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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흥기


6박 7일의 피곤한 첫 프레스 일정을 마치고 돌아오면서, 영화제 마감 보고를 해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어찌된 영문인지 첫 단어를 쓰기까지 매우 고통스러운 시간이 흘렀고, 욕심만 앞 선 까닭에 썼다 지우기를 여러 차례 반복했다. 글은 좀처럼 중심을 잡지 못하고 의미 없는 수사로만 가득 차버리기 일쑤였고, 그 와중에 편집장님의 마감 시한 선고까지 더해지면서 매우 괴로워지기 시작했다. 글쓰기를 중단하고 무엇이 문제인가에 대하여 생각하고 특단의 조치를 취해야만 했다. 생각 끝에 내린 결론은, 첫 프레스 일정을 근사한 언어로 정리하고 싶은 초짜의 욕심이 4일이란 시간을 허망하게 허비해 버린 것이었다. 본디 못난 글 솜씨를 지니고 있으면서, 하루아침에 명문을 써지기를 기대한 나의 어리석은 행동이 자초한 자충수라고 볼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남루한 문장력을 지니고 있지만 솔직담백한 글로나마 보는 이를 충분히 만족시킬 수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에 도달하게 되었다. 내가 이 글을 쓰려 했던 본래의 목적을 상기해 보니, 일은 아주 수월해졌다. 나는 관객으로서 그리고 프레스 입장으로서 영화제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가에 대하여 사적인 고백을 하고자 한다. 그러니까 나에게 영화제는 어떤 의미이며, 당신들에게 영화제가 어떤 의미인지를 되묻고, 이 화두를 통하여 일종의 선문답을 시도해보고자 한다. 그럼 먼저 고백하겠다. 나에게 영화제란 무엇인가?


영화제는 영화를 보는 곳인가? 영화에 관련된 사람을 만나는 곳인가?

영화제를 찾아다닌 지 그리 오래되진 않았지만, 4~5년 전부터 꾸준히 영화제를 돌아다니는 관객의 일원으로서 원래 나에게 영화제란, 다양한 영화를 선택해 만나 볼 수 있는 일종의 접견 장소였다. 그러니까 영화와 관련된 게스트들을 만나는 일은 부차적 차원의 일이었을 뿐, 본래의 목적과는 별개의 문제였다. 그간의 기간 동안 내게 영화제는 푸짐한 만찬의 다양한 메뉴를 전시한 뷔페와 같은 곳이었다. 평소 볼 수 없는 다양한 영화들과 아직 아무도 접해보지 못한 새로운 작품을 가장 먼저 본다는 그 짜릿함이 나를 설레게 만들었다. 때문인지 그 때는 하루에 3~5편씩을 닥치는 대로 해치웠다. 밥보다 영화를 보는 편이 좋았으니까, 영화가 뭔지도 모르고 좋았던 시절이니까. 뜻도 의미도 모르면서 그저 새로운 장면과 새로운 형식이 나오면 두 눈이 휘둥그레져 새로운 경험에 짜릿한 오르가즘을 느끼곤 하였다. 이해보다는 감상이 내 중추신경계를 장악했던 시절이었다. 그래서 그 당시에는 누군가를 만날 시간도 좀처럼 없었다. 누군가를 만나기보다는 빨리 저 어두운 세계에서 펼쳐지는 또 다른 이야기들을 기대했기 때문에. 영화와 관련된 이야기보다는 영화 안에서 펼쳐지고 있는 문법이 너무나 매혹적이었다. 그렇게 나는 영화제에서 영화에 중독된 채로 시간을 흘려보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내게도 좁지만 인맥이란 것이 생기기 시작했다. 점차 영화제에서 만나는 사람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내가 저명한 평론가 혹은 유명 감독처럼 매일 미팅 스케줄이 꽉꽉 들어차 있었다는 것은 아니다. 그저 영화제 기간 중에서 하루 정도는 지인들과 술잔을 기울이며, 영화제와 그간의 세상사는 이야기에 대하여 담소를 나누는 그런 수준이다. 하지만 올해 처음으로 프레스로 영화제를 경험하였다. 새로운 경험도 많았지만, 무엇보다 영화제에서 부딪히는 많은 사람들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만큼 영화를 보는 시간은 당연히 줄어들었다. 그리고 이런 의문이 생겼다. 영화제는 과연 영화를 보기 위한 곳인가. 아니면, 영화를 통해 영화에 관련된 사람들을 만나기 위한 곳인가.

사진출처: 전주국제영화제 공식 홈페이지


과연 영화제는 영화를 보기에 적당한 장소인가?


하루에 세 네 편의 영화를 보는 일이 과연 영화를 진짜 사랑한다는 증거가 될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오래전부터 생각해왔던 문제였다. 영화를 진짜로 좋아한다면, 오히려 하루에 세 네 편의 영화를 보는 일은 각기 영화에 대한 모독이라고 생각한다. 영화제에 초청된 영화들이 그렇게 간단하게 잊혀질 평작들은 아니기 때문이다. 비단 세계 3대 영화제(칸느-베를린-베니스)뿐만 아니라, 세계 유수의 영화제들로부터 초청되는 국내 영화들을 한 번 살펴보라. 이미 국내에서 한 차례 검증 받은 탄탄한 작품들이거나, 혹은 프로그래머의 고심 끝에 고른 역작일 것이다. 국내 영화제라고 그 고민이 크게 달라질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일단 영화제에 초청되어진 영화에 대해서 어느 정도 퀄리티를 믿고 따른다. 따라서 그 영화들이 앞서 얘기했다시피 그렇게 간단하게 기억에서 잊힐 영화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우리가 영화제에서 연속으로 세 편 이상의 영화를 볼 때, 그 영화들이 가져다 준 그 강렬한 감정들은 분명 다음 영화의 기억 속 뒤안길로 사라지는 일이 발생한다. 영화를 온전히 감상하기에는 분명 하루는 그렇게 긴 시간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여기서 감상이라 함은 영화를 눈으로 보는 시간뿐만 아니라, 자신이 영화를 보고 느낀 감정을 완벽에 이르기까지 정리하는 내면화의 시간을 포함하는 것이다. 그래서 영화제에서 영화를 보는 일은 때론 그냥 정말 단순한 관람으로만 그치는 경우도 적지 않게 존재한다. 그렇다고 영화제까지 와서 하루에 한 편의 영화를 관람한다는 것은 또 너무 아쉬운 일이다. 영화를 보는 행위에 있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참으로 아이러니한 곳이 또한 영화제이다.


그렇다면,
영화제는 영화를 통해 영화와 관련된 사람들을 만나기 위한 곳인가?


어쨌든 영화제는 영화에 관계된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장소이다. 영화 하나로 이토록 다양한 사람들이 모일 수 있겠구나 생각이 든 것은 이번 취재 활동 덕분이다. 첫 프레스 활동에 욕심만 앞서 각기 다양한 측면에서 영화제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가를 알아보고자 한 적이 있었다. 비록 그 결과는 수월하게 이루지 못하였지만, 내가 이 취재를 통하여 알게 된 사실은 매우 다양한 사람들이 전주국제영화제라는 이름 안에 하나로 모여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이다. 우선 영화를 만들고 이를 영화제 측에 출품한 감독 및 출연진들과 프로그래머의 선정에 따라 초빙된 영화와 관련된 게스트들이 이 축제를 더욱 화려하게 밝혀주면, 이에 애정 어린 시선으로 환호해주며 열광하는 열정적인 관객들이 있다. 또한 이 둘 사이의 만남을 뒤에서 도와 줄 봉사자들과 영화제 스태프들의 노고가 곳곳에서 서려있으며, 이러한 뜨거운 만남을 좀 더 많은 대중들에게 홍보할 사명을 지닌 언론도 존재한다. 대체로 영화제를 움직이는 주체는 이러한 4개 집단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영화제 프레스 카드를 부여받고, 또 ‘네오이마주 스태프’라는 직함을 부여받고 처음 참여하게 된 영화제에서 무엇보다도 이전과 판이하게 달라진 경험은 기존의 영화제 측에서 부여한 만남의 기회를 뛰어넘어 자발적으로 각기의 주체들과 원활하게 소통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처음에 내가 관객의 입장으로 영화제를 참가했을 때는 영화제 측이 준비한 행사를 통해서만 게스트를 만날 수 있었다. 그리고 같이 영화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상대자라고 해봐야 그 좁디좁은 인간관계 안에서 뿐이었다. 하지만, 이 새로운 일정은 사뭇 흥미로웠다. 영화제 첫 날부터, 나는 이번 영화제 두 개 부문의 수상에 빛나는 <반두비>의 신동일 감독과 기타 스태프 분들과 술잔을 기울이는 기회를 가졌다. 당시 호기 어린 목소리의 현장 스태프들이 보여준 이번 영화에 대한 자신감은 두 개 부문의 수상을 능히 짐작하고 남을 정도로 당당했다. 내가 이 긴 글을 쓰면서 고작 영화제에서 현장 스태프 분들과 술을 먹은 자랑을 하려는 의사는 아니다. 중요한 것은 영화 저널과 현장이 제대로 소통할 기회가 대체로 이런 곳 밖에 없다는 것이다. 삼사오오 취기를 달래러 자리를 파하고 떠나는 분위기 속에서 현장 스태프들과 기자들 간의 이야기는 깊어져 갔다. 여기서 그것을 모두 밝힐 수 없지만, 초짜인 나에게는 정말 뼈와 살이 되는 중요한 얘기도 상당수 오고갔다. 중요한 것은 이것이다. 영화 산업의 종사자 사이의 간극을 밀착시켜 줄 수 있는 것이 바로 이런 영화제이다. 저널과 저널 사이의 유대도 보통과 다르게 영화제에서는 더욱 강해진다. 또한 관객과 저널은 그 어느 때보다도 밀착되어 같은 극장에서 동시에 숨 쉬어 그 온기를 그대로 전달한다. 비단 이것은 저널의 입장에서 뿐만 아니라, 영화감독과 관객과의 관계 역시 마찬가지이고, 영화제 스태프들은 말 할 것도 없을 것이다. 생각해보면, 우리는 같은 산업에 연을 맺고 있으면서도 상당히 접점을 가지기 힘든 집단들이다. 따지고 보면, 현장과 비평 간의 괴리는 상당히 멀고도 멀다. 하지만 영화제라는 이름으로 이들이 하나로 묶이는 기회가 생긴다는 것은 꽤나 의미 있는 일이다. 비평과 현장이 완전한 이해를 전제로 함께 일 할 순 없지만, 적어도 이런 자리를 통하여 서로를 알아보려는 노력은 필요할 것이다.



영화제를 즐기는 방법

이것이 단지 프레스 카드의 권능은 아니다. 영화제를 찾는 누구나가 이룰 수 있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다만 그 방법을 이제야 터득했을 뿐이다.

먼저, 영화제에 와서 너무 많은 영화를 보지 말라고 권하고 싶다. 영화는 하루에 한 두 편이면 충분하다. 그것을 가슴에 새기기에도 벅차다. 그리고 되도록 많은 사람들과 얘기를 나누기를 추천한다. 그 사람이 일면식 없는 낮선 관객이더라도 상관없다. 그 역시도 누군가가 말을 걸어주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을지도 모른다. 나 역시도 그러했다. 설령 그들이 다른 목적을 지니고 있는 이들이라도 영화제가 그대들을 하나로 묶어 줄 것이다. 영화에 대하여 이야기하자. 그것이 영화를 만든 감독이라면 더할 나위 없이 좋다. 영화제에서 감독을 만날 기회는 의외로 많다. 영화제를 직접 찾을 정도의 열정이라면,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걸어올 낮선 이를 외면할 이유가 없다. 영화제는 영화를 전시하는 의미도 가지고 있지만 이를 즐기는 축제의 역할도 가지고 있다. 즐기기 위해서는 많은 사람과 그것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함께 하려는 자세가 필요하다. 영화는 숙제가 아니다. 많이 본다고 누군가가 당신을 칭찬해주지 않을 것이다. 영화를 보고 그 영화를 본 또 다른 누군가와 그것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영화제를 즐기는 진짜 방법이 될 것이다.

끝으로 딱 한 가지만을 더 전하자면, 이 모든 경험을 글로서 정리하자. 표현되지 않는 즐거움은 즐거움이라고 말 할 수 없다. 이를 언어로 내뱉으면 당시에 이 즐거움을 향유하게 되지만, 글로서 남기면 이 즐거움은 향기로 흡착되어 오래도록 남게 된다. 이상하게도 어렵게 시작된 글이었지만, 그 끝은 상당히 홀가분하다. 이것으로써 전주국제영화제에 대한 초짜 영화애호가의 어떤 단상을 마친다. 그렇다면, 이제는 당신 차례이다. 당신에게 영화제는 어떤 의미인지를 한 번 생각해보자. 조만간 새로운 영화제가 다가오기 전에 꼭 답을 얻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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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건영


부산국제영화제의 규모가 날로 커지고 있다. 출품된 작품의 숫자를 비롯한 규모에서 매년 역대 최다기록을 갱신해왔으며, 세계최초 상영인 월드프리미어와 자국 외 최초상영인 인터내셔널프리미어 역시 해마다 증가하고 있다. 이에 뒤질세라 매체들마다 앞 다투어 이 같은 수치를 보도해온 바 있지만 과연 양적증가가 그렇게 중요한 일인지 자문해볼 일이다. 그러니까 부산영화제가 감당할 만한 규모를 넘어선 게 아니냐는 것이다. 양적인 팽창이 질적 성장으로 고스란히 이어지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그 징후는 여러 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예컨대 해외 초청 게스트의 면면만 봐도 예년에 비해 격이 떨어지고 있음이 발견된다. 물론 주관적 기준에 의한 것이고 사적 호불호가 갈릴 만한 일이긴 하다. 하지만 일일이 열거하지 않더라도 분명 올해의 게스트는 작년과 비교해 빈약하기 짝이 없다. 문제는 게스트의 면면이 상영작의 품질과도 맞물린다는 점에 있다. (국내 팬의 절대적 지지를 모르는 바 아니고 작품자체는 나 또한 무척 좋아하지만, 왕가위의 <동사서독: 리덕스>까지 부산영화제에서 상영했어야 하는 것일까?)

칸을 비롯한 유럽의 영화제들이 필름마켓 운영과 경쟁부문 성과에 기대어 역사를 만들어온 것과는 달리 부산영화제는 이 땅의 씨네필의 열정을 자양분삼아 발전해왔다. 그러니까 영화를 보러 전국에서 달려온 영화애호가의 열정과 발걸음이 오늘의 부산영화제를 일궈냈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한 편의 영화를 보기 위해 벌여야 하는 사투는 여전하다. 삽시간에 매진되는 개, 폐막작은 물론이고 일반상영작의 경우도 표구하기가 하늘의 별따기다. 출품작은 기하급수로 늘어나는데 반해 상영관과 행사 기간은 그대로인 까닭이다.

새벽부터 줄지은 매표 행렬과 찜질방에서 기숙하는 씨네필의 모습은 부산영화제만의 자랑거리로 여겨져 왔으니, 부산행을 결심한 영화애호가들마다 이 정도의 고생쯤은 당연한 것으로 여긴지 오래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많아야 3회 상영에 그치는 개별 작품들 중 대부분은 고작 몇 백 명의 관객과 만난 후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지기 마련이다. 이런 환경에서 영화를 둘러싼 담론의 생성은 고사하고 적절한 평가를 받는 것조차 요원한 일일 터이다. ‘부흥.발견.비평’이라는 부산영화제의 모토가 무색해지는 순간이다.

비록 출품작 숫자가 적더라도 상영회차를 늘려 관객과 만날 기회를 보다 많이 제공하는 문제에 대하여 진지하게 고민할 때가 되었다. 부산영상센터 ‘두레라움’의 기공은 비록 늦은 감이 있으나 부산국제영화제의 안정적 행사 공간 확보와 작품상영의 효율성을 높인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크다. 완공되는 2011년이 되면 사정이 나아지려나? 남포동에서 낯설게 첫발을 내딛던 제 1회 부산국제영화제의 기록과 기억 속으로, 소담했지만 화합과 흥분의 도가니 속에서 ‘영화가 주인 되었던’ 그 시절로 돌아가 새롭게 생각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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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영화제에 관한 사적 기록

필진 칼럼 2008.10.06 15:06 Posted by woodyh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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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건영


공항리무진 버스가 해운대에 도착한 것은 토요일 오전 9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었다. 영화제마다 그랬듯이 아이디카드 수령과 표를 예매하는 것이 먼저 해야 할 일이었다. 꼭 1년 만에 다시 찾은 해운대 파빌리온은 하나도 변한 게 없었다. 예상했던 대로 대부분의 화제작은 매진이었다. 이런 와중에 <사랑의 4중주>와 <잃어버린 노래>를 발권할 수 있었던 것은 그나마 행운이었다. (그럼에도 팡호청의 <경박한 일상>과 양익준의 <똥파리>를 못 본 것은 못내 아쉽다.) 시간이 남아 한참을 서성이는 동안 발견한 사실은, 예년에 비해 해운대 거리를 활보하는 매체기자 수가 현저하게 줄었다는 것이다. 작년만 해도 도로와 모래사장에서 마주치는 사람들의 다수는 프레스카드를 목에 건 기자들이었다. 그러나 한국영화 불황 탓일까, 아니면 최진실의 죽음 여파 때문일까. 드문드문 눈에 띠는 기자들의 표정은 무거웠고, 그들에게서 전날 밤의 치열한 술자리를 떠올릴 만한 피로감은 발견되지 않았다. 무슨 까닭인지 몰라도 부산국제영화제에서만 느낄 수 있는 달뜬 분위기와는 거리가 먼 느낌이었으니, 개인적으로도 예년 같은 설렘은 없었다. 어느 해 보다 체류 일정이 짧았음에도 영화보기에 집중할 수 있었던 것은 이 때문일 것이다. 짬짬이 틈을 내어 기자와 평론가들, 영화인까지 적지 않은 사람을 만났으나 작년처럼 거창한 술자리는 없었다. 이유인즉 상대방들이 금요일 밤부터 ‘신나게 달린’터라 토요일마저 통음으로 지샐 수는 없는 노릇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깔끔하게 단장된 해운대시장의 곰장어집에서 별로 시원하지도 않은 C1소주를 연신 들이켰다. 내년 부산을 기약하면서. 다음은 이번 영화제에서 본 두 편의 영화에 대한 즉흥 리뷰이다.


[사랑의 4중주](Four Ages Of Love, 2008/러시아)


세르게이 모크리츠키 감독의 <사랑의 4중주>는 제목처럼 말랑말랑한 멜로드라마가 아니다. 오히려 사랑에 관하여 새로운 표현방법 혹은 영화언어를 모색하는 꽤나 묵직한 영화라고 해야 맞을 것이다. 4계절로 나뉜 에피소드로 펼쳐지는 이 영화에서 감독은 사랑이라는 보편적이고 통속적인 규정 자체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려는 것처럼 보인다. 충동적이고 우발적인 10대들의 이야기로 시작한 영화는, 노년의 인물들이 보여주는 이기적이지만 속 정 깊은 이야기를 거쳐, 고독에 지치고 사랑에 목마른 두 여인의 묘한 연대감을 통과한 후 마지막 에피소드에 이르는 동안 '사랑'이 아름답고 순결한 그 이름만으로 빛나는 단어가 아닐 수 도 있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사계절에 맞춰 그려진 에피소드마다 각 계절에 부합하는 멋진 장면들이 하나씩 들어있다는 점은 다소 지루할 수 있는 영화에 활력소가 된다. 이를테면, 처음만난 남자 아이를 위해 방아쇠를 당기는 시퀀스와 장례식을 마치고 돌아가는 버스 안에서 고개를 맞댄 노년부부의 모습, 묘령의 여인을 쫓아가는 빨간 하이힐의 긴박감이 그것이다. 특히 마지막 에피소드가 보여주는 풍경들은 인물들의 내적 상태와 궤를 맞춰 영화의 품질을 격상시키는 데 공헌하고 있으니, 대문 형상의 기둥 아래 앉은 두 수사의 모습을 당겼다 놓기를 반복하는 트래킹 쇼트는 러시아 영화가 이뤄낸 미적 성취와 닮으려는 촬영감독 출신의 모크리츠키의 욕망을 드러낸 명장면이라 하겠다. 한편 <사랑의 4중주>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각각의 에피소드를 넘나들며 등장하고 있는데, 이는 마치 키에슬롭스키의 삼색 시리즈 속 인물들의 재등장과도 유사하다. 요컨대 <사랑의 4중주>는 러시아 영화 특유의 묵직함과 음울한 정조가 여전히 유효하다는 것을 확인시켜준 영화가 아닌가 싶다.


[잃어버린 노래](Lost Song, 2008/캐나다)


로드리크 장 감독의 <잃어버린 노래>를 보고 난 후, 밖으로 나와 한참 동안 쉼 호흡을 해야 했다. 그만큼 영화는 극한의 지점까지 밀어붙이면서 관객을 힘들게 만들었다. 최소한 관객의 절반은 심적 압박과 지루함을 견디지 못해하는 듯 보였다. 그것은 미카엘 하네케의 영화들, 혹은 다르덴 형제의 영화를 보았을 때의 강렬한 인상에 비견될 정도였다. 그러니 영화 속에서 현실로 돌아오기 위해 들숨날숨을 연신 반복하는 것 말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었을까? 영화는 엄마이자 아내인 여성의 역할이라고 당연시 여겨왔던 것들에 대한 의문에서 출발한다. 모성애와 육아의 어려움 사이에서 고립된 엘리자베스가 극단적 선택을 하기까지 감독은, 시종일관 아슬아슬한 시각을 견지하면서 산후 우울증에 대한 치밀한 심리묘사를 보여주고 있다. 사실 나는 영화가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부터 저 아이에게 언제 변고가 생길까? 라는 걱정을 해야 했다. 갓난아이와 부모를 둘러싼 숲 속 세상은 더 없이 푸르렀으되, 카메라는 쉼 없이 흔들렸고 엘리자베스의 마음은 카메라의 속도보다 더 빠르게 요동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비극적으로 끝난 한 여인과 아이의 삶을 통해 감독은, 불변하는 가치관이 사라진 이 세계를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엄마는 마땅히 그래야 한다는, 그럴 것이라는 믿음이 송두리째 흔들리는 느낌. 그래서 인지 카메라는 상당 수 컷을 엘리자베스의 뒷모습에 할애하고 있다. 극장에 있던 50~60대 한국주부들은 엘리자베스의 내적변화를 어떻게 보았을까. 천만 다행인 것은 이것이 영화! 라는 점이다. 여성들 사이에서도 격론이 벌어질 만큼의 문제적 영화를 만든 감독 로드리크 장은 현재 새 영화의 후반작업 중이라고 한다. 그의 새로운 영화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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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민영(편집스탭)







해마다 '꽃피는 봄이 오면' 전주는 성장통을 겪는다. 하지만 아픔이 가득 배인 성장통의 본 의미는 전주에서만큼은 예외다. 목소리를 지속적으로 높여가며 전주국제영화제는 확고한 기반을 다졌다. 한국의 수많은 영화제 중 전주국제영화제의 의미는 영화 매니아들에게 단 비와도 같은 존재다. 주목받는 신작들의 뜨겁고 터질듯한 경쟁을 기반으로 하는 큰 규모의 영화제들과는 달리, 전주영화제는 자신의 자리를 확고하게 지키며 지지층을 넓혀갔다. 아담하지만 쾌적하게 뻗은 영화의 거리를 사이로 극장들이 즐비한 전주의 시내로 화사한 옷을 갖춰입은 씨네필들은 잠간동안 목을 축인다. 이제 두 자리의 숫자를 향해 달려가기 바로 직전인 아홉돌을 맞은 전주국제영화제는 오는 5월 1일부터 9일까지의 9일간의 감칠맛 나는 만찬을 준비중이다.

제 9회 전주국제영화제 상영작 발표 기자회견이 지난 4월 1일 오후 5시, 서울 명동의 세종호텔 에서 열렸다. 송하진 조직위원장, 민병록 집행위원장, 강성률 비평위원, 그리고 전주의 기둥인 정수완과 유운성 프로그래머가 참석한 가운데 기자회견은 활기를 더해갔다. '자유, 독립, 소통'이라는 슬로건을 토대로 송하진 조직위원장의 간단한 인사말을 시작으로 깊게 숨어있던 전주국제영화제의 알맹이가 속속들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올해 전주국제영화제는 작년보다 169편이 더해진 1204편을 상영작으로 추렸으며, 이것은 지금까지의 전주국제영화제 중 가장 많은 작품수를 기록하기도 한다. 전주국제영화제가 계속해서 고수하는 '인간의 삶'이라는 주제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한도 내에 상영작이 대폭 증가했으며, 이 중 다큐멘터리의 비중이 상당히 증가했다. 유운성 프로그래머는 '전주국제영화제가 지속적으로 발전하고 있기 때문에, 그에 걸맞는 방향을 꾀했다'라고 말하며 역대 최다 작품수를 선보이는 이유를 들었다. 이에 따라 '인디비전'이라는 이름을 걸고 운영되던 국제경쟁섹션의 공식 명칭이 '국제경쟁'부문으로 변경되었다. 또한 이번 전주국제영화제는 국제적인 위상으로 거듭나는 모습을 굳히기 위해 'Daum 심사위원 특별상'을 신설했으며, 작년부터 신설된 '비평가 주간'의 'KT&G 상상마당상'과 아시아 영화들을 대상으로 하는 '넷팩상'에 지속적인 지원을 할 것을 밝혔다.

개막작 <입맞춤>전주의 얼굴을 빛낼 개,폐막작에는 일본에서 건너온 만다 쿠니토시 감독의 <입맞춤>과 국가인권위원회가 제작한 국내 옴니버스 영화 <시선 1318>이 각각 선정되었다. <입맞춤>의 만다 쿠니토시 감독은 2001년 <언 러브드>로 칸 영화제를 통해 주목받기 시작했으며, 2004년 <터널>로 칸 영화제 감독주간에 정식 초청되어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는 감독이다. 전주국제영화제는 일상을 토대로 잔잔하지만 치명적인 변화의 아름다움을 선사해왔던 쿠니토시의 발견에 새로운 시선을 던진다. 폐막작으로 선정된 <시선 1318>은 국내 다섯 감독의 인권영화 프로젝트로 청소년들이 바라보는 사회의 모습, 그리고 그들이 행하는 '투쟁'에 초점을 맞추었다. 오랜만에 스크린을 통해 이야기를 던지는 이현승 감독(<릴레이>), 배우로 데뷔해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는 방은진 감독(<진주는 공부중>), 2006년 <삼거리 극장>으로 영화 매니아들을 열광케 했던 전계수 감독(<유 앤 미>), 그리고 최근 가장 주목받는 독립영화계의 재치꾼 윤성호 감독(<청소년 드리마의 이해와 실제>)과 스타 감독으로 자리를 굳혀가는 김태용 감독(<달리는 차은>)등 서로 다른 시선으로 채워줄 따듯하고 직설적인 대화법으로 이번 전주국제영화제의 말미를 장식할 예정이다.




이번 전주국제영화제에서 단연 주목할 섹션은 바로 회고전이다. 대륙을 넘나들며 과거와 현재를 토대로 재발견해왔던 전주국제영화제 회고전 올해의 선택은 독일감독 알렉산더 클루게와 헝가리 감독 벨라 타르로 선정되었다. <서커스단의 예술가들>을 통해 독일뿐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확고한 입지를 보여준 클루게의 <독일의 가을>, <감정의 힘>을 포함한 8편의 장편과 7편의 단편을 관객에세 선보일 예정이다. 벨라 타르 감독회고전의 메인을 장식할 벨라 타르는 헝가리가 낳은 최고의 감독으로 손꼽힌다. 수많은 평론가들이 벨라 타르의 이름을 훑어내리며 그를 위대한 시네아스트라 칭해왔으나 우리에게 벨라 타르의 작품을 맛 볼 수 있는 기회는 흔치 않았다. 특히 전주영화제가 막 걸음마를 떼었을 때 상영했던 <사탄 탱고>는, 7시간에 달하는 러닝타임을 가지고 있으나 이것이 무색할 만큼 아름답고 매혹적인 벨라 타르 최고의 작품으로 칭송받고 있다. <사탄 탱고>를 포함해 총 12편의 영화를 들고 '직접' 전주를 방문할 예정인 벨라 타르의 미학은 오래 전 부터 수없이 재발견되었던 것으로, 이번 회고전을 통해 벌써부터 많은 시네필들을 전주로 불러모으고 있다는 소문이 나돌 정도다.

반가운 이름들도 눈에 띈다. 전주국제영화제는 올해부터 대폭 증가시킨 '시네마 스케이프' 섹션을 통해 전 세계 거장들의 최근작, 그리고 신인 감독들의 발굴에 힘을 쏟았다. 에릭 로메르의 <로맨스>, 알렉산더 소쿠로프의 <알렉산드라>를 시작으로 수오 마사유키의 <그래도 나는 하지 않았다>, 그래도 나는 하지 않았다라울 루이즈의 <렉타 프로빈시아>, 마노엘 데 올리베이라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수수께끼>를 포함해 이름을 나열하기도 숨이 찬 따끈한 영화들을 차려놓고 대기중이다. '시네마 스케이프' 부문의 다큐멘터리 작품들 또한 작년보다 다양하게 마련되었다. 지아 장커의 신작 두 편과 함께 새롭게 발굴된 동남아시아들의 주목작들이 상영된다. 또한 전주국제영화제의 또다른 자랑거리인 '특별전'에서는, 지난 5년간 비서구 지역의 영화를 발굴해왔던 전주영화제만의 독특한 소통을 계속 이어간다. 올해는 중앙아시아 5개국에 중점을 두어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키르기스탄, 타지기스탄, 투르크메니스탄의 영화들을 소개할 예정이다.

'시네마 스케이프'의 다큐멘터리 섹션을 토대로 국내 다큐멘터리 또한 활개를 칠 준비를 한다. 한국영화 쇼케이스를 통해 김동원 감독의 신작 <끝나지 않은 전쟁>을 서두로 2007년 서울독립영화제가 선택한 작품들과, 막 극장에서 발을 뗀 신작들에 주목한다. 또한 강석률 비평위원은 '한국단편의 선택: 비평가 주간'을 통해 610편의 지원작 중 19편을 선정하여 전주국제영화제가 보여준 것 중 최고의 다양성을 확립할 것임을 밝혔다. 전주국제영화제가 선택한 야심찬 한국단편들은 크게 세 가지 섹션으로 나뉘어 선정되었다. 이번 '비평가 주간'은 '현실, 비현실, 새로운 시도'라는 주제 아래 엄선되었으며, 현재의 한국에서 발생되는 비정규직, 취업, 노인 문제등 소화하기 거북한 문제들, 그리고 이것들과 상반되는 종교, 신화적 색채를 통해 지금의 우리를 바라보자는 취지하에 준비되었다.

봄이 오는 것을 날씨보다 습관적으로 먼저 알게 해주는 대상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전주국제영화제다. 하루종일 열거해도 모자랄 영화들은 먹거리, 사람내음이 풍만한 전주로 매년 모여든다. 늘 복닥거리지만 어수선하지 않은 전주국제영화제의 매력은 바로 영화를 사랑하는 시네필들에게 아담한 안식처를 제공해주는 것이다. 단돈 오천원에 한 상 가득하게 차려나오는 따듯한 밥상과, 그 밥상의 인심을 훌쩍 뛰어넘는 다채로운 영화들의 향연을 맛보러 습관적으로 발걸음을 돌린다. 작년과 다른 올해, 올해와 다를 내년이 기대되는 전주국제영화제는 봄내음을 흠뻑 받으며 무더운 여름을 준비하기 알맞은 피서지다. 지금까지 미뤄왔던 온전한 영화로의 사색을 올해 가져보는 것은 어떨까. 다만 전주의 맛과 향, 그리고 영화들에 취해 집으로 오는 발걸음이 무거워질 것이 분명하니, 전주로의 '불멸의 향수병'에 대비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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