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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8.08.21 여름이야기, 그곳에 가고 싶다

여름이야기, 그곳에 가고 싶다

필진 칼럼 2008.08.21 10:32 Posted by woodyh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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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건영



 


제목만 보고 혹여 에릭 로메르의 <여름이야기 Conte D'Et>가 아닐까 기대한 분들에게는 미안한 얘기지만 그것과 무관하다. 각설하고. 남들은 계곡이다 해수욕장이다 해서 고속도로에 비싼 기름을 철철 쏟고 있다는데 또 이름 꽤나 알려진 대기업의 CE0들은 몇 권의 책과 더불어 휴가를 보낸다는데, 혹은 베이징까지 날아가 나라사랑을 실천(?)하고 있다는데, 나는 올해도 휴가라는 놈에서 멀어지고 있다. 그런 와중에 오랜 만에 홍상수의 <생활의 발견>을 다시 보게 되었고 경수가 경주행 기차를 타는 장면에서 어느 해 나의 경주행 휴가가 떠올랐다.

내가 마지막으로 휴가를 간 것이 언제였더라? 그렇지, 1998년에 휴가를 떠났었지. 그러니까 IMF가 이 땅을 휩쓸던 그 팍팍한 시절에 나는 경주로 휴가를 떠났더랬다. 계획은 이랬다. 「준비해간 비디오 10편을 보되, 한 편이 끝나자마자 평을 쓰고 다음 영화로 넘어갈 것.」 다소 황당하기까지 한 나의 계획이 알려지자 영화친구들은 “경주에 가거든 황남빵 좀 사다주라” “경주가면 영덕에 가서 영덕게 먹고 오는 건 기본이다. 가면 박 선장 집도 좀 보고 와라. 거기 명소가 되었다더라.”며 저마다 한 마디씩 거들었다. 경주의 ‘황남빵’은 나 역시 먹어 보고 싶었던 특산품이고 <그대 그리고 나>로 알려진 영덕(정확하게는 강구)의 촬영지 또한 한 번쯤 가보고 싶단 생각이 들게 만들었다. 그러나 이런저런 참견과 조언에도 불구하고 세상시름 다 잊고 휴대폰도 꺼놓은 채 영화보기에만 몰두하리라 스스로 다짐했다. 그렇다고 거창한 영화를 볼 것은 아니었다. 평소에 놓쳐버렸고 예술영화와 거리가 있는 가벼운 영화로 리스트를 짜고는 비디오대여점의 도움을 받아 여행가방 한가득 비디오테이프를 챙겨 포항행 비행기에 올랐다는 얘기다.

문제는 비디오플레이어가 완비된 숙박업소를 찾는 일이었다. 보문단지까지 들어가 호텔 몇 군데와 모텔을 수소문 해봤지만 비디오플레이어가 설치된 곳은 없었다. 하는 수 없이 보문단지에서 떨어진 감포 인근의 모텔에 비디오플레이어가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는 그리로 향했다. 이렇게 경주에서의 3박 4일은 영화와 함께 아니 비디오와 함께 시작되었다.

짐을 푼 곳은 감포 앞바다와 맞닿아있어서 창을 열면 바다 내음이 코를 찔렀다. 고작 비디오 10편을 보러 비싼 돈 들여 경주까지 날아갔다고 탓하지 마시라. 같은 영화라도 스크린으로 보는 것과 텔레비전화면으로 보는 것이 다르듯이 비디오 일지라도 집에서 보는 것과 바다를 지척에 둔 곳에서 보는 맛이 확연히 다르니까 말이다. 게다가 내가 가져간 것들은 <폭풍 속으로> <지중해> <쿨 러닝> <워킹 걸> <사랑한다면 이들처럼>등이었으니 왜 안 그렇겠는가. 그렇다고 아무렴 영화만 보았을라고? 더위가 수그러들면 감은사지 삼층석탑까지 걸어가서는 그 앞에서 한 참을 서있다 돌아오는 것도 일과 중 하나였는데, 석탑 앞에 서 있으면 게다가 흐린 날이면 한 없이 평화로워지면서 주술에 걸린 사람인양 몸의 기운이 모두 빠져나간 듯 새털처럼 가벼워진 느낌마저 들었다. 그것은 마치 베르베르의 『뇌』 속 인물들이 맛보는 천상의 희열과도 같은 것이었다. 또 국내유일의 수중횟집이라던 ‘늘시원’의 전망대 앞에 서서 전국에서 몰려온 관광객을 구경하는 것도 별난 즐거움 중 하나였다. 영화와 더불어 보내겠다던 나의 마지막 휴가는 감은사지 삼층석탑 아래서 피안의 낙토를 찾았고 늘시원의 질기고 텁텁한 횟감을 현실처럼 곱씹으면서 그렇게 끝을 맺었으니, 그 이후로 휴가 갈 엄두조차 내질 못했다. 자금사정 탓도 있지만 여름과 가을 사이에 몰린 각종 영화제를 챙기다보니 시간적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1998년 여름 감포 앞바다로부터 꼭 10년이 흘렀다. 올 여름 내가 한 일이라고는 DVD를 보는 것이 고작이었으니, 시사회에 참석하는 일도 뜸해진데다가 배급사에서 보내오는 스크리너를 돌려 보기에 급급한 탓이다. 돌이켜보면 10년 전의 나는 지금보다 훨씬 감수성 풍부하고 문화 호기심으로 충만했었다. 영화비평을 하기 위해 다양한 문화체험을 해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주장해온 것도 사실은 오래전 경험을 우려먹는 것에 불과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체 지난 10년간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10년간 변변한 여행을 하지 못했고, 영화보기를 제외하고는 지극히 건조한 삶을 살았다는 것이다. 그것을 증명해주는 것은 10년 전 쓴 글들이다. ‘정말 내가 쓴 글이 맞나?’할 정도로 번뜩이는 것들이 눈에 띔에도 어쩌면 다시는 쓰기 힘든 그런 표현들 말이다. 반면 지금의 글은 기름기 잔득 밴 허영 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을 따름이다. 이 모든 것이 영화를 쪼개고 붙이고 파헤쳐내려는 알량한 시도가 불러온 결과이고 한 가지에 몰두하느라 옆을 보지 못한 탓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결국 머지않아 에너지가 고갈될 것이고 재충전을 하지 않으면 영원히 회복하지 못할 위기의 순간이 도래할지도 모른다. 위험신호가 감지되었을 때 적절한 행동이 뒤따르지 않으면 그대로 주저앉고 말 터. 이제는 휴가를 떠나야할 때가 왔다는 느낌이다. 익숙한 것들에서 벗어나 새로운 세계로 눈을 돌릴 때가 되었다는 것이고, 다른 이의 추억이 쌓이고 먼저 다녀간 사람의 흔적을 고스란히 기억하는 덕지덕지 때 묻은 벽지 아래서 잠을 청해야 할 시기가 왔다는 말이다. 다시 감은사지 삼층석탑아래 서고 싶다. 정말 그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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