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터데스크 관리자

도움말
닫기
적용하기   첫페이지 만들기

태터데스크 메시지

저장하였습니다.

2009 서독제 장편초청작 <경계도시2>

필진 리뷰 2009. 12. 15. 14:18 Posted by woodyh98
사용자 삽입 이미지

김시원

홍형숙 <경계도시2>

2003년에 제작된 이 다큐멘터리 영화에 대해 영화로서의 형식에 대한 논의를 하기엔 우선적으로 껄끄러운 지점이 있다. 영화가 소재주의에 함몰된 경향을 운운할 수는 있겠지만 무엇보다 이 영화가 소재로 삼은 대상에 대한 무지, 즉 송두율 개인에 대한 삶을 언론을 통해서 보도 받은 대로 알고 믿고 있었던 역사적, 정치적 무의식이 선명하게 드러나는 순간의 부끄러움을 사실 스스로도 숨길 도리가 없기 때문이다. 국내의 독립 다큐멘터리 운동의 시작이 된 공동체 중 하나인 서울영상집단에서 영화를 시작하여 지금까지 계속적으로 사회 정치적인 운동으로서의 다큐를 만들어오는 홍형숙 감독은 이 영화의 카메라를 여러 사람에게 옮겨 다니면서 찍게 한다(촬영자만 5-6명은 되었던 것 같다). 그녀가 카메라를 들지 않았을 때는 스스로 카메라에 등장해보이기도 한다. 여러 사람이 든 카메라에 담기는, 이 영화의 소재이자 주제인 송두율의 모습은 어떤 함축적 경계를 두고서 우리에게 다가온다. 감독의 관찰자적 내레이션이, 어떻게 보면 우리에게 송두율의 말보다 더 신뢰가 가는 광화문 전광판의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의 헤드라인이, 그가 검찰에 출두할 때만 쫓아다니는(즉 국내에서 주로 이루어진 그의 학술활동 등엔 관심이 전무하다시피 한) 기자들의 무식한 폭력에 가까운 취재 행태가 그를 계속 경계선 위로 몰아세우는 느낌을 준다.


송두율의 통일철학에 대한 핵심론은 변두리로 몰려나고 그의 배후 세력 캐기에 온통 집중하는 이 나라의 주류 언론들은 그를 정치인이나 연예인의 가십거리에 열 올리는 것과 별반 다를 바 없는 수준으로서 대한다. 당시엔 진실처럼 우리 위를 군림했던 이들의 명제와도 같은 주장들은 1년도 채 안되어 거짓임이 밝혀졌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그 당시 진실로 받아들였던 자신의 기억에 보다 절대적인 우위를 둔다. 송두율이 구속되는 이미지가 남았을 뿐, 그가 무죄가 되어 언론과 그로 인해 좌우지되던 남한 사회를 향해 가했던 일침을 제대로 본 사람도, 기억하는 사람도 드문 것이다. 게다가 그가 독일로 결국 돌아간 것, 남한 사회에서의 통일 관련 일을 접은 사실은 거의 아는 사람만 아는 일이 된 것이다.


송두율은 남한으로의 귀국을 결심했을 때 어차피 스스로는 경계인이기 때문에 국내의 어느 정도 부정적인 반응을 예상했겠지만 그것은 예상보다 훨씬 대단한 것이었다. 남한에서 사상적 경계선은 곧 회색지대나 다름없다. 대한민국의 경계엔 군사적 긴장(군인과 철조망)만이 흐른다. 그 곳은 사람이 있을 곳이 아니다. 그 곳은 이 나라에서 가장 위험한 지대이다. 자신의 identity에 대한 질문에 가장 먼저 nationality(대한민국 국민임)를 자랑스럽게 이야기할 만큼 우리는 한반도 경계선의 남쪽을 '내부(자아)'로, 북쪽을 '외부(타자)'로 인식한다. 우리는 이 경계의 '안'에 속한 것을 다행스럽게 여긴다. 그런데 밖에 소속된 자가 신분을 버젓이 유지한 채 이 안에 오려고 한다. 안과 밖을 평화적으로 통일하자며, 내 안의 타자를 발견하자고 한다. 이것은 우리의 identity의 존재적 근거를 위협하는 자의 그러한 발언이다. 대한민국 국민은 이 나라의 국경선을 구성하는 하나의 구성원이다. 우리에게 이 나라의 정체성은 비판적이던 친화적이던 우리의 영원한 소재이자 주제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경계도시2>에서는 송두율에 대해 친화적이던 비친화적이던 누구나가 훈수를 두려고 한다. 사람들은 개인 철학자 송두율 교수를 마치 사회의 대안적인 영역이라도 발견한 것처럼, 그 자체의 존재에 대한 찬반을 표명하는 것처럼 군다. 철학자 세미나를 마친 리셉션 자리에서 대표적 보수인사인 한홍이 송두율에게 건배를 제의하며 '당신 피엔 예수의 피가 흐른다. 핍박받는 것은 당연하다. 사오로가 바오로가 됐듯이 당신도…….' 운운하고(이날 한홍은 거의 전향을 선언했다?), 송두율의 귀국 후 긴박하게 돌아가던 검찰 수사에 대한 비대위에 모인 사람들은 '당신은 어떤 사람이다', '대한민국은 당신을 이렇게 생각하고 있다', '따라서 당신은 이처럼 행동해야만 한다'고 끊임없이 제의하고 주장한다. 송두율은 거의 침묵으로 일관한다. 사실 관계를 묻는 질문(자신이 노동당 정치국 후보위원임을 북한 방문 전에 알았는가에 대한 문제 등)에도 헛갈리는 대답들을 내놓는다. 37년 만에 밟은 고향 땅에서 송두율은 스스로의 identity로 여겼던 borderer에 대해 근본적인 위협을 받는다. 이 나라엔 '대한민국 국민'과 '북조선 인민'만이 존재한다(외국인 노동자와 탈북자, 교포2세들의 문제도 여전히 있겠지만 그들의 출신이 어디든 이 '고귀한' 땅을 선택한 이상 엄연히 이전의 사상을 버리고 대한민국 헌법 사상으로 전향한 사람이다). 그것의 선택은 자유이다. 다만 제3의 변수는 없다.


송두율은 임종을 지키지 못한 아버지의 땅을 밟고 싶어 했다. 그리고 민족주체철학자로서, 남과 북의 평화통일을 지향하는 경계인으로서 고국을 방문해야만 했다. 남한이 보수 세력의 집권에 눌려있을 시절 북한에서의 활동이 있었고 2000년 들어 역사적인 남북 정상회담이 성사되었다. 그는 이 화해적인 분위기에 힘입어 더 늦기 전에 남한에서의 자신의 위치를 만들어가야만 했다. 하지만 이 학자의 철학적 소신에 따른 행동적 실천은 국가 전체의 이데올로기를 뒤흔드는 일대 혼란적인 이슈가 된다. '당신이 무엇이기에 남한에 와서 스스로를 'borderer'로 말하느냐?', '북한 노동당원이 국내 간첩으로 대대적으로 귀화하는 뻔한 공작에 우리가 또 속을 것 같으냐?' 언론과 여론은 하나가 되어 송두율의 남한 귀국에 대한 관점이 아니라 이 기회에 우리가 지금까지 존재할 수 있었던 모든 이데올로기적 근거들을 쏟아내며 이 나라의 border를 또 한 번 단체적으로 그려나가는데 집중하기 시작한다. 송두율은 어떤 사람이냐를 이야기하는 것은 곧 송두율은 '대한민국'에서 어떤 사람이냐를 말하는 것과 같아진다. 세계적으로 그는 유명한 주체철학자이자 민족평화운동에 앞장서는 지식인인데 이 나라에선 노동당에 가입된 북한 공작원 김철수로서 당연히 분리조치(구속수감)되거나 추방되어야할 사람일 뿐이다.


송두율은 이 같은 남한 사회에 대해 할 말을 잊은 듯 사람들의 훈수와 인터뷰 요청에도 거의 어떠한 제스처도 하지 않다가 기자회견을 통해 결국 '독일 국적을 포기하고 국내 귀화하겠다'는 선언을 한다. 대한민국 헌법을 따라서 북한에서 편향된 활동을 한 점을 사과하고 사법처리 되어야할 부분은 엄중하게 받겠다는 것이다. '경계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주장하던 그에게 어떤 심경의 변화가 있었던 것일까. 하지만 그는 이 '대국민 사과'에 진정성이 부족했다는 여론의 채찍을 맞고 수차례의 검찰 조사를 더 받은 후 결국 구속 수감된다. 송두율은 2003년 귀국 시점부터 신문과 뉴스의 톱을 장식하며 일대 이슈 메이커가 되었지만 스스로의 반전에도 불구하고 결국 하부로 밀려났다. 그가 구속된 바로 그 시점부터 언론과 여론은 일제히 그에게서 관심을 접는다. 몇 개월 후 항소심에서 승리하고, 노동당원으로서 활동한 적이 없음을 확인받아 무죄를 선고받았지만 이미 사람들의 관심밖에 멀어진 후의 일이었다. 그 당시 우리의 반응과 대처는 옳았고, 송두율은 국내에서 사상 검증을 받은 후 감옥에 갔었던 사건으로 기억돼있을 뿐이다.


전편의 <경계도시>가 송두율이 국내 귀국을 시도하다 좌절된 사건을 그의 베를린에서의 일상적인 모습들과 함께 스케치하며 마치 일기같은 형식으로서 기록했다면 <경계도시2>는 본격적인 국내 다큐멘터리로서의 정체성을 분명히 하려 한다. 영화는 정치적 민감함을 건들인 개인, 그 집단 이데올로기에 희생된 개인의 모습을 철저하게 따라가며 사회적 활동가의 기록물로서 우리에게 전달된다. 영화는 당시 KBS에서 제작 방영한 송두율 관련 다큐의 편파성 논란으로 인해 KBS사장까지 해임되는 사건을 보여주면서 이에 따라 <경계도시2>영화를 TV 방송분으로 내보내려했던 계획을 접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린다. 국영 방송이 허용하는 미디어 활동과 영화의 다큐멘터리 활동사이의 정치적이고 현실적인 차이를 드러내는 부분이다. 하지만 2003년에 벌어진 민감한 정치적 상황을 기록한 영화가 2009년에 와 상영(완성)될 수 있었던 것을 본다면 독립 다큐멘터리로가 가진 운동의 한계성도 분명 느껴지는 것이다.

이 당시의 생생한 활동의 영화가 2009년의 지금에 와 과거의 기억과 망각을 사유하는 영화가 된 것은 기획 의도로 보았을 때 좀 아이러니하다. 지금 존재하지 않는 송두율의 과거 영상을 끄집어 내 편집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시간이 지난 영화를 지금 트는 것이다. 이것은 엄연히 말해 다큐 집단의 다큐멘터리 운동의 일환으로 보기엔 어려운 점이 있다. 영화는 생생한 현장을 위험을 무릅쓰고도 쫒으며 가려진 진실의 이면을 드러내고자 애쓰는데 이 지점에서의 감흥은 6년이란 시간이 지나 우리에게 이 시간을 '기억'하는가의 또 다른 화두를 제시하며 그 날의 진실을 알지 못했던 현재의 관객을 반성의 영역으로 들어서게 한다. 이 지점은 송두율이 석방 후 소회를 묻는 기자들의 질문에 대해 언론이 '계몽'의 역할을 다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 자신은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받았다는 말을 했던 것을 떠올리게 한다. 이 영화의 운동성은 결국 소재적이고 주제적인 것으로부터의 운동성에서 멈추지 않고 시간의 흐름을 지나 형식적인 운동성이 된다. 그렇다면 이 영화는 지금 우리에게 어떤 '계몽'을 하고 있는 것일까. 현실에서 실패한 운동을 기록한 영화를 뒤늦게 볼 때 이 영화는 과연 어디에 존재하는 것일까. 필름 위, 우리의 망각, 그 시절에만 군림했던 언론, 혹은 나올 수 없었던 국영 텔레비전 화면 위. 아니면, 2003년의 상상적 스크린. 그도 아니면 그냥 보이는 그대로 2009년의 스크린?


댓글을 달아 주세요

2009 서독제 장편초청작 <탈주>

필진 리뷰 2009. 12. 15. 14:07 Posted by woodyh98
사용자 삽입 이미지
김시원

이송희일 <탈주>

도시의 밤, 청춘들이 오토바이를 탄 채 거리를 질주하고, 카메라는 이들의 얼굴을 바짝 쫓는다. 이들은 절망했고, 벗어나고 싶고, 도망치고 싶어 담을 넘고 숲을 지나 도로 위를 나온다.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지만 중요하진 않다. 다만 지금 여기 정주하고 싶지 않다. 그래선 안 된다. 붙잡힐 것이기 때문이다. 범죄라도 저지른 것일까. 어쩌다 여기까지 온 것일까. 김성수 감독의 <비트>(1997) 이후 12년이 지난 2009년, 한국 중견의 감독들은 마치 약속이나 한 것처럼 거리의 청춘들을 오토바이에 태우기 시작한다(정성일 <카페느와르>, 김정 <경>, 박찬옥 <파주>, 이송희일 <탈주>). 그들(청춘과 카메라)은 밤 혹은 안개 속의 거리, 그 불확실한 시야의 도로 위를 헤드라잇 불빛 하나에 의지한 채 달린다. 어쩌면 레오 카락스 영화의 오토바이 질주를 떠올린다. 그 새까만 어둠을 향해 온몸으로 춤을 추다 오토바이에 몸을 싣는 드니 라방과 줄리엣 비노쉬. 그 엄청난 속도에도 불구하고 눈빛 하나 떨지 않은 채 정면의 무언가를 응시하고 있는 눈동자. 완전히 절망했거나 완전히 포기한, 백지 같은 얼굴의 순전함, 그 검은 눈동자속의 작은 흰 빛 같은 것.

<탈주>는 세 젊은이가 군대로부터 탈영한 직전의 상황으로부터 6일 간의 여정을 담고 있다. 강재훈 일병(이영훈), 박민재 상병(진이한)과 함께 나온 친구는 가장 먼저 다리에 총격을 맞는데, 해병대 출신 아버지가 헬기 위에서 자신을 부르는 소리를 듣고 기겁한 나머지 자살해버린다. 그 친구는 집으로 가도 군대와 다를 바가 없었던 것이다. 재훈은 죽어가는 어머니를 만나기 위해, 민재는 예전 여자 친구를 만나기 위해 목숨을 걸고 탈출을 감행한다. 하지만 민재의 불안한 심리상태와 불완전한 정신상태(군대 내 성폭행사건으로 인한)는 이들을 끊임없이 티격태격하게 만들면서 수시로 위기적인 상황에 마주치게 한다. 하지만 수색대의 추격에 쫓기는 때면 이들은 몸을 붙여 서로 의지해가며 그 미로 같은 산 속의 숲길을 함께 헤쳐 나간다. 마치 러시아 해빙기에 나온 전쟁영화들, 특히 라리사 셰피트코의 <고양>같은 데서 보았던 장면(성격적으로 상반된 두 병사(세속적 vs 초월적)가 다친 몸을 부여잡고 함께 의지하여 눈길을 헤쳐 나가던)이 떠오르기도 한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영화는 재훈과 민재의 현실적 소망을 철저하게 앗아가 버린 후(재훈의 어머니는 이미 죽었고 민재는 여자 친구를 만나지 못한다) 재훈이 알고 지내던 '누나' 이소영(소유진)을 그녀의 낡은 차와 함께 이들에 합류시키면서 본격적인 로드 무비의 길을 향한다(남2, 여1의 삼각 로드무비). 이들 셋이 동승한 자동차는 추격을 피해 계속해서 옮겨 다닌다. 똥차에서 개장수 트럭이 되었다 길거리에서 훔친 차량들이 된다. 시간이 하루씩 지나면서 돈과 식량은 점차 바닥나고, 도피 과정에서 입은 재훈의 총상은 자꾸만 그를 무겁게 만든다. 재훈은 소영에게 계속해서 돌아가라고 말하며 끊임없이 불만을 토로하는 민재로부터도 벗어나고 싶어 한다. 어느 갈림길에서인가 재훈은 오토바이 하나를 훔쳐 달아나기 시작한다. 그는 길거리에서 뒤 따라오던 차를 세운 뒤 운전자를 산 속으로 몰아가 잔인하게 살해한 후 다시 갈림길로 돌아온다. 뿔뿔이 흩어질 뻔한 셋은 다시 만나 질주를 시작한다. 이들은 이제 차를 버리고 오토바이 위에 세 몸을 포갠다. 재훈과 소영과 민재가 마치 한 몸이 되어 오토바이에 동승한 채 달리는 신은 더할 수 없는 청춘의 절망감을 가슴 시리게 흔들어놓는다. 젊음의 시간은 계속해서 도로 위에서 소진된다. 이들은 어디에도 발붙일 수 없다. 카메라가 이들의 운동을 가까이에서 포착할 때 그것은 흔들리거나 부유하지 않는다(핸드헬드가 거의 불가능한 무게를 가진 바이퍼 카메라로 찍었다). 공간은 시간과 함께 계속해서 흘러가지만 이들은 마치 그것을 따르지 않는 점처럼 존재한다. 배경만 흘러갈 뿐 상황은 그대로 있거나 더욱 악화된다. 이들은 6일에 가까운 시간을 계속해서 운동하지만 이들 앞에 펼쳐지는 새로운 공간과 시간이란 없는 것이다. 그것은 그저 자신들의 입지를 더욱 좁혀가는, 멀리 나아가는 희망적 운동이 아닌 막다른 길을 향해 가는 비극적 운동일 뿐인 것이다.

군대 같은 사회 조직도 아니고 집도 아닌 곳, 그야말로 울타리도 없는 벌판, 대한민국 어디인지도 모를, 지도로 찾을 수도 없는 도로 위를 질주하는 청춘들의 존재감은 마치 경계 위에 선 자의 그것 같다. 끊임없이 경계를 만들어 내부(나)와 외부(타자)를 분리시키는 국가는 결코 경계 위의 존재를 허락할리 없다. 그 위에 선다는 것은 곧 비극을 선택하는 일이다.

탈주의 5일 째, 이들은 마치 아메리칸 뉴 시네마를 열어젖힌 기념비적인 작품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보니 앤 클라이드)>의 한 장면처럼 이 셋은 대낮게 과감하게 은행을 털지만 결국 그 돈이 이들의 운명을 가르게 된다. 민재는 이 땅에서 새롭게 살아보겠다며 성형수술 비용을 챙겨 떠나고, 재훈과 소영은 돈으로 브로커를 사 중국으로의 밀입국을 시도하게 된다. 어쩌면 이 땅에서의 마지막이 될 수도 있을 밤, 재훈과 소영이 사랑을 나누는 사이 민재는 오토바이를 홀로 질주하다 경찰에 발각되고 만다. 만감이 교차하는 밤이 지나가고 드디어 운명의 6일 째 아침이 찾아온다. 로드무비는 이 젊은이들을 어느 샌가부터 마치 무전여행이라도 하는 것처럼 만들어버리고, 그들은 자신이 전국에 수배령이 내려진 존재라는 것을 현실적으로 느끼지 못한다. 비극은 항상 슈퍼에서 생필품을 사다 발생한다. 주스와 담배. 여행에 앞서 기호품을 챙기게 되는 심리라도 발동한 것일까. 어느 새 이들은 새까만 수색대에 둘러싸여있다.

영화는 <보니 앤 클라이드>의 엔딩에서처럼 장렬하게 총에 몸이 뚫리는 청춘 남녀들의 몸을 보여줄까 싶더니 난데없이 기호품을 챙긴 소영의 머리통만을 뚫어버린다. 수색대의 차량 안엔 벌벌 떨고 있는 민재의 구겨진 모습이, 도로 위엔 총을 맞고도 여전히 살아있는 재훈의 절규가 흐른다. 이 결말은 셋이 함께 몸을 부대끼며 동승해 온 로드 무비의 정서를 뒤집는다. 세속적인 자가 선택하는 결말은 그렇다 쳐도 지금까지 구축되어온 재훈의 캐릭터가 소영의 죽음을 목도하고도 살아있는 상태로 끝이 나는 것은 사실 잘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경계도시인 대한민국에서 경계에 내몰린 청춘들의 영화, 그 정신의 운동을 살려가는 영화였다고 한다면 이들 중 누군가는 자진적인 결정을 해야만 했다. 셋 모두가 수색대 앞에 꼼짝없이 당하는데, 운명을 같이하는 것도 아닌, 각기 다른 운명에 처하는 이러한 결말은 어둠 속을 헤치고 달려온 간절하고도 절실했던 길, 작은 빛 하나를 부여잡기 위해 끊임없이 절망하고 비극을 겪어내야 했던 이들의 여정을 무력하게 만들어버리는 것이다. 어쩌면 탈주는 과거의 레지스탕스 영화들에서만 희망적으로나 비극적으로 성공했는지도 모르겠다(브레송, 르누아르, 멜빌의 영화들).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Favicon of http://www.datadoctor.biz BlogIcon file recovery  수정/삭제  댓글쓰기

    멋진 기사에 대해 매우 인기있는 영화. 난 그 영화를 본 것은 아니지만 내가보고 영화의 예고편과 영화는 정말 맛있 네요.

    2010.08.09 17:39

사용자 삽입 이미지
김시원

1. 김미례 <외박>(2009)

김미례 감독의 <외박>은 510일간 이랜드 총파업을 이끈 비정규직과 정규직 여성노동자들간의 연대의 힘을 보여주는 영화였다. 이 영화는 당연히, 그들에게 돌아가야할 영화일 것이다. 이 공동체 의식은 아름다운 것이었다. 정규직과의 차별철폐를 외치는 비정규직 편에 정규직 여성노동자들이 나서 장기 투쟁을 이끌어나가는 모습은 낯설고도 감동적인 것이었다. 결국 정규직 지도부들의 일괄 총사표를 전제로 이들을 전원 복귀조치하게된 결말에 이르면 더욱 그러한 것이다. 영화는 초반, 막 투쟁을 위한 그녀들의 외박이 시작되는 시점의 막연한 흥분감들을 유쾌하게 스케치하며 곳곳 쉬어가는 틈을 이용해 정규직과 비정규직, 비정규직 180일 일수를 넘는 자들과 넘지 못하는 자 등 각각 다른 입장에 있는 그녀들의 사적인 속내들을 질문하는 인터뷰를 인서트하며 즐거움과 그 이면의 미세한 갈등들을 긴장감있게 교차시켜 나간다. 영화는 특별히 하루가 지나고 밤이 되었을 때, 이들이 투쟁(외박)을 결심하는데 있어 매일같이 결단을 해야하는 지점의 풍경을 인상깊게 보여준다. 마트에서 외박을 할 것인가, 남편과 아이들이 있는 가정으로 들어갈 것인가. 낮동안 지속되었던 공동 집회와는 또 다른 개인적 선택이 요구된다. 영화는 거의 대부분을 마트의 시멘트 바닥에 버티고 있는 여성들의 선택을 지지한다. 지금 하고 있는 일이 맞고, 지금이 아니면 안될 일이라는 서슬퍼런 결단임에도 겉핧기로 보면 그녀들의 활기찬 모습 때문에 마치 그녀들이 집안을 내팽개치고 될대로 되라, 여기까지 왔는데 포기할 수는 없다는 오기식으로 비취기도 한다. 하지만 영화의 중반부부터 이런 모습은 점점 사라진다. 투쟁이 장기화될 기조가 보이자 민주노총 지도부의 공식적 지원선언과 대선 당시 권영길 후보를 앞세운 민주노동당의 정치적 연대를 위한 개입이 본격화되고, 예상대로 공권력이 투입되면서 영화엔 불가피한 폭력적 요소들이 연출된다. 팔과 팔로 짜여서 누운 채 버티고 있는 여성들의 몸 위로 경찰들의 뜯어내기(?)가 시행된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여성 경찰들을 동원한 모습은 웃지못할 풍경을 연출한다. 그녀들은 끌려가며 '니들은 엄마도 없냐'는 말을 반복한다. 이 지점은 혼란스럽다. 후에 면목 홈에버 매장을 점거했을 때에도 한 전경과 대화하는 신을 통해 '엄마 보고 싶어?'란 말이 얼핏 들려온다. 그녀들은 지도부가 자신들을 '아줌마'라 부르는 것이 격노하지만 집회에서는 스스로 '아줌마'들이 이렇게 나섰다라고 말한다. 나는 영화가 이 점을 지목해서 보여주는 것을 생각해보았다. 그녀들은 분명 공적 노동자로서 집회에 나왔다. 하지만 그녀들은 여전히 가정주부라는 역할에 매여있다. 이 투쟁은 민주노총 지도부들의 싸움과는 달리, 그녀들에겐 완전히 공적인 싸움이 아닌 것이다. 그녀들은 마치 이 두가지의 역할론에 대해 함께 투쟁하고 있는 듯한 인상을 준다. 게다가 그녀들은 공적으로 노동자이면서 사적으로는 엄마일텐데, 이들이 결국 사회에서 불리는 말은 '아줌마'로 통일된다. 이 단어는 공적이지도 사적이지도 않은, 그 성격이 불분명한 특정 집단을 표현하는 익명성의 단어이다.


영화는 이 '아줌마'란 단어가 불편한 여성 노동자들이 자신들을 사회에 설득시켜야할 불가피한 때에 스스로 사용하는(인정하는) 모순을 보여줌으로 그녀들이 사회에 처한 모순적인 위치를 그대로 드러낸다. 영화의 후반부 물대포를 맞고 농성 천막이 부숴지고 지도부가 체포되는 모습들은 앞서 보여주었던 활기찬 풍경에 담긴 이상들을 조금씩 지워나간다. 투쟁이 장기화되면서 점차 생계유지에 지쳐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결국 몇몇은 떠밀리듯이 돌아가지만, 영화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남아있는 정규직, 비정규직 여성 노동자의 끈질긴 투쟁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들은 생계비 마련을 위해 물품 판매에 나서기도하면서 사측과의 협상의 시점을 기다리고 또 기다린다. 마침내 타결이 이뤄진다. 올림픽 매장을 점거한 지 정확히 510일만의 일이다. 정규직 지도부들의 결단을 요한 처사였다. 이 결말은 일반 관객에게 직접적인 감동을 준다기보다는, 끝까지 남아 싸운 사람들과 그들을 위해 자신을 희생한 지도부들의 희비 교차를 보여주며 어찌 보면 차가운 현실의 느낌을 전달하기도 한다. 하지만 자신의 이익을 대변하는데 치중하지 않고 보다 공공적으로 중요한 것의 가치를 믿고 선택한 자들에게만은 다 말할 수 없는 벅찬 감동을 선사할 것이다. <외박>은 여러 불리한 변수들 가운데서도 결국 불합리한 사측과의 투쟁을 결단했고 감당해냈던 그녀들, 공적, 사적 위치 어디에서도 온전히 자신만의 자리와 합당한 이름을 부여받지 못했던 그녀들의 소중한 일기이며, 결국 그녀들의 공동체를 위한 영화일 것이다. 활동하는 집단에 활동적으로 참여한, 연대하는 풍경에 동일하게 연대하여 들어간 카메라는 현실의 투쟁을 지속시키는 일에 기여한다. 여기에서 영화와 현실의 구분은 무해하다. 그녀들은 이 영화를 기뻐하고, 이 영화도 그런 그녀들을 기뻐할 것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2. 정재훈 <호수길>(2009)

이 다큐멘터리 영화는 전체가 완전한 공포(현실)영화이다. 초반부, 철거가 진행되기 이전의 마을의 고요하면서도 평화로운 풍경을 보여주다 후반에 이르러 시간이 어느정도 흐른 후 철거가 진행되면서부터의 황폐한 풍경을 보여 주지만, 내 느낌으로 이것은 대비적인 풍경이 결코 아니다. 초반부는 너무나 일상적이면서도 한적한 풍경 속에서 오히려 은밀한 암시들을 보여준다. 영화는 느리게 걸으며 이따금씩 먼산을 올려다보는, 근심을 다 헤아릴 수 없을 듯한 노인의 무표정과 골목을 밟고 뛰어다니며 서로 쫓고 쫓는 놀이에 치중하는, 근심이라고는 헤아릴 수조차 없는 어린아이들의 무동기적 흥분의 표정을 대비시킨다. 초반의 이러한 방식은 우리를 이상한 느낌으로 몰아간다. 노인의 기우뚱한 근심어린 뒷걸음과 카메라를 향해 돌진하는 어린아이들의 대단스런 앞걸음질, 완전한 정적을 연출하는 롱 테이크의 불길한 카메라와 귀를 째는듯한 비명과 이보다 더 의도가 없을 수 없는 날것의 표정에 거의 참여하는듯 이들과 마치 함께 뛰노는 듯한 정신없는 컷을 이어가는 카메라의 대비는 우리에게 지속적이고 자연적인 관찰에서 얻은 섬뜩한 지점들을 그대로 노출시킴으로 후반부 기계소리로 인한 공포감보다 외려 더 섬찟한 지점을 선사한다. 가히 일상(현실)의 스펙터클이라 불릴만한 것이다. 영화엔 낮과 밤의 이미지와 그 각각의 소리들이 대비적으로 연출된다. 낮의 빛과 밤의 어둠, 낮의 아이들의 소리와 밤의 개짓는 소리. 이것은 개발 이전과 이후 즉, 전반부와 후반부를 기이하게 연결짓는다. 전반부에서 동네의 건물을 쏘아대는 듯한 강렬한 낮의 빛은 후반부 포크레인이 철거를 위해 뿌려대는 강렬한 물줄기와 연결되고, 동네 전체를 깨어내듯 날카롭게 질러대는 아이들의 (즐겁고도 무서운)비명소리는 후반부 귀를 쨀듯한 포크레인 소리로 연결된다. 단순히 아름다움이 철거의 비극적 풍경으로 파괴되었다고 말하기에 이 두가지 이미지와 소리들은 현상적으로 사실 유사해서 약간 섬찟하다. 밤의 완전한 시각적 어둠 상태에선 저 멀리 작은 네모난 유리창문으로 비쳐 보이는 불빛이 존재한다. 이 불빛은 밤이 깊어가면서 점점 작아지거나 점차 어두워진다. 철거가 시작되면서 이 동네 주택들의 유리창은 완전히 사라진다. 빛을 반사시키던 유리가 없고, 완전히 뚫린 시멘트 창들이 그보다 더욱 어두운 내면을 드러내며 완전한 시각적 눈멀음의 상태로 우리를 안내한다. 여기가 주택의 안인지 바깥인지 우리는 감지할 수가 없다. 어느 순간 카메라가 꽝꽝 닫히는 문의 소리들을 들려주며 이곳이 사람이 사라진 집의 내부임을 드러낸다. 순간적으로 우리는 완전한 공포에 노출된다. 언제부터 카메라가 이 안에 들어와있었던 것일까. 우리가 지금까지 느낀 어둠과 정적이란 어떤 현상이었던 걸까.

사용자 삽입 이미지

영화는 빛과 사람이 소멸한 밤에 자연발생적인 소리에 집중한다. 바람소리, 그리고 개짖는 소리. 개들은 한 곳에서 누군가 짖으면 여기저기서 따라 짖는다. 그들은 마치 교신하면서 서로의 존재감을 드러내며 소리로서 연대한다. 이 집단적인 짖음은 영화 전반부의 낮, 어린아이들이 놀이를 하며 질러대던 중첩된 소리들의 연결시킨다. 아이들이 떠난 자리를 대신하고 있는 개들의 함성. 영화엔 사람들이 나오지만 그들의 행동력은 등장하지 않는다(오히려 행동력은 개들로 인해 실천된다해도 과언은 아니다). 사람은 마을의 풍경의 하나로서 등장할 뿐 동네가 철거될 것을 알고는 있는지, 이들은 반대 투쟁을 했었는지조차 전혀 알길이 없다. 카메라는 '경축, 재개발'같은 플래카드만 무심하게 보여줄 뿐이다. 사람이 완전히 사라진 마을 안에 혼로 남아 마치 레지스탕스처럼 동네의 최후 풍경을 날것으로 담아내는 카메라는 완전한 매체 그대로의 느낌, 즉 사람이 없이도 여전히 그 자리에 남아있는 카메라의 느낌을 준다. 하지만 감독은 카메라를 세워둔 것이 아니라 늘 이 카메라와 함께 다녔다고 말했다. 즉 직접 체험한 풍경만 담겼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조차도 물질적인 느낌이 압도적이다. 여기엔 세상의 변화를 관찰하고도 참여하려는, 기록하면서도 연출하려는 카메라의 이중적 욕망의 경계가 그대로 노출되어있다. 시네마베리떼와 다이렉트시네마의 경계가 무너진, 아찔하면서도 통쾌한 미학이 드러나는 순간이다.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Favicon of http://bondage.dwc.cc BlogIcon bondage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봐, 당신도 여기에 아주 멋진 문서를 가지고 좋은 블로그. 당신은 속박이 날 체크 아웃 좋아해요.

    2011.08.09 00:43

사용자 삽입 이미지
박정애

12월 10일, 바로! 한 해의 독립영화를 정리하는 서울독립영화제의 개막식이 있는 날이다. 아침부터 비가 추적추적 내리더니 오후까지 계속되었다. 내리는 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중앙시네마 앞엔 그 어느 때 보다도 많은 사람들로 붐볐다(중앙시네마에 사람이 그렇게 많은 건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이번 서독제에 장, 단편 경쟁부분에 오른 몇몇 감독들을 볼 수 있었는데, <호수길>의 정재훈 감독, <노동자의 태양>의 늘샘 감독, <외박>의 김미례 감독 등 이들의 표정에서 영화제가 시작 된다는 설렘을 느낄 수 있었다. 이 밖에도 네오이마주 4주년 상영회 때도 찾아주신 정성일 평론가, 민병록 전주국제영화제 집행위원장, 한상준 부천판타스틱국제영화제 집행위원장, 안정숙 前 영화진흥위원회위원장, 최정운 한국시네마테크협의회 대표, 특별전의 주인공인 장률 감독, 한국독립다큐멘터리의 전설 김동원 감독, 단편초청 <개를 키워봐서 알아요>의 이우정 감독, 독립영화계의 얼굴 배우 이채은씨도 볼 수 있었다.

7시가 조금 넘어 개막 공연이 시작됐다. 이번 개막 공연은 불나방쏘세지스타클럽, 일명 불쏘클이 맡아주었다. 불쏘클의 리더 조까를로스는 자신들은 얼터너티브 라틴댄스음악을 한다고 했는데 계속 산으로 가고 있다고 말해 좌중을 폭소로 몰아 넣었다. 나는 불쏘클을 이름만 들었지 처음 보는 것이었는데, 초등학교 이후로 본 적도, 연주한 기억도 없는 트라이앵글과 아코디언 등의 악기들을 사용해 멋진 공연을 펼쳐 주었다. 공연 후 앵콜까지 이어졌는데, 앵콜 곡명이 '시실리아'였다. 신파적 분위기로 시작해서 코믹으로 갔다가 드라마로 끝나는 곡이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불쏘클의 앵콜 공연까지 끝나고 올해로 9년 째 사회를 맡고 있다는 권해효 씨와 올해로 6년 째 사회를 맡게 된 류시현 씨의 인사가 이어졌다. 함께 진행을 한 횟수가 많아서 그런지 두 분의 호흡은 죽이 잘 맞았다. 무대를 정리하는 동안 권해효 씨와 류시현 씨의 재치 있는 입담으로 사람들에게 지루할 틈을 주지 않았다. 곧이어 임창재 이사장님의 개막선언이 있었는데, 다사다난한 한 해를 보낸 애환이 개막선언을 뒤로 하게 만들었다. 임창재 이사장님의 개막 선언에 이어 내빈인사와 감독 소개가 이어졌다. 이번 영화제에 네오이마주의 강연하 스태프의 <수진들에게> 또한 단편경쟁부분에 이름을 올려 영화제를 더욱 설레게 했다.

이어진 조영각 집행위원장님의 개막작 소개. 조영각 집행위원장님은 <반두비>에 이어, <친구 사이?>까지 18세 관람불가를 어이없게 받자 이번엔 작심하고 18세 관람불가영화를 만들어보고자 기획을 했다고 한다. 개막작인 <원 나잇 스탠드>의 세 가지 에피소드를 만든 민용근, 이유림, 장훈 감독의 인사도 이어졌다. 민용근 감독은 주제가 '원 나잇'이라 정말 원 나잇을 해봐야하는거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는데 결국 못해보고 영화를 만들게 찍게 됐다고 말해 실소를 자아냈다. 두 번째 에피소드를 만든 이유림 감독은 개막일 전날, 밤 10시에 서울대 100주년 기념관에서 DV카메라를 연결해 <달이 차기 전에>라는 영화를 봤다고 한다. 개막식 날 자신의 영화를 보기 전에 반드시 봐야만 할 것 같은 영화라고 해서 도대체 이유림 감독이 어떤 영화를 만들었기에 그런 것인지 궁금하게 만들었다. 마지막으로 장훈 감독은 이번 프로젝트로 인해 합법적으로 야동을 다운로드해서 볼 수 있었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감독들의 인사도 끝나고 드디어 개막작인 <원 나잇 스탠드>를 상영했다. 세 편 모두 원 나잇의 주제를 담고 영화적 장 내에서 각자의 개성을 표출했다(개막작에 대한 자세한 언급은 김시원 스태프가 할 것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드디어 시작이다. 이번 인디스페이스에서 서울독립영화제가 마지막일 것이라고 한다. 갈수록 독립영화계를 조여 오는 압력이 만만치 않다. 그래서 영화제의 슬로건이 '치고, 달리자' 일까. 힘들 때 일수록 십시일반의 자세로 같이 해쳐나가자는 취지인 것 같다. 개막 영상 속의 ' 너는 치고, 나는 달린다.' 라는 말이 리듬감 있게 다가오는 이유도 그 때문일 것이다. 자 그럼 다 같이 외쳐 보자, '치고, 달려!'


(사진제공: 서울독립영화제사무국)


댓글을 달아 주세요

사용자 삽입 이미지

[실종]_박성배

공중파에서 방송되는 내레이션의 친절함에 익숙하기 때문일까. 영화는 인디펜던트 다큐 특유의 불편함으로 첫 시작부터 한 남자가 언성을 높인다. 어딘가 이해관계가 심하게 어긋나 보이는 이들의 모습에서 대화의 내용은 뒷전이고, 소리치는 목소리가 먼저 뇌리에 박힌다. 이 시작이 앞으로 진행 될 이야기의 전체적인 톤을 설정한다.

사건의 발단이 된 5.18 광주 민주화 운동 관련 미신고자 385명의 처우에 대한 뉴스가 보도된다. “사망하였거나 행불되었으나 당국에 보상받지 못한 이들에 대해 5.18 기념재단과 유족회는 본인이나 가족이 연락해 올 경우 명예회복과 5차 보상을 돕겠다”고 한다. 하지만 뉴스에서 보도된 것과는 달리 실제 5.18 관련 단체들은 행방불명자들을 인정하는데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다.

명단에서 자신 아들의 이름을 찾은 위사요씨는 안도에 가슴을 쓸어내린다. 하지만 명단에 이름이 올라갔다고 해서 보상을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형 집행 정지.” 자료에 있는 그의 마지막 기록은 여기까지다. 그 후 그가 행방불명 된 상태다. 그러나 그의 실종은 5.18 운동 관련으로 인정되지 않고, 행불자 가족회는 기각된 사유와 관계 공무원 및 경찰 조사에 대해 열람할 수 있도록 해 달라고 요구했으나 심사위원들의 신원이나 심의에 대해서는 공개를 하지 않고 있다. 원인도 모른 채 “안 된다.”라고만 하니 이 억울함을 어디서부터 풀어나가야 할지 막막하기만 하다.

한 걸음도 물러설 수 없는 팽팽한 접전 속에서 현장의 말투를 알아듣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감독이 인물의 간단한 정보를 밝히는 것 이외에 자막을 쓰지 않았던 이유는 불가피하게 생기는 가치 개입을 막기 위함이다. 관객으로서 나는, 유족회들이 정의하는 ‘광주 민주화 항쟁의 시기와 관련이 없는’ 철저한 방관자이다. 최대한 이성적으로 행불자들의 상황을 대변하려는 김정길 회장과는 달리 5.18 관련 단체들은 격분해 있다. “5.18이 자선단체도 아니고, 그 당시 행불자면 다 5.18운동 관련 행불자인가?!”

광주는 특별한 곳이다. 그것은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모든 국민이 가슴속으로 조의를 표하고 있을 것이다. 국가 유공자들의 보상금으로 세워진 5.18 기념재단. 어쩌면 그 곳에 들어오려는 민주화 운동 시기에 행방불명된 피해자들에 대한 배타적인 태도는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5.18 기념재단을 비롯한 단체들의 지나친 피해의식은 오월정신을 변질시키고 있다.

왜 그렇게 명예회복을 원하는 행방불명자 가족회를 적대시하는가? 감독은 이 물음에서 민주화 운동 이후 방향을 잃은 광주의 고착된 시민의식에 대해 문제제기를 한다. 건드리면 맞아 죽을 것 같아 모두가 쉬쉬하는 분위기 속에서 관용의 자세는 찾아볼 수 없다. 그들은 지켜나가야 한다. 5.18로 희생된 그들의 가족과 자신의 인생에 떳떳하기 위해 민주화의 기상을 더욱 드높여야만 한다. 하지만 오늘날 그들의 고착된 태도와 숭고한 오월정신은 부조화를 이룬다. “광주인이라면 다 알죠~? 518 대리운전!” 명쾌한 결말이다! (관객심사단_ 황예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개를 키워봐서 알아요]_이우정

필름의 입자 속으로 부서지는 햇살이 포근하다. 그 속에서 한 여선생이 어린 소녀를 바라보고 있다. 금방이라도 울어버릴 것 같은 표정. 머리카락을 스치며 돌아보는 아이는 그녀를 보며 미소 짓는다.

영화는 두 자매를 주축으로 다른 이야기가 진행된다. 초등학교 교사인 다은은 맡은 반 학생인 아영에게서 유독 눈을 뗄 수가 없다. 아영에게 알 수 없는 감정을 느끼고 난 이후로, 그녀는 남자친구와의 관계에도 싫증이 나고 혼란스럽기만 하다. 한편, 다은의 동생 유은은 남자친구와의 이른 이별 후 공중에 붕 떠 버린 상태가 되어 어찌할 바를 모른다. 답답한 마음에 채팅으로 만난 남자와 모텔에 가 보기도 하지만, 무의미한 행동을 반복하는 자신의 모습에 화가 난다.

이 영화는 금단의 영역이 없다. 아영은 성적인 본능을 숨기지 않는다. 그 어린아이 특유의 천진함에 어른들은 할 말을 잃는다. 유은의 전 남자친구는 소파에 누워있는 다은에게 시선이 간다. 쓰러져 있던 유은은 자신을 깨운 언니의 남자친구에게 달려들어 키스를 한다. 아영은 화장실 창문에서 낯선 아저씨를 쳐다본다. 그리고 가장 강력해 보이는 영화의 메인 에피소드인 여선생과 여제자의 관계는 보는 것만으로도 야한 기분에 휩싸인다.
사람들은 자신의 발밑에 본능을 숨겨놓고 있다. 어느 날 내가 밟고 있던 것의 존재를 의식하게 될 때, 누구나 다은의 심정이 될 수 있다. 애들같이… 개를 키워 보지 않아도 그쯤은 알 수 있다. (관객심사단_ 황예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조율]_조태희


눈물 없는 이별. <조율>은 한 여자가 이별을 말하면서 시작한다. 그런데 이별선언을 하는 여자치고는 그 표정이 너무 평온하다. 사뭇 사랑하기 때문에 헤어진다는 통속소설의 공식을 깨달은 표정이다. 여자는 독백으로 과거 애인과 얽힌 추억을 풀어놓는다. 그녀가 기억하는 건 기승전결이 있는 서사가 아니라 이미지의 편린들이다. 끈적끈적한 여름, 건반이 망가진 피아노, <시네마 천국>의 메인테마, 그리고 첫 사랑은 나눴던 날 달뜬 애인의 얼굴과 그날의 창밖으로 떨어지던 빗방울과 낙엽들까지. 여자는 낙엽을 그러모으듯 지난날의 이미지를 떠올린다. 그녀에게 사랑은 동적인 것이 아니라 정적인 것에 가깝다.

흥미로운 것은 이 영화의 연출이다. 9분 동안 이어지는 여자의 독백을 원 씬 원 컷으로 찍었다. 한 번의 호흡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카메라는 자연스레 빛의 변화를 잡아내게 된다. 밝음과 어둠이 교차하는 실내는, 감귤 빛에서 짙은 녹색 계열로 바뀐다. 클라이맥스에 이르러서는 해사한 빛에 감싸인 여자의 화사한 얼굴이 드러난다. 그때의 여자 얼굴은, 베르메르의 회화에 소녀들에 버금갈 만큼 청초하다. 가만히 보면 원목가구로 구성된 실내장식과, 창에서 쏟아지는 햇살, 그 햇살을 받아 밝게 빛나는 여자의 옷과 얼굴은 베르메르의 회화를 쏙 빼닮았다. 분명 영화 제목 ‘조율’은 이별을 말하는 여인의 감정변화뿐만 아니라 빛을 '조율‘하는 카메라의 기교를 뜻할 것이다. (관객심사단_ 이도훈)



사용자 삽입 이미지


[친구사이?]_김조광수

서로의 애인을 만나러 가기 위해 버스에서 동행하는 석이와 어느 여자. 각자의 애인에게 줄 선물을 준비하고, 설레는 마음으로 같은 목적지로 향한다. 같은 공간에서 상반되는 장면이 연출되는 두 남녀의 모습이 보인다. 사랑이란 동일한 감정임에도 동성애와 이성애가 나타내는 심리적인 표현 방식은 서로 다르다. 여자는 애인을 만나 음식을 먹여주기도 하고, 다정한 모습으로 있었지만 석이의 모습은 다소 심각한 표정으로 무언가를 적고 있다. 석이는 관계를 적는 난에 애인이라고 써놓고도 무척 후회하는 듯, 면회 신청서 한 장을 더 요구한다. 하지만, 신청서가 얼마 남지 않은 이유로 거절당하고, 석이는 애인이란 단어를 가로로 두 줄을 그어 놓고 뒷면에 남아있는 글씨체까지 까맣게 지운다. 애인이지만, ‘애인’이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없는 동성애 커플이다.

그들은 호칭의 문제뿐 아니라, 동성애 커플로 커밍아웃하는 과정에서도 큰 충격과 변화의 과정을 맞이한다. 거리에서 다른 연인들처럼 손을 잡고 길을 걷거나, 사람들 앞에서 연인이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없는 민수와 석이. ‘친구사이’라고 생각했던 석이와 아들의 관계를 알게 되는 민수 어머니. 또한, 남자친구가 게이라고 고백하며, 자신이 남자가 아닌 것이 슬퍼하는 여자. 그 앞에서 자신은 여자가 되고 싶다고 말하는 석이. 상반되는 그들의 이해관계는 극으로 치닫는다.

“당신은 두 눈을 가졌지만, 만약 외눈박이들이 사는 세상에서 살아간다면, 사람들은 당신을 어떻게 생각할까?” 다수의 이성애자로 구성된 세상에서 살아가는 성적 소수자들의 모습을 되짚어 생각하는 물음이다. 이성애자와 동성애자 모두 사랑이라는 공통분모를 가졌다. “엄마, 난 남자가 좋아요. 그래도 난 웃을게요. 남들보다 조금은 힘들겠죠.”라고 말하는 민수의 고백처럼, 이 영화는 성적 소수자의 이야기를 다루었지만, 결국 인간 대 인간의 사랑으로 갈등을 이겨냈다. (관객심사단_ 박다해)


사용자 삽입 이미지

[The End]_백현진

각자의 에피소드에서 하나같이 곤란함에 처한 인물들. 누군가를 린치하는 꿈에 시달린다. 본인 또한 현실에서 린치 당한다(박해일). 뭐든 쉽게 되는 대로 생각하는 경솔한 세상에 "왜들 이러시는 거예요?"라고 묻는다(엄지원). '나는 나고 너는 너다.'라는 식으로 철저히 분리된 세상. 다름과 같음이 공존한다는 확신으로 그 세상을 버틴다(류승범). 정말로 용서했다는 데도 믿지 않는 세상에 성난 목소리로 자신을 변호한다(문소리).

그 곤란함 앞에서 보는 이 또한 난처하다. 인물이 그렇게 행동하는 이유를 명확하게 설명하는 장면이 부재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자신은 망각의 명수라며 소스라치게 외치는 문소리는 대체 지금 통화 중인 엄마와 어떤 사건을 겪은 것인지 알기 어렵다. 이 영화에서 서사는 안중에도 없다. 그러곤 대뜸 인물들의 얼굴로 바투 다가가는 카메라. 시선을 최대한 카메라에 고정한 인물들의 눈가가 점점 촉촉해진다. 번역되기 어려운 표정. 그 위로 타이틀 'The End'가 뜬다.

영화는 부러 슬픔의 맥락을 결여한 것처럼 보인다. 왜 하필 그 자리에 우리를 앉혀놓고는 난해함을 굳이 체험하게 하느냐고 따져보자. 그때 영화는 반문한다. "이해하면 안 되는 거 아닙니까?"(박해일) 더 자세히는, "이해하기가 그렇게 쉬워요?" 엄지원의 말이다. 그녀는 책을 읽다가 도저히 "모르겠다"라고 말한다. 그 말은 자백하는 투에 가깝다.

이해하기란 단번에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도 이해하는 덴 다들 능통하다. 그러나 그게 단지 이해한 척이라면? 무지라는 구멍을 메우기 위해 자신을 속인 것은 아닐까? 모르는 상태는 견딜 수 없이 불쾌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재빠르게 봉합하고는 마치 모든 걸 완료한 양 돌아보지 않는다. 영화는 두 번째 관람을 전제로 한 듯 시작한다. 모른다는 것을 인정하고 느긋해지자. 거푸 상상하고 생각하자. 그때 비로소 열릴 영화다. (관객심사단_ 정아람)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Favicon of http://nippleplay.dwc.cc BlogIcon nipple play  수정/삭제  댓글쓰기

    좋은 물건 좋은

    2011.08.10 06:22

BLOG main image
네오이마주(neoimages)와 영화 깊게 읽기
영화 비평 매거진 '네오이마주'의 공식블로그입니다. 더 많은 글은 http://neoimages.co.kr 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by woodyh98

카테고리

분류 전체보기 (521)
필진 리뷰 (260)
필진 칼럼 (149)
사람과 사람들 (55)
문화와 세상 엿보기 (10)
그리고... (41)

달력

«   2019/12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 3,158,894
  • 16

네오이마주(neoimages)와 영화 깊게 읽기

woodyh98's Blog is powered by Tattertools.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