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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는 남자의 미래다'에 해당되는 글 1건

  1. 2009.05.15 홍상수의 ‘치맛자락’을 들추다: 홍상수가 ‘사랑’했던 여성들에 대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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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민영


드디어 <8명의 여인들>이 완성되었다. 나이와 직업, 그리고 생김새를 단정 지을 수 없을 정도로 활발하게 돌아다니던 이 여덟 명의 여인들은 매년 자체적인 숨바꼭질을 개최해왔다. 그녀들은 빨강머리 팜므 파탈로 나타나기도 했고, 또 어떤 때는 핏기 하나 없는 청순한 얼굴로 긴 생머리를 흩날리며 바닷가를 거닐기도 했다. 이제 그들은 아홉 번째 소리 없는 변주를 (아마도)고대하고 있는 중일 것이다. 숫자로는 여덟인데 그녀들이 나아가야 할 길은 여덟을 훌쩍 넘을 것이니, 침을 꿀꺽 삼키며 여인들의 탈피 아닌 탈피를 기다릴 수밖에는 없다. ‘어쨌거나’ 여덟이라는 숫자는 지금 이 순간 스쳐지나간 과거가 되었으니 말이다.
 
그녀들에게 순번을 매기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물론 이유는 뻔하다. 그녀들이 품고 있는 이야기는 언제나 같은 방향으로 뱃머리를 돌리고 있기 때문이다.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에 대해서 따지는 것은 그 다음의 문제였다. 조금 더 뒤로 나와 보자면, 그녀들의 주위를 배회하는 남성들로 하여금 치기어린 ‘일관성’이 작용했다고 판단할 수도 있다(다시 말해, ‘그럴만한’ 충분한 가능성이 존재한다는 이야기다). 그래서 그들은 공공장소에서 만나 일상을 나누고 일상에서 비롯된 연애를 읊는다. 여기서 생성되는 사랑과 집착의 모호한 울타리는, 정성스럽게 차려놓은 밥상을 언제고 거리에 나도는 토사물마냥 버릴 수도 있다는 전제하에 형성된다. 때문에 그들이 사방팔방으로 종잡을 수 없게 움직인다고 해도, 어느 지점으로 회귀할 것이라는 예측은 자연스레 생성된다. 하지만 그네들(여덟 명의 여인들을 포함한 다수의 남성들)의 속사정을 천편일률적인 것이라 단정 짓는 것은 터무니없게 앞선 일반화이다. 머릿속으로 엘레나와 수잔이라는 인물을 가정해보자. 두 여자는 친한 친구사이지만, 엘레나가 수잔의 값 비싼 화장품에 침을 뱉었는지 혹 수잔이 엘레나의 고양이로 공놀이를 했는지에 대해 누가 명확한 답변을 내릴 수 있을까? 두 친구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씨름을 하고 있는 것을 완벽한 전지적 시점에서 바라보지 않고서는 알아낼 재간이 없다. 홍상수는 바로 이 전지적 시점을 매우 촌스럽고 직설적으로 ‘여덟 명의 여인들’에게 실행해왔다. 이야기가 이쯤 되니 고개를 다른 곳으로 돌리기는 불가능해진다. 당신이라면 두터운 화장을 지우고 등장할지도 모르는 여주인공에 대한 호기심을 저버릴 수 있겠는가?

홍상수의 여인들은 일정한 구간을 반복 재생한다. 그녀들의 발걸음은 자의든 타의든 간에 결코 일상이라는 공간을 벗어나려 하지 않는다.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부터 시작해 <밤과 낮>까지 단 한 순간도 여성 혼자 존재하는 이야기는 없으며 또한 프레임 밖으로 나가려는 여인을 내버려두는 남성도 없다. 여성의 팔목을 잡으며 애원하거나 그녀를 자신의 카메라로 끌어오기를 바란다. 그 과정에서 두 남녀는 술을 마시고, 머리를 맞대고 울기도 하며 심지어는 죽음을 논하기도 한다. 홍상수의 남성들은 여성 앞에서 무너짐과 동시에 그 무너짐을 통해 이후 단계로의 발판을 마련하기도 한다. 그들에게 여성이라는 존재는 또 다른 내일을 기약하기 위한 수단으로 작용한다. 오늘을 벗어나기 위해서, 혹은 과거를 회상하기 위해서 여성이라는 존재는 결코 배제할 수 없는 ‘소품’의 역할을 한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영화 속 남성들에게 여성은 손에서 놓아버릴 수 없는 달콤한 중독으로 변화한다. 이미 한순간 ‘시각’과 ‘감성’의 노예가 되어버린 남성들은 그녀들의 치맛자락을 좇는다. 그들은 다소 빤한 이야기로 여성의 시선을 고정시키기를 원한다. 이것은 일종의 구애적 습관이다. 철저하게 무너지고 갱생을 갈구하고 지루한 현실을 이어나간다. 영화 속 남성들의 모습은 마치 시행착오를 반복 실행하는 뫼비우스의 띠와 같다. 그곳의 중심에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여성’이 서있다.


벗겨냄, 구원, 지속의 삼중주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이하 돼지)>은 위태롭게 서있는 연인들의 모습을 바탕으로 했다. 하지만 <돼지>는 남녀 간의 대립이나 갈등을 쌓는 이야기를 풀어내기보다 그들이 속한 사회가 얼마나 비루한 것인지에 대한 고발을 우선으로 쏟아냈다. <돼지>에서 단적으로 소개된 여행의 이미지는 홍상수의 두 번째 작품 <강원도의 힘>으로 확대된다. <돼지>와 <강원도>는 현실과 비현실이 이어질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돼지>가 공공연한 사실이라면 <강원도의 힘>은 영양가 없이 반복되는 꿈이다. 두 작품은 가시 돋친 표정을 무기삼아 현대라는 공간 속에서 한 올도 남기지 않고 바닥까지 해체된다. 그렇게 아슬아슬하게 생계를 유지하는 주인공들, 남성과 여성들은 기계적인 움직임에 몸을 맡긴다. 천 조각 하나 걸치지 않은 그들에게 남은 과제는 내일을 향해 나아가는 ‘길’을 찾는 것이다.

지루한 삶을 이어가던 그들이 번듯한 탈출구를 찾지 못했을 때, 여성들은 머뭇거리며 고개를 돌리고 남성들은 그런 그녀를 바라본다. 모든 치부가 완벽하게 드러날 지경이 될 무렵, 홍상수는 남녀 두 가지의 시선 중 하나를 택한다. 그것은 ‘남성’의 시선으로, 홍상수의 남성들은 자신의 등을 보듬어줄 상대방을 진정으로 갈망하기 시작한다. 따라서 자연스럽게 도태(혹은 방목)되어진 ‘여성’이라는 존재는 아름다운 조각품의 위치로 남성들의 주변에 남게 된다. 지칠 대로 지친 남성들에게 더 이상의 기회란 눈을 씻고 봐도 찾을 수 없는 것이 되어버린다. 그래서 그들은 가까스로 여성의 발목을 잡고, 안간힘을 쓰기 시작한다. 육체의 깊은 곳에서 ‘구원’을 바라는 그들의 눈망울은, 결국 ‘수정’이라는 여신을 탄생시키기에 이른다.

홍상수의 세 번째 작품 <오! 수정>이 빚어낸 여성은 영화의 전후를 포함해 가장 독특하고 매력적인 캐릭터로 설정되어 있다. 그녀(수정)은 앞서 말한 것처럼 남성들이 소유하고 싶은 욕망을 끓게 만들 만한 성격과 외모를 가진 ‘여신’이다. 수정은 외부의 상황과 상관없이 독단으로 존재하는 여성으로, 그녀는 남성을 파멸시키는 육감적인 팜므 파탈과는 거리가 있다. 수정이 가진 가장 큰 무기는 남성의 손이 닿지 않은 처녀라는 것이다. 물론 수정의 사연을 끌고 들어온다면 그녀는 ‘온전한’ 처녀가 아니지만, 수정을 가지고 싶어 하는 남성(재훈)의 입장에서 일반적 이론의 처녀성은 충분한 변명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수정(남성)은 흑과 백의 공간을 거닐며 재훈(여성)을 품는다. 그들이 해체 이후 다가오는 구원의 결합을 위해서 택할 수 있는 공간은 ‘어쩌면’이라는 망상에 흡수된 현실뿐이다.

재훈은 계속해서 그녀의 이름을 되새김질한다. 수정의 이름을 읊조리는 재훈의 목소리는 그녀를 품에 안기 전까지 조심스럽게 울려 퍼지지만, 재훈과 수정의 감정적 화합이 이루어질 무렵 재훈은 다른 여자의 이름을 부른다. 화를 내는 수정의 모습에 재훈은 어쩔 줄 몰라 하며 수정을 설득하고, 일시적으로 수정은 재훈의 곁을 떠난다. 그러나 수정은 재훈을 등지고 그를 밀쳐 내버리지 않는다. 그녀는 (심지어) 자신과의 섹스 도중 다른 이의 이름을 부른 남성-어쩌면 육적인 성취감만을 좇을지도 모르는-에게, 지금까지 허용되지 않았던 ‘두 번째’ 기회를 준다. 그리고 이 작은 용서를 통해 재훈은 허락과 구원을 동시에 가지게 되고 비로소 추락하지 않아도 되는 적절한 이야기를 꾸며낼 수 있게 된다.

수정이 허락한 남자들은 이제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가기 시작한다. 달라진 것은, 다수의 남성들이 수정을 공유했을 때 생기는 미묘한 감정이 새로 탄생했다는 것이다. 때문에 수정의 남성들은 지금까지 잊기 위해 안간힘을 써왔던 본연의 모습(<돼지>)을 하나 둘 드러내기 시작한다. 임시적으로 회칠되었던 남성들은 다시 비루한 거리로 돌아와 하얀색 백지 위에 골방철학을 쓰기 시작한다. 수정(여성)은 그 모습을 바라보며 전에 없던 매혹의 기술로 남성들을 거듭 안아 올릴 방법을 생각해내려 노력한다. 그녀는 본래 자신이 가지고 있던 성향을 바꿔, 질척한 현실의 굴레로 돌아가려는 남성들에게 ‘일상의 발견’을 촉구한다. 물론 쉽지는 않을 일이다.

홍상수의 네 번째 여인(<생활의 발견>)과 다섯 번째 여인(<여자는 남자의 미래다>)은 달콤한 상상에 사로잡혀 있던 남녀의 로맨스를 정면에서 돌파하는 전환점을 가져다준다. 수다를 늘리고, 희극적 상황을 가미한 <생활의 발견>에서 여성은 한 템포 물러나 상대방, 그러니까 남성의 반응을 살핀다. <생활의 발견>은 지금까지 홍상수의 여성들이 달려온 길을 최대한 흠집 내지 않으며 재조명한다. 외부의 자극을 받지 않고 자신의 사연에만 치중할 수 있게 변화한 남성의 앞모습을 찾아낸 여성은, 다시 여신의 모습으로 돌아가기 위한 준비를 한다.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에서 선화는 수정의 거울이다. 선화는 수정이 가지고 있던 남성 구원적 위치의 성향을 이어받는다. 하지만 그녀는 깨질 듯한 유리알 같은 존재였던 수정의 모습을 버리고 다른 방향으로 각성을 시작한다. 수정이 마음으로 남성을 안았다면 선화는 자신의 육체를 통해 그녀의 남자들을 받아들인다. 술자리를 통해 상상으로 빚어진 선화의 이미지를 실제로 마주한 두 남자는 첫째로 그녀에게 접근하고, 둘째로 그녀를 가지고 싶어 한다. 두 남성은 ‘삐걱거리는’ 의자에 걸터앉아 선화를 논하고 그녀에 대한 욕망을 불태우는 것으로 오늘과 내일을 이어나간다. 그들은 선화라는 여자와의 추억보다 기본적 욕구-자신들이 몸으로 느꼈던 섹스의 감각에 의존한다. 과거에서부터 선화를 떠올리는 현재까지 두 남자가 그리워하는 것은 ‘기억’이 아니라 ‘본능’이다. 그들에게 수정은 기억 속에서만 존재하는 대상으로 전락하게 된 지 오래다. 수정의 존재가 희미해짐과 동시에 홍상수의 남성은 과거에 받았던 최초의 해소법(여성의 구원)을 잊어버린다. 그리고 그들은 선화(수정)을 가졌거나, 가질 수 있다는 자신감에 찬 상태에서 그녀를 조종하기 시작한다. 이제 남성에게 선화는 더 이상 여신의 이미지가 아닌 창부의 모습으로 자리 잡게 된다.

선화는 스스로 ‘깨끗하고 싶다’는 말을 남성들에게 흘린다. 그녀는 이상을 직시하지 못하고 눈앞에 당장 닥친 허구를 좇는 남성의 모습을 묵묵히 지켜본다. 선화와의 섹스를 통해 더러움을 치유 받는 존재가 선화 자신이 아닌 두 남자(혹은 다수의 남자)라는 것을 그녀는 알고 있지만 표현하지 않는다. ‘수정’의 남자들에서 ‘선화’의 남자들로 추락을 감행해 남성이 가는 곳마다 그들과 동등한 위치에서 얼굴을 맞대기를 원하는 수정(혹은 선화)은 일시적 어머니의 자리를 대변한다. 하지만 가장 낮은 위치에서 자신을 버려가며 회개를 촉구하던 선화는 이윽고 자신의 방법이 잘못 되었다는 회의를 가진다. 그래서 그녀는 다시 한 번 ‘선화’의 캐릭터가 아닌 다른 여인으로 변태를 시도한다. 그것이, 남성과 여성의 흡수 관계에서 완벽하게 전환되는 여섯 번째 여인, <극장전>이다.


“자긴 어제 재미 봤죠? 이제 그만, 뚝!”

남성의 뒤에 서서 그들의 행동과 사고를 바라만 보던 선화는 지금까지의 동정 어린 시선을 내던진다. 그녀는 ‘영실’이라는 이름을 통해 ‘수정’의 모습으로 일정 부분 회귀를 시도한다. <극장전>은 영화 속 영화와, 영화 밖 영화가 정확하게 맞닿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이것은 곧 모방(영화)과 재창조(현실)의 시선으로 보여 지기도 하며, <극장전>의 인물들은 ‘영화’라는 상황을 통해 거리낌 없이 서로에게 다가갈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기도 한다. <극장전>은 지독한 현실의 끝에서 다시 꿈으로 돌아갈 것인지 혹은 늘 살아왔던 방식으로 삶을 이어갈 것인지의 갈림길에 존재하는 영화다.


<극장전>의 두 남녀는 자신들이 속한 모호한 공간에서 매번 선택을 강요받는다. 남자는 환상(영화)를 좇아 병든 닭처럼 꾸벅꾸벅 고개를 떨구며 여성의 주변을 배회한다. 그는 스스로 걸어온 시간들을 토대로 더욱 절실하게 여성의 관심을 끌기 위해 노력하지만, 상황은 겉잡을 수없이 곤두박질치고 남자의 껍데기만이 길거리에 나뒹군다. 남자는 틀에 박힌 습관을 통해 다시 처음(<돼지>)으로 돌아가기를 갈망한다(설령 그것이 남성의 ‘자의’가 아닐지라도, 그는 무의식적인 행동으로 과거를 지향하기 위해 발걸음을 내딛고 있음을 보여준다). 남성이 돌아가고 싶어 하는 세계는 어떠한 가능성도 존재하지 않는 사회적 해체의 중심에 있는 곳으로, 그가 다시금 ‘생존 본능’에 충실할 때, 여성과 남성의 균형이 깨지기 시작하게 될 것이다. 이 상황을 가정할 때 여성은 지금까지 남성을 위해 소비해왔던 구원의 시간을 모두 버리고 새로운 방법을 찾아야만 한다는 결말을 초래한다. 힘겹게 이어온 치유를 위한 노력이 물거품이 되는 것을 막기 위해, 영실(수정과 선화)는 마지막 충고를 내지른다. 영실은 더 이상 가냘픈 프시케(수정)나 본능에 치중한 아름다움의 상징인 아프로디테(선화)의 탈을 쓰지 않는다. 영실은 조용히 색안경을 벗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남성에게 내비쳐 그의 각성을 요구한다. 그녀는 엉거주춤 서있는 남자에게 단 한 마디 말을 흩뿌린 채 미련 없이 자리를 뜬다.

영실이 떠나고 난 후 선택의 문제는 전적으로 남성에게 위임된다. 어깨 너머에서 남성이 올바른 선택을 할 것인지를 걱정하는 영실의 모습은 설명되지 않는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남성은 자신을 돌보아준 여성에게 처음으로 온전한 보답을 실행한다. 그는 여성이 던진 조언을 받아들인 순간, 그녀의 뒷모습에서 자신을 스쳐간 수정과 선화의 시간들을 읽는다. 그리고 아주 오래전의 기억인 수정을 떠올리게 된다. 즉, 수정(여성)의 세 번째 변신으로 인해 남성은 과거로 돌아가는 것을 포기하게 되는 셈이다. 남성이 선택한 여성의 모습은 그가 그토록 열광하던 꾸밈의 모습이 아닌, 있는 그대로의 여인이었고, 이 평범한 여인은 최소 본능에 의존하는 남성을 마지막으로 보듬어 안는다.


스릴 넘치는 일상으로 돌아오다


여성은 세 번의 변신을 통해 남성과 같은 공간에 자리 잡게 된다. 남성은 여성이 내미는 구원의 손길을 통해 갈등과 오해를 주기적으로 풀어내며 일상으로 돌아온다. 영화 속 남성들은 독자적으로는 일어설 수 없는 나약한 존재로 묘사되며, 그로 인해 여성이 자신의 이상적인 세계에서 미래지향적 신화를 창조해나가기를 바란다. 이에 따라 여성은 남성의 상위에 ‘군림’하게 되며, 남성보다 조금 더 높은 곳에서 그들을 바라볼 수 있는 위치를 가지게 된다. 갱생의 입장에서 비교적 자유롭게 벗어날 수 있게 된 두 남녀는 이제 형이상학적인 사건이 아닌 자신들의 눈앞에서 일어나는 매우 시시콜콜한 이야기, ‘연애담’에 집중하게 된다.

홍상수가 가장 ‘최근에’ 정을 주기 시작한 두 여인(<해변의 여인>과 <밤과 낮>)은 앞서 지나친 여성과 남성의 관계에 대한 명쾌한 확답을 그럴싸하게 피해가기 시작한다. 제 3의 수정이 마지막으로 바로잡게 된 남성의 모습은 <극장전> 이후 조금씩 혈색을 띄기 시작한다( 물론 그가 여성의 노력에 의해 변화했다고 해서, 태초부터 이어져온 ‘본능’을 전적으로 지양하고 억누르게 되었다고는 말할 수 없다). 여성은 남성의 행동에 대해 최대한 묵인하며 어깨에 올려놓았던 짐을 내려놓는다. 이 과정에서 그녀는 연극적인 인물인 ‘문숙(<해변의 여인>)’으로 창조되어 관객을 향한 독백을 여성으로서는 처음으로 실행하기도 한다.

<해변의 여인>에서는 처음으로 ‘여성’에 대해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비현실적 기류가 생성된다. 문숙은 지금까지 방관자와 치유자의 입장에 서있던 여성의 모습과 매우 다른 성격을 가지고 있다. 그녀는 뒤로 물러나지도 앞으로 나아가지도 않은 채 자신의 발목에 못을 박고 고정된 장소에서 남성의 이름을 부른다. 홍상수의 영화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개(혹은 강아지)’는 <해변의 여인>에서 문숙이라는 독특한 캐릭터를 통해, 다른 어떤 곳에서보다도 체계적으로 설명되어진다. 바닷가에 아무렇지 않게 개를 버리고 가는 커플을 바라보는 문숙은 급기야 자신을 그 강아지에 대입하기 시작한다. 다시 말하면, 그녀는 적극적으로 자신이 놓인 연애사에 참관하기 시작한다. 문숙이 사랑했던 하룻밤의 남자에 집착하고 남자가 해변에서 만난, 그의 또 다른 애인에게 질투와 화해의 손짓을 동시에 취한다. 때때로 그녀는 자신이 소유하지 못할 것이라는 불안감에 사로잡힌 나머지 맛있는 음식, 혹은 그 음식을 만드는 행위에 의미를 부여한다. <해변의 여인>은 맵고 짠 조미료를 마음껏 들이부어 독특하지만 거부하고 싶은 재미가 살아있는 영화다. 그리고 <해변의 여인>의 문숙은 지금까지 우리가 익숙해져 왔던 홍상수의 영화를 최절정으로 솟구칠 수 있게 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는 여성으로 읽혀진다. 문숙은 수정 이후 남성을 통해 억압되어왔던 여인을 처음으로 거리낌 없이 풀어주는 역할을 한다. 그녀의 대담한 행동은 하여금 지금까지 홍상수의 영화에서 존재했던 여성의 이미지가 절대적인 포용을 이루고 있다는 것을 전면으로 부인한다. <극장전>까지 절대적인 모성의 사고를 이어오던 홍상수의 여성형은 <해변의 여인>의 문숙으로 인해 ‘여신’이 아닌 ‘인간’으로 돌아오게 된다.

인간으로 돌아온 문숙의 사설이 수정보다 늘고, 문숙의 치졸함은 예를 찾을 수 없는 것이었지만 문숙은 <돼지>부터 <해변의 여인>까지 이어져온 여성의 위치를 잊지 않는다. 그녀는 여섯 번의 산을 넘으며 힘들었던 심정을 풀밭을 쳐내며 노래하며 하소연을 하고 싶은 마음이외에는 욕심을 부리지 않는다. 상대방의 습관적인 외도를 바로 세우기 위하여(설령 그것이 옳은 행동이었다고 해도) 문숙은 남성을 손바닥에 올려놓고 마음껏 조롱을 가한다.

먼 길을 돌아서 걸어온 지루한 긴장감을 뒤로 하고, 남성과 여성은 현실 내에서 완벽하게 동등한 입장을 취할 수 있게 된다. 그래서 그들은 또 한 번의 반복적인 여행(<밤과 낮>)을 통해 서로가 가지고 있는 치부를 적절히 드러낸다. 외지로의 여행을 통해 문숙은 낮과 밤의 여인으로 이분되고, 이 ‘두 가지 계절’의 여인은 보다 적극적으로 남성의 반응에 임한다는 것이다. 날개를 버리고 구정물이 흐르는 인간 세상을 견학했던 문숙의 눈을 통해, 그녀들은 자신이 가지고 싶은 것 혹은 버리고 싶은 것들을 마음껏 표출한다.

 

<밤과 낮>을 마지막으로 홍상수의 여인들은 억압의 이미지를 벗어낸다. 수정과 선화, 그리고 영실의 시행착오를 거치며 그녀들은 남성의 행동양식을 읽어낼 수 있는 천리안을 가지게 되었다. 누군가를 보듬어 줄 필요도, 또한 남성의 적극적인 구애에 일일이 응답할 필요도 없어진 이 ‘해방’의 여성들은 본래 살던 스릴 넘치는 일상으로 돌아온다. 물론 전지적 시점에서 내려다보았던 그녀들의 일상은 전과 다를 것 없이 고약한 악취가 진동하는 공간이다. 그곳에서 남성은 여전히 남루한 옷차림으로 소주병을 기울이고 있다. 여성은 사회가 요구했던 본분을 버리고 미소를 띠며 남성의 소주병을 받아든다. 변화한 여성을 마주한 남성은 자신의 앞에 놓인 이성을 과거와 현재를 지나온 새로운 본능으로 생각할 뿐이다. 하지만 여성의 입장에서 자신을 바라보며 순진한 웃음을 짓는 남성은 ‘지는 게임’을 수긍할 수 있는 파트너로 작용한다. 그녀는 더 이상 순응과 방관의 입장을 취하지 않는다. 이미 자신에게 매혹된 상대방을 통해 놀이를 할 준비가 되어있기 때문이다. 평강공주의 탈을 과감히 벗어던진 홍상수의 여성은 여유 있는 발걸음으로 마라톤을 준비한다. 그녀가 느긋해질 수 있는 까닭은, 과거의 굴레를 탈피할 수 있는 전환점을 여러 번 돌아왔기 때문이다. 진짜 재미는 이제부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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