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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우연찮게 만나 놀라움을 안겨주었던 <나의 친구, 그의 아내>가 드디어 27일 개봉한다. 우여곡절이야 어찌됐건 스크린에서 만나게 된 것을 감사하며. 종잡을 수 없는, 이 변태기질 다분한 예고편에 푹 빠져보시라. 그리고 27일 모두 극장으로 고고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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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민영


이 영화, 시작부터 범상치 않다. 총천연색 레이저를 연발하며 등장을 관객에게 부각시키는데 여념이 없는 우리의 슈퍼히어로, 그의 이름은 ‘차이니즈 인프라맨’. 시작부터 주의를 끌던 히어로의 오프닝 시퀀스는 갑자기 자연의 재해로 위장한 외계인으로 이동되고, 생각할 겨를도 주지 않은 채 관객에게 미션을 내던진다. ‘자, 이제부터 나는 히어로와 싸울 악당이다. 끝내 패할 것을 알지만, 되는대로 해보련다.’ 이름도 ‘데빌’로 불려지는 엘지법 공주는 조촐하고 조악한 등장과 함께 결말을 시작부터 예견하고 싸움을 시작한다.

<슈퍼 인프라맨>은 초반 10분 내에 급격한 상황 발전과 함께 모든 사건사고를 축약시켜 서술한다. 그리고 이 사건사고가 매우 동시다발적이고 정신없이, 빠르게 진행되리라는 걸 관객은 애초부터 알고 있다. 시작과 결말이 정해졌으니 남은 것은 중간과정. <슈퍼 인프라맨>의 진행이 얼마나 스릴있게 움직일 것이며, 영화 속 슈퍼 히어로가 어느 정도까지 기질을 발휘해 팬들을 위한 멋진 신고식을 치를지에 대한 궁금증이 시작된다.

슈퍼맨이 보면 배를 잡고 웃을 정도의 퀄리티를 자랑하는 ‘슈퍼 인프라맨’은 태생부터 히어로가 되기를 타고난 인물이 아니다. 또한 그는 여타의 히어로가 그렇듯 어떠한 치명적인 우연에 의해 특별한 능력을 부여받은 것도 아니다. 청천벽력같이 나타난 빙하시대의 악당들, 그들은 오랜 시간동안 땅 속에 묻혀있다가 돌연 지구의 표면에 나타나 인류를 멸망시킬 것을 꾀한다. 아무 것도 대비하지 않던 인간들은, 뜻밖의 재앙에 ‘급조된’ 히어로를 창조한다. 인프라맨의 탈을 쓴 레이마는 자신이 몸담고 있는 연구소에서 스스로를 희생할 것을 결정한다.

<슈퍼 인프라맨>의 구조는 크게 토너먼트와 부족싸움, 두 가지로 나뉜다. TV히어로물의 전형적인 절차를 밟는 <슈퍼 인프라맨>의 관습을 견뎌낼 수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빨간색 갑옷을 입고, 자신을 일정부분 기계화시켜 인프라맨으로 변신한 레이마는, 단 몇 초간의 드라마도 허용되지 않은 채 곧바로 싸움에 투입된다. 그의 목적은 오로지 악마들을 소탕하고, 지구의 평화를 되찾는 것이다. 간접적인 존재들부터 시작해서, 인프라맨의 행보는 점점 우두머리를 향해 나아간다. 물론 감초 역할을 하는 숨은 복병이 있긴 하지만 그도 졸개에 불과하다. 인프라맨의 행진은 비교적 안정적이게 진행된다.

뻔하디 뻔한 토너먼트의 마지막엔 당연하다는 듯 악당들의 제왕이 지키고 있으며, 인프라맨은 반드시 제왕을 쓰러뜨린다. 하지만 이 직선적인 스토리는, 인프라맨이 만나는 악당들의 속성을 가능하게 만들며 주의를 끌기 시작한다. 한번 칼질이라도 할라치면 훌러덩 벗겨질 듯한 악당들의 분장은, 생각보다 정교하게 꾸며져있으며 그 능력 또한 다양하다. 파워레인져나 독수리 오형제와 같은 집단 히어로물이 매회 꾸준히 긴장을 일으키고 사랑받는 이유도 이러한 기대감 때문이다. 모든 적들의 강약을 조절함과 동시에 부속성을 다르게 만들어 주인공과 대결시킬 때, 관객들은 일정수준 자신이 모르는 히어로 능력의 발현에 관심을 품는다. <슈퍼 인프라맨>의 경우에 이것은 마지막 대결을 통해 관객을 충족시킨다.

인간과 기이한 모습의 악당, 두 계급간의 대립은 막판에 이르러 거대한 패싸움을 연상시킨다. 딱히 언어라고 할 것이 없는 악당들과 비명을 지르며 지구를 지키는 인간과의 ‘건전한’ 혈전은, ‘1+1=1’의 공식을 떠올리게 하는 원시부족의 사투를 방불케 한다. 특별한 무기도 없이, 맨 손으로 상대를 압박하는 무시한 외모의 악당들은 기승전결에 맞게 철저하게 무너진다. 때문에 <슈퍼 인프라맨>의 막판에 다다르면, ‘인류는 인내를 통과한 후 밝은 햇살을 맞이할 것’이라는 엔딩이 너무나도 분명히 읽힌다. 보통의 히어로가 고통과 고뇌의 드라마를 소유한다면 <슈퍼 인프라맨>은 능력만을 가지고 발현된 독특한 캐릭터다. 어린 시절, 말도 안되는 주인공의 능력에 열광하고 추종한 기억이 있다면 이 영화는 딱 그때의 향수를 불러 일으키기 적당한 영화다. TV 히어로와 파워레인져가 아른거린다면, 주저할 필요가 없는 영화, <슈퍼 인프라맨>. 인프라맨의 속수무책 망연자실 매력은 당신의 어린 시절을 완벽하게 소환시켜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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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건영


부산국제영화제의 규모가 날로 커지고 있다. 출품된 작품의 숫자를 비롯한 규모에서 매년 역대 최다기록을 갱신해왔으며, 세계최초 상영인 월드프리미어와 자국 외 최초상영인 인터내셔널프리미어 역시 해마다 증가하고 있다. 이에 뒤질세라 매체들마다 앞 다투어 이 같은 수치를 보도해온 바 있지만 과연 양적증가가 그렇게 중요한 일인지 자문해볼 일이다. 그러니까 부산영화제가 감당할 만한 규모를 넘어선 게 아니냐는 것이다. 양적인 팽창이 질적 성장으로 고스란히 이어지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그 징후는 여러 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예컨대 해외 초청 게스트의 면면만 봐도 예년에 비해 격이 떨어지고 있음이 발견된다. 물론 주관적 기준에 의한 것이고 사적 호불호가 갈릴 만한 일이긴 하다. 하지만 일일이 열거하지 않더라도 분명 올해의 게스트는 작년과 비교해 빈약하기 짝이 없다. 문제는 게스트의 면면이 상영작의 품질과도 맞물린다는 점에 있다. (국내 팬의 절대적 지지를 모르는 바 아니고 작품자체는 나 또한 무척 좋아하지만, 왕가위의 <동사서독: 리덕스>까지 부산영화제에서 상영했어야 하는 것일까?)

칸을 비롯한 유럽의 영화제들이 필름마켓 운영과 경쟁부문 성과에 기대어 역사를 만들어온 것과는 달리 부산영화제는 이 땅의 씨네필의 열정을 자양분삼아 발전해왔다. 그러니까 영화를 보러 전국에서 달려온 영화애호가의 열정과 발걸음이 오늘의 부산영화제를 일궈냈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한 편의 영화를 보기 위해 벌여야 하는 사투는 여전하다. 삽시간에 매진되는 개, 폐막작은 물론이고 일반상영작의 경우도 표구하기가 하늘의 별따기다. 출품작은 기하급수로 늘어나는데 반해 상영관과 행사 기간은 그대로인 까닭이다.

새벽부터 줄지은 매표 행렬과 찜질방에서 기숙하는 씨네필의 모습은 부산영화제만의 자랑거리로 여겨져 왔으니, 부산행을 결심한 영화애호가들마다 이 정도의 고생쯤은 당연한 것으로 여긴지 오래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많아야 3회 상영에 그치는 개별 작품들 중 대부분은 고작 몇 백 명의 관객과 만난 후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지기 마련이다. 이런 환경에서 영화를 둘러싼 담론의 생성은 고사하고 적절한 평가를 받는 것조차 요원한 일일 터이다. ‘부흥.발견.비평’이라는 부산영화제의 모토가 무색해지는 순간이다.

비록 출품작 숫자가 적더라도 상영회차를 늘려 관객과 만날 기회를 보다 많이 제공하는 문제에 대하여 진지하게 고민할 때가 되었다. 부산영상센터 ‘두레라움’의 기공은 비록 늦은 감이 있으나 부산국제영화제의 안정적 행사 공간 확보와 작품상영의 효율성을 높인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크다. 완공되는 2011년이 되면 사정이 나아지려나? 남포동에서 낯설게 첫발을 내딛던 제 1회 부산국제영화제의 기록과 기억 속으로, 소담했지만 화합과 흥분의 도가니 속에서 ‘영화가 주인 되었던’ 그 시절로 돌아가 새롭게 생각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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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민영


마지드 마지디의 복선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더 송 오브 스페로스>를 마다할 여지가 없다. <천국의 아이들> 이후 지속적인 주목을 받고 있는 그의 연출방식은 <더 송 오브 스페로스>에서도 도드라진다. 아이 세대와 어른 세대의 유대감, 그리고 동물을 이용한 안정적인 이야기, <더 송 오브 스페로스>에는 독특한 에피소드들이 한 데 섞여 커다란 하나의 줄거리를 이룬다. <더 송 오브 스페로스>은 '이란의 작은 마을'이라는 울타리를 벗어나 하나의 생명체가 꿈틀대는 '지구'의 이미지를 형성한다.

아버지의 타조로 시작한 이야기는 아이의 물고기로 결말을 맺는다. 자신만을 바라보며 하루하루를 이어가는 두 아이와 아내에게, 아버지가 해줄 수 있는 것은 돈을 벌어오는 것이다. 설상가상 시험을 앞둔 딸아이의 보청기가 고장나고, 아버지는 타조 목장에서 제법 큰 가격으로 거래되는 타조를 잃어버리고 만다. 시간이 갈수록 궁지에 몰리는 아버지는, 자신의 유일한 재산인 오토바이를 통해 소일거리를 찾아다니기 시작한다.

아버지를 거리로 내몬 것은 사라진 타조다. 타조가 행방불명되자마자 아버지는 타조를 찾기위해 하루 온종일 땡볕에서 머문다. 들판에서 깨진 타조알들을 발견하지만 아버지는 결국 타조를 찾지 못한다. 하지만 타조를 잃어버린 아버지의 사건은, 이후 계속해서 행운돠 돈을 가져다준다. 잃어버린 타조를 통해 아버지는 가족을 부양할 당위성을 다시 회복한다. 곳곳에서 발견되는 타조알은 아버지의 마음을 흔들지만 아버지는 더이상 타조를 찾지 않는다.

<더 송 오브 스페로스>은 아버지와 아들이 충돌하는 모습과 화해하는 모습을 극적으로 포착해낸다. 시종일관 도망가기 위해 꾀를 부리는 타조를 잡기위해 아버지는 타조의 의상을 만들어서 스스로 타조가 되기위해 노력한다. 그가 일생을 바쳐 성실히 일했던 타조를 돌보는 직업에서 해고되었을 때, 아버지는 우연적으로 구원을 받는다. 이윽고 아버지는 새로운 일자리를 찾으면서 자신이 쌓은 것에 반하는 유혹과 양심으로의 시험을 받는다. 하지만 딸아이의 귀가 점점 들리지 않음을 알아가는 아버지는 이 모든 것들을 멈추지 못한다.

<더 송 오브 스페로스>의 모든 순간은 '가족애'라는 이름 하에 아름답게 묘사된다. 때문에 영화를 타고 흐르는 우연성의 일치도 인물들이 어울리며 생존하는 공간에 맞춰 꾸밈없이 이동한다. <더 송 오브 스페로스>은 바닥부터 끝자락까지 재치와 유머가 가득차고 넘치도록 스며있는 영화다. 그리고 영화의 후반부에 이르러, 아버지와 자식, 아버지와 가족간의 대화는 정점을 이룬다. 어린 아들은 단지 물고기를 키우기 위해 더러운 저수지를 청소한다. 아버지는 그럴 때마다 크게 역정을 내며 아이를 꾸짖는다. 하지만 생계수단이 어떤 사고에 의해 아버지를 제외한 가족들에게 이동되면서부터 아버지는 입을 닫는다. 어느날 문득 그가 마주한 더러운 저수지는, 아들의 손에 의해 물고기가 살 수 있을 만큼 깨끗해져 있다. 아버지가 뚝심있게 지켜낸 가족들의 행복은 부메랑처럼 아버지에게 다시 쏟아진다. 그리고 그들은 커다란 타조알 오믈렛을 나눠먹으며 사랑을 실감한다. <더 송 오브 스페로스>는 가족을 위한 시선을 한 순간도 놓치지 않는 수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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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색과 청색의 영화, [고모라]

필진 리뷰 2008.10.08 10:05 Posted by woodyh98


강민영



영화는 시작부터 살인행위를 보여준다. 단순 쾌락, 혹은 사색을 즐기는 듯한 한 무리에게 다른 무리가 다가와 사정없이 총구를 겨눈다. 소리없이 흩어지는 사람들, 그들의 죽음은 마치 인형이 쓰러지는 모습과 같다. 하지만 피를 흘리고 버려진 사람들의 시체는 결코 환상이나 망상이 아닌 현실, 즉 '실제 상황'이다. <고모라>에서 가장 눈여겨 보아야 할 흥미로운 사건, 그것은 사람들이 총을 맞고 살해되는 방법이다.

<고모라>의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장치는 '칼'과 '방패'다. 이 두 장치는 영화 속에서 '총'과 '방탄복'으로 대변된다. 총이라는 검은색 무기를 찾아내기 위해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드는 조직과 똘마니들, 그리고 총알을 막기위해 방석만한 두께의 방탄복을 착용하는 또다른 사람들. <고모라>의 칼과 방패는 전혀 다른 곳에서 출발하지만, 우연히 누군가 습득한 총의 총구에서 총알이 발사되는 순간, 사건의 제공자들 겉잡을 수 없이 가까워지게 된다. 인류를 위협하는 최대의 살인무기를 통해 힘이 없던 사람들은 일시적으로 권력을 얻고, 권력을 거머쥐었던 사람들은 위협을 받는다. 그리고 이로 인해 이태리의 한적한 마을은 범법이 무자비하게 행해지는 위험지대로 돌변한다.

<고모라>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세 가지 욕구를 철저히 거세한다. 섹스를 시도하지만 성공하지 못하는 두 청년, 식품을 단지 배달해가기 바쁜 소년, 그리고 잠 못이루는 건조한 도시의 사람들. 각 집단은 단지 단편적 목적을 위해 움직이고 있을 뿐이다. 마치 슈팅게임을 연상시키는 듯한 마르코와 치로가 내지르는 바다에서의 포효는, 그들이 엄청난 자본을 끌어모은다해도 결코 행복하지 못할 것이라는 결말을 미리 암시하게 된다. 속옷만 입고 한적한 부두에서 불필요한 총성을 만들어내는 두 청년의 모습은 <고모라>가 말하려고 하는 극적인 문제를 가장 치명적인 방법으로 보여준다. 총에 의해 조종당하는 작은 마을의 사람들은 순차적으로 우발적인 죽음을 맞고, 이를 통해 씻을 수 없는 죄악의 미래를 받아들인다. 총을 다루는 방법조차 참을 수 없이 엉성한 그들을 움직이는 것은 더이상 '삶의 의지'가 아니다. <고모라>는 조종하는 인간과 조종되는 인간을 다루지만, 영화의 중심이 꿰뚫고 있는 것은 단지 인간들만의 싸움에서 그치지 않는다. <고모라>의 마지막 씬은 망연자실한 절망의 구렁텅이를 밀도 높게 잡아낸다. 단 몇 발의 총성으로 인해 하염없이 쓰러지는 사람들의 '어설픈 죽음'은, 이 영화에 옹호할 수 밖에 없는 현실을 창조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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