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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하성태
사진 무비스트 권영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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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애에게는 ‘이영애의 하루’가 있었고, 전지현은 한 때 테크노 여전사로 불렸으며, ‘예쁜’김태희의 광고 이미지는 <중천>과 <싸움>를 몰락시켰다. 김민희에게도 “사랑은 움직이는 거야”로 대변되는 N세대 전령사 시절이 존재했었다. 지금 당장 검색창에 ‘김민희’ 석자를 쳐 보라. ‘스타일, 머리, 고백, 미니홈피, 쇼핑몰, 키, 원피스, 이정재’ 등의 연관 검색어가 줄줄이 올라올테니. 그녀가 여전히 ‘스타일리쉬’와 ‘패셔니스트’란 수식에 포획되어 있다는 걸 다시금 깨닫게 될 것이다.


물론, 오늘도 김민희는 브라운관 속 30초 광고에서 ‘스타일’을 정의하고는 달리고 또 달리는 중이다. 이미지 하나로 먹고사는 연예인이 자신을 스타로 만들어 준 이미지를 떨쳐내기가 어디 쉬운 일이던가. 하지만 스타라고 해서 시간이란 괴물이 비켜가 주는 것은 아닌 법. 웹 2.0이 도래한 2008년, ‘N세대’란 세대 규정은 기억 저편으로 사라져 버린지 오래다. 그리고 김민희는 새해 들어 스물 일곱, 적지 않은 나이가 됐다. 한 해 두 해 나이를 먹어가며 겪어 낸 경험들은 ‘배우’ 김민희의 표정을 풍부하게 만들어 줬고, <뜨거운 것이 좋아>의 120% ‘털털모드’이자 영원히 스물 일곱으로 남을 시나리오 작가 ‘아미’를 탄생시켜다. 그 시간들이 배우 김민희에게 선사한 가장 소중한 선물은 바로 ‘자연스러움’과 ‘성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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럭셔리와 패셔니스타? 이 죽일 놈의 선입견!


그러니까, 이 죽일 놈의 선입견이 문제다. 영화와 광고 속 이미지 그대로인 배우가 과연 몇이나 될까. 김민희 또한 크게 다르지 않다. 자기 주장과 패션에 대한 소신을 당당하게 드러내는 자신만만함과 ‘야심만만’에서 강호동에게 기를 못펴던 수줍은 여인 사이의 간극이 이를 증명한다. 연이은 홍보일정 탓에 피로가 몰려온 상태임을 감안하더라도 수더분한 김민희는 상당히 의외다. 나지막한 목소리로 조근조근 침착하게 의견을 피력하는 김민희의 모습이 조금은 낯설게 다가온다.


“대중들에게는 광고에서의 이미지가 강했기 때문에 <뜨거운 것이 좋아> 같은 모습이 새로울 수 있을 거라 생각해요. 광고는 원래 짦은 시간 안에 강렬한 인상을 남겨야 하는 작품이잖아요. 또 그런 광고를 많이 찍었고요. 제가 다른 이미지를 보여주고 (대중들이) 아, 이런면도 있구나 하면 기분 좋은 것 같아요. 솔직히 김민희의 일상이 광고 속 모습은 아니잖아요(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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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우리가 상상한 ‘패셔니스타’ 김민희의 일상은 없다는 이야기인 셈이다. 그도 애인과 헤어지면 아프고, 힘들면 짜증나고, 좋은 이들과 함께 있을 때면 행복한, 스물 일곱 살 여자일 뿐이다. 물론 일찌감치 잡지 모델로, 드라마 ‘학교’의 주역으로 활약한 그가 마냥 평범하다고 우길 생각은 없다. 다만 자신이 발 딛은 세계를 가감없이 인식하고 그걸 직업적으로 받아들일 정도의 여유를 이제는 갖춰가고 있다는 말을 하고픈 거다. 언론이 으레껏 김민희를 표현하는 N세대란 클리쉐에 대해서도 미소를 지으며 현답을 내놓는다.


“‘N세대’라는 세대 자체가 끝날 수 밖에 없는거고 영원할 수 없잖아요. 세월이 흐르면서, 자연스럽게 끝난거죠. 제가 서른이 되도 N세대일 수 없는 것 처럼요(웃음).”
묘하게도 자조와 연민이 섞여 있으면서도 마치 남의 얘기를 하는 것 마냥 편안하다. 자신도 모르게 ‘자연스럽게’라는 수식이 섞여나오는 걸 보면 강조가 아닌 무의식에 가깝다.


그렇게 물 흐르듯 흘러버린 시간은 그녀를 성장으로 이끌었다. “무작정 카메라 앞에 서서 연기하는 것 자체가 굉장히 공포스러웠어요”라고 회상할 정도로 오디션에 응할 필요도 없이 대중에게 얼굴을 먼저 알렸던 소녀는 이제 자신이 찜한 캐릭터라면 누구에게도 뺏기고 싶지 않을 만큼 욕심도 생겼다. 연예인으로서의 삶도 마찬가지다. 방송에서 뱉은 한 마디 한 마디나 애정사와 같은 프라이버시가 화제가 되는 일상도 고개를 끄덕이려고 노력중이다. 무심한 듯, 체념한 듯 한 말투에 내공이 묻어난다.


“사실 적응이라고 하긴 그런 것 같고요. 이제는 좀 내려놓고 싶어요. 어쩔 수 없는 일 하나하나에 너무 신경쓰기 보다는요. 제가 편해지는, 더 편할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싶다랄까요?”



아미와 민희는 예쁘다, 그리고 닮았다



<뜨거운 것이 좋아>의 아미는 신께서 세상에 내보낸 순간부터 ‘쿨’이란 단어를 아예 뇌 속에서 지워버린 듯 한 인종이다. 영화화될 가망이 없어 보이는 시나리오를 몇 년째 붙잡고 있다거나, 굳게 마음먹은 금연 계획을 단숨에 날려버리고 쓰레기통을 뒤져 꽁초를 찾는 건 애교에 가깝다. 비전없는 것도 모자라 바람까지 핀 뮤지션 남자 친구 원석(김흥수)을 매정하게 내치지 못하고 번듯한 회계사 소개팅남 승원(김승수) 사이에서 갈팡질팡 하는 모습은 매번 선택의 순간을 마주할 때 마다 갈등하는 우리네 모습과 닮아 있다. 사춘기 소녀 강애(안소희), 화려한 40대 싱글녀 영미(이미숙) 중에서 가장 현실에 굳건히 발을 디디고 선 캐릭터이자 영화를 이끄는 나레이션의 주인공도 물론 아미다.


“원석과의 관계도 그렇고 모든지 무언가를 결정하고 선택하는 건 힘들잖아요. 아미가 원석이를 무척 사랑했지만 너무 비슷한 처지라 힘들었던 상태인데다 (바람피는) 그런 장면을 목격하게 되면서 헤어지고 갈등하고 힘들어 하는 거죠.” 일은 안풀리고, 결혼하게 될 줄 알았던 남자친구는 바람이나 피고, 이래저래 되는 일 없는 불쌍한 중생. 권칠인 감독의 전작 <싱글즈>에서의 장진영보다 두 세배는 더 망겨져야 하는 아미 캐릭터를 120% 소화해낸 탓에 ‘김민희의 재발견’, ‘김민희가 이렇게 연기를 잘 하는 배우였나’라는 평가가 쏟아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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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희 연기의 백미는 원석과 헤어지고 난 뒤 친구들 앞에서 ‘난리부르스’급 주정을 부리는 장면. 왠만하면 지지않을 음주 경력을 자랑하는 술꾼들이라도 무릎을 탁 치게할 명연기는 감각적인 점프컷의 도움으로 한껏 빛을 발한다. “다음날 너무 힘든 그 느낌이 싫어서 감당 못할 정도까지는 마시지 않아요”라는 음주 습관이 살짝 의심이 갈 정도. “아미가 쭉 빨아들이는 모습은 담배 피는 분들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거”라는 말처럼 흡연장면이랄지 외적인 모습이 눈에 먼저 들어오기 마련이지만 그 보다 아미의 속내를 들여다 볼 수 있는 순간들이 더 큰 공감을 불러 일으킨다. 울면서 달려 온 원석을 못내 받아준 뒤 급작스런 관계를 갖게 되는 해프닝도 마찬가지다.


원석이가 눈물을 머금을 때 마법에 걸린 것 처럼 다시 끌려가는 기분 같은 게 있잖아요. 그 부분은 일상적인 거고 누구다 다 공감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래서 또 원석이랑 해프닝이 일어나고. 그 부분 촬영이 제일 재미있었어요. 사실 저도 그런 편이에요. 맺고 끊고를 떠나서 오랜 시간 동안 정이 쌓여 있었을 테니까요. 원석이가 아미를 찾아 왔을 때의 모습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어요.”

“여자가 들켜서는 안 될 것이 세 가지 있다. 바람, 주름살, 그리고 속마음”이라고 충고하는 영화 속 아미는 결국 누구보다 자신에게 솔직하고자 노력한다. “이루고 싶던 영화의 꿈은 포기해야 되고, 원석이는 자기 때문에 다치고, 승원은 갑자기 청혼을 해서 미국으로 떠나자고 하고. 갑자기 아미한테 너무 많은 것들이 온 시기가 그때였던 것 같아요.” 인생사가 결국 선택의 연속 아니던가. 아미는 <싱글즈>의 나난이나 동미에 버금가는 선택을 하지만 또 그것이 영화적으로 튀어보이지 않는다. 인터뷰 내내 아미란 이름을 1인칭으로 사용할 만큼 캐릭터 자체를 자연스레 받아들인 김민희 본인이라면 그 순간 어떤 선택을 했을까.

“승원이요? 그 남자는 모든 여자들의 로망이죠. 제가 아미였으면요? (한참을 생각하다) 글쎄, 잘 모르겠어요. 그래도 도전해 보는 아미의 선택이 용감하다고 생각해요. 시나리오 작가로 데뷔하는 걸 그렇게 원했으니까 다시 도전해보고 싶다는 맘은 또 들 것 같아요. 아직 또 젊잖아요(웃음).”


 
 ‘내 인생의 터닝포인트’ <굿바이 솔로>가 가져다 준 욕심

김민희는 과작의 배우다. 데뷔 10년 통틀어 열 작품도 채 되지 않는다. 영화는 <순애보>와 <서프라이즈>, <뜨거운 것이 좋아> 단 세편이고, 드라마도 출세작인 <학교2>와 <줄리엣의 남자> 그리고 <굿바이 솔로>를 포함해 6편에 불과하다. 돌아보면 20대 초반, 인기도 누려봤고 자의반타의반의 공백기도 거쳤다. <순수의 시대>와 같은 드라마를 통해서는 낮은 시청률과 연기력 논란도 겪었다. 그 사이 떠들썩하게 연애도 했고 여행도 다녀왔다.


물론 모두 과거에 불과하다. 그러거나 말거나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이제껏 김민희가 빛났던 순간들이 장르적인 연기보다 본인 그대로의 단면들을 캐릭터 안에 온전히 녹여냈을 때라는 점이다. 10대 특유의 당돌함이 깜찍함으로 승화됐던 <줄리엣의 남자>, 동성애적 감수성과 시니컬한 면모를 동시에 표현했던 <순애보>, 결혼을 앞둔 신부의 설레임이 두드러졌던 <서프라이즈>, 그리고 이 모든 캐릭터의 김민희적 총합인 <굿바이 솔로>의 마리까지. 주눅들지 않는 청춘의 당당함을 남달리 표현해 낸 김민희의 작품 선택은 범상함과 독특함 사이에 걸쳐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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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릭터와 닮아 간다는 느낌이요? 좋은 말 맞는거죠, 그거?굉장히 기분이 좋네요. 어쨌든 캐릭터와 잘 맞았다는 얘기니까요. 모두 조금씩은 닮은 부분이 있겠죠. 첫 영화 <순애보>의 미아라는 캐릭터는 조금 시니컬한 친구였어요. 우인이가 말을 걸려고 그래도 딱 한마디 하고 가버리는 친구였고 또 약간 동성애적 기질도 있었잖아요. 제가 마음에 들어했던 매력적인 캐릭터였어요. 저 보다 나이 많은 캐릭터를 연기한 적도 없고 나이를 먹어가고 그 나이에 맞게 움직였던 것 같네요. 그러고 보니 작품 선택이 좋았다는 얘기는 처음인데요?(웃음)”


하지만 지금의 사람들은 대부분 김민희의 ‘변신’에만 관심을 표명한다. <뜨거운 것이 좋아>의 아미가 기존의 럭셔리 이미지와 달리 털털한 생활밀착형 캐릭터인데다 김민희의 연기가 자연스러웠다는 호평 때문이다. 하지만 배우도 사람인 것을, 하루아침에 가능한 변신이란 사실 존재하지 않는다. 변신의 계기가 무엇이냐는 질문은 더더욱 식상하다.


“그런 질문 많이 들었어요. ‘어, 많이 바뀌었네’ 라면서. 계기라는 건 굳이 없고 사실 시간인 것 같아요. 시간이 이렇게 흐른 것 뿐이죠. 공백기가 길었어요. <굿바이 솔로> 하기 전에 <형수님은 열 아홉>이란 작품을 했는데 조용하게 끝이 났거든요. 심적으로 굉장히 힘들었고 생각도 많아지고 그러다 3년이 지났어요. 그러다 보니 무슨 일이든 하고 싶다는 의지가 자연스럽게 생겼죠. 그 전에는 사실 제가 어렸어요. 일에 대한 고민이나 그런게 전혀 없었거든요.”


그러던 차에 운명적으로 만난 사람이 바로 노희경 작가다. <거짓말>, <우리가 정말 사랑했을까>, <꽃보다 아름다워> 등 마니아를 몰고 다니는 노희경 작가가 <러브 액츄얼리>가 유행시킨 모자이크식 구성을 야심차게 도입한 작품이 바로 <굿바이 솔로>. 김민희는 많지 않은 나이지만 바의 월급 마담으로 일하며 나이 많은 조폭 호철(이재룡)과 동거를 하는 사연많은 미리를 소화해냈다. 시청률은 저조했지만 마니아들의 열광적인 지지를 이끌어냄은 물론 김민희 개인에게는 연기자 인생의 “터닝 포인트”가 되어줬다.

 
 “<굿바이 솔로> 많이 배웠고 얻었어요. 연기하는 재미, 대중과 호흡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 진실로 다가가는 마음 같은거요. 공백기도 길었고 고민도, 생각도 많았던 차에 만난 소중한 작품이에요. 이유요? 시놉시스하고 딱 1부 5~6신 만 봤는데도 굉장히 독특했어요. 시간 구성도 계속 왔다갔다 하고 나레이션도 들어오고. 와, 세련된 드라마구나 생각했죠. 기존에 했던 드라마와는 완전히 다르고 미리라는 캐릭터도 매력있는 여자고요.”

<굿바이 솔로> 이야기를 꺼내자 누가 피곤했냐는 듯 봇물 터지듯 이야기를 이어가는 모습에서 진심이 묻어난다. “미리 역할을 먼저 해 보고 싶다기 보다 시나리오를 접하고 작품에 욕심이 났어요. 어떤 역할이든 상관없을 정도로.” 제작발표회에서 흘린 눈물, 노희경 작가에게 5번이나 퇴짜를 맞았다는 에피소드가 화제가 됐지만 그런 외적인 요소는 중요치 않았다. 오디션도 생소했던 김민희가 처음으로 온전히 작품에만 매달릴 열정을 지펴줬던 작품이기에 더더욱. ‘쿨’함의 대명사 같은 성격이지만 남자에게는 뜨거운 여자 미리가 있었기에 삶의 굴곡은 덜할지 몰라도 만만치 않은 갈등과 고민에 휩싸인 <뜨거운 것이 좋아>의 아미가 탄생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제 김민희는 쉬지 않고 일에 매진할 작정이다. <4인용 식탁>의 조연출을 거친 정용주 감독의 데뷔작 <민조 이야기> 계약서에 도장을 찍는 일만 남았다. 온 몸의 근육이 마비되는 루게릭 병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게되는 20대 스튜디어스 역할이다. 불치병과 대면하게 되는 격한 감정의 굴곡을 ‘당당함’, ‘거침없는’이란 수사가 어울리는 김민희가 어떤 느낌으로 표현할지 벌써부터 궁금하다. 그러나 걱정은 없다. 한층 성숙한 김민희는 맞춤형 캐릭터를 자기 안으로 끌어들여 제3의 인물로 만드는 노하우를 터득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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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성태


 
<뜨거운 것이 좋아>의 가장 강력한 경쟁상대는 바로 권칠인 감독의 전작 <싱글즈>다. 스물아홉 살 동갑내기 친구 나난(장진영)과 동미(엄정화)의 사랑과 일, 우정을 감칠맛 나는 나레이션과 생활밀착형 에피소드로 채워 넣었던 <싱글즈>는 20대 여성 관객들의 지지와 공감을 얻어낸 바 있다. 그로부터 시간은 4년이 흘렀고, 29살의 나난과 동미는 데뷔도 못한 스물일곱 살 시나리오 작가 아미(김민희), 잘나가는 인테리어 디자이너이자 40대 초반 싱글맘 영미(이미숙), 그리고 집안의 실질적인 살림꾼(?)이자 이제 막 사랑에 눈뜬 ‘고딩’ 강애(안소희)를 주인공으로 삼아 그 심리적 외연을 넓혔다.



<싱글즈>의 장점을 이어받아 <뜨거운 것이 좋아> 또한 동시대를 살아가는 여성들의 속내 혹은 수다를 까칠하거나 비루하지 않게 그리면서도 최대한 대중성을 고려한 바운더리 안에서 현실의 끈을 놓지 않으려 노력한다. 그리하여 “여자가 들켜야하지 말아야 할 세 가지가 바람과 주름살, 그리고 속마음이다. 그런데 그걸 들키지 말아야 한다는 강박을 들켰을 때” 보다 당혹스러운 순간을 없을 것이라는 아미의 나레이션은 <뜨거운 것이 좋아>의 주인공들이 처한 상황을 멋들어지게 함축한다.

영미는 여자는 결혼보다, 연애보다 일로 잘나가야 한다는 신조를 지녔지만 ‘쿨’한 연하남 경수(윤희석)과의 ‘원나잇 스탠드’를 마다할 생각이 없고, 아미는 잠깐 바람을 핀 가난한 뮤지션 애인 원석(김흥수)를 정리하고 소개팅에서 만난 안정된 회계사 승원(김성수)와의 연애를 시작하며, 강애는 3년 된 ‘남친’ 호재(김범)보다 단짝친구 미란(조은지)와의 연습 키스가 더 끌리는 중이다. 티켓 구매의 주도권을 쥔 여성 관객들을 유혹하자는 포석임에 틀림없고, 또 그 기대에 부응하기에 충분할 만큼 말랑말랑하면서 공감을 자아내는 에피소드를 고루 배치했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해피엔딩이 불가능한 걸까?”라고 묻는 이 언니들은 인생이 다 그런 듯이 선택의 순간을 지혜롭게 넘기게 해 줄 “심판관”들이 필요하다. 조기에 폐경기를 맞는 충격적인 사건으로 냉정함을 잠시 잃는 영미, 두 남자 사이에서 자신을 찾고자 노력하는 아미, 끌리는 감정이 당혹스러운 강애는 정상(?)적인 현대 가족답게 연대보다 각개돌파를 시도한다. 그러니까 끊임없이 ‘이 게임이 끝나면 행복할까’ 라고 자문하지만 결국 ‘다시 시작이다’를 외칠 정도의 여유는 부여된다는 점이 중요하다. ‘싱글맘’을 선택한 동미의 리믹스 버전이자 이른 선배 겪이 될 영미나 내 인생의 봄날은 언제 오느냐고 하소연하는 20대 아미나 10대지만 자신만의 고민으로 충만한 강애나 고민의 무게는 다르지 않지만 그렇다고 파격적이지도 않다. 다만 자잘한 선택으로 이뤄지는 지금, 현재의 삶의 단면들을 펼쳐내 보이는 것만으로도 <뜨거운 것이 좋아>는 무겁지 않지만 일정정도 동시대성을 내포하고 있지 않느냐고 귀엽게 봐줄 수 있을지 모르겠다. 특히 20, 30년대와 장르의 틀 속으로 질주하고 있는 현재 한국 영화의 지형도에서 봤을 때는 말이다.

하지만 이런 해석이 무게를 가지기에 영미의 에피소드는 과한 판타지가 개입되어 있고, 강애의 경우는 아무리 여고생들 사이에 ‘레즈’ 코드가 다반사라 할지라도 단막극 에피소드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닌 것처럼 보인다. 이미숙과 같은 매력적인 외모와 능력이라면 가능하지 않느냐고 강변할지 모르지만 디테일한 감정의 묘사가 생략되어 있기에 중년 여성의 욕망을 적절히 버무리지 않았느냐는 의혹의 시선이 제기된다 해도 무리는 아닐 듯싶다. 그녀의 고민을 진정으로 나누기에 묘사의 톤이 가볍단 얘기다. 성장통의 일부라 넘어갈 수 있을 강애의 에피소드는 20대 이상 관객들이 미소 지으며 바라볼 수 있는 딱 그 정도 수위에 멈춰 선다.

역시 방점이 찍히는 것은 나레이션의 주인인 아미 쪽이다. 17번을 퇴짜 맞은 시나리오 작가라는 설정은 게을러 보이지만 일과 두 남자 사이에서 갈등하는 아미의 감정변화는 무릎을 딱 치며 ‘맞아, 맞아’를 연발할 만큼 사실적이라 나머지 아쉬움을 상쇄하고도 남는다. 다만 남자친구의 미국행 제의를 거절하는 후반부는 <싱글즈>의 나난과 판박일 뿐 아니라 ‘일에 성공한 여자만이 살아남을 수 있다’는 일반적 주장의 동어반복이라 신선함이 덜 하다. 주인공이 속물이 되는 꼴은 못 보겠다는 심리는 관객을 의식한 배려일까, 제작진의 생각일까.
싱글맘을 택한 동미와 아빠가 되어주겠다는 나난의 다소 파격적인 선택으로 리얼리티 논란을 일으켰던 <싱글즈>에서 장진영과 엄정화의 앙상블과 솔직한 연기는 빛을 발한 바 있다. <뜨거운 것이 좋아>에서는 그 몫을 김민희가 담당한다. 노희경 작가의 드라마 <굿바이 솔로>에서 재발견된 김민희는 하이톤의 갈라지는 발성에도 불구하고 때로는 섬세하고, 때로는 털털한 20대 여성의 심리를 가감 없이 표현한다. 특히 발군의 술주정과 ‘흡연’ 금단현상 연기는 과연 그가 새침한 부잣집 공주 이미지로 어필했던 김민희가 맞나 싶을 정도다. 더불어 이미숙은 여전히 묵직하고, ‘만두’ 소희양은 뚱한 표정만으로도 귀엽고 또래 여고생으로 보일 정도다.

보너스 하나. 흥미롭게도 <뜨거운 것이 좋아>는 비슷한 시기 개봉하는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과 대척점에 서 있지만 그리 얄밉지는 않은 소품 드라마다. 팍팍한 마이너리티의 삶과 ‘아줌마성’을 응원하지는 않더라도 고민에 빠진 ‘그녀’들에게 솔직함을 잃지 말라며 등을 토닥이는 것을 잊지 않는 것만으로도 소중하다고 할까? 편안한 대중영화 속에 따뜻한 시선을 견지하는 권칠인 감독이 할 수 있는 최상의 제스추어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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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drd  수정/삭제  댓글쓰기

    개념좀........ 결말을 말해버리면 어떻게합니까..

    2008.01.03 2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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