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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응자]가 일깨워준 몇 가지 것들

필진 리뷰 2008.02.01 16:24 Posted by woodyh98


영화가 업이 된 후로 미처 보지 못한 것들을 DVD로 챙겨보는 것이 하루 일과 중 하나가 되었다. 이렇게 DVD로 영화를 본 후면 어김없이 두 가지 생각이 들기 마련인데, 즉 ‘극장에서 안 보길 다행’ 이라는 안도감 혹은 ‘이런 영화는 극장에서 봤어야 하는데’ 하는 아쉬움이 그것이다. 물론 블록버스터나 시네마스코프로 찍은 것이라고 모두 후자에 해당하지는 않는 것은, 빛과 그림자, 인물의 주름과 심지어 구두소리마저도 스크린으로 보아야 제 맛과 멋을 느낄 수 있는 영화들이 엄연히 따로 존재하기 때문이라 하겠다.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 Bernardo Bertolucci의 <순응자 Il Conformista>(1971) 역시 그런 영화들 중 하나다.

이 작품은 10여 년 전 화질 불량의 비디오테이프로 보았을 뿐이고 그 후로 완전히 잊고 지냈는데,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에서 박찬욱 감독의 추천을 통해 스크린으로 볼 수 있게 되었으니 큰 행운이 아닐 수 없었다.

베르톨루치는 1960년대 영화의 찬란하며 불가피했던 질병과 난해한 나르시시즘과 결별하고 대중적인 대작을 만들기 위해 1970년에서 1977년 사이에 파시즘에 관한 자신의 추억과 환각을 흘려 넣게 된다. 그리하여 소설적이며 세련된 그러나 점점 과격해지는 3편의 영화를 만들게 되는데, 그 중 하나가 1930년대를 배경으로 파시즘에 투신한 그러나 중산층의 삶을 희구한 평범한 남자의 이야기를 그린 <순응자>이다.

혹자들은, 베르톨루치의 평가하락이 <마지막 황제>의 아카데미 입성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오인하고 있으나, 엄밀히 말하면 <순응자>의 판권을 파라마운트에 팔면서부터, 즉 미국자본과 결탁함으로써 베르톨루치 영화세계의 비판적 서막이 시작되었다고 봐야 옳을 것이다. 그 결과 이탈리아 좌파와 평단은 그에게서 멀어져 갔으니,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의 소설을 기초로 만든 <거미의 계략>과 알베르토 모라비아의 원작을 각색한 <순응자>에서 볼 수 있듯이 역사를 이용하여 영화적 열망을 펼쳐내려 했던 베르톨루치의 작업은 번번이 비평 도마 위에 올라야 했다. 특히 650만 달러의 미국자본을 가지고 만든 <1900년>은 당연하게도 가장 할리우드에 가까운 이탈리아 영화가 됨으로써 비평가들에 의해 만장일치로 거부당하게 된다. 그러나 비평과는 무관하게 이것들이야 말로 스크린으로 봐야 마땅한 작품이며, 특히 <순응자>는 베르톨루치 영화의 정점을 보여주는 의심할 나위 없는 걸작이다. 과연 지독한 좌파였던 작가 자신이 풍미한 혼돈의 시대를 보여줌에 있어 이만큼 매혹적이면서 경쾌한 작품이 또 있을까?

또한 <순응자>는 코엔 형제가 (새로운 영화의 크랭크-인을 앞두고 스탭들과 감상할 정도로) 무척 좋아하는 작품으로 알려져 있기도 하다. 때문인지 <밀러스 크로싱>을 휘젓는 톰(가브리엘 번)의 모습에서 <순응자>의 마르첼로 크레리치(장-루이 트랭티낭)의 기운을 엿볼 수 있을 뿐 아니라, 여러 장면에서 오마주가 발견되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어쨌거나 다시 보게 된 <순응자>에서 내 눈을 사로잡은 것은, 단연 공간을 분할하고 이어붙이는 매혹적인 미장센이었다. 물론 이것은 당대 최고의 촬영감독 비토리오 스토라로 Vittorio Storaro가 일궈낸 빛과 어둠을 경계 짓는 카메라와 조명의 덕택이라 하겠지만, 몇몇 장면은 큰 화면이 아니었더라면 천하의 카메라도 무용지물이 될 수 있었음을 명백하게 확인시켜주고 있었다. 예컨대, 어머니의 저택 정원 시퀀스에서 자동차를 감싸 돌며 흩날리는 낙엽을 찍은 앙각 숏의 건조한 느낌, 콰드리 교수를 방문한 크레리치가 안나의 방을 엿보다가 팬터마임 같은 몸짓으로 문에서 몸을 빼내는 장면 등은 작은 화면으로는 결코 느낄 수 없는 것들이다. 그러니 화질 나쁜 비디오로 보았을 당시에는 도저히 찾아낼 수 없었던 공간과 여백의 미, 그 위에 드리운 빛과 그림자들이 더 없이 황홀하게 다가올 수밖에. 치밀하게 계획된 트래킹 숏이 자아내는 긴장과 장엄의 조화로움은 또 얼마나 대단했던지.

우리는 시대정신이 사라진 자리에 풍속만 남겨놓고 떠난 감독들을 무수히 보아왔다. 그런 점에서 베르톨루치는, 의심할 바 없이 풍속의 노예와 올바른 시대정신 사이를 횡단하고 60년대 이탈리아 영화의 신 부흥시대와 70년 대작시대를 거쳐 내면적 서사의 90년대를 관통하며 부단히 고민하고 실험해온 감독이었다. 한 때 그가 거대한 모순의 기념비를 세웠고 이념의 혼동과 나르시시즘에 빠진 혼란스러운 한철을 보냈다는 이유만으로 몰락한 거장이라는 식의 섣부른 단정은 금물일 테다. 베르톨루치는 언제라도 세상을 놀래 킬 준비가 되어있는 감독이라는 것에 의심의 여지가 없고 반드시 그러리라 나는 희망한다.

사진작가인 한 선배는 “나이를 먹어야 보이는 세상이 따로 있다”고 입버릇처럼 말하곤 했다. 베르톨루치 또한 내가 나이를 더 먹어감에 따라 조금씩 비집고 들어갈 여지가 생기는 감독 중 하나다. <순응자>를 보고 베르톨루치의 깊은 주름을 조금이나마 헤아릴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든 것도 이 때문이 아닌가 싶다. 한 감독의 세계 중 단면을 쪼개어 의미를 새삼 깨달은 그날 저녁, 집으로 돌아온 나는 진열장 속 DVD 중에서 <몽상가들>을 만지작거렸다. 순진하고 미성숙한 혁명주의자들의 유아적 행동양식을 통해 68혁명이 미완의 역사가 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베르톨루치 방식의 냉소로 채색시켜버린 그 영화를. 그리고는 이름값과 거리가 멀다는 이유로 제멋대로 처박아두었던 <마지막 사랑>과 8년간의 망명생활 끝에 돌아와 토스카나에서 찍은 <스틸링 뷰티>를 꺼내어 <1900년>과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 뒤에 가지런히 꽂아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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