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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7.11.12 보졸레 누보와 [사이드웨이] (2)

보졸레 누보와 [사이드웨이]

필진 칼럼 2007.11.12 15:46 Posted by woodyh98


삼청동 길을 따라가다 만나는 어느 건물 2층에는 꽤 알려진 와인 바가 있다. 은은한 조명과 귀를 간질간질하게 만드는 재즈넘버가 흐르고 칠레 산 '까베르네 소비뇽'이 입안 가득 향을 품기며 짝 달라붙을 때면 그 순간만큼 나는 이세상의 왕이 된다. 가늠하기 힘든 천차만별의 맛만큼이나 품종과 가격이 다양한 와인은, 서민의 가정식탁에서 명망가의 지하보관소에 이르기까지 찬란한 역사와 빛깔로 자신을 뽐내고 있으니, 우연한 기회로 접한 맛에 반해 한 병 거뜬히 비운 뒤 오는 기분 좋은 취기를 누가 알 것인가!

어김없이 ‘보졸레 누보’ Beaujolais Nouveau 의 계절이 돌아왔다. 백화점과 대형마트 할 것 없이 동네 편의점에도 보졸레 누보 출시 안내문이 붙여져 있으니 말이다. 매년 11월 셋째 주 목요일이 다가오면 쉽게 볼 수 있는 모습이다. 대체 언제부터 우리 국민들이 와인애호가가 되었을까?

1990년대 초중반 이 땅에는 재즈 열풍이 불었다. 너나 할 것 없이 재즈를 들었고 이야기했으며 홍대를 위시해 젊은이들의 집합소마다 유행처럼 재즈 바가 들어섰다. 사실 말이 좋아 재즈 바이지, 재즈에 대해 문외한인 업주와 종업원이 최소한의 오디오시스템을 가지고 귀에 익은 레퍼토리를 들려주는 것이 고작인 업소도 많았다. 수준 미달의 뮤지션으로 라이브 연주를 들려주던 곳은 또 얼마나 많았던가. 따지고 보면 재즈열풍은 90년대 거품경제와 쿨 한 라이프스타일의 유행이 빚어낸 기형아에 다름 아니었다. 그럼에도 버번위스키나 데킬라를 마시며 말보로를 피워대면서 빌리 할리데이와 존 콜트레인의 소리에 취하는 것이 더 없이 멋져 보였던 시절이었다. 뒤이어 시가 바와 더불어 보졸레 누보가 일반인들 사이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보졸레 누보가 국내에 들어온 역사는 꽤 오래다. 특급호텔마다 매년 11월이면 주요고객을 대상으로 시음회를 열곤 했으나, 세간에 알려질 기회가 없었는데, 1999년을 기점으로 언론에 부각되면서부터 24시간 편의점까지 보졸레 누보를 예약 받는 기이한 현상이 벌어지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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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다시피 보졸레 누보는 프랑스의 부르고뉴 주 보졸레 지방에서 9월에 수확한 포도를 저장했다가 11월 까지 숙성시킨 뒤 첫 째 목요일 밤 0시에 출시하는 그해 첫 번째 와인을 말한다. 그러니까 2007년도 처음 제조된 소주를 일반에 공개하는 것과 하나도 다를 바가 없다는 얘기다. (부르고뉴의 다른 포도재배지와는 달리 보졸레 지방은 오래 숙성할 수 없는 ‘가메’ 품종을 재배하는 서민용 와인의 주산지이다)아직 누구에게도 맛을 보인 적이 없는 최초공개라는 것인데, 영화로 말하자면 월드-프리미어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우리 국민의 경우 ‘세계최초’ ‘세계최고’등의 수식어가 붙는 것을 좋아하다 보니 이런 단어 앞에는 사족을 못 쓰기 일쑤지만, 그해 프랑스 서민용 와인을 최초로(그렇다고 가장 첫 번째 병도 아닌 마당에) 마시는 것이 뭐 그리 대단한 일이라고 온 유통업계가 팔을 걷어붙이고 나서는지 모르겠다. 앞서 얘기한 와인 바의 주인은 “처녀의 순결을 중시여기고 좋아하는 우리나라 남성들의 성적 취향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냐”고 농을 했지만 어쨌든 흥미로운 현상임에 분명하다. 그런데 정작 와인 맛만 놓고 보자면 그다지 좋은 품질의 것이 아니다. 불과 2달의 숙성을 거친 것이니 왜 안 그렇겠는가. 그런데도 보졸레 누보에 열광하는 이들이 의외로 많으며, 와인 바는 물론이고 레스토랑에서까지 보졸레 누보 시음회를 개최한다. 이렇다 보니 별 가치 없는 와인 한 병에 턱 없이 높은 가격을 붙이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오죽하면 전 세계적으로 한국의 와인 값이 가장 비싸다는 얘기가 나올까.

와인 얘기를 하자면, 2005년 미국 내 비평가협회 작품상을 모조리 휩쓴 알렉산더 페인 Alexander Payne 감독의 [사이드웨이_Sideways](2004)를 빼놓을 수 없다. 영화에는 캘리포니아의 와인 산지로 여행을 떠나는 두 친구가 등장하는데, 갖은 와인의 향연이 펼쳐지는 가운데, 잠시 샛길로 빠졌던 두 남자가 제 자리를 찾아갈 때 즈음이면, 관객은 이미 반쯤 취하게 된다. 포도농장을 배경으로 영화 내내 와인 시음을 하는 장면에서 취하고, 담백한 일상의 에피소드를 넉넉한 풍광 안에 거둬들인 영화의 마력에 취하게 되는 것이다. 이렇듯 탈현실적 여유와 감미로운 나른함이 진한 와인 향처럼 풍겨나는 영화 한편을 만나는 기쁨을 어떻게 말로 표현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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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드웨이]에서 캘리포니아의 멋진 풍광과 와이너리를 대리 체험하는 큰 즐거움만큼이나 영화의 품격을 높이는 데 한몫한 재즈 스코어를 듣는 재미도 쏠쏠하다. 와인과 재즈는 확실히 탁월한 결합이지만 자세히 귀 기울이면, 빌리 홀리데이 보다 새러 본이, 허비 행콕 보다는 키스 쟈렛이, 존 콜트레인보다는 아트 페퍼에 가까운 선율들이 흐르고 있음 또한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소리는 미미하여 영화를 방해하지 않고 와인과 동일선상에 서서 두 남자의 행보를 말없이 지켜볼 뿐이다. 마치 알렉산더 페인의 시선처럼.

삶이 무료하거나 곤죽이 될 정도로 지쳐있을 때 우리는 여행을 통해 재충전하곤 한다. 하지만 여행이란 꼭 물리적 장소를 바꾸는 것만은 아니다. 하던 일을 잠시 멈추고 거리를 걷거나 음악을 듣는 것, 또는 [사이드웨이] 같은 영화 한편을 보는 것 역시 여행의 다른 모습일 터이다. 게다가 쉼 없이 마셔대는 와인과 청명한 잔 부딪히는 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당장이라도 와인 한 병 사고 싶어 못 견디게 될 것이다. 이 영화가 한국에 개봉되던 해에는 와인 동호회들을 중심으로 와인 바에서 영화 상영회가 열리기도 했다. 와인과 함께하는 영화 관람이라. 멋지지 않은가. 이런 영화감상은 몸과 영혼에 더 없이 유익할 테니 그야말로 오감이 만족스러울 터이다. 그렇다면 올해 11월의 셋째 목요일에는 사랑하는 연인과 또는 친구와 혹은 영화를 좋아하는 그 누구와 저렴한 와인 한 병 준비해놓고 [사이드 웨이]를 다시 한 번 보는 것이 어떨까? 오래 묵은 좋은 와인 맛만큼이나 시간이 지날 수 록 가치를 더 해가는 이 영화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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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www.sunblogged.com BlogIcon easysun  수정/삭제  댓글쓰기

    글 잘읽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보졸레 누보를 마셔야 하지 않을까 생각하던 참이었습니다. 그냥 봄에는 딸기, 여름에는 수박 먹듯이요, 가을엔 전어철이라니 전어 먹으러 가듯이요. 가을이 채 무르익기 전에 새콤하고 살짝 떫은 맛에 풋사과 먹는 것처럼 그렇게 와인을 좋아하는 사람들끼리 모여 보졸레 누보 마시는 것도 일상의 기쁨이 아닐까 싶습니다.
    오늘 유난히 '사이드웨이'에 대한 얘기가 많네요. 꼭 한번 봐야겠어요.
    너무 좋은 글이라서 블로그 코리아 와인채널에 링크를 걸어 두겠습니다.

    2007.11.16 13:16
  2. Favicon of https://neoimages.tistory.com BlogIcon woodyh98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도 잘 모르지만 와인은 오래 묶을 수록 맛나다면서요... 아, 좋은 와인 먹고잡네요.

    2007.11.16 23:11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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