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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7.09.19 지독한 영화 [여름 궁전]

지독한 영화 [여름 궁전]

필진 리뷰 2007.09.19 14:00 Posted by woodyh98
2007.09.18


가끔씩 영화의 존재론적 지위에 관해 의구심이 생길 때가 있다. 영화는 이 시대에 과연 유의미한 매체일까. 혹시 ‘문화산업’의 전위 역할을 열심히(?) 수행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이 문득 들곤 하는 것이다. 나에게 말을 걸어오는 영화, 나를 무차별적으로 감염시키는 영화와 만날 기회가 어떠한 연유에서건 점점 적어지고 있기 때문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하지만 최근에 본 영화 한 편의 후폭풍이 엄청나다. <여름 궁전>. 이 영화는 무엇보다 머리보다는 가슴으로 먼저 와 닿는 영화다. 확실히 우리는 예술적 창작물을 접할 때 일차적으로 ‘정서’로 받아들이지 ‘사고’(thinking)로 받아들이지는 않는다. 후자는 그 이후의 이차적인 문제다. 스테판 말라르메가 살아생전 매주 화요일마다 가졌던 문학 모임에서도 같은 일이 벌어진 바 있다.

기이하게도 그 모임에 참석했던 이들은 그 때 그 곳에서 가졌던 대화 내용의 구체적인 세목들을 기억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 모임의 시간이 그들에게 무의미하고 지루했던 것도 결코 아니었다. 외려 그들은 매주 그 화요일의 모임에 더할 나위 없는 만족감과 즐거움을 느꼈음을 아낌없이 고백했다. 화요일의 참석자들은 그것을 두고 말라르메의 ‘마법’이라 불렀다고 한다. 생각해보면 진정 마법 같은 일 아닌가!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먼저 와서 박히는 정서. 이 부분이 흥미로운 대목이다. 주목하시길.  무릇 이성 아닌 감성 앞에서 인간이란 쉽게 무너질 수밖에 없는 존재다. <여름 궁전>이 그러했다. 이 영화를 보고 있자면 어느 순간 나의 주체성을 느닷없이 강탈당하고 마는 때가 있다. 그 감정의 파고는 꽤나 강렬한 것이어서 영화를 보고 나온 이후에도 그 감정은 쉬이 사라지지 않는다. 한번 생각해보시길. 당신을 감염시킨, 공명시킨 영화가 얼마든지 있지 않은지.

천안문 사태를 다루었다고 해서 중국내에서 상영금지 처분을 받은 로우 예 감독의 <여름 궁전>에서 주목해야 하는 건 사실 ‘천안문’ 사건이 아닌 것 같다. 차라리 이 영화에게는 부유하는 청춘의 지독한 사랑 이야기라는 표현이 훨씬 더 합당하다. 이 영화에서 제시되는 정치적 사건은 주로 부유하는 청춘의, ‘사랑의 불가능성’의 은유로 작동하고 있을 뿐이다.

<여름 궁전>은 정말이지 지독하고 지독하다 못해 그럼에도 불구 다시 한 번 더 지독한 영화다. “성관계는 없다”는 라깡의 유명한 명제를 영화는 상영시간 내내 온몸으로 실천해내고 있는 듯 보인다. 러닝타임도 2시간이 조금 넘는데다가, 그 적나라하기 그지없는 청춘의 황량함 내지는 불모성에 대한 묘사를 앉은 자리에서 온전히 견뎌내기란 여간 고통스런 일이 아니다. 영화가 끝난 이후에도 그 빼앗긴, 강탈당한 내 존재감을 쉬이 되찾아올 수 없다. 단언컨대 정말이지 한동안 그 감염의 상태에서 깨어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영화를 보는 동안 아마도 당신은 당신 자신의 불가능한 사랑의 서사가 동시에 무차별적으로 머릿속에서 스쳐지나가는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역설적으로 나는 이렇게 권해본다. 이 영화는 누군가와 함께가 아닌 혼자 감상해보시기를. 그 누더기같이 처참했던 과거 어느 순간 자신의 기억과 홀로 어디 한 번 정면으로 대면해보시기를. 저 속 깊은 어디엔가 쟁여두었던 앙금과 정면으로 마주해보시기를. 실재의 끔찍함과 얼마든지, 기꺼이 대면하시기를.

당신의 기억 속에 또렷이 각인된 영화나 문학 작품들을 한 번 떠올려 보시길. 아마 한 가지 공통점이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 영화 속에서, 문학 작품 속에서 당신은 필시 당신 스스로가 존재론적으로 완전히 벌거벗는/벌거벗김을 당하는 기분을 ‘느낄 수’ 있었을 것이라고 나는 장담한다. 그 감정의 잔여물은 절대 사라지지 않는다. 없어질 수도 없다. 말라르메의 ‘마법’의 정체는 이것이 아니었을까.

그것은 일단 모든 사회적/문화적 의미론적 체계들을 초월한다. 의미(signification) 아닌 ‘의미’(sense). 그것이 마치 기적과도 같이 내 눈 앞에 현전하는 순간 앞에서 인간은 적어도 주체가 아니다. 될 수 없다. 그 때 인간은 비-개인적이고 비-인칭적인 ‘수동적’ 정념을 온몸으로, 그야말로 온전히 체감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실재의 적나라함과 마주하는 바로 그 순간이, 당신 존재의 미약한 불꽃이 타오르는 순간이 될 것이다. 아낌없이, 남김없이, 이 영화를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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