제스츄어를 취한다. 미국은 모든 사람이 평화롭고, 평등하게 살 수 있는 곳이라는 듯 말이다.

샌드맨을 다른 관점으로 보면, 그는 미국을 상징한다. 모래와 제국의 이미지를 연상하면 로버트 W. 메리의 저작인 <모래의 제국>이 떠오른다. 미국의 개입주의와 네오콘의 일관성 없는 보수주의를 경계한 이 책은, 후쿠야마의 ‘역사의 종언’ 이후 미국식 민주주의가 전세계에 어떤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지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다. 미국은 견고한 민주주의의 수호자인가? 아니면 언젠가 쓰러질 ‘모래의 제국’일 뿐인가? 스파이더맨은 평화의 수호자가 되고, 샌드맨은 악인으로 남지 않고 본연의 자리로 돌아간다. 샌드맨은 왜 사라지는 걸까?

샌드맨은 ‘중동’ ‘아랍’ ‘이슬람’ ‘석유’로 은유된다. 스파이더맨과 베놈이 싸우는 마지막 장면에서 샌드맨은 사라진다. 영화는 샌드맨이 악당이 아니라 평범한 소시민이라고 말한다. 그리하여 영화는 샌드맨에게 정당성을 부여한다. 살인은 사고였고, 그의 집은 가난하고, 그의 인생은 불안하다. 샌드맨은 스파이더맨의 애국주의와 손잡지 않는다. 그러나 샌드맨은 스파이더맨이 수호하려는 가치관과 질서에 흡수된다. 이 말은 미국식 개입주의가 이슬람을 포섭하거나, 이슬람이 미국에 동조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미국은 석유가 필요했고, 더 이상 문명의 충돌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민주주의가 전세계의 보편적 체제가 되어야 했다. 미국은 모래의 땅을 원했던 게 아닐까? 미국은 그들의 완전한 영향권 아래 ‘석유의 땅’을 두고 싶었던 것 같다.



<트랜스포머>는 더 노골적인 은유로 ‘모래의 제국’ 미국을 설명한다. <트랜스포머>의 초반부 전투 씬은 중동 카타르 지역 미군기지에서 벌어진다. 로봇은 기밀문서를 빼내기 위해서 카타르에 있는 미군 기지를 습격한다. 왜 하필 모래 언덕밖에 없는 카타르를 습격한 것일까? 애초에 국방부를 습격하거나, 에어포스원이나 백악관을 침입하지 않고 말이다. 중동 지역으로 날아가 미군 기지를 습격한 오프닝. 그곳에 미국의 모든 핵심이 있다고 중요성을 부과한 것 자체가 이미 미국의 중심이 세계를 향해서, 더 직접적으론 중동의 석유를 노리고 있다는 말이 된다.

<트랜스포머>는 발칸반도와 중동지역에 개입정책을 펼치며 세력을 확장하는 미국의 야욕을 보여준다. 우선, 첫 장면을 보자. 전투가 벌어지는 사막이라는 장소는 로봇과 지구인의 대결에는 어울리지 않는다. 이 대결을 외계 생명체(로봇) VS 미국이라고 보아도 되지만, 필자는 이상하게도 그 모습이 문명 충돌로 보였다. 전투는 마치 이슬람권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미군과, 반서구 반미를 외치며 지하드를 자행하는 이슬람 테러분자들의 대결로 보인다. 위치상으로도 로봇은 마을 밖에 있고, 미군들은 마을 안에 들어가 있다. 안과 밖의 차이. 미군이 안으로 들어간 상태고, 로봇은 밖에 나와 있는 상태다. 집을 빼앗긴 자는 되찾으려 하고, 남의 집을 강탈한 자는 그들의 저항에 맞선다.



살아남은 미군들은 다시 미국으로 돌아온다. 이제 남은 건 본토를 수호하는 일. 이 때 등장하는 건 ‘존 맥클레인’ 이라는 추억 속 영웅이다. 시간이 흘러도 영웅 신화는 계속되고 있다. <다이하드 4.0>은 제 발 저린 미국이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한 영웅 신화다. 마이클 베이가 기술 문명으로 시대를 앞서갔다면, <다이하드 4.0>은 디지털과 결별하면서 뒤로 물러난다. 버튼 하나로 백악관이 무너지는 상상의 세계를 만들 수 있는 미디어 시대에 존 맥클레인은 아날로그 방식으로 디지털 시대와 맞선다. 그리고 승리한다.

몇 장면만 언급해 보자. 이 영화야말로 미국이 포스트 9.11 이후 심각한 위기의식을 느끼고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 존 맥클레인(브루스 윌리스)은 주로 유색인종과 싸운다. 적들은 아랍계와 아시아계가 대부분이고, 최고 우두머리만이 백인 미국인이다. 이게 무슨 인종 간 대결도 아니고. 재미있는 건 공격방법도 무식하다는 거다. 맥클레인의 자동차는 기둥을 타고 공중으로 날아올라 헬기와 충돌한다. 이건 흡사 자살 폭탄 테러나 일본의 카미카제 공격을 연상시킨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맥클레인은 공격자보다는 수비자의 위치에서 적들과 맞선다. 이 때 적의 공격형태도 쿵푸나 야마카시가 대부분이다. 단순히 디지털과 아날로그의 대결이 아니라, 인종간의 대결로 보아도 이 영화는 흥미롭다. 유색인종과 대결하는 액션 씬이 난무하는 <다이하드 4.0>은 다인종 국가 미국을 보여준다. 한편, 이 영화는 백인 우월주의를 은근히 뽐낸다. 그리고 기존의 질서를 유지하려고 한다. 맥클레인의 런닝과 옷은 갑옷처럼 보이며, 그런 맥클레인의 행동은 공격보다는 수비 위주다. 세계화 시대에 미국을 견제하는 세력은 증가하고, 이에 미국은 무너질지도 모르는 그들의 신화를 다시 세워야만 한다. <다이하드 4.0>은 아직 미국이 건재하다는 걸 뽐내는 영화다. 하긴, 브루스 윌리스는 멋졌다.



2. 영화가 없는 시장 - 이데올로기가 된 영화

- <화려한 휴가> <디 워>

이제 한국 영화를 이야기하려 한다. 올 여름, 두 편의 영화가 극장가를 달구고 있다. 충무로의 위기라고 칭얼거리는 한국 영화. <화려한 휴가>와 <디워>는 총체적 난국에 빠진 영화계를 돈놀이로 구출하자고 선봉장으로 나선 영화다. 앞 글에서 헐리우드 영화 세 편을 곱씹은 건, 영화를 즐기는 한 방편일 뿐이다. 영화가 재미있거나 없거나, 씹은 후 뱉어야 한다. H군의 말을 빌리면 ‘영화란 로또’다. 영화를 볼 때나, 보고 나서 즐기는 방식이 적절하면 당첨된 거고, 틀리면 그만이다. 7000원의 소비는 인생대역전이 아니다. 영화가 돈으로 탄생한 거라면 소비 형태라고 보는 게 더 적합하고, 태생적으로 영화는 그렇게 탄생했다. 펠리니는 “더 이상 돈이 남아 있지 않을 때 영화는 끝날 것이다.”라고 말했다. 슬프지만 돈과 영화가 만나야만 결과물이 나오고, 그 영화가 소비가치를 얻으면서 상품이 된다. 영화란 소비에서 시작된다. 헌데 여기에 이상한 국가 이데올로기가 작용한 영화들이 있다. 굵직한 영화가 많았던 올 여름 극장에서는 영화가 아니라, 메이드인 코리아를 단 상품만 보고 온 기억 밖에 나지 않아 씁쓸하다.



두 영화는 위대하지도, 중요하지도 않다. <화려한 휴가>가 광주를 다루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그 업적을 인정받는 건 사실이며, 이에 동의한다. 하지만 이 영화가 논쟁이 되는 이유는 대중적 방식으로 역사를 사유함에 있다. 영화가 오락이 되고 상품이 될 때, 영화는 역사 안의 주체였던 사람들을 망각하는 우를 범한다. 광주를 다룬 이전의 작품들(꽃잎, 박하사탕, 오래된 정원)은 개인의 역사 안으로 들어간다. 혹자들은 이를 ‘먹물 영화’(지식인 영화)라고 불렀다. 먹물이건 아니건, 중요한 것은 역사를 한 개인의 사유 안에서 반성하고, 저주하기도 하는 과정이다. 그 과정에서 치유되지 않던 역사는 상처를 지울 수 있다는 희망을 준다. 그때서야 살아남은 자들은 자신을 유죄라고 생각하며 죽어간 자를 애도한다. <화려한 휴가>가 지적받아야 할 부분은 역사를 대하는 태도에 기인한다.

<화려한 휴가>가 살아남은 자들의 안락을 위한 영화라면, 죽은 자들의 위치는 어떻게 되는가? 오늘날 극장에 앉은 우리들은 편하게 눈물샘을 자극하는 코드와 컨벤션으로 이루어진 영화로 역사를 대한다. 그리고 눈물을 흘린다. <화려한 휴가>는 광주 민주화 항쟁으로 죽어간 이들을 위한 눈물이라기보다는 보편적 슬픔을 접한 관객의 눈물이다. 왜? 세트에서 가상으로 만들어지고 인공적으로 창출된 시공간은 역사를 가장한다. 금남로와 도청 세트는 광주를 겨냥하고 있지만, 그 지명과 세트를 거세하면 익숙한 소재-형제애, 가부장제, 전쟁의 상처-만 남는다. 도청 앞에서 불을 뿜는 특전사들의 총부리에 의문을 제시하지 않는 <화려한 휴가>. 이 영화는 민중과 광주 시민의 의심을 거세하고, 단지 피와 눈물로 범벅된다. 이 때, 이것을 보는 자는 편안하게 눈물을 흘리고 카타르시스를 경험한다. 도대체 저 총부리 위에 무엇이 있었고, 고립된 광주 밖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역사를 의심하지 않고, 상황을 의심하지 않는다는 건 슬픈 일이다. 골치 아픈 의혹들을 모두 거세하고, 전쟁영화와 휴먼드라마로 탈바꿈한 광주를 보는 건 가슴 아프다.

<화려한 휴가>는 전쟁영화의 신화를 세운다. 광주란 지명을 지우고 보면 이 영화는 그저 내전영화일 뿐이다. 어느 학생이 역사 교과서를 달달 외운다고 올바른 역사관을 가졌다고 할 수는 없다. 관객을 대신해 울어주는 영화보다는, 뼈 속에서 우러나는 눈물을 만들 수 있는 영화가 더 중요하지 않을까? <화려한 휴가>는 우리가 울어야 할 이유를 주지 않는다. 관습적인 눈물만이 존재한다. 다시 물어본다. 이 영화는 죽어간 자를 위한 애도인가? 보는 자들의 안락을 위한 영화인가?



<디워>를 상품이라고 본다면, 여타의 영화와 견주어도 크게 손색없다. 거기에 심형래의 B급 취향과, 키치적 색채가 섞이면 골수팬을 만들어낼 수 있을 만큼 독특한 영화다. 헌데 이 영화도 극장 밖에서 환영받고, 뜨거운 감자가 된 영화다. 극장 안에서는 누구도 이 영화를 이야기하지 않다가 극장 밖을 나서서야 입에 올린다. 사람들은 <디워>에 민족주의와 애국심이란 외피를 두른다. 그 순간 영화는 사라지고, 감정적 대립과 가치관의 차이만이 남는다. 이미 영화가 개봉되기 전부터 심형래를 둘러싼 숱한 논쟁이 있었고, 개봉 후에도 이송희일 감독의 글을 두고 격심한 논쟁이 일었다. 심형래는 자기의 고생을 눈물로 호소하고, 맨 땅에 헤딩했던 지난 시절을 회고했다.

<디워>의 마지막 영상은 충격이다. 심형래는 너무 일찍 자기 회고전을 개최했다. 불안했던 걸까? 그의 사후에 누구도 심형래를 기억해주지 않을 거라는 불안감, 혹은 루카스나 스필버그도 하지 못한 일을 당당하게 뽐내면서 자국민에게 자긍심을 심어주고 싶었던 걸까? <디워>에는 700억원의 경제적 가치를 환수해야 한다는 목표가 있고, 그 파급 효과를 기대하는 대중이 있다. 반대로 영화가 돈과 민족주의로 나아가서는 안 된다고 보는 사람들도 있다.

하나 더, 이 영화가 심형래의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그를 강하게 의식한 관객들의 인식의 오류가 발생한다. 개그맨 심형래와 영구를 가슴 속에서 끌어낸 관객들의 태도는 양분된다. <디워>를 우습게 볼 수밖에 없는 건, 심형래의 광대 이미지를 기억하기 때문이다. 심형래는 광대 이미지를 벗으려고 하고, 일부 사람들은 그것에 강한 저항 심리를 가지고 있다. 이상한 건, 광대의 이미지가 오인되고 있다는 거다. 위대한 희극인들은 자기를 비하하면서 웃음을 선사한다. 개그맨 심형래는 그걸 보여주었지만, 영화에서는 희극성을 버리고 자기비하를 용납하지 않는다. 자기를 희화화하면서 대중을 웃겼던 심형래는 사라졌고, 민족영웅이나 영화감독의 권위를 얻으려는 심형래만이 남았다. 그러니 충돌할 수밖에 없다.

<디워>는 심형래의 독특한 개인 취향이 녹아있는 페티시 영화다. 끊임없이 등장하는 이무기와 한국적 정서를 세계화 시키려는 그만의 취향. 그 취향은 무시될 게 아니라 인정되어야 한다. 하지만 거기에 두드러기를 느끼는 자들이 있다. 어차피 그것도 취향 차이일 뿐이다. 여하튼 올여름 극장가에는 영화가 없고, 이데올로기만 난무한 것 같다. 한국영화는 이 둘뿐이던가?

뜨겁고 덥다. 이 긴 글의 가치를 찾는 날, 나는 좀 더 편안하게 영화를 볼 수 있지 않을 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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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워>의 흥행몰이가 장난이 아니다. 가히 메가톤급이다. 전국이 전 '용'판이다. 1000만 관객동원이 현실화될 조짐까지 보인다. 근데, 불편하다. <디워>를 비판한 입장이기에 배 아파 하는 소리가 아니다. <디워> 옹호론자들이 흥행이 잘 돼 ‘용용 죽겠지’ 놀려서도 아니다. 영화를 둘러싼 과열된 현상들이 정말이지 가관이라 그러하다.

떼거리로 몰려다니며 일삼는 고약한 행동 좀 자제하자는 거다. 심형래 감독과 그의 야심작인 <디워>를 좋아하고 지지하는 거!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고, 누가 뭐라 안 그런다. 한 영화와 한 영화인을 쌍수 들고 환영하는 건 개인의 자유다. 그 반대의 의견도 그럼 마찬가지다. 근데, 상황은 전혀 그렇지 않다. 심형래 감독이나 <디워>를 향해 곱지 않은 시선을 보였다가는 무슨 반국가행위를 저지른 듯 빨간 딱지를 붙여 집단적 폭력이 가해지는 꼴이다. 그러한 일사불란한 태세로 이미 초토화된 블로그와 사이트가 한 둘이 아니다. 언제 누가 <디워> 열성팬을 찬양고무죄로 억압하며 곤욕을 치르게 했던가? 과격한 비유라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디워>를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광팬들의 극단적 행태는 아무리 생각해도 수긍하기 힘들고 부당하다. 오바 좀 작작하자!

소위 전문가 집단은 왜그리 억지스럽게 <디워>를 못 잡아먹어 안달이 났느냐는 게 이들의 주장이다. 그럼 장점으로 커버하기엔 너무도 그 단점이 다종다양하고 극명한, 밑 빠진 독에 물붓기식인, 이 영화에 찬사를 보내라는 말인가? 그거야 말로 자신의 존재이유를 부정하는 꼴이다. 아닌 건 아닌 거다. 이걸, <디워>에 완전 감동 먹은 사람들을 무시하는 작태로 보는 분들도 있던데 이 또한 비약적 논리다. <디워>를 재밌게 봤으면 됐다. 감동을 받아 눈물 흘렸으면 그만이다. 언제 평단의 반응에 대중이 민감했고, 그에 따라 영화를 취사선택해 봤다고 이러시나. 전문가의 평가와 대중의 취향이 기가 막힌 궁합으로 딱 맞아떨어진 적 알다시피 극히 드물다. <디워>의 미덕을 전면에 내세워 영화를 추켜 올린 기자나 평론가도 분명 있다. 왜 굳이 <디워>에서만 일치된 의견을 원하는 건지 당최 모르겠다. 논란을 박터지게 지피기 위한 전술이라면 모를까! <디워>의 욱일승천에 장애가 되지 않을까 걱정스런 마음에 그랬다면 안심해도 된다. 보다시피, 언론의 비평! 흥행에 쥐뿔 영향 없다.

그런데, 알다가도 모를 일이 있다. 기이한 현상 하나가 감지된다. <디워>를 향해 평단이 죄다 혹평을 퍼부었다는 식으로 여론이 조성됐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앞서 언급했듯 <디워>의 장점을 보다 도드라지게 비평한 매체 또한 적지 않다. 절반의 성취라는 표현을 빌려 모자람과 빼어남을 고루 섞은 언론이 부지기수다. 까놓고 말해 노골적으로 <디워>를 씹은 매체야말로 소수다. 충무로로부터 따돌림을 당해왔다는 심형래 감독의 오바스런 억하심정이 대대적 마케팅 공세에 따라 전국적으로 전파를 타며 숱한 대중의 마음을 얻어냈고, 이를 <디워> 지지자들이 사이버 공간에서 거세게 몰아붙이며 확산한 결과물이 만들어낸 허구다. 전문가 집단과 관객의 맞장으로 비화됨과 동시에 충무로 대 심형래 감독의 대립구도 전선이 형성된 것이다. 실체가 없는 가상의 적을 설정해 맹공을 퍼붓는 격이다. 충무로를 탐탁지 않게 바라보는 대중의 정서가 <디워>라는 뇌관을 통해 일순간 폭발하며 발생한 현상이기도 하고, 이는 분명 일리 있는 말이지만 지금의 이런 방식은 전혀 생산적이지 않다.

기현상을 부추기는 데 일부 언론이 한몫했음도 사실이다. <디워> 추종자들이 그토록 질타하던 언론이 알고 보니 <디워> 서포터즈로 활약한 셈이다. 논란에 불을 당겨버린 이송희일 감독의 발언을 비롯해 사적공간에 남긴 영화인들의 글을 잽싸게 퍼날아 기사화시키는 근면성실한 민첩함을 선보이며 심형래 감독 광팬의 심기를 건드리는 데 일조한 것이다. 심지어는 <디워> 팬덤 현상을 비판한 이송희일 감독의 글을 마치, <디워>를 직접적으로 비난한 식으로 왜곡해 보도하기까지 했다. 본의 아니든, 미필적 고의든 비상식적 여론몰이에 언론이 부채질한 꼴이다. 오바 좀 작작하자!

애국심과 심형래 감독의 인간승리를 내세우며 타인의 평을 두들겨 패는 몰지각한 행동도 마찬가지다. 심형래 감독의 참으로 감동 먹음직스러운 인생역정! 인간적으로 마음이 가는 거 사실이다. 없이 사는 내 자신과 혹은 우리네와 동일시될 수밖에 없는 지점이 있는 거 이해간다.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와 견주어 손색없는 CG를 우리만의 힘으로 구현해 냈기에 불타오르는 자긍심 그리고 그 기술 집약체인 <디워>가 할리우드 시장에 진출해 그들과 제대로 한판 승부를 벌일 것이기에 애국애족을 벗 삼아 응원해줘야 한다는 거! 불편하지만 심정적으로 고개가 끄덕여지는 대목이다. 애국심에 기댄 마케팅은 사실 한국 블록버스터가 이미 오래전부터 마르고 닿도록 애용해온 하나의 수단이다. 다시 말해, 심형래 감독의 지지자들이 죄다 싸잡아 비판하는 충무로의 시스템에 <디워>는 안착해 있고, 그 어느 영화보다 충무로의 메커니즘에 철저히 부합해 모든 게 굴러가고 있는 와중이다. 그래도 그렇지! 이러한 만만세는 일찍이 없었다. 정도를 넘어섰다. 가히 광풍이다. 애국심을 필두로 온갖 감언과 이설이 본질을 뒤덮은 지리멸렬한 형국이다.

그리고 심형래 감독이 말했듯, <디워>의 타깃은 미국시장이다. 한국이 아니다. 당연 그들은 심형래가 누구인지 모른다. 애국심을 부르짖고 민족 운운해봤자! 소용없다. 그들 입장에서는 나 몰라라 할 일이다. 우리만의 마스터베이션으로 전락할 수 있다. 결국, 관건은 영화다. <디워>가 내밀 수 있는 카드는 그것만이 유일하다. 때문에 이미 할리우드를 정복한 듯 호들갑을 떠는 현재의 이상 열기는 다분히 병적이다. 심형래 감독이 그토록 간절히 원하는 미국 성공신화가 현실화되는데 아무런 도움이 안 된다. 진정으로 심형래 감독를 지지한다면 <디워>가 미국시장에서 좀 더 먹힐 수 있도록 생산적인 이야기를 보다 활발히 주고받아야 된다. 그러한 소통이 <디워>의 미국 버전에 반영돼야 함은 당연지사고.

때로는 오바가 신선하고 재미나지만 지금의 삽질 현상은 피곤할 뿐이다. 어떠한 쾌락도 뱉어내지 못하고 있다. 한마디로 재미없다. 그러니 <디워> 광팬이나 언론 모두 오바를 자제하고 알아서들 살맛나는 길을 찾았으면 한다. 심형래 감독 또한 마찬가지다. 어차피 인간적 미덕보다는 장사치의 심성이, 올곧은 처신보다는 돈이 장땡인 시대인 만큼 한국이 우짜고 저짜고 하는 감정적 발언들은 좀 거둬들이고 산업적으로 큰 건 하나 건져오시길 바란다. 비아냥이 아니라 진심이다. 그나저나 미국에서 1500여개 스크린을 확보해 뚜껑을 연다는 데 이거! 사실상 불분명하다. 제대로 굴러가고 있는지 정말이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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