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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바다만큼, 빛나던 영화들

필진 리뷰 2009.10.17 22:19 Posted by woodyh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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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연하

부산에 온 지 4일째가 되어 가는데, 매일 세 편의 영화씩을 챙겨 보느라 미처 글로 정리할 시간을 내지 못하였다. 햇살을 머금은 바다가 반짝이고 어두운 밤바다 위의 오징어 배들도 반짝이는 부산, 열심히 즐겁게 보고 있는 영화들도 흥분하리만치 반짝이는 영화들이 많다. 어제는 처음으로 하루 네 편의 영화를 보았는데, 네 편 다 형식의 새로움과 가슴이 움직이는 장면들을 발견할 수 있어 놀랐다.

김정(김소영) 감독의 <경> 과 정성일 감독의 <카페 느와르>를 쓰기에는 내게 조금의 시간이 더 필요하다. 당장 쓰고 싶어지는 영화는 지난 5월 전주영화제에서 발견한 감독 라야 마틴의 <인디펜던시아>와 로카르노 영화제 감독상 수상작인 <탬버린, 드럼>이었다. 다음 영화까지 남은 한 시간, 짧게나마 정리하고 싶어 컴퓨터 앞에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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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디펜던시아>

근원을 알 수 없는 총탄의 굉음이 들리는 가운데 어머니와 아들은 숲 속으로 도망친다. 아들은 다른 여자와 결혼하여 아이를 낳고 가족을 꾸려 살아간다. 그들은 보이지 않는 적에 대해 이야기하며 두려워한다. 때때로 숲은 비바람이 휘몰아치고 이상기후를 보이는데, 감독은 이 폭풍우를 마치 세상의 종말처럼 음산하고 폭발적으로 연출해 낸다. 그 비바람의 강도가 너무나 거세고 그 분위기를 표현해 내는데 많은 쇼트들을 할애하기 때문에, 이건 뭔가 다른 거대한 현상의 은유가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어린 아들은 잠시 사라졌다가 집에 돌아와서 금빛 머리와 빛나는 몸을 가진 무서운 남자들을 보았다고 말한다. 마지막 대 폭풍이 불어 닥치고 아버지와 어머니가 죽어갈 때, 드디어 관객의 눈앞에 노란 머리의 백인 군인들이 나타난다. 이들은 어린 아들이 도망치자 그에게 총을 쏜다. 흑백으로 진행되던 영화는 아들이 절벽에서 뛰어내리자 하늘을 붉게 물들이며 끝이 난다.

이제 우리는 저 폭풍우가 무엇을 은유하는지 알 수 있다. 라야 마틴은 영화 중간, 필리핀이라는 국가를 설명하는 오래된 뉴스릴 필름을 모방하여 삽입한다. 필리핀이라는 커다란 숲은 적에 의해 어두운 강점기를 겪었다. 필리핀의 영 제너레이션 (Young Generation) 라야 마틴은 자신이 태어나기 전의 그 시대를 기억하기 위해 이 영화를 만들었다. 이 태도가 그를 진정한 영 제너레이션으로 우뚝 서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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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탬버린, 드럼>

이 영화를 일컬어 ‘가난한 어른들의 초상’ 이라 부르고 싶다. 경제적으로 너무도 궁핍한 90년대의 러시아에서 중년여성 카티야는 도서관 사서로 일하며 살아간다. 냉소적인 면모의 그녀에게는 비밀이 하나 있다. 때때로 도서관의 책들을 훔쳐 기차역의 사람들에게 내다 팔고 그 돈으로 빵과 감자를 사는 것. 어느 날 그녀에게 우연처럼 ‘또 다른 가난한 어른’인 한 남자가 찾아온다. 그들은 사랑을 나누고 카티야의 집에서 함께 지낸다. 하지만 남자는 카티야의 비밀을 알고 난 후 그녀를 떠난다.

줄거리 나열로는 이 영화의 매력과 성취에 대해 반도 전달할 수 없을 것이다. 몸과 마음이 가난한 어른들은 시종일관 속내를 털어놓기 보다는 매사에 냉소적이다. 이 냉소는 비판적으로 날이 선 냉소가 아니라, 오랜 세월이 그들에게 새겨놓은 체념에 가깝다. 감독은 문어체적이고 앞뒤 문맥이 잘 맞지 않는 대사들을 인물들에게 부여하는데, 때때로 그것들은 역설적이게도 가장 직접적으로 그들의 고통을 우리에게 전달한다. 동시에 이 영화만의 독특한 아우라를 이루어 낸다. 영화는 잔인하다. 현실적으로도, 심정적으로도 더 이상 갈 곳 없는 이 중년의 어른들을 끝까지 밀어붙인다. 묘하게 연극적인 프레임이 인물들의 뒷모습을 따라 길게 트래킹할 때, 그들의 뒷모습은 고독하며 불안하다. 무엇보다, ‘변명하지 않는’ 카티야의 모습들이 한없이 내 마음을 울린다.










 

PIFF, 시간에 관한 짧은 기억

필진 리뷰 2009.10.17 22:08 Posted by woodyh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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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석중


금요일, 하루 업무를 마치고 KTX를 타고 부랴부랴 부산엘 내려갔다. 부산에 내려서는 이미 한 밤중이었다. 부산역에는 기념 삼아 사진 촬영을 하는, 아마도 부산 국제 영화제를 보기 위해 내려온 듯한 사람들이 여기저기 눈에 띄었다. 지하철을 타고 해운대로 이동했다. 서울의 지하철 보다 조금 폭이 좁은 편이라 자리에 앉으면 건너편의 사람의 무릎이 닿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잠시 해운대 바닷가를 서성이다가 숙소로 들어갔다.

이번 부산 국제 영화제에 가기로 결심한 것은 딱 한 작품 때문이었다. 바로 정성일 감독의 <카페 느와르>를 보는 것이 목적이었다. 그러나 프레스 카드로 아침 일찍 티켓을 구해야하는데 쉽지는 않은 상황이었다. 이미 온라인으론 예매가 끝난 상황이고, 현장에도 얼마나 티켓이 남아있는지 알 수 없었다. 다른 영화는 못 보아도 <카페 느와르> 만큼은 꼭 보아야겠다고 결심하고 내려왔지만, 볼 수 있을지 어떨지도 불분명한 상황이었다. 결론 부터 이야기하자면 ‘기어코’ <카페 느와르>를 볼 수 있었다.

이번 부산에서 본 영화는 순서대로, <경>, <낙원은 서쪽이다>, <카페 느와르>, <익사일> 이다. 뭐랄까 굉장히 불균질한 컬렉션인 것 같다. 사실 영화제를 여기저기 쫒아다니면서 영화를 챙겨 보는 성격은 아니다. 지금 꼭 보지 못하면 안된다. 이런 종류의 감정을 느끼기 시작하면 오히려 그것에 억눌린 기분 그 자체를 부담스럽게 생각하는 성격 탓인 것 같다. 그저 게으른 것일지도 모르고.

김 정 감독의 <경 Viewfinder>은 영화평론가인 김소영 교수의 장편 데뷔작이다. 집을 나간 (혹은 독립하기 위해 집을 떠난) 동생을 찾아 나서는 여자의 이야기를 축으로, 낡은 휴게소를 오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씨줄과 날줄로 엮어낸 영화이다. 이 영화에서 보게되는 상징 같은 것들은 굉장히 직접적으로 드러난 채로 제시가 된다. 예를 들자면 이런 것이다. 언니의 이름은 전경이고, 동생의 이름은 후경이다. 휴게소에서 전전하는 남자의 이름은 창(window)이다. 남자는 자신을 디지털 퇴마사, 또는 디지털 탐정으로 소개한다. 누구든, 무엇이든 인터넷을 통해 찾을 수 있다고 한다.

개인적으로 모든 영화는 탐정영화라고 생각하는 쪽이다. 장르로서의 탐정이 아닌 행동과 결과로서의 탐정영화 말이다. 거의 모든 영화의 내러티브는 상실로 시작되고 그 상실을 수복하는 과정을 보여주거나 그 수복의 결과를 제시한다. <경> 역시 동생을 찾아 길을 떠나는 언니의 이야기를 보여주는데. 사실 이러한 탐색의 과정은 이 영화의 맥거핀에 가깝다. <경>이 보여주려는 것은 언니가 기어코 동생을 찾아 내고 서로의 관계를 수복했다. 는 결론이 아니다. <경>을 통해서 볼 수 있는 것은 일종의 시간의 퇴적층 같은 것들이다. <경>에서 ‘중첩’이라는 개념은 굉장히 중요하다. 과거와 현재, 실재와 환영, 이 모든 것들이 남강이라는 오래되고 낡은 휴게소를 동심원처럼 떠도는 인물들을 통해 보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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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스타 가브라스의 <낙원은 서쪽이다>는 로드무비 형식의 블랙 코미디다. 정치적으로 첨예한 소재들을 다루어 왔던 노장 감독의 신작 치고는 어쩌면 말랑말랑한 영화일 수 있겠지만, 국내에 코스타 가브라스의 이름을 알려준 의 기묘한 유머를 생각한다면, 그다지 낯선 영화는 아니다. 이 영화는 마치 채플린의 코미디를 보는 것 같다. 영어는 못하고, 불어를 아주 조금 알고 있는 주인공은 대사를 거의 하지 않는다. 혹은 못한다. 사람들은 그에게 끊임없이 자신들의 언어로 말을 걸지만 말은 통하지 않는다. 이 영화의 대부분의 유머는 말이 통하지 않기 때문에 벌어진다.

이 영화에서 남들에게 통용되는 언어를 할 줄 안다는 것은 적당한 옷을 입는 것 만큼이나 중요하다. 영화의 처음에 밀입국자들은 신분증을 모두 찢어서 바다에 버린다. 미래를 위해 지금의 자신을 자발적으로 포기하거나 지워버리는 것이다. 구사일생으로 파라다이스 리조트의 누드 비치로 떠밀려 살아난 엘리야스는 계속해서 옷을 갈아입음으로써 자신을 위장한다. 리조트 직원의 옷을 갈아입고 직원 행세를 하고, 그에게 호감을 느낀 여자가 사다준 옷을 입고 리조트의 손님행세를 한다. 목적지인 파리까지 가능동안 엘리야스가 갈아 입는 옷은 일종의 여권 Passport처럼 기능한다. 그러나 어디까지 옷은 그저 몸 위에 걸쳐질 뿐이다. 옷은 사람의 본질을 바꾸어주지는 못했다. 샹젤리제 거리에 선 엘리야스에게 마술은 이루어졌지만, 현실은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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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 느와르>는 개인적으로 작은, 그러나 충만한 위로 같은 영화였다. 이 영화에 대해 좀 더 자세하게, 그리고 집요하게 쓰고 싶은 욕구가 있기 때문에 짧게 언급할 것이지만, 고다르의 <국외자들>의 카페 댄스 장면을 차용한 것이 분명한 정유미의 춤 장면 하나 때문이라도 나는 이 영화를 사랑할 수 밖에 없다. 몸을 움직인다는 것의 쾌감이 마치 혈관에 천천히 차오르는 것 같은 정유미의 모습을 보는 것 만으로도, 이 영화를 기다렸던 시간을 충분히 보상하고도 남았다.

두기봉 감독의 <익사일>은 국내 개봉했을 때 너무 작은 상영관에서 거의 끝물에 봐서 아쉬움이 남았던 영화였다. 이번 PIFF에서는 CGV 스타리움 관에서 상영하다고 해서 보았는데, 결과적으론 그다지 만족 스럽지 못했다. 화면 크기만 키우고 정작 영사기의 세팅은 제대로 되지 않아서 화면 밝기가 고르지 않았다. 사실 그런 얼룩 같은 느낌이 묘하게 세르지오 레오네의 영화를 닮은 이 영화의 분위기에 약간의 플러스가 된 것은 사실이지만, 영화만 놓고 보자면 두 번 세 번 지치지 않고 다시 볼 수 있을 정도로 역시! 였다.

두기봉의 영화에서 인물들은 총을 마치 칼처럼 사용한다. 오우삼이 춤을 추듯 총격을 묘사하는 것과는 다르다. 그렇다고 <이퀄리브리엄>의 건카타 처럼 요란한 액션은 아니다. 인물들은 마치 총알을 ‘찔러넣듯’ 발사하는데, 좁은 공간에서 벌어지는 이러한 액션은 특히 <익사일>처럼 어두운 공간이 많이 나오는 영화에서는 누가 누구를 겨냥하고 맞추었는지 명확하게 알기 어렵다. 마지막 호텔에서의 총격전에서 인물들은 거대한 하나의 절멸을 향해 질주하는 것처럼 보인다. 영화 속 대사로 미루어 보건데, 홍콩 반환 이전의 시점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익사일>은 그저 철지난 소재를 끌어들인 회고조의 영화라기 보다는, 이미 홍콩 반환 이전에 만들어져 지금까지 어디선가 잠자고 있다가 발견 된 것같은 느낌을 준다. 그만큼 오래되어서가 아니라 그만큼 생생하게 말이다.

위에도 적었지만 이번 PIFF에 참석 했던 이유는 정성일 감독의 <카페 느와르> 단 한 작품 때문이었다. 분명히 상영시간과 대중적인 부분 때문에 개봉은 불확실한 부분이고, 그렇다고 해서 영화제나 특별전 형식으로는 언제 볼 수 있을지 어려운 상황이었고, 물론 기다린다면 ‘언젠가는’ 볼 수 있었겠지만, 정말 따끈따끈한 그 대로 이 영화를 보고 싶었다. 다른 사람보다 먼저 영화를 봤다. 뭐 이런식의 등수놀이는 거의 무의미 하다고 생각했지만, 이번만큼은 마음이 그렇게 움직이질 않았다.

2001년인가 2002년인가 나카노 히로유키 감독의 <사무라이 픽션>이 PIFF에서 공개 되었을 때, 그것도 출장 길에 시간이 남아 본 것 빼고는 이번이 정식으로 참가한 것은 처음이다. 그저 시간이 맞아 <사무라이 픽션>을 보고선 턱이빠져 달아날 정도로 웃었던 기억이 난다. 이번 PIFF에는 막상 내려가 정말 ‘별처럼 많은’ 영화목록들을 보니 그 예전에 교보문고를 처음 찾았던 중학생 꼬마의 설레임이 다시 살아났다. 밥벌이의 압박만 아니라면 넉넉하게 여유를 두고 영화제를 즐기고 싶었다. 영화라는 것이 시간 속에서의 작은 탈주라고 한다면, 영화제는 그보다는 조금 더 적극적인 탈주행위다. 그러고보니 이번 영화제에서 본 영화들은 ‘탈주’라는 주제로 엮어 볼 수 있을 법한 영화들이었다. 어쩌면 내가 지금 그러한 공간과 시간들을 그리워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계몽영화]가 계몽하는 것

필진 리뷰 2009.10.17 21:53 Posted by woodyh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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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건영

올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의 수확이라면, 타릭 살레 감독의 <메트로피아>와 박동훈 감독의 <계몽영화>를 꼽을 수 있을 것이다. 그 무시무시한 매표전쟁에서 살아남은 자들의 달뜬 표정과 취소 표라도 얻어 볼 요량으로 간절한 눈빛을 보내는 이들의 절망마저 훈장처럼 빛을 발하던 <카페느와르>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고 선택한 영화가 <계몽영화>라면 어딘가 이상하지 않나? 이는 올 부산에 걸린 355편의 영화를 다 볼 수 없을 바에야 볼 수 있을 만한 영화를 찍어서 집중 공략하는 게 심신 건강에 좋을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고, 당연히 경험에서 비롯되었다. 그렇게 선택한 <계몽영화>, 아이의 조기유학 때문에 남편과 떨어져 살다 아버지의 임종에 즈음하여 귀국한 딸과 죽음 직전의 아버지가 서로의 기억 속 시간을 불러내고 과거를 소환하며 펼쳐지는 <계몽영화>는 절대로 실망스러우면 안 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과연” 영화는 만족스러웠다.

2005년 단편 <전쟁영화>를 만든 바 있는 박동훈 감독은 <계몽영화>의 가족 삼대를 통해 한국의 근현대사를 담아낸다. 그것은 청산되지 못한 과거사 위에 쌓아올린 중산층이라는 신기루인 동시에 우리가 해결해야할 숙제이다. 영화는 친일을 한 할아버지 정길만과 군사독재시절 낮은 포복으로 살면서 또 다른 독재자의 형상으로 군림했던 아버지 정학송과 이로 인해 아물지 않은 상처를 지니고 살아가는 딸 정태선, 이렇게 삼대의 이야기를 보여주면서, 이들 가족사를 관류하는 한국사회의 치유되지 못한 상처와 질곡의 과거사를 조심스레 진단하고 내보인다. 인물들의 플래시백을 통해 시공간을 넘나들며 펼쳐지는 이야기는 크게 세 개로 나뉘는데, 친일을 통해 입지를 다지고 부를 축재하는 할아버지의 시대, “마당에서 북한산 족두리 봉이 보이는 서교동 양옥집에” 살며 군사독재정권 하에서도 재산을 보존하고 가부장을 드높이는 아버지의 시대, 이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딸의 오늘과 가족의 초상이 그것이다.

영화는 상처가 치유되지 않고 미봉에 그쳤을 때, 어두운 과거가 청산되지 못한 채 오늘에 이르렀을 때, 그것은 어디선가 누군가에게로 전이되어 또 다른 상처를 입히거나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를 수도 있음을 알려준다. 감독은 친일행위와 군사독재와 조기유학열풍으로 상징되는 인물들의 과거사를 코믹하고 유머러스하면서도 애처로운 시선으로 담아내고 있는데, 이때 정학송의 집안은 한국사회의 알레고리에 다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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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터인가 ‘계몽’이라는 단어는 전근대적인 사고방식 혹은 군사독재정권이 내세운 깃발의 다른 이름으로 인식되어왔다. 이 영화를 보기 전 궁금했던 점 역시 단편에서 ‘포복절도할 만한 유머감각을 보여준 감독이 어떤 방식으로, 우리에게 무엇을 계몽할 것인가’였다. 사실 다방과 고궁으로 이어지는 정학송과 박유정의 데이트 장면에서 멈춘 <전쟁영화>는 코믹한 전반부와 사이렌 소리에 공포에 떠는 둘의 모습으로 전쟁이 남긴 내상을 보여준 후반부의 균형이 조화로웠음에도, 할 말을 다 못하고 헤어지는 연인의 모습처럼 아쉬웠다. 하지만 그것은 기우에 지나지 않았다. <계몽영화>에는 주인공 격인 정학송과 정태선 외에도 정학송의 사위라는 히든카드가 있었기 때문이다. 감독은 태선의 남편 성호를 처가의 그늘 아래서 살아가는 무기력하고 저항할 수 없는 소시민의 모습으로 그려내면서, 진실로 우리사회가 어디에서 왔고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되묻고 있다. 말하자면 우리사회를 지배하는 기득권의 뿌리가 어디서 왔고 어떻게 유지되었는지를, 그것이 낳은 비극적 가족사를 치유하기 위해서 아픈 과거 속으로 돌아가 자기성찰의 시간을 가져야 하되, 그것을 타자화·대상화해서는 안 된다는 것, <계몽영화>가 우리에게 ‘계몽’하고 싶었던 것은 바로 이것이었다.

사람은 누구나 두 가지 마음을 동시에 품고 살아간다는 점, 어느 쪽을 드러내느냐에 따라서 선과 악이 갈리고 교양과 천박이 나뉘며 독재와 민주의 갈림길에 선다는 것을 정확하게 인지하고 영화 속 인물을 통해 열린 결말까지 만들어냈다는 점, <계몽영화>를 칭찬할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차마 제 민족을 수탈하지 못할 여린 마음을 가졌으면서도 목숨을 살려준 친구를 밀고한 할아버지를, 카라얀과 클래식을 탐닉하며 교양을 한껏 내세우지만 폭압적 가부장에 다름 아니었던 아버지의 삶을, 그런 아버지에게 “사과를 받아내고 싶었”을 만큼의 상처를 입었음에도 같은 상처를 강아지와 남편에게 안겼던 딸을, 그리고 이들 가족의 이야기를 단지 남의 집안일로 가볍게 넘길 수 있을까?

난 체 잰 체 하지 않으면서도 할 말을 다하는 잘 만든 영화란 이런 것이다. “라면 위에 티파니 반지가 있는” 유머러스한 대사와 “그 어른 아니었으면 우리가 이만큼 살 수 없었을 것”이라던 자조어린 시선과, 이제는 “당신 집안사람들, 참 웃겨”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와 “엄마는 아빠와 조금 더 있다가 갈께”라며 화해와 자기치유의 첫 손길을 내미는 따스함이 어우러진 <계몽영화>에 나는 기꺼이 박수를 보낸다. <계몽영화>가 ‘개봉영화’가 되어 더 많은 사람과 만날 날을 기대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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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지혜

[복수]

부산에서 가장 즐거웠던 기억은 두기봉 영화와의 만남이었다. 특유의 긴장과 리듬으로 직조된 두기봉의 영화들은 멋진 액션이 스펙타클에 있지 않다는 점을 새삼 일깨운다. 인물의 움직임이 그리는 선과 리듬에 대한 매혹, 시․공간이 추상화된 운명론적 세계, 플롯이나 캐릭터보다 장르 그 자체에 의해 작동되어가는 방식 등은, 그의 영화를 동시기의 다른 영화들에 비교했을 때 특별한 위치에 놓이게 만든다. 두기봉의 영화에서 가장 흥미롭다고 느끼는 부분 중 하나는 특유의 유희적 측면이다. 인물들은 뚜렷한 명분이나 목적이 없는 상황에서 그들의 행동을 유희적 액션으로 바꾸어 놓는다. 이미 실패 혹은 죽음이 분명해 보이는 순간에도 인물들은 목적 없는 모험이 주는 오로지 순수한 만족을 위해 행위를 멈추지 않는다. 이는 그의 신작 <복수>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주인공은 복수를 감행하기 위해 전문킬러들을 고용하지만 그는 이미 점점 기억을 잃어가고 있는 상태이다. 어느 시점에 이르면 그가 고용한 킬러들과 복수의 대상에 대한 기억마저 잃고 만다. 기억을 잃어버린 상황에서 복수란 과연 어떤 의미인가에 대해 관객이 고민을 하게 될 즈음, 인물들은 ‘이미 선을 넘었다’ 정도의 말만 내뱉을 뿐 어떤 고민도 없이 다음 액션으로 이어간다. <익사일>이나 <복수>의 인물들은 고도의 전문킬러이면서 동시에 아이 같은 어떤 천진함을 지니고 있다. 그러한 천진함은 행위를 그저 순수한 놀이 혹은 모험으로 여기는 것과 연결된다. 따라서 주인공의 잃어버린 기억은 복수에 대한 어떤 성찰을 위해 존재한다기보다 더 이상 질문을 던질 수도 그럴 필요도 없어진 하나의 상태로 주어지는 것이다. 질문이 삭제된 자리에 장르적 움직임을 채워 넣는 두기봉의 영화는 관객에게 형상적 쾌감을 선물한다. 인물들이 쏘아대는 총에 의해 움직이는 자전거가 등장하는 장면이 있다. 사람이 타고 있지 않음에도 총알과 바퀴의 움직임이 맞물려 자전거는 멈추지 않고 나아간다. 인물들의 장난스러움을 보여주는 장면이면서 동시에 두기봉 영화들이 담고 있는 장르적 유희성에 대한 귀여운 농담처럼 느껴지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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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레스타인]


엘리아 슐레이만의 <팔레스타인>과의 만남은 조금은 낯선 경험이었다. 은연 중에 익숙한 타자로 여기고 있던 팔레스타인에서 날아온 기이한 유머와 현실 감각은 팔레스타인에 대해 그동안 갖고 있던 단편적 이미지들이 그야말로 단편이었음을 새삼 일깨웠다. 언제나 이스라엘의 거울 이미지로서만 존재하는 팔레스타인은 그 자체로는 여전히 부재하는 시간 속에 놓여있다(영화가 시작되면 제목과 함께 ‘부재하는 시간의 연대기’라는 자막이 등장한다). 영화가 시작되면 한 남자가 공항에서 나와 택시를 잡아탄다. 밤길을 달리던 택시는 곧 안개 속에 갇히게 되고 멈춰선 차 안에서 운전기사는 ‘여기가 대체 어디인지’ 갈피를 못잡고 중얼거린다. 이후 영화는 1948년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침공부터 현재에 이르는 시간을 연대기처럼 담아낸다. 슐레이만은 역사라는 거대 담론이 아닌 가족의 기억과 자신의 경험을 통해 역사가 만들어 낸 일상의 페이소스를 차가운 유머와 함께 그려낸다. 이를테면 레지스탕스였던 아버지에 대한 묘사는 상당부분 일상에서 주변 인물들과 아이러니한 웃음을 유발하는 상황들로 채워진다. 영화의 침묵 속 단단한 고독과 슬픔은 슐레이만 자신이 장대로 가자지구의 벽을 뛰어넘는 장면, 조용히 창틀너머로 바라보는 노모의 모습과 함께 묘한 감흥을 일으킨다.

부산에서 만난 네 편의 한국 영화

필진 리뷰 2009.10.17 21:27 Posted by woodyh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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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흥기


이번 부산에 와서 많은 영화를 본 것은 아니지만 이를 추려본다면, 한 가지 공통점으로 이 영화들을 묶어 볼 수 있다. 이제 얼마 남지 않은 하반기에 우리와 만나게 될 중요한 한국 영화란 범주로 나는 이 영화들을 선택하였다. 따라서 여기서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 영화를 보기 전, 나는 이 영화의 감독들이 분명히 한국 영화의 자장 안에서 이루어내야 할 성과가 있을 것이라는 사전 기대와 이 영화들을 보고 난 후, 이들이 이루어낸 것과 그렇지 못한 것 그리고 이외의 것들을 간단하게나마 소회하려고 한다. 영화를 자유롭게 보아오고 사유했던 과거와는 달리 이제는 영화인들을 만나는 스케줄이 많아졌다는 핑계로 영화에 관한 글을 도외시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지금으로서 이 네 편의 영화를 한데 묶어서 자세히 비평하려는 시도 자체가 도리어 무의미한 작업이 될 것이기에 대체로 프리뷰 형태로 간단하게나마 기술하려고 한다.

첫 번째 영화  [굿모닝 프레지던트]

장진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장진을 기대한다. 장진의 영화보다는 장진을 기대한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장진은 희미하다. 장진은 장진으로 남지 않고, 영화 캐릭터를 대신 내세웠다. 영화는 대통령이기에 앞서 한 정치인의 이야기를 다룬다. 감독은 결코 정치적이지 않다고 말하지만, 나는 이 영화야 말로 정치적으로 가장 재밌는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한국에서 정치는 영화적인 소재보다는 현실적인 오락의 소재로 유희된다. 정치 혐오증은 이런 정치를 현실의 유희적인 오락거리로 남기기 위한 반향이고, 투표율이 떨어지는 현실은 이런 행위에 대한 일종의 보복이다. 나는 그래서 이 영화가 재밌다. 하지만 고로 이 영화는 대중적인 영화가 될 수 없다고 확신한다. 한국 사회에서 대중은 정치를 영화적인 오락거리로 환원시키기를 꺼려한다. 그것은 현실에 갇혀 비웃음거리의 일환으로 남아 있기를 강력하게 소망하기 때문이다. 그럴수록 대중들은 정치에서 멀어지는 희열을 느낀다. 영화가 그것을 가깝게 이어붙이면 붙일수록 대중들은 극렬한 혐오감에 빠지게 될 것이다. 그것은 그 정치인에 대한 혐오가 아닌 정치에 대한 혐오감에 빠진 자신에 대한 혐오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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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영화 [카페 느와르]

이번엔 정성일이다. 두 시간 칠 십 팔 분짜리 영화를 관람하는 일은 역시 쉬운 일이 아니다. 특히 그것이 데뷔작이라면 그 걱정이 배가 되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또한 정성일의 영화가 불편하지 않았다면, 그것은 거짓말이다. 하지만 그 불편함은 단순한 것이 아니다. 그리고 그런 기우는 첫 장면에서 바로 아주 부드럽게 녹아버렸다. 영화의 시작은 무거운 기운이 감돌지만, 화면의 비추어진 이미지만큼은 경쾌하다. 이것은 <극장전>이다. 화면의 장면은 바뀌고, 다시 다른 영화의 이미지가 떠오른다. 그렇게 시간은 두 시간 칠 십 팔 분을 지나쳤다. 영화는 끝도 없이 기존의 영화들을 콜라주 한다. 이것은 몽타주가 아니다. 정성일은 이를 분명히 콜라주 했다. 어떻게 보면 이건 그의 화법과 닮아있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렇게 생각한다. 결국 정성일은 영화를 찍지 못하였다. 그는 영화로 영화에 대한 글을 쓴 것이나 다름없다. 이게 실망은 아니다. 내 가슴 한쪽에는 안도가 스며있기 때문이다. 정성일의 글은 여전히 매력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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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째 영화 [파주]

개인적으로 올 한 해 가장 중요한 한국 영화가 될 확률이 높다고 본다. 7년의 기다림을 무색하게 만드는 성장이다. 그녀에게 성장이란 표현이 어색하다면, 완성으로 고쳐 쓰자. 인간 내면의 깊은 곳을 스스럼없이 자유스럽게 드나들던 그녀의 연출 화법은 이제 인간 외면의 공간으로까지 확장되었다. 이 영화의 제목이 <파주>인 것은 아주 탁월한 선택이었다. 그녀는 장소적 특히 도시의 공간을 인간 내면에 접목시키는 방식을 그 어느 누구보다 탁월하게 제시하는 능력을 갖췄다. 도시 공간적인 내러티브와 인간 내면의 붕괴를 심리적으로 교차하는 흐름은 이 영화가 가지는 백미이며, 이제까지 한국 영화에서 볼 수 없던 방식임이 분명하다. 도시에 대한 지극히 사적인 담론. 하지만 이보다 더 이상 뛰어 날 수 없는 영화적 완성도. 박찬옥은 현재 한국 영화계에서 가장 중요한 감독의 위치로 당당히 한발자국을 내딛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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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번째 영화 [작은 연못]

나는 솔직히 노근리 사건에 대하여 잘 알지는 못한다. 하지만 이 사건이 다시 조명되어져야 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에는 전적으로 동의한다. 하지만 나는 <작은 연못>에는 다소 회의적이다. 이 영화의 문제 제기 방법이나 영화의 윤리성을 탓하는 것도 아니다. 과연 이 영화의 시점은 누구의 것인지 묻고 싶다. 이 영화는 피해자들의 관점인가? 아니면 가해자들의 관점인가? 그것이 중요한 이유는 이러한 관점이 가지는 영화의 감상법 자체가 틀려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영화는 상황 재현의 노림수에 빠져 이 둘을 혼동하고 있다. 시점숏이냐 아니냐의 문제를 따지는게 아니다. 영화는 단순한 상황 재현극이 아니다. 그런 것은 이미 TV드라마에 넘쳐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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