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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이보그지만 괜찮아'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09.05.09 [박쥐] 천재가 사라진 자리에 남겨진 스타일인가? (1)
  2. 2009.04.22 박찬욱의 [복수 삼부작] 다시 읽기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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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건영


천재가 사라진 자리에 남겨진 스타일인가?

웬만한 사람들은 다 보았고 두 번이나 본 사람도 심심치 않을 정도로 논쟁의 중심에 선 영화 <박쥐>를 이제 서야 보았다. 박찬욱으로 말하자면 ‘복수 삼부작’에 관한 글을 썼을 정도의 개인적으로 애정과 호감을 가진 감독 중 하나였고, 또 적지 않은 평자들이 ‘장난질’이 지나쳤다고 비판한 <친절한 금자씨>마저도 그간 한국영화에서 보기 드문 오프닝 신과 정교한 미장센을 이유삼아 호평의 대상에서 놓지 않은 인물이기도 하였다. 그런데 <박쥐>의 경우는 달랐다. 한마디로 실망스러웠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순간까지도 도무지 아무런 감정이 생기질 않았다는 것이 주된 이유인데, 그 배경은 간단하다. 영화에서 인간이 실종되었고, 자기복제마저 실패했으며 죽음을 너무 가볍게 다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그것은 박찬욱의 영화라는 점에 기인한다.

언제부터인지 몰라도, (아마도 박찬욱이 <올드보이>에서 보여준 이후가 아닐까 한다.) 극한의 이미지가 영화미학의 하나의 준거가 되고 있다. 이는 내러티브가 아닌 시각적 효과의 극대화에 의지한다는 점이 문제로 지적된다. <친절한 금자씨>에서 자기복제의 위태로운 전조를 보일 때까지도 이러한 경향이 현실이 될 거라 생각하진 않았다. 그러나 <박쥐>에 이르러 그것은 현실이 되었다. 망치로 이빨을 뽑고 상대의 머리를 깨부수는가 하면 가위로 혀까지 잘라 심장 약한 관객을 힘들게 만들었던 박찬욱의 영상미학. 박찬욱의 영화가 장도리로 머리를 내려치고 이빨을 뽑아서 칸의 그랑프리를 차지한 거라 생각한다면 대단한 오해다. 그러한 장면이 꼭 필요한 상황에 등장하면서 심리적, 정서적으로 잔혹함을 느끼게 한 드라마구조가 바닥에 깔려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그런데 정작 감독 자신이 서구의 관객이 열광한 영화적 근본을 너무 빨리 망각해버린 건 아닌지 모르겠다.

적어도 박찬욱의 영화라면 잔혹성이 선정성과 상징성 사이를 줄타기하며 인간 본성에 대한 성찰로 연결되는 과정을 통해 미학적 가치를 확보했어야 했다. 다시 말해 ‘이미지의 과잉’이 주인공들의 ‘내부 과잉’과 균형을 이뤄야 하고, 박찬욱이라면 이 정도는 능히 해낼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박쥐>는 시각적 물리적 잔혹성 수준에 머문 영화가 되고 말았다. 심리적 정서적 잔혹성에 충실해야 한다는 대명제를 외면한 채 오로지 잔혹함과 유희 사이에서 키치적 감성으로만 승부하려는 우를 범해버린 것이다. 혹자는 상현과 태주의 대극으로 라 여사로 상징되는 부르주아 집단을 놓음으로써 계급성을 고수한다는 말로 박찬욱의 화법을 옹호하지만, 그런 이들이라면 클로드 샤브롤의 <의식>에서 잔느와 소피에게 일가족이 몰살당하는 장면을 먼저 보아야 할 것이다.

또 다른 문제는 영화에 인간이 실종되었다는 점이다. 흡혈귀가 된 상현과 태주는 물론이고 라 여사와 강우, 그의 마작 동료들 역시 사람다움을 갖추지 못한 이들이다. 거칠게 말하자면 <박쥐>에서 사람이라 불릴 만한 이는 찾아보기 드물다는 것이다. 이는 죽음을 가볍게 대하는 태도에서 비롯된다.

사실 영화 초반 순교와 자살을 혼동하지 말라는 의사의 충고를 듣는 순간까지만 해도, 삶과 죽음, 성과 속의 꽤나 진중한 드라마로 흘러가지 않을까 기대했었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한 대사에 불과했다. 그러니 순교는커녕 살인을 일삼다가 끝내 자살로 마감하는 불꽃같은 삶, 그 틈새에 로맨스가 스며들었다고 해서 이것을 B급 멜로드라마의 코드라 오인해서는 안 된다. 순교를 이루지 못하고 흡혈귀가 되었기 때문에 자살로 생을 마감할 수밖에 없다는 식으로 죽음을 낭만적으로 미화시키지 말란 얘기다. 대체 낭만적 죽음이란 게 있기나 한다는 말인가. 거칠게 말해 <박쥐>의 마지막 장면은 노을 진 바닷가를 배경으로 클라렌스와 알라바마를 앉혀놓은 <트루 로맨스>의 엔딩 신을 뒤집어놓은 것에 불과하다.

대체로 <박쥐>에서 관객에게 웃음을 선사하는 지점은, 죽음의 이미지가 비추는 장면들이다. 예컨대 상현은 “인터넷 자살사이트 사람들을 찾아 그들을 도와주면서” 흡혈을 한다는 말로 자신의 행위가 태주의 살인과는 격이 다르다고 주장한다. 그 지점에서 관객은 폭소를 터뜨린다. 박찬욱 특유의 유머가 빛을 발하는 순간인가? 그러나 제 아무리 장르를 비틀고 전복시키고 이종교배를 단행할지라도 삶과 죽음을 다룸에 있어 최소한의 엄숙함은 유지되어야 한다(고 나는 믿는다.) 적어도 죽음이란 희희낙락거리면서 논할 정도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쥐>에 드러나는 죽음은 단순한 흡혈의 결과로 전락할 뿐이다. 상현과 태주의 흡혈은 생존의 문제도 아니고 순교의 때를 기다리기 위한 것도 아니요, 오로지 그들의 욕망을 지속시키기 위한 유희에 다름 아니라는 것이다. 한 인간의 숭고한 죽음이 아닌 죽어 마땅한 인물의 객체화. 이는 박찬욱이 즐겨 쓰던 수법인 동시에 논란을 피해하기 위해 영리하게 사용된 기제의 다른 이름이다.

생명의 탄생은 인간의 의지로 억제할 수 있지만 죽음은 인간 의지 밖의 영역이고 그래서 죽음은 탄생보다 인간적이면서 방법과 행태에 있어 탄력적이다. 때문에 많은 예술 분야에서 그래왔듯이 탄생은 하나의 아이콘으로 고착된 반면 죽음은 그것을 다루는 작가에 따라 다양한 이미지로 변형되거나 심하게는 풍자의 대상으로까지 다루어지곤 했다. 그런데 <박쥐>에서 박찬욱은 넘어선 안 될 선을 보란 듯이 넘어가버린다. 그것들을 희석시키기 위한 현란한 미장센을 가림막 삼아서 말이다. 무릎으로 박박 기면서 포월(匍越)까지는 아니라도 좀 더 조심스럽게 넘을 수는 없었을까?


<싸이보그지만 괜찮아>가 나왔을 때, 김영진 평론가의 주관으로 황진미와 박찬욱이 격론을 벌인 일을 기억해보자. 이름조차 반가운 『필름2.0』의 특집기획이었는데, 나름 까칠하게 조목조목 물고 늘어졌음에도, 이 대담은 황진미의 영화적 안목의 한계와 비평적 자산의 빈곤함을 실토하는 엉뚱한 결과를 낳고 말았다. 황진미가 박찬욱을 상대한다는 것 자체가 무리였고 수읽기에서 비교가 되질 않았다는 것이다. 느닷없이 지나간 얘기를 끄집어낸 이유는 <박쥐>를 두고 호불호가 갈리는 이 상황을 박찬욱은 어떻게 느끼고 있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가 이 상황을 천천히 느긋하게 즐기고 있을지 어떨지 알 수 없는 노릇이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제 아무리 비판과 비난에 악평을 쏟아낸다고 한들 박찬욱의 영화화법이 쉽사리 변할 것 같지는 않아 보인다. 그것이 그의 스타일이고, 감독에게 스타일이란 필요에 따라 갈아입을 수 있는 옷이 아닌 피부와도 같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박찬욱이 개별적 비평에 일희일비할 인물은 아닐 테니까 말이다.

영화에는 메시지와 메타포, 이미지가 있다. 그것들은 영화 밖 세계관과 상호 영향을 주고받는다. 세계관이 불안정할 때 재현된 삶은 온전하게 설득력을 얻기 힘들다. 거듭 말하지만, 모름지기 분출하는 힘을 붙잡아 절제미를 구하는 사람만이, 어떤 참혹한 상황일지라도 인간에 대한 애정이 깃든 작품을 만들 수 있는 사람만이 대가의 반열에 오를 수 있다. 위대한 작품은 이성이 분별없는 환상을 누르고, 형식이 소재를 누르며, 천국이 지옥을 누른다. 여전히 박찬욱의 영화는 관심의 대상이고 흥미롭지만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그것들에 대한 총체적 판단을 유보한 채 다음 작품을 기다리는 일일 테다. 천재가 죽으면 스타일이 남고, 시대성이 사라지면 풍속만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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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blog.naver.com/amireal BlogIcon Kei  수정/삭제  댓글쓰기

    묵은 글에 묵은 리플 하나 남겨 봅니다.

    글을 읽어나가는 도중에 "적어도 죽음이란 희희낙락거리면서 논할 정도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라는 말씀이 눈에 들어오더군요.
    반대로 저는 죽음을 희희낙락거리면서 장난질을 쳐대는 그게 너무 재미있었는데 말입니다 ^^

    박찬욱에게 우리는 너무 많은걸 기대하고 있었는지도 몰라요,
    그를 참 좋아하고, 그의 영화를 참 좋아하지만 세계적인 거장이라고 칭송받을 정도의 위치는 아니라고 생각하거든요. (박찬욱 감독도 그런 부분을 스스로도 억울해하는거 같고.. 좀 즐기는거 같기도 하고..)

    어쨌든, 거장이 아닌데 마치 거장인양 포장된 박찬욱의 껍데기를 벗겨놓고 생각한다면, 박쥐는 그의 씁쓸한 유머가 제대로 기능한 몇 안되는 영화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좋은 글 감사하게 잘 읽고 갑니다.

    2009.11.14 12:18

박찬욱의 [복수 삼부작] 다시 읽기

필진 리뷰 2009.04.22 10:04 Posted by woodyh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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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건영

프롤로그

폭력이 준동하는 인간 내면의 욕망 속에 사회적 불신과 냉소를 가득 채워놓은 박찬욱의 ‘복수 삼부작’이 대단원의 막을 내린지도 4년의 세월이 흘렀다. 각각의 작품에서 보여준 한국영화사에서 그 유래를 찾기 힘들 정도로 전편에 넘쳐나는 비장함과 유려한 미장센은 박찬욱을 미래의 거장으로 올려놓기에 충분해보였다. 그러나 이어 내놓은 2006년작 <싸이보그지만 괜찮아>의 상업적 실패는 천하의 박찬욱도 관객과 평단의 칼바람 앞에서 안전할 수 없음을 확인시켜주었다. 혹자는 쉬어가는 영화가 아니었냐고 반문해댔으나, 감독에게 쉬어가는 영화란 게 어디 있으며 그렇게 영화를 찍는 작가가 있을라고. 모름지기 천재가 사라지면 스타일만 남고, 시대정신이 사라지면 풍속만 남는 법이라지만 박찬욱의 경우는 어느 한쪽도 잃지 않고 후일을 도모해왔다는 점에서 기대감을 배가시키기 충분했다. 그리고 다시 3년, <공동경비구역 JSA> 당시 기획한 10년 숙원의 프로젝트 <박쥐>가 드디어 그 베일을 벗었다. 감독 스스로 “내 영화 중 최고”라고 자긍심을 드러낼 정도이고 보면 영화에 대한 기대감은 한층 커질 수밖에 없을 터. 벌써부터 ‘한국영화의 구원투수’ 라는 식상한 용어로 덧칠된 박찬욱의 컴백 기사가 넘쳐나는 이즈음, 오히려 지금이야 말로 ‘복수 삼부작’을 복기해보는 절호의 시점이 아닐까, 하는 마음이다.


바그너와 박찬욱 영화

바그너는 독일이 낳은 위대한 음악가이다. 그의 사유에는 게르만 전승이 깔려있고 낭만주의로 덧씌워진 무대연출에 비중을 뒀다는 점에서 여느 독일의 음악가들과 궤를 달리한다. 영화가 없던 19세기의 블록버스터는 바그너의 그랜드 오페라였다고 말하면 정확하다. 그러나 그의 음악이 나치즘과 선동정치의 준거가 되고 히틀러에게 영감과 불씨를 제공했다는 점에서 오늘날까지도 독일국민에게 껄끄러운 존재로 자리하고 있다. 한 때 바그너를 동경했다가 훗날 혹독한 비판을 가했던 니체 역시도 바그너의 음악 뒤에 숨겨진 선동과 지나친 인기의 위험성을 경고하곤 했다. 무엇보다 바그너에게서 문제 삼았던 것은 ‘데카당스의 문제’였다. 즉 삶의 요소가 줄어들고 거대한 피로감이 몰려오는 것, 헌신과 잔인함과 인위적인 순결함이 합치되는 현상에서 삶과 사랑의 에너지를 누르고 이념과 순결을 따라갔다는 것이다.

나는 박찬욱 영화에서 바그너의 음악을 본다. 비록 바그너와 같은 이념의 추구는 없을지라도 의도하지 않은 컬트화가 낳은 세몰이식의 마니아를 양산했다는 점은 상당부분 유사하다. 바그너의 음악은 음악자체가 아니라 언어가 되고 도구가 된다. 동시에 작은 요소들로 디테일을 표시한다는 점에서 대단히 뛰어나다. 극소 공간 안에 감각과 그림자, 색, 스러져가는 빛의 은밀함 등을 표현하는 다채로움과 풍요로움에 있어 바그너를 따라갈 사람은 없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박찬욱의 영화는 시간이 갈수록 소도구를 이용한 절묘한 미장센을 만들어내고 있으며 디테일한 묘사와 테이크 간 연결기법은 정점에 오른 느낌이다. 하지만 미학적 기술적으로 따라올 자가 없다는 자신감의 과잉은 종종 모든 장면을 클라이맥스로 만드는 오류를 범하기도 한다. 이는 바그너의 음악이 종결부 없이 무한선율로 이어지는 것과 맥을 같이 한다. 그것은 하나의 주제에서 다음으로 넘어가고 모티브들이 한데 섞이는 방식을 말한다. 그러니까 전체를 유기적으로 조직하는데 필요한 분절 없이 작은 단위들이 모두 동일한 가치를 지닌다는 것이다. 이것이 데카당스 양식의 특성이다. 박찬욱이 의도했건 아니건 그의 영화는 바그너의 음악양식과 닮아 있다.

거칠게 말하자면 바그너의 음악은 언뜻 왕의 진수성찬 같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영리한 주인이 손님에게 제공하는 경제적인 만찬일 뿐이다. 이처럼 최소 비용으로 제후의 밥상을 모방하는 재주, 그것은 몇 번은 배가 부르겠으나 과시적인 메뉴는 식상하기 쉽다는 단점이 있다. 박찬욱의 영화가 넘어야 할 산이 있다면, 바로 이것이다. 자기복제를 피하고 관습과 형식미의 절제를 통한 적절한 변주만이 그의 영화를 사랑하는 이들에게 끊임없이 에너지를 제공하는 길이 될 것이며 한국영화계를 위해서도 바람직한 일일 것이다.



불신과 냉소


박찬욱은 자신의 영화를 통해서 반사회 반인류적 대상의 공멸을 통한 사회냉소주의와 인간혐오주의를 내보여온 감독이다. 그것은 차가운 냉소주의적 기류 속에서 사회를 움직이는 불건전한 논리를 머리로만 인식하면서, 가슴을 훈훈하게 만드는 온정주의적 인간의 실종을 목도하게 만든다. 이는 B급 영화정신으로 무장된 그의 영화적 사유와 평론가 시절부터 보여준 주류영화계에 대한 미온적 태도와도 무관치 않다. 이미 <복수는 나의 것>을 통해서 노동자계급과 자본가의 갈등을 드러냈고 장기밀매와 동진의 딸을 유괴하는 과정 속에서 거짓과 가식으로 얼룩진 온정주의가 아닌 진심이 담긴 온정주의적 인간의 실종을 보여주면서 ‘진정한 온정주의’, 그런 건 이 세상에 없다고 단언했던 감독이었다. 그는 <친절한 금자씨>에서도 사회구조에 대한 불신과 냉소를 가득 담아내고 있는데, 이를테면 유괴당시 미온적 태도를 보였으나 복수의 적극적 가담자로 탈바꿈시켜놓은 형사와 마음속으로는 복수를 준비하면서도 거룩한 얼굴로 참회기도를 하는 금자의 모습과 왜곡된 욕망으로 가득 찬 전도사를 통해 한 치의 오차 없이 인간의 이율배반적 본질을 까발리기게 이른다. 이처럼 감독은 불온한 욕망으로 가득 찬 성직자와 공적의무를 상실한 형사의 모습을 통해 사회의 법과 규범에 대한 조롱을 한껏 퍼붓고 있다.

<복수는 나의 것>에서 장기 판매업자들은 류를 속여 그 누이를 죽게 했기에 류에게 죽임을 당한다. 그리고 류에게 신장을 먹혀버린다. 류와 영미는 유괴를 했기에 아이의 아비에게 죽임을 당하고 그 아비는 노동자를 착취한 자본가이기에 노동자들에게 살해당한다. 이같이 박찬욱 영화에 나오는 인물들은 미시적으로는 무죄이나 거시적으로는 모두 유죄인 자들이다. 때문에 그들은 사회적 관계 안에서는 필연적으로 유죄가 될 수밖에 없다. <올드 보이>에서 ‘웃어라. 세상이 너와 함께 웃을 것이다. 울어라. 너 혼자 울게 될 것이다’라는 말이나, ‘모래알이나 바윗돌이나 가라앉기는 마찬가지’라는 말은 인간이 불가항력적으로 사회적 관계를 수용할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암시한다. 이는 박찬욱 영화 속 사회적 불신과 냉소주의를 이해하는 첩경이 된다.

박찬욱은 그의 영화 속에서 사회적 관계를 인간의 존재 조건으로 받아들이곤 했다. 인물들은 모두 관계 속에서 숨 쉬고, 그 관계는 개인의 의도나 의지와 상관없이 얽히고 충돌한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무의미한 말이나 행동, 선의에서 비롯된 악행도 결과적으로 죄악이 될 수 있으며 아무리 평범한 사람도 <올드 보이>의 오대수처럼 ‘악행의 자서전’을 대여섯 권 쓰는 일이 가능하게 됨을 말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완강하게도, 그리고 냉정하게도 박찬욱은 사회적 관계 속에서 ‘짐승만도 못한 놈의 살 권리’는 인정하지 않는다. 이것이 박찬욱의 영화가 여타 스릴러나 복수극과의 차별을 이루는 지점이다.


유괴 혹은 납치에 스며든 자본주의

박찬욱의 복수 3부작에 어김없이 등장하는 소재는 ‘유괴와 납치’이다. 먼저 그리스 신화를 잠시 살펴보자. 추수의 여신 데메테르에게는 하나 뿐인 딸인 봄의 여신 페르세포네가 있었다. 명부의 신 하데스가 그녀를 칠흑처럼 검은 수레에 태워 지하세계로 데려간다. 데메테르가 아흐레 동안 슬피 울다가 태양을 만나고서야 진상을 알게 되었고 제우스의 도움을 빌어 간신히 딸을 지상으로 데려왔다. 이미 명부의 흙을 먹은 그녀는 1년 중 4개월은 어둠 속에서 지내야 한다. 어둠을 이기고 지상으로 올라오는 그녀는 사람들에게 경외감 자체였다. 바야흐로 봄의 시작이다. 이렇듯 계절의 순환을 이야기하는 메타포의 시작은 유괴와 납치에서 비롯된다.

의심할 바 없이 <친절한 금자씨>는 개인적 원한을 복수의 파노라마 속에서 펼쳐내는 영화이고, 그 사건의 발단은 유괴이다. 복수 3부작 속 인물들은 저마다 개인적 복수나 이기적 욕망을 유괴와 납치 감금을 통해서 해소하고 있다. 하지만 영화마다 등장하는 유괴와 납치는 양태와 목적에서 차이를 보인다. 예컨대 <복수는 나의 것>의 류와 영미가 동진의 딸을 유괴하는 것은 자본주의 메커니즘에 대한 원초적 불신과 악순환의 고리를 재촉하는 행위였다. 다만 자신의 신장을 강탈당해 누나의 수술이 막연해진 노동자 빈곤계층이 유괴를 통해 수술비를 마련하려 했다는 것은 (영미의 입을 통한) ‘좋은 유괴’와 ‘나쁜 유괴’의 자기합리화를 가능케 한다는 점에서 박찬욱의 영민함이 빛나는 대목이다. 그러니까 유괴범의 행위 자체는 용서할 수 없으나 심정적으로 동정할 만한 여지를 남겨놓음으로써 유괴가 가져오는 공멸의 기운 속에서 양가성(兩價性)을 함유하고 있는 것이다. 반면에 <올드 보이>속 오대수의 납치 감금은 이우진의 경제력이 사적 복수의 수단으로 사용된다는 점에서 차이를 보인다. 이렇게 자본주의가 낳은 경제력은 <복수는 나의 것>에서 유괴의 동기가 되지만, <올드 보이>에 이르면 납치 감금의 수단으로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친절한 금자씨>의 유괴는 애초에 백 선생이 아이들을 싫어했다는 금자의 설명을 통해서 부의 축적을 위한 동기 말고는 어떠한 이유로도 해석되기 힘들다. 이것은 <친절한 금자씨>가 <복수는 나의 것>의 유괴와는 다른 차원에서 읽혀져야 하며, 배금주의의 병폐가 만연된 당대의 현실과도 무관치 않은 이유가 된다. 결국 <친절한 금자씨>속 유괴는 앞선 두 편의 중간쯤에 놓이는 안전주의 노선을 택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금자의 복수극을 통해서 무사히 안착하며 백 선생 납치 역시 ‘사필귀정’이라는 단어 안에서 어떠한 제제도 받지 않고 암묵적 동조를 얻어내기에 이른다.


감사와 은덕의 Bella Vendetta

르네상스시대의 복수는 언제나 고민의 여지를 남겨놓곤 했다. 그것은 ‘인간 자신의 힘으로 행할 것이냐, 신의 섭리에 맡기고 울분을 참고 견딜 것이냐’의 고민이었다. 근세가 도래하고 법과 규범이 등장할 때 까지 그 역할은 제사장이나 성직자들이 대리해왔다. 그런데 복수의 심판주체가 인간이냐 신이냐의 문제는 결말의 확연한 차이를 가져온다. 인간이 심판하고 복수할 때 그것은 살인을 불러오며 그것으로 인해 자신 역시 복수의 대상이 된다는 점에서 복수의 연쇄고리에서 벗어나기 힘들기 때문이다. <복수는 나의 것>의 장기강탈과 유괴가 불러온 복수의 순환 고리는 인간의 복수가 갖는 한계를 극명히 보여준다. 하지만 복수란 것이 사회적 갈등의 해소 차원에서 보면 현실은 그리 간단치가 않다. 이때 개입하는 것이 샤머니즘이다. 사회적 지위가 낮거나 소극적일 수록 죽어서 복수하는 형태를 잠재우는 방식으로서의 샤머니즘. 말하자면 무속의 힘을 빌린 복수극이 공포영화의 소재로 자주 등장하는 것은 여기에서 비롯된다. <올드 보이> 역시 심령술사를 동원해 오대수의 기억을 조작하는 복수의 단편을 보여주는 반면, <친절한 금자씨>의 복수극은 조금 다른 방향으로 변형되기 이른다.

박찬욱의 삼부작을 관통하는 ‘복수’라는 단어를 단순하게 접근해서는 숲 만보고 나무를 지나치는 우를 범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이탈리아인들의 오랜 관습으로 자리한 복수방식은 하나의 징표가 된다. <친절한 금자씨>의 이금자는 13년 전 사건으로 13년간 복역하는 동안, 교도소에서 자신의 동조자를 하나 둘 씩 만드는 동시에 자신의 복수를 치밀하게 기획한다. 그녀가 간증하거나, 정상인은 이해하기 힘든 친절함으로 재소자를 감화시키는 동안 자신의 행동을 비웃는 사람까지도 자기편으로 만드는 수준까지 도달하게 되는데, 이는 자기가 당한 부당함을 기억하는 사람일 수 록 자기가 받은 은덕을 더 깊고 오래 기억하기 때문이다. 감독은 금자의 대극적 이미지로 뚱뚱한 죄수 마녀를 배치함으로써 조력자로서의 명분을 제공하고 있다. 살인을 저지른 창녀와 꽃뱀과 은행 강도였던 이들이 하나 둘씩 금자의 복수극에 참여하는 것은 금자의 친절함과 대비되는 마녀의 폭력적 행동에 대한 반발 심리이자 금자에 대한 보답이다. 따라서 복수욕의 정당화를 위한 금자의 친절과 베풂의 나날은 이탈리아인들의 복수 방식인 ‘벨라 벤데타 (Bella Vendetta)’와 절묘하게 상통한다. 금자라면 자신의 출소까지 기다리지 않더라도 얼마든지 복수가 가능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오래도록 복수를 미루는 까닭은 좋은 복수(벨라 벤데타)란 오랫동안 기다려온 모든 상황들이 맞아 떨어져야 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복수욕의 정당화를 위해선 이에 상응하는 감사와 미덕이 있음을 입증해야하는 영화적 스토리의 개연성과 무관치 않다. 많은 평자들이 의문을 품었듯이 <친절한 금자씨>가 복수극 3부작의 완성치고는 싱거운 감이 없지 않은 것은 이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이상적 복수의 완성

<친절한 금자씨>에서 금자는 백 선생을 어느 폐교에 가둔다. 그리고는 법과 인간의 감정 사이에서 갈등하는 유괴아동의 가족들을 불러내 동참하게 함으로써 성대한 복수의식을 치른다. 바야흐로 개인의 복수가 공공의 복수로, 사적 감정이 공적응징으로, 죄인에게 조차 보장되어야 할 인간의 존엄성이 짐승만도 못한 놈의 살 권리의 실종으로 바뀌는 순간이다. 이 과정에서 박찬욱은 인간 내면에 숨겨진 폭력성을 본격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하는데, 이때 감독은 피해자 가족의 잔인한 응징이 연상되는 장면마다 시점의 전환을 통해 잔혹성의 논란을 피해가는 영리한 연출을 시도한다. 이를테면 백 선생에 대한 유괴아동 가족들의 복수장면에는 가해 장면의 직접적 표현 대신 결과만을 보여주고 있으며, 무수한 응징을 당했음에도 마지막 까지 백 선생을 살려두는 설정이 그러하다. 이유는 영화적 시점(백 선생의 시점이 아닌, 가해자의 시점)의 차이 때문이다. 즉, 가족들의 원한이 너무도 크다보니 백 선생이 받는 고통의 무게가 상대적으로 작아 보여야 하고, 마지막 응징자가 들어갈 때 까지 그의 목숨은 붙어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유괴아동의 가족이 하나 둘씩 들어가 사적인 복수를 거행하는 동안 그들 손에 들려진 무기는 각양각색이지만, 이 부분에서도 응징도구를 통한 힘의 논리가 포착되고 있다. 그들 대부분이 칼을 들고 있던데 반해, 가장 형편이 어려운 부부에게는 가장 큰 무기(도끼)를 들려줬고, 상대적으로 가장 부유해 보이지만 노쇠한 할머니에게는 작은 가위를 주었을 뿐이다. 그럼에도 백 선생을 절멸시키고 직접사인을 제공하는 것이 마지막으로 들어간 할머니의 가위였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것은 자본가 또는 부르주아의 모습에 나약한 육체를 가진 노파에게 최종응징을 허락한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백 선생이 아이들의 몸값으로 받은 돈을 축재의 수단으로 사용한 부르주아라는 점에서 보자면, 반인륜적 범죄를 저지른 대가로 획득한 부의 종말은 동질의 부유층인 할머니의 손에서 결말지어 져야 마땅하다고 감독은 생각했는지 모른다. 만약 빈곤층의 열등감과 분노가 과잉 표출된 응징의 결과로 백 선생이 죽었다면 아마도 이 장면을 참아내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영리하게도 박찬욱은 자본가의 손으로 절멸시키고는 자본가의 종말을 목도케 함으로써 자신이 일관되게 추구해온 사회적 불신과 B급 영화의 정신을 합일 시키고 있는 것이다.


힘의 구도 재편

아울러 <친절한 금자씨>가 남성위주의 복수극에서 탈피해 여성의 복수극으로 변형되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복수는 나의 것>과 <올드 보이>에서의 남성은 피해자인 동시에 가해자의 모습이었던 반면 여성은 순수한 피해자로만 그려졌다. 류의 누나, 동진의 딸, 우진의 누나와 대수의 딸이 모두 피해자인 여성을 대변하고 있었다. 게다가 근친의 집착을 통한 금기시된 사랑을 내포하면서 ‘하지 말아야 할 것’에 대한 벽을 넘어서려는 위험한 시도를 병행해왔다. 그러나 <친절한 금자씨>에 이르러 박찬욱은 강하고 카리스마 넘치는 금자에 비해 너무도 가냘프고 여성적인 모습의 남성을 만들어낸다. 그것은 박찬욱 영화 속 어디에도 존재 하지 않던 남성의 모습이었다. 비록 비열하고 내면적 열등의식으로 가득 찬 인간이었을지언정 박찬욱의 남성은 마초의 광포함을 공공연하게 드러내곤 했기 때문이다. 결국 폭력의 과잉으로 얼룩진 남성성의 허영을 조롱하는 도구로 여성성과 남성성의 역할변경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절묘한 타협과 해결책이 찾아낸 독특한 변주

한국형 하드보일드 고어영화의 효시를 이룬 <복수는 나의 것>에서 보여준 계급 간 갈등이 빚어낸 공멸하는 인간의 모습은, 박찬욱식 냉소주의와 맞물려 대단한 반향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또한 상업적으로 성공했던 <올드 보이>는 대답과 함께 질문을 찾아야 하고, 반전의 속임수를 끊임없이 읽어내야 하며, 충돌과 어긋남에서 비롯되는 아이러니를 분석해야 하는 영리한 영화였다. 그러나 <친절한 금자씨>는 표면적으로 현란해 보이는 구성, 구도, 장치, 심지어 화려한 소품에 이르기까지, <올드 보이>와는 사뭇 다른 기교와 작법으로 완성시킨 영화이다. 딸과 함께 접어든 골목길의 눈 내리는 장면 등의 스타일리시한 영상은 이명세의 냄새가 진동하고, 일정한 무게감 없이 시퀀스마다 파편을 이어붙인 것 같은 내러티브는 잔혹복수극을 기대한 관객 앞에 컬러풀한 블랙코미디로 화답한다. 한마디로 <복수는 나의 것>과 <올드 보이>의 경계를 넘나들며 관객과 평단의 입맛을 맞출 줄 아는 영민한 감각과, 철저하게 기획된 소품과 세트가 주는 매력이 장르적 관습과 전작의 변주를 통해서 허허실실 구동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차라리 콜라주에 가깝고 역하거나 불편하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친절한 것과는 거리를 달리한다. 이렇게 볼 때 <친절한 금자씨>는 부분은 뛰어나나 전체가 부분을 넘지 못하는 독특한 실험의 결과물처럼 보인다. 요컨대 이우진이 실패한 길에서 절묘한 타협과 해결책을 찾은 이금자의 복수극이 <친절한 금자씨>이다.


에필로그

시간이 흐를수록 성숙한 모습과 영혼의 깊이를 지닌 균형 잡힌 화법으로의 변화를 모색해왔다는 점에서 박찬욱은 여전히 독보적 위치를 점하는 감독임에 틀림없다. 그의 영화는 언제나 인간을 향했으며 관계와 사회문제를 제기하는 데 뒤쳐짐이 없었다. 사실 이것은 매우 중요하다. 한 편의 영화를 통해 문제를 제기하는 감독이 있는 반면 남이 제기한 문제를 환기하는 데 그치는 감독도 있고 더러는 돌출된 문제를 절묘하게 포착해 해답만 내놓는 감독도 있기 때문이다. 과연 <박쥐>가 ‘복수 삼부작’을 능가하는 새로운 영화문법을 보여줄지, 뱀파이어라는 소재가 사회문화적으로 어떤 파장을 몰고 올지는 아직 미지수이다. 각종 수사를 보탠 언론의 호들갑이 마뜩치는 않지만, 박찬욱의 영화가 지닌 고유의 힘과 스타일만으로도, 그 이름 석 자만으로도 아드레날린이 샘솟는 것은 부정할 수 없으니 극장으로 가서 눈으로 확인할 밖에. 드디어! <박쥐>가 날개 짓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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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s://japanplaza.tistory.com BlogIcon JNine  수정/삭제  댓글쓰기

    누군가 쓰지 않을까 싶었던 글을 쓰셨군요.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박찬욱 감독의 영화는 '영화' 자체를 연구해서 만든다는 느낌이 강하게 듭니다.
    워낙 공부도 많이하고, 작품도 많이 보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그냥 보는게 아니라 자신이 만들 영화에 흡수시켜 반죽하고 자신이 원하는 것, 보여주고 싶은 것을 만드는 재능이 뛰어난 사람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박쥐는 정말...기대 만빵

    2009.04.23 14:04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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