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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7.09.06 서명운동까지 해야 하는 시대
  2. 2007.08.22 [므이]와 [1408], 호러 영화의 공간

서명운동까지 해야 하는 시대

필진 칼럼 2007.09.06 10:03 Posted by woodyh98
2007.09.05


"관객들이 5편의 영화를 비교 감상할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며 관람 시기를 놓친 관객들과 다시 한 번 극장에서 관람하고 싶었던 관객들에게 이번 행사가 큰 선물이 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조기 종영된 영화들의 재개봉을 결정한 CGV의 어느 관계자의 말이다. 앞뒤 잘라내고 액면 그대로 이해한다면 관객을 위한 극장 측의 사려 깊은 결정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언사는 영화의 조기종영사태와 관련해 일정부분의 책임이 극장 측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큰 선심을 베푸는 것인 양 본질을 호도하려는 태도에 다름 아니며, 극장과 배급사의 현주소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라 하겠다. 대체 무슨 영문이란 말인가. 그러니까 얘기는 몇 주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모 포털 사이트 네티즌 청원란에는, 스크린 감소와 교차상영 상황에 놓인 <기담>과 <리턴>의 장기상영을 촉구하는, 관객의 서명운동이 벌어졌다. 관객들이 서명운동에 참여한 이유는, 이러한 극장들의 무리한 교차상영으로 인해 겪은 불편 때문이라 할 수 있는데,

가령 “<기담>을 보고 싶어서 갔더니 새벽 1시에 딱 한 번 상영 하더라” “관객이 영화를 선택한다기보다는, 제작사와 배급사의 돈벌이에 이용당하는 느낌이었다”는 것이 이들의 주장이다. 보고 싶은 영화를 보기 위해 관객 스스로 서명운동까지 해야 하는 시대라니. 다른 나라에서도 유사한 예가 있는지 모르겠으나, 한국영화 팬들의 응집력과 힘을 느낄 수 있는 사건이 아닐 수 없다.

사실, 이러한 서명운동이 벌어진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관객이 나서서 영화의 장기상영을 촉구한다는 점에서 볼 때 <기담>과 <리턴>의 사례는, 지난 2001년에 있었던 '와라나고' 운동을 떠올리게 한다. 그러니까 ‘와라나고’ 운동은 2001년 10월부터 잇따라 개봉했던 <와이키키 브라더스> <라이방> <나비> <고양이를 부탁해> 등의 영화들에 대하여, 상영 공간 확보를 목표로 관람운동을 벌였던 사례를 말하는데, 당시의 노력으로 <고양이를 부탁해>는 영화의 주무대인 인천에서 재개봉됐고, <와이키키 브라더스>는 연장상영에 들어갔던 전례가 있다.

다만 이전 ‘와라나고’ 운동이 애초부터 극장을 잡기 힘들었던 영화를 대상으로 벌인 개봉관 확보 운동이었다면, 이번의 <기담>과 <리턴>의 경우는 CJ를 비롯한 대형배급망을 등에 업고도 흥행대작에 밀려 교차상영과 조기 종영될 수밖에 없는 현실에 대항하는 관객운동이라는 것에 차이가 있을 따름이다. 사안은 다르지만 작년 5월에는 국내개봉을 거부했던 김기덕 감독의 <시간>의 국내 개봉을 위한 관객 서명운동이 벌어진 바 있기도 하다.

따지고 보면 이러한 일부 영화의 소외현상은 해묵은 이야기일 따름이다. 비대하게 늘어난 스크린 수가 무색할 정도로 돈 되는 작품에만 눈길을 주는 흥행만능주의가 영화산업을 왜곡시켜온 것이 어제 오늘의 일이던가.

관객들이라면 누구나 한국영화나 할리우드영화를 막론하고 대형흥행작이 아니면 좀처럼 극장에서 원하는 시간에 만날 수 없었던 경험이 있을 터이다. 특히 지난 3월 이후 <300> <스파이더 맨 3> <캐리비언의 해적: 세상의 끝에서> <해리포터와 불사조 기사단> <트랜스포머>로 이어지는 할리우드의 총공세 동안 한국영화는 숨을 죽이고 때를 기다려야 했다. 개봉하는 영화도 부족했고 설사 힘들게 개봉하더라도 일주일을 채 못 넘기고 간판이 내려가기 일쑤인 시절이었다.

그리고 7월을 기점으로 <화려한 휴가>와 <디 워>를 내세운 한국영화의 대반격이 시작된다. 이런 와중에 전체 스크린(현재 영화진흥위원회 통합전산망에 등록된 스크린 수는 1867개 정도다)의 반 이상을 두 영화가 차지하면서 나머지 영화의 소외현상이 심화되어버린 것이다. 특히 <리턴>의 경우는 <화려한 휴가>의 배급사인 CJ엔터테인먼트의 배급망을 업고도 교차상영에 이어 조기종영이 되어버리는 이중소외를 감수해야 했다.

특정배급사가 동시에 여러 작품을 배급하는 경우 경쟁력이 떨어지는 영화는 당연히 외면당하기 마련이다. 이것이 극장의 현실이고 영화산업의 생리다. 문제는 그것이 관객의 선택이냐, 아니면 배급과 홍보의 전략적 희생양이냐 라는 것인데, 이와 관련하여 계량화된 수치를 통해 명확하게 입증할 근거가 빈약하다는 것은 한국영화의 산업구조를 연구하고 입안하는 이들의 한결 같은 고민일 터이다.

사실이지, 관객이 많이 찾는 영화를 더 많이 더 오래 상영하겠다는 주장을 반박할 만한 논리가 있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근자에 빚어진 일련의 사건들, 이를테면 작은 영화의 조기종영과 교차상영 사례들은 대부분이 배급사와 극장주 사이의 이해관계에 따라 합의 도출된 결과물이라고 밖에는 이해할 방법이 없다. 결국 돈 되는 영화에 올-인하는 극장과 배급체계를 근본적으로 손보지 않고서는 해마다 계속되는 악순환의 고리를 풀 방법이 묘연하다고 하겠다.

다만, 서명운동 때문인지 몰라도, 현재 <기담>은 지난 8월 27일부터 스폰지하우스와 필름포럼에서 추가상영 중이고, <리턴>과 <므이> <해부학교실> <검은 집> 등, 조기 종영된 영화들도 9월 6일부터 12일까지 CGV 산하 극장에서 재 상영에 들어갈 예정이다. 앞서 필자가 극장 관계자의 말에 딴죽을 걸긴 했어도 관객 입장에서는 다행스런 일이라 하겠다. 또한, 영화진흥위원회에서도, 스크린 독과점과 교차상영, 조기종영 등 영화계 폐단들을 바로잡고자, '공정경쟁 환경조성 특별위원회'를 만든다고 발표한 바 있다.

이 위원회는, 9월 초 영화전문가들로 구성된 공정특위 임원 5명을 구성해 9월 중순부터 활동을 시작하게 되는데, 특히 스크린 독과점 문제에 대해 집중, 조사할 예정이라고 하니 지켜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바야흐로 영화 한편을 보기 위해 서명운동까지 해야 하는 시대이다. 무수히 쏟아지는 영화들 속에서 길을 잃지 않고 좋은 영화를 찾아 볼 수 있는 지혜와 감식안을 가져야 할 때다. 그러니 관객들이여 명심하자! 선택의 표를 쥔 사람은 자신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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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므이]와 [1408], 호러 영화의 공간

필진 리뷰 2007.08.22 15:55 Posted by woodyh98

호러, 스릴러 영화에 있어 공간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샤이닝]의 을씨년스러운 호텔, [텍사스 전기톱 대학살]의 외떨어진 텍사스 시골 마을, [알 포인트]의 군인 잡는 대저택 ‘로미오 포인트’,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의 고립된 시골과 도시, [주온]의 저주받은 흉가까지. 도시 괴담이든 스플래터 무비든, 사다코가 나오든 좀비가 나오든 잘만든 호러와 스릴러 영화의 공간은 살아 숨쉬는 유기체로 기능한다. 비명 꽤나 질렀던 영화들을 되짚어 보라. 폐쇄공포증을 불러일으킬 법한 생생한 영화 속 공간이 먼저 떠오를 테니.

이건 물리적 제약이라는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보다 넓은 공간을 배경으로 삼는다손 치더라도 심리적 거리를 옥죄이며 인간 내면으로 침잠할 것이냐, 반대로 좁아터진 공간에서 사회 전체의 무의식과도 같은 신경증을 포착해낼 것이냐. 문제는 감독이 선택한 바로 그 공간에서 어떠한 일관된 정서를 유지할 것이냐가 관건이란 말씀. J호러만 단순 비교해도 핸드폰을 옮겨 다지는 저주를 통해 도쿄 전체를 대상으로 삼은 [착신아리]가 전자라면, 컴퓨터 모니터 화면, 혹은 한 개인의 살인으로 출발해 현대 사회의 우울을 포착해내는 구로사와 기요시의 작품들이 대표적이리라.

그런 점에서 베트남의 풍광과 한 호텔방을 주요 모티브로 삼은 [므이]와 [1408]은 호러 영화 속 공간의 중요함을 비교할 수 있는 바로미터가 되어준다. 차예련, 조안 주연, 김태경 감독의 [므이]는 베트남에 전해 내려오는 괴담이라는 독특한 설정을 가져온 반면, [1408]은 스티븐 킹의 단편 소설을 바탕으로 뉴욕 돌핀 호텔 ‘1408호’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전개해 나간다. 거칠게 대비하자면 베트남이라는 이국성과 귀신들린 호텔방이라는 폐쇄성으로 요약할 수 있겠다. 그러나 이 두 편은 베트남과 뉴욕의 거리만큼이나 상이한 방식의 전개를 보여주는 것은 물론 공간을 사유하고 재단하는 방식의 차이를 극명하게 드러낸다.

베트남의 패션화, [므이]의 경우

베트남이야 말로 무릇 역사, 사회적인 맥락을 고려해야 한다는 시선은 고리타분하다. 철저하게 여름 기획 영화인 [므이]가 심각해져야 한다고 훈계하는 건 더더욱 아니다. 그럼에도 [므이] 속 베트남이 우려스러운 것은 패션화된 오리엔탈리즘의 발로, 즉 제3세계가 제3세계를 타자화 시키는 시선이 엿보이기 때문이다.

베트남을 전경화 하는 대표적 예는 전설을 설명하는 플래쉬백과 므이 전설을 취재한 다큐 화면이다. 서연의 나레이션을 바탕으로 진술되는 므이 전설은 하층 계급의 여인 므이이 부잣집 도련님과의 비극적인 사랑, 약혼녀의 질투로 망가진 뒤 자살, 원귀가 되었지만 남자에게 배신당하고 초상화에 봉인되기까지의 과정을 담고 있다. 저주를 내릴 수 있는 능력을 타고난 므이는 2차 세계 대전 중 봉인을 깨뜨린 일본군 장교에 의해 깨어나 보름달이 뜨는 매달 15일에 저주를 퍼트리게 된다.

김태경 감독은 소설가 윤희(조안)의 취재 과정 속에 전설을 몇 개의 플래쉬백 시퀀스로 포갠다. 윤희의 시점에서 음산한 기운을 풍기는 서연(차예련)과 므이를 동일화시키기까지의 과정. 서연의 사연이 밝혀지기 전까지 의구심에서 출발, 클라이맥스에서 공포를 극대화하는 교과서적인 플롯 구성인 셈이다. 다만 영화의 전반을 아우르는 베트남에서 윤희 심리의 묘사와 서연과의 관계가 촘촘하게 연결되어 팽팽한 긴장감을 유지했는가 하는 점은 의문 부호로 남는다.

주목할 것은 00북도 00군 00읍 00리에서도 전해 내려올 법한 ‘전설의 고향’스러운 이야기를 왜 굳이 베트남에서 끌어왔는가 하는 점이다. 후반부 서연의 비밀이 밝혀지면서 자명해지지만 므이와 서연은 여성인 동시에 사랑하는 이 앞에서 물리적인 폭력을 당했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이런 폭력이 물론 베트남의 역사적인 맥락으로 알레고리화되지 못했다는 점은 차치하도록 하자. 그 보다 저주의 씨앗을 베트남이라는 공간에서 찾으려 한다는 점이 집중할 필요가 있다. [므이]가 베트남이란 공간을 필요로 했던 이유는 전설을 취재한 김교수의 다큐 화면으로 대변된다. ‘비과학=저개발=베트남=저주의 근원’이란 기이하고 정치적으로 편향된 시각이야 말로 [므이]가 공포스러운 이유다.

일견 공간만 놓고 본다면 일본의 한 섬에서 자란 사다코를 찾아가는 [링]의 변주로도 보이며, [링]의 일주일의 시한을 연상시키는 D-DAY 자막도 유사하다. 하지만 여성과 타국을 타자화 시키는, 저주의 바이러스가 국내로 유입된다는 설정이야 말로 [링]과 출발선부터 다르며 유쾌하지도 않다. 사다코가 진정 관객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던 근원은 아버지일지 모르는 박사에 의해 우물에서 죽어갔다는 그 원한이었다. 반면 친절한 플래쉬백으로 밝혀지는 서연의 사연은 이에 비해 ‘전설의 고향’에서 한 발짝도 전진하지 못한 식상함을 던져준다. 오죽하면 어떤 여기자는 ‘한국은 정녕 강간의 왕국이란 말인가’란 촌철살인의 한 마디로 [므이]를 평했으랴.

정리하면 베트남식 ‘전설의 고향’이 필요했던 이유는 이국적인 풍광과 아오자이를 입은 조안과 차예련, 두 주인공의 차별화된 비주얼, 그리고 이식된 저주라는 이 세 가지 차별성 때문이다. 물론 베트남 시내와 과거와 현재가 공존한 듯한 외곽 풍경을 담은 기능적인 롱 숏은 분명 색다른 풍경을 제공한다. 아오자이를 입은 두 주인공을 나란히 잡은 투 숏도 남성 관객들의 눈을 즐겁게 한다. 여전히 화면보다 먼저 놀래 키는 음향이 귀에 거슬리지만 사다코의 관절꺾기가 나오지 않는 것만 해도 어딘가. 저주의 완성을 담은 클라이맥스가 공포의 지속이라는 관점에서 일정정도의 성취를 보여준 다는 점은 칭찬받아 마땅하다.

하지만 다시 공간으로 돌아가 보자. 실존하는 대저택 하나로 기막히게 베트남의 굴곡적 역사를 알레고리화 해내며 폐쇄적인 공포를 극대화했던 [알포인트]는 [므이]의 단순한 기능성에 비교한다면 걸작 수준이다. 동일하게 윤희와 서연의 긴장 관계가 구체화되는 장소인 서연의 저택이 [장화, 홍련]의 2층집 세트만큼의 기능을 다하지 못하는 것 또한 유감이다. 무엇보다 뼈아픈 것은 이 모든 것이 이국적인 눈요기를 위함이었다손 치더라도 철저하게 타자를 분리시키고자 하는 내러티브 구조에 녹아있다는 점이리라. 도대체 왜 서연은 자기희생은 물론 친구까지 망쳐가며 낯선 베트남 땅에서 복수를 시작해야 했을까.

폐쇄적인 공간의 경제적인 활용, [1408]의 경우

단도직입적으로 [1408]은 지극히 경제적이다. 주요 등장인물은 공포 소설가 마이크 엔슬린(존 쿠삭)과 호텔 지배인 제랄드 올린(사무엘 L. 잭슨), 그리고 엔슬린의 부인 릴리(메리 맥코막)이 전부. 사실상 존 쿠삭의 원맨쇼다. 공간? 마이크가 1408호에 입성해 불을 지르고 빠져 나오기 까지가 한 시간. 러닝타임의 3분의 2가 호텔방에서만 진행된다. 한정된 공간에서의 세트 촬영이니 제작비 절감은 물론 원톱의 원맨쇼니 저렴한 출연료까지. 예산이 2,500만 달러라니 외형적인 면만 본다면 저예산 스릴러의 모범적 사례가 아닐 수 없다.

‘귀신의 집에서의 열흘 밤’ 같은 호러물로 인기를 끈 마이크는 하나 뿐인 딸을 병으로 잃고 아내와 별거 중인 상태. 데카르트의 후예다운 면모를 과시하는 소설가 마이크는 귀신의 흔적을 계량화할 수 있는 기계들을 이용하면서 공포 체험을 글로 옮긴다. ‘뭐, 별거 없잖아?’, 항상 이런 식이지만 글만큼은 을씨년스럽게. 그러던 중 “Don’t enter 1408”이라고 적힌 엽서를 받은 뒤 마이크는 95년간 투숙객들이 1시간을 견디지 못하고 모두 죽어나간 뉴욕 돌핀 호텔 1408호로 향한다. 지배인 제럴드의 간곡한 회유와 경고를 무시한 채.

스티븐 킹의 동명 단편 소설을 영화화한 [1408]은 서스펜스 스릴러의 형식을 취하지만 효과만큼은 여느 호러 영화 못지않다. 음향을 동반한 쇼크 기법은 물론이요, 마이크가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넘나들며 마주하는 유령들, 심리 상태와 각각의 상황에 맞게 변주되는 조명, 끝날 것 같지 않은 두려움의 지속이라는 라스트까지. 요란하게 변죽을 울리는 엉성한 호러 영화보다 깔끔한 공포를 선사한다. 이런 심리를 관객이 공유할 수 있는 전제로 스티븐 킹의 힘과 사무엘 L. 잭슨의 호연이 빛을 발하는 호텔 지배인과의 팽팽한 심리적 대결도 훌륭하다. 흑백 사진으로 제공되는 피해자들의 흔적들, 그걸 보고도 이성의 힘을 외치며 기어코 입성을 바라마지 않는 마이크의 자신감. 주인공이 자신만만할수록 관객들의 공포는 배가되기 마련이다.

이 중심에는 마이크의 심리를 ‘쥐었다 놨다’하는 공간, ‘1408호’가 있다. 생존의 제한 시간인 60분으로 맞춰져 있는 타이머는 끊임없이 반복되고, 도로 건너편 창에서는 또 다른 자신이 섬뜩하게 쳐다보고 있고, 측정기로 바라 본 호텔방에는 이유 없이 죽어나간 자들이 고스란히 누워 있는 미스테리의 연속. “이런 초자연적인 현상보다 더 재미있는 것은 없다”던 이성적인 소설가를 단번에 광기로 몰아넣는 것은 무엇보다 공간과 결합한 고립감이다. 공간 자체의 공포에서 심리적인 공포로의 이동. 자신만만했던 이 소설가가 물리적인 폭력을 동반한 수상한 기운들이 감지되면서 예상보다 빨리 이성을 잃고 SOS를 구하지만 되돌아오는 건 고립에서 오는 죽음에의 공포뿐이다. 자신의 패배를 인정하며 프런트에 전화를 걸어 봐도, 화상 채팅으로 아내에게 구조를 요청해도 돌아오는 건 절대자 혹은 호텔 주인의 앙갚음뿐이다.

고립감이 가져다준 심리적 외상의 근저에는 ‘아버지 되기’에 대한 공포가 도사리고 있다. 휠체어에 앉아 초라해진 노년의 아버지가 “너도 나처럼 될 거다”라는 저주 아닌 저주를 내린 뒤 절망하는 마이크 앞에 나타나는 이는 불치병으로 세상을 떠나버린 어린 딸. “사람은 모두 죽는다”는 딸에게 근거 없는 희망을 뇌까릴 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아버지 마이크. 지극히 한정된 공간 속에서 마주해야 하는 것은 결국 내면 깊숙한 곳에 도사리고 있는 죄의식에 기반한 공포다.

물론 이 모든 장점이 스티븐 킹이라는 당대 최고의 스릴러 작가의 공으로 돌릴 수도 있다. 그도 아니면 작가주의 영화와 블록버스터를 오가면서도 개성을 잃지 않는 존 쿠삭의 내공을 염두에 둬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클라이브 오웬, 제니퍼 애니스톤 주연의 [디레일드]로 할리우드에 입성한 스웨덴 출신 미카엘 하프스트롬 감독의 장르 세공술은 무시하지 못할 법하다. 극장에서 영화가 어서 빨리 끝났으면 하는 감정을 느꼈다면 둘 중에 하나일 것이다. 도저히 끝나지 않을 것 같은 폐쇄적인 공간에서 허우적대는 주인공의 공포에 이입을 했거나, 내면으로 파고드는 후반부로 갈수록 그 한정된 공간이 지겹게 느껴졌거나.

따지고 보면 공간의 중요성을 굳이 호러나 스릴러 장르에 국한시킬 필요는 없다. 공간이란 외피는 요리사가 어떻게 요리하느냐에 따라 밥이 달라지는 재료일 뿐이다. 올 여름 호러의 승자로 점쳐지고 있는 [기담]이 병원을 중심으로 하되 멜로드라마의 궤적을 따랐듯이. 하지만 공간의 크기에 상관없이 그 공간의 특성을 어떠한 감정선과 연결시키느냐는 무엇보다 중요하다. 베트남을 이국적인 타자로 국한시키는 [므이]와 한정된 호텔방을 죄의식과 대면시키는 [1408]의 예처럼 말이다. 부디 우리 영화가 이색적인 공간을 찾아 나서기보다 익숙한 공간을 정공법으로 다루는 영민함을 보여주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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