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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장원


역시 신동일이었다. 어쩌면 홍보된 것처럼 이주노동자와 여고생의 로맨스라는 말랑말랑하고도 얄팍한 소재주의의 노선을 따라갔다면 이 영화에서 찾을 수 의미는 무엇이었을까? 과연 의미를 찾을 수는 있었을까? 누군가는 선정적이며 확 끌리는 것들을 기대했겠지만 감독은 철저하게 그들의 기대를 배반하며 자신이 그동안 닦아왔던 노선을 확장시킨다. 그것이 바로 감독의 힘이고 그를 혹은 그의 영화를 애타게 기다렸던 관객이 받을 수 있는 감흥이다. 그래서 신동일의 세번째 영화 <반두비>는 혼란스럽고 불만가득한 이 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이 꼭 봐야할 작품이다. 누구도 말 못하지만 누군가는 말하여야만 하는 이야기를 용기있게 감독은 풀어내었고 소재주의에 함몰될 수 있는 유혹을 당당히 떨쳐 내고 자신의 말을 분명히 한다. 그와 같은 노선을 달리는 관객은 그의 열렬한 응원자가 되어 함께 행동하며 그처럼 자신들이 하고 싶은 말을 해야 한다. 그 이유는 이 영화가 우리들이 분출하고 싶은 감정들을 무수히 끌어내는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신동일 감독은 전작에서 보여진 것과 같이 '관계'를 표현하는 데 있어서 탁월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 소수종교를 믿으며 전쟁을 거부하는 청년과 사회적으로 타락한 대학강사의 관계를 그리는 데뷔작 <방문자>에서나 부인보다도 더 강렬한 '관계'를 맺고 있는 한 남자와 그의 친구의 이야기를 그린 <나의 친구, 그의 아내>를 보면 그가 사람과 사람을 연결시키는데 있어서 상당한 에너지를 가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세번째 작품 <반두비>도 예외일 수 없다. 그의 장기를 십분 살려 민서와 카림이라는 인물의 '관계맺음'을 그리고 있다. 그가 보여주는 인물들의 '관계'는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는 너무나 어울리지 않는데,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서로가 그들에게 꼭 필요한 존재임을 각인시켜준다. 어떤 여고생이 말도 피부도 다른 외국인 노동자를 좋아할 수 있을까? 하지만 그의 영화 안에서는 불가능은 곧 가능이 되고, 소수자의 시선이 곧 다수의 생각이 된다. <방문자>와 마찬가지로 이 영화에서도 감옥에서의 면회장면이 등장하는데, 두 장면 모두 이루어질 수 없는 것처럼 보였던 인물들의 관계가 이제는 서로에게 한쪽 구석을 채워주는 관계로 발전했음을 잘 보여주는 부분이다. 그래서 그 장면은 이 영화에서 엔딩장면만큼 값지고 감동적인 부분이라고 말할 수 있다.

감독은 <나의 친구, 그의 아내>에서부터 세심하게 매만져 왔던 '계급'에 관한 문제도 인물들의 '관계맺음' 못지않게 이 영화에서 부각시키고 있다. 달콤하며 씁쓸함 가득한 상류사회로의 진입 욕망을 그렸던 전작과 달리 이 영화에서의 상류사회의 모습은 모순, 그 자체이다. 상류사회의 모습은 다층적으로 표현되는데 부패한 정치인, 타락한 교사, 외국인 노동자를 부려먹는 공장 사장등을 통해서 변주된다. 하지만 하나같이 제대로 된 모습은 존재하지 않는다. 감독은 그것을 직접적으로 비판하며 정치적,사회적 시선에 두 눈을 치켜 뜨고 마주선다. 그것을 모두 아우르는 감독의 시선은, 물론 인물을 묘사하는 것처럼 따스하고 온화한 배려가 느껴지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더 나아가서 감독은 불온함을 받아들이고 적극적으로 저항하는 소녀의 모습을 통해 '계급'이 생김으로써 파기되는 모순덩어리의 모습 역시도 세밀하게 관찰해 낸다.

민서는 대부분의 여고생과 다를 바 없는 것처럼 보인다. 영어학원에 등록하고 싶어하고 아버지의 부재를 쉽게 인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녀가 '행동하는 인물'이라는 것을 생각했을 때, 민서는 특별한 인물이 된다. 방법이 옳다라고 볼 수는 없지만 스스로 학원비를 마련하고 정당하지 못한 정치와 언론, 정권에 쓴 소리를 내뱉으며 자신에게 찾아온 사랑을 즐길 줄 안다. 생각없이 말하지 않으며 '왜'를 통해 '어떻게'할지를 결정하는 소녀이다. 이것은 정권에 아부하는 인물들(카림의 공장사장)과 정권에 저항하지 못하며 스스로 포기하려는 인물들(민서의 어머니와 의붓아버지, 그리고 어쩌면 카림까지)을 비판하면서 그것을 바라보는 관객들이 적극적으로 행동으로 실천할 것을 요구한다. 민서는 그래서 이 시대에 꼭 필요한 인물을 대변하는 '메타포'처럼 느껴진다. 여고생으로 분하긴 했지만 민서는 혼란기에 처한 우리 누구라고 해도 사실 무방하다. 다만 민서가 가치를 가질 수 있는 인물인 것은 아무도 쉽게 건드릴 수 없는 부분을 건드리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민서는 또한 영화를 만든 신동일 감독의 '메타포'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데뷔작부터 그려온 그의 정치적 올바름을 향한 비판적 시선은 영화를 통해 관객이 가질 수 있는 것이 단지 감동뿐은 아니라는 것을 직설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뉴타운 건설의 페해를 말하는 술주정뱅이나 시급 3500원의 억울함을 토로하는 아르바이트생 모두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초상이다. 하지만 시대는 억울함을 받아줄만큼의 포용력을 가지고 있지 않다. 오히려 갖지 못한 자를 가진자의 테두리에서 더 멀리 내쫒을 뿐이다. 수많은 노동자들, 이주민들을 그 테두리 밖으로 내쫒은 것은 것은 어쩌면 우리 자신이 아닐까? 힘없다고 소리내어 말하지 못했던 우리 때문은 아닐까?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MB정권에 현명하게 대처하는 방법을 어린 소녀를 통해서 보여주는 <반두비>는 정말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영화임에 틀림없다. 분명 웃음지을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 민서가 카림이 전에 만들어주었던 방글라데시 음식을 먹으며 슬며시 웃음지은 그 모습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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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장원



실망의 감정은 단지 실수였을뿐

적당히 흥미롭고, 조금은 따분했다. 그리고 당황스러웠다. 영화를 보고 나서도 한참은 멍한 기분었다. <방문자>를 본 후에 경험했던 활화산처럼 피어오르던 감정의 폭발이 <나의 친구, 그의 아내>에서는 없었다. 난 신동일의 2번째 작품이 데뷔작과는 전혀 다른 작품이라고 단정지었다. 이내 내 자신을 쓰다듬었다. 이건 <방문자>와는 다르게 생각할 필요가 있어. 영화가 완전히 다르잖아. 그러니까 그다지 실망할 필요는 없는거야. 그리고 슬며시 꿈틀거리지만 누구에게도 표현할 수 없었던 실망의 감정이 다른 영화에서 느꼈던 실망과는 차원이 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작품이 정말 맘에 들지 않아서 느끼는 실망의 감정이 아니라 뭔가 나의 기대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그로 인해 발생하는 아쉬움이었다. 기대에 못 미치는 것은 전혀 아닌데도 그런 감정에 사로잡혀 못내 아쉬웠다. 그래서 난 이 작품을 다시 한번 봐야했다. 정확히 10여달이 지난 후, 난 처음 본 후에 느꼈던 내 실망의 감정이 실망이 아니라 실수였다라는 것을 깨달았다. 지적으로 탁월한 능력을 지닌 감독에게 난 속아 넘어갔다. <나의 친구, 그의 아내>는 내가 그렇게 감동적으로 보았던 <방문자>와 전혀 다르지 않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러니 난 이내 생각을 180도 돌려 이 작품을 논해야 했다. 이 작품이 가지는 다중적인 플롯에 대해서, 그리고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사회의 계급과 관계를 보여준 작가의 의도에 대해서 난 힘든 고뇌의 과정을 거쳐야만 했다. 종결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 후에 난 이토록 자아를 이데올로기적 무형체의 흐름으로 이입시키는 작품이 또 있었나 찾아보았다. 그런 다음에야 <나의 친구, 그의 아내>가 가지는 비상하리만치 아름다운 매혹에 정신없이 빠져있는 스스로를 발견할 수 있었다.



묘한 관계와 이동할 수 없는 계급

신성한 결혼식이 끝나고 부부 재문과 지숙은 친구들과 단체 사진을 찍는다. 그런데 재문은 지숙보다 그의 오른쪽에 서있는 친구 예준에 더 붙어 서 있다. 좀 의심이 된다 싶더니, 화면은 지숙을 가려 놓은채 재문과 예준의 행복한 얼굴을 비춘다. 아내보다도 더 사랑하는 사람이 존재할 수는 없는것처럼 재문 역시 예준을 지숙보다도 더 사랑할 수는 없다. 그런데 재문은 더 사랑하는 것처럼 보인다. 아이의 태어난 것을 예준에게 알릴 때, 지숙이 파리에 가 있을 때 잡에 방문한 그를 바라볼 때 재문의 표정은 어딘 가 모르게 예준을 친구 이상으로 생각하는 것 같은 느낌이다. 하지만 기묘하게도 영화는 그 이상 선을 넘지 않는다. 모든걸 예측하고 상상해야 하며, 절대로 결론짓지 않아야 한다. 그것만이 이 영화를 더 깊이있게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이다. 지숙은 그런 관객의 내면 속에 자리잡은 존재일지 모른다. 그들의 관계를 질투하지만 과하게 표현하지 않으며 뭐라고 자기 스스로 결론 짓지도 않는다. 그냥 바라볼 뿐이다. 이 묘한 관계는 몇 번이나 엎어지고 회복되지만 끝내 파탄의 국면을 맞이하고 만다. 아기가 사고로 목숨을 잃었을 때 재문은 기꺼이 예준을 위해 자신을 희생한다. 이것은 좀 급작스럽고,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다. 죄까지 뒤덮은 재문은 심하게 떨고 있지만 난 그 초점에서 예준을 향한 눈빛이 전과는 많이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예준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은 멍하고 혼란스러워 보였다. 물론 사건 전후를 따져봤을 때 그것이 당연해 보이지만, 분명한 것은 전에 예준을 향한 재문의 눈빛과는 많은 차이가 있어 보였다. 뭔가 그(예준)를 위함이라기 보다는, 그(예준)에게 받은 것들을 보상하기 위해 즉흥적으로 행한 것처럼 보여졌다. 그럼 다시 돌아와서 재문이 사랑한 사람은 지숙이 맞다. 그리고 또 다시 난 지숙을 만나기 전부터 예준과 재문 사이에서 이루 말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났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의심해 보았다. 도통 결론을 내릴 수 없는 복잡한 지점들이 산재되어 있다. 이런 지점들이 이 영화를 더 신비롭게 부각시키는 것이 아닐까?

관계성과 함께 이 영화를 종단하는 또 하나의 흐름은 계급성이다. 정치적인 성향이 다분한 감독의 특징이 이번 작품에도 때론 노골적으로, 그리고 전반적으로 깔려있다. 재문과 지숙은 서민층의 전형이라고 볼 수 있다. 동네 미용실을 하는 지숙과, 공항 레스토랑의 요리사로 일하는 재문은 우리가 볼 때 지극히 평범하다. 그들이 서로 혹은 따로 자신의 계급에서 한단계 도약하려는 욕망을 보여준다. 'chef'가 되려고 하는 'cook' 재문은 아내와 함께 미국으로 이민을 떠나려 한다. 그것은 정말로 'chef'가 되려는 이유에서이다. 하지만 그들을 위해서 이민을 도우려하는 예준은 재문에게 넌 'chef'가 아니라 'cook'이라고 강조한다. 그러니 애초부터 재문에게는 계급 상승 도약의 희망이 보이지도 않을 뿐더러, 당연히 그것은 실패하고 만다. 지숙 또한 마찬가지다. 미국이민계획이 실패하고 아이까지 잃자, 지숙은 또한번 예준의 도움으로 미국 유학을 간다. 유학 후 다시 돌아와 강남에 큰 테라스가 있는 미용실을 오픈하며 상류 사회의 즐거움을 만끽하지만 그것도 오래가지 않는다. 그러니 재문과 지숙은 허상의 욕망의 틈바구니에서 자신을 소비하고 점점 더 본질을 잃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재문'이라는 인물로 인해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재문은 '허상의 욕망'을 대표한다. 그가 가지는 부와 명예, 지식과 능력은 보기에 좋지만, 허울뿐이고 주변 사람을 괴롭힌다. 그 욕망을 맛보는 순간, 혼란스러운 굴에 빠지게 되며 그 곳에서 다시 빠져나오기 위해 발버둥쳐야 한다는 것을 뒤늦게 깨닫게 된다. 달아도 삼킬 수는 없는 것, 영화는 그것이 무엇인지 은유한다.



대립적인 인물의 지속적인 등장

<방문자>의 호준과 계상은 이 작품의 예준과 재문으로 변주된다. 그들의 관계나 특징은 정확히 이 작품으로 지속되는데, 그것은 몇 가지로 알 수 있다. 타락한 지식인을 대표하는 호준은 감정에 휩싸이는 법이 없다. 자신의 말을 분명히 하고 지적으로 뛰어날 뿐만 아니라 적잖이 퇴폐적이다. 순수 영혼을 대표하는 계상은 재문으로 이어진다. 그는 순전히 착한 마음을 지녔으며 굳건한 믿음을 가지고 있다.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에 관한 마음도 일관적이다. 그것이 무엇을 바라건 그렇지 않건. 전작에서 인물들이 티격태격 대립되고 갈등한 것에 비해서 이번 작품에서는 갈등이 별로 보여지지 않는다. 인물 속의 대립 속에서 감화되었던 호준과 계상과 달리, 예준과 계상은 이미 그런 사이로 시작되며 오히려 역으로 관계가 악화된다. 이런 지속되고 변주된 인물을 보는 것은 이 영화의 또다른 재미라고 할 수 있다. 친구 이상의 관계는 여전하며 그 속에서 느껴지는 사건의 발전 양식은 반대이기에 흥미롭다. 그러므로 신동일 감독은 인물과 인물의 관계에서 자유롭게 그들을 서로 맺고 흔들며 돌이켜 보이는데 탁월한 능력을 지녔다. 그것은 앞으로 계속될 그의 영화에서 확장되고 또다시 변주될 것이다.



타고도 용서할 수 없는 욕망

다시 되돌아 온 재문과 지숙은 그들의 옷에 맞는 한적한 미용실에서 다시 삶을 살아간다. 허황된 욕망을 불로 태워버린 지숙은 선택은 현명했던 것일까? 하지만 모든 것이 재로 타 날아가 버렸다고 할 수 있을까? 그리고 그들 사이에서 그렇게도 그들을 흔들어 놓았던 허상의 욕망 '예준'은 어디로 갔을까? 영화는 예준의 흔적을 보여주지 않는다. 다만 그들에게 편지가 배달됨을 끝으로 마무리를 짓는다. 편지는 누구에게 온 것일까? '나의 친구, 그의 아내'라는 제목이 문뜩, 그리고 불현듯 생각나게 하는 결말이다. 그들의 욕망은 타고 없어졌을지도 모르지만 그것이 그 누구에게도 용서할 수 없을 것이라 난 확실했다. 타고도 용서할 수 없는 욕망. 다시 자신들의 위치로 돌아와 평범한 본래의 옷을 입었지만 그래도 그들의 욕망은 끝이라고 볼 수 없다. 왜냐하면 용서할 수, 용서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난 이 위대한 감독의 연출 앞에서 이렇게 깊이 영화에 대해 고민하고 흔적을 남기려는 감독이 또 있을까 생각해 보았다. <나의 친구, 그의 아내>는 감독의 그러한 치밀한 고민의 흔적이 온전히 느껴지는 작품이다. 이 시대의 놓여진 깊은 사회 문제와 온전치 못한 기운들을 모든 사람이 방관한 채 다른 기류들로 편승할 때, 감독은 뚝심있게 자신의 할 말과 하고 싶은 이야기를 대범하게 건드렸다. 그리고 다시 돌아와 내가 깨달았던 실수는 이런 연유인 듯 하다. <방문자>가 겨울을 배경으로 찍었음에도 불구하고 '영상의 기온'을 가지는 작품이라면, 이번 작품은 대부분 여름을 배경으로 찍었는데도 '영하의 기온'이 느껴지는 작품이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느꼈던 두 영화의 이질감은 곧, 기온의 차이였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인물, 관계, 이야기의 흐름과 감독의 성향을 미루어 봤을 때 내가 처음 이 영화를 보고 속았다고 느꼈던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것을 알기 위해서는 적어도 2번 이상은 봐야하며, 3번 이상은 생각하여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물론 이 영화에는 감동이 느껴지지는 않지만 스산한 감정의 동요가 조용히 스며드는 느낌이다. 좀 더 오래 이 느낌이 전해질 것 같다. <나의 친구, 그의 아내>라는 기묘한 영화제목처럼 규정할 수 없는 감정들이 천천히 스며들어 그것들이 내 안에서 잠전되는 데에는 아마도 시간이 좀 필요할 것이다. 그 시간이 지나면 난 감독의 3번째 작품 <반두비>를 기쁨으로 맞이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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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건영



0. 열면서- <신성가족>에서 <나의 친구, 그의 아내>까지의 거리

신동일 감독의 두 번째 장편연출작 <나의 친구, 그의 아내>를 처음 본 것은 2006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였다. 당시 약간의 감흥과 다소 강한 충격 그리고 엄청난 혼란에 휩싸였던 기억이 난다. 물론 감독 입장에서 거북스러우리만치 혹평에 가까운 평가를 써댔었다. 잦은 클로즈업의 효용성을 지적했고 그 원인으로 감독의 연출력을 문제 삼았다. 적어도 그때의 느낌은 분명 그러했다. <방문자> 개봉 이후 그의 영화에서 내가 놓친 것이 있음을 알았다. 다시 보고 싶어졌다. 금년 2월 명보극장에서 열린 모니터시사회를 포함해 6번을 보았으니 결코 적게 본 것은 아닐 것이다. 결국 처음 보았을 때의 느낌이 완전히 휘발되자 이제는 전혀 다른 관점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면서 나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2001년 칸 국제영화제 단편경쟁부문에 출품되었던 <신성가족>을 본적 있는 사람이라면 <나의 친구, 그의 아내>가 상정되는 지점을 쉽사리 알아챘을 것이다. 그러니까 비 내리는 헤어 숍 창가에 선 여주인공과 옛 남자가 둘 사이에서 만들어졌을 법한, 그러나 세상에 없는 딸아이의 기일을 배경삼아 진행되는 11분짜리 단편영화에 함축시킨 사연의 근원을 찾아가는 영화가 <나의 친구, 그의 아내>라고 보면 틀리지 않을 것이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굳이 장편을 통해 신동일이 말하고자 한 것은 무엇일까? 칼 마르크스 Karl Marx의 논문 제목을 인용한 <신성가족>과 <나의 친구, 그의 아내>를 관류하는 논리적 배경은 무엇이고, 우정의 이름으로 포장되어 대극적 캐릭터 사이를 유영하는 힘의 정체는 무엇일까. 이제부터 나는 두 남자와 한 여자 사이의 우정과 욕망과 사랑과 배신이 뒤엉킨 혼돈 속을 헤집고 다니며 개입하는 ‘권력’을 집중 조망할 것이다. 부디 나의 견해가 영화를 만든 신동일의 생각과 정면으로 배치되지 않길 바랄 따름이다. 다만 유의해야 할 것은, 영화가 말하는 권력이란, 선명하게 구분지어진 ‘계급투쟁의 대상’으로서의 그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1. 무엇이 권력인가?

일찍이 푸코 Michel Foucault는 『감시와 처벌』 에서 시선의 관점에서 본 권력의 속성을 얘기했다. 권력은 곧 사람 사이의 관계이다. 이때 푸코가 말하는 권력이란 지배-피지배 관계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제도적인 동시에 사적 개인들 간의 인간관계이기도 하다. 우리 일상의 사소한 모든 관계는 그래서 권력을 동반하기 마련인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권력이 미치는 힘이 균형적이지 않고 비대칭을 이룬다는 데서 비롯된다. 이를 영화에 대입시켜 보면, 경제를 포함한 일상의 모든 영향력 즉 권력은 예준과 재문의 우정보다 우위를 점하고 있음이 발견 된다. 권력은 ‘아는 것’ 즉 지식에서 비롯되고 ‘시각’으로 지속되며 ‘진실’을 자양분삼아 키워지기 마련이다. 결국 <나의 친구, 그의 아내>에서 보여 지는 권력은 ‘앎의 권력’이고 그것을 유지하는 것은 ‘자본’과 ‘진실’이라는 것이다.


1-1. 자본은 권력이다
“힘이 있어요. 예준 씨는”

지긋지긋했을 것이고 한심했을 것이다. 미국에 가서 잘 살아보려고 했던 희망이 한 순간에 물거품처럼 사라진 것도 따지고 보면 순진하고 용의주도하지 못한 남편의 무능력 때문이었다. 그러니 힘들 때마다 백기사처럼 나타난 남편의 친구가 어찌 고맙고 든든하지 않겠는가. 서로의 속내를 처음으로 확인하던 밤, 지숙은 말한다. “참 명확하군요. 힘이 있어요. 예준 씨는”

남자의 힘. 성공한 지성이 보여주는 안정감처럼 여자를 안심시키는 것이 또 있을까? 그렇다면 그 힘, 권력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예준의 권력은, 적어도 영화 속 관계망을 작동시키는 힘은 그가 이룬 경제적 기반에서 발로한다. 하지만 그 부가 상대에게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면 그것은 권력화 될 수 없는 노릇이다. 그러므로 달리 말하자면 권력은 재문과 지숙이 부여한 권력이고 상호작용 속에서 키워진 권력이다.

동기와 선배를 제치고 항상 수익률 톱을 달리는 외환딜러에 한 눈에 보아도 고급스러운 주거 공간이 예준의 현재를 말해주고 있다. 그러나 그는 까다로운 성격 탓에 결혼은 뒷전일 정도로 일에만 매달려 사는 인물이다. 문제는 조직에서 따돌림 당하고 변절한 운동권으로 손가락질 받기 일쑤인 그에게 있어 유일한 친구가 재문이란 것이다. 자신을 인정해주고 자신이 영향을 미치는 대상이 유일할 때 그 대상의 이탈을 방지하는 행위로 경제적 호의만큼 확실한 게 또 있을까? “적어도 지숙씨 정도는 돼야지, 아니면 평생 연애만 하고 살 거”라던 예준은 어쩌면 애초에 물심양면의 지원을 통해 그들의 생활에 깊숙이 관여하려했는지도 모른다. 결국 재문 부부에게 둘 도 없는 친구요 삶의 조력자 역할을 자처한 예준의 호의는 부부의 자생력을 소멸시켜버린다. 때문인지 예준을 거치지 않고 부부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별로 없어 보인다. (심지어 섹스마저도 예준의 호출에 가볍게 깨지는 현실을 보라)

여기서 주목할 것은 포장마차 신인데, 그러니까 이 장면은 둘의 관계가 우정이 아닌 자본권력에 의해 작동됨을 알려줌과 동시에 재문을 바라보는 예준의 속내가 담긴 장면이기에 흥미롭다. 아내 지숙과의 섹스 도중 예준의 호출을 받고 뛰쳐나간 재문은 예준의 술값을 지불하게 된다. 이때 “4만 2천원”이라는 말에 어리둥절해하는 모습은 상당히 인상적이다. 둘의 관계에서 재문이 돈을 낸 것은 처음일 게 빤할 테니 경제적인 것에 관한한 전적으로 의존해온 재문으로서는 당황하는 게 당연한 일일 것이다. 게다가 한 구석에 앉아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적지 않은 분량의 장면 어디에도 술값 계산에 관한 둘의 대화는 없다. 나는 이 시퀀스가 영화 전체를 통해 대단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내가 그동안 베푼 게 얼마인데, 굳이 고마움을 표시할 필요가 있나?’라는 조건 없이 베풀기만 하던 자의 무의식이 드러나는 장면이라는 말이다. 그리하여 영화의 후반부 다시 한 번 보여 지는 예준의 속마음. 이처럼 신동일의 연출은 어떤 장면이라도 전체의 맥락을 관통하거나 횡단하는 방식으로 개연성을 확보하고 있다. 말하자면 큰 의미 없어 보이는 신 하나에도 철두철미한 계산이 담겨있다는 말인데, 그의 영화가 뒤로 갈 수 록 궁금증을 자아내는 것은 이 때문일 것이다.



1-2. 아는 것은 권력이다
“그런데 넌 아직 쿡(cook) 이지”

쉽게 얘기하자. 아는 것 혹은 정보는 힘이다. 그리고 그것은 권력이 된다. 영화에서 예준은 재문 부부에 대해 거의 모든 것을 알고 있다. 예준에 대한 의존도가 높을수록 그 힘은 시각화 되어 재문과 지숙의 일거수일투족을 꿰뚫게 된다. 이민에 대비한 영어교습을 위해, 사기당해 절망한 이들을 위로하고 희망을 주기 위해, 그리고 친구 아들을 보기위해 방문한 예준의 손바닥 위에 이들 부부가 있는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사건이 벌어지기 전까지 영화는 철저하게 예준의 시점에서 진행된다는 점이다. 이는 권력의 주체성과 무관하지 않다. 그러니까, 중반까지 드러나는 부부의 모든 일상이란 것이 실은 예준의 권력형성 과정에 대한 해설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것이 극단적으로 드러난 장면을 보자. 재문은 만삭인 아내와 섹스를 시도하던 중 예준의 전화를 받고 황급히 뛰쳐나간다. 감독은 둘의 우정이 얼마나 돈독한지를 알려주기 위해 이 장면을 넣었을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3자 시점을 택한 이 시퀀스의 관찰자는 관객인 동시에 예준이기도 한데, 이는 허망하게 깨진 섹스에 이어지는 포장마차에 앉은 두 남자를 비추는 카메라를 통해 예준의 권력이 부부의 침실까지 미치고 있음을 보여주려는 감독의 의도와 맞닿아 있다는 것이다. 만약 경제적 도움을 받지 않았다면 재문이 그 상황에서 나갔을까? 자신이 전화를 걸면 어떤 경우에라도 나올 것임을 예준은 알고 있었을 것이다. 힘의 불균형이 지속되는 한 그것은 우정이 아닌 권력관계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앞서 말했듯이 권력은 고정적이지 않고 이동하며 순환한다. 예준에게 있던 권력이 부부에게로 넘어가는 것은 꽁꽁 숨겨놓았던 일상이 공개되고서부터이다. 상대가 그의 실상을 알기 시작하면서 권력은 의심받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단 한 번도 예준의 사생활을 보여주지 않던 영화가 돌연 그의 집안을 훑는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특히 운동을 하는 그의 모습을 잡은 시퀀스는 감독의 의도가 드러난 중요한 대목인데, 거꾸로 매달린 채 TV를 통해 보는 영화가, 자본주의에 의해 무너져가는 핀란드 노동자의 삶을 그린 아키 카우리스마키의 1999년 작 <유하 JUHA>라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한편 재문이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예준의 집에 지숙의 출입이 가능했던 것은 친구의 아내가 아닌 유사 가족으로의 위상변경이 이루어졌기 때문일 테지만 무엇보다 지숙이 그를 알려고 노력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둘의 관계가 급속히 진전된 이후 지숙의 집과 재문의 가게에 방문하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인 것이다. 친구는 아내를 포기했고 그의 아내는 곧 내 여자가 될 터인 즉 권력이 미칠 대상과의 관계망이 모호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알아야 할 대상이 사라진 순간 자신도 상대의 대상으로 전락할 수 있음을 깨달았어야 했다. 바로! 예준이 실수를 범한 지점이다. 게다가 도덕성을 상실한 권력은 지속될 수 없는 법. 권력의 틈바구니에서 춤추던 예준이 한 순간에 몰락할 수밖에 없는 것도 도덕성에 흠집이 났기 때문이다. 그것은 감춰두었던 ‘진실’이 드러나면서 시작된다. 이제 권력은 진실을 알게 된 자의 손으로 다시 넘어가기 직전이다. 권력이란 소유물이 아닌 관계 속에서 만들어지고 이동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1-3. 진실은 권력이다
“낮에 별이 안 보인다고 없는 게 아니래”

그렇다면 권력은 무엇에 의존하여 힘을 얻게 되는가. 물론 수없이 많을 것이지만, 권력화의 과정에서 등장하는 것은 주류담론이다. 예컨대 ‘유신잔당 혹은 5공 세력은 부패와 수구의 상징이다’라든지 ‘요즘 세상에서 기침하고 살려면 성공해야 한다’든지 ‘386은 이 땅의 민주화에 중추적 역할을 했다’라든지. 등등 기타 등등, 이런 것들이다. 지난 세월 동안 무수한 사회 담론이 있어 왔지만 이 가운데 대중의 지지를 바탕으로 약간의 정치적 지원이 뒷받침되면 이러한 담론들은 주류담론이 되었고 그것은 권력을 만들어내곤 했다. 다름 아닌 진실의 힘이다. 즉 주류담론은 진실이 되었고 사람들은 진실 앞에 머리를 조아렸다. 진실이 권력이 되어버린 것이다.

영화로 돌아가면, 예준과 재문은 군대에서 처음 만난 이후 둘도 없는 친구관계를 유지해왔다. 이들의 관계는 사회로 나온 이후에도 계속되고 있는데, 영화의 시작인 결혼선물로 신혼 여행권을 주고 퇴근 후 친구 부부의 미국 이민을 돕기 위해 영어지도까지 하는 모습에 이르면 이 둘의 관계가 단순한 우정을 넘어서고 있음이 발견된다. 이들 사이의 권력으로 작용하는 ‘진실’은 무엇인가. “책을 다 읽고 나니까 네가 존경스럽기까지 하더라”는 재문의 말처럼 군대에서부터 이미 그들의 관계는 (인간은 평등하다던 예준의 주장과는 달리) 정신적 주종의 위치에 놓여 있었다. 한 때 운동권이었던 예준이 지금은 잘나가는 외환딜러로 변신했다는 급반전된 환경이 이를 잘 보여주고 있는데, 재문은 군 시절에는 정신적 스승이었고 사회에 나와서는 조건 없이 경제적 도움을 주는 그의 행동을 ‘평등’과 ‘진실’의 이름으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다만 재문과 지숙이 바라보는 ‘진실’은 다르다. 이를테면 재문이 지적소양과 시대의식으로 드러난 예준과의 우정을 모습을 진실이라고 생각한 반면, 지숙은 경제적 도우미로써 성공한 남자의 힘 있는 모습을 진실로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그러나 「진리란 당대 권력과 지식이 야합해 만들어낸 일시적 사고체계이다」라던 푸코의 말처럼 영원한 진실은 없는 법. 이제 그 진실의 봉인이 풀리는 순간, 진실을 매개로 권력을 얻고 앎을 유지했던 자는 추락하기 시작한다. 재문과 지숙이 예준에 대해 알게 된 까닭이다.



2. 우정과 일상의 권력 사이 어딘가에
“빈말이라도 미안하단 말 정도는 해줄 수 있잖아!”

세상에는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 혹은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로 사회를 구분 지었던 마르크스의 이론으로는 설명할 길이 없는 권력들이 있다. 다름 아닌 일상의 권력이다. 이를테면 동일계급 내에서의 불평등이라든지, 인권운동가가 자행하는 비인권적 사례라든지 유색인종 간 벌어지는 냉대와 멸시의 사례는 지배와 억압의 개념으로 설명하기 힘든 지배양식들이다. 나는 글의 서두에서 이 영화가 선명하게 구분지어진 계급투쟁의 대상으로서의 권력이 아닌 일상의 권력을 다루고 있다고 주장한 바 있다. 그렇다면 한 가지 의문. 난공불락으로 보였던 예준의 권력이 쉽사리 무너진 까닭은 무엇일까? 지숙에 대한 욕망에 눈이 멀어서인가? 아니면 욕망 앞에서 이성적 판단이 흐려졌기 때문인가. 그것은 그의 권력행사가 시대흐름에 역행했기 때문이다.

과거의 권력은 억압과 폭력을 일삼는 물리적 힘에 의존하는 한마디로 무식한 권력이었다. 하지만 현대의 권력은 무지하지도 않거니와 조직적이고 체계적으로 생산해낸 담론에 힘입어 권력의 정당성을 설득함으로써 적극적 지지자를 양산해낸다. 그러니까 내치고, 제외시키고, 금지하고, 주변부로 몰아내고, 억압하는 과거의 권력이 근대 이후를 기점으로 생산해내고 관찰하며 아는 권력, 스스로의 효과로부터 힘을 증식시키는 권력으로 변했다는 말이다. 이렇듯 네거티브에서 포지티브로 형질변경이 이루어진 근대 권력체계와는 정반대로 영화에서 예준의 권력 형태의 변화를 보면 포지티브에서 네거티브로 이동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미 언급했듯이 재문 부부에게 베푸는 다양한 호의로 인해 그들 스스로 마음과 일상을 내보일 때만 해도 예준의 권력은 큰 문제가 없어보였다. 하지만 불의의 사건 이후 그는 과거 권력의 형태로 역행하게 된다. 따라서 전근대적 권력의 양상을 띠며 퇴행하던 예준이 순식간에 몰락하는 것은 어쩌면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여기서 던지는 다른 질문. 그렇다면 재문과 지숙은 권력적인 것과 거리가 멀었을까? 천만에 말씀이다. ‘권력의 일상성’은 말 그대로 일상에 스며들어 부지불식간에 빚어지고 영향을 미치는 권력의 속성을 의미한다.(한나 아렌트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에서 밝힌 ‘악의 일상성’ 과도 일맥상통한다) 둘 역시 어느 시점을 통과하면서 권력을 쥐게 되는데, 말하자면 가해자의 죄책감을 담보로 잡은 권력이 그것이다. “너는 아직 셰프가 아닌 쿡”이라고 두 번 씩이나 위상을 정정해주는 예준의 말에 멋 적은 미소로 화답하던 재문이었다. 예준의 행동과 삶이 대단해 보였기에 무엇보다 존경해마지 않던 친구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출소하던 날 그는 “내가 뭐 죄 지었냐?”라며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더니 회사로 찾아가서는 “이런 거였어? 빈말이라도 미안하단 말 정도는 해줄 수 있잖아, 개새끼야!”라며 이전에는 상상 못할 말을 내뱉는다.

한편 절친한 우정에 걸맞지 않게 재문과 예준이 단 둘이 있는 장면은 의외로 적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재문이 자의로 예준을 만난 것은 단 한 번 밖에 없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포장마차에는 예준의 호출을 받아 나갔고, (공교롭게도)지숙이 파리로 떠난 후 집으로 찾아왔으며, 재문의 출소일에 예준이 마중 나왔지만 정작 재문이 먼저 움직이는 것은 지숙의 행방을 찾기 위해 회사로 찾아가 다툼을 벌이는 한 장면뿐이라는 것이다. 이는 권력관계에서 우위를 점하는 자는 먼저 청하는 쪽이 아니라 초대 받는 쪽이며 찾아 가는 쪽이 아니라 앉아서 맞는 쪽임을 방증한다. 그러므로 예준의 허락 없이 재문이 찾아왔다는 것은 이미 둘의 권력관계에 이상 징후가 보임을 말해주는 것인 동시에 동등한 위치로 재편되고 있음을 암시하는 것이다. 물론 그 징후의 시발은 예준이 저지른 사고(법적 책임+윤리적 과실+인간적 배신)에서 시작된다. 이것은 재문 뿐 아니라 지숙에게도 똑같이 적용된다. 다만 삼자 격인 지숙의 경우는 위치의 뒤바꿈이 더 잦을 따름이다. 미국에서 돌아온 그녀가 예준에게 헤어 숍 개업 사실을 알려준 이후, 예준이 개업식에 참석하고, 다시 지숙이 그를 찾아 투자 상담을 하며 그 다음은 예준이 미용실 밖에서 기다리는 식이다. 바야흐로 일상적 권력은 충돌직전에 이르렀다.





3. 자기중심적 집단성의 아이러니
“이것들이 다, 누구 덕에 살고 있는데!”

좀 위험한 발언이지만 한국 사람처럼 자기중심적이고 집단성이 강한 이들도 드물 것이다. 그러니까 어떤 상황과 현상에 대하여 마치 자기 손으로 모든 것을 일군 양 거들먹거리기 일쑤라는 말인데, 예컨대 이 땅에 민주 정부가 세워졌을 때 소위 민주세력들은 저마다 자기들만이 민주화를 부르짖었고 그로 인해 핍박 받은 양 우쭐거리며 전리품의 당연 소유를 주장했다. 이후 권력의 언저리를 배회하던 60년대 생들 또한 민주화운동 경력을 앞세워 한 몫 잡겠다는 심산을 부렸으니 모두가 자기중심적 사고에서 발로한 것들이다. 또 순전히 개인적 행위에 불과함에도 이를 집단의 이름으로 둔갑시켜 명분을 얻으려는 일이 비일비재할뿐더러 그것에 눈감아 주는 사례도 허다하다. 소소한 개인의 문제를 거대한 사회담론으로 키워가는 능력에 있어 우리 국민만큼 탁월한 재능을 보이는 민족은 드물다는 것이다. 엄연한 개인의 범죄행위를 마치 커다란 음모의 희생양인 양 본질을 호도하는 것도 이러한 특성에 기인하고, 의외로 쉽사리 이에 동조하는 국민정서 또한 동일 선상에 있음을 대변하고 있다. 예컨대 민주당에서마저 뜨거운 감자가 되어버린 김민석의 (야당탄압, 공작정치) 발언은 실로 놀랍기 짝이 없다. 1985년 미국문화원을 점거하고 태극기를 흔들던 그 때의 결기는 어디로 가고, 뼛속까지 물든 노회한 정치인의 모습으로 둔갑해버렸는지 씁쓸할 따름이다. 촛불의 의미를 깨닫지 못하는 게 이명박 정부만이 아님을 만천하에 알리고 싶었던 것일까? 비아냥 대는 것인가? 그렇다. 나는 지금 신동일의 영화를 보면서 그 속에 등장하는 예준과 재문을 보면서 이 시대를 관류해온 집단중심주의의 허구성을 비꼬는 것이다.

영화의 후반, 아침을 먹던 예준은 숟가락을 집어던지며 말한다. “이것들이 다 누구 덕에 살고 있는데!” 혹자는 이 대사를 놓고 386을 비롯한 민주화세력의 시대착오적 사고를 극명하게 표현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렇게 볼 수도 있으나 내 견해는 다르다. 영화 초반 보여 지는 예준의 모습은 학생운동권의 순수한 동지애에 다름 아니었다. 그러나 후반부로 갈 수 록 욕망과 권력에의 집착을 보임으로써 오히려 독재정권 즉, 과거 자신들이 타도대상으로 삼았던 집단과 닮아가고 있음이 발견된다. 이것이 비단 영화 속 이야기에 국한되지 않음은 설명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집단의 이름으로 자행돼 온 이중적 행동양식과 계급 속의 계급이 빚어낸 아이러니를 보여주고자 한 감독의 연출이 만들어낸 의미심장한 장면이다. 같은 맥락으로 <나의 친구, 그의 아내>를 386의 자기반성으로 읽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감독의 중의적 시선을 제쳐놓은 채 운동권에 대한 비판적 성찰에만 함몰되는 것은 담론의 가능성을 조기 봉쇄한다는 점에서 우려스럽다. 영화 속 이야기는 사실 사회 모든 분야, 집단을 막론하고 벌어지는 공통적 현상일 뿐 아니라 영화마저도 예준이 타락한 운동권을 상징하는 인물이 아닌 권력과 욕망에 포획된 한 인간일 뿐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4. ‘가족 로망스’ 와 여성
“우리 셋이 같이 살까?”

영화의 오프닝으로 돌아가자. 그러니까 신혼여행 첫날밤 예준과의 통화 도중 태연하게 내뱉던 말. “지금? 그래 와. 같이 자면 되지 뭐” 그러나 이 말은 아내와 자식을 희생시킨 남자들의 연대를 향한 여성의 되물음으로 돌려지게 될 것이다.

단언컨대 한국사회에서 가족만큼 문제적이고도 신성한 집단은 없다. 모든 희생을 감수하게 만드는 명령어인 동시에 개인적 쾌락의 절제를 요구할 수 있는 준엄한 이름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가족’이다. 그러므로 가족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라도 할 수 있고, 가족의 이름으로 명명되어지는 행위는 어떤 가치관보다 높은 위치에 자리한다. 그러나 가족도 못 말리는 것이 우정이다. ‘친구 따라 강남 간다’는 말이 있듯이 때론 가족보다 친구가 가깝고 허물없기 마련인데, 빚보증을 잘 못 서서 가산을 탕진해도 친구를 위해서라면 후회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이들이 내세우는 논리는 핏줄보다 진한 우정일 터이다. 재문은 예준에게 “우리 부부가 너 좋아는 거 알지? 지숙이나 나나 널 친구 이상으로”생각한다고 말한다. 아이가 태어났을 때 가장 먼저 전화를 거는 대상도 예준이고, 재문이 사기당해 미국에 갈 수 없게 되었을 때, “내가 마련해볼게, 그 정도는 가능할거”라며 부부를 절망에서 구원해주는 것도 예준이다. 그러니 상투적이긴 해도 “내가 더 좋아? 예준씨가 더 좋아?”라고 묻는 것도 무리가 아닐 터이다. 그런데 이 우정이라는 것이 마냥 순수하고 아름다운 것일까? 이를테면 우정을 작동시키는 것 중에는 베푸는 자의 은혜와 수혜자의 고마움이 뒤엉켜 묘한 권력체계를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문제는 남자들의 우정 속에서 신음하는 것이 철저하게 제 삼자로 밀려난 여성이고 아내라는 점이다. 따라서 이때 두 남자 사이에 서있는 지숙은 둘을 연결하는 고리인 동시에 권력에의 욕망을 추동하는 메타포로 작용한다. 그러므로 영화 속 인물 중에서 내가 눈여겨 본 것은 재문도 예준도 아닌 지숙이다. 그렇다면 그녀는 어떻게 기능하는가.

역사학자인 린 헌트 Lynn Hunt 는 이러한 심리학적 개념을 신문화사적으로 응용하여 자신의 저서 『프랑스혁명의 가족 로망스』를 통해 “혁명기 정치의 밑바닥에 깔려있는 가족적 질서에 대한 집단적이고 무의식적인 상”을 지칭하는 의미로 전환시키게 된다. 그녀에 따르면 프랑스 혁명은 가부장제로부터의 탈출에서 발로된 상상력이 정치적 행동으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그러나 혁명의 결과는 안정된 공화국이 아닌 공포정치를 낳기에 이르고, 결국 또다시 새로운 아버지를 찾아내어 잃어버린 가족로망스를 되찾기 위한 노력이 아비를 폐한 자들 손에 의해 이루어짐으로써 혁명의 정통성은 손상된다. 우리가 프랑스 혁명과 가족로망스를 거론할 때 간과해서 안 될 것은, 이 위대한 시민혁명이 철저하게 남성들 주도하에 이루어졌으며 이들 남성연대는 루이 16세의 왕비인 마리 앙투아네트로 상징되는 여성들을 희생제의 도구로 전락시키거나 권력의 중심에서 더욱 멀어지도록 강제했다는 점이다. 이것은 근대 시민사회의 결정적 특징을 “남성으로서의 인간(men), 형제로서의 인간에 여성이 복종하게 된 것” 으로 보았던 캐롤 페이트먼 Carole Pateman 의 주장을 뒷받침하고 있다.

「프랑스 혁명에서 아버지를 죽인 자들이 아버지 없는 콩가루 집안을 형제애를 통해 통합하고자 했다면, 가정 내에서의 자기 역할보다는 사회적 출세를 우선시 했던 한국의 아저씨들과 그들로부터 버림받았던 아줌마들은 밖에서의 연애를 통해 ‘가족 로망스’를 충족시키고자 했다. 혁명 후 형제애를 근간으로 하는 사회계약을 통해 공화국을 건설함으로써 여성을 정치와 사회에서 배제시켰던 것이 프랑스식 ‘가족 로망스’라면, 이에 비해 1990년 후반의 한국인들은 이른바 하나의 ‘연애 공화국’을 추구했기 때문에 한국의 ‘가족 로망스’는 페미니즘을 신장시키는 결과를 가져왔지만, IMF 위기와 함께 이러한 ‘연애 공화국’도 파산을 맞이하게 된다. 요컨대 프랑스의 ‘가족 로망스’는 혁명을 통해 공화국을 건설했지만 혁명의 좌절을 통해서 역사의 나침반을 상실했고, 오직 살아남기 위해서 대체적 아버지와 가족을 동경했던 한국의 ‘가족 로망스’는 사회를 병들게 하고 말았다.」 (註)

제 아무리 대단한 우정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가족의 영역으로 들어오기 시작하면 상황은 달라진다. 너무나 가까워서 오히려 불편한 관계들. 일일이 예를 들 필요도 없을 듯하다. 더욱이 재문의 경우처럼 정신적 물질적으로 예속된 채 오랫동안 지속된 관계라면 가족은 이미 삶의 긴장감을 요구하는 대상에서 멀어졌을 것이다. 따라서 신동일은 권력의 탈을 뒤집어쓰고 태연하게 존속되는 남성들의 굴절된 우정의 대항마로 여성인 지숙을 전면에 내세우기 시작한다. 바야흐로 아내의 반란을 통한 권력의 전복이요 느와르 풍의 여성복수극인 동시에 신성가족의 회복을 꿈꾸는 자를 위한 헌사에 다름 아니다. 그리하여 영화 시작 남편이 내뱉은 말을 마무리 짓는 아내의 마지막 대사. “우리 셋이 같이 살까?”

특별히 언급할 것은, 한국사회의 가족로망스가 그려낸 지옥도에 몸을 담근 채, 천당과 지옥을 오가는 남자들에도 아랑곳 않고 시종 담담한 표정으로 지숙을 연기한 홍소희의 발견은 <나의 친구, 그의 아내>가 찾아낸 최고의 수확이라 하겠다.


5. 평범해서 놓치기 쉬운 몇 가지 것들

이제 우리는 감독의 전작 <방문자>의 마지막 장면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러니까 깐깐한 대학 강사 호준이 군사독재시대로 상징화된 푯말을 뽑고 자기 신발을 땅에 묻을 때 들려오던 망치소리를 기억해야 한다는 말이다. 전작에서 양심적 병역거부자인 계상이 망치를 들어 호준을 구했다는 사실도 기억하자. <방문자>에서 망치는 닫힌 문을 열고 호준을 살렸으며 박제된 이데올로기를 매장시키는 도구로 사용되었음을 말이다. 감독은 <나의 친구, 그의 아내>의 마지막, 가위소리를 들려준다. 이는 신동일의 영화가 스토리에만 치중하고 있지 않음을 알려주는 대목이다. 인물들 간 대사와 심리묘사를 통해 내러티브에 치중한 듯 보이지만 치밀한 연출력에서 비롯된 미장센 또한 놓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몇 개의 장면을 기억해보자. 먼저 지숙과 두 사내가 헤어 숍 계단에서 담배피우는 장면을 꼽을 수 있다. 이 신은 구도와 색감에 있어 전혀 다른 영화를 보는 듯한 느낌마저 자아내는 데, 이는 숨 쉴 틈조차 없이 달려온 이야기를 슬그머니 내려놓으며 한 템포 쉬어가게 만드는 효과를 만들어낸다. 또 포말처럼 맺혔다 떨어지기를 반복하는 빗방울 가득한 창가에 서서 누군가를 기다리는 여주인공을 잡은 앙각 숏은 아름답고 처연하면서 몽환적인 분위기마저 자아낸다.

특별히 반복적인 장면들이 여럿 등장하고, 게다가 그것들이 모두 세 번 반복되고 있다는 점은 흥미롭다. 예컨대 천장 모서리를 보여주는 장면의 경우 지숙이 재문을 찾아왔을 때의 치킨 집 천장과 지숙이 바에서 만난 남자와 묵은 객실 천장과 그리고 불타는 헤어숍의 천장이 그것인데, 이를 두고 본지 스태프 이영은 「세 번의 천정은 경제적 불평등을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고 하늘 아래 모든 것은 ‘높아 봤자’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고 주장한 바 있으니, 적절한 지적이라 하겠다. 또한 인물들의 관계가 자본에 의해 일그러졌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통장’ 역시 세 번 등장하고 있는데, 예준이 지숙에게 건넸고, 지숙이 재문에게 확인받았으며 예준이 바닷가에서 재문에게 넘겨주려했던 통장이 그것들이다. 끝으로 부부의 소망을 상징화한 ‘비행기’ 역시 세 차례 등장한다.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횟수가 거듭될수록 비행기의 크기가 줄어든다는 점인데, 이는 현실과 꿈 사이의 거리를 상징화한 설정이라 볼 수 있다. 그러니까 첫 번째는 식당 창가에 선 재문이 큰 형체의 비행기를 바라보고 있다는 점에서 실현 가능한 꿈을 대변하는 반면, 지숙이 파리로 떠났을 때 장바구니를 든 재문의 머리 위로 날아가는 작은 비행기는 현실에서 멀어져버린 꿈을 보여주고 있으며, 지숙이 언덕길을 오를 때 들리는 (형체조차 사라진)비행기 소리는 부부의 꿈은 물론 가족 관계마저 위태롭게 됨을 암시하고 있다.

무엇보다 나는 특정 시점마다 경사진 장소에 놓인 인물을 바라보는 카메라의 위치에 주목한다. 흥미롭게도 감독은 상황 변화에 따라 경사진 곳을 배경으로 인물을 배치하면서도 카메라의 실제 위치는 평각을 유지하도록 만듦으로써 일관된 세계관을 드러내고 있다. 이를테면 영화 초반 영어수업을 마친 세 사람이 걸어 내려올 때, 아이를 안은 재문이 장바구니를 들고 계단을 올라갈 때, 예준이 허겁지겁 어둠 속으로 사라질 때, 지숙이 언덕을 걸어갈 때, 상황이 종료된 후 지숙이 맨발로 걸어갈 때에 프레임에 담기는 것은 인물만이 아니라 그 위에 펼쳐진 지상의 공간들도 어김없이 포함되어 있는 데, 이처럼 인물은 경사진 곳을 내려가거나 올라가고 있지만 정작 카메라의 프레임은 하나 같이 수평각으로 잡힌 풍경의 일부로 인물을 인식한다는 것이다. 무수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음에도 결국 사람 사는 세상 특별할 게 없다는 것을 감독은 말하려는 것 아닐까? 마치 이것이 삶이고 당신도 일상의 권력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을 말이다.




물론 장점만 드러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많은 부분에서 아쉬운 점이 노출되고 있다. 대표적인 것은 개봉에 맞춰 잘라냈다고는 하지만 러닝타임은 여전히 길게 느껴진다는 점이다. 이는 전반적으로 정적인 장면이 많은 때문으로 보인다. 이를테면 특정 상황에 이르기 위한 인물들의 계속된 이동이 병행되었던 <방문자>와는 달리, <나의 친구, 그의 아내>는 시퀀스와 시퀀스사이의 이동과정이 생략되고 있다는 것이다. 가령 이런 식이다. 지숙이 “나 갑자기 통닭 먹고 싶어”라고 하자 이내 닭을 먹는 장면으로 바뀌고 “밥이나 먹자”고 하면 식당에 앉은 두 사람이 보이며, “바람이나 좀 쐴까?”라고 하자 바닷가 장면으로 이동한다. 동선을 생략하고자 한 감독의 의도를 모르는 바 아니나, 인물의 심리묘사에 많은 분량이 할애된 것과 비교한다면 지나치게 정적이라는 것이고 그것은 곧 지루함을 유발할 수도 있다는 말이다. 시간 안배에 좀 더 치밀한 고민이 있기를 당부하고 싶다.

지금까지 살펴보았듯이 <나의 친구, 그의 아내>는 우연한 사고로 벌어진 진실과 운명의 실타래가 세 남녀의 삶을 걷잡을 수 없도록 흔들어 놓는 동안, 친밀한 관계망이 어떻게 무너지고 다시 회복되는가를 인물들의 내면변화에 초점을 맞춰 그려낸 영화이다. 그 속에는 한 시대를 호령했던 사회문화 담론과 권력이데올로기가 부상했다 침잠하기를 반복한다. 영화는 권력관계에 대한 세밀하고 빛나는 성찰이 깃들어 있는 동시에 우리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각종 권력을 쥔 자들의 허위와 이중성, 즉 권력의 일상성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기도 하다.


6. 닫으면서

지난 몇 년 간 한국영화계가 천착해온 소재주의를 탈피하고자 노력한 흔적이 보인다는 점만으로도 <나의 친구, 그의 아내>는 그 의미를 지닌다. 그간 상업영화들은 ‘세대론’에 대하여 애써 무심한 태도를 보인 것이 사실이다. 독립영화 역시 계급과 계층에 대한 이야기를 숱하게 다뤄왔으되 본격적으로 세대론을 들고 나온 예는 흔치 않다. 이를테면 가부장, 구세대, 보수 등으로 상징화된 ‘아버지 담론’에 치중하느라 대항적 의미를 지닌 세대가 안고 있는 현실적 한계를 짚어내는 데 실패했다면, 신동일의 장편 연작은 중심인물의 세대론적 성격을 명확하게 규정함으로써 뼈아픈 자기반성과 희망을 동시에 보여주려 했다는 것이다. <나의 친구, 그의 아내>가 2006년, 그러니까 참여정부와 386으로 상징되는 운동권에 대한 대중의 피로감이 극에 달한 시점에 제작되었다는 점은, 자신 역시 386 후반세대인 감독의 시선이 어디에 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는 말이다.

<나의 친구, 그의 아내>는 전작 <방문자>와는 사뭇 다른 형식을 취하는 작품이다. 엄격하게 말하자면 호불호가 극명하게 갈릴 만한 지점이 도처에 매복되어 있기도 하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신동일의 고집스러운 시선이 흔들림 없이 두 영화에 깃들어있다는 사실이다. 나는 이것이 중요하다고 본다. 속살거림과는 거리가 먼 주인공들을 통해서 진짜배기 삶을 이야기하고, 인간관계에 영향을 미치는 사회적 문제들을 날카롭게 짚어내는 것이 그의 영화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신동일의 영화 속에는 인간에 대한 무한애정이 깃들어있다는 점에서 벗 삼아 지켜볼 가치를 지닌다.

모름지기 분출하는 힘을 붙잡아서 진정한 작품을 만들 수 있는 사람만이 대가의 반열에 오를 수 있다. 위대한 작품은 이성이 분별없는 환상을 누르고, 형식이 소재를 누르며, 천국이 지옥을 누른다. 권력관계에 대한 세밀하고 빛나는 성찰을 촘촘하게 엮어낸 감독에게 박수를 보낸다.



(註: 졸고 「[가족의 탄생] 한국영화가 가족주의를 그려내는 방식에 대하여」 재인용 (네오이마주 2006. 6. 2)





2006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우연찮게 만나 놀라움을 안겨주었던 <나의 친구, 그의 아내>가 드디어 27일 개봉한다. 우여곡절이야 어찌됐건 스크린에서 만나게 된 것을 감사하며. 종잡을 수 없는, 이 변태기질 다분한 예고편에 푹 빠져보시라. 그리고 27일 모두 극장으로 고고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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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건영


아무래도 촬영장을 한 번 다녀와야 될 것 같았다. 이미 다른 매체들이 취재해 기사화되었고 우리 역시 꽤 많은 분량의 원고를 준비해놓은 상태였음에도 직접 눈으로 봐야 속이 시원할 것만 같았다는 말이다. 혹여 방해가 되지나 않을까 걱정되어 완곡하게 의사를 타진하니 뜻밖의 답이 날아왔다. “거두절미하고, 일요일 날 아예 (카메오)출연하시죠....신 대표의 비즈니스 파트너가 필요합니다.” 젠장. 난 그냥 촬영장에 찾아가 덕담이나 몇 마디 던지고 오려고 했는데, 이게 웬 날벼락이람. 일찍이 김훈의 『칼의 노래』가 「한국문학의 벼락같은 축복」이라는 문단의 평가를 받았듯이, 까짓것 나라고 ‘한국영화 카메오계의 벼락같은 축복’이 되지 말란 법이 있겠느냐는(그러니까 제 정신이 아니었다는 얘기다) 말도 안 되는 호기를 부리며 촬영장소인 대학로의 어느 카페로 향했다. 그로부터 4시간 쯤 흐른 후.

이런 경우를 두고 사서 고생한다고 말하던가? “배우가 너무 컵을 일찍 잡은 것 같아. 애초에 컵을 깨기로 작심한 것처럼 보이면 곤란할 텐데.” 진짜로 무심코 던진 말이었다. 하지만 그 장면이 허술해 보이는 것은 분명했다. 극의 흐름 상 그래서는 안 될 것 같았다. 모니터를 보던 감독이 조감독을 호출해 다시 찍을 것을 지시하는 순간, 아차! 싶었다. 준비한 소품용 설탕 컵이 3개라고 하지 않았던가. 하필 세 번째 테이크에서 이런 일이 발생하다니. 스태프의 움직임이 분주해질수록 나는 ‘이게 다 좋은 영화를 위해서야. 귀찮아도 다시 찍으면 훨씬 그럴싸한 그림이 잡힐게 틀림없어’라 자꾸 되뇌고 있었다. 비록 내 발언으로 인해 벌어진 일이지만 눈총이 두렵지도 않았고 눈총을 주는 사람도 없었다. 누구하나 불평 없이 자기자리를 잡고 재촬영을 준비하기 시작했다는 말이다. 컵 대신 주먹으로 치는 것으로 설정을 바꾸자 소품 걱정은 사라졌다. 하지만 바뀐 설정에 따라 몇 차례의 테스트가 다시 이어져야 했다.

곧이어 재개된 촬영. 그런데 도무지 감독은 오케이 사인을 낼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몇 번의 리허설을 거친 후 슛에 들어가도 만족할 만한 장면 하나를 얻기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닌 마당에, 다 찍었다 싶은 신을 처음부터 다시 찍어야 하는 배우와 스태프, 또 감독의 심정이야 오죽할까. 배우의 동선이 맞지 않아 한 번, 배우 배에 그림자가 비춰서 또 한 번, 오버액션 때문에 다시 한 번. “다시 가겠습니다” 조감독의 목소리가 이어질 때마다 분주하게 움직이는 스태프들. 그럼에도 감독은 직접 나서는 법이 거의 없었다. 그저 모니터를 주시하다가 가끔 한 번씩 나타나서는 연기에 대해 몇 마디 의견을 내놓거나 하는 것이 전부였다. 그는 하루 종일 그랬다. 현장은 전적으로 조감독에 맡겨져 있었다. 조급해하기는커녕 무엇을 하고 무엇을 말아야 할지를 명확하게 알고 있다는 것, 이것만큼 감독에게 필요한 덕목은 또 없을 터이다. 일찍이 이탈리아의 감독들, 그러니까 비스콘티와 파솔리니가 그랬고 그리고 베르톨루치가 배우에게 그러했던 것처럼. 그는 배우에게 어떤 지시도 주문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번 신이 어떤 연유로 해서 벌어진 것이고 어떤 이야기로 연결될 것인지를 이해시키는 데 주력했다. 촬영감독과도 프레임에 대해 의견을 나누는 정도면 족해보였다. 반복촬영을 최대한 절제한 채 촬영감독의 의견을 절대적으로 존중하는 태도에서, 무표정함으로 일관하는 그의 카리스마에서 나는 기타노 다케시를 떠올렸다.

끝이 보이지 않던 촬영에 제동을 건 건 엉뚱하게도 빛이었다. 해가 저물어가기 시작하면서 조명등으로 감당할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영화에서 빛이란 얼마나 중요한가. 결국 5번의 테이크 만에 오케이 사인이 나왔다. 그러나 감독의 표정은 밝지 않았다. 왜 안 그렇겠는가. 묵묵히 담배를 입에 문 감독의 지친 표정 위로 고뇌가 배어나온다. 돈과 시간과의 싸움을 지배하지 못하고 타협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아쉬움의 다름 아닐 테다. 곁에서 눈치를 챘는지 “한 번 더 가시 던지요”라고 촬영감독이 거든다. 말만으로도 고맙기 그지없지만 말처럼 그게 어디 쉬운 일인가. 촬영, 분장, 조명, 동시녹음, 편집 등등의 분업화된 스태프의 협조와 4시간 가깝게 숨소리도 내지 못하고 자리를 지켜야 했던 보조출연자와 배우들을 생각하면 감독 욕심을 앞세우기가 쉽지만은 않을 터. 연출부의 촬영 정리에 이어 기계와 장비들이 하나 둘씩 엘리베이터에 오르면서 하루는 그렇게 마무리되고 있었다. 생면부지인 나를 사람 좋은 웃음으로 편안하게 대해준 정동규씨(나홍진의 <추격자>에서 시장 역할을 맡았던 배우다)와 사소한 것까지 신경써준 스태프들과 아쉬운 인사를 나누고는 서둘러 자리를 떴다. 알 만한 사람은 벌써 눈치 챘겠지만, 이건 신동일 감독의 <반두비> 촬영장을 찾은 후 써내려간 사적단상이다.

신동일의 세 번째 장편 <반두비>의 촬영이 막바지에 접어들었다. 벵골어로 ‘참 좋은 친구’라는 뜻의 <반두비>는 이주노동자와 여고생 간의 수상쩍은 로맨스를 통해 한국의 사회시스템 전반을 진단해나가는 독특하고 진중하며 경쾌한 영화다. 예정대로라면 9월 24일 경 크랭크업을 하게 된다. 두 번째 장편의 개봉 불발을 딛고 와신상담한 작품이니만큼, 스태프들의 유기적인 협조와 노력이 보태진 만큼 좋은 영화가 나올 것으로 확신한다. 한 가지 주목할 것은, 이 영화를 위해 <반두비 제작위원회>가 구성되어있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이 제작위원회라는 것은, 투자 제작 배급을 수행해온 전문 집단이 삼각편대를 이룬 후 유기적으로 협력하여 투자부터 개봉까지를 관장하는 독립영화의 실험적 제작시스템을 말한다. 2007년 윤성호 감독의 <은하해방전선>이 그 효시였으니 신동일의 <반두비>는 두 번째 수혜자가 된 셈이다. 이미 2008 상반기 독립영화제작 지원작에 선정된 바 있고, 독립영화배급의 메카인 인디스토리가 배급. 마케팅을 맡았다는 사실은, 적어도 개봉 걱정은 안 해도 된다는 점에서 의미하는 바가 크다. 주인공인 방글라데시 출신의 이주노동자이자 미디어활동가인 마붑 알엄과 CF모델 출신의 신인 백진희 사이의 수상쩍은 로맨스, 혹은 박혁권과 이일화가 다른 한 축을 이뤄 펼쳐내는 닭살 돋는 사랑 놀음이 궁금하지 않은가? 그래도 조금만 기다리시라.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반두비>는 후반작업을 거친 후 내년 초 반드시! 여러분과 만나게 될 것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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