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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프닝과 에필로그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이하 우생순) 은 (영화 속) 핸드볼 큰잔치로 시작해서 (실제의) 아테네 올림픽으로 끝맺는다. 이 두 공간에는 세 명의 감독이 있다. 실업팀 송감독, 당시 대표팀 임영철 감독, 그리고 이 영화의 연출자 임순례 감독. 나는 이 영화에서 영화의 시작과 끝을 보는 것이, 그리고 거기에 있는 세 명의 감독에 주목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우생순]은 임순례 감독의 전작과는 판이하게 다른 스타일을 보여준다. 아니 이 영화에서 임 감독의 스타일은 많은 부분 휘발되었다. 그래서 위의 두 장면은 묘하게 기억에 남는다. 두 감독의 표정과 이 두 감독을 바라보는 한 감독의 시선.

핸드볼 큰잔치가 벌어지는 국내 어느 체육관. 듬성듬성 관중을 비춰주던 카메라는 벤치로 시선을 향한다. 후보선수들은 달아오른 표정과 목소리로 코트 위 선수들을 향해 기운을 내뿜는다. 그 사이에서 무표정한, 얼핏 보기에 어떤 상념에 잠긴 듯한 송 감독의 모습이 눈에 띤다. 송감독은 우승이라는 짜릿한 ‘순간’ 만큼은 선수들에게 느끼게 해주고 싶지만, 그 순간 너머 찾아오는 해체라는 명약관화한 사실을 이미 알고 있다.

에필로그. 결승전이 끝난 후 당시 대표팀 임영철 감독의 인터뷰. 선수들과 국민들께 감사하고, 하지만 임 감독은 준우승의 짜릿한 순간 너머, 저 멀리 한국땅에서 이미 벌어졌고, 앞으로도 벌어질 명명백백한 현실에 말을 잇지 못한다. 그리고 크래딧이 올라간다.

이 두 감독의 '체념' 혹은 '말 줄임표'가 그 동안의 임순례 영화였다. [세친구] 는 세 청춘의 암흑같은 미래에 대해 체념에 가까운 목소리를 전달한다. 과연 그들이 앞으로 나갈 수 있기나 한가.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폭행으로 의가사 제대를 한 후 쓸쓸히 거리를 걷는 무소속을 비추는 부감으로 끝을 맺는다. 여기에서는 어떠한 희망도 찾아볼 수 없다. 여기서 문득 드는 생각. 지난 해 보았던 [행복]의 영수와 [세친구]의 무소속. 이 두 영화의 마지막은 비슷한 장면으로 끝맺는데, 과연 누가 더 절망적일까. 그러니까 영화가 끝나고 앤딩 크래딧이 오를 때 새로 만드는 이야기, 혹은 시나리오. [와이키키 브라더스]의 첫 장면과 마지막 장면은 반복이다. 그들은 밤무대에서 여전히 노래를 부르고 연주를 한다. 다른 대안이 어디 있겠느냐... 라며 와이키키밴드의 무대를 역시 부감으로 잡으며 영화는 끝맺는다. 그렇게 그동안의 임순례 영화는 생애 최고의 순간을 보여주지 않았다. 오히려 생애 최악의 순간이라 할만한 장면을 처절하게 보여주는데 공을 들였다.




순간 혹은 순간 너머

그랬기에, 7년만에 돌아온 임순례 영화의 제목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을 처음 접했을 때 이질적인 느낌을 받은 건 당연했다. 흔히들 쓰는 반어의 수사인가. 임순례가 어떤 방식으로 최고의 순간을 그렸을지 궁금했다. 다소 위험한 대중관객 반응에 대한 가정. 관객들은 가공된 판타지로써의 상황. 장르적으로 말하자면 공포나 스릴러의 최악의 상황은 맘을 열어 즐기는 것 같다. 왜냐하면 2시간동안 그러한 최악의 대리경험으로 쾌락을 누리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화관 바깥에서 늘 존재하는 어떤 불편한 순간을 영화관에서조차 보려하는 관객은 점점 줄어들고 있다고 생각한다. 임순례 감독은 [우생순]의 전략으로 이전 영화들에서 볼 수 있었던 최악의 순간들을- 이 영화에서 말하자면, 이혼, 불임, 소녀가장, 자살기도 등 - 단지 말로만 전달하거나 간단한 설명 혹은 장면으로 대체한다. 이전 영화들처럼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든 살아야하지 않겠느냐. 의 과정은 대폭 간소화하고, 그 결과도 영화 바깥으로 지연시킨다.

우리가 정란과 수희 때문에 웃고, 올림픽 은메달의 환희와 안타까움을 함께한다고 해도, 그것만으로 온전히 이 영화를 설명할 수 없는 까닭은, 그들이 아테네를 떠나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을 때를 상상하게 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 영화에서 그런 상상을 떠올리는 건 관객의 자유다. 선택이란 말이다. 이전의 임순례 영화에서는 이건 선택이 아니었다. 어떤 불가피함이 있었다. 우리는 영화를 보고 영화관을 나오며 그들이 직면해야 할 현실을 상상해야만 했다.

하지만 [우생순]의 무게는 태릉과 아테네 라는 두 공간 속 ‘순간’ 을 생애 최고로 만들기 위한 여정에 실렸다. [세친구] 는 지독한 영화였다. 이 영화에는 이런 순간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은 어쩌면 그들에게 생애 최고의 순간이었을지도 모르는 학창시절을 졸업하고 스무살 성인이 된다. (영화는 졸업 이후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이들 셋은 끝도 없이 방황하고, 상처받고, 하여튼 그렇게 남겨진다. 관객은 이 처절한 경험을 함께해야만 한다. [와이키키 브라더스] 에는 그래도 그런 '순간'이 회상 혹은 환타지로 보여진다. 하지만 그건 희망이 아니라 현실의 남루함을 돋보이게 하는 장치로 쓰인다. 이미 이 부분에 대해서 필자는 [와이키키 브라더스](낭만주의자의 꿈) 에 관한 글에서 언급한 바 있다. 그 부분을 옮겨보자.

장면 하나. 충고보이스 시절, 그들은 동해바다를 저 멀리 와이키키 해변으로 대신 바라볼 거침없는 권리를 갖고 있다. 드넓은 와이키키 해변에, 하얀색 보트가 지나가고, 야자수 나무 아래로 금발의 비키니 미녀들이 보이고... 그렇게 ‘충고 보이스’ 는 ‘와이키키 브라더스’로 개명한다. 대여섯 위의 대학생들과 맞장 뜰 정도로 함께 있으면 두려울 것 없었던 그들은 거리낌 없이 벌거벗고 바다로 뛰어간다. 다시 카메라는 시선을 돌려 노래방 기기 화면에는 비키니를 입은 금발의 여인을 비춰준다. 10년도 한참 지나 해후상봉한 친구들, 금발의 여인 위로 지나는 가사를 보며 노래를 부른다. 장면 둘. 밴드 생활을 같이 했던 친구의 죽음으로 심각한 쇼크를 받은 성우, 그는 노래주점에서 성고문에 가까운 일을 겪는다. 나체쇼를 즐기던 사장님들은 성우에게도 옷을 벗을 것을 요구하고 성우는 결국 나체로 노래를 부른다. 노래방 기기 속의 비키니 차림의 금발의 미녀는 해변에서 달리고 있다. 이때, 바로 위에서 언급한 충고보이스 시절, 그 때 그 장면이 디졸브된다. 플레시백 효과를 쓴 이 대비되는 두 장면은 단연 이 영화의 백미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이 ‘플레시백’ 을 단순한 과거 사실의 나열, 혹은 그들의 회상이 아니라 그들의 ‘환상’이라 생각해야 한다는 점이다. 강산이 한번 바뀐 후에 겨우 만나게 된 옛 친구들은 , 으레 학창시절 모임이 그렇듯이 옛날을 떠올린다. 그리고 현실에서 일탈하여 과거로의 행복했다고 믿는 그 순간들을 지속하려 한다. 자, 여기서 다시 두 번째 장면으로 넘어갈 때, 우리는 환상을 바라보는 주체가 어떻게 변하는지 주목해야 한다. 환상의 공간에 쉽게 동화되어 주체적 시선으로 그곳을 바라보던 성우는 영화 종반부의 대비되는 장면 속에서 환상 속 그들과 동화될 수 없는 타자로 거리를 유지한 채 그곳을 바라볼 수밖에 없다. 첫 번째 장면에서 ‘비키니 아가씨’와 ‘청년 브라더스들’ 과 그것을 바라보는 ‘장년 브라더스들’ 은 추억을 매개삼아 삼중 인화로 ‘심리적 디졸브’로 엮어질 수 있다. 하지만 두번째 장면에서 ‘비키니 아가씨’ 와 ‘청년 브라더스들’ 과 그것을 바라보는 성우는 ‘심리적 디졸브’ 로 엮어질 수 없다. 왜냐하면 브라더스 중 한명이 죽었기 때문이다. 성우는 지금 이곳, 발개벗은 사장님 옆에 있다. 그가 서있는 곳은 여기지(수안보) 거기가(환상 속 학창시절) 아니다.

이처럼 [세친구]와 [와이키키 브라더스]는 아예 ‘거기’ 라는 공간을 없애버리거나, '거기'보다 '여기'에 주목한다. 하지만 [우생순]의 전략은 여기보다 ‘거기’에 방점을 찍는데 있다. 이런 식으로 어떤 영화의 상업적 전략에 대해 논하는 건 매우 재미없는 일이다. 다만 혹자가 말하는 임순례의 영화가 점점 희망적으로 변한다. 에는 동의할 수 없다. 물론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세친구]에서 [우생순]까지 영화는 점점 희망 혹은 꿈을 보여주는 장면이 많아지는 건 사실이지만, 그의 영화에는 일관되게 어찌할 수 없는 체념의 정서가 흐르고 있다. 한 가지 무모한 가정. 당신이 지금의 현실에서 어느 실업팀의 핸드볼 감독, 혹은 대표팀 감독이 된다고 해보자. 희망을 쉽게 얘기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이 영화에서 그들의 연대, 화합, 우애 등을 통해 희망의 카타르시스를 느끼지만, 그들이 아테네를 떠나, 태릉을 떠나 이미 영화관 밖으로 나와 버린 우리를 뒤로 하고 살아가고 있다면? 임순례 감독의 최종 질문은 결국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이 영화의 오프닝과 에필로그를 놓치면 안 되는 이유다.



승부 던지기, 대면의 순간

우리가 이 영화에서 그녀들의 움직임, 그 역동적인 몸짓에 반했다고 하는 건 어떤 스펙타클 차원의 스포츠로써 느끼는 감상이 아니다. [우생순]보다 더 역동적인고 실제에 가까운 몸짓을 보여준 스포츠 영화는 무수히 많다. 그런 영화들에서 볼 수 있는 액션의 쾌감이 이 영화에는 부족하다. 다만 우리가 그들의 코트 바깥에서의 모습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몸짓이 우리의 가슴에 맺힌 것이다. 그래서 [우생순]의 승부던지기는 - 비록 실제를 바탕으로 했기에 어쩔 수 없이 찍어야만 했겠지만, 그보다는 - 필연적인 선택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축구를 해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승부차기에서 오는 그 압박감이란 이루 말로 형용할 수 없다. 고독한 실존. 혹은 실존의 위기. 존재 대 존재의 맞섬. 이것은 어느 낭떠러지에 서 있는 인간 실존의 위태로움과 닮아있다.(실제로 초등학교 축구대회 결승에서는 선수보호 차원에서 승부차기가 아닌 추첨의 방식으로 승부 방식이 변하고 있다고 한다.) 특히 나는 한미숙의 마지막 승부던지기가 실패로 끝났을 때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무릎을 치고 알았다. 승부던지기가 실패로 끝나고, '아, 금메달은 날아갔다.' 이건 당시 티비를 지켜보았던 모든 대한민국 국민이 느낀 공통된 사실, 반작용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 영화는 그 실패를 전제로 한 영화다. 즉 우리가 이 장면을 통해 느끼는 정서는 2004년 아테네 올림픽 결승전 중계의 반복이 될 수 없다. 미숙에게 승부던지기의 실패는, (가상의) 승부의 끝. 다시 코트 밖의 진짜 승부와 대면해야 한다는 그런 끔찍한 자각을 가장 먼저 불러오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

이 영화를 아줌마들의 영화라고 많이 얘기한다. 그들의 힘이 긍정적으로 작용하는 영화라고 한다. 물론 백프로 동의한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해 보자. 이 빌어먹을 대한민국 사회는, 아줌마들의 악착같은 생명력으로만 돌파가능한 것인가. 그렇게 항상 정신 바짝 차리고 기합 들어간 삶을 살아야만 하여튼 버틸 수 있는 것인가. 아, 나같이 비리비리한 남자에겐 그들이 위대해보이고, 한편으론 든든하지만, 그 사실이 슬프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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