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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흥기

한결 경쾌해졌다. 이제 갓 세 편의 장편을 통과한 신동일 감독이지만, 그의 전작들과 비교해보자면 유머 코드는 한층 강화되었다. 보고 있노라면 영화 상영 내내 웃음이 끊이질 않는다. 물론 그 웃음은 전적으로 현 정부와 기득권 세력에 대한 일종의 비웃음에서 시작한다. <반두비>는 은유보다 직접적인 상징으로 대담하게 관객을 유혹한다. 남대문, mb, 촛불소녀, 쥐새끼, 수입소고기, 조. 중. 동, 이건희, (강)만수, 심지어 직접적으로 이명박을 ‘쥐새끼’라고 부르기 까지 한다. 실컷 웃기야 했지만, 시국이 하 수상하다보니 이거이래도 되는 건가 슬쩍 걱정스럽긴 하다. (이 걱정은 기우에 그치지 않고, 등급 심사에서 15세 관람가로 제출한 영화를 청소년 관람불가의 차원을 달리하는 영등위의 멋진 심사로 대응해주셨다.)

그렇다고, 그가 천착했던 영화의 사회적인 주제까지 가벼워지진 않았다. 여전히 신동일은 그 방면의 논점을 영화화 할 수 있는 한국에 몇 안 되는 소중한 사회파 감독이다. <반두비>는 한국의 당찬 여고생과 방글라데시 출신 이주 노동자 간의 우정을 그린 영화이다. 여기서 한국의 여고생은 영화 곳곳에서 상징하는 것처럼 ‘촛불 소녀’로 읽힌다. 영화의 외피는 이 촛불 소녀 여고생과 이주노동자간의 친목이 애정과 우정사이를 오르락내리락 거리는 과정을 통해 우리 사회가 이주노동자를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으며, 그들과의 관계에 어떤 욕망이 스며들고 있는지 서슴없이 까발린다. 하지만 영화의 실질적인 주제는 세대론에 가깝게 형성되어 있다. 그러니까 촛불 소녀 세대가 이주 노동자라는 소외 계층과의 연대를 통하여 어떻게 우리 사회에 대응하고 있는가를 직접적으로 조명하고, 그곳에서 희망을 찾기에 이른다.

영화는 곧잘 인물들이 거리를 걷고 있는 모습을 비추곤 한다. 영화가 시작하면서 이주노동자인 카림(마붑 알엄 분)이 진입 금지가 새겨져 있는 일방통행 도로를 거꾸로 걸어가고 있는 장면이나 원어민 영어 강사 학원비를 마련하기 위해 마사지업소에서 일하기로 결심한 여고생 민서(백진희 분)가 휘항 찬란한 네온사인이 밝혀진 도시로 걸어 들어가는 장면과 이제 막 서로가 친해지기 시작한 두 사람이 서먹하게, “이제 어디로 가느냐?”는 질문에 둘 다 자신들이 어디로 가야 할 지 몰라 하는 모습 그리고 미국인 영어 강사와 만난 후, 카림과 민서는 서로 반대 방향으로 각 자의 길을 걸어간다. 이러한 길을 걸어가는 장면들은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아주 함축적으로 잘 담고 있는 상징적인 장면들이다. <반두비>는 한국 사회에서 여고생과 이주노동자들이 어떤 삶의 길을 걸어가고 있는 가를 살펴보고 생각해 볼 수 있는 아주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Open Your Mind!

필진 칼럼 2009.06.12 10:06 Posted by woodyh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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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건영

영화가 개봉되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말들이 많다. 한마디로 불순하고 위험하다는 것이다. 어떤 이는 사회적으로 대두된 이주노동자의 문제를 미화하고 여고생을 이주노동자의 성적대상으로 비하할 뿐 아니라 원조교제를 부추긴다고 격분한다. 상영을 못하게 막아야한다는 목소리도 들린다. 개봉이 확정되었지만 어떻게든 전국으로의 확대상영을 막아야 한다는 주장도 인터넷 공간을 중심으로 조용히 일어나고 있는 형국이다. 25일 개봉 예정인 <반두비>에 관한 얘기다. 물론 이 영화에 일부 관객층과 집단에게 불쾌감과 거부감을 불러일으킬만한 장면이 없지 않다. 관람자에 따라서는 뜨악할 만한 장면과 대사가 횡횡하기도 한다. 그렇다고 그것들을 위험하다거나 선동적이라고 매도해서는 곤란하다. 영화는 영화일 뿐이다. 따라서 이 글은 영화를 영화로 보지 않는 사람들. 현실과 판타지를 혼동하는 사람들, 대중문화의 불온성을 이해하지 못하는 그 혹자들을 위한 것이다.

<반두비>는 정직하고 현실적이면서 환상적이기까지 한 영화다. 아, 여기서 환상이란 이주노동자나 중년남성의 판타지를 의미하는 게 아니다. 본시 영화란 기본적으로 환상(fantasy)에 기초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 이는 문화가 대중과의 접점을 획득하는 도구인 핍진성과 무관치 않다. 이를테면 ‘한 발만 앞서 간다’는 대중문화의 속성 측면에서 바라봐야 한다는 말이다. 반드시 현실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야기를 근간으로 하되 절대로 두 발 세발 무턱대고 앞서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가령 이런 식이다. 언제부터인가 우리사회에 이주노동자가 급속도로 늘어났다. 그들과 연애하거나 결혼하여 다문화가정을 이룬 예가 적지 않은 게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아예 보편적인 현상이라고 간주할 정도는 아니다. 섣부른 일반화는 금물이라는 것이다. 이때 드러내기 힘든 사회정서를 감안해 감추거나 드러내더라도 적정선을 유지하는 것, 그러면서 대중의 욕망전선에 침투하는 것. 이것이 ‘한 발만 앞서가기’의 전략이다. 대중문화는 언제나 사회적 코드를 놓치지 않아왔다. 그것을 가장 먼저 간파하여 상품화하는 것은 드라마와 영화이다. 이때 개별 작품들은 현실을 조금 과장하고 앞서 나가면서 이를 통해 대중의 호기심과 욕망을 자극하게 된다. 다만 특정 영화나 드라마가 대책 없이 끝도 없이 현실을 앞서 나가는 경우가 있는데, 이때 쓰는 말이 '막장'이다.

이렇게 볼 때, 신동일은 우리사회에 엄연히 존재하는, 지금 여기에 상존하는 이주노동자의 이야기를 한 발 앞서 그려냄과 동시에, 그의 짝으로 예의 정치사회적 코드의 전달자인 당찬 여고생을 내세웠을 따름이다. 요컨대 영화 속 소녀는 과거와 현재 그리고 감독이 꿈꾸는 미래의 모습까지를 올곧이 품고 있는 한국사회의 알레고리다.


모름지기 영화를 만드는 사람은 인물을 다룸에 있어 거침없어야 한다. 자기의 배우를 온전히 주체로 인식하되 그 앞에서 머뭇거리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신동일은 적어도 자기 확신 속에서 영화를 만드는 사람이다. 되지도 않는 도덕심에 발목 잡혀 말더듬는 사람은 아니라는 말이다. 감독 자신이 딸 가진 아비이면서도 불온하고 당혹스러운 장면을 정면으로 돌파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이미 <나의 친구, 그의 아내>에서 (쿠르베 식으로 표현하자면) ‘세상의 근원’으로부터 막 탄생하는 새 생명의 코앞까지 카메라를 밀고 들어간 그가 아니었나. 그러니 이 영화가 이주노동자의 성범죄를 부추긴다던지, 청소년이 보게 해서는 안 된다던지 하는 식의 황당한 주장은 그만 하라. 이는 곧 “난 대중문화의 속성을 모르는 무식한 사람이요, 편협한 국수주의자”라고 자기 얼굴에 침 뱉는 일이 될 테니까 말이다.


일찍이 전후 독일사회에 피어오르는 ‘일상의 파시즘’을 경계했던 파스빈더 R.W. Fassbinder의 목소리가 <반두비> 개봉을 앞두고 다시 들려오게 될 줄이야. 고작 영화 한편 씹어 먹을 궁리에 불철주야 골몰하는 그대들이여. 마음을 열어, 마음을! 그래도 싫으면 말고!


 

너무, 분통 터뜨리지 말자

필진 칼럼 2009.06.05 12:30 Posted by woodyh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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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건영


2007년 늦가을, <반두비>의 시나리오를 처음 보았을 때 내가 가장 먼저 던진 말은 이랬다. “와우, 이거 센걸. 다 좋은 데 청소년관람불가 나올 거 같아 걱정이야” 그때 신동일 감독의 답, “설마요...힘겹기도 하지만 꿋꿋하게 나아가는 한 소녀의 성장드라마인데. 문제될 수 있는 부분은 조심스럽게 연출할겁니다” 그러나 그게 감독의 연출만으로 될 일인가.

2009년 6월, 아니나 다를까. 여고생이 마사지 숍에서 일하는데다가 그곳에서 담임선생님과 마주치기까지 하는 영화, 육두문자와 “졸라”가 스크린에 흩날리는 이 영화, 청소년에게 유해할까? 당근, 유해하지! 내 생각이 아니라, 그러니까 현직 대통령을 설치류 동물에 비유하여 묻거나 한국여성을 비하하는 발언이 위대한 미국원어민강사의 입을 통해 나오는데, 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 불철주야 불침번을 서고 있을 영상물등급위원회 나리들이 15세 관람가 등급을 주겠느냐 말이다.


지난 6월 3일 영등위의 한 관계자는 ‘아시아경제’와의 인터뷰를 통해 등급논란에 대한 영등위의 입장을 밝혔는데, 예상대로 황당한 주장으로 일관하고 있었다. 이례적이고 즉각적으로 단행된 이 인터뷰가 시사하는 점은, 재심을 통한 등급번복의 가능성이 희박해졌다는 것과 현 정부에 배치되는 영상표현은 좌시하지 않겠다는 영등위의 결연한 의지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인터뷰에서 밝힌 등급사유에 한국인비하와 현 정권에 대한 부정적 시각에 관한 얘기가 빠져있다는 사실이다. 아니 이 양반, 성격이 소심한 거야? 아니면 현직 대통령을 거론한다는 것 자체가 불경죄에 해당한다고 지레 겁먹은 거야. 게다가 정작 인터뷰 당사자는 영화도 제대로 안 본 듯하다. 영화 어디에도 나오지 않는 이야기를 천연덕스럽게 해대고 있으니 말이다.

어차피 일고의 논의할 가치도 없는 영등위의 주장은 교회에다 헌금이나 해버리고 흥분을 가라앉힌 후 생각해보자. 본시 훌륭한 영화란, 관객으로 하여금 감독의 세계관에 동화되어 작품을 경험하게 만들고, 그리하여 개인의 신념 체계마저 흔들리게 만든다. 때문에 어떤 영화를 본 첫 관람자가 불편함을 느꼈고 영화에 묘사된 모든 불온한 것들이 현실로 이어지리라는 우매한 확신이 들 때, 그리하여 그 관람자가 무언가를 희생양 삼아 분노와 비판을 표출하고자 한 결과에 대한 것이라면 굳이 애석해야만할 이유는 없다. 달리 보면 그만큼 훌륭한 작품이라는 반증일 수 도 있으니까 말이다.

이제 <반두비>의 개봉이 20일 밖에 남지 않았다. 배급홍보사의 바쁜 행보가 시작될 시점이고 감독은 노심초사 개봉을 기다리는 형국이다. 청소년관람불가가 확실시 되는 영화를 어떻게 효율적으로 홍보하고 많은 이들을 극장으로 불러 모으느냐에 힘을 모아야 할 때라는 것이다. 소규모 개봉에 등급까지 발목을 잡으니 불리한 게 이만저만이 아니지만 그렇다고 부정적으로 볼 일만도 아니다. 영등위 관계자의 억측대로 등급논란을 마케팅 재료로 삼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 수 있다. 개봉 전까지는 등급에 대한 논쟁을 극대화하고 개봉 후에는 작품에 대한 평가를 통해 관객층을 확보하자는 말이다. 또 민서 역의 백진희의 가능성을 극대화시키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 것이다. “<주노>의 엘렌 페이지를 찜 쪄 먹고도 남을 <반두비>의 백진희” 이런 것 말이다. 사실이지 신동일의 영화 속 여배우들은 얼마나 매력적이었나.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앉은 누이의 모습으로 뭇 사내들의 애간장을 태운 홍소희의 고혹적인 자태하며, 기성세대에게 거침없는 하이 킥을 날릴 때의 씰룩거리던 백진희의 통통한 볼 살과 입술이라니. 전주국제영화제 상영당시 혈기 방자한 청년들이 백진희의 이름이 올라가는 순간, 탄성을 질렀다는 소문도 있고 보면 충분히 가능한 일일 테다.

나 역시 누구보다 개봉에 맞춰 많은 청소년이 <반두비>를 관람할 수 있기를 바라는 사람이다. 그렇게만 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일이지만 아직 재심결과는 나오지 않았고 어느 쪽이 더 좋은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다. 결과가 어떻든 신동일이 영화 만들기를 그치지 않고 개별 작품마다 품질을 인정받는다면, 오랜 시간에 걸쳐 관객과 만나는 작품들 속에 <반두비>도 있을 것이고 그중에는 2009년 6월에 보지 못한 것을 애통해했던 청소년도 있을 터이니 이 정도면 행복한 상상이지 않나? 그러니 비록 청소년관람불가의 족쇄가 풀리지 못할지라도 너무 분통 터뜨리지 말자. 결국 영화와 그 속에 담긴 감독의 마음은 변함없을 테니까. 애초에 내가 그리고 우리가 흥행감독 신동일을 지지한 것은 아니지 않은가.


(추신) 한 동안 잠잠하더니 저자가 또 신동일 타령이라고 혀를 차는 사람도 있을 게다. 그런데 미안하다. 아직 시작도 안 했다. 이건 편집장 칼럼일 뿐이고 본격적인 것은 개봉 전후로 폭포수 같은 은총을 쏟아 부을 터이니 기대하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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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흥기


6박 7일의 피곤한 첫 프레스 일정을 마치고 돌아오면서, 영화제 마감 보고를 해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어찌된 영문인지 첫 단어를 쓰기까지 매우 고통스러운 시간이 흘렀고, 욕심만 앞 선 까닭에 썼다 지우기를 여러 차례 반복했다. 글은 좀처럼 중심을 잡지 못하고 의미 없는 수사로만 가득 차버리기 일쑤였고, 그 와중에 편집장님의 마감 시한 선고까지 더해지면서 매우 괴로워지기 시작했다. 글쓰기를 중단하고 무엇이 문제인가에 대하여 생각하고 특단의 조치를 취해야만 했다. 생각 끝에 내린 결론은, 첫 프레스 일정을 근사한 언어로 정리하고 싶은 초짜의 욕심이 4일이란 시간을 허망하게 허비해 버린 것이었다. 본디 못난 글 솜씨를 지니고 있으면서, 하루아침에 명문을 써지기를 기대한 나의 어리석은 행동이 자초한 자충수라고 볼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남루한 문장력을 지니고 있지만 솔직담백한 글로나마 보는 이를 충분히 만족시킬 수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에 도달하게 되었다. 내가 이 글을 쓰려 했던 본래의 목적을 상기해 보니, 일은 아주 수월해졌다. 나는 관객으로서 그리고 프레스 입장으로서 영화제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가에 대하여 사적인 고백을 하고자 한다. 그러니까 나에게 영화제는 어떤 의미이며, 당신들에게 영화제가 어떤 의미인지를 되묻고, 이 화두를 통하여 일종의 선문답을 시도해보고자 한다. 그럼 먼저 고백하겠다. 나에게 영화제란 무엇인가?


영화제는 영화를 보는 곳인가? 영화에 관련된 사람을 만나는 곳인가?

영화제를 찾아다닌 지 그리 오래되진 않았지만, 4~5년 전부터 꾸준히 영화제를 돌아다니는 관객의 일원으로서 원래 나에게 영화제란, 다양한 영화를 선택해 만나 볼 수 있는 일종의 접견 장소였다. 그러니까 영화와 관련된 게스트들을 만나는 일은 부차적 차원의 일이었을 뿐, 본래의 목적과는 별개의 문제였다. 그간의 기간 동안 내게 영화제는 푸짐한 만찬의 다양한 메뉴를 전시한 뷔페와 같은 곳이었다. 평소 볼 수 없는 다양한 영화들과 아직 아무도 접해보지 못한 새로운 작품을 가장 먼저 본다는 그 짜릿함이 나를 설레게 만들었다. 때문인지 그 때는 하루에 3~5편씩을 닥치는 대로 해치웠다. 밥보다 영화를 보는 편이 좋았으니까, 영화가 뭔지도 모르고 좋았던 시절이니까. 뜻도 의미도 모르면서 그저 새로운 장면과 새로운 형식이 나오면 두 눈이 휘둥그레져 새로운 경험에 짜릿한 오르가즘을 느끼곤 하였다. 이해보다는 감상이 내 중추신경계를 장악했던 시절이었다. 그래서 그 당시에는 누군가를 만날 시간도 좀처럼 없었다. 누군가를 만나기보다는 빨리 저 어두운 세계에서 펼쳐지는 또 다른 이야기들을 기대했기 때문에. 영화와 관련된 이야기보다는 영화 안에서 펼쳐지고 있는 문법이 너무나 매혹적이었다. 그렇게 나는 영화제에서 영화에 중독된 채로 시간을 흘려보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내게도 좁지만 인맥이란 것이 생기기 시작했다. 점차 영화제에서 만나는 사람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내가 저명한 평론가 혹은 유명 감독처럼 매일 미팅 스케줄이 꽉꽉 들어차 있었다는 것은 아니다. 그저 영화제 기간 중에서 하루 정도는 지인들과 술잔을 기울이며, 영화제와 그간의 세상사는 이야기에 대하여 담소를 나누는 그런 수준이다. 하지만 올해 처음으로 프레스로 영화제를 경험하였다. 새로운 경험도 많았지만, 무엇보다 영화제에서 부딪히는 많은 사람들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만큼 영화를 보는 시간은 당연히 줄어들었다. 그리고 이런 의문이 생겼다. 영화제는 과연 영화를 보기 위한 곳인가. 아니면, 영화를 통해 영화에 관련된 사람들을 만나기 위한 곳인가.

사진출처: 전주국제영화제 공식 홈페이지


과연 영화제는 영화를 보기에 적당한 장소인가?


하루에 세 네 편의 영화를 보는 일이 과연 영화를 진짜 사랑한다는 증거가 될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오래전부터 생각해왔던 문제였다. 영화를 진짜로 좋아한다면, 오히려 하루에 세 네 편의 영화를 보는 일은 각기 영화에 대한 모독이라고 생각한다. 영화제에 초청된 영화들이 그렇게 간단하게 잊혀질 평작들은 아니기 때문이다. 비단 세계 3대 영화제(칸느-베를린-베니스)뿐만 아니라, 세계 유수의 영화제들로부터 초청되는 국내 영화들을 한 번 살펴보라. 이미 국내에서 한 차례 검증 받은 탄탄한 작품들이거나, 혹은 프로그래머의 고심 끝에 고른 역작일 것이다. 국내 영화제라고 그 고민이 크게 달라질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일단 영화제에 초청되어진 영화에 대해서 어느 정도 퀄리티를 믿고 따른다. 따라서 그 영화들이 앞서 얘기했다시피 그렇게 간단하게 기억에서 잊힐 영화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우리가 영화제에서 연속으로 세 편 이상의 영화를 볼 때, 그 영화들이 가져다 준 그 강렬한 감정들은 분명 다음 영화의 기억 속 뒤안길로 사라지는 일이 발생한다. 영화를 온전히 감상하기에는 분명 하루는 그렇게 긴 시간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여기서 감상이라 함은 영화를 눈으로 보는 시간뿐만 아니라, 자신이 영화를 보고 느낀 감정을 완벽에 이르기까지 정리하는 내면화의 시간을 포함하는 것이다. 그래서 영화제에서 영화를 보는 일은 때론 그냥 정말 단순한 관람으로만 그치는 경우도 적지 않게 존재한다. 그렇다고 영화제까지 와서 하루에 한 편의 영화를 관람한다는 것은 또 너무 아쉬운 일이다. 영화를 보는 행위에 있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참으로 아이러니한 곳이 또한 영화제이다.


그렇다면,
영화제는 영화를 통해 영화와 관련된 사람들을 만나기 위한 곳인가?


어쨌든 영화제는 영화에 관계된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장소이다. 영화 하나로 이토록 다양한 사람들이 모일 수 있겠구나 생각이 든 것은 이번 취재 활동 덕분이다. 첫 프레스 활동에 욕심만 앞서 각기 다양한 측면에서 영화제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가를 알아보고자 한 적이 있었다. 비록 그 결과는 수월하게 이루지 못하였지만, 내가 이 취재를 통하여 알게 된 사실은 매우 다양한 사람들이 전주국제영화제라는 이름 안에 하나로 모여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이다. 우선 영화를 만들고 이를 영화제 측에 출품한 감독 및 출연진들과 프로그래머의 선정에 따라 초빙된 영화와 관련된 게스트들이 이 축제를 더욱 화려하게 밝혀주면, 이에 애정 어린 시선으로 환호해주며 열광하는 열정적인 관객들이 있다. 또한 이 둘 사이의 만남을 뒤에서 도와 줄 봉사자들과 영화제 스태프들의 노고가 곳곳에서 서려있으며, 이러한 뜨거운 만남을 좀 더 많은 대중들에게 홍보할 사명을 지닌 언론도 존재한다. 대체로 영화제를 움직이는 주체는 이러한 4개 집단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영화제 프레스 카드를 부여받고, 또 ‘네오이마주 스태프’라는 직함을 부여받고 처음 참여하게 된 영화제에서 무엇보다도 이전과 판이하게 달라진 경험은 기존의 영화제 측에서 부여한 만남의 기회를 뛰어넘어 자발적으로 각기의 주체들과 원활하게 소통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처음에 내가 관객의 입장으로 영화제를 참가했을 때는 영화제 측이 준비한 행사를 통해서만 게스트를 만날 수 있었다. 그리고 같이 영화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상대자라고 해봐야 그 좁디좁은 인간관계 안에서 뿐이었다. 하지만, 이 새로운 일정은 사뭇 흥미로웠다. 영화제 첫 날부터, 나는 이번 영화제 두 개 부문의 수상에 빛나는 <반두비>의 신동일 감독과 기타 스태프 분들과 술잔을 기울이는 기회를 가졌다. 당시 호기 어린 목소리의 현장 스태프들이 보여준 이번 영화에 대한 자신감은 두 개 부문의 수상을 능히 짐작하고 남을 정도로 당당했다. 내가 이 긴 글을 쓰면서 고작 영화제에서 현장 스태프 분들과 술을 먹은 자랑을 하려는 의사는 아니다. 중요한 것은 영화 저널과 현장이 제대로 소통할 기회가 대체로 이런 곳 밖에 없다는 것이다. 삼사오오 취기를 달래러 자리를 파하고 떠나는 분위기 속에서 현장 스태프들과 기자들 간의 이야기는 깊어져 갔다. 여기서 그것을 모두 밝힐 수 없지만, 초짜인 나에게는 정말 뼈와 살이 되는 중요한 얘기도 상당수 오고갔다. 중요한 것은 이것이다. 영화 산업의 종사자 사이의 간극을 밀착시켜 줄 수 있는 것이 바로 이런 영화제이다. 저널과 저널 사이의 유대도 보통과 다르게 영화제에서는 더욱 강해진다. 또한 관객과 저널은 그 어느 때보다도 밀착되어 같은 극장에서 동시에 숨 쉬어 그 온기를 그대로 전달한다. 비단 이것은 저널의 입장에서 뿐만 아니라, 영화감독과 관객과의 관계 역시 마찬가지이고, 영화제 스태프들은 말 할 것도 없을 것이다. 생각해보면, 우리는 같은 산업에 연을 맺고 있으면서도 상당히 접점을 가지기 힘든 집단들이다. 따지고 보면, 현장과 비평 간의 괴리는 상당히 멀고도 멀다. 하지만 영화제라는 이름으로 이들이 하나로 묶이는 기회가 생긴다는 것은 꽤나 의미 있는 일이다. 비평과 현장이 완전한 이해를 전제로 함께 일 할 순 없지만, 적어도 이런 자리를 통하여 서로를 알아보려는 노력은 필요할 것이다.



영화제를 즐기는 방법

이것이 단지 프레스 카드의 권능은 아니다. 영화제를 찾는 누구나가 이룰 수 있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다만 그 방법을 이제야 터득했을 뿐이다.

먼저, 영화제에 와서 너무 많은 영화를 보지 말라고 권하고 싶다. 영화는 하루에 한 두 편이면 충분하다. 그것을 가슴에 새기기에도 벅차다. 그리고 되도록 많은 사람들과 얘기를 나누기를 추천한다. 그 사람이 일면식 없는 낮선 관객이더라도 상관없다. 그 역시도 누군가가 말을 걸어주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을지도 모른다. 나 역시도 그러했다. 설령 그들이 다른 목적을 지니고 있는 이들이라도 영화제가 그대들을 하나로 묶어 줄 것이다. 영화에 대하여 이야기하자. 그것이 영화를 만든 감독이라면 더할 나위 없이 좋다. 영화제에서 감독을 만날 기회는 의외로 많다. 영화제를 직접 찾을 정도의 열정이라면,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걸어올 낮선 이를 외면할 이유가 없다. 영화제는 영화를 전시하는 의미도 가지고 있지만 이를 즐기는 축제의 역할도 가지고 있다. 즐기기 위해서는 많은 사람과 그것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함께 하려는 자세가 필요하다. 영화는 숙제가 아니다. 많이 본다고 누군가가 당신을 칭찬해주지 않을 것이다. 영화를 보고 그 영화를 본 또 다른 누군가와 그것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영화제를 즐기는 진짜 방법이 될 것이다.

끝으로 딱 한 가지만을 더 전하자면, 이 모든 경험을 글로서 정리하자. 표현되지 않는 즐거움은 즐거움이라고 말 할 수 없다. 이를 언어로 내뱉으면 당시에 이 즐거움을 향유하게 되지만, 글로서 남기면 이 즐거움은 향기로 흡착되어 오래도록 남게 된다. 이상하게도 어렵게 시작된 글이었지만, 그 끝은 상당히 홀가분하다. 이것으로써 전주국제영화제에 대한 초짜 영화애호가의 어떤 단상을 마친다. 그렇다면, 이제는 당신 차례이다. 당신에게 영화제는 어떤 의미인지를 한 번 생각해보자. 조만간 새로운 영화제가 다가오기 전에 꼭 답을 얻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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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장원


역시 신동일이었다. 어쩌면 홍보된 것처럼 이주노동자와 여고생의 로맨스라는 말랑말랑하고도 얄팍한 소재주의의 노선을 따라갔다면 이 영화에서 찾을 수 의미는 무엇이었을까? 과연 의미를 찾을 수는 있었을까? 누군가는 선정적이며 확 끌리는 것들을 기대했겠지만 감독은 철저하게 그들의 기대를 배반하며 자신이 그동안 닦아왔던 노선을 확장시킨다. 그것이 바로 감독의 힘이고 그를 혹은 그의 영화를 애타게 기다렸던 관객이 받을 수 있는 감흥이다. 그래서 신동일의 세번째 영화 <반두비>는 혼란스럽고 불만가득한 이 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이 꼭 봐야할 작품이다. 누구도 말 못하지만 누군가는 말하여야만 하는 이야기를 용기있게 감독은 풀어내었고 소재주의에 함몰될 수 있는 유혹을 당당히 떨쳐 내고 자신의 말을 분명히 한다. 그와 같은 노선을 달리는 관객은 그의 열렬한 응원자가 되어 함께 행동하며 그처럼 자신들이 하고 싶은 말을 해야 한다. 그 이유는 이 영화가 우리들이 분출하고 싶은 감정들을 무수히 끌어내는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신동일 감독은 전작에서 보여진 것과 같이 '관계'를 표현하는 데 있어서 탁월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 소수종교를 믿으며 전쟁을 거부하는 청년과 사회적으로 타락한 대학강사의 관계를 그리는 데뷔작 <방문자>에서나 부인보다도 더 강렬한 '관계'를 맺고 있는 한 남자와 그의 친구의 이야기를 그린 <나의 친구, 그의 아내>를 보면 그가 사람과 사람을 연결시키는데 있어서 상당한 에너지를 가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세번째 작품 <반두비>도 예외일 수 없다. 그의 장기를 십분 살려 민서와 카림이라는 인물의 '관계맺음'을 그리고 있다. 그가 보여주는 인물들의 '관계'는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는 너무나 어울리지 않는데,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서로가 그들에게 꼭 필요한 존재임을 각인시켜준다. 어떤 여고생이 말도 피부도 다른 외국인 노동자를 좋아할 수 있을까? 하지만 그의 영화 안에서는 불가능은 곧 가능이 되고, 소수자의 시선이 곧 다수의 생각이 된다. <방문자>와 마찬가지로 이 영화에서도 감옥에서의 면회장면이 등장하는데, 두 장면 모두 이루어질 수 없는 것처럼 보였던 인물들의 관계가 이제는 서로에게 한쪽 구석을 채워주는 관계로 발전했음을 잘 보여주는 부분이다. 그래서 그 장면은 이 영화에서 엔딩장면만큼 값지고 감동적인 부분이라고 말할 수 있다.

감독은 <나의 친구, 그의 아내>에서부터 세심하게 매만져 왔던 '계급'에 관한 문제도 인물들의 '관계맺음' 못지않게 이 영화에서 부각시키고 있다. 달콤하며 씁쓸함 가득한 상류사회로의 진입 욕망을 그렸던 전작과 달리 이 영화에서의 상류사회의 모습은 모순, 그 자체이다. 상류사회의 모습은 다층적으로 표현되는데 부패한 정치인, 타락한 교사, 외국인 노동자를 부려먹는 공장 사장등을 통해서 변주된다. 하지만 하나같이 제대로 된 모습은 존재하지 않는다. 감독은 그것을 직접적으로 비판하며 정치적,사회적 시선에 두 눈을 치켜 뜨고 마주선다. 그것을 모두 아우르는 감독의 시선은, 물론 인물을 묘사하는 것처럼 따스하고 온화한 배려가 느껴지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더 나아가서 감독은 불온함을 받아들이고 적극적으로 저항하는 소녀의 모습을 통해 '계급'이 생김으로써 파기되는 모순덩어리의 모습 역시도 세밀하게 관찰해 낸다.

민서는 대부분의 여고생과 다를 바 없는 것처럼 보인다. 영어학원에 등록하고 싶어하고 아버지의 부재를 쉽게 인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녀가 '행동하는 인물'이라는 것을 생각했을 때, 민서는 특별한 인물이 된다. 방법이 옳다라고 볼 수는 없지만 스스로 학원비를 마련하고 정당하지 못한 정치와 언론, 정권에 쓴 소리를 내뱉으며 자신에게 찾아온 사랑을 즐길 줄 안다. 생각없이 말하지 않으며 '왜'를 통해 '어떻게'할지를 결정하는 소녀이다. 이것은 정권에 아부하는 인물들(카림의 공장사장)과 정권에 저항하지 못하며 스스로 포기하려는 인물들(민서의 어머니와 의붓아버지, 그리고 어쩌면 카림까지)을 비판하면서 그것을 바라보는 관객들이 적극적으로 행동으로 실천할 것을 요구한다. 민서는 그래서 이 시대에 꼭 필요한 인물을 대변하는 '메타포'처럼 느껴진다. 여고생으로 분하긴 했지만 민서는 혼란기에 처한 우리 누구라고 해도 사실 무방하다. 다만 민서가 가치를 가질 수 있는 인물인 것은 아무도 쉽게 건드릴 수 없는 부분을 건드리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민서는 또한 영화를 만든 신동일 감독의 '메타포'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데뷔작부터 그려온 그의 정치적 올바름을 향한 비판적 시선은 영화를 통해 관객이 가질 수 있는 것이 단지 감동뿐은 아니라는 것을 직설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뉴타운 건설의 페해를 말하는 술주정뱅이나 시급 3500원의 억울함을 토로하는 아르바이트생 모두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초상이다. 하지만 시대는 억울함을 받아줄만큼의 포용력을 가지고 있지 않다. 오히려 갖지 못한 자를 가진자의 테두리에서 더 멀리 내쫒을 뿐이다. 수많은 노동자들, 이주민들을 그 테두리 밖으로 내쫒은 것은 것은 어쩌면 우리 자신이 아닐까? 힘없다고 소리내어 말하지 못했던 우리 때문은 아닐까?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MB정권에 현명하게 대처하는 방법을 어린 소녀를 통해서 보여주는 <반두비>는 정말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영화임에 틀림없다. 분명 웃음지을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 민서가 카림이 전에 만들어주었던 방글라데시 음식을 먹으며 슬며시 웃음지은 그 모습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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