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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건영


더욱 날선 목소리를 요청하며

9월 18일은 한국독립영화협회가 이 땅에 세워진지 10년째 되는 날이다. 요즘처럼 자고나면 세상이 바뀌는 시대에 십년 세월이라니, 얼마나 많은 이들의 땀과 눈물이 오늘의 독립영화협회를 일구어냈는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연일 도착한 안내문을 보면 창립 10주년을 기념하기 위한 다양한 기획이 준비되어 있는데, 독립영화의 과거를 돌아보고 미래를 준비하는 3개의 포럼과 10주년 기념식과 <파업전야> DVD발매 기념상영 등, 영화단체이자 시민사회단체로서 독립영화협회의 발걸음에 새로운 힘을 불어넣을 행사로 가득하다.

지난 10년간 기억도 못할 많은 일들이 독립영화계를 스쳐 지나갔을 테지만, 독립영화인들의 오랜 숙원인 독립영화전용관 ‘인디스페이스’의 개관은 10년 한국독립영화사에 한 획을 그은 특별한 사건으로 기록될 듯하다. 식자들마다 한국영화의 미래가 독립단편영화에 달려있다는 말은 쉴 새 없이 해대왔지만 정작 현실은 이와 동떨어져있어 적은 제작비로 힘겹게 완성시켜도 홍보는 고사하고 상영할 극장을 찾아 나서기도 벅찰 노릇이고, 설사 힘들게 상영관을 잡았다 해도 마케팅의 부재로 찾는 관객이 소수인 것이 현실이었다. 그런 점에서 인디스페이스는 독립영화의 안정적인 상영 뿐 아니라 지속적인 홍보를 통한 관객과의 거리 좁히기를 가능케 했다는 점에서 전용관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고 하겠다.

독립영화협회 10주년을 맞은 지금에도 ‘독립영화의 현재가 한국영화의 미래에 큰 영향을 미친다’는 말은 여전히 유효하다. 단편영화 제작을 통해 기술을 익히고 동시에 세상을 바라보는 안목을 키워나간다는 점만 놓고 봐도 그렇다. 문제는 상영공간과 배급라인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수요가 있는 곳에 공급이 따라오기 마련인 법. 독립영화의 발전과 저변을 위한 제도적 뒷받침만큼이나 관객의 호응이 절대적으로 요청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돌아보면, 장산곶매, 서울독립영화집단 등을 주축으로 8.90년대 만들어진 <판놀이 아리랑> <강의 남쪽> <상계동 올림픽> <오! 꿈의 나라> <파업전야> 등의 영화들은, (비록 시대적 요청이었다고는 하나) 그 소재가 민주화로 증폭된 사회계층간의 갈등과 소외된 삶에 편중되었던 것도 사실이다. 낯선 영상과 메시지의 중압감에 부담스러워했던 당시의 관객들은 독립영화에 대한 편견을 가졌을 런지도 모른다. 물론 독립영화가 어둡고 음습한 외진 곳의 삶을 조명해만할 이유는 없다. 거꾸로 가는 세상을 바꾸겠다는 다짐이 투쟁적 영상을 만든다고 해서 굳건해지는 것도 아닐 터이다. 하지만 돌이켜 생각해보자. 자유당과 공화당을 거쳐 민정당으로 이어진 독재군사정권 하에서 한국영화산업은 국가정책의 발 빠른 메신저 역할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이를테면 반공. 계몽. 건전이라는 명찰을 단채 정권의 홍보대사로 격하되기 일쑤였으니, 그 시절 다수의 영화들은 통치자의 대국민 영상편지에 다름 아니었다는 말이다. 때문에 격동의 시대를 뚫고 탄생한 한국독립영화는 태생적으로 영화자본으로부터의 독립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그러니까 자본은 물론이고 정치적 목적으로부터의 독립과 부조리한 사회시스템에 항거하지 않고서는 만들 수 도 상영될 수 도 없었다는 것이다. 물론 지금 시대의 관객이 이러한 태생적 연원까지 알아야 할 이유는 없다. 나는 그것을 강요하려는 것이 아니다. 다만 독립영화에의 애정을 과시한답시고 소재와 형식을 상업영화와 비교해 섣불리 재단하는 것은 지양해야 한다는 것이다. 독립영화에 관한한 독보적 비평가 중 한사람인 김이환은, 자신의 첫 번째 독립영화인 송혜진의 <안다고 말하지 마라>를 보며 얻은 경험을 교훈삼아 쓴 글에서  「가끔 사람들이 독립영화가 뭐냐고 묻는다면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모르겠다. 나는 언제나 나름대로의 기준을 갖게 될까? 그 기준은 또 얼마나 자주 변할까? 그러니, 함부로 안다고 말하지 말자」고 우리에게 요청하고 있다. 소중히 새겨야할 대목이다.

이제 마음만 먹으면 볼 만한 독립영화는 도처에 산재해 있다. 독립영화 전용관뿐 아니라, 인터넷 영화 사이트나 포털 사이트에서도 독립영화를 만날 수 있다. N 포털 사이트의 경우는 독립영화관이 별도로 개설되어 있고 무료관람이 가능하다. 열정과 성의만 있다면 얼마든지 독립영화를 접할 수 있는 시대가 도래 한 것이다. 그러나 인프라의 확충만으로 독립영화에의 관심을 증폭시킬 수는 없다. 대중이 관심을 갖고 보고자 할 때, 극장을 찾아 나서며 적극적으로 동조할 때서야 독립영화의 위상이 달라지고 관객과의 만남이 잦아질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 번의 관람과 두 번의 관심이 더해져야 한다.

영화는 가히 21세기 문화산업의 총아로 군림하고 있다. 여기서 방점은 산업에 찍혀야 한다. 환금성 높은 것만이 상품으로서 가치를 지니는 후기자본주의시대에 독립영화라고 예외일 수 는 없는 노릇이다. 즉 철저히 자본의 흐름에 따라 움직이고 작동하는 산업의 자장 안에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독립영화감독들과 인터뷰를 해보면 공통점이 발견되는데, “오래오래 계속 영화를 찍고 싶다”는 바람이 그것이다. 당연한 얘기지만 오래도록 영화를 찍자면 자본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가족의 주머니에서 나오든 친구 친지에게 읍소해 제공 받든, 아니면 감독과 스태프가 아르바이트로 조달하든 돈이 있어야 영화를 찍을 것 아니냐는 말이다. 영화 속 한 장면을 보자. 김삼력의 <아스라이>에서 주인공 상호는 “상금 타먹으려고 영화 찍느냐”고 대드는 후배에게 “그래도 찍었으면 돌려봐야지, 돈을 구해야 영화를 찍지, 그러려면 작품이라도 부지런히 돌려야지” 않겠냐고 말한다. 사람에 따라서 느낌이 다를 수 있겠으나 독립영화인의 현실적 고민이 담겨있는 이 장면에서 나는 오히려 김삼력의 솔직한 심정을 읽을 수 있었다. 그러므로 자본의 독립만큼 중요한 것은 자본의 자립이다. 제도의 장벽과 대작영화의 극장독점이라는 공정성 문제가 상존함에도 불구하고 독립영화 감독들은 자신의 작품을 자본화 시키는 방법을 연구하고 터득해야 한다. 바야흐로, 창작예술이라는 1차원적 사고에서 벗어나 산업적 논리를 대입시키려는 2차원적 문제를 고민해야 할 때가 되었다.

지난 시간 동안의 독립영화가 투철한 모험정신으로 세상과 맞서 사회적 모순과 문제를 진단하고 스크린에 상정시켜놓은 반면,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해 명쾌한 답변까지 이어지지 못한 경우도 많았다. 현실에 집착하면 상상력이 결핍되기 십상이고 상상력이 앞서면 현실과의 괴리가 발생한다. 그런 점에서 우리시대의 대안가족에 대하여 곰살스럽게 펼쳐 보인 안슬기의 <다섯은 너무 많아>가 (개인적으로 더 없이 좋았음에도) 더 전진하지 못하고 멈춘 그 지점을 김태용의 <가족의 탄생>이 과감하게 돌파했다는 사실은, 독립영화의 한계와 가능성을 동시에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다. 여기에서 현실에 대한 비판적 사유를 놓치지 말되 풍부한 상상력과 따뜻한 인간미도 두루 스크린 안으로 끌어들임으로써 독립영화의 편견과 한계를 넘어설 수 있다는 진단이 나온다. 인간에 대한 애정이 실종된 목소리는 무책임한 선동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또한 오늘날 영화의 다양한 기능성, 그러니까 영화의 사회적 책무에 버금가는 엔터테인먼트로서의 속성 또한 간과해서는 안 될 일이다. 이는 독립영화라고 해서 피해갈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용인될 수 있는 것은 더욱 아니다. 그러므로 독립영화도 재미있어야 한다. 볼거리를 제공하고 그 속에 영민하게 메시지를 담는 방법을 끊임없이 찾아내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한국독립영화가 더 날선 목소리를 내야 한다고 믿는다. 부조리한 세상을 향한 날선 목소리를 독립영화에서마저 들을 수 없다면 진실의 외침이 설자리는 어디라는 말인가. 최근 몇 년간 독립영화는 비전향 장기수, 외국인 노동자, 청년실업, 기지촌, 일탈을 꿈꾸는 가족사, 무미건조한 일상 등, 소재의 다양성과 내러티브의 확장성을 시도하면서 디지털 시대에 걸 맞는 깔끔한 영상과 재미로 관객과 한층 가까워지고 있다. 독립영화의 대중성 확보를 위해 바람직한 일이다. 그러나 달리 보면 지금이야 말로 <파업전야>의 결기를 독립영화가 다시 이어받아야 할 때가 아닌가 싶다. 오래전 선배들이 피와 땀과 눈물로 지켜낸 소중한 필름과 그 속에 담긴 뜨거운 시대정신 말이다. 그러니 역사의 시계바늘이 거꾸로 도는 것을 막기 위한 초석이 되고, 독립영화를 지켜온 많은 땀방울에 부끄럽지 않도록 세상을 향해 더 통렬하고 시원한 직격탄을 날려주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한국독립영화협회 창립 10주년을 맞아 만들어진 <파업전야> DVD에 담긴 상징이야말로 그 시대로의 회귀를 거부한다는 몸짓이요 영화를 통한 실천적 모험정신을 놓지 않겠다는 새로운 다짐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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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 영화에 대한 글을 쓰는 이유

그리고... 2008.09.17 11:53 Posted by woodyh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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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유경


영화에 대한 이야기에 앞서 질문하고 싶은 것은 왜 영화를 보느냐에 관한 질문이다. 영화에 대한 어떤 욕심 혹은 쾌락, 그것들의 근저에 무엇이 자리잡고 있는지에 관해 나는 당신과 대화를 나누고 싶다. 그에 관한한 나는 아주 솔직한 답변을 당신에게 제공할 수 있을 것이며, 그 답변의 완성도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나마 발전 가능성에 대해서는 긍정한다.

최근 나는 영화를 보는 나 자신에 대해 의문을 가졌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영화에 대해서 뭐라고 말하고 있는 내가 우스워보였다. 영화는 저 스크린에서 상영되고 있는데 나의 입과 손은 글을 생산해내고 싶어 안달났다. 그것은 영화로부터 유발된 행위가 아니라 내 자신에게서부터 시작하는 열망이다. 생산이라기 보다는 타인의 것을 해체하는 폭력에서 유발하는 쾌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미성숙하게 발달된 쾌감 인식 작용으로 당신의 고민 결과를 해체시키는 행위. 그 행위는 끝내고 나서야 허무함을 느낀다. 그런 즐거움이라면 다시금 아쉬워 몰두하기 마련이다.

글을 써야 한다는 건 여러가지 이유에서일 것이다. 생각을 정리해가는 과정일 수도 있고 타인에게 글을 읽게 할 목적일 수도 있고. 자신이 작성한 이야기가 타인에게 읽혀질 때는 그 전파성에 대해 생각해보아야 하는데, 사실상 영화가 감독의 손에서 떠날 때 처럼 글 역시 글쓴이의 손에서 떠나면 더 이상 그 안의 내용에 관해 개입할 여지가 줄어드는 게 맞다. 그러나 내가 개입할 수 없다고 하여 그 내용에 대한 책임 여부까지 줄어드는 건 아니다.

갑자기 글의 책임여부, 전파성 등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는 까닭은 지금 내가 영화에 관한 '비평'을 쓴다는 것이 과연 읽혀야 하는 글일지에 관한 고민이 들기 때문이다. 이 글을 쓴다는 것이 담론형성의 목적을 넘어서 자의식을 드러내기 위한 목적이 더 크게 작용한다면? 나는 영화에 관한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일기를 쓰는 것일지도 모른다. 분석과 비평의 목적이 스스로에게로 머물러 있다면. 적어도 그런 글은 쓰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다.

왜? 내용물과 형식상의 괴리가 있기 때문이다. 글의 형식은 어쨌거나 힘을 가진다. 비록 연예인에 관한 근거없는 뒷담화일지라도 기사라는 형식을 가지면 파급력을 지닌다. 적합한 내용물이 아닐지라도 그 형태가 그럴듯 하면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얘기다. 텍스트 이론에서는 작가의 손을 떠나면 해석은 독자의 몫이라고 언급했으나, 독자의 자발적 해석에만 의지할 수는 없다고 본다. 특히나 글을 쓰고 난 뒤 자기 스스로의 카타르시스를 위한 글은 자기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해야한다.

대상을 분석하고 해체하여, 그에 관한 글을 쓴다고는 하지만 그것이 결국 자기 만족일 경우와 쓰기 위한 목적이 강한 경우. 솔직히 나는 그런 글들을 보며 이 글들의 목적이 결국 그거구나, 싶을 때는 읽기 싫어진다. 또 내가 그런 글을 쓰고 있을 때는 당장이라도 키보드에서 손을 떼고 싶다. 가속도 붙은 나의 미성숙에 제동을 걸고 싶다. 과잉된 의식으로 작품을 대하지 말자는 다짐은 내게 유효하다. 타인을 분석하고 비판하는데서 자기 정체성을 얻어버린 '그' 혹은 '그녀'는 결국 남 이야기만 하다 살아갈 뿐이다. 자신에게 결핍된 부분을 타인에게서 찾지 말라는 것. 이것은 내가 나 자신에게 요구하는 바다.

해체를 시켰다면 다음의 것을 조립해야 한다. 한탄을 했으면 대안을 내놓아야 한다. 이것은 내 가치관이다. 구조를 알기 위해 해체를 해야 하는 것이고, 더 나은 것을 알기 위해 불평을 해야한다는 것은 언제까지나 유효하다. 내 불평의 첫 출발점을 알 때다. 나는 나의 결핍을 안다. 내가 갈망하는 것이 무엇인지 깨달아 간다. 나는 나를 위해 영화를 본다. 얻어낼 것들을 위해 영화를 본다. 어떤 직업 상의 이유로 영화를 보는 게 아닌 이상 나는 영화를 보고 나의 이야기를 한다. 나의 생각을 캐낸다. 말초에서 얻어버린 감각을 통해 내 생각을 꺼낼 수 있는 화두를 얻는다. 그거면 충분하다. 이거면 내가 영화에 대한 글을 왜 쓰는지 이유가 된다.
TAG 비평,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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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민영


임권택을 이야기할 때면 으레 많은 수식어가 붙곤 한다. 임권택은 1980년대 이후로 계속해서 작가로 명명되어온 감독으로, 그는 현재 쏟아져 나오는 다수의 역사 영화의 현 상황을 직접 체험해 걸어온 사람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임권택은 한국 역사와 한국 영화사를 아울러 말할 수 있는 유일한 ‘산 증인’인 동시에 한국 영화에 대한 향수와 비판을 동시에 가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감독이다.

임권택은 수 년 간의 연출부 생활을 바탕으로 1962년 <두만강아 잘 있거라>라는 액션물을 통해 데뷔했다. <두만강아 잘 있거라> 이후 약 40년이 훌쩍 지난 지금까지 임권택은 카메라를 놓지 않는다. 1년 전이었던 2007년 봄, 꽃이 흐드러지는 계절에 임권택은 자신의 백 번째 영화 <천년학>을 완성했다. 임권택의 <천년학>은 그가 걸어왔던, 그리고 쌓아왔던 시간에 대한 가능성을 완곡하게 열어두는 장치인 동시에 또 다른 결말의 시작이었다. 한 평생을 사회와 혼돈 속에서 묵직하게 지켜온 임권택의 삶은 오로지 그의 영화에만 온건히 녹아있다. 때문에 임권택을 이해하기 위해서는(여기서 ‘이해’라는 말은 여전히 가당치 않은 말이지만), <천년학> 이전, 그리고 그가 본격적으로 주목을 받은 <취화선>과 <서편제>를 포함한 다른 영화들을 훑어보는 수고가 필요하다.

임권택의 영화는 크게 두 가지 시기로 구분된다. 시기로 따지면 1990년대 이전 영화들과 1990년대 이후 영화들이 그것인데, 보통 그를 대표하는 작품들은 대부분 후자에 속하는 작품들이었다. 임권택은 데뷔 당시 다소 폐쇄적인 영화계의 틀을 겪어야 했으며, 이는 곧 감독과 제작사, 그리고 흥행 간의 고려를 통해 지원 유무를 결정하는 값을 낳았다. <두만강아 잘 있거라>를 통해 스크린에 비로소 감독으로 이름을 보태게 된 임권택은, 이후 상업 영화의 전선에서 많은 영화를 만들었다. 특히 <두만강아 잘 있거라> 이후 70년대로 들어서면서 임권택은 엄청난 다작을 했는데, 이는 당시 그가 제작자와 관객을 동시에 만족시키는 흥행 감독이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게 확인시켜주는 예다. <두만강아 잘 있거라>와 같은 해에 발표된 <전쟁과 노인>, 그리고 그의 전쟁 영화 중 가장 수작으로 꼽히는 <낙동강은 흐르는가>를 포함한 한국 영화 산업의 붐도 바로 이 시기에 일어났다. 임권택의 초기 전쟁영화들은 대부분 같은 결말 구조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전쟁 영화는 대체로 소재의 오락성에 의해 관심을 받기 쉬운 서사를 가지고 있지만, 임권택의 전쟁 영화는 동시대, 혹은 전 시대 감독들의 그것과는 조금 다른 양상을 보인다. 주로 한국 전쟁 초기의 상황에 초점을 맞춘 임권택의 70년대 영화들은, ‘소년’의 눈으로 읽힘을 받는 장면이 곳곳에 명확하게 쌓여있다. 그리고 곧 이것은 비극적 결말을 낳는다. 임권택의 73년작 <증언>은 전쟁 통을 겪은 감독 자신의 체험이 가장 짙게 반영된 작품이다. <증언> 역시 전쟁 초기의 혼란스럽고 악몽과 같은 상황을 서술하는데, 이 영화는 정부 슬하에 제작된 영화이지만 임권택은 단지 지원에서 그치지 않고 전쟁이라는 단어의 참혹한 경험을 알리는 데 치중한다. 전쟁 영화에서 임권택의 연출은 주로 사격과 진압을 포함한 전투 장면을 중심으로 서술된다. 특유의 서스펜스 영화적 분위기로 많은 주목을 받았던 <낙동강은 흐르는가> 또한 임권택이 바라본 전쟁 당시의 직접 체험을 영화를 통해 간접으로 투영한다. 이들은 모두 박진감 넘치는 서사를 꾀하고 있지만, 결말에 이르러서는 붕괴(<낙동강은 흐르는가>)와 주변 상황의 급격한 변화(<깃발 없는 기수>)를 토대로 철저하게 무너지는 양식을 취한다. 때문의 임권택의 초기 영화, 그 중 전쟁 영화는 폭탄이 빗발처럼 쏟아지는 유혹적 상황에서 결국 파탄에 이르는, 다시 말해 형언할 수 없는 ‘긴박감’을 낳는다. 이는 한국 전쟁 영화에서 매우 드문 양상에 속하는 것이다.

70년대를 뛰어넘어 80년대로 들어서면서도 임권택은 전쟁에 대한 확고한 시선을 고수한다. 이것은 한국 전쟁 밑바닥에서 시작된 역사와 더불어 그곳에서 파생된 각종 범죄에 대한 영화들을 만들어내는데, 85년작 <길소뜸>은 정면에서 바라보던 전쟁을 측면에서 이야기하는 변화를 가져다준다. 시선을 현대로 돌려, 텔레비전의 영상을 통해 이산가족의 현실을 여성의 삶을 통해 풀어낸 <길소뜸>은 자식과 부모간의 근본적인 유대 관계를 건드린다. <길소뜸>의 화영은 역사가 쏟아버린 잔재를 끌어안고 최대한 감정을 자제한다. 화영이 마지막까지 자신의 친자를 부인하는 장면에서 <길소뜸>의 점프 컷이 발생하는데, 이는 곧 <길소뜸>을 전후해 쌓아왔던 임권택의 전쟁사를 하나로 폭발시키는 과정의 마지막이다.

90년대로 넘어온 임권택은 그의 영화사에서 두 번째 시기를 맞는다. 90년대 이전의 연출이 임권택에게 있어 실험과 반복을 시도하게 했다면, 90년대 이후의 작품들은 감정과 서사에 충실한다. 임권택은 전쟁, 그리고 역사 이야기를 통해 지속적으로 눌러 담아왔던 인간의 정서를 표현하기 시작하는데, 이것의 출발점은 81년작 <만다라>와 91년작 <개벽>이다. 두 작품은 이후 임권택의 영화사를 통틀어 가장 도발적인 작품이다. <만다라>는 자신을 지우거나 확인하기 위해 끊임없이 길을 떠도는 로드무비다. <만다라>는 이후 <서편제>와 <취화선>, 그리고 <천년학>을 잇기 위해 존재하는 발판과도 같다. <만다라>의 지산 스님과 옥순은 시간을 매개로 간극을 형성해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한다. 두 사람의 서사는 펠리니의 <길>과 상통되는 사건을 만드는데, 주목할 것은 지산과 옥순의 두 번째 만남에 있다. 옥순과 지산이 처음 만났을 때 욕망과 사랑의 결정체를 낳았다면, 그들의 다음 만남은 자연스레 추억이 전제된 것이어야 했다. 하지만 지산은 옥순을 다시 만난 후에도 본가였던 종교로의 회귀를 꾀하지 않는다. <만다라>의 결말은 <개벽>의 최시형과 맞닿아 있다. <만다라>의 지산과 <개벽>의 최시형은 역사의 정 중앙을 걸어가는 동시에 도망과 안정점으로의 모색을 보여주지 않는다. <만다라>에서 이어진 애정에 대한 감정은 <개벽>의 결말과 맞닿는다. <개벽>은 역사 영화로서는 엄청난 서사와 깊은 사상을 입힌 농도 짙은 실극이라 하기 마땅하다. 그렇기에 <개벽>의 이야기는 시간에 비례하지 않으며 오히려 알 수 없는 몰입도를 낳는다. 그러나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개벽>이 단순 동학운동의 처음과 끝을 보여주는 것에 지나는 영화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 영화에서 <개벽> 이전의 임권택 영화들에서 좀처럼 볼 수 없었던 로맨스의 서술이 가장 크게 작용한다. <개벽>은 마지막인 최시형의 총살 장면, 온전한 샷 바이 샷이 아닌 최시형의 부인의 눈으로 봉기의 결말을 선언함으로 막을 내린다. <개벽>의 마지막 은 감정을 증폭시킨 채 어떠한 테크닉도 발하지 않은 순수한 카메라의 움직임으로, 이로 인해 완성되는 <개벽>은 부정할 수 없을 정도로 탄탄하고 완벽한 영화다.

<개벽>이후 임권택은 역사의 공간에 서 <태백산맥>을 낳는다. <개벽>에서 화두로 작용했던 인간 본연의 사상, 그리고 인물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모든 상황들은 <태백산맥>에서 정지된다. <태백산맥>은 <개벽> 이후 현대의 역사를 사는, 말하자면 ‘그 시대’에 존재했던 사람들을 위한 분노의 표출이라고 할 수 있다. <태백산맥>의 서사가 임권택의 역사서중 가장 난해하고 목으로 넘기기 힘든 거친 것이었다면, <태백산맥>과 거의 동시에 제작된 <서편제>는 <만다라>의 정서를 반영한 것이다. <서편제>는 길의 종착점을 알 수 없는 임권택의 두 번째 로드무비로, 판소리를 매개로 한 유봉과 송화, 그리고 동호의 이야기를 그린다. <서편제>가 임권택의 미학을 완성시킨 것이라는 말에 동의를 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서 작용한다. <서편제>는 <만다라>에서 참아 온 한국, 혹은 인간의 정서를 대폭 반영한다. 하지만 영화는 길을 따라 떠도는 세 가족의 모습을 직접 서술하지 않고 ‘소리’를 통해 ‘노래’한다. 진도 아리랑이 길게 울려 퍼지는 <서편제>의 롱테이크는 현실에 상처받은 한 가정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하나의 목소리를 내는 장면이다. <서편제>에는 아들과 아버지, 아버지와 딸이라는 부모 자식 간의 형용할 수 없는 정서가 녹아있다. 이것은 어떤 방식으로도 곧이 읽혀서 솎아낼 수 없는 가장 기본적인 서사임은 분명하다. <서편제>는 그것을 ‘음악’을 통해 건드려 낸 것이다.

이후 임권택은 <축제>를 통해 가족에 대한 기억을 상기시키고, 동시에 가족을 묻는 방법을 표현한다. <축제>의 기억은 한 사람의 시선이 아닌 구성원 모두의 시각을 통해 완성되고, 이는 곧 장례로 이어진다. <축제>와 <창>에서 이어진 <춘향뎐>은 <서편제>와 동시로 임권택의 영화 중 가장 중요한 공간을 차지하는 영화다. <서편제>의 연장선은 <천년학>이 아닌 <춘향뎐>이다. 임권택의 <서편제>에서 시작된 ‘소리’에 대한 갈망은 <춘향뎐>에서 극대화된다. <춘향뎐>은 서사가 없다. 이것을 조금 더 돌려 말하자면, 임권택의 영화 속에서 지금까지 중요시 되어오던 이야기 자체가 <춘향뎐>에만 유독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임권택은 인물을 이루는 환경에 눈을 돌린다. <춘향뎐>은 대사가 아닌 노래로 남는 영화다. 전문 배우가 아닌 신인을 대거 등용해 배우에 대한 파격을 감행한 영화는, 그로 인해 ‘춘향’과 ‘몽룡’의 현실성을 관객에게 각인시킨다. <춘향뎐>의 이미지와 소리는 다른 형식과 방식을 빌리지 않은 본연 그 자체로 존재한다.

<춘향뎐>이 한반도 안과 밖에서 외적인 성공을 거두게 되었고, 이와 동시에 임권택의 서사 또한 완벽한 안정점(그렇지만 결코 진부하지 않은)을 터울 짓게 된다. 임권택의 세 번째 로드무비인 <취화선>은 영화라는 한정적인 시간 안에 속할 수 있는 어떤 ‘인물’의 최대 값을 이미지로 불어넣은 것이다. <취화선>은 오원 장승업이라는 거친 화가의 궤도를 좇기 위해 몇 가지 방점과 전환점을 적재적소에 배치한 아름다운 영화다. <취화선>은 2002년 칸느에서 감독상을 수상하는 사건을 발생시키며 동시에 한국에서 장기간 상영으로 전환된 영화이기도 하다. 이전의 작품들이 하나의 역사를 서술한 것이라면 <취화선>은 앞서 말한 <개벽>과 <서편제>, 그리고 <춘향뎐>의 사건을 하나로 뭉친 결과물이라 하겠다. <취화선> 이후에도 임권택은 멈추지 않는다. 그리고 그의 계속적인 진보는 <하류인생>의 태웅으로 전환되고 마침내 <천년학>으로 귀속된다. <서편제>에서 이야기 하지 못했던 남녀의 정은, 수 년이 지난 후 <천년학>에서 진정성을 달고 하늘을 향해 훨훨 날아오른다. 이제 더 이상 동호는 송화를 그리워하는 것을 숨기지 않고, 송화는 동호의 손을 뿌리치지 않는다. <천년학>은 동호와 송화, 그리고 임권택 자신의 환상을 통해 ‘영화란 어떤 것인가’에 대한 짙은 정의를 내린다.




<춘향뎐>이후 연속성을 보이던 임권택의 영화들은 <천년학>을 전환점으로 삼고 회귀한다. 때문에 <천년학>의 시퀀스들은 철저하게 분할되지 않은 채 하나의 원을 이룬다. 임권택의 역사 속에 또 다른 획을 그은 <천년학>은, 그가 걸어온 길만큼이나 굴곡진 영화인 동시에 아련한 기억을 형상화하는 영화다. 임권택의 영화는 시간의 연속이라는 이론을 단적으로 정의내리는 것들이다. 위에서 열거했던 영화들 외에 임권택의, 이를테면 <티켓>이나 <아제아제 바라아제>, <짝코>, <족보>와 같은 작품들 모두 거듭되는 시간 속에 존재할 때 빛을 발하는 것들이다. 그래서 우리는 임권택을 더 이상 거장이라는 명칭으로 국한할 수 없다. 만약 한국에서 ‘옳은 영화’가 그립다면, 그 해답은 임권택의 영화들에 있을 것이다. 그의 영화를, 그것도 근작을 아직도 놓치지 않고 볼 수 있다는 사실은 (감히 말해) 무료로 받는 엄청난 수혜에 가깝다. <하류인생>의 마지막 나래이션은 이렇다. "태웅은 이후에도 몇 년을 더 그 일에 종사하다가, 1975년 전업했다. 그의 인생이 맑아지는 조짐이 보였다." 임권택의 영화는 태웅의 내일을 알 수 없듯이 이미 스크린 밖의 공간에 존재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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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덤까지 가져갈 단 한 편의 영화

필진 칼럼 2008.07.14 14:47 Posted by woodyh98
백건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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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아트시네마에서 열리는 ‘2008 시네바캉스’의 백미는 단연 스파게티 웨스턴의 거장 ‘세르지오 레오네 특별전’일 것이다. 돈만 있으면 우주여행도 가능해진 시대에 말 타고 총질이나 해대는 웬 구닥다리 영화냐고? 자고로 싸움의 백미는 총싸움인 법. 짤막한 권총에 유독 푸른 눈을 지녔던 프랑코 네로와 총구가 긴 권총을 소지했던 신경질적인 광대뼈의 리반 클립과 궐련을 질근질근 문 채 윈체스터를 폼 나게 돌려가며 쏘아대던 클린트 이스트우드를 탄생시킨 것이, 세르지오 꼬르부치에서 시작되어 그의 후예 세르지오 레오네가 꽃을 피운 스파게티 웨스턴이라면 어떤가!

이렇듯 수정주의 서부극에 B급 감성을 버무려 독특한 영화세계를 일궈온 세르지오 레오네였지만, 그가 필생의 작업으로 여겼던 영화는 전혀 다른 형식의 것이었다. 입버릇처럼 말해왔듯이, 세르지오 레오네의 위대함은 단순히 그의 영화세계에서 끝나지 않는다는 것에 있다. 즉, B급 서부극이라 불린 레오네 영화에서나 주연일 수밖에 없었던 2류 배우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오늘날 거장으로 군림하기까지 레오네의 영향을 무시할 수 없을 것이고 레오네만의 특별한 무언가가 있었을 것이라는 말이다. 따라서 개인적으로 너무나 좋아하는 레오네의 영화, 그 중에서도 그의 유작(遺作)을 필름으로 다시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번 시네바캉스는 절반의 만족을 안겨준 셈이라 하겠다. 이제, 물어보자. 당신을 미치게 만드는 단 한 편의 영화가 있는가? 제목만 들어도 뛰는 가슴을 주체하기 힘든 그런 영화가 있는가. 아님 당신의 가슴을 데워줄 영화가 있기는 한 것인가.

좋은 영화란 셀 수 없이 많다. 이 무수한 영화를 전부 이야기하자면 평생 걸려도 못할 일이기에 단 한편의 영화를 고르라면 누구라도 머뭇거릴 수밖에 없을 테지만 내겐 그리 고민스러운 일은 아니다. 그러니까 누군가 최고의 영화 한 편만 꼽아보라고 할 때 주저하지 않고 꼽을 영화가 있다는 것. 정말로, 그런 영화가 있다는 건 얼마나 다행스런 일인가!

이 영화에 대해서 긴 얘기가 필요 있을까? 어떤 수식어로 이 영화에 대한 찬사를 다 할 수 있을까. 70 년대에 <대부>가 있었다면, 80년대는 바로 이 영화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가 있다. 물론 90년대에 이르면 <좋은 친구들>로 그 계보가 이어진다.

「뉴욕 빈민가의 어느 식당, 한 소년이 화장실로 들어가 벽돌 하나를 조심스레 빼낸다. 그리고 잔뜩 긴장한 채 그 구멍을 통해 옆방을 들여 다 본다. 벽 너머의 공간에서는 소녀가 발레 연습을 하고 있다. 소녀는 소년이 엿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마치 뽐내듯 발레를 계속하고, 소년이 소녀를 좋아하듯 소녀도 소년을 좋아하고 있었다. 하지만 소녀는 소년이 나쁜 길로 빠지려 하고 있음이 안타까웠다. 그리고 소녀의 걱정대로 소년은 사람을 죽이고 교도소에 가게 되었다. 옛날 옛적 미국에서...」

1920년대 경제 대공황과 금주법시대의 뉴욕 브룩클린을 배경으로, 다섯 명의 소년이 범죄자로 성장하는 과정과 이젠 도피생활에 지칠 대로 지친 주인공 누들스의 과거회상을 통해 인생과 사랑, 범죄와 죽음을 다루고 있는 이 영화는, 둘도 없는 친구였던 누들스와 맥스, 그리고 연인인 데보라를 통해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과 우정, 그리고 배신의 인생 이야기가 애절한 엔니오 모리코네의 아름다운 음악과 함께 그려지고 있다. 여기에 루마니아 출신의 세계적 팬플루티스트인 게오르그 장피르의 주옥같은 선율이 듣는 이의 가슴을 저미게 하는 이 영화는 가히 영화도 영화음악도 모두 최고 걸작 반열에 오를 가치가 충분하다 하겠다.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는 세르지오 레오네가 평생 간직해온 ‘드림 프로젝트’였다. 70년대 후반 연출보다는 제작에 더 힘을 쏟았던 그는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를 만들기 위해 <대부>의 연출제안을 거절했을 정도였다. 스파게티 웨스턴 영화들을 통해 상당히 기묘한 스타일을 지닌 감독쯤으로 인식됐던 레오네는 이 영화를 통해 거장다운 실력을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는데, 과거, 현재, 미래를 정교하게 오가면서 진행되는 사건은 미스터리하면서도 매혹적이기까지 하다.

원작은 "HOODS"라는 소설로 당초 10시간짜리 러프 컷을 수정한 레오네의 1차 편집본은 6시간짜리이고 디렉터 컷(현존하는 완전한 감독 공인판)도 229분짜리 분량으로 만들어졌으나, 흥행을 고려한 제작사가 무려 89분을 잘라낸 2시간 19분짜리 필름으로 개봉시켰으니, 결과적으로 평론가들의 악평과 흥행 참패를 겪어야 했고, 10년이 지난 후에야 감독 판이 재개봉되어 제대로 된 평가를 받을 수 있었다. 내가 이 영화를 처음 만난 것은 1984년 명보극장 개봉 당시인데, 132분이라는 (지금으로서는)어처구니없는 러닝 타임에도 불구하고 그 때의 충격과 매혹은 여전히 기억을 지배할 뿐 아니라 광적 지지자로까지 바꿔놓을 정도였으니, 단언컨대 내가 무덤까지 가지고 갈 단 한 편의 영화가 있다면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일 것이다.

영화에는 유머러스한 장면들도 꽤 등장하는데, 이를테면 어린 창녀의 환심을 사기위해 슈크림을 사들고 찾아간 ‘짝눈’이 그녀를 기다리는 동안을 참지 못하고 야금야금 핥다가 기어이 다 먹어치우는 장면이라든지, 보석상을 턴 맥스 일당이 훗날 안주인과 재회하자 복면으로 얼굴을 가림으로써 그녀의 기억을 되살려주는 장면 등은 가히 레오네 다운 발상으로 여겨진다. 사랑하는 여인보다 손 안의 슈크림이 더 간절한 소년의 심정은 얼마나 절절하던가! 또한 출옥한 누들스가 데보라와 만나 야연을 즐기던 시퀀스도 잊을 수 없으니, 이 장면에서의 대사는 이렇다. “미치지 않기 위해선 바깥세상은 다 잊어야 했어. 하지만 그래도 잊혀 지지 않는 건, 도미니크였어. 총 맞고서 ‘나 넘어졌어.’ 라고 말하던 아이 말이야. 그리고 데보라...너!”

숱한 밤, 나를 갈색추억 속으로 빠져들게 만들었던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 휘파람 불며 브룩클린 다리 밑을 걷던 다섯 명의 소년들을 어찌 잊을 수 있을까. 이제 필름으로, 그것도 현존하는 가장 완전한 판본으로 그들을 다시 만날 수 있다니 어찌 가슴 설레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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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blog.daum.net/polelate BlogIcon Arti  수정/삭제  댓글쓰기

    슈크림을 사들고간 아이는 '짝눈'이 아니라 '펫시' 였던것 같은데요...^^
    파란 눈동자가 인상적이었던 아이...

    2008.07.18 19:21

길 위에서 영화를 만나다 ①

그리고... 2008.07.14 14:41 Posted by woodyh98

강민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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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으로 밟는 남도 땅은 뜨거웠다. 8월의 마지막 주, 서울에서 벗어나 경상남도 진주에서 아는 분과의 조우를 마치고 꼬박 두 시간이 걸려 전라남도의 땅을 밟았다. 단 한 번도 남도로 내려온 적이 없고 함께 여행을 하는 동행도 없던 터라 모든 것이 신기했다. 다만 입을 꾹 다물고 내리쬐는 햇빛을 혼자 대하기에는 약간의 외로움이 느껴졌다.

여름에는 습기와 고온으로 숨이 제법 막힌다는 남도의 더위. 지금 내가 밟고 있는 이곳이 나에게 특별하게 다가오는 이유는 바로 내가 사랑하는 두 영화의 모든 것이 공존하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이청준의 단편집을 원작으로 한 임권택 감독의 두 편의 영화 <서편제>와 <천년학>은 전라남도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굽이굽이 산길과 논밭을 걸어 다니며 노래를 부르고 세월을 읊던 그들의 모습이 문득 눈앞을 가로막았다. 나의 등에 올려진 배낭과 카메라는 조금 무거웠지만 다시 한 번 신발 끈을 조이고 『선학동 나그네』, 영화 <천년학>의 배경이 된 장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몇 십 년 인생을 풀어내는 단 하루의 저녁, <천년학>의 선자마을

보성에서 장흥으로 넘어오는 길은 험했다. 애초에 ‘걸어서 남도를 돌아다녀보자’ 라고 생각했던 나의 무지를 조롱하듯 산길에는 버스가 아니면 지나갈 수 없도록 차도가 놓여있었다. 장흥에 도착하자마자 장흥 터미널에서 <천년학>의 촬영지로 유명한 선자마을이 있는 버스를 찾았다. 선자마을은 장흥에서 약 40분을 달려 회진에 내려 다시 30분을 걸어야만 했다.

회진으로 향하는 버스에 올라 남도에 내려온 지 이틀 만에 처음으로 시원한 에어컨 바람을 맞았다. 이곳에 내려와서 느낀 것은 주민들 대부분이 나이 드신 분들이라는 것과 공기관에서 근무하는 사람들이 아니면 좀처럼 젊은이들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사방이 논으로 둘러싸인 한적한 길의 고요를 뚫고 버스에서 나는 엔진소리를 들으며 버스 안을 훑었다. 큼지막한 버스에 무거운 배낭을 짊어 진 여행객 복장을 갖춘 사람은 나뿐이었다. 그런 나를 신기한 눈으로 바라보시는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시간이 지나자 곧 고개를 돌려 당신들끼리의 담소를 나누기 시작했다. 버스 내에서도 역시 젊은이는 나 하나 뿐. 새삼 전형적인 시골 땅을 달리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할아버지, 선자마을 가는 길이 이쪽 맞나요?”
“선자마을? 선자마을은 뭣 땜시 가려고? 아가씨, 이 더운디 거까지 걸어가려고?”
“네. 제가 선자마을에 볼 일이 있는데 방향을 잘 모르겠네요.”
“이 도로를 따라 쭉 가면 선자마을이 나오긴 하는디, 걸어가기는 좀 힘들 터인데. 가다가 사람들 나오면 또 물어보구 허라구.”





회진읍의 버스 정류장에 내려서 무작정 앞으로 걷다가 지나가시는 할아버지께 길을 물었다. 도로를 따라 쭉 가기만 하면 선자마을로 향한다는 할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다시 걸어가기 시작했다. 전라남도를 여행하면서 지도 하나 가져오지 못한 것이 후회가 되었지만 길을 잃을까 걱정하는 것도 잠시, 읍내에 군데군데 놓인 표지판은 ‘천년학 촬영지’로 가는 길을 너무나 친절하게 알려주고 있었다.

선자마을로 가는 길은 할아버지의 말씀처럼 멀었다. 회진읍내에서 한참 벗어나 있는 마을인줄은 알았지만 찌는 듯한 남도의 더위는 매번 앞길을 가로막으려 필사적이었다. 회색 도로에는 화물을 싣고 가는 트럭들이 질주하며 지나갔고 그 위를 걷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몇 십 년 전만해도 흙이 구르는 길로 범벅이었을 이 도로는 <천년학>의 동호가 선학동으로 가기 위해 지나갔던 발자국이 남아있는 길이다. 무미건조한 회색 도로를 따라 한참을 걸었다. 커다란 고개를 넘어가니 쭈욱 뻗은 도로 한 켠에 작은 건물이 하나 보인다. 눈에 익은 소나무. 익숙한 산의 모양새. 이곳이 선자마을의 주막, 동호가 하루를 묵고 가면서 자신의 인생을 풀어낸 그 주막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포구에 물이 없고 나무가 저 모양인디 학인들 날라 들것소. 하긴 지 마음에 그 시절을 잡아 놓고 학이 다시 날라들기를 기다리는, 그런 한심한 인간도 있으니께.” -<천년학> 中


<천년학>에서 동호의 아버지 유봉은 어린 송화와 동호를 물이 흐르는 선학동으로 데리고 와서 선학동의 주축을 이루는 학 산을 보여준다. 학이 날개를 펼친 채 날아오르고자 하는 모양새를 그대로 본 딴 듯한 산을 보며 어린 동호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시간이 흘러 선학동에 다시 찾아온 그는 변해진 선학동의 모습을 낯설게 바라보며 오랜 애환이 묻은 선학골의 주막에서 평생 주막을 지키던 사내와 술잔을 기울인다.

‘촬영지’라는 간판이 크게 써 붙여진 선자마을 입구의 작은 주막의 뒤로 영화 속 동호가 느꼈던 황량함을 보여주는 곱게 포장된 도로가 여전히 달리고 있었다. 회진읍에서 이곳으로 걸어오기를 한 시간. 고개를 숙이며 익어가는 벼들 사이로 지칠 대로 지친 나와 나의 배낭은 망설일 것도 없이 쉬어야만 한다는 판단을 내렸다. 멀리 마을이 보이고 마을로 가면 시원한 물 한 잔 얻어먹을 수 있을 것 같다. 여행길에서의 냉수 한 모금은 고급 음식점의 잘 차려진 식탁보다 반갑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마음은 좀처럼 움직이지 않는다. 조그맣게 보이는 마을의 모습을 한번 손가락으로 살짝 눌러보고 바깥채 쉼터에 짐을 내려놓았다. 풀들만 무성한 주막의 모습이 익숙하지 않았다. 누군가 살 법한 번듯한 집이라고 생각해 조심스레 창문을 닦으며 안쪽을 들여다보았지만 역시 아무도 살지 않는다. 촬영이 끝나고 발길이 뜸해졌기에 먼지가 수북하게 앉은 작은 집에 지금 숨 쉬고 있는 생물이라고는 풀들을 제외한 나와 벌레들 뿐 인 듯 했다. 마을은 멀리 있고 보는 사람도 아무도 없었다. 바로 왼쪽에 바다가 있고 배들도 여러 척 있었지만 배 위에 올라있는 사람도, 바다를 구경하는 사람도 보이지 않는다. 먹이를 기다리는 거미에겐 미안하지만 거미줄을 대충 휘휘 저으며 치워버리고 배낭을 베고 먼지더미로 풀썩, 몸을 던졌다.

새벽을 꼬박 지새우던 동호의 눈빛이 떠올랐다. 동호가 가진 것이라고는 그의 인생의 굴곡을 짐작하게 하는 눈빛 하나밖에 없었다. 그는 남도 천지를 떠돌다가 이 작은 주막에 와서 송화의 흔적을 찾았지만 그에게 주어진 것은 송화가 다녀갔던 곳과 그녀가 만났던 사람들에 대한 몇 가지의 이야기밖에는 없었고, 그의 앞에 놓인 것은 술 한 잔과 묵은 김치 한 그릇이었다. 자신이 사랑했던 누이 송화를 만나기 위해 그가 이곳으로 달려온 것은 아닐 것이다. 동호가 자신의 마음을 넌지시 술잔에 토해내고 있을 그 시간에 송화는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몸을 바로하고 앉아 다시 주막을 둘러봤다. 한참을 누워있는 동안 주막 앞의 도로를 지나간 차는 다섯 대가 넘지 않았다. 오늘 아침 장흥근처의 찜질방에서 물을 담아두었던 물통을 꺼내들었다. 미지근하지만 그런 것을 따지기엔 햇볕이 너무 뜨거웠다. 물을 마시다보니 문득 옆에 놓여 진 뒷간이 눈에 들어왔다. <천년학>에서 현실과 환상이 교차하는 시간은 단 한번 뿐이다. 주막 주인은 밤새도록 동호와의 술자리를 마치고 이른 아침 화장실로 볼일을 보기위해 몸을 옮긴다. 그가 일을 마치고 뒷간에서 나오는 바로 그 순간 동호는 차분히 앉아서 유봉이 자신에게 남긴 북을 바로 세운다. 화장실에서 빠져나오려 했던 주인 사내는 동호의 모습을 보고 황급히 몸을 숨긴다. 동호는 북을 들고 사내는 그런 그를 바라본다. 동호가 북을 치는 순간, 논으로 바뀐 황량한 벌판에는 물이 차오르고 송화는 그의 곁에서 소리를 한다. 그리고 곧, 두 마리의 학이 함께 날아오른다.





<천년학>은 ‘소리’를 아낀다. 송화의 목소리는 <서편제>에서와 같이 여전히 애절하지만 그것 자체가 마음을 움직이지는 않는다. <서편제>를 달려온 동호와 송화의 이야기는 <천년학>에서 이어지나, 사실은 그들의 마음속에 응어리진 한을 토해내기보다는 서로를 향한 마음을 더 많이 보여준다. 송화와 동호에게 아버지였던 유봉이 가르쳐준 ‘소리’라는 것은, 반드시 지나가야 할 길과도 같은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그 길 위에서 사랑을 노래한다. 이복누이 송화를 향한 동호의 사랑, 동호를 그리워하는 송화의 마음, 그리고 그 주변에서 그저 자신의 사랑을 태울 수밖에 없던 주막 사내의 이야기가 교차할 때 선학동에는 학이 날아든다. 태풍을 맞고 을씨년스럽게 변한 소나무도, 그리고 동호가 어깨에 짊어진 세월의 굴레 또한 학이 날아오르는 그 순간만큼은 깃털처럼 가벼워진다. 과거도 미래도 생각하고 싶지 않게 하는 바로 이 순간은 <천년학>의 가장 아름다운 장면이다.

카메라를 한 손에 들고 한참동안 생각에 빠져 있다가 시끄러운 오토바이 소리에 다시 고개를 들었다. 나를 빤히 쳐다보며 주막 뒤편을 가로지르는 오토바이는 얼마 달리지 않아 아까 보았던 주인 없는 배들이 있는 작은 방조제 앞에서 멈추었다. 커다란 배낭을 풀고 휴식을 취하는 이방인을 신기하다는 듯 바라보는 아저씨의 시선을 뒤로하고 다시 한 번 물 한 모금을 들이켰다. 급하게 걸어온 아까와는 달리 제법 많은 것들이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주막 주변에는 코스모스도 피어있었고 잡초라고 살아 있는 것들에도 꽃이 피어있었다. 아까 내가 없애다시피 해버린 거미줄에 매달려 있었던 거미는 열심히 다시 거미줄을 치고 있었다. 동호가 다녀간 이후 이 작은 건물에는 많은 시간이 흘렀을 것이다. 기둥을 잡고 이따금씩 사람이 지나갈 때마다 혹시 <천년학> 때문에 주막을 찾지는 않을까 기대하며 자동차와 오토바이를 바라보았지만 아무도 이곳에 내리는 사람은 없었다.

될 수 있다면 내가 앉아있는 이곳에서 노을이 지는 것을 보고 싶다. 가능하다면 이곳에서 별이 뜨는 것을 보고 싶다. 그러나 마음은 움직였지만 현실적으로 그것은 불가능했다. 누군가 작고 보잘 것 없는 이 건물에서 발길을 쉽게 떼지 못하는 나를 본다면 아마도 ‘청승맞다’라고 했을 것이 분명하다. 여기에는 마을버스도 하루에 한두 번 들어오는 것이 전부이고 지나가는 사람조차 뜸하기 때문이다. 영화에서 존재하던 그들은 선자마을의 주막을 떠난 지 이미 오래다. 겉멋만 잔뜩 들은 것처럼 나도 이 주막에서 조용히 탁주에 작은 안주를 곁들여 밤을 지새우고 싶었다. 동호처럼 너무 많은 이야기를 나도 이곳에서 풀어내버린 것일까. 오늘 내에 반드시 완도로 넘어가야 하는 나의 일정과는 달리 처음 왔던 그때처럼 발걸음은 좀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회진에서 선자마을로 넘어온 지 벌써 세 시간째. 입구에서 주저하는 나에게 회진으로 갈 예정이면 태워주겠다는 선한 인상의 아저씨가 요란한 트럭소리를 내며 나를 불렀다. 걸어왔던 길이니 다시 한 번 걸어볼까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지만 아저씨는 버스는 이미 끊겼고 힘든 일도 아니니 어서 타라며 재촉했다. 갈등 끝에 트럭에 오른 나에게 아저씨는 어쩐 일로 발길 뜸한 이 동네로 왔냐며 말을 걸었다. 트럭의 백미러로 학산이 어스름히 보였다. 이것저것 질문을 하는 아저씨와 대화를 하면서 덜컹거리는 트럭 뒤로 고개를 내밀어 슬그머니 다시 학산을 눈에 담았다.

(편집자 주: 강민영의 남도여행기는 다음 주 <서편제>의 촬영지로 이동합니다. 독자여러분의 많은 기대와 열독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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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bidon  수정/삭제  댓글쓰기

    천년학을 보지 못했네요 임권택감독님의 영화의 영상은 상상만으로도 가늠이 갑니다 보고 나서 이글을 다시 떠올려야 할듯.......(어릴때부터 일년에 한두번 남도여행을 다녔었는데 차가 있고 부터는 오히려 소홀해 졌네요 버스타고 다닐때 기억만이 남은듯...)

    2008.07.14 16:27
  2. Favicon of http://daumtop.tistory.com BlogIcon TISTORY 운영  수정/삭제  댓글쓰기

    안녕하세요.티스토리 입니다^^
    회원님의 포스트가 현재 다음 첫화면 카페.블로그 영역에 보여지고 있습니다. 카페.블로그 영역은 다음 첫화면에서 스크롤을 조금만 내리시면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회원님께서 작성해 주신 유익하고 재미있는 포스트를 더 많은 분들과 함께 나누고자 다음 첫화면에 소개 하게 되었으니, 혹시 노출에 문제가 있으시다면 tistoryblog@hanmail.net 메일로 문의주시기 바랍니다.
    앞으로도 티스토리와 함께 회원님의 소중한 이야기를 담아가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즐거운 하루 보내세요!

    2008.07.16 14:13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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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오이마주(neoimages)와 영화 깊게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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