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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11.11 미조구치의 50년대 영화에 대해 (1)

미조구치의 50년대 영화에 대해

필진 리뷰 2009.11.11 14:08 Posted by woodyh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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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시원


아트플러스 시네마네트워크에서 주관하는 넥스트플러스 영화 축제의 일환으로 필름포럼에서 미조구치 겐지 특별전을 진행 중이다. 서구의 평자들, 특히 프랑스의 까이에 뒤 시네마의 동시대 필진들에 의해 발굴된 미조구치의 영화들을 생소한 채 보았다. 사실 오래 충분히 이야기 된 작가이기도 하기에 많이 뒤늦은 감으로 따라가보듯이 영화를 보았다. 이 영화들의 무엇이 그 시대의 그들을 흥분하게 했을까. 나는 그들의 글이나 유명하다는 노엘 버치의 분석을 사실 직접 읽어보진 못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 영화들이 카메라 움직임, 인물, 프레임 이 셋의 연속적인 구성을 순수하게 구사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이는 무성영화시기를 거친 감독들의 작품에서 느낄 수 있는 고유의 영화적 감각이기도 하다. 미조구치의 영화는 시대와 지역을 넘어 2009년 현재 서울의 한 작은 지하 시네마테크에서 영화를 보고 있는 나의 앞에서 여전히 상영(screening)되고 있었다. 이 상영은 기술적인 상영의 과정이 아니라 그로부터 발생된 현상을 뜻하는 말이다. 영화 이야기가 아니라 영화적인 이야기가 발생된다.


영화적이란 말은 초기 영화의 순수성을 내포한 말이다. 이는 말하지 않는 침묵으로서의 이야기로서 시적인 영상을 뜻한다. 이 함축된 영상은 이야기를 말이 아닌 정서로서 우리에게 전달한다. 미조구치는 자취(흔적)로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그는 단절과 연속 즉, 닫히고 열리는 문으로, 갇히고 해방되는 카메라 움직임으로, 밝아지고 어두워지는 페이드 인/아웃으로, 그것의 느린 디졸브로 참혹한 전후의 사회상 위에 위태롭고 불완전하게 존재할 수 밖에 없는 인간의 상황을 겹쳐 그려낸다. 미조구치는 정지한 풍경을 기점으로 돌아 큰 원을 그리면서 비극을 불교의 사상으로 회유한다. 이 원운동은 관념적인 것이고 역사적, 사회적 비극 속에 처한 인간에게서 움직이지 않는 그 내면의 무엇을 발견, 관찰하려는 탐색이다. 이는 카메라에게 부여된 철학적, 논리적, 윤리적, 도덕적 증명이 결코 아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인간과 인간으로서 만나려는, 사물과 인간이 마치 일치되려는, 관계적으로 말해 면(3차원)과 선(2차원)으로부터 점(1차원)으로 회귀하려는 것이고 정서적인 방황으로부터 해탈하려는 것이다. 즉 현세의 입체적이고 구체적인 지옥에서 내세의 추상적인 세계로 초월하려는, 왔다가 사라지려는 회귀 운동이다. 미조구치의 카메라 움직임은 관조적이며 인물들은 유령적이고 프레임은 끊임없이 외화면을 의식한다. 이것은 쇼트와 쇼트를 거의 나누지 않으려는 듯한 원 신 원 컷, 디졸브의 잦은 사용, 사라졌다 다른 존재로 재발견되곤 하는 인물들의 등,퇴장 방식, 외화면에서부터 시작하여 외화면으로 사라지는 소리의 연출방식 등에서 그러하다. 즉 미조구치에게 내화면은 외화면의 순수한 현전이다.

미조구치의 말기인 50년대는 그의 영화 세계를 완성 지을만한 걸작들로 채워져 있다. 미조구치는 50년대의 사실주의적인 풍경과 정서적인 드라마를 빈틈없이 연출해내는 데 있어 거의 모든 작에서 예외가 없을 정도의 경지에 이르고 있다. 그의 영화는 시대적 배경을 불문하고 마을의 부감 쇼트로 시작하여 부감으로 마친다. 영화의 존재적 출처인 듯 하늘로부터 하강하여 다시 하늘로 상승한다. 그런 다음, 일본의 전통 연극을 의식하듯 인물들의 등/퇴장의 기점, 방향, 루트, 시간을 충실히 묘사한다. 그들은 출현한 곳으로 사라지는데 그 과정을 보면 긴 골목길의 소실점에서부터 출발하여 긴 시간에 걸쳐 걸어나와 문(발)과 문(발)을 넘나들고, 방과 방을 옮겨가며 그 각각의 공간에서 외면과 내면을 연기한다. 미조구치는 안과 바깥을 화면 안에서 나누는 프레이밍을 선보인다. 그것은 가옥의 문 안에서 바깥으로 보이는 긴 거리의 골목길을 보여주는 방식이나 가옥 내의 방을 칸막이로서 나누어 보여주는 방식에서 그러하다. 그는 한 공간을 이중의 공간으로 만들어 여기와 저기 즉 다시 말해 내부적 상황과 외부적 상황, 드라마와 현실, 혹은 현실과 도피, 현세와 내세를 입체적으로 명시한다. 인물들은 거의 실시간적인 조명을 받으며 일종의 카메라 테스트를 거치는 듯 연기한다. 그들은 마치 외면과 내면의 방을 넘나들 듯 행동으로서 출현해서 심적으로 고백하고는 다시 행동으로서 떠나간다. 한 인물과 사건에 부여된 긴 신들은 거의 느린 페이드 인 혹은 아웃, 디졸브를 통해 겹쳐진다. 중요한 것은 이 겹치는 장면의 화면의 구도이다. 사라지는 화면의 구도가 이어지는 화면의 구도와 일치한다. 인물이 있었던 자리에 다른 인물 혹은 사물이 배치되어 있다. 왔다가 사라진 존재의 운동감은, 이 영화를 지켜본 관객으로서만 온전히 느낄 수 있는 것으로서 화면엔 정지된 흔적, 혹은 미세한 떨림, 즉 수면의 파동, 미닫이 문 운동의 잔감, 혹은 외화면의 잔향(소리)만이 맴돌고 있다. 그와 동시에 그 각각의 공간에서 결핍되어있는 요소들을 이 이중 공간의 드나듦의 과정으로서의 네러티브를 통해 역설적으로 채워 나간다. 이 드나듦의 과정에서 만나게 되는 인물들은 결코 동일한 출신(혈연, 가족)이 아닌 각기 다른 출처의 인연들이다. 이 인연은 인간적이고 살가우며 온정이 있다. 폭력적이고 극악 무도한 위정자, 그 비극의 역사와 정치 아래서 인간들은 완전히 벌거벗은 상태로서 만나 온기를 나눈다. 그들은 사실 이상적으로 표면화된, 매끈한 성격의 구조를 하고 있다. 미조구치의 인물은 복합적인, 내밀한 성격의 소유자들이 아니다. 다시 말해 몸은, 게이샤의 치장은, 예쁨과 추함은, 늙음과 젊음은 도구적인 것이고, 역사와 정치의 시대적 반영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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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조구치의 50년대 영화에서 전후의 고아들이라 불릴만한 떠도는 인물들은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의 원자화된 인간들의 풍경의 일부일 것이다. 이것은 <산쇼다유(1954)>에서 가장 극적이다. <산쇼다유>는 가장 전통적인 가치를 설득하는 영화로 영화의 엔딩에서의 어머니의 대사(아버지의 길을 따랐기에 너가 나를 만날 수 있었다)를 통해 그것을 극단적으로 드러낸다. 앞서도 언급했듯 미조구치는 무성영화의 자산을 토대로 영화를 만들고 있음을 50년대에까지 의식적으로 보여준다. 시대극이라고 불릴만한 <우게츠 이야기(1953)>와 <산쇼다유>는 한밤중의 강물을 특별히 빼어나게 묘사한 작품으로, 강물을 사이에 두고 일어나는 비극을 통해 인연, 삶, 운명으로서의 강물, 즉 깊이를 알 수 없이 고요한 표면의 잔잔한 파동만을 일으키고 있는 검은 물로 가득찬 까마득한 풍경을 연출한다(여담이지만 이 두 영화는 물 위의 도시, 베니스 영화제에서 은사자상을 수상한 바 있다). 강물은 신화적인 기원으로부터 떠남/이별을 상징한다. 이것은 신체적인 분리의 지점이자 정신적인 방황의 시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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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조구치는 이 시대극에서 무르나우의 무성영화를 떠올리게 할 정도로 자연의 묘사를 통해 인간의 정서적인 풍경을 만들어내는 자연주의적인 시선을 노출한다. <우게츠 이야기>에서 겐주로나 도베이가 마을을 떠나고 방황하는 여정의 트레블링, 밤의 강물에 띄워진 배, 그 배 위의 인물들의 부유한 상태, 산쇼다유에서 남매가 인신매매단에 의해 부모와 생이별을 하는, 인물의 인연의 거리는 벌어지고 그 사이를 검은 물로서 채우는 까마득한 비극의 장면, 여동생을 죽음을 묘사한 강물의 미세한 파동의 움직임을 오래도록 응시하는 장면들이 그러하다. 이는 표현주의적인 무성영화, 즉 프레임, 조명, 무대의 극적인 장치들을 동원하여 미장센에 대한 의식이 돋보이는 영화들이라 할 만하다. 이처럼 미조구치는 물리적인 수평과 수직 즉, 양적인 길이와 깊이를 가지고 질적인, 정신적인 문제를 드러낸다.

이같은 미조구치의 정신적인 위기감은 그의 자전적인 무대이기도 한 매춘가의 풍경을 보여줄 때 보다 직접적으로 연출된다. 매춘거리의 사실적인 풍경을 그려낸 <게이샤(1953)>나 <적선지대(1956)>에서 미조구치는 상대적으로 미학적 형식의 장치보다는 유곽 내부의 가장 치부스러운 삶의 부분을 드러내며 그 맨 상태의 낯을 화장과 기모노와 술과 음식과 음악과 노래로서 연출한다. 그러면서 그는 좀 더 사적이고 내면적인 공간으로 들어와 그들의 결핍된 가족관계를 드러내며 같은 '핏줄'이 아닌 같은 '처지'에 속한 자들끼리의 연대를 만들어낸다. 그는 매춘이라는 사회적이고 성윤리적인, 도덕적인 현상을 일본의 전통 가옥과 황폐한 전후의 거리처럼 환경적인 처지로 만든다. 그는 그것을 한 번 들어섰을 때 결코 벗어날 수 없는, 운명론적인 구조물로 여긴다. <게이샤>에서 나이 든 매춘부와 젊은 무희가 겪는 정신적 위기, 그리고 선대가 후대를 위해 희생함으로 맺어지는 연대감은 그들을 또다시 매춘의 거리로 힘차게 전진하게 만들면서 인간적인 위기의 시대를 남다른 방식으로 극복한다. 그의 운명론적인 시각은 첫 컬러 영화인 화려한 색체감과 빼어난 미장센이 돋보이는, 가장 모던한 양식을 가진 <양귀비(1955)>같은 영화에서는 보다 형식적으로 설명된다. 이 영화의 첫 시퀀스는 상당히 인상적인데, 궁궐의 긴 복도의 끝에서부터 사선으로 걸어들어오는 신하들의 모습이 보여진다. 그런 다음 창가 앞에 앉아있는 늙은 현종의 모습이 보인다. 그는 양귀비의 목상을 앞에 두고 관찰하고 있다. 여기까지 이 신하들의 좁혀오는 운동감과 정지한 현종은 아무런 상관관계가 없다. 이어 현종의 공간 왼쪽 편에서 아까 그 신하들이 등장해 명령을 전달하고 현종은 이를 거부한다. 그리고 나서 이 신하들은 아까 그 출현한 방향(왼편)으로 조용히 사라진다. 이제야 현종이 창가앞에서 고심하며 앉아있거나 양귀비상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의 정황이 설명된다. 그 현종의 방안의 묘사는 신하의 등장과 사라짐의 실시간 운동으로 둘러싸여진 것으로 운명적인 처지, 즉 비극의 처지를 설명한다. 미조구치는 비극의 시대에 서글픈 처지에 몰린 인간의 순수한 감정들을 이와같이 애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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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조구치의 유작이 된 <적선지대>는 미조구치 영화중에서 가장 형식적인 의식이 없는, 리얼리즘계열의 영화라 불릴만한데 이 영화의 엔딩은 흡사 브뉘엘의 자연주의를 닮고 있어서 꽤나 충격적이다. 그는 이 영화에서 거의 이전까지의 초월성, 관념성을 배제하려 한다. 돈으로 성을 사는 남자를 소위 말해 '등쳐먹고' 자립하여 나간 매춘부의 빈 자리에 심부름을 하던 젊은 소녀가 들어선다. 미조구치는 유곽을 늘 열린 구조로 보여준다. 이 가옥은 개방적이면서 동시에 유동적이다. 강물 위의 배가 인물들의 정신적 방황을 유출한다면 이 열려있는, 결코 영업이 정지되지 않는, 망할 듯 망하지 않는 매춘의 유곽은 육체적인 방황을 안착시키고 직업적으로 귀화시킨 후 정신적이고 인간적인 정서를 이 구조와 별개로서 취급한다. 하지만 <적선지대>의 풍경은 이전의 미조구치의 세계관을 일정부분 부정하고 있다. 오랜 기간 매춘에 몸담아온 늙은 매춘부들의 현실이 여과없이 보여진다. 이들은 남들과 같은 안정적인 결혼생활도 제대로 해보지 못한 채 쓸쓸하고 적적한 마음을 서로 부대껴가며 살아간다. 라디오에선 매춘금지법이 곧 통과될 것이란 보도가 들리고 이들은 그렇지 않아도 빚에 쪼들리는 신세에 더 큰 생계의 부담을 느낀다. 이들은 어려운 와중에서도 돈을 쪼개어 서로 돕고 의지하며 추운 시절을 근근히 버텨나간다.


미조구치는 이 영화에서 <우게츠 이야기>에서 정점을 이룬, 관념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시선을 사회적 리얼리즘의 시선과 거의 충돌시킨다. 이 마주침의 영역에서 도피하거나, 초월하거나, 아름다운 죽음을 그려내며 내세로의 진전을 꾀한 이전의 아름다운, 시적인 카메라와는 달리 이 영화의 엔딩에선 거리에 막 화장을 하고 나선, 조금은 수줍은, 그러나 미세하게 흥분한 홍조의 얼굴과 두려움에 찬 눈동자를 한 소녀를 기이한 일본 전통 음악과 함께 매치시키며 우리를 사실적인 혼란에 빠뜨린다. 그녀는 거리로 나선 것도, 도피의 길로 들어선 것도, 또 다른 세계에 들어선 것도, 죽음의 미학을 실천한 것도 아니다. 지금 그녀는, 아이러니하게도 그 무대와 현실의 경계선에 서서 카메라 바깥의 거리를 보고 있다. 그 곳은 미조구치가 단 한번도 염두하지 않았던,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영역의, 금기시된 곳이다. 미조구치는 새로운 운명론에 처한 세대를 막 보여주고는 너무 성급히 퇴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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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1.08.09 0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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