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터데스크 관리자

도움말
닫기
적용하기   첫페이지 만들기

태터데스크 메시지

저장하였습니다.

'식스센스'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08.06.25 [해프닝] 당신이 기대하는 그 어떤 것
  2. 2008.06.23 [해프닝] 당신이 걱정하는 모든 것 (1)

사용자 삽입 이미지

부제: [해프닝]에 대한 다른 생각

강민영이 쓴 글(당신이 걱정하는 모든 것 [해프닝])의 처음, “<해프닝>이 던지는 화두는 인간 생존, 혹은 인간존속에 대한 문제다.” 과연 그럴까? 센트럴파크에서 집단 자살사건이 벌어지는 프롤로그를 지나면 주인공 엘리엇의 생물 수업이 보여진다. 엘리엇이 학생들에게 제기하는 문제는 “왜 벌들이 사라졌을까?”이다. 학생들은 여러 가지 의견들을 말하고, 그중 엘리엇이 가장 수긍하는 대답은 “자연의 현상은 완벽히 이해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 영화는 처음부터, 그리고 제목에서부터 말하고자 바를 분명히 하고 있다. 이 영화는 현상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현상을 보여주는 것에 주력하고 있다. 되풀이되고 있는 프롤로그와 에필로그의 대구법은 이 영화의 경계 혹은 진의를 강조한다.

강민영 글의 중간, “어느 날 갑자기, 그것도 무차별적으로 식물들은 바람을 통해 특정 물질을 내뿜는다.” 과연 그럴까? 영화 내에서 식물들이 바람을 통해 특정 물질을 내뿜는다는 것은 하나의 유력한 가설일 뿐이다. 영화는 갑자기 벌들이 사라진 것처럼, 고래들이 육지로 몰려와 자살(?)을 하는 것처럼 어느 순간 인간에게도 올 지 모를 현상을 그저 보여주고 있다. “인간 생존과 인간 존속”의 문제는 인간이 설정한 화두일 뿐이다. 이 영화가 보여주려 하는 것은 동물로서의 인간에 더 가깝다.


당신이 기대하는 어떤 것


“쇼크와 공포 효과를 제대로 활용하며 강렬하게 시작한 <해프닝>은 시간이 갈수록 미스터리의 해답에 접근하기보다는 자극적이고 반복에 불과한 자살 행위들만 끊임없이 되풀이한다. 권총으로 머리를 쏘거나 목을 매달고, 혹은 짐승에게 참혹하게 뜯기며 먹이가 되기를 자처한다. 첫 R등급 영화로서 그에 어울리는 폭력의 수위 조절은 성공적일지 몰라도, 이야기로 관객을 매료시켰던 샤말란의 장기는 영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다. 특히 재앙이 벌어지기 전 사이가 좋지 않았던 주인공 부부가 우여곡절 끝에 사랑을 재확인하며 관계 회복을 맞이하는 상황은 실소를 자아낸다.”


위의 글은 『씨네21』에 실린 김종철의 글을 발췌한 것이다. 이 한 단락은 영화에 대한 확실한 요약인 동시에 성급한 오류를 보여주고 있다.

영화가 끝난 후 뒷자리에 앉았던 이름 모를 관객들의 대화는 이렇다. “뭐야, 이거. 호러도 아니고 드라마도 아니고 대체 이 영화의 주제가 뭐야?” “자연을 보호하자는 거네~” 다시 말하지만, 이 영화는 어떤 현상, 제목 그대로 “happening” 에 대한 현시일 뿐이다. 이 현상을 보고 어떤 결론에 이르던지 관객의 자유겠지만, 영화가 유보한 결론과 필연성을 덧붙이지 않고 이 영화를 이해할 순 없을까?



제1의 자연과 제2의 자연


영화의 오프닝 시퀀스는 하늘에 떠있는 구름의 움직임을 보여주고 있다. 구름은 쉴 새 없이 움직이며 모양을 바꾸고 하늘도 그에 따라 변하고 구름도 변한다. 이 영화에서 사람들에게 공포의 대상이 되는 것은 바람이다. 식물을 움직이게 하는 바람은 자살소동의 유력한 용의자처럼 보여진다. 이 부분에서 생각할 것, 그 시선의 주체는 인간이라는 것, 인간은 자신을 둘러싼 환경에 심리를 투영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게오르그 루카치는 『소설의 이론』에서 제1의 자연과 제2의 자연을 정의한다. 침묵하는 제 1의 자연이 있다면, “인간이 만들어낸 구조물인 관습의 세계는 제2의 자연이다. 제1의 자연과 마찬가지로 이 제2의 자연은 단지 알려져 있는 필연성의 체계라고 정의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필연성은 의미와는 거리가 먼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제2의 자연은 자신의 진정한 실체 속에서는 파악될 수가 없다. …중략… 제1의 자연에 대한 제2의 자연의 낯설음, 즉 자연에 대한 현대의 감상적인 태도는 스스로가 만든 환경이 인간에게는 이제 그들이 안주할 고향이 아니라 감옥이 되어 버렸다는 체험의 투영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 영화가 보여주는 것은 제1의 자연과 제2의 자연이라는 외투를 벗은 인간의 존재이다. 엘리엇과 앨마와 제스는 알 수 없는 공격에 노출된 사람들을 따라 도시를 떠나고 온갖 가설과 추론에서 벗어나 집단에서도 이탈한 후에야 죽음에 맞설 수 있는 용기를 갖는다. 허허벌판을 헤매다 들어선 모델 하우스의 가짜 물건들은 인간들이 안심하고 즐기고 누리던 모든 것들의 실체는 허구일 뿐이라는 상징이고, 집단을 떠나 혼자 살고 있는 괴팍한 노인에게서는 무위자연의 평온함이 아니라 자신의 이기심에 갇힌 인간의 허울이 보인다.

노예를 숨겨주던 창고에 살고 있던 개구리처럼 한낱 무의미한 것의 정점, 즉 진실되고 깊은 인간의 노력도 결국에는 무위로 끝나 버릴 수 있다는 사실이나 아니면 인간이 결국 무가치한 존재일 수도 있다는 가능성은 제2의 자연(관습과 제도)이 만들어낸 제1의 자연과의 결계 안에서 가려지고 있는 것이다.



인간, 인간의 에너지


김종철이 언급한 “특히 재앙이 벌어지기 전 사이가 좋지 않았던 주인공 부부가 우여곡절 끝에 사랑을 재확인하며 관계 회복을 맞이하는 상황은 실소를 자아낸다.”는 부분. 왜 감독은 그 부부의 관계를 세밀하게 보여주고 있을까? 가족과 아이의 생존을 둘러싸고 혹자는 이 영화를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우주전쟁>에 빗대기도 하지만, 나이트 샤밀란 감독은 필연성과 인과관계보다 미스터리에 관심이 많아 보인다. 그의 관심은 <식스센스>에서 비롯된 ‘반전’에 대한 기대치를 따라잡지 못해 고군분투한다는 세간의 평을 뒤로 한 채 순수한 결정체의 모습이 되어가고 있는 듯하다.

엘리엇은 공포에 떨고 있는 제스에게 인간이 가진 에너지에 대해 말한다. 엘리엇은 감정에 따라 색이 변하는 반지를 가지고 다니는데 영화에서 그 반지의 색깔은 어떤 암시를 전달한다. 두 그룹으로 나뉘어서 도망칠 때 언뜻 보여지는 반지의 색깔은 파란색이고, 혼자 사는 노파가 죽고 나서 엘마와 제스를 만나러 밖으로 나가기 전 반지의 색깔은 노란색이다. 굳이 해석을 하자면 흔히 알려진 파란색의 의미는 평온함이고 노란색은 사랑을 상징한다고 한다. 이것은 의도된 트릭일 수도 있지만 샤밀란 감독이 주목한 것은 인간의 에너지다.

결국 제스의 아버지인 수학교사가 말하던 확률의 설득력과 식물 농장 주인의 가설과 엘리엇의 과학적 지식을 뒤로 하고 남는 것은 세 주인공의 에너지이다. 아이를 지켜야 한다는 마음, 이 난국을 어떻게든 헤쳐나가야겠다는 의지, 죽더라도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하고자 하는 마음이 내뿜는 인간 감정의 에너지 말이다. 제도와 관습에서 벗어난 인간이 지닌 순수한 에너지는 인간에게 반응한다는 식물의 에너지와 동격처럼 보여지고 있다.

왜냐고 묻지 말자. 왜 주인공은 살아남았는지, 왜 동일한 사건이 또 일어나는지, 앞으로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머리 아프게 고민할 필요는 없다. <해프닝>을 보고 나서 생긴 고민이라면 더더욱 쓸데없다. 이 영화는 “왜”라는 질문을 하는 영화가 아니라, 현상을 보여줌으로써 인간이 가진 외피를 벗겨내는 영화이기 때문이다

댓글을 달아 주세요

[해프닝] 당신이 걱정하는 모든 것

필진 리뷰 2008.06.23 08:23 Posted by woodyh98
<해프닝>이 던지는 화두는 인간 생존, 혹은 인간존속에 대한 문제다. 이것은 결국 현재 벌어지고 있는 지구의 일반적인 생태계를 위협하는 동시에 태초 시기로 역행하고자 하는 움직임과 같다. 주목할 것은 <해프닝>의 엄청난 사건에서 최대 피해자는 인간이며 유일하게 배제된 개체 또한 인간이라는 것이다. <해프닝>의 재앙은 인간을 위협하기 위해 존재한다. 최악의 대재앙에 현명하게 대처하는 방법이나 해법은 머리를 쥐어뜯어가며 생각을 해봐도 나타나지 않는다. 결국 인간은 명확한 근거지를 알 수 없는 '해프닝'이 하루 속히 자신을 지나쳐가기를 기도하는 수 밖에 없다. 가만히 앉아 숨을 고르는 자유조차 보장되지 못한다. 발을 내딛을 때 마다 신경을 곤두세운다. 사고는 발생했지만 답은 찾을 길이 없다. 이유는 매우 단순하다. <해프닝>은 인간과 더불어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자연, 그리고 그 자연이라는 생물 중에 가장 기본적인 '호흡'을 제공받는 식물들로부터 탄생된 것이기 때문이다.

<해프닝>은 미국 동부의 센트럴파크로부터 시작한다. 시간이 정지된듯 모든 사람들이 한 자리에서 멈춰 같은 단어를 반복하고, 오래 지나지 않아 그들은 주변의 모든 것들을 이용해서 자살을 감행한다. 무표정한 얼굴로 자신의 머리에 총을 겨누는 사람들의 얼굴에는 감정이 보이지 않는다. 죽기 위해 도구를 찾아 헤매는 그들은 알 수 없는 생물체에 의해 조종당하는 듯 태연하다. 센트럴파크에서 발생한 이러한 기현상은 뉴욕을 시작으로 북동부 전역을 공포에 떨게 만든다. 사람들은 밀집해서 생존을 위한 탈출구를 모색하지만, 노력을 거듭할 수록 죽어가는 사람들의 수는 늘어나기만 한다. 미 정부가 테러일 가능성이 높다고 단정지은 재앙은 시간이 지날수록 정치적 목적으로 행해진 것이 아닌 동시다발적인 자연 현상이라고 결론지어진다.

어느 날 갑자기, 그것도 무차별적으로 식물들은 바람을 통해 특정 물질을 내뿜는다. 그리고 이것은 공기를 통해 호흡을 해야만 살아갈 수 있는 일차적인 객체, 즉 인간이라는 존재에게 치명적인 약점으로 다가온다. 인간들의 죽음 외에 아무 것도 바라는 것이 없어보이는 자연은 하루 동안 끔직한 사건사고를 발생시키고 24시간이 지나서야 살인을 멈춘다. 일시적인 재앙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이 감사하는 마음으로 남은 일상을 이어나가는 것은 당연한 결말이다. 하지만 이야기는 안정적으로 끝나지 않는다. 모든 것이 사라졌다고 믿는 순간, 식물들은 제 2, 제 3의 살인을 준비하고 있다. 이번엔 미국이 아닌 다른 나라, 그리고 다음 번엔 또 다른 국가에서. 영화는 지구에 발을 딛고 삶을 이어나가는 인간들의 일방적인 약육강식의 이행을 가장 극단적이고 끔찍한 이미지를 통해 비판한다. 몇 분 전, 바로 옆에서 큼직한 핫도그를 건네던 노부부가 순간적으로 사라지고, 그토록 의지가 강했던 친구조차 순식간에 무너져내린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있는 곳을 중점으로 공격하는 식물의 특정 독소는 자신이 타겟으로 잡은 사람에 절대 예외를 두지 않는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두 한순간에 불로 뛰어든 나방처럼 죽어간다. 인물들은 죽어있는 시체들을 보며 자신의 미래를 예감한다. 그리고 눈을 감는다. 살기 위해 몸을 낮추고 최대한 바람으로부터 떨어져 걸어가는 사람들에게 식물은 이제 더이상 인간들이 환경을 공급해야만 살아갈 수 있는 나약한 객체가 아니다.

<해프닝>은 재난 영화와 호러 영화의 중간지점을 공유하고 있다. 우리에게 익숙한 재난 영화는 대부분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는 것으로, 시작은 언제나 외부 생물체 또는 환경이었다. 재난 영화의 주인공은 최대한 많은 사람들을 모아 '인력'을 이용해 사건을 해결해왔다. 하지만 <해프닝>은 상황을 반전시키는 주인공 자체를 무력화시켰다. 다시 말해, 보는 이와 극 속에서 행동하는 이 모두가 진정한 화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해프닝>속 동물들의 생존방식이다. 영화는 단 한번도 동물의 시체나 동물들이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것을 보여주지 않는다. 그들은 사건이 발생한 직후, 최대한 인간들에게서 벗어나 달아날 뿐이다. 같은 공기를 마시고 호흡을 하는 생물이지만 생태계의 정방향과 역방향을 일으키는 주체가 누구인지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장면이다. 환경문제를 다루는 <해프닝>은 현재를 살아가는 인간들이 더는 앞으로도 뒤로도 움직일 수 없다는 사실을 각인시킨다.

<해프닝>은 인간에 대한 주의와 비판의식을 특정 지역을 통해 극화시킨 '교훈'적인 이야기다. 물론 예전에도 그러했듯이 해결법은 없다. 시원스런 해답 없이 순간 순간의 휴머니즘으로 영화 전반을 이끌어가는 <해프닝>은 반전을 노린 영화도, 그렇다고 생태계 현실을 명확하게 보여주는 다큐멘터리도 아니다. <해프닝>은 포스터 한 장으로 영화 전체의 스토리를 대번에 알아낼 수 있는 매우 미적지근한 영화다. <해프닝>이 평범한 재난 영화가 아닌 일종의 호러로 도약할 수 없는 가장 큰 이유도 위와 같은 이유에 있다. 영화가 사라져 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조금 더 잔인하거나 냉혹하게 반복 묘사하는 것에 치중했다면 <해프닝>은 위험하지만 성공적인 실험형식으로 읽힐 수 있었을 것이다. 마치 조지 로메로가 <시체들의 일기>에서 좀비들에 의한 대학살을 꾀했듯이 말이다. <해프닝>은 재난과 공포의 중간에 위치하는 영화지만 사건, 그러니까 인간들의 자살소동이 극 비중의 반 이상을 넘지 않아 달갑지 않다. 그러나 <해프닝>의 주제는 거부할 수 없을 만큼 단적이다. <해프닝>은 결과적으로 나이트 샤말란식의 반전, 혹은 그 이상 이하의 무언가를 안겨주진 못했지만, 영화는 인류가 피할 수 없는 명백한 사건의 단면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극 중 '지구에서 꿀벌들이 사라지면, 4년 이후 세상은 멸망한다'라는 문구는 그 누구도 벗어나거나 피해갈 수 없는 강력한 호기심과 종점을 제공한다.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Favicon of http://plan9.co.kr/tt2 BlogIcon 주성치  수정/삭제  댓글쓰기

    좀 더 다양한 방법으로 더 많은 사람이 죽었으면 영화가 주는 공포가 더 풍성하게 느껴졌을 것 같지만 저는 이정도가 딱 좋았습니다. 그네가 삐그덕거리고 자동차 덮개에 구멍이 난 장면들..이런게 좋았어요.

    대학살극으로 갔다면 그런 장면들이 빠져야했겠죠.

    2008.06.23 09:26

BLOG main image
네오이마주(neoimages)와 영화 깊게 읽기
영화 비평 매거진 '네오이마주'의 공식블로그입니다. 더 많은 글은 http://neoimages.co.kr 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by woodyh98

카테고리

분류 전체보기 (521)
필진 리뷰 (260)
필진 칼럼 (149)
사람과 사람들 (55)
문화와 세상 엿보기 (10)
그리고... (41)

달력

«   2019/11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 3,158,644
  • 110

네오이마주(neoimages)와 영화 깊게 읽기

woodyh98's Blog is powered by Tattertools.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