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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8.08.19 [옛날 옛적 서부에서] 웨스턴이 시간을 다루는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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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태균



세 명의 총잡이 사내가 기차 역으로 들어선다. 예의 범절 따윈 쓰레기통에 쳐 박은 듯한 무례한 사내들, 이들은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다. 아마도 그 대상이 다음 도착할 기차에서 내릴 누군가인듯 한데 중요한 것은 세 명의 사내가 기차역에서 누군가를 기다리는 그 상황 자체가 아니라 기다림의 시간을 묘사하는 방법에 있다. 예나 지금이나 차간 배차시간이란 영 지루하기 짝이 없기 마련이다. 그 지루한 시간 동안 카메라는 땀과 먼지로 범벅이 된 사내들의 너저분한 얼굴을 화면 가득 담아 낸다. 이들에겐 별 다른 움직임도 없다. 파리가 달려들면 그저 미간을 살짝 찡그려 보일 뿐이고 머리 위로 떨어지는 빗방울은 모자 챙에 흥건히 고일 때까지 내버려 둔다. 그러고 보면 이 세 명의 사내들은 지저분하고 무례할 뿐만 아니라 게으르기까지 하다. 몇 발짝 옆으로 비켜 서고 팔 한번 휘휘 저어주면 될 것을 그마저도 귀찮다는 듯, 좀처럼 움직이려 들지를 않는다. 표 값 내라는 역무원 말에도 댓구조차 없다. 그저 우악스런 얼굴을 찌푸려 보이며 저리 비키라는 무언의 시위만 할 따름이다. 열차가 도착하기 전까지의 시간은 폭풍전의 고요와도 같은 정적에 화면을 차지하고 들어선 세 사내들의 게으름과 더불어 더더욱 더디게 흘러간다. 영화평론가 이상용씨가 필름2.0에 기고한 글에서 말한 것처럼 이것은 그냥 기다림도 아니고 웨스턴의 기다림이다. 이제 곧 오랜 지루함을 깨고 총성이 울려 퍼지게 될 것이다. 그러나 달리 보면 이 영화의 오프닝은 누군가에게 들이 닥친 죽음 직전의 시간을 묘사한 것이기도 하다.

돌이켜 보면 가장 금쪽 같아야 할 시간들임에도 불구하고 세 총잡이의 마지막 휴식 시간은 전혀 거창하지 못하게, 잔뜩 늘어지다가 속절없이 흘러가고 만다. 한 때 기세 등등했을 그들의 삶은 지루함을 남겨 둔 채 황야의 먼지바람 속으로 파묻혀 버리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허무한 죽음과 죽음 직전의 별 볼일 없는 시간들은 세르지오 레오네 감독이 웨스턴의 신화를 바라보는 그 시선과도 일치한다. 미국의 건국신화라는 서부의 전설도 알고 보면 별 것 아니더라는 얘기. 물론 영화의 처음은 여느 웨스턴 무비와 별 다를 것 없이 시작된다. 마지막도 마찬가지다. 총잡이 사내가 마을에 들어선다. 여기에 그 사내가 간직한 사연과 그 밖의 사건들이 뒤엉키고 모든 사건이 해결 된 후 사내는 고독한 모습으로 마을을 떠난다. 그러나 [옛날옛적 서부에서]는 일군의 카우보이들이 말 달리며 황야를 가로지르는 류의 호방함과는 거리가 먼 영화이다. 태양은 뜨겁게 내리 쬐고 사건의 진상은 천천히 드러나며 그 내막에 대해서 속 시원하게 말해주는 일도 없다. 화면 전체를 휘감고 있는 답답하다 싶을 정도의 느릿함과 건조함은 실은 ‘이들에 대해 그리 긴 이야기 늘어놓고 싶지 않다’라는 감독의 선언처럼 느껴질 정도이다. 영화의 실질적인 주인공이라 할 하모니카 사내의 사연은 단 한번도 제대로 설명되지 않는다. 대충 짐작이 가는 이야기이긴 하지만 어슴푸레하게 보이는 카우보이의 실루엣만 반복해서 들이미는 것에는 답답증이 생길 법도 하다.

반면 우악스러운 총잡이 사내들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여인 '질'의 이야기는 좀 더 명확하게 설명된다. 밑바닥 생활을 청산하고 강인해 보이는 팔뚝을 지닌 남자와 결혼해서 열심히 살아보려던 이 여인의 꿈은 도착과 동시에 박살이 나버리고 마는데 그 이면에는 철도 부지를 둘러싼 총잡이와 자본가의 시커먼 속내가 숨겨져 있다. 그렇다. 예나 지금이나 문제는 땅, 좀 더 정확히는 그 땅을 둘러싼 자본의 흐름이다. 보통 사람의 꿈을 갈취하는 악덕 자본가의 존재도 여전하며 그들 곁에서 떡고물을 받아 챙기며 폭력을 휘둘러대는 무뢰배 역시 마찬가지다. 그러나 단순히 무력을 앞세워 강도 짓을 일삼던 서부의 무법자들은 이 영화에 이르러 한층 진화된 형태로 나타나게 된다. 자본가를 등에 업고 안전하고 효과적이며 지속적인 이윤 추구를 위하여 철도 부지의 이권 다툼에 적극 개입한 프랭크 일당은 바로 그 진화된 악당들이며 맥베인 일가를 죽였다는 누명을 쓰게 되는 샤이안 일당은 고전적인 형태의 무법자들이다. 여기에 맥베인의 땅에 얽힌 음모를 밝혀내고 막아내는 하모니카 사내는 레오네 감독의 전작들에서도 등장하는 솜씨 좋고 머리도 좋은 총잡이의 재래라 할 만하다. 하지만 자신의 이익 보다는 해묵은 원한 관계에 더 집착한다는 점에서 그는 구시대와 새로운 시대 양쪽에 한발씩을 걸치고 있는 인물인 셈이다. 자, 이쯤 되면 하모니카 사내의 복수극보다 새로운 삶을 찾아 왔다가 얼결에 사건에 휘말리게 되는 질의 이야기가 선행되는 이유를 알 수도 있을 듯 하다.



이 모든 것은 말과 총에 의해 좌우되던 서부시대의 종말의 징후, 세 남자의 물고 물리는 접전은 저물어 가는 자신들의 시대에 대한 한바탕 살풀이 굿판이나 마찬가지며 이곳에 머물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에 대한 씁쓸한 자조에 다름 아니다. 게다가 레오네 감독의 전작들에서 여성 캐릭터가 가련한 희생양이거나 존재감조차 희미했던 것에 반해 [옛날 옛적 서부에서]의 질은 총을 든 사내 앞에서도 기죽지 않고 “더러운 기억만 늘어날 뿐 여자는 그런 일로 죽지 않아”라고 맞받아치거나 굴욕을 감수하고서라도 살아남을 만큼 강하고 모진 캐릭터로 거듭난다. 세 남자는 모두 한번씩은 질과 조우하며 그녀의 땅 스위트 워터에 발을 들여 놓지만 어느 누구도, 질과 그녀의 땅을 소유하지는 못한다. 이유도 제 각각이다. 그녀를 자신의 어머니와 동일시해서, 단지 힘으로만 정복하려 들어서, 또는 가슴 속에 숨겨진 죽음의 그림자를 거둬내지 못해서. 그러나 가장 큰 이유는 이들 세 남자가 노동에 의한 건설적인 측면과 그 땀방울 보다는 총성에 의한 파괴와 그것들이 풍겨내는 피비린내에 더더욱 익숙한 인물들이기 때문이다. 처음 텅 빈 황야에서 시작된 영화 속의 공간은 뒤로 갈수록 새로운 건축물과 땀 흘려 일하는 노동자들로 채워지게 된다. 물론 그 밑거름이 된 것이 서부 시대의 개척자들이 일궈낸 폭력과 착취의 시간들이었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바로 그 시간의 흐름이 그들의 퇴장을 요구하게 되었다는 점만이 다를 뿐이다. 그래서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마지막 시간을 늘려보기라도 하겠다는 듯 영화 속의 서부개척사 역시 퇴장을 미루며 주저하고 미적거린다.

하모니카 사내가 간직한 사연이 영화가 끝나기 직전에야 겨우 드러나는 것도, 금새 이루어질 듯 했던 프랭크와 하모니카 사나이의 대면이 돌고 돌아 한참 뒤에야 이뤄지는 것도 허망하게 사라져 가는 개척시대의 끝자락을 조금이라도 붙잡고 늘어지려는 헛된 몸부림에 불과하다. 마치 영화의 도입부에서 조금 있으면 하모니카 사내의 총탄에 스러질 세 총잡이의 별볼 일 없는 마지막 시간이 그러했듯이 말이다. 이들의 퇴장이 필연적이라는 또 다른 징후는 철도 건설 현장을 가득 채운 노동자들의 부지런함과 확연히 대비되는 총잡이들의 게으름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아마도 [옛날옛적 서부에서]의 총잡이들은 웨스턴 역사상 가장 게으른 총잡이들일 것이다. 오프닝의 세 사내가 그러했듯이 영화 속의 총잡이들은 하나같이 움직임이 드물다. 속전속결로 끝나는 서부극의 결투가 지닌 특성상 애초부터 움직임에 제한이 있을 수 밖에 없긴 하지만 이들에게는 여타 서부극의 총잡이들이 보여주던 기본적인 움직임마저 배제되어 있다. 하긴, 한 건 제대로 올린 다음에 주색잡기에 골몰하는 것이 일상의 전부일 그들에게서 근면 성실함을 찾는 일 자체가 어불성설일 터. 땀으로 번들거리는 얼굴을 하고 느릿하게 움직이다 단 한번의 손놀림으로 자신을 증명하는 이들은 공룡과도 같은 존재들일 뿐이다. 강하고 난폭하되 곧 멸종될 운명을 지닌 슬픈 짐승. 프랭크가 하모니카 사내와의 결투를 위해 돌아오는 게 만든 원동력도 바로 그 짐승의 본능과 흡사한 것이 아니었을까? 그들은 죽을 자리를 찾는 짐승처럼 북새통을 이루고 있는 철도 건설 현장을 빠져 나와 텅 빈 황야를 향해 느릿느릿 걸어간다.

북적대는 건설 현장 보다는 역시 먼지 바람 휘몰아치는 황야가 이들에게 더욱 잘 어울리는 장소일 것이다. 비장한 음악과 마침내 밝혀지는 하모니카 사내의 사연, 그리고 전광석화와 같은 결투의 끝. 그러나 그 단발마의 총성은 노동현장의 소음에 이내 파묻혀 버리고 만다. 도입부의 결투 장면이 그러했듯 기다리고 기다렸던 최후의 결투도 그 끝은 다소 허망하다. 마지막 총잡이라고도 할 수 있을 프랭크와 하모니카 사내의 대결이 철도 건설현장에 밀려 화면의 지배자로 당당히 자리잡지 못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보다 더 큰 이유는 이들의 대결이 시간의 소멸을 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누군가의 등장과 퇴장으로 간략히 요약할 수 있는 이 영화가 시종일관 뿜어내는 것은 저물어가는 시대에 대한 아련한 정취이다. 조롱과 향수라는 서부개척사에 대한 상반된 시선은 일견 양립할 수 없는 모순점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냉소 대신 깊은 한숨을 내쉬게 만드는 그 마법의 비결은 복수를 꿈꾸며 살아온 긴 세월을 가슴에 묻은 채 홀로 쓸쓸히 사라져 가는 사내의 뒷모습이 전하는 지독한 여운에 있다고 할 수 있을 터. 브론슨 페이스라 이름 짓고 싶은 특유의 찌푸린 인상으로 화면을 활보하는 찰스 브론슨은 친구도, 연인도, 그리고 이름도 없이 서부를 방랑하는 마지막 카우보이 역에 더할 나위 없이 어울려 보인다. 이 보다 더 좋을 수 없는 무드를 자아내는 엔리오 모리코네의 음악도 빼놓을 수 없다. 시간마저 굴절시켜 버릴듯한 황량한 사막과 계곡 속에서, 세르지오 레오네 감독은 그렇게 웨스턴이라는 장르의 정점을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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