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터데스크 관리자

도움말
닫기
적용하기   첫페이지 만들기

태터데스크 메시지

저장하였습니다.
2시간여 남짓한 인터뷰 내내 박효주는 누구보다 들떠 있었다. 특유의 비음섞인 목소리에 행복이 묻어났다. 배우가 행복한 이유가 무엇있겠는가. 좋은 작품으로 사랑받는 기쁨이 최우선 아니겠는가. <추격자>와 <별순검>으로 시공을 초월한 형사 캐릭터를 소화해낸 박효주는 지금 연기와 목하 열애중이다.

<봄날은 간다>의 상우는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라며 눈물지었지만, 박효주는 연기에 대한 열정만큼은 절대 변치않으리라 자신한다. 궂은 날도, 맑은 날도 함께하는 것이 사랑이듯, <추격자>와 <별순검> 촬연 형장을 오가며 일에 매진한 2007년은 육체적으로 힘든 한해였다. 하지만 타고난 인복을 바탕으로 '좋은' 사람들과 함께 한 현장은 일터이자 학교였고, 놀이터가 되어줬다.

잠시 '척추분리증'이란 희귀병을 앓았다는 사연이 알려져 포털 사이트를 뜨겁게 달궜지만 실상은 발레리나 출신답게 '액션' 연기를 즐길 만큼의 노하우도 쌓았다.  지금 물론 박희주 최대의 관심사는 다양하고 자연스러운 캐릭터 소화. 그러나 속전속결은 금물이다. 뒤늦게 찾아온 연기에 대한 연정을 느긋하게 즐길 작정이니까. 어차피 "따뜻한 할망구"가 될 때까지 할 연기이니까.  


사용자 삽입 이미지
하성태(이하 ‘하’)
<추격자>자 재미있게 잘 봤어요. 너무 좋던데요. 관객들 반응도 장난 아니고요. 어떻게 출연하게 됐어요?
박효주(이하 ‘박’) 영화 정말 잘 나왔죠? 오형사 역할로 오디션을 봤어요. 저도 그렇게 될 줄 몰랐는데 <에어시티> 끝나고 <별순검> 하기 직전 <추격자>에 캐스팅 된 거예요.

일정이 겹치지는 않았나요?
같은 주에 같이 시작하는 바람에 초반엔 많이 힘들었어요. <추격자>는 밤 촬영이 대부분이어서 낮에 <별순검> 촬영하고 밤에 <추격자> 촬영하면서 밤을 꼬박 샌 적도 많았죠.

<별순검> 현장도 빡빡했다고 들었는데요.
네, 그래서 작년에 정말 육체적으로 힘들었어요. <추격자> 현장에서는 또 가만히 앉아 있지 못하니까. 구르고 싸우는 거 말리고 이런 거만 시키니까요. <추격자> 촬영만 갔다 오면 아팠죠. 제 첫 촬영이 산 속에서 시체 찾다가 구르는 신이었어요. 한 다섯 번 정도 굴렀나? 아, 처음부터 만만치 않구나 싶었죠.

몸을 쓰는 연기가 힘들지는 않았어요?
재미있어요. 오디션 보고 더 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죠. 사실 역할을 떠나 감독님 단편을 보고 어떤 분일까 궁금했었어요. 이런 생각을 가진 사람이 영화를 만든다면 참 재미있겠다 싶었죠. 오디션 볼 때도 연기 디렉팅이 남달랐어요. 아무리 작은 역할이고 비중이 없다는 건 알았지만 같이 참여하면 분명히 득이 되겠다는 생각이 컸던 거 같아요. 솔직히 그렇게 말하고 시켜주세요 그랬죠(웃음).

감독님 성격은 어때요? 영화도 그렇고 굉장히 셀 거 같은데.
네, 한 성격 하세요. 하하. 사실 배우들에 대해서는 별로 세지 않았어요. 항상 서로 얘기하고, 그런 면에서 감사했고요. 현장 진행에 있어서 부딪치는 부분이 있으면 (분위기가) 좀 험하잖아요(웃음). 그게 또 감독님 카리스마인거 같아요. 귀여울 땐 얼마나 귀여운데요.

함께 붙는 신이 많았던 김윤석, 정인기씨는 대선배잖아요. 어떤 모습이 기억에 남던가요?
워낙 선배님들인데다 여자 혼자니까 많이 챙겨주셨죠. 윤석 선배님은 드라마 <인생이여 고마워에>에서 함께 했고요, 이 작품과 나 감홍진 감독님을 소개시켜줬어요. ‘82년생 박효주라고 있어’란 문자도 감독님한테 보냈주셨고 선배님 덕택에 더 친밀할 수 있었죠. 윤석 선배님은 그 전 작업도 있었고 워낙 잘 챙겨주세요. 같이 부딪치는 신은 많지 않아도 촬영장에 함께 있는 날들이 많으니까요. 항상 촬영 끝나면 그 다음날 전화 먼저 해서 어땠는지, 어떻게 찍었는지 알려주고. 인기 선배님하고도 재미있었어요. 오형사, 이형사가 항상 붙어 있으니까요. 같이 수다 떨고(웃음).
<추격자>에서 본인 장면이든 아니든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이 있다면요.
서영희 선배 장면인데요, 처음 잡혀가서 욕실에서요. 그렇게까지 나올지 몰랐거든요. 읽으면서도 느낌이 세다고 생각했지만 찍은 걸 보니까 정말 소름 끼치더라고요. 두 배우가 고생한 것도 보이고 얼마나 힘들었을지 아니까요. 그런 잔인한 장면을 정말 잘 찍었구나. 그리고 전 ‘왜 우리가 항상 골목길에서 촬영을 하지?’ 그랬거든요? 어, 근데 영화 내내 골목길을 달려가는 모습이 너무 대단한거에요. 미로 속을 헤매는 사람들의 모습처럼. ‘어휴, 이런 거였어? 좋은데?’ 전 찍을 때는 몰랐거든요. 통제도 안 되고, 힘들어 죽겠는데. 골목길 촬영 때문에 스탭들이 통제하느라 정말 힘들었거든요. 아현동, 성북동에서 찍었는데 골목의 느낌이 정말 좋더라고요.

사용자 삽입 이미지

영화를 본 망원동 주민이나 골목길에 사는 분들은 정말 무서울 거예요. 미진이 죽을 때 눈물짓는 컷도 있잖아요. 개인적으로 감독님이 왜 클로즈업을 주지 않았나 싶었는데.
찍었어요(일동 웃음). 원래 엄중호가 소리칠 때 오형사의 얼굴 한 컷이 어떤 타인의 느낌을 주거든요. 관객의 표정일 수도 있고. 제 눈앞에서는 현장 편집을 그렇게 했거든요(웃음). 그런 식으로 빠트린 컷들이 굉장히 많아요. ‘저 부분에 내 바스트 나올 텐데, 내 신 나올 텐데.’ 전 다 아니까요. 근데 흐름상 껄끄러울 것 같다 싶었거든요. 내가 봐도 이건 아닌 거 같고(웃음). 별로 상처받진 않았어요. 어차피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역할이 크든 작든 모두 한 목소리를 내는 거니까. 어떤 배역이든 조금씩 녹아내야지 하나의 목소리가 된다고 생각했는데 그걸 제가 잘 못해냈다는 아쉬움은 있어요. 분명히 있었는데 편집에 의해서 설명이 안 되더라고요?(웃음) 감독님 선택이 좋았던 거 같아요.

형사들의 심리는 정인기씨가 연기한 이형사에게 몰려있는 거 같더라고요.
네, 경찰들 부분은요. 감독님이 그 얘기를 했었어요. 영민이가 미진이를 죽이기 전에 잡혔잖아요. 같은 여성인 오형사와 어떤 피드백도 없지만 지영민이란 사람 옆에 여자가 존재하는 것만으로 극의 긴장감을 갖게 하고 싶었다고. 단 하나 ‘생리하셨나봐요’, 그 대사는 영민의 성격을 더 부각시키기 위한 거였고요.

오형사가 확실히 여자라 역할이 작아도 도드라져요. 목소리는 역할마다 조금씩 바꾸는 거 같던데요.
아유, 감사합니다. 역할마다 달라지는 거 같기도 해요. 그런데 오형사는 그냥 가서 제 모습을 찍은 거 같아요. 감독님도 어떤 캐릭터를 뒤집어쓰는 걸 굉장히 싫어했고요. ‘당신 그냥 형사인거 다 알거든요?(웃음)’ 엑스트라 분들한테도 촬영 전에 꼭 얘기해요. ‘제발 설정하지 말고 그냥 있어주세요’ 그런 얘기들. 어떤 캐릭터나 설정을 하면 바로 컷을 불러요. 저도 알아요. ‘이럴 줄 알았어, 딱 걸렸네. 저도 이상하다 생각했어요’ 이러면서(웃음).

사실 배우라면 설정에 대한 욕심도 있을 텐데요.
거기서 꼭 욕심을 안 부려도 된다고 생각했어요. 상황에 집중해야죠. 그런 배우들도 있어요. 뭔가 설정하고 튀려고 하고. 우리 기동수사대는 하나란 말이에요. 거기서 튀는 행동을 하고 싶지도 않았고요. 오형사는 박효주가 짜증나있는 상태의 모습들이 굉장히 많이 보였던 거 같아요.

본인이 보기에도 그래요? 짜증나면 내가 저런 모습인가?
네. 정말 촬영 내내 짜증나 있었어요(웃음).

영화마다 장르의 느낌에 영향을 많이 받는 편인가요?
그럼요. 정말 다 다르고 삶이 달라져요. 촬영하면서는 밖으로 나가는 거 자체를 거부하고요. 어떤 캐릭터를 만나면 친한 친구 같아요. 같이 있는 동안 충실하고 싶고. <에어시티> 같은 경우는 해피하게 보냈고요. 솔직히 <추격자>는 계속 짜증이 나 있었고요(웃음).

사용자 삽입 이미지
오형사는 짜증은 몰라도 실제 박효주와는 꽤나 멀리 간 인간형 같아요. 의식도 많이 했을 거 같은데요.
오은실 같은 경우 그 안에서 공감을 많이 했어요. 선배님들이 엠티를 가서도 그런 조언을 많이 해줬던 거 같아요. “여기 경찰서에 있는 이 사람들은 정의감은 다 사라지고 돈 벌려고 와 있는 거야.” 그 말이 정말 맞아요. 정의감은 이미 사라져 버렸고 내가 뭐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공허한 상태의 눈빛. 스스로들 그럴 때가 있잖아요. 공감을 못해서 어렵진 않았어요. 연기를 진짜 사랑하지만, 몸과 마음이 지칠 때는 내가 뭐하고 있는 건가 했던 기억을 떠올리며 공감할 수 있었죠. 제가 보기에 오형사는 그곳에 있는 것 자체가 너무 짜증이 난 거에요. 하필이면 그날 생리도 하고, 수산시장에 대충 있다 가면 되는데 사건이 너무 커지니까. 또 그 밤에 가서 삽질하고 굴러야 되니까. 그런 느낌들을 계속 가지고 있었어요.

형사 역할을 연이어 맡았어요. 어느 인터뷰를 보니 “연약함 속에 숨어 있는 강인함”이란 멋진 말도 했더라고요.
왜 강인한 역할만 맡느냐, 여성스러운 역할도 맡고 싶지 않느냐는 질문이었어요. 여성스러움에도 여러 가지가 있는 거 같아요. 오형사나 <별순검>의 여진도 강한 여자가 참고 인내하는 모습 속에 피어오르는 여성성이 있잖아요. 아무리 강한 여성이라고 해서 남성은 아닌 거잖아요.

스릴러나 호러 장르 영화는 잘 봐요?
잘 못 봐요. 근데 <추격자>는 잘 봤죠. 아는 내용이고 아는 사람들이니까(웃음). 공포영화는 진짜 못 보지만 심리 스릴러는 잘 보는 편이에요. 근데 잔인한 장면은 정말 못 보거든요. 예전 <레드 아이>때는 너무 무서워서 소리 지르고 다녔어요(웃음). 그 촬영장이 너무 싫었고 분위기도 공포 영화 찍을 때는 세트장 분위기도 안 좋은 거 같아요(웃음). <추격자> 마지막 부분에서 기동수사대가 시체 찾는 장면인데, 너무 리얼하게 만들어서. 살 느낌이 딱 오는데 아, 진짜 싫더라고요(웃음).

이제 <별순검> 이야기를 해 보죠. 드라마가 너무 잘 돼서 기분이 너무 좋을 거 같아요.
네, 너무 좋고 그 현장이 그리워요. 정리를 좀 하려고 했는데 저번 주에 스페셜 방송 때문에 또 보고나니까 (사람들이) 너무 보고 싶어졌어요. 너무 좋은 분들하고 너무너무 행복했어요. 제가 정말 많이 정을 쏟았고 사랑했던 거 같아요.

어떤 인터뷰에서 류승용씨는 쫑파티 할 돈 있으면 그걸로 스탭들 보너스를 주라고 말 할 만큼 고생이 이만저만 아니었다고 하던데요.
아무래도 돈이죠. 스탭들이 정말 고생했고요. 하루에 30~40신 찍는 다는 건, 미친 거죠(웃음). 류승용 선배가 “그 기사 너무 건방지게 나오지 않았어?”라면서 과격하지 않느냐고 걱정하던데요?(웃음) 사장님들 보면 화내는 거 아니냐며. 설날 때 <서툰 사람들> 공연 보러가서 만났거든요. 근데 작가들이랑 감독님은 너무 잘했다고, 인터뷰 너무 잘 봤다고(웃음).

사용자 삽입 이미지

온주완씨는 같은 소속사고, 안내상씨까지 네 분 호흡이 정말 좋았을 거 같고요.
류승룡 선배는 인간적이고 너무 따뜻해요. 정말 재미있고요. 같이 촬영하는 신이 사건 현장 나가거나 회의 할 때나 정해져 있잖아요. 가끔 떨어져서 각자 조사하러 나갈 때면 외로울 정도였어요. 혹시 SES나 핑클 같은 댄스그룹들이 이런 마음이 아닐까?(일동 웃음)

<별순검>의 여진이는 참 매력적인 캐릭터에요. 똑똑하고 바르고 강인하고.
연기하면서 그녀와 대화를 많이 했어요, 이럴 때 여진이는 어떨까 하면서. 여진이는 꼭 언니 같았어요. 그런 캐릭터를 간절히 원한 시절이기도 했고요. 처음에 시놉시스 읽었을 때도 ‘이거 안하면 난 바보야’ 이랬어요. 그래서 좋은 캐릭터를 내가 망치면 어떡하나 하는 부담감도 있었던 거 같고요. 초반에는 혼란도 조금 있었어요.

어떤 면이요? 시나리오 상에서요?
감독님과 제 생각이 조금 안 맞았어요. 이해 못했을 수도 있고, 제 몸에 맞지 않았을 수도 있고요. 초반부 여진이는 굉장히 들 떠 있어요(웃음). 그런데 마지막 즈음은 아주 달라요. 류승용 선배도 초반에 들 떠 있어요(웃음). 감독님들이 남자라 그런지 여진이는 여성스럽고 밝은 느낌을 요구했었어요. 초반에는 이걸 해야 되나 말아야 되나 고민했는데 중반 이후부터는 확실히 자리가 잡혀 갔어요. 내상 선배 같은 경우 막판 갈수록 더 까불어요(웃음). 시청자들도 초반에는 여진이 도대체 어떤 캐릭터냐고 물어서 힘들었는데, 후반부에는 여진이가 어떤 캐릭터라는 걸 알려주고 끝내서 다행이고 보람도 있었죠.

<별순검> 같은 경우 팬들이 살려냈고 마니아도 많아서 뜨끔 했겠어요.
우리 팬들은 정말 전문적이에요. 깜짝 놀랐어요. 너무나 전문적으로 잘 꼬집어 주니까 정신 똑바로 차리게 만들어줬던 거 같아요.

평소 성격은 어때요? 차분해 보이는 여진이랑 다를 거 같기도 한데.
아니요. 저한테는 여진도 있고 오형사도 있고. <에어시티> 임예원 같은 경우는 밝은 제 모습을 극대화시켜 보여줬어요. 여진의 어두운 부분도 제 안에서 파생됐다고 생각하죠. 오형사는 짜증내는 면이 저 답고요(웃음). 제 성격은 밝고 긍정적이고요, 사람 굉장히 좋아하고 잘 믿고, 상처도 잘 받고.

목소리는 어때요? 평소는 분명 하이톤인데 <별순검>에서는 꽤나 저음이에요.
여진이가 너무 하이톤이면 사건을 얘기하거나 할 때 약해보이더라고요. 그리고 사극은 기본적으로 힘을 좀 줘야 해요. 처음에는 그걸 몰라서 헤맸죠. ‘이건 조금 연기 같지 않아?’하는 것들이 사극이니까 가능해요. 그게 저랑 맞지 않아서 불편한 거였고, 그러다보니 목소리 톤도 좀 바꿔야했고요. 목소리는 기분 상태에 따라 바뀌는 거 같아요. 정말 기분 좋을 때는 <에어시티> 예원이처럼 시종일관 하이톤으로 이야기 할 때도 있어요. 어떤 목소리를 만들려고 했던 건 아니지만 다 제 목소리 중 하나에요.

퓨전사극이라서 그런지 의외로 잘 어울리던데요. 사극은 처음 아닌가요?
제가 사극을 하게 될지 몰랐어요. 현대적이다, 도시적이라는 말을 많이 들었거든요. 그런데 전 알고 있었죠. 예전에 한국무용을 했었기 때문에 안 어울리는 건 아니야(웃음)! 원래 (그런 면이) 있거든?(웃음). 앞날은 모른다는 걸 그때 깨달았어요. 중요한 시점에 <별순검>을 하게 됐는데 그게 사극이 될 줄은 몰랐죠. 그 전에 발랄한 역을 많이 했거든요. 배우들은 누구나 다양한 역할에 감정을 쏟아내고 싶어 하잖아요. 그 전까지 폭이 넓지 않았어요. 아픔도 있고 어두운 부분에 다가간 역할을 해봐야지 하는 생각을 했었기 때문에 그렇게 불편하지는 않았던 거 같아요. 오만이 아니라 처음으로 그런 자신감이 생겼어요. ‘이거 내가 해!’(웃음).

호흡도 길었고 주요한 캐릭터였어요. 시청률도 좋았고. 연기 면에서 도약이 될 거 같아요. 스펙트럼이 넓어졌다 랄까요.
네, 확실히 전체를 보는 눈이 더 넓어 진거 같아요. 너무 행복해요. 솔직히 <추격자 >는 몸으로 하는 연기가 많아서 만날 힘들었는데(웃음). 별순검은 지루하지가 않았어요. 원래 한 10부 정도 넘어가면 조금 지겨워지잖아요. 언제 다 찍어, 그러면서. 근데 단 한번도 지겹다는 생각이 안 들고 너무 좋았어요. 여진이를 떠나보내는 것도 너무 싫었고요.

다음 시즌도 꼭 찍어야겠네요.
(웃음) 마무리를 하지 않은 상황에 끝나서 그게 조금 궁금하기는 해요.

이제 인지도도 욕심이 날 시기잖아요. 아직 박효주 하면 <별순검>이 가장 큰데요.
솔직히 어렸을 때는 잘나가고 싶었어요(웃음). 그 마음이 없어진지 오래지만. 그렇다고 못나고 싶은 건 아니지만 딱 하나는 있어요. 알려지면 알려질수록 작품을 (다양하게) 할 수 있잖아요. 박효주를 모르면 작품을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줄어드니까 버릴 수 없는 욕심인 거죠. 지금은 점점 불러주니 좋아요(웃음). 폭이 넓어지는 거 같고.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진 촬영 할 때 보니 옆모습이 진짜 장만옥을 닮았어요.
으흐흐흐. 감사합니다. 너무 좋아요.

제 중학교 때부터 이상형이었거든요(웃음). 성룡 영화 나왔을 때부터 챙겨보고 왕가위 영화에서는 그야말로 ‘죽음’이고요.
제가 장만옥 여사님 광 팬이에요. 안 본 영화가 없을 정도로. 우와, 저랑 너무 비슷하다. 홍콩 영화 없었으면 전 배우의 꿈도 없지 않았을까 싶어요(웃음). 어렸을 때부터 <첨밀밀>부터 <중경삼림> <2046>까지 홍콩영화 너무 좋아했어요. 저 영상 속에 있는 여주인공이 참 부럽다 하는 막연한 동경도 있고요.

처음 잡지 ‘쎄시’ 모델로 데뷔했다고요? 길거리 캐스팅?
어유, 전 그런 거 없어요(웃음). 누가 저를 길거리 캐스팅해요(웃음). 우연히 아는 친구가 프로필 찾으러 간다고 해서 같이 갔어요. 그 친구에게 감사하죠(웃음). 그때 대표님 눈에 띄어서 돈도 안 든다고 해서 그냥 사진 한 번 찍어 본거죠(웃음).

여배우들 데뷔 얘기 들어보면 항상 같이 갔던 친구들은 잘 안 됐더라고요. 원래 전공은 발레였다면서요.
하하. 그 친구도 정리했어요. 저도 우연히 그렇게 됐네요. 허리가 아파서 고등학교 때 발레에서 한국무용으로 전공을 바꿨어요. 고3 때 진로 때문에 고민이 많았어요. 중요한 상황이었거든요. 무용과를 가기도 그렇고 연극영화과를 가기에는 겁이 났고(웃음). 사진과 가고 싶어 사진 학원도 기웃거리고. 저는 목표를 잘 세우고 어릴 때부터 딱 그것만 보고 달리는 스타일인데 막판에 뒤죽박죽 돼서 혼란스러웠죠.

인터뷰 준비하면서 하도 ‘척추분리증’ 기사를 많이 봐서 내심 걱정을 다 했어요.
이제는 괜찮은데(웃음). 그러니까 사람들이 너무 걱정을 해 줘요.

진짜 연기자가 되고 싶다는 생각은 언제쯤 들었나요?
아무래도 기회들이 생기잖아요, 오디션도 보게 되고. 솔직히 제가 너무 못 하는 거예요. 무용을 했기 때문에 사진은 잘 찍었는데 연기는 또 너무 다르니까요. 저한테 화도 났고 실망도 들었고. 첫 작품이 장진 감독님 <극단적 하루>에요. 어디 가서 입 뻥끗하는 거 처음이었는데 너무 떨리고, 아무 생각도 안 나고. 바보 같고 숨고 싶고 도망가고 싶고 뭐 하고 있나 싶은 거예요. 그 때부터 잘하고 싶다는 생각 때문에 나를 괴롭히고 채찍질을 했고요. 배우를 하면서는 게으르지 않게 사는 거 같아요.

그럼 언제까지 그런 채찍질을 계속 했어요?
나를 달달 볶고 괴롭히고, 어떻게 보면 오기도 있었고요. ‘난 왜 못하지?’ 그런 질문 속에 정신없이 살다 1년 넘게 일을 안 한 적이 있었어요. 그때 정말 많은 고민을 했죠. 마음이 확고해졌으니까 과거와 다른 어떤 큰마음이 생겼던 시기였어요. 연극도 해 보고, 오디션도 다 보고. 예전에는 오디션 한 번 떨어지면 미친 아이처럼 울고 그랬어요. 내 자신이 너무 싫어서. 욕심도 많고 그런데 얼마나 화가 났겠어요(웃음). 이제는 길게 볼 수 있는 마음이 생겼죠. 연기 말고 다른 게 없다는 생각이 든 후부터 또 다른 원동력이 생기면서 지탱을 해 나가는 거 같아요.

지금에야 편안하게 얘기할 수 있는 거겠죠. 어느 인터뷰에서 오디션을 300번 정도 떨어졌다고 했어요. 또 1년 반 정도 쉬고 그러면 어렸으니까 굉장히 불안했을 텐데요.
하하, 그럼요. 그런 면이 항상 저를 괴롭혔고 또 일어서게 했던 거 같아요. 잘 울어요. 딱 울고 나면 정신 차리고요. 무엇보다 단 한번도 포기하려는 생각은 안 했어요. 속상하고 화가 나도 신기하게 ‘나 안 할래’ 그런 생각은 안 했어요. (연기자로서) 정체성이 완전히 자리 잡게 된 계기가 바로 그 시간들 덕분이었죠.

그런 마음가짐을 갖게 된 계기를 꼭 하나만 꼽는 다면요?
전 책이었어요. 그 시기에 (릴케의)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를 읽었어요 .그 책을 읽고 ‘어, 난 이런 고민도 없이 뭘 하겠다고 설친 거야’ 라는 생각과 함께 의지도 되고 제가 많이 바뀐 거 같아요. 그 책이 너무 어려웠는데 또 고교 권장 도서라더군요(웃음). 우리 고등학교 때는 그런 책 없었는데(웃음).

그래요? 그럼 저도 어려울 거 같은데요(웃음). 그렇게 오디션을 많이 봤는데 아쉬운 작품은 없었어요?
여러 가지 일들이 많았죠. 딱 하나만 꼬집을 수는 없을 거 같고요. 끝까지 갔다가 떨어진 것도 너무 많고(웃음). 촬영 전날 펑크 난 것도 많고, 정말 책 한권 써요(웃음).

이제 다 지난 일이 잖아요(웃음). 하나만 공개한다면요.
창피해요(웃음). 그 작품들 다 아니까 연상을 하게 될 거 아니에요. 최호 감독님 굉장히 좋아해서 작품에 들어갈 뻔 했는데 막판에 다른 배우가 됐고요. <올드보이> 오디션도 최종 8명까지 뽑혀서 박찬욱 감독님이랑 최민식, 설경구 선배 앞에서 최종 면접을 봤었어요. 그때 박찬욱 감독님이 장만옥 닮았다는 이야기를 해줘서 그때부터 더 미친 듯이 영화들을 찾아 봤죠. 최고의 배우를 닮았다는 건 얼마든지 장점으로 만들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드니까요. 멋있지 않아요? 너무 좋아요, 막 이래. 너무 멋있게 늙는 거 같아요.

사용자 삽입 이미지
개인적으로 얼굴이 굉장히 현실적인 느낌이에요. 극적인 드라마보다 리얼한 드라마에 어울리는. 혹시 그런 얘기 많이 들어요?
전 그렇게 믿어요(일동 웃음). 어렸을 때는 제가 아주 평범하다고 생각했거든요. 근데 모델을 했는데 특이하게 생겼다는 거예요. 연기를 했을 때는 그 특이함이 또 별로 장점이 안 됐고 다양한 역할을 만나지도 못했고요. 거울을 보면서는 항상 스스로를 위로해줬어요. 너무 예쁜 친구들 때문에 상처받을 때가 있잖아요. 그래서 드라마에 잘 녹아드는 얼굴이라고 저 스스로가 믿었죠. 그런 면이 다양함을 가질 수 있는 배우의 장점인 거 같아요. 물론 그 장점을 받아 들인지 얼마 안 됐지만. 더 빨리 그 장점을 내 것으로 받아들였다면 그렇게 마음이 다치지는 않았겠죠.

<파란자전거> 때도 주변에 있을 법한 친구라는 느낌이었는데요.
네. 전 <파란자전거> 같은 영화가 너무 좋아요. 예전에는 모나고 날카로운 생각만 했는데, 그때는 그런 시간들이 다 지나고 편안한 상태였거든요. 작품에 임하는 태도가 달라진. (눈을 만지작하며) 그때부터 눈 꼬리가 이렇게 내려왔던 거 같아요. 옛날 사진하고 진짜 다르다니까요. 성형 없이도 사람얼굴이 변한다는 걸 그때 느꼈어요. 좋아하는 걸 하려면 먼저 변해야겠다는 생각도 했고요. 그런 따뜻한 드라마를 갈구했는데 결국 만나서 다행이었죠.

일반적인 여자들은 스물 넷, 다섯에 가장 예쁘다고 하잖아요. 하지만 여배우는 서른이 넘어야 가장 매력적이고 연기력도 물이 올라요.
저랑 생각이 너무 같은데요? 서른에 대한 환상은 언제나…… 이제는 좀 현실로 다가오지만요(웃음). 배우나 여성이나 서른을 넘겨야 진짜 여자, 여성이고 매력 있는 거 같아요. 그 전엔 사과 같은 싱그러움이 있다면요.

식상한 질문이지만 그렇게 생각하는 선배들이 있나요? 롤모델일 수도 있고.
장만옥이 일단 절대적이었고요. 장만옥도 목소리가 많이 바뀌었어요. 목소리도 따라해 봤어요. 원래 앵앵거리는 목소리인데 왕가위 감독 만나면서 바뀐 거 아닌가요? 우리 선배들 중에서는 전도연 선배도 너무 좋고, 이미연, 장진영 선배도 멋있고.

그럼 지금 박효주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자신 있는 캐릭터, 연기가 있을까요?
그 영화 뭐죠? 여자 세 명 나오는 한국 영화인데.

아, 송일곤 감독, <꽃섬>?
(웃음) 네. 김호정씨하고 김혜나씨 나왔던 그 <꽃섬>. 한 동안 방에 포스터도 계속 걸어놨었어요. 그 몽환적인 느낌이 좋아서요. 세 여성 캐릭터가 나이도 다 다르잖아요. 이십대 혜나 씨가 연기한 캐릭터의 느낌을 갖고 싶었어요. 김호정 선배도 주완이가 한 번도 부러웠던 적이 없었는데 <피터팬의 공식>때 너무 부러웠죠. 그 눈, 그 눈빛들을 참 담고 싶어요. 저도 나이 먹어서는 깊은 눈을 가진 배우가 되어야지 그랬어요.

정형적인 연기보다 열려있고 리얼리티가 살아있는 역할에 욕심을 내는 거 같아요.
자유로운 영혼이 좋아요. <추격자>는 감독님이 다큐멘터리 같은 느낌을 내고 싶어 했어요. <파란자전거> 같은 느낌도 너무 좋고. <별순검> 같은 경우 사극이니까 또 다른 재미가 있었고요. 확실히 부담스러운 건 <에어시티> 예원이처럼 딱딱 정해진 역할. 절대 현실적이지 않잖아요. 팬들은 제일 좋아하는 거 같지만 그런 연기가 공감을 끌어내기는 너무 힘들죠. 제 어두운 면은 보기들 싫어하는 거 같아요.

여배우들 꿈이 뭐냐고 물어보면 죽을 때까지 연기하고 싶다고들 해요. 김혜자, 고두심 선생님처럼. 그런데 나이 먹은 뒤 본인 모습이 궁금하지는 않나요? 어떻게 늙고 싶어요?
제 인생의 모토가 ‘잘 늙자’에요. 왜냐하면 사람 얼굴을 보면 어떻게 살아왔는지 보인다고 하잖아요. 하루하루 진실 되고 충실하게 살수록 할머니 때 제 얼굴이 좋아진다고 생각해요. 또 배우니까 잘 늙는 건 정말 중요하고요. 어쨌건 전 따뜻한 할망구가 되고 싶어요.

그보다 귀여운 할머니가 될 거 같은데요?
네, 웃으면 마음까지 좋게 만드는 할머니들 있잖아요. 손자들, 아이들한테 따뜻한 동상 같은 사람. 따뜻하고 부끄럽지 않은, 따뜻한 할머니가 되고 싶어요. 그래서 하루하루 열심히 살려고 노력해요. 오늘 하루 삐뚤어진 생각을 하면 주름살이 더 깊어질 거 같고요.

귀여운 할망구 말고 인간 박효주의 꿈이 있다면요?
배우가 되겠다고 생각했던 순간부터 좋은 연기자가 되어야지 하는 건 항상 똑같았어요. 그런데 작년에 작업을 하며 ‘진실’에 관해 많이 부딪혔던 거 같아요. 올해는 그런 생각을 했어요. ‘내가 진실하지 않으면 진실한 연기는 할 수 없다’고. 그 동안 내 삶을 진실하게 살지 않았구나 싶어요. 겉핥기 같은 느낌. 더 열어 놓고 더 받아들이고 싶고 더 느끼고 싶고 다 진실한 원액 그대로의 느낌들 있잖아요. 너무 작품과 연기만 생각하다 내 삶을 놓친 거 같더라고요.

작년에 너무 바빴던 거죠?(웃음) 마지막으로 배우 박효주가 생각하는 좋은 연기가 있다면요.
진실은 당연하고요. 뭔가 살아있는 느낌이어야죠. 캐릭터 안에서 정말 살아 숨쉬는 에너지가 느껴지는 그런 배우들. 이번에 윤석 선배님 보며 많이 느꼈어요. 그 분은 (연기가) 정말 살아 있어요. 어느 순간부터 제가 너무 정형화된 연기를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선배님 조언 중에 ‘드라마하게 되면 효주야, 그런 매커니즘에 제발 빠지지 마’가 제일 고마웠어요. 배우는 물고기가 파닥파닥 뛰듯이 살아있어야 돼요. 그게 진실에서 비롯되는 거고요. 윤석 선배님 말씀이 작년의 숙제였어요. 사실 그런걸 노려서 <추격자>를 했고 현장에만 다녀오면 정신이 번쩍 드는 기분이었죠.

박효주에게 2007년은 참 버라이어티하고 배운 것도 많았을 듯해요. 차기작은 좀 뒤로 미루고 쉴 생각이죠?
차기작은 아직 결정 안했지만 드라마랑 영화랑 구분은 없어요. 둘 다 너무 재미있고요. 어디가나 연기는 다 똑같은 거 같아요. 대신 빨리 어떤 이야기 속에 살고 싶은 생각이에요. 그 동안 여행도 다녀오고 계절학기도 다녀오면서 푹 쉬었거든요(웃음).

글_하성태
사진_권영탕

댓글을 달아 주세요

[추격자] 살기위해, 내리쳐라

필진 리뷰 2008.02.22 14:42 Posted by woodyh98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살고 싶으면 상대를 내리꽂아야 한다. 태생적으로 수직상승하기 글러먹은 놈이 하나 있고, 후천적으로 땅으로 떨어진 녀석이 하나있다. 중호(김윤석)는 전직 형사였지만 지금은 보도방 사장이다. 경찰로 국가의 녹을 받아먹을 당시, 중호는 검은 돈을 챙기면서 자기 배를 채웠고, 그 결과 경찰직에서 쫓겨났다. 중호는 후천적으로 땅에 떨어진 녀석이다. 더 이상 갈 곳도 없고, 하루 벌어먹고 살기 위해서는 여자들을 등쳐먹으며 밤에 쾌락을 찾는 남정네들의 지갑을 열어야만 한다. 태생적으로 땅에 떨어진 남자는 연쇄 살인범 영민(하정우)이다. 그는 발기가 되지 않아 성적 쾌감을 느껴보지 못한 남자다. 성기가 일어설 수 없듯이, 그의 원초적 쾌감은 수직상승 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는 악의를 품고 여자들을 살해하기 시작한다. 망치로 정을 내려쳐서 여자를 살해할 때 쾌감을 느끼는 영민. 얼추, 두 사람은 비슷하게 생겨먹었다. 골목을 기어다니며 돈을 긁어모으는 중호나, 여자들을 정으로 내리치며 성적 쾌감을 얻는 영민이나 하류인생이긴 마찬가지. 두 녀석이 이글거리는 눈으로 상대를 흘겨보며 붙었을 때는 유도나 레슬링이 연상된다. 애초에 둘 사이에는 물리적 거리가 제로에 가깝기에 <추격자>를 보면서 상대를 견제하면서 잽을 날리는 아웃복싱은 상상이 가지 않는다. 중호와 영민은 상대의 호흡을 느껴가며 적을 죽이기 위해서 칼을 갈고 있다. 땀이 쏟아지며, 그 사이사이 비가 추적추적 내린다. 레슬링에서 심판의 지시로 빠떼루 자세를 취한 것과 모양새가 비슷하다. 살기 위해서는 최대한 땅에 밀착해야 하며, 승점을 따기 위해서는 적을 뒤집어 매트에 내리 꽂아야 한다. <추격자>는 인간이 극복하지 못한 중력의 법칙을 최대한 이용하고 있는 영화다.

이 영화의 인물들을 보고 있으면 중력의 법칙을 온 몸으로 체험할 수 있다. 지구가 인간을 끌어당긴다면 인간은 하늘로 수직상승 할 수 없다. 영민의 발기부전, 중호의 타락한 모습. 여기에 이 영화가 보여주는 사건들 역시 추락하는 이미지 일색이다. 한 시민은 정치인의 얼굴에 배설물을 던져 경찰서를 발칵 뒤집어 놓는다. 위신이 떨어진 정치인의 모양새. 경찰들은 배설물 투기 사건으로 향할 여론의 시선을 살인 사건으로 돌리기 위해서 고군분투한다. 권력 앞에 쪼그라든 경찰들의 정치적 행태는 추락한 관료사회의 모습이다. <추격자> 안에는 앞에서 열거한 인물들이 만들어 놓은 풍경이 있다. 그리고 그 속에는 현실 정치의 권력 구조가 있으며, 권력 앞에서 꼬리치는 인간들이 있다. 이런 몇 가지 풍경을 먼 배경으로 하여 연쇄살인이 벌어진다. 카메라는 하늘을 바라보지 않고, 땅과 수평을 유지하며 중호와 연민의 숨 가쁜 질주를 따라가기에 바쁘다. 달리다가 지친 영민과 중호의 육체를 대변하듯, 카메라의 포커스가 어그러지기도 한다. 즉 굳이 이 영화의 리얼리즘을 인물과 사건으로 논하기 이전에 카메라는 현장성을 보여준다.

2시간짜리 영화는 대략 24시간의 도망과 추격을 밀도 높게 보여준다. 미로처럼 엮인 골목길을 야심한 밤에 질주하는 두 남자의 모습은, 한국 영화에서 (필자 스스로 칭하길) ‘골목길 느와르(혹은 스릴러)’로 정면 승부하지 못했던 한국영화에 숨통을 틔어주고 있다. 특이한 것은 추격이 벌어지는 골목길과 반 지하 건물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마을이 언덕진 곳에 위치해 있다는 점이다. 영화에서 사건 해결의 실마리가 되어 맥거핀처럼 등장하는 교회의 십자가 역시 마을에서 가장 높은 곳에서 빛을 발하고 있다. 롱샷으로 찍힌 마을의 모습은 서울에서 부유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아득히 멀고도 높다. 교회의 십자가는 어두운 밤 외롭게 그리고 밝게 빛난다. 마지막으로 살인에 쓰이는 망치와 골프채는 우아한 자태를 뽐낸다. 영민의 손에서 수직상승한 망치는 포물선을 그리며 아래로 떨어진다. 영민의 손에 살해당한 자는 바닥에 피를 흘리며 쓰러진다. <추격자>안에서 살아가는 자나 죽은 자 모두 땅으로 내려가 있으며, 존재하지 않는 (일종의 형이상학적인 것들은) 하늘에 떠 있다.

중호도 어쩔 수 없는 인간이다. 그에게도 인간의 악한 본성이 있다. 하지만 중호는 남의 간을 빼먹으며 지갑을 채울지언정, 남의 피와 살을 갉아먹는 일은 하지 못한다. 감기로 앓고 있는 미진에게 매정하게 전화를 걸어 여름에도 감기가 걸리냐며 핀잔을 주는 그는 인간미라곤 찾아 볼 수 없는 인간이다. 영화 속 미진과 미진의 딸의 입을 빌리면 쓰레기다. 그렇게 살아온 인생이다. 공직의 힘을 빌려 깡패들에게 기생했던 사람이며, 지금은 변태들을 이용하고, 몸 밖에 가진 게 없는 여자들을 매매하며 살아간다. 중호가 하류인생으로 살아오면서 배운 건, 자기 밥그릇을 지키는 법이다. 중호에게 미진은 재산의 일부였으며, 영민은 중호의 재산을 앗아간 (중호에겐) 더 극악한 녀석이다. 중호가 영민을 찾아다니게 된 첫 번째 이유는 사유재산을 보호하기 위해서다. 영민은 보도방 아가씨들을 불러서 살인을 저질렀으며, 이를 계기로 중호와 영민의 동선이 만나게 되고 충돌하게 된다. 좁은 골목길에서 우연히 중호의 차와 영민의 차가 교통사고를 당하게 되는 것도, 어찌보면 단순한 우연일 뿐이지만 사건으로 보자면 영화의 전개과정이다. 이 장면은 중호의 사유재산이 훼손되는 의미에서 사건 속으로 더욱 깊숙이 들어가는 계기가 되어준다. 교통사고 현장에서 직감적으로 영민이 범죄자임을 알게 된 중호. 이제 중호와 영민은 지리멸렬한 추격전을 벌이게 된다. 영민의 범죄는 성적 트라우마와 연관되어 있으며, 영민은 자기폐쇄적인 정신분열증 환자의 모습이다.

<추격자>는 중호와 영민을 통해서 선-악을 이분법하지 않는다. 중호에게도 악한 모습이 존재한다. 다만, 중호와 영민에게 다른 점이 있다면 지켜야할 재산과 대상이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다. 사유재산을 잃은 중호의 분노는 영화 후반부가 되면 사라지게 된다. 영민은 자신이 미진을 살해했다고 경찰서에서 밝히지만, 중호는 영민이 여자들을 팔아먹은 인간이지 살인을 저지를 위인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경찰에 넘겨진 영민을 뒤로하고, 중호는 자신의 재산인 미진을 찾으러 다니게 된다. 이 과정에서 중호는 미진의 숨겨놓은 딸을 만나게 된다. 미진의 딸은 중호의 인간미를 자극하기 시작한다. 사건에 집착하는 중호를 향해 한 경찰 동료는 “언제 인간될래?”라고 말을 한다. 중호가 사건에 집착하게 되는 것은 살아있을지도 모르는 미진을 찾아야만 하기 때문이다. 중호의 뇌리 속에서 미진의 딸이 스쳐지나가고, 딸아이의 모습위로 살아서 숨 쉬고 있을지도 모를 미진의 모습이 오버랩 된다. 김윤석이 연기한 중호라는 캐릭터는 후반부로 갈수록 지쳐간다. 세탁기에서 탈수해낸 인간마냥 그의 몸은 수분이 모두 빠진 것 마냥 맥없이 늘어진다. 하지만, 지칠대로 지친 중호가 자신의 목을 누르는 영민의 손아귀를 뿌리칠 수 있었던 불가사의한 힘은, 가시화되지 않은 그의 선한 본성 때문이다. 김윤석은 이빨을 깨물며 자신의 육체를 땅 바닥에 수차례 내리꽂는다. 넘어지고 쓰러지는 사이에 그의 육신은 흔들리고 뒤섞이면서 일종의 중화과정을 거친다. 거짓으로 살아온 인생. 거짓과 위선적인 삶을 통해 가시적으로 악해 보였던 중호의 내면과 외면이 마지막 남은 연민과 동정이라는 감정과 만났을 때, 한 인간이 가지고 있는 분노가 폭발한다. 영화 후반부에서 어금니 깨무는 소리가 들리는 중호의 처절한 모습은 생과사의 갈림길에서 지푸라기를 잡는 것 같다.



사건은 골목에서 벌어졌고, 도심에서 외진 곳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이 영화는 종로의 고층건물을 보여주면서 끝이 난다. 모든 것이 끝나고 병실의 잠든 미진의 딸의 손에 중호의 손이 포개어질 때 카메라는 창밖으로 시선을 돌린다. 메트로폴리스는 많은 것을 감추고 은폐한다. 결국, 이 영화가 지금까지 보여주었던 것은 매스미디어에서 감추고 싶을 혹은 정치권력이 개입하고 싶지 않은 또는 소시민조차도 보고 싶지 않은 일이었음을 말해준다. 드러나지 않고, 드러나더라도 감추고 싶은 삶의 모습과 잔혹함. 도시는 늘 현대적인 미적 감각을 뽐낸다. 병실 창 밖으로 보이는 건 고층 빌딩아래의 모습이 아니다. 높은 곳에서는 아래쪽을 보지 못한다. 결국 많은 일들이 은폐되어왔고, 암묵적으로 은폐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이 영화는 서울의 도심 속 외진 곳에서 일어난 일을 땅과 가장 가깝게 찍은 영화이다. 기쁜 마음으로 말하자면, 이 영화에는 <추격자>가 아니라면 보지 못할 도시의 공기와 도시의 이야기가 끈질기게 살아있다. 감추려고 해도, 숨으려고 해도 살아있는 이야기를 감출 수는 없다.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최병준  수정/삭제  댓글쓰기

    도훈님 글 정말 정말 잘 쓰십니다.
    땅을 향해 있다는 영화분석도 날카롭고요.
    영화 내공 정말 대단대단....

    인천에서 준이 드림.

    2008.02.23 01:36
  2. Grace  수정/삭제  댓글쓰기

    색다르고 명쾌한 해설..
    웬만하면 읽지 않는 영화 리뷰인데 잘 읽고 갑니다^^

    2008.02.23 03:18

BLOG main image
네오이마주(neoimages)와 영화 깊게 읽기
영화 비평 매거진 '네오이마주'의 공식블로그입니다. 더 많은 글은 http://neoimages.co.kr 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by woodyh98

카테고리

분류 전체보기 (521)
필진 리뷰 (260)
필진 칼럼 (149)
사람과 사람들 (55)
문화와 세상 엿보기 (10)
그리고... (41)

달력

«   2019/11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 3,158,689
  • 53

네오이마주(neoimages)와 영화 깊게 읽기

woodyh98's Blog is powered by Tattertools.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