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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친구들 영화제' [쳐다보지 마라]

필진 리뷰 2010. 1. 21. 05:45 Posted by woodyh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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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시원
친구들 영화제에서 박찬욱 감독의 추천작으로 니콜라스 뢰그의 <쳐다보지 마라 Don't Look Now>(1973) 를 보았다. DVD로 봤을 때의 날카로운 충격을 상대적으로 느낄 수 없었다. 영화가 나른한 공포감처럼 몰려왔다. 무척이나 강렬한 해체주의적 영화인데 예민해지는 것이 아니라 무력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영화는 빨간 옷의 아이가 강물에 빠져 죽는 신으로부터 시작한다. 가족들은 아이의 죽음을 현재의 일상 속에서 목도한다. 인상적인 일상과 사건의, 집 안과 집 밖의 교차편집 오프닝 시퀀스는 그 이후 이어지는 영화의 모든 내러티브를 이 지점으로 끌어들이는 역할을 한다. 이 시퀀스는 죽음이 발생하는 과정을 마치 도미노처럼 우연적이면서도 필연적인 물리적인 반응처럼 묘사한다. 마치 죽음을 위해 완벽하게 짜여진 각본처럼 죽음은 순차적인 불길한 이미지들의 누적으로서 발생한다.

박찬욱 감독은 이 영화를 소금기의 바닷물에 의해 부식하는 도시 베니스에서 찍은 가장 인상깊은 영화중의 한편이라고 소개했다. 그는 몰락하는 유럽의 문화와 도시의 비장미를 강조했다. 그러면서 등장인물들 모두가 실제로는 유령일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내비쳤다. 줄리 크리스티가 식당에서 현기증을 일으키며 쓰러질 때, 그리고 도널드 서덜랜드가 성 니콜라스 성당의 복원 현장에서 사고를 당할 때 그들은 이미 죽은 것이며, 그 스스로의 죽음 이미지를 강 위에서 목도한 것이다. 그들은 이미 죽었고, 유령이 되었고, 그들이 좇는 심령술사 맹인 자매와 빨간 옷의 정체 모를 아이는 그들이 만들어 낸 환상이라는 것이다. 박찬욱 감독은 플래시 포워드 기법을 인상 깊게 사용한 부부의 정사신을 이야기하면서 과거와 미래가 현재에 끊임없이 개입하는 것에 대한 영화라고 말했다. 특히 미래가 개입하고 있는 현재성에 대해 언급하며 이러한 시각은 숙명론적인 것이자 현재를 현재화할 수 없는 것에 대한 실패의 이미지, 즉 현실과 현재의 바깥, 온통 포커스 아웃된 것들의 이미지들의 총체적 결합이다라고 했다.

이러한 해석은 미래에 대한 현재적 나르시시즘과 같다. 그것은 이미 본 것(과거)에 대한 죄의식이자, 그것으로부터 발생된 미래의 심판 이미지이다. 현재는 이미 본 것과 앞으로 볼 것 안에 사로잡혀 있다. 그것에 점점 잠식당해가고 있다. 현재는 과거의 반작용으로 발생하는 것이다. 식당에서 남편이 창문을 닫자 출입문이 열린다. 그 문으로 티끌이 들어와 맹인의 눈에 박힌다. 아내는 맹인을 돕는다. 과거의 행동에 반작용처럼 지배당하는 현재를 우리는 우연이라는 명목상으로 목도하고 경험한다. 현재는 온통 어지럽고, 목졸리고, 피를 토한다. 지금 보는 이미지는 과거로부터 투영된, 이미 보았던, 이미 겪었던 것의 반영체이다. 완전히 새롭고 낯선 것은 현재의 조망권에 포착되지 못한다. 남편이 보았던 자신의 장례식은 자신의 미래 이미지일 수 있지만 이미 죽은 아내의 현실 이미지일 수 있다. 그가 좇게 되는 빨간 우비의 정체 모를 아이는 이미 목도한 자신의 아이의 죽음, 그 빨간 색에 대한 죄의식의 이미지를 투영한 자의식적 결과물이다. 그것은 현재에 와 완전히 낯선 이미지(연쇄 살인마)로 포커스 아웃되지 못한다. 그의 누적된 과거 이미지들의 시각성이 이 연쇄 살인마를 친숙한 자신의 핏줄로서 포커스 인하는 것이다. 죽음을 스스로 불러들이는 것이다. 이런 그야말로 시각적 영매일지 모른다. 이 영화에서 눈먼 영매는 어쩌면 맥거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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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창호 감독은 시네마테크 친구들 영화제 개막식에서 '영화를 통한 진정으로 강력한 체험이란 감독이나 작가가 자기의 삶에서 몸과 마음으로 절실히 느낀 체험을 관객들과 함께 느끼고 공유해서, 관객의 생각과 마음을 깊고 넓게 확장시켜주는 그런 체험이다'라는 말을 했다. 영화를 만드는 감독의 눈이란 성숙된 것이다. 친구들 영화제에서 감독들이 추천한 영화를 함께 보고, 그들과의 시네토크를 듣고 있으면 감독의 시각이란 관객보다 훨씬 정제되어 있고 밀도 있으며 입체적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그들은 끊임없이 조망권역과 그 바깥의 영역을 나눈다. 영화의 화면을 만드는데 있어서의 내화면과 외화면, 즉 선택과 배제라는 영역을 항상 언급한다. 그들이 쇼트 하나를 완성하기 위해 끊임없이 고심한다는 것을 드러내는 대목이다. 영화를 확장시키고, 풍부하게 만드는 것은 영화의 기술적인 효과가 아니다. 그것은 시각의 고도화에 대한 체험이자 그 훈련이다. 고도화는 공감각적인 감각과 과학적 공간지각능력과 인문학적 정신의 깊이까지를 포함하는 단어일 것이다.

이 영화는 박찬욱 감독이 언급했듯 깨지는 이미지, 유리의 잔상같은 영화적 이미지들을 동반하여 시작한다. 참을 수 없는 시각의 유혹층, 그 얇디 얇은 층에서 미끄러지듯 깨질 듯 시작하는 영화는 본 것을 끊임없이 의심하면서도 부정하지 못하는 곤경의 심안의 이미지체로 들어선다. 그 안에서 목도하게 되는 과거와 미래를 넘나드는 영혼의 이미지에서 감독은 이미지에 대한 영안에 도전하려한다. 이 영화에서 죽음은 시각의 가장 바깥층에 있는 유리의 깨짐으로부터 발생한다. 그 죽은 육체가 물안에 깊숙히 잠긴다. 얇은 시각층을 깨고 죽음을 목도한 시각이 물 속을 유영하며 아이의 시신을 찾아 건져올린다. 그는 이 물 속의 입체성을 통과하며 심안을 획득한다. 이 심안은 평안한 유리체로 구성된 현재의 이미지를 깨고 들어온 과거의 이미지를 찾아 유영한다. 그것은 이미 깨진 현재 바깥에 있었던 미래의, 보이지 않는 영역의 이미지들을 불러들인다. 이것은 영안이라는 환상을 만들어낸다. 이 영화는 이미 목도한 것에 대한 윤리적인 질문들을 시각의 시간적, 공간적 층을 넘나들며 묻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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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bondage.dwc.cc BlogIcon bondage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봐, 당신도 여기에 아주 멋진 문서를 가지고 좋은 블로그. 당신은 속박이 날 체크 아웃 좋아해요.

    2011.08.09 0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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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건영


천재가 사라진 자리에 남겨진 스타일인가?

웬만한 사람들은 다 보았고 두 번이나 본 사람도 심심치 않을 정도로 논쟁의 중심에 선 영화 <박쥐>를 이제 서야 보았다. 박찬욱으로 말하자면 ‘복수 삼부작’에 관한 글을 썼을 정도의 개인적으로 애정과 호감을 가진 감독 중 하나였고, 또 적지 않은 평자들이 ‘장난질’이 지나쳤다고 비판한 <친절한 금자씨>마저도 그간 한국영화에서 보기 드문 오프닝 신과 정교한 미장센을 이유삼아 호평의 대상에서 놓지 않은 인물이기도 하였다. 그런데 <박쥐>의 경우는 달랐다. 한마디로 실망스러웠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순간까지도 도무지 아무런 감정이 생기질 않았다는 것이 주된 이유인데, 그 배경은 간단하다. 영화에서 인간이 실종되었고, 자기복제마저 실패했으며 죽음을 너무 가볍게 다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그것은 박찬욱의 영화라는 점에 기인한다.

언제부터인지 몰라도, (아마도 박찬욱이 <올드보이>에서 보여준 이후가 아닐까 한다.) 극한의 이미지가 영화미학의 하나의 준거가 되고 있다. 이는 내러티브가 아닌 시각적 효과의 극대화에 의지한다는 점이 문제로 지적된다. <친절한 금자씨>에서 자기복제의 위태로운 전조를 보일 때까지도 이러한 경향이 현실이 될 거라 생각하진 않았다. 그러나 <박쥐>에 이르러 그것은 현실이 되었다. 망치로 이빨을 뽑고 상대의 머리를 깨부수는가 하면 가위로 혀까지 잘라 심장 약한 관객을 힘들게 만들었던 박찬욱의 영상미학. 박찬욱의 영화가 장도리로 머리를 내려치고 이빨을 뽑아서 칸의 그랑프리를 차지한 거라 생각한다면 대단한 오해다. 그러한 장면이 꼭 필요한 상황에 등장하면서 심리적, 정서적으로 잔혹함을 느끼게 한 드라마구조가 바닥에 깔려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그런데 정작 감독 자신이 서구의 관객이 열광한 영화적 근본을 너무 빨리 망각해버린 건 아닌지 모르겠다.

적어도 박찬욱의 영화라면 잔혹성이 선정성과 상징성 사이를 줄타기하며 인간 본성에 대한 성찰로 연결되는 과정을 통해 미학적 가치를 확보했어야 했다. 다시 말해 ‘이미지의 과잉’이 주인공들의 ‘내부 과잉’과 균형을 이뤄야 하고, 박찬욱이라면 이 정도는 능히 해낼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박쥐>는 시각적 물리적 잔혹성 수준에 머문 영화가 되고 말았다. 심리적 정서적 잔혹성에 충실해야 한다는 대명제를 외면한 채 오로지 잔혹함과 유희 사이에서 키치적 감성으로만 승부하려는 우를 범해버린 것이다. 혹자는 상현과 태주의 대극으로 라 여사로 상징되는 부르주아 집단을 놓음으로써 계급성을 고수한다는 말로 박찬욱의 화법을 옹호하지만, 그런 이들이라면 클로드 샤브롤의 <의식>에서 잔느와 소피에게 일가족이 몰살당하는 장면을 먼저 보아야 할 것이다.

또 다른 문제는 영화에 인간이 실종되었다는 점이다. 흡혈귀가 된 상현과 태주는 물론이고 라 여사와 강우, 그의 마작 동료들 역시 사람다움을 갖추지 못한 이들이다. 거칠게 말하자면 <박쥐>에서 사람이라 불릴 만한 이는 찾아보기 드물다는 것이다. 이는 죽음을 가볍게 대하는 태도에서 비롯된다.

사실 영화 초반 순교와 자살을 혼동하지 말라는 의사의 충고를 듣는 순간까지만 해도, 삶과 죽음, 성과 속의 꽤나 진중한 드라마로 흘러가지 않을까 기대했었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한 대사에 불과했다. 그러니 순교는커녕 살인을 일삼다가 끝내 자살로 마감하는 불꽃같은 삶, 그 틈새에 로맨스가 스며들었다고 해서 이것을 B급 멜로드라마의 코드라 오인해서는 안 된다. 순교를 이루지 못하고 흡혈귀가 되었기 때문에 자살로 생을 마감할 수밖에 없다는 식으로 죽음을 낭만적으로 미화시키지 말란 얘기다. 대체 낭만적 죽음이란 게 있기나 한다는 말인가. 거칠게 말해 <박쥐>의 마지막 장면은 노을 진 바닷가를 배경으로 클라렌스와 알라바마를 앉혀놓은 <트루 로맨스>의 엔딩 신을 뒤집어놓은 것에 불과하다.

대체로 <박쥐>에서 관객에게 웃음을 선사하는 지점은, 죽음의 이미지가 비추는 장면들이다. 예컨대 상현은 “인터넷 자살사이트 사람들을 찾아 그들을 도와주면서” 흡혈을 한다는 말로 자신의 행위가 태주의 살인과는 격이 다르다고 주장한다. 그 지점에서 관객은 폭소를 터뜨린다. 박찬욱 특유의 유머가 빛을 발하는 순간인가? 그러나 제 아무리 장르를 비틀고 전복시키고 이종교배를 단행할지라도 삶과 죽음을 다룸에 있어 최소한의 엄숙함은 유지되어야 한다(고 나는 믿는다.) 적어도 죽음이란 희희낙락거리면서 논할 정도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쥐>에 드러나는 죽음은 단순한 흡혈의 결과로 전락할 뿐이다. 상현과 태주의 흡혈은 생존의 문제도 아니고 순교의 때를 기다리기 위한 것도 아니요, 오로지 그들의 욕망을 지속시키기 위한 유희에 다름 아니라는 것이다. 한 인간의 숭고한 죽음이 아닌 죽어 마땅한 인물의 객체화. 이는 박찬욱이 즐겨 쓰던 수법인 동시에 논란을 피해하기 위해 영리하게 사용된 기제의 다른 이름이다.

생명의 탄생은 인간의 의지로 억제할 수 있지만 죽음은 인간 의지 밖의 영역이고 그래서 죽음은 탄생보다 인간적이면서 방법과 행태에 있어 탄력적이다. 때문에 많은 예술 분야에서 그래왔듯이 탄생은 하나의 아이콘으로 고착된 반면 죽음은 그것을 다루는 작가에 따라 다양한 이미지로 변형되거나 심하게는 풍자의 대상으로까지 다루어지곤 했다. 그런데 <박쥐>에서 박찬욱은 넘어선 안 될 선을 보란 듯이 넘어가버린다. 그것들을 희석시키기 위한 현란한 미장센을 가림막 삼아서 말이다. 무릎으로 박박 기면서 포월(匍越)까지는 아니라도 좀 더 조심스럽게 넘을 수는 없었을까?


<싸이보그지만 괜찮아>가 나왔을 때, 김영진 평론가의 주관으로 황진미와 박찬욱이 격론을 벌인 일을 기억해보자. 이름조차 반가운 『필름2.0』의 특집기획이었는데, 나름 까칠하게 조목조목 물고 늘어졌음에도, 이 대담은 황진미의 영화적 안목의 한계와 비평적 자산의 빈곤함을 실토하는 엉뚱한 결과를 낳고 말았다. 황진미가 박찬욱을 상대한다는 것 자체가 무리였고 수읽기에서 비교가 되질 않았다는 것이다. 느닷없이 지나간 얘기를 끄집어낸 이유는 <박쥐>를 두고 호불호가 갈리는 이 상황을 박찬욱은 어떻게 느끼고 있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가 이 상황을 천천히 느긋하게 즐기고 있을지 어떨지 알 수 없는 노릇이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제 아무리 비판과 비난에 악평을 쏟아낸다고 한들 박찬욱의 영화화법이 쉽사리 변할 것 같지는 않아 보인다. 그것이 그의 스타일이고, 감독에게 스타일이란 필요에 따라 갈아입을 수 있는 옷이 아닌 피부와도 같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박찬욱이 개별적 비평에 일희일비할 인물은 아닐 테니까 말이다.

영화에는 메시지와 메타포, 이미지가 있다. 그것들은 영화 밖 세계관과 상호 영향을 주고받는다. 세계관이 불안정할 때 재현된 삶은 온전하게 설득력을 얻기 힘들다. 거듭 말하지만, 모름지기 분출하는 힘을 붙잡아 절제미를 구하는 사람만이, 어떤 참혹한 상황일지라도 인간에 대한 애정이 깃든 작품을 만들 수 있는 사람만이 대가의 반열에 오를 수 있다. 위대한 작품은 이성이 분별없는 환상을 누르고, 형식이 소재를 누르며, 천국이 지옥을 누른다. 여전히 박찬욱의 영화는 관심의 대상이고 흥미롭지만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그것들에 대한 총체적 판단을 유보한 채 다음 작품을 기다리는 일일 테다. 천재가 죽으면 스타일이 남고, 시대성이 사라지면 풍속만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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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blog.naver.com/amireal BlogIcon Kei  수정/삭제  댓글쓰기

    묵은 글에 묵은 리플 하나 남겨 봅니다.

    글을 읽어나가는 도중에 "적어도 죽음이란 희희낙락거리면서 논할 정도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라는 말씀이 눈에 들어오더군요.
    반대로 저는 죽음을 희희낙락거리면서 장난질을 쳐대는 그게 너무 재미있었는데 말입니다 ^^

    박찬욱에게 우리는 너무 많은걸 기대하고 있었는지도 몰라요,
    그를 참 좋아하고, 그의 영화를 참 좋아하지만 세계적인 거장이라고 칭송받을 정도의 위치는 아니라고 생각하거든요. (박찬욱 감독도 그런 부분을 스스로도 억울해하는거 같고.. 좀 즐기는거 같기도 하고..)

    어쨌든, 거장이 아닌데 마치 거장인양 포장된 박찬욱의 껍데기를 벗겨놓고 생각한다면, 박쥐는 그의 씁쓸한 유머가 제대로 기능한 몇 안되는 영화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좋은 글 감사하게 잘 읽고 갑니다.

    2009.11.14 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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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태희

도대체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해야 좋을까? 나는 박찬욱의 <박쥐>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어떻게든 이 영화에서 장점을 찾아내고 싶었다. 비록 나는 박찬욱을 좋아하지 않지만 그를 지지하는 그 많은 사람들은 분명 내가 보지 못한, 그의 영화에서 영화적으로 뛰어난 요소들을 보았다고 믿었고, 내 스스로 그것을 직접 찾아내고 싶었다. 이제 한국 영화를 말 할 때 박찬욱이라는 이름을 피할 수는 없다. 그건 인정한다. 그런데 그가 내놓은 새로운 영화 <박쥐>는 실망스러움을 넘어서 그 수준이 매우 처참 할 정도이다.

이전 박찬욱 영화도 그랬지만, <박쥐>는 현대를 배경으로 한 주인공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진행됨에도 불구하고 특정한 로컬리티와 시대성을 지워버린다. 이 영화의 배경은 2000년대에 갖다놔도 되고 60년대에 갖다놔도 이야기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는다. 그 대신 온갖 한국적이라는 것의 희화화만 존재한다(한복가게의 저 우스꽝스러운 화장을 한 여자들, 트롯트 레코드판, 이층 한옥에 이르기까지). 또한 영화를 보기 전, 진지하게 다룰 것이라는 예상을 했던 카톨릭적 죄의식과 구원이라는 테마를 거의 유머 수준으로 남발하고 있으며, 강우의 가정을 부르주아로 설정했지만 특별히 계급적인 이야기를 하는 것도 아니고(사실 박찬욱은 이것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이다. 이것을 생각했을 때 <복수는 나의 것>은 얼마나 낯간지러운 영화인가), 강우의 어머니를 통해서 혹은 강우를 좀더 나이를 든 인물로 설정해 외디푸스적인 이야기로 흐르는 것도 아닌, 단지 여기에는 온갖 테마가 뒤섞여서 수습을 하지 못한 채 자멸로 끝나버리는 인간상에 대한 오독의 캐리커처만 담겨져 있다.

좀 더 쉽게 얘기해서, 금기시되는 쾌락 때문에 괴로워하는 신부의 이야기에서 출발한 영화가 내놓은 결론이라는 것에서 무엇을 느껴야 하냐는 것이다. 결국 주인공들이 이 세상에 마지막 남은 커플이 된 마냥, 서로 껴안으며 서로를 확인한 채 죽어가는 연인들을 보여줄 때 결과적으로 이걸 코미디로 봐야하나, 마지막 장면에서 연민을 느껴야 하나.

박찬욱은 지금 너무나도 지나친 농담을 하고 있는 중이다. 본인이 에밀 졸라의 소설에서 영향을 받았다고 말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그저 잉마르 베리만의 <겨울빛>으로 시작해 캐서린 비글로우의 <니어 다크>로 끝나는 영화처럼 보인다(이런 비유도 박찬욱에겐 과한 것이다). 그리고 이 안에 온갖 주제들이 뒤죽박죽 뒤엉켜 있다. 박찬욱은 영화를 결코 어렵거나 난해하게 찍는 감독이 아니다. 그저 이야기의 논리를 무시 할 뿐이다. 언젠가부터 그는 이야기 안에서 해소하지 못하는 부분을 항상 남겨 놓았다. 뭐, 이걸 스타일이라고 부를 수 있지만 결과적으로 박찬욱은 정말 시나리오를 못 쓴다.

이상하게 박찬욱은 자꾸만 어떠한 테마나 소재주의에 집착한다. 같은 말의 다른 판본.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것과 다르게) 홍상수는 테마나 주제에 매달리는 감독이 아니다. 그의 영화 속 인물들이 섹스 하는 장면이 점점 사라진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다. 그는 영화에서 섹스 장면이 나오는 순간, 아무리 영화가 다른 얘기를 해도 관객에겐 영화 자체보다 섹스의 이미지가 먼저 눈에 들어온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이것을 자신의 영화에서 없애버렸다. 그런데 박찬욱은 홍상수와 반대다. 그는 오히려 영화 안에서 테마를 붙잡고 늘어지기 위해 자꾸만 상황을 폭력적으로 몰아가고, 격렬한 섹스를 해야 하고, 주인공이 곤경을 당하고, 그 때문에 괴로워하며 마지막엔 기어이 송강호의 자지를 보여준다(이 말은 아무리 포장해도 결국은 같은 말이다). 박찬욱의 영화가 (개인적으로) 계속 실패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박찬욱은 자기가 하고 싶어 하는 이야기를 진지하게 하는 방법을 모르거나, 아니면 아예 세계관 자체가 없는 사람이다. 나는 <박쥐>에 대해 더 이상 생각하는 것을 멈추고 매우 진지하게 그에게 묻고 싶다.

"박찬욱 감독, 당신에게 영화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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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똘레랑스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어쩌면 내가 하고픈 지적 정확히도 하셨네요~~ 박찬욱감독영화중 최악이 아닐까 싶네요

    2009.05.07 14:31
  2. Favicon of https://donghun.kr BlogIcon 멀티라이프  수정/삭제  댓글쓰기

    기존의 박찬욱 감독의 영화들 보다도 현저히 떨어지는 영화라는 생각이 드네요.

    2009.05.08 01:25 신고
  3. 혀기  수정/삭제  댓글쓰기

    영화는 관점나름아닌가요? 재미없게 본사람이 있으면 재미있게 본 사람도 있습니다.
    그리고 사건의 시작 갈등의 해소 이런것 만으로 영화를 해석할수는 없습니다. 마치 당신의 글은 인수분해 공식을 외운 이제 갓 중3이 된 학생이 미,적분을 이해하려 하는것 같군요. (개인적으로) 당신의 글은 쓰레기로군요. ^^

    2009.05.08 06:25
  4. 탑쌓기  수정/삭제  댓글쓰기

    <"박찬욱"이 만든 영화>라는 타이틀이..정작 감독의 역량보다는 관객들의 상상력을 배양시키는게 아닌가..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감독의 의도를 뛰어넘어버리는 관객들의 해석력..
    '싸이보그지만 괜찮아'라는 영화를 보고 많은 사람들은 "이게 뭐지?" "박찬욱이 말하고 싶은게 뭐지?" "뭔가 있을거야..박찬욱이 만든 영화인데...." 라며 한참을 고민하고 입씨름 하며 수많은 의견들을 쏟아내고, 혹자는 기껏 영화 하나 이해 못한 누군가를 보며 '무식하다'라는 발언까지 써대죠..
    박찬욱의 영화라면..무슨 공식이나 부가적인 해석이 필요하다는 듯한 풍조가 생겨버렸죠. 그가 대단한 학자나 천재도 아닌데..그의 영화를 떠받들어버리죠..
    결국 '싸이보그지만 괜찮아'에 대해선 차후에 박찬욱 曰 "그건 아무 의도가 없었다."로 마무리 지었던.
    박쥐를 보면서 박찬욱은 "그저 특이한" 뭔가를 통해 "박찬욱스러움"을 만들어내려고 노력한 흔적은 보인듯 합니다.
    문제는 사용된 도구들이 명성(?)에 걸맞지 않게 엉켜 있어보였구요.
    그냥 정작 어떤 물고기를 잡을지 생각도 않은채, 여러개의 미끼를 던져놓고는 막상 걸려 올라오는 물고기를 보며 '내가 잡으려 했던게 이거다.'라는 식의 구성이 보였던거 같습니다. 물론 그 물고기는 관객이 걸어주는듯 하구요.
    이 영화에서 그나마 건질거라고는,
    정말..의외의 연기력으로 다가온 김옥빈이라는 배우를 보는것 하나였던것 같습니다.
    그를 캐스팅한게 박찬욱 감독이라면, 그의 섭외력에는 높은 점수를 주고는 싶더군요.

    2009.05.08 08:55
  5. ...  수정/삭제  댓글쓰기

    감독의 결론에 길들여진 관객들...
    감독이 던져주는 먹이의 내용이 분명해야 좋은 영화라고 생각하는 관객들...

    2009.05.09 09:14
  6.  수정/삭제  댓글쓰기

    시나리오를 못쓴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2010.06.28 07:25

[박쥐], 보자마자 한마디

필진 리뷰 2009. 4. 28. 10:22 Posted by woodyh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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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성태

송강호의 거시기 노출이 벌써 인터넷을 달궜나 보다. 그래서 이렇게 함 풀어보자. 그 장면, 뜬금없긴커녕 꽤나 의미심장하다. 송강호 왈 "1년 전부터 감독하고 고민하고 토론했던" 장면이란다. 500대 1을 뚫고 살아 돌아 온 이 사제를 병자들은 미신 받들 듯 추앙한다. 하지만 주체할 수 없는 욕망에 신을 저버린 이 남자, 신도 중 한 명(아, 황우슬혜!)을 강간하다 걸려 완벽하게, 그리고 추악하게 까발려진다. 거기서 성기가 노출된다. 욕망의 나락으로 추락해 버린 사제 상현은 이 장면의 마지막에서 자조어린 쓴웃음을 짓고 있었다. 이건 어쩌면 칸에서 금의환향한 사제 박찬욱을 추앙하는 불특정다수의 대중들에게 <박쥐>를 통해 자신의 취향을 적나라하게 까발리려는 감독 자신의 항변은 아니었을까.

각설하고 그 만큼 <박쥐>는 논쟁의 불을 당길, 아니 벌써 당기고야 만 영화다. 뱀파이어가 된 사제는 치정극에 휘말려 욕망에 눈 뜨고, 또 그 욕망에 배신당한다. 사제는 고해성사를 받아 준 신부를 죽이면서 신과 완전히 결별한다. 그리곤 연인 태주와의 파국이다. 그간 언뜻 언뜻 내비쳤던 죄의식과 구원의 문제가 극단으로 치닫는 가운데, 에밀 졸라의 소설에서 빌려온 치정극과 욕망의 드라마가 펼쳐지고 중간 중간 뱀파이어란 설정 그 자체를 유머와 조소의 기제로 활용한다. 그리하여 <박쥐>는 <복수는 나의 것>의 정서를 바탕으로 <올드 보이>의 뜨거움과 <친절한 금자씨>의 농담과 속죄를 섞고, <싸이보그지만 괜찮아>의 라스트 신으로 승화시킨, 더없이 풍부한 플러스의 영화인 셈이다.


개인적으로 뱀파이어나 치정극 하나만 집중했다면 좀 더 농밀해지지 않았을까 싶지만, 그건 박찬욱 감독의 선택일 뿐. 그래서 그의 조소와 두 세신 걸러 분출되는 아드레날린과 대속이 뒤범벅된 복잡 미묘한 이 영화의 정서를 공감하느냐는 순전히 취향의 문제다. 어쩔 수 없이, 취향의 문제라고 썼다. 그런데 그 취향이 점점 언어와 배우를 제외하고, 김치가 아니라 버터 맛이 난다면 분명 대중들은 한 발자국 더 멀어질 것이 빤하다. 그러거나 말거나 박찬욱은 제 갈 길을 갔다. 성취보다는 전진으로 보이는 이 <박쥐>를 살짝 응원해보는 것도, 좋지 아니할까? 아, 그리고 제목은 <박쥐>보다 영어제목 [Thirst]가 200배 더 섹시하고 맛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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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런...  수정/삭제  댓글쓰기

    어디서 까발려지는지 알아버렸네요...-_-;;

    제목에 스포일러 워닝해주세요....

    2009.04.28 12:34
  2. 앍앍앍앍  수정/삭제  댓글쓰기

    당했다 당했어!!!
    영화 줄거리를 거의 다 까발린 글에 경고문구 하나도 안 적어 놓다니...완전히 낚였다.

    2009.04.28 13:01
  3. 냉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감독 취향도 좋지만, 돈 잔뜩 투자받아서 독립영화 찍고 관객들 외면해서
    투자자들 돈 다 날리고 나면.. 다른 후배 영화인들이 영화 찍기 힘들다는 건 아는건지..?

    2009.04.30 18:23

박찬욱의 [복수 삼부작] 다시 읽기

필진 리뷰 2009. 4. 22. 10:04 Posted by woodyh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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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건영

프롤로그

폭력이 준동하는 인간 내면의 욕망 속에 사회적 불신과 냉소를 가득 채워놓은 박찬욱의 ‘복수 삼부작’이 대단원의 막을 내린지도 4년의 세월이 흘렀다. 각각의 작품에서 보여준 한국영화사에서 그 유래를 찾기 힘들 정도로 전편에 넘쳐나는 비장함과 유려한 미장센은 박찬욱을 미래의 거장으로 올려놓기에 충분해보였다. 그러나 이어 내놓은 2006년작 <싸이보그지만 괜찮아>의 상업적 실패는 천하의 박찬욱도 관객과 평단의 칼바람 앞에서 안전할 수 없음을 확인시켜주었다. 혹자는 쉬어가는 영화가 아니었냐고 반문해댔으나, 감독에게 쉬어가는 영화란 게 어디 있으며 그렇게 영화를 찍는 작가가 있을라고. 모름지기 천재가 사라지면 스타일만 남고, 시대정신이 사라지면 풍속만 남는 법이라지만 박찬욱의 경우는 어느 한쪽도 잃지 않고 후일을 도모해왔다는 점에서 기대감을 배가시키기 충분했다. 그리고 다시 3년, <공동경비구역 JSA> 당시 기획한 10년 숙원의 프로젝트 <박쥐>가 드디어 그 베일을 벗었다. 감독 스스로 “내 영화 중 최고”라고 자긍심을 드러낼 정도이고 보면 영화에 대한 기대감은 한층 커질 수밖에 없을 터. 벌써부터 ‘한국영화의 구원투수’ 라는 식상한 용어로 덧칠된 박찬욱의 컴백 기사가 넘쳐나는 이즈음, 오히려 지금이야 말로 ‘복수 삼부작’을 복기해보는 절호의 시점이 아닐까, 하는 마음이다.


바그너와 박찬욱 영화

바그너는 독일이 낳은 위대한 음악가이다. 그의 사유에는 게르만 전승이 깔려있고 낭만주의로 덧씌워진 무대연출에 비중을 뒀다는 점에서 여느 독일의 음악가들과 궤를 달리한다. 영화가 없던 19세기의 블록버스터는 바그너의 그랜드 오페라였다고 말하면 정확하다. 그러나 그의 음악이 나치즘과 선동정치의 준거가 되고 히틀러에게 영감과 불씨를 제공했다는 점에서 오늘날까지도 독일국민에게 껄끄러운 존재로 자리하고 있다. 한 때 바그너를 동경했다가 훗날 혹독한 비판을 가했던 니체 역시도 바그너의 음악 뒤에 숨겨진 선동과 지나친 인기의 위험성을 경고하곤 했다. 무엇보다 바그너에게서 문제 삼았던 것은 ‘데카당스의 문제’였다. 즉 삶의 요소가 줄어들고 거대한 피로감이 몰려오는 것, 헌신과 잔인함과 인위적인 순결함이 합치되는 현상에서 삶과 사랑의 에너지를 누르고 이념과 순결을 따라갔다는 것이다.

나는 박찬욱 영화에서 바그너의 음악을 본다. 비록 바그너와 같은 이념의 추구는 없을지라도 의도하지 않은 컬트화가 낳은 세몰이식의 마니아를 양산했다는 점은 상당부분 유사하다. 바그너의 음악은 음악자체가 아니라 언어가 되고 도구가 된다. 동시에 작은 요소들로 디테일을 표시한다는 점에서 대단히 뛰어나다. 극소 공간 안에 감각과 그림자, 색, 스러져가는 빛의 은밀함 등을 표현하는 다채로움과 풍요로움에 있어 바그너를 따라갈 사람은 없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박찬욱의 영화는 시간이 갈수록 소도구를 이용한 절묘한 미장센을 만들어내고 있으며 디테일한 묘사와 테이크 간 연결기법은 정점에 오른 느낌이다. 하지만 미학적 기술적으로 따라올 자가 없다는 자신감의 과잉은 종종 모든 장면을 클라이맥스로 만드는 오류를 범하기도 한다. 이는 바그너의 음악이 종결부 없이 무한선율로 이어지는 것과 맥을 같이 한다. 그것은 하나의 주제에서 다음으로 넘어가고 모티브들이 한데 섞이는 방식을 말한다. 그러니까 전체를 유기적으로 조직하는데 필요한 분절 없이 작은 단위들이 모두 동일한 가치를 지닌다는 것이다. 이것이 데카당스 양식의 특성이다. 박찬욱이 의도했건 아니건 그의 영화는 바그너의 음악양식과 닮아 있다.

거칠게 말하자면 바그너의 음악은 언뜻 왕의 진수성찬 같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영리한 주인이 손님에게 제공하는 경제적인 만찬일 뿐이다. 이처럼 최소 비용으로 제후의 밥상을 모방하는 재주, 그것은 몇 번은 배가 부르겠으나 과시적인 메뉴는 식상하기 쉽다는 단점이 있다. 박찬욱의 영화가 넘어야 할 산이 있다면, 바로 이것이다. 자기복제를 피하고 관습과 형식미의 절제를 통한 적절한 변주만이 그의 영화를 사랑하는 이들에게 끊임없이 에너지를 제공하는 길이 될 것이며 한국영화계를 위해서도 바람직한 일일 것이다.



불신과 냉소


박찬욱은 자신의 영화를 통해서 반사회 반인류적 대상의 공멸을 통한 사회냉소주의와 인간혐오주의를 내보여온 감독이다. 그것은 차가운 냉소주의적 기류 속에서 사회를 움직이는 불건전한 논리를 머리로만 인식하면서, 가슴을 훈훈하게 만드는 온정주의적 인간의 실종을 목도하게 만든다. 이는 B급 영화정신으로 무장된 그의 영화적 사유와 평론가 시절부터 보여준 주류영화계에 대한 미온적 태도와도 무관치 않다. 이미 <복수는 나의 것>을 통해서 노동자계급과 자본가의 갈등을 드러냈고 장기밀매와 동진의 딸을 유괴하는 과정 속에서 거짓과 가식으로 얼룩진 온정주의가 아닌 진심이 담긴 온정주의적 인간의 실종을 보여주면서 ‘진정한 온정주의’, 그런 건 이 세상에 없다고 단언했던 감독이었다. 그는 <친절한 금자씨>에서도 사회구조에 대한 불신과 냉소를 가득 담아내고 있는데, 이를테면 유괴당시 미온적 태도를 보였으나 복수의 적극적 가담자로 탈바꿈시켜놓은 형사와 마음속으로는 복수를 준비하면서도 거룩한 얼굴로 참회기도를 하는 금자의 모습과 왜곡된 욕망으로 가득 찬 전도사를 통해 한 치의 오차 없이 인간의 이율배반적 본질을 까발리기게 이른다. 이처럼 감독은 불온한 욕망으로 가득 찬 성직자와 공적의무를 상실한 형사의 모습을 통해 사회의 법과 규범에 대한 조롱을 한껏 퍼붓고 있다.

<복수는 나의 것>에서 장기 판매업자들은 류를 속여 그 누이를 죽게 했기에 류에게 죽임을 당한다. 그리고 류에게 신장을 먹혀버린다. 류와 영미는 유괴를 했기에 아이의 아비에게 죽임을 당하고 그 아비는 노동자를 착취한 자본가이기에 노동자들에게 살해당한다. 이같이 박찬욱 영화에 나오는 인물들은 미시적으로는 무죄이나 거시적으로는 모두 유죄인 자들이다. 때문에 그들은 사회적 관계 안에서는 필연적으로 유죄가 될 수밖에 없다. <올드 보이>에서 ‘웃어라. 세상이 너와 함께 웃을 것이다. 울어라. 너 혼자 울게 될 것이다’라는 말이나, ‘모래알이나 바윗돌이나 가라앉기는 마찬가지’라는 말은 인간이 불가항력적으로 사회적 관계를 수용할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암시한다. 이는 박찬욱 영화 속 사회적 불신과 냉소주의를 이해하는 첩경이 된다.

박찬욱은 그의 영화 속에서 사회적 관계를 인간의 존재 조건으로 받아들이곤 했다. 인물들은 모두 관계 속에서 숨 쉬고, 그 관계는 개인의 의도나 의지와 상관없이 얽히고 충돌한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무의미한 말이나 행동, 선의에서 비롯된 악행도 결과적으로 죄악이 될 수 있으며 아무리 평범한 사람도 <올드 보이>의 오대수처럼 ‘악행의 자서전’을 대여섯 권 쓰는 일이 가능하게 됨을 말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완강하게도, 그리고 냉정하게도 박찬욱은 사회적 관계 속에서 ‘짐승만도 못한 놈의 살 권리’는 인정하지 않는다. 이것이 박찬욱의 영화가 여타 스릴러나 복수극과의 차별을 이루는 지점이다.


유괴 혹은 납치에 스며든 자본주의

박찬욱의 복수 3부작에 어김없이 등장하는 소재는 ‘유괴와 납치’이다. 먼저 그리스 신화를 잠시 살펴보자. 추수의 여신 데메테르에게는 하나 뿐인 딸인 봄의 여신 페르세포네가 있었다. 명부의 신 하데스가 그녀를 칠흑처럼 검은 수레에 태워 지하세계로 데려간다. 데메테르가 아흐레 동안 슬피 울다가 태양을 만나고서야 진상을 알게 되었고 제우스의 도움을 빌어 간신히 딸을 지상으로 데려왔다. 이미 명부의 흙을 먹은 그녀는 1년 중 4개월은 어둠 속에서 지내야 한다. 어둠을 이기고 지상으로 올라오는 그녀는 사람들에게 경외감 자체였다. 바야흐로 봄의 시작이다. 이렇듯 계절의 순환을 이야기하는 메타포의 시작은 유괴와 납치에서 비롯된다.

의심할 바 없이 <친절한 금자씨>는 개인적 원한을 복수의 파노라마 속에서 펼쳐내는 영화이고, 그 사건의 발단은 유괴이다. 복수 3부작 속 인물들은 저마다 개인적 복수나 이기적 욕망을 유괴와 납치 감금을 통해서 해소하고 있다. 하지만 영화마다 등장하는 유괴와 납치는 양태와 목적에서 차이를 보인다. 예컨대 <복수는 나의 것>의 류와 영미가 동진의 딸을 유괴하는 것은 자본주의 메커니즘에 대한 원초적 불신과 악순환의 고리를 재촉하는 행위였다. 다만 자신의 신장을 강탈당해 누나의 수술이 막연해진 노동자 빈곤계층이 유괴를 통해 수술비를 마련하려 했다는 것은 (영미의 입을 통한) ‘좋은 유괴’와 ‘나쁜 유괴’의 자기합리화를 가능케 한다는 점에서 박찬욱의 영민함이 빛나는 대목이다. 그러니까 유괴범의 행위 자체는 용서할 수 없으나 심정적으로 동정할 만한 여지를 남겨놓음으로써 유괴가 가져오는 공멸의 기운 속에서 양가성(兩價性)을 함유하고 있는 것이다. 반면에 <올드 보이>속 오대수의 납치 감금은 이우진의 경제력이 사적 복수의 수단으로 사용된다는 점에서 차이를 보인다. 이렇게 자본주의가 낳은 경제력은 <복수는 나의 것>에서 유괴의 동기가 되지만, <올드 보이>에 이르면 납치 감금의 수단으로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친절한 금자씨>의 유괴는 애초에 백 선생이 아이들을 싫어했다는 금자의 설명을 통해서 부의 축적을 위한 동기 말고는 어떠한 이유로도 해석되기 힘들다. 이것은 <친절한 금자씨>가 <복수는 나의 것>의 유괴와는 다른 차원에서 읽혀져야 하며, 배금주의의 병폐가 만연된 당대의 현실과도 무관치 않은 이유가 된다. 결국 <친절한 금자씨>속 유괴는 앞선 두 편의 중간쯤에 놓이는 안전주의 노선을 택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금자의 복수극을 통해서 무사히 안착하며 백 선생 납치 역시 ‘사필귀정’이라는 단어 안에서 어떠한 제제도 받지 않고 암묵적 동조를 얻어내기에 이른다.


감사와 은덕의 Bella Vendetta

르네상스시대의 복수는 언제나 고민의 여지를 남겨놓곤 했다. 그것은 ‘인간 자신의 힘으로 행할 것이냐, 신의 섭리에 맡기고 울분을 참고 견딜 것이냐’의 고민이었다. 근세가 도래하고 법과 규범이 등장할 때 까지 그 역할은 제사장이나 성직자들이 대리해왔다. 그런데 복수의 심판주체가 인간이냐 신이냐의 문제는 결말의 확연한 차이를 가져온다. 인간이 심판하고 복수할 때 그것은 살인을 불러오며 그것으로 인해 자신 역시 복수의 대상이 된다는 점에서 복수의 연쇄고리에서 벗어나기 힘들기 때문이다. <복수는 나의 것>의 장기강탈과 유괴가 불러온 복수의 순환 고리는 인간의 복수가 갖는 한계를 극명히 보여준다. 하지만 복수란 것이 사회적 갈등의 해소 차원에서 보면 현실은 그리 간단치가 않다. 이때 개입하는 것이 샤머니즘이다. 사회적 지위가 낮거나 소극적일 수록 죽어서 복수하는 형태를 잠재우는 방식으로서의 샤머니즘. 말하자면 무속의 힘을 빌린 복수극이 공포영화의 소재로 자주 등장하는 것은 여기에서 비롯된다. <올드 보이> 역시 심령술사를 동원해 오대수의 기억을 조작하는 복수의 단편을 보여주는 반면, <친절한 금자씨>의 복수극은 조금 다른 방향으로 변형되기 이른다.

박찬욱의 삼부작을 관통하는 ‘복수’라는 단어를 단순하게 접근해서는 숲 만보고 나무를 지나치는 우를 범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이탈리아인들의 오랜 관습으로 자리한 복수방식은 하나의 징표가 된다. <친절한 금자씨>의 이금자는 13년 전 사건으로 13년간 복역하는 동안, 교도소에서 자신의 동조자를 하나 둘 씩 만드는 동시에 자신의 복수를 치밀하게 기획한다. 그녀가 간증하거나, 정상인은 이해하기 힘든 친절함으로 재소자를 감화시키는 동안 자신의 행동을 비웃는 사람까지도 자기편으로 만드는 수준까지 도달하게 되는데, 이는 자기가 당한 부당함을 기억하는 사람일 수 록 자기가 받은 은덕을 더 깊고 오래 기억하기 때문이다. 감독은 금자의 대극적 이미지로 뚱뚱한 죄수 마녀를 배치함으로써 조력자로서의 명분을 제공하고 있다. 살인을 저지른 창녀와 꽃뱀과 은행 강도였던 이들이 하나 둘씩 금자의 복수극에 참여하는 것은 금자의 친절함과 대비되는 마녀의 폭력적 행동에 대한 반발 심리이자 금자에 대한 보답이다. 따라서 복수욕의 정당화를 위한 금자의 친절과 베풂의 나날은 이탈리아인들의 복수 방식인 ‘벨라 벤데타 (Bella Vendetta)’와 절묘하게 상통한다. 금자라면 자신의 출소까지 기다리지 않더라도 얼마든지 복수가 가능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오래도록 복수를 미루는 까닭은 좋은 복수(벨라 벤데타)란 오랫동안 기다려온 모든 상황들이 맞아 떨어져야 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복수욕의 정당화를 위해선 이에 상응하는 감사와 미덕이 있음을 입증해야하는 영화적 스토리의 개연성과 무관치 않다. 많은 평자들이 의문을 품었듯이 <친절한 금자씨>가 복수극 3부작의 완성치고는 싱거운 감이 없지 않은 것은 이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이상적 복수의 완성

<친절한 금자씨>에서 금자는 백 선생을 어느 폐교에 가둔다. 그리고는 법과 인간의 감정 사이에서 갈등하는 유괴아동의 가족들을 불러내 동참하게 함으로써 성대한 복수의식을 치른다. 바야흐로 개인의 복수가 공공의 복수로, 사적 감정이 공적응징으로, 죄인에게 조차 보장되어야 할 인간의 존엄성이 짐승만도 못한 놈의 살 권리의 실종으로 바뀌는 순간이다. 이 과정에서 박찬욱은 인간 내면에 숨겨진 폭력성을 본격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하는데, 이때 감독은 피해자 가족의 잔인한 응징이 연상되는 장면마다 시점의 전환을 통해 잔혹성의 논란을 피해가는 영리한 연출을 시도한다. 이를테면 백 선생에 대한 유괴아동 가족들의 복수장면에는 가해 장면의 직접적 표현 대신 결과만을 보여주고 있으며, 무수한 응징을 당했음에도 마지막 까지 백 선생을 살려두는 설정이 그러하다. 이유는 영화적 시점(백 선생의 시점이 아닌, 가해자의 시점)의 차이 때문이다. 즉, 가족들의 원한이 너무도 크다보니 백 선생이 받는 고통의 무게가 상대적으로 작아 보여야 하고, 마지막 응징자가 들어갈 때 까지 그의 목숨은 붙어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유괴아동의 가족이 하나 둘씩 들어가 사적인 복수를 거행하는 동안 그들 손에 들려진 무기는 각양각색이지만, 이 부분에서도 응징도구를 통한 힘의 논리가 포착되고 있다. 그들 대부분이 칼을 들고 있던데 반해, 가장 형편이 어려운 부부에게는 가장 큰 무기(도끼)를 들려줬고, 상대적으로 가장 부유해 보이지만 노쇠한 할머니에게는 작은 가위를 주었을 뿐이다. 그럼에도 백 선생을 절멸시키고 직접사인을 제공하는 것이 마지막으로 들어간 할머니의 가위였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것은 자본가 또는 부르주아의 모습에 나약한 육체를 가진 노파에게 최종응징을 허락한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백 선생이 아이들의 몸값으로 받은 돈을 축재의 수단으로 사용한 부르주아라는 점에서 보자면, 반인륜적 범죄를 저지른 대가로 획득한 부의 종말은 동질의 부유층인 할머니의 손에서 결말지어 져야 마땅하다고 감독은 생각했는지 모른다. 만약 빈곤층의 열등감과 분노가 과잉 표출된 응징의 결과로 백 선생이 죽었다면 아마도 이 장면을 참아내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영리하게도 박찬욱은 자본가의 손으로 절멸시키고는 자본가의 종말을 목도케 함으로써 자신이 일관되게 추구해온 사회적 불신과 B급 영화의 정신을 합일 시키고 있는 것이다.


힘의 구도 재편

아울러 <친절한 금자씨>가 남성위주의 복수극에서 탈피해 여성의 복수극으로 변형되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복수는 나의 것>과 <올드 보이>에서의 남성은 피해자인 동시에 가해자의 모습이었던 반면 여성은 순수한 피해자로만 그려졌다. 류의 누나, 동진의 딸, 우진의 누나와 대수의 딸이 모두 피해자인 여성을 대변하고 있었다. 게다가 근친의 집착을 통한 금기시된 사랑을 내포하면서 ‘하지 말아야 할 것’에 대한 벽을 넘어서려는 위험한 시도를 병행해왔다. 그러나 <친절한 금자씨>에 이르러 박찬욱은 강하고 카리스마 넘치는 금자에 비해 너무도 가냘프고 여성적인 모습의 남성을 만들어낸다. 그것은 박찬욱 영화 속 어디에도 존재 하지 않던 남성의 모습이었다. 비록 비열하고 내면적 열등의식으로 가득 찬 인간이었을지언정 박찬욱의 남성은 마초의 광포함을 공공연하게 드러내곤 했기 때문이다. 결국 폭력의 과잉으로 얼룩진 남성성의 허영을 조롱하는 도구로 여성성과 남성성의 역할변경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절묘한 타협과 해결책이 찾아낸 독특한 변주

한국형 하드보일드 고어영화의 효시를 이룬 <복수는 나의 것>에서 보여준 계급 간 갈등이 빚어낸 공멸하는 인간의 모습은, 박찬욱식 냉소주의와 맞물려 대단한 반향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또한 상업적으로 성공했던 <올드 보이>는 대답과 함께 질문을 찾아야 하고, 반전의 속임수를 끊임없이 읽어내야 하며, 충돌과 어긋남에서 비롯되는 아이러니를 분석해야 하는 영리한 영화였다. 그러나 <친절한 금자씨>는 표면적으로 현란해 보이는 구성, 구도, 장치, 심지어 화려한 소품에 이르기까지, <올드 보이>와는 사뭇 다른 기교와 작법으로 완성시킨 영화이다. 딸과 함께 접어든 골목길의 눈 내리는 장면 등의 스타일리시한 영상은 이명세의 냄새가 진동하고, 일정한 무게감 없이 시퀀스마다 파편을 이어붙인 것 같은 내러티브는 잔혹복수극을 기대한 관객 앞에 컬러풀한 블랙코미디로 화답한다. 한마디로 <복수는 나의 것>과 <올드 보이>의 경계를 넘나들며 관객과 평단의 입맛을 맞출 줄 아는 영민한 감각과, 철저하게 기획된 소품과 세트가 주는 매력이 장르적 관습과 전작의 변주를 통해서 허허실실 구동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차라리 콜라주에 가깝고 역하거나 불편하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친절한 것과는 거리를 달리한다. 이렇게 볼 때 <친절한 금자씨>는 부분은 뛰어나나 전체가 부분을 넘지 못하는 독특한 실험의 결과물처럼 보인다. 요컨대 이우진이 실패한 길에서 절묘한 타협과 해결책을 찾은 이금자의 복수극이 <친절한 금자씨>이다.


에필로그

시간이 흐를수록 성숙한 모습과 영혼의 깊이를 지닌 균형 잡힌 화법으로의 변화를 모색해왔다는 점에서 박찬욱은 여전히 독보적 위치를 점하는 감독임에 틀림없다. 그의 영화는 언제나 인간을 향했으며 관계와 사회문제를 제기하는 데 뒤쳐짐이 없었다. 사실 이것은 매우 중요하다. 한 편의 영화를 통해 문제를 제기하는 감독이 있는 반면 남이 제기한 문제를 환기하는 데 그치는 감독도 있고 더러는 돌출된 문제를 절묘하게 포착해 해답만 내놓는 감독도 있기 때문이다. 과연 <박쥐>가 ‘복수 삼부작’을 능가하는 새로운 영화문법을 보여줄지, 뱀파이어라는 소재가 사회문화적으로 어떤 파장을 몰고 올지는 아직 미지수이다. 각종 수사를 보탠 언론의 호들갑이 마뜩치는 않지만, 박찬욱의 영화가 지닌 고유의 힘과 스타일만으로도, 그 이름 석 자만으로도 아드레날린이 샘솟는 것은 부정할 수 없으니 극장으로 가서 눈으로 확인할 밖에. 드디어! <박쥐>가 날개 짓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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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s://japanplaza.tistory.com BlogIcon JNine  수정/삭제  댓글쓰기

    누군가 쓰지 않을까 싶었던 글을 쓰셨군요.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박찬욱 감독의 영화는 '영화' 자체를 연구해서 만든다는 느낌이 강하게 듭니다.
    워낙 공부도 많이하고, 작품도 많이 보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그냥 보는게 아니라 자신이 만들 영화에 흡수시켜 반죽하고 자신이 원하는 것, 보여주고 싶은 것을 만드는 재능이 뛰어난 사람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박쥐는 정말...기대 만빵

    2009.04.23 14:04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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