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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비행 <뻑큐멘터리-박통진리교> 상영 현장을 가다

(영화비평 전문웹진 네오이마주(http://neoimages.co.kr)와 객원필자인 윤성호 감독의 수상한 통정이 시작되었다. 매월 인디포럼 상영회와 대담을 취재하여 기사화하기로 의기투합한 것인데, 그 첫 번째로 지난 2월 24일 인디스페이스에서 열린 월례비행을 올린다.)

이젠 더이상 어울리는 단어가 없는 세상이다. 하수상하다는 말, 이상하고 기이한 시절이라는 말은 당연하고 진부하게만 들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한 번 '그런 단어'들을 되뇌이지 않을 수 없는 건, 아마 조금도 나아지지 않은 대한민국의 상황 덕분일 것이다. 요즘 들어 부쩍, 그리고 갈수록 영화같은 일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벌어진다. 텔레비젼 앞에만 앉으면 속속들이 터지는 사건사고들덕분에, 창작자들은 참 살맛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다. 때문에 반사적으로 우려되었던건 2009년차 비행을 시작하는 인디포럼 월례 상영 프로그램의 첫 번째 작품이었다. 독립영화를 모르는 사람마저도 그 제목과 명성은 익히 들어 알고 있는<뻑큐멘터리-박통진리교(이하 뻑큐멘터리)>. 수도세 절약 운동을 벌이면서 길거리에 엄청난 물대포를 쏴대고, 마스크를 썼다는 이유만으로 철창행이 될지도 모르는 이 공포스런 사회, 그것도 저들이 '사건의 근원지'라 부르는 종로 한 복판에서 <뻑큐멘터리>를 상영한다니, 엄청난 걱정이 앞서지 않을 수 없다. 창작의 자유마저 앗아가고 문화산업마저 시장경제의 힘으로 제압하려는 저들의 눈에 이건 일종의 '모의공모'인 셈이니까. 아니, 어쩌면 이건 '인디포럼의 역습'일지도 모르겠다.

<뻑큐멘터리>에 관한 나의 기억은 지금으로부터 5년 전, 갓 고등학교를 졸업해 실패한 대학교 진학에 재도전했던 시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어린 시절부터 할아버지 할머니와 함께 살았던 나는 어느 날 문득 조선일보와 한겨레, 두 종류의 신문이 집에 배달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조선일보는 할아버지, 할머니를 위한 신문이었고 한겨레는 엄마를 위한 신문이었다. 나는 두 종류의 신문 중 조금 더 색상이 화려하고 문장들이 유했던 한겨레를 택했다. 할아버지는 집에 잘 계시지 않아 모르겠지만, 할머니는 가끔씩 뉴스에 나오는 특정 당원들의 얼굴이나 한겨레 신문을 볼 때마다 '빨갱이'라는 단어를 쓰시곤 했다. 어쩐지 반감이 들었던 할머니의 '빨갱이'라는 단어는 내가 지지하고 관심가지는 정치색을 이루는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해주었다. 이후 할아버지, 할머니를 떠나 어머니와 내가 다른 곳으로 이사갔을 때, 집에는 더이상 조선일보가 날아들지 않았다. 한나라당의 절대적인 지지자였던 할아버지, 할머니와 좌파를 지지하는 어머니의 충돌이 빚어지면 나는 슬그머니 방으로 들어가 조용히 귀를 기울이곤 했다. 유난히 박정희 이야기를 많이 하던 할아버지는 다행스레 어린 나에게까지 특정 정치집단을 옹호하기를 강요하진 않으셨다. 그러기에는 내가 너무 어렸을 거라 생각한다. 초등학교, 중학교, 그리고 고등학교를 거쳐오는 과정 동안 그 어떤 교과서도 한국 근현대사의 이면에 대해 논하지 않았다. 내가 가장 이해할 수 없던건 박정희와 전두환에 관해 단 두 줄로만 묘사되어있던 국사 교과서였다. 전두환의 손녀와 3년 내내 같은 반에서 수업을 들었던 이유인지 어쨌는지는 모르겠지만, 국사 선생님은 그 부분만 나오면 갑자기 다른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의문 투성이인 학교를 졸업하고나서 처음 만난 (비교적)정치적인 다큐멘터리가 <뻑큐멘터리>였다. 할아버지가 그토록 좋아하던, 그리고 할아버지가 보셨던 신문인 조선일보가 한 달에 한 번 간격으로 찬양 기사를 싣곤 했던 '대한민국의 영웅' 박정희가, 그 영화 속에서는 철저히 무너져내리고 있었다. 그때 처음 접하고 배웠던 말이 바로 이거다. 대한민국 꼰대 1세대.

때문에 <뻑큐멘터리>를 떠올리면 담배를 피지 않는 나도 괜스레 담배를 입에 물고 싶어진다. 내 나이 또래의 친구들은 대부분 고등학교를 졸업해서야 그동안 배워왔던 국사가 어느 정도 잘못되었고 어느 부분이 미약했는지에 대해 깨닫게 된다. 학교가 그런 것들에 대해 자세히 가르쳐 줄 의무는 없었다. 고등학교 졸업 후 수 년 만에 다시 만나게 되는 인디포럼 <뻑큐멘터리>의 상영이 걱정스러운 동시에 반가운 이유는 아마 어린 시절 우파와 박정희, 그리고 조선일보에 대한 사적인 기억이 앞서기 때문이다. 지난 화요일 저녁, 조바심이 앞섰던 <뻑큐멘터리>의 상영은 성황리에 이루어졌다. 영화를 보는 내내 며칠 전 모 마트에서 미국산 소고기를 대량 구입하던 검정 잠바를 입은 아저씨들이 들이닥치는건 아닐까 무서운 감정이 앞섰지만, 많은 관객들이 참석한 가운데 상영은 '안전히' 막을 내리고, 훈훈한 분위기 속에서 <뻑큐멘터리>의 연출자 최진성 감독과, 윤성호 감독, 그리고 이택광 경희대 교수의 대담이 이어졌다.





윤성호 감독 (이하 '윤'): 8년 전에 최진성 감독에게 <뻑큐멘터리> 비디오테잎을 선물 받았는데 다 보진 못했다. 이 영화를 제대로 본 건 이번이 처음이다. 오랜만에 다시 극장에서 보니 소감이 어떤가.

최진성 감독 (이하 '최'): 나도 아직 <은하해방전선> 안봤다(웃음). <뻑큐멘터리>는 2001년도 제작된 작품이고 나의 첫 작품이다. 그 이후로 단편 극영화나 뮤직비디오 등 여러 가지를 만들고 있는데, 어쨌거나 이게 내 처음 영화다. 영화를 보면 양가적인 감정이 생긴다. 27세에 만든, 27세의 최진성이 보여서 흐뭇하기도 하고, 영화 속 등장인물들이 요즘도 활동하시는걸보면 참 감정이 묘하다.

이택광 교수 (이하 '이'): 명성은 익히 알고 있었는데, 아쉽게도 <뻑큐멘터리>가 나왔을 때 나는 한국에 없었다. 김대중 정부 출범기에 유학을 갔고, 2004년도에 다시 한국에 들어왔다. 다큐멘터리에 관해 토론한다는 걸 듣고 얼마 전에 DVD를 받아서 처음 봤다. 유학하면서 딴지일보를 종종 보긴 했지만, 내가 존재하지 않는 나라에서 일어났던 일을 보는 것이기 때문에 당시의 빈 부분이 채워지는 느낌을 받았다.


윤: 이번에는 최진성 감독의 연출의도를 새로 받기도 했는데, 박정희기념관은 이제 어떻게 된건가.

최: 그 이후는 모른다. 그리고 여러분들도 잘 아시다시피 현재 박정희기념관은 한국에 존재하지 않는다. 간간히 반발성기사로 여전히 한 두번씩은 나오는 것 같다. 물론 mb 시대니까, 잘은 모르지(웃음). 아직 현재 진행 중인 사건도 있다. 7년 전과는 달리 좋은 소식들이 간간히 들려오고 있다. 특히 허경영선생. 저 분이 이렇게 뜰줄은 당시에는 정말 몰랐다(웃음). 당시만해도 '듣보잡'이었는데. 그래서 작년에 되게 반가웠다. 감회가 새롭더라(웃음).

이: 박정희 기념관에 대한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이명박 정부가 과연 박정희기념관을 건립할까? 이명박은 그러지 않을 거라고 본다. MB는 노무현의 2세다. 제 2의 노무현, MB 반대로 하면 다 성공하는 세상이다. <워낭소리>도 그렇지 않은가. 상황이 바뀌었다. 다큐를 보며 뭔가 지금과는 맞지 않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만큼 세상이 변했다는 것이다. <뻑큐멘터리>의 장점은 박정희 시대의 피해를 진상규명하기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박정희가 우리에게 뭘 해주었는가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는 것이다. 영화 속에서 자본주의의 실체들이 명확하게 보인다. 재밌는건 영화 속에서 박정희를 극 옹호하던 사람들이 이제 MB정부에서 소외받고 있는 것이다. 진짜 주인들은 따로 있다. 그들이 바로 한국의 중산층이다. 한국 사회의 합리성을 박정희에서 찾는, 한국의 중간계급. <뻑큐멘터레>에사 희화되는 존재들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가는 존재들이다. 여기서 생존해서 돌아오는 사람들이 진짜 무서운 사람이다. 대표적으로 박근혜와 같은, 강남 조기유학파들의 우상과 같은 사람들. <뻑큐멘터리>는 파시즘을 보여주는 영화다. 박정희는 파시즘의 상징적인 이름이다. 우리 나라는 유일하게 삼성의 광고도 그걸 여실히 보여주지 않나. 김연아 같은 사람들의 성공사례들을 들먹이며 성공했다는 것 자체 때문에 모든걸 긍정화시킬수있다는 게 무서운거다. 독재를 거쳤지만 지금은 어쨌든 민주화를 이루지 않았느냐라고 생각하는 게 잘못된 것이고 가장 무서운 논리다. 지만원같은 선동가가 무서운게 아니라 조갑제같은 이데올로그들이 무서운거다. 프롤레타리아들이 끊임없이 소급하는 합리성이 박정희다. 그들이 보는건 인간 박정희가 아니라 영웅 박정희다. 이명박도 마찬가지다. 왜 MB를 찍었냐고 물어보는 물음에 한 아주머니가 이렇게 답하더라. "이명박이 되면 나도 돈을 많이 벌 것 같아서." 그때부터 이명박의 실패는 내정된 거다. 노무현이 해놓은 일을 완성만 하면 될텐데 그걸 아예 청산해버렸다. 황당한 이야기지. 지금 우리 사회의 꼰대, 꼴통 박정희는 예전과 사뭇 다른 모습으로 군림하고 있는거다.

최: 노무현에서 이명박으로 바뀌며 컨텍스트도 많이 바뀌었다. 안티조선도 없어졌고 이런 움직임들이 다른 식으로 넘어가면서 점점 교묘해지고 있다. 겉으로는 개혁적이고 진보지만 내부로는 한국의 적들이 세상엔 너무 많다. 이게 MB로 넘어오면서 교활해지고 있다. 이 영화를 지금 다시 만든다면... 뭐, 지금은 무서워서 만들 수나 있을까(웃음). 농담이다. <뻑큐멘터리>를 상영하자고 했을 때 살짝 주저했다. 예전에는 괜찮았는데, 지금은 상황이 다르지 않나.


윤: 우리도 선정할 때, 박정희 모자가 너무 크게 나와서 조금 주저했다, 우리도 나라의 지원금을 받아야하니까(웃음). 요즘 깊어진 인식과 함께 이런 종류의 다큐멘터리를 찍으면 깐느도 갈 수 있을 것 같은데. 나라가 깐느 갈 소재를 제공하는 것 같다(웃음).

최: 소재가 풍성하다는데 적극 동의한다. 노무현 때도 풍성했고. <뻑큐멘터리>때 같이 작업했던 분들 중 2002년에 노무현이 당선되며 나와 다른 성향을 가지고 다른 노선을 걷기 시작한 분들이 많다. 나름대로 고민 끝에 만든 게 <그들만의 월드컵>이다. 노무현을 적극 지지하는 개혁적 민족주의자들이 우리 사회를 망치는 것이라 생각한다. 요즘같은 경우는 정말 소재가 많다. 영화인 입장에서 좋은 소재를 무궁무진하게 제공하는게 참 감사하다(웃음). 이런건 지금은 못 만들지 싶다. 27세의 최진성이 삐딱하게 만들었던 것이니, 지금과는 좀 다르다.


관객1: 박정희라는 인물은 분명히 악의에 충실한 면도 있지만, 어떤 부분에서는 가시적인 성과를 낸 사람이 아닌가. 그 시대를 겪지않아서 어느 편에 서야할지 잘 모르겠다. <뻑큐멘터리>의 지만원, 조갑제, 허경영 이런 사람들은 비판 받을 만 한데, 영화 속에서 일반 시민들을 비꼬는 태도는 조금 불쾌했다. 당시를 겪은 사람들 중 박정희가 훌륭한 사람이었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박정희는 나쁘다고 해야할 지 잘 모르겠다. 근본적으로는 다른 것이라 생각한다. 영화 속 인터뷰 자체도 너무 편향적이고, 인물소개도 되게 편파적이더라.

최: 일단 명백한 나의 입장이 <뻑큐멘터리>에 있다. 박정희에 대한 이데올로기나 담론이 이미 한 쪽으로 치우쳐져 있는 상황이었고 박정희를 위대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국민의 80%는 될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영화를 균형있게 만드는 건 의미없는 작업이라 생각한다. 여전히 살아있는 김대중, 김종필, 박근혜, 조갑제, 그리고 그 분들을 위시로 한, 박정희의 맥락 속에서 주워먹고 살고 있는 이회창같은 사람들. 이런 영향력이 30년이 넘게까지도 진행되는 걸 이야기하고 싶었다. 단순히 20년전에 죽은 박정희를 말하고자 한 건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뻑큐멘터리>가 토론할 수 있는 계기가 되는, 담론을 형성할 수 있는 조그만한 가능성이라도 가지게 된다면 좋을 것이다라는 생각에서 제작한 것이다.

이: 질문하신 것 자체가 이미 바뀐 맥락이다. 영화가 만들어질 당시는 냉전체제가 무너질 시절이다. 그들이 무너진다는 공포와 불안감은 영화 맨 마지막의 퍼포먼스에서 모두 드러난다. 민중에겐 이념이 필요없다. 좌파이념이든 우파이념이든 내가 잘먹고 잘사면 되는거다. 자본주의가 탈가치화시키는 것이다. 박정희를 제거한다고 열망이 사라지진 않는다. 풍자는 약자가 강자와 싸울 때 쓰는 가장 고전적인 수법이다.


관객2: 영화를 나쁘게 보진 않았다. 단지 문제가 될 수 있다 생각하는 부분은, 이 영화 이전에 필터링을 거치지 않았을 때, 반대입장을 가진사람에게는 비판의 여지를 줄 수있다는 것이다. 박정희에 대해 반하는 사람들이 낄낄거리며 볼 수 있는 기능을 하긴 하지만, 더 중요한건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문제에 대한 환기와 동시에 다수로 하여금 다가갈 수 있게 하는 기능이라 생각한다. 의식이 주체적이지 못한 사람들을 설득 할 수 있는 다큐는 아니라 생각한다. 그들을 설득하기위해서는 실제로 공정하고 교묘하게 접근해야하지 않나.

최: <뻑큐멘터리>는 1960년대 중반부터 2001년도까지 벌어지는 이러저러한 상황들에 대한 개인적 관심과 억울함, 그리고 나의 의견이 담겨진 아카이브 같은 영화다. 이런 것들을 여러분들에게 제시한 것이다. 불편하든 통쾌하든 모두 각자의 감정이다. 공정성이라는 부분은 어려운 문제인데, 실은 다큐가 그런 부분이 좀 어렵긴하다. 윤리나 도덕 교과서도 공정하지 않은데 공정하게 보고 있다. 신문과 언론도 마찬가지다. 공정한듯 말하는것. 시민단체나 유니세프 같은 곳에 만원, 이만원 기부하고, 지나가는 거지에게 천원 적선하면서 자신의 아이들을 조기유학보내고 서울대 보내는그런 착한 분들이 사회의 공정성을 흐리지 않나. 다시 한 번 고민해봐야 하겠다. 영화 속에서 가장 맘에 드는 장면은 유치원 꼬마들이 박정희 묘에서 묵념을 하는 장면이다. 유아교육학과를 나온 똑똑한 분들의 인솔 하에 아이들은, 카메라방송의 지시에 따라 세 번을 반복해 묵념한다. 내려가면서 아이들이 용그림, 용그림 하지않나. 실제로 아이들은 용그림을 보고 싶는데, 선생들은 박정희에만 관심있다. 우왕좌왕 내려가면서도 꼬마들은 '한줄로'를 외치며 억지로 줄을 서고 있다. 이런게 중산층의 폐해라고 생각한다.


윤: 중간계급을 쉽게 말해 '꼬실 수 있으면' 좋겠다. 영화에서는 중간층을 설득하는 것보다 말하는 것 자체에 대해 관심이 많은 것 같다.

최: <뻑큐멘터리>가 내 입장에서는 귀엽게 보인다. 들이대기도 하고(웃음). 지금의 나는 이러저러한 고민이 많다. 영화 만드는 게 주저스럽기도 하고, 다큐는 더욱 어렵다.
다른 독립 다큐멘터리를 많이 봐달라. 나는 이런 스타일로 영화로 만드는 한국 인디 다큐멘터리 감독 중 한 사람일 뿐이다. 윤성호 감독같은 사람도 그런 부분을 굉장히 잘 건드린다. 다른 많은 영화들을 보면 좋겠다. 김동원감독님 영화들은 절실한 고민이 느껴지지 않나. 그런 건 정말 좋은 다큐멘터리다.


관객3: 박정희로 대표되는 근대와 현대사의 과정을 보면 이분법적사고만 전개되어왔다고 생각한다. 우파니 좌파니 하는 건 말장난같은 느낌이다. 근대사는 왜곡이 대부분이 아닐까. 젊은 세대들은 취업이 우선이지, 인문학이나 역사등은 관심 대상이 아니다. 그런 부분에서 자기만의 역사에 관한 입체적 사고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부분이 부재된 상황에서 취사 선택할 수 있는 방법론이나 회화를 제시해주신다면.

이: 무조건 하면 된다. 이것저것 잴 것이 뭐 있나. 이론을 가지고 있으면 적용을 하면 된다. 현재 우리나라가 어떤 나라인지 모르는 사람이 너무 많다. 한국 사회는 궁극적으로 보수주의 국가다. 한국의 윗대가리에는 좌파, 우파가 없다. 다 학연과 지연으로 연결 된다. 그래서 다들 미친듯이 좋은 학교를 보내려하는 것이다. 중간 계급들은 부동산박사, 교육학 박사, 모든 방면에 박사들이다. 그들에겐 비판적사고가 실종되었다. 그들은 이제 더 이상 위험하지 않다. 지금은 예술적 감수성, 인문학적 비판의식이 필요한 세대다. 이런 것들을 키워야 정말 제대로 된 사회를 만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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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아지 키워보셨나요?

필진 칼럼 2009.02.25 09:51 Posted by woodyh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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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아지를 키워 본 적이 있으신가? 이제 겨우 1년 8개월을 같이 살았을 뿐이지만 내게는 네 발을 가진 ‘또 하나의 가족’이 있다. 2007년 6월 8일에 태어났고 두 달이 지난 그해 여름에 만나게 된 아메리칸 코커스패니얼 종인 그 녀석의 이름은 ‘찰리’다. 어릴 적부터 집 마당에서 개를 키워왔던 까닭에 녀석이 처음 집에 올 때만 해도 이 녀석을 키우는 일이 그리 어렵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밥 주고 똥 치워주고 가끔 데리고 나가 산책시켜주면 끝일 것이라 믿었던 것은 판단미스였다. 뒤늦게 안 사실인즉 코커스패니얼이 비글, 슈나우저와 더불어 소위 ‘3대 지랄견종’으로 불릴 정도로 부산스럽고 말썽피우는데 일가견 있어 여간 키우기 힘든 종이 아니라는 것. 얼마나 산만하냐면 잠시도 가만있지를 못하고 온 집안을 돌아다니며 사고치기 일쑤인데, 신발을 물어뜯고 벽을 갉아먹는 것도 모자라 책이란 책의 표지는 죄다 뜯어 헤쳐 놓은 탓에 책장 하단에 있는 책은 모두 표지가 보이지 않게 거꾸로 꽂혀있을 정도다. 요컨대 단 10초를 가만 앉아있지 못하고 하다못해 머리라도 흔들어야 직성이 풀리는 이 녀석. 그런 녀석을 1년 8개월 동안 금쪽같은 내 새끼라 여기며 같이 살아올 수 있었던 힘은, 철저하게 개인주의를 지향해온 내 삶을 조금이나마 변화시킨 힘은, 바로! 찰리로부터 나왔다. 

말과 글로는 생명존중과 타인에 대한 배려와 이타적 삶을 떠들어왔지만 정작 실제 삶은 그런 것에 발치도 가보지 못한 터였다. 그런데 이 녀석을 키우면서부터 생명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절실하게 깨닫게 되었고 나의 부모님이 나를 보며 때론 안타까워했을 수많은 순간들과 그 심정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예컨대 몸이 아파 낑낑대는 녀석을 보고 있을 때면 오래전 앓아누운 나를 바라보던 어머니의 눈빛이 떠올랐고, 같이 놀아달라고 간식 달라고 집안을 어질러 놓으며 어리광피우는 녀석을 보고 있노라면 갖고 싶은 물건을 쟁취하기 위해 밥을 굶고 방에 틀어박히기 일쑤였던 철없는 내 어린 시절의 모습이 오버랩되곤 했다. 강아지 한 마리를 키우면서도 이렇듯 많은 생각과 삶의 변화를 경험하는데 하물며 사람 자식은 오죽할라고. 요컨대 애완견이 아닌 반려견(伴侶犬) 즉 단순히 키우는 강아지가 아닌 한 공간에서 같이 생활하고 세월과 추억을 함께하는 가족으로서의 찰리는 이렇게 내 마음 속에 들어온 지 오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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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말리와 나>가 보여주는 것 또한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일과 신혼의 단꿈을 포기할 수 없었던 주인공은 아이를 갖는 것을 대신해 강아지를 선택한다. 즉 맞벌이에 바쁜 현실 속에서 좌충우돌 말썽장이 말리를 키우는 동안 아이 갖기를 늦출 수 있다고 믿은 것이다. 래브라도 리트리버 종인 말리와 존 그로건 부부가 한 지붕 아래서 살게 된 시발점이다. 그저 한 때 자신들의 편의적 판단에 의해 데려와 키운 강아지가 숱한 말썽을 피워도 웃을 수 있었던 것은, 아이가 없었기 때문이고 어쩌면 아이가 생기기전까지 마음을 나눌 대상이 필요했기 때문일 것이다. 적어도 이때까지 말리는 가족으로의 편입이 유보된 상태였다. 수단일 뿐 목적은 아니었다는 것. 그러나 아이가 하나 둘 셋 태어나고 부부의 시선과 관심이 아이에게로 옮겨가는 동안 말리는 애물단지로 변해간다.

이처럼 <말리와 나>는 애완견이라는 미명하에 강아지를 키우는 인간이 한 번쯤 겪을 법한 심적 물리적 변화를 세밀하게 보여줌으로써 흔치 않은 보편성을 획득한다. 이를테면 허전함을 채우기 위한 대체품으로 데려온 강아지와 인간 사이에서 벌어질 수 있는 이야기들. 그러니까 예쁘고 귀여운 강아지시절을 지나 덩치 큰 개로 탈바꿈하면서 관심이 줄어들고 분산되며 때론 남 줘버리고 싶기까지 한 순간들을 겪은 이들에게 영화는, 인간과 개의 소통방식을 통해 생명의 소중함과 가족의 의미를 이야기하고 있다. 세월이 흘러 이별을 할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깨닫는 존재의 의미와 무게는 비단 인간에 국한되지 않는 법. 관객의 눈물샘을 자극하는 지점 역시 그러하다. 인간과 세월을 함께해온 모든 생명체에 바치는 뜨거운 눈물. 그것은 기억을 부르고 추억으로 아로새겨지며 개인의 역사가 된다. <말리와 나>에 담긴 진정성 또한 여기에서 비롯된다.


희망을 꺾고 싶을 정도로 힘든 시절이다. 삶이 힘들면 마음의 여유가 없어지고 심성이 강퍅해지기 마련이다. 그렇다고 모두가 잔혹한 마음을 품고 우악스럽게 살지는 않을 터. 극단으로 치닫고 싶은 마음을 잡아당기는 힘은 생명에 대한 경외감으로부터 나온다. 가족이 그렇고 자신과 관계 맺은 모든 생명체가 그 대상이다. 생명경시풍조가 만연한 세상, 죽음을 가벼이 여기는 세태에 한 마리 개 앞에서 흘리는 눈물이 소중한 것은 이 때문일 것이다. 분명 가족이었던 그러나 뒤늦게야 가슴절절하게 깨달았던 사실 말이다.

당신이 외로움에 지쳐 따뜻한 정이 그리운 사람이라면, 그러나 스멀스멀 밀고 들어오는 끈적끈적하고 복잡한 인간관계에 질렸다면 강아지를 키워보길 권한다. 분명 그 녀석은 당신이 주는 것과는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의 많은 것을 당신에게 아낌없이 줄 것이고, 삶의 기적까지는 못 될지라도 더불어 살아가는 삶의 소중한 가치를 얻기에 부족하지 않을 것이다. 하긴 삶의 기적이 별 건가? 애초부터 가족이었고 앞으로도 쭉 가족일, 불과 두 살도 안 된 찰리와 함께하는 동안 인간적 이기심이 작용하지는 않았는지를 되돌아보게 만든 영화 <말리와 나>를 보고 돌아온 늦은 밤, 나는 녀석을 데리고 동네 한 바퀴를 돌았고 가장 좋아하는 고구마 간식을 듬뿍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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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s://lexa.tistory.com BlogIcon .블로그.  수정/삭제  댓글쓰기

    예전에 키웠던 성격 안 좋았던, 저희집 강아지 뭉치가 생각나네요.
    언제 블로그에 사진이라도 올려야겠어요 .^^

    2009.02.25 10:08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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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민영


영화 <카비리아의 밤>은 페데리코 펠리니의 1954년 작인 <길>의 연장선에 위치한 작품이다. <길>의 젤소미나와 <카비리아의 밤>의 카비리아는 진실한 사랑을 찾아 떠도는 여성으로 어떤 상황에서건 특유의 낙천성을 잃지 않고 미래를 바라볼 수 있는 쾌활한 성격을 가진 주인공이다. 하지만 카비리아는 젤소미나와 달리 필연적인 시공간을 배회한다. <길>이 우연히 던져지는 사건들의 연속이라면 <카비리아의 밤>은 시간과 공간이 서로 치밀하게 얽혀 하나의 완벽한 드라마를 만들어 낸다는 것이다. <카비리아의 밤>은 페데리코 펠리니가 네오리얼리즘을 떠나는 반환점이 되는 동시에 ‘펠리니적’이라는 수식어의 탄생 과정에 놓인 영화다.

영화는 물에 빠진 카비리아를 마을 사람들이 구출해내는 장면으로부터 시작된다. 카비리아가 사랑했던 조르조는 카비리아를 물에 빠뜨린 채 그녀의 돈을 빼앗아 달아난다. 카비리아는 물에 흠뻑 젖은 채 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되고, 마침내 그녀는 애지중지 키우던 닭을 끌어안고 울음을 터뜨린다. 하지만 카비리아의 우울한 마음은 이내 조르조에 대한 분노로 바뀐다. 그녀는 눈물을 삼킨 채 방으로 들어가 조르조의 사진을 모조리 불태워버린다. 마음을 굳게 다진 카비리아는 떠나간 조르조를 뒤로하고 다시 거리로 나선다. 그러나 여전히 그녀의 사정은 계속해서 후퇴할 뿐이다.

펠리니의 영화 속 주인공들 대부분은 종교적인, 혹은 구원적인 특정 대상에 자신을 의지해 해답을 얻으려 노력한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신으로부터 외면당한 채 스스로 파멸하고 갱생하기를 거듭한다. <카비리아의 밤>의 카비리아 또한 자신의 처지를 벗어나고자 성당을 찾지만, 그녀에게 되돌아오는 것은 구원의 밧줄이 아닌 침묵뿐이다. ‘언젠가는 지독한 불운에서 벗어나리라’ 다짐하는 카비리아를 덮치는 것은 실망과 배신의 나날이다. 페데리코 펠리니는 카비리아라는 인물의 행로를 설정하기 전에 그녀가 몇 번이고 실패로부터 일어서게 만드는 힘을 영화에 덧씌운다. 카비리아의 ‘힘’은 기적, 혹은 구원 에 대한 갈증으로 펠리니는 이를 통해 카비리아의 행동에 대해 한 치의 의심도 허용하지 않는 질서를 만들어 낸다.

영화가 끝나갈 무렵 카비리아는 마지막 희망, 그리고 마지막 기적의 상대인 오스카를 만난다. 거듭되는 악몽이 두려웠던 카비리아는 오스카를 경계하지만, 그의 끈질긴 구애 앞에 결국 마음을 받아들인다. 그러나 그토록 사랑을 속삭였던 오스카도 사랑의 힘에 이끌려 카비리아를 원한 것이 아니었음이 밝혀지고, 카비리아는 홀로 외딴 지방에 남아 구슬픈 눈물을 흘린다. 자신이 살던 마을을 벗어나 방황하던 카비리아는 그녀의 유일한 친구였던 음악의 유혹에 이끌려 울음을 삼키고 웃음을 짓는다. 카비리아의 눈가에 맺힌 검은 눈물방울은 사랑이라는 단어를 이용해 기생해야했던 남성들의 모습을 보여주는 동시에 딛고 일어나야만 하는 카비리아의 ‘광대적 삶’을 함축적으로 묘사한다. 카비리아의 웃음은 그녀가 그토록 찾아 헤맸던 종교적 해답을 발견했음을 보여주고, 이것은 곧 페데리코 펠리니의 ‘신성’으로 이어진다. 웃는 자는 곧 깨달음을 얻은 자이며, 자기치유의 권한을 단독으로 부여받은 사람이다. 카비리아는 사랑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자신을 사랑하며 세상을 향해 웃음 짓는다.


(2009년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웹데일리에 송고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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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해하고 학습하는 데에 있어

    2013.04.25 2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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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요 좋아. 열 받으면 지는 거죠”


영화 [8마일]에서 주인공 버니 래빗의 친구이자 랩베틀의 진행자이기도 한 퓨처는 살기등등한 기세로 서로를 노려보는 랩퍼들을 달래기라도 하듯 저렇게 말한다. 맞다. 옳으신 말씀이다. 싸움도 냉정하고 침착한 놈이 더 잘하는 법. 흥분 잘하고 열 내기 좋아하는 놈은 소리만 요란할 뿐 실속이 없다. 결국 승리는 차분하게 결정타를 날릴 기회를 기다릴 줄 아는 녀석이 가져가게 되어 있으니까. 그런데 뭔가 좀 이상하지 않은가? 욕설과 분노의 찌꺼기들을 마구 마구 긁어 모아 상대방의 면전에 토해내는 랩베틀의 세계에서 은근슬쩍 차분함과 냉정함의 미학을 설파하다니. 물론 두 말할 필요 없이 분노는 갱스터랩이 지닌 에너지의 원천이다. 랩베틀의 현장에서 랩퍼들이 서로에게 쏟아내는 랩 가사의 내용도 태반이 상대방에 대한 비방과 욕설들뿐이다. 앨범에 수록되어 발매되면 ‘19금’ 딱지가 붙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지는, 불량하며 불온한 에너지로 들끓는 뒷골목의 세계. 아마도 이것이 갱스터랩과 랩베틀에 대한 고정관념일 텐데 [8마일]을 보고 난 뒤에 떠오른 생각은 랩베틀의 세계가 폭력적인 성향을 띄고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렇게까지 폭력적이지는 않더라는 것이었다. ‘그렇게까지’라는 수식어가 이도 저도 아닌 듯 애매하게 느껴진다면 다시 설명해보도록 하겠다. 어차피 랩베틀의 주요 내용을 이루는 게 조롱과 비방인 다음에야 여기서 상대방에 대한 배려와 정치적 공정성을 기대한다는 건 무리일 것이다. 분명 갱스터랩 자체는 과격하다. 하지만 총대신 마이크를 든 갱스터들이 일합을 겨루는 랩베틀의 현장은 일방적이지도, 무자비하지도 않다.

그곳은 확고한 룰에 의해 움직이는 곳이기 때문이다. 무턱대고 선빵을 날릴 수도 없고 내가 한바탕 독설을 쏟아 부었으면 상대방에게도 반박의 기회를 줘야만 하며 기분이 상했다 해서 멱살잡이를 하거나 주먹을 날려서도 안 된다. 오로지 랩으로만 눈 앞의 적을 난도질할 수 있으며 그러기 위해선 상대방의 흠집을 하나라도 더 찾아내야 하고, 자연스럽게 주도 면밀한 관찰이 이뤄질 것이며 당연히 냉정함을 유지할 수 밖에 없게 된다. 열 받으면 지는 거라는 퓨처의 말은 괜한 소리가 아니었던 것이다. 게다가 승패가 갈라지게 되면 결과에 대한 깨끗한 승복이 이뤄지니, 이쯤 되면 과연 랩베틀을 험상궂은 청년들의 불량한 모임 정도로 치부할 수가 있는 것인지 의문이 들 지경이다. 랩베틀이 벌어지는 클럽 내부에서만 그러는 것 아니냐고? 그렇다면 다른 장면을 주목해 보도록 하자. 버니 래빗이 일하는 공장의 노동자들이 점심시간에 급식차 앞에서 주거나 받거니 랩을 하는 장면이 바로 그것이다. 시발점이 되는 것은 역시 막연한 분노다. 갑갑한 현실에 대한 분노, 그리고 그 분노를 쏟아 붓기에 적당해 보이는 만만한 상대를 향한 분풀이. 그 결과는 동성연애자인 공장 동료를 향한 비방과 조롱으로 이어진다. 식사중인 노동자들의 이목이 집중된 이 현장을 버니 래빗도 그냥 지나칠 수 없다. 누군가의 성 정체성을 두고 면전에서 폭언을 일삼으니 명백한 인신공격이요 인권침해의 현장이 아니겠냐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그 자리에서 오고 간 것은 막말이 담긴 랩 가사가 전부이다.

같은 공장에 동성연애자가 있다 해서 근무조건 상의 불이익이 가해진 것도 아니고 집단 구타를 한 것도 아니다. 거기다 일방적으로 당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편을 들어준 다른 노동자도 있다. 반박의 도구 역시 랩이며 이렇게 즉석에서 벌어진 베틀의 현장에서도 클럽과 마찬가지로 룰은 지켜진다. 회식 자리에서 술 퍼 마시고 멱살잡이 하는 것 보다는 훨씬 흐뭇한 광경 아닌가? <8밀리> ⓒ유니버설픽처스물론 편견도 없고 화낼 일도 없는 세상이 온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것이다. 분노할 일이 없다면 서로에게 욕지거리를 날릴 일도 없고 조롱을 당할 일도 없을 테니까.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런 세상은 어디에도 없다. 아마 앞으로도 오지 않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분노를 어떻게 제어하고 다스리느냐의 문제다. 공정함과 배려의 시선까지는 심어주지 못하겠지만 랩과 랩베틀로 이루어진 거리의 문화가 분노를 순화시키는 창구의 기능을 수행하기도 한다는 점에 주목해야 하지 않을까? 버니 래빗을 둘러싼 현실이 각박하다 보니 [8마일]의 세계에도 분명 폭력은 존재한다. 영화 속 디트로이트의 거리는 그다지 살기 좋은 환경은 되지 못한다. 거기다 애인이 다른 남자와 몰래 정사를 나누는 현장을 목격한다면 어느 누구라도 버니 래빗처럼 폭발하고 말 것이다. 허나 이 상황이 주는 교훈은 딱 한가지뿐이다. 폭력은 결국 더 큰 폭력을 부르게 된다는 것. 흠씬 두들겨 맞고 도망간 녀석이 자신의 패거리를 끌고 와서 집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달리 무슨 도리가 있을까? 이쯤 되면 애인 뺏기고 집단 구타까지 당한 버니 래빗의 굴욕과 분노를 해소할 수 있는 건 랩베틀 무대에서의 승리 밖에 없어 보인다.

그것은 더 큰 폭력을 불러오지도 않고, 본인 스스로나 다른 누군가를 다치게 하지도 않으면서 상대방을 산산조각 낼 수 있는, 정당하고 합법적이면서도 가장 달콤한 복수의 수단이기 때문이다. 물론 버니 래빗의 복수는 어디까지나 상징적인 복수에 불과하다. 그의 현란한 랩이 눈가의 멍자욱을 지워주지도 못할 것이고 그가 겪은 것만큼의 물리적 고통을 상대에게 안겨 주지도 못할 것이며 무너져 버린 신뢰를 회복시켜주지도 못할 것이다. 그렇다고 신분상승을 위한 고속 승강기가 되어주는 것 또한 아니다. 그러나 버니 래빗이 느끼는 쾌감만큼은 진짜다. 언어와 리듬으로 짜인 랩이라는 틀 안에서 심사 숙고한 결과이기에 그것은 예술적이면서도 지적인 성취이기도 한 것이다. 이런 게 바로 문화가 지닌 힘이 아닐까? 대중을 위로하고 그 속에 맺힌 응어리를 순화 및 해소시키며 또 다른 차원으로 승화시키기도 하는 것. 한 손엔 색안경을, 또 다른 한 손엔 19금 딱지를 손에 든 사람들에겐 거리의 청년들이 쏟아내는 그 직설적인 에너지가 여전히 세균폭탄과 같은 위험물질로 보일지도 모르겠지만 진짜 위험한 것은 따로 있다. 폭력적인 대중문화를 승인하는 사회와 일상 속의 폭력을 묵인 및 승인하는 사회 중 과연 어느 쪽이 더 위험한 사회일까? 일상 속의 폭력은 일방적이며 무자비하다. 그것은 순서 따윈 기다리지 않는다. 그리고 반박의 기회도 주지 않는다. 그저 선빵부터 지르고 무자비하게 상대를 밟아대기만 할 뿐이다.

[체인질링]의 크리스틴 콜린스는 자신의 아들에게 ‘먼저 싸움을 걸지는 말되 마무리는 네가 지어야 한다’는 합리적인 가르침을 제시했지만 우리는 사실 ‘누가 괴롭히면, 누가 건드리면 참지 말고 그냥 싸워라’라는 즉각적인 행동강령에 더 익숙하다. 확실한 기준점 없이, 애매하고 자의적인 고무줄 잣대에 따라 싸워라, 때려라, 라고 교육 받다 보니 폭력에 대해서도 그럴 만 했다, 상대가 먼저 원인 제공을 했다는 식으로 둘러치기 일쑤다. 보다 크고 거대한 폭력에 대해서도 책임은 고사하고 치졸한 변명만을 남발한다. 과연 이런 사회가 대중문화의 폭력성을 훈계할 자격이 있는 것일까? 알고 보면 랩베틀의 현장이란 기본적인 소통이 보장된 곳이다. 그곳에서는 뭔가 반박의 여지를 찾아내기 위해서라도 상대방의 독설을 들어줘야만 한다. 버니 래빗이 파파독을 이길 수 있었던 이유도 자신을 향한 조롱을 새겨듣고 되받아 쳤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힘과 권력을 앞세운 폭력은 일방적이다. 거기에는 소통의 가능성이 차단되어 있다. 상대방의 말은 생떼거리 쓴다며 외면하고 여기저기 금기의 표찰들을 날려대며 몽둥이질을 가하는 사회가 안전해 봐야 얼마나 안전하겠는가. 애들은 싸우면서 큰다는 말은 곧잘 하는데 기왕이면 싸우는 방법도 제대로 가르쳐야 할 것이다. 질풍노도의 시기라고 교과서에만 적을 일이 아니라 그 질풍을 어떻게 다스릴 것인지도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하긴, ‘UNDER MY SKIN’도 용납 못해서 기어코 ‘UNDER MY SKY’로 바꿔 버려야 직성이 풀리는 세상에서 무엇을 바랄까. 그저 분노를 토해낼 마이크조차 갖지 못한 사람은 이렇게 글이라도 쓸 수 있게 내버려 둬 주길 바랄 수 밖에.


<8밀리> ⓒ유니버설픽처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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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캬 글참예술이네

    2009.07.16 01:10
  2. EMINEM  수정/삭제  댓글쓰기

    흥분을 덜해야지 디스걸때 무슨 말을할지 더 잘떠오르자나

    2012.07.25 18: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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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월,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에 즈음하여 진행된 인터뷰에서 김성욱 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래머는 시네마테크사업에 대한 중요한 이야기를 꺼낸 바 있다. 중차대한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사안이 첨예하고 민감한데다가, 사실 확인이 모호한 상황에서 먼저 움직이는 것이 이롭지 않다는 판단이 섰기에 이 내용은 의도적으로 기사화하지 않았다. 그런데 불과 한 달도 되지 않아 우려가 현실로 나타났다. 다름 아닌 시네마테크 전용관 위탁사업을 공모제로 변경한다는 것이 주요 골자다. 쉽게 설명하면 시네마테크전용관 ‘서울아트시네마’는 독립영화 전용관 ‘인디스페이스’와 미디어 센터 ‘미디액트’와 더불어 영화진흥위원회의 위탁사업 수행기관 중 하나이다. 서울아트시네마의 공간 임대료를 비롯한 기자재 구입비와 운영비는 이처럼 정부지원금으로 조달되어왔고 이것이 서울아트시네마 전체 운영비의 30%를 차지한다. 그런데 이제부터는 위탁이 아닌 공모제로 전환하겠다는 것이다. 계약 갱신을 불과 한 달도 남기지 않은 시점에서 말이다. 여기서 한 가지, 오해하지 말아야 할 중요한 사실이 있다.

시네마테크 서울아트시네마는 영진위나 문화관광체육부가 출연한 기금으로 설립 운영되어온 기관이 아니다. 순수하게 민간이 주도하여 만들고 이어져온 민간 기관이라는 것. 다만 영진위는 시네마테크 전용관 위탁사업의 형식을 통해 운영자금의 일부를 지원해왔을 뿐이라는 점이다. 그러니까 민간이 시작해 힘들게 꾸려온 사업에 정부는 단지 위탁이라는 미명하에 운영비 일부를 지원해주었다는 것인데, 그것을 빌미로 이제 와서 그 사업의 주체를 자기들이 결정하겠다는 것이 논점이다. 이것이 중요한 이유는 뒤에 거듭 말하겠지만, 자칫 영진위가 시도하는 공모제가 시네마테크전용관의 주체를 선정하기 위한 꽤나 정당하고 투명한 절차로 오인될 수 있기 때문이다.

현재까지는 확정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서울아트시네마가 공모에 참여할지, 어떤 주체가 추가로 공모에 참여할지 확연하게 드러나지 않은 상태이다. 하지만 손 놓고 안이하게 결과를 기다리기에는 돌아가는 정황이 석연치 않다. 황급히 글을 쓰는 것도 이런 까닭이다. 그래, 솔직히 고백한다. 이것은 선방이다. 상대를 넘어뜨리기 위한 피니시 블로우가 아닌 상대가 접근하지 못하도록 잽을 날리는 데 그 목적이 있다. 그러므로 지금부터 할 이야기가 전혀 쓸모없는 기우에 불과했기를 바랄 따름이다. 진심으로 내가 별것 아닌 일에 호들갑 떤 우스운 인물이 되어버렸으면 좋겠다.

정부사업에서의 수의계약은 잡음을 만들어내기 일쑤였다. 특혜 시비와 부적격자 선정에 따른 부실문제가 뒤따랐고 여기에는 검은 돈 또는 외압이 개입되기 마련이었다. 공모입찰제로 바꾸고 공개경쟁을 통해 사업의 내실을 기하는 풍토가 확산된 것은 이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행태는 사업권자 선정 방법만 바뀌었을 뿐, 공모입찰제하에서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순진한 입찰자들은 자신들이 결정과정의 합법성을 증거 하기 위한 들러리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아야만했다. 결국 문제는 (언제나 그랬듯이) 제도가 아닌 제도를 운영하는 주체와 사람에 있었다. 

영진위의 시네마테크 사업권자의 공모제 역시 같은 맥락에서 살펴봐야 할 것이다. 영진위는 “모든 위탁사업을 공모제로 전환하라”는 문광부의 지시에 따른 것이라고 얘기하고 있지만 문광부의 주장은 이와 사뭇 다르다. “문광부는 그런 세세한 부분까지 관여하고 지침을 내리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지금 어느 쪽의 말이 맞는 지는 중요하지 않다. 문제는 이제까지 민간 주도하에 운영해 온 시네마테크를 공모에 붙이겠다는 발상 자체가 어불성설이라는 데 있다. 영진위는 시네마테크 사업의 주체가 아니라 그 알량한 정부지원금의 대리 집행기관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제 와서 공모제로 전환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요컨대 민간사업에 정부가 관여하여 간섭하고 통제하겠다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서울아트시네마 측이 항변하자 영진위는 “어차피 공모할 주체가 없으니 빨리 응모할 수 록 서울아트시네마에 유리하다”는 이유를 내세워 설득하려 했다. 이 말은 마치 서울아트시네마 이외에 시네마테크전용관 위탁사업을 수행할 만한 자질과 경험을 가진 단체가 없어 보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모제를 수행하는 것은 단순히 행정처리지침의 일환이요, 요식행위이니 서류만 제출하면 끝날 일이라는 것처럼 들린다. 당신도 그렇게 생각하는가? 영진위의 호언장담과는 달리 특정 단체가 공모하고 심사 결과 서울아트시네마가 공모에서 탈락한다면? 결과는 간단하다. 지금의 장소에 머물 명분이 없으니 현재의 형태는 사라지게 될 것이다. 서울아트시네마가 없어진다는 말이다.

만약 다른 단체가 공모한다면 어떤 곳일까? 현재로써는 정확하게 알 길이 없다. 표면상 드러난 주체가 없는 마당에 섣부른 추측은 위험하다. 하지만 가늠되는 것이 없지도 않다. 사실 2008년 이후 영화계 일각에서는 시네마테크전용관 사업에 대한 사업권자 교체 가능성에 대한 이야기가 솔솔 흘러나오곤 했다. 세간에서는 현재의 서울아트시네마를 대체할 사업자로 특정 단체의 이름도 거론되고 있었다.

이쯤에서 혹자는 이렇게 말할 지도 모른다. 그간 서울아트시네마가 펼쳐온 사업을 그 화려한 고전의 향연을 지금 그 어떤 단체가 순조롭게 해낼 수 있겠느냐고. 물론 나 역시 서울아트시네마만이 유일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것은 달리 보면 지극히 순진하고 위험한 질문이다. 왜냐하면 애초에 사업자 선정의 대상이 아닌 것을 가지고 논박하는 것은 상대의 술책에 말려드는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분명이 알아야 할 것은, 시네마테크전용관은 영진위의 산하 기관도 아닐 뿐더러 공모를 통해 선정되기만 하면 운영할 수 있는 공간이 아니라는 점이다.


서울아트시네마가 지난 7년간 해온 사업을 되살펴 볼 필요도 없이, 이제껏 우리들이 보아온 시네마테크는 비록 시네마테크 프랑세즈처럼 방대한 아카이브를 구성하지는 못했을지라도 그간의 프로그램과 상영실적에 있어 시네필의 욕구를 충족시키려 무던히 애써왔다. 또한 고전 걸작의 상영에 그치지 않고 젊고 역량 있는 작가들을 소개하고 지원해왔으며 교육기관과의 연대를 통한 고품격 영화문화의 창달에도 힘써왔다. 그렇게 7년의 세월을 통해서 뿌리내린 시네마테크의 친구들은 지금도 한국영화의 중심으로 활약하고 있다. 때문에 오직 서울아트시네마만이 시네마테크의 주체이고 이것이 이 논란의 부질없음을 증명하는 이유가 된다.

문화예술이란 것이 정권에 따라 부침을 겪는 것도 사실이다. 지난 10년의 진보정권 시절 보수ㆍ우익 예술인이 상대적으로 소외 받은 것은 사실이다. 그렇지만 좌우 이념 논쟁을 부추기는 언론플레이로 ‘실리’를 챙기겠다는 ‘꼼수’를 부렸던 이들이 시네마테크전용관 사업까지 노린다면 그것은 시대착오적인 생각이다. 무엇보다 영화계에 발붙이고 있는 이들이 행할 도리가 아니다. 빛의 속도로 변화하는 관객의 욕구에 부합할 만한 영화를 찍을 자신이 없으니까, 뱃속 편하게 고전영화나 틀면서 추억에 젖겠다는 건가? 정권이 바뀌었다고 세월까지 되돌릴 수는 없는 노릇이고 문화헤게모니는 그런 경로로 이동하는 것이 아니다. 정말로 한국영화가 걱정스럽고 한국영화 발전에 기여하고 싶다면, 빈약한 논리로 한 풀이를 도모하기 이전에 영화를 찍는 것이 순서일 것이다. 모름지기 감독이란 영화로 말을 해야 하지 않나? 그럼에도 허황된 욕심이 피워내는 고약하고 불온한 냄새가 진동하니 그래서 노탐(老貪)이라고 하는 거다.


영화광이라면 저마다 자신의 영화적 고향 또는 모태로 삼은 공간이 있을 것이다. 70.80년대의 영화광들이 프랑스문화원과 독일문화원을 거점삼아 영화의 사회성을 고민했다면, 90년대의 영화광들은 문화학교서울(현재의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영화를 터득했고, 이후 세대들은 시네코아를 비롯한 다양한 예술영화전용관을 두루 섭렵하면서 자신의 영화적 소양을 쌓아왔다. 그래서 누군가는 “나는 시네마테크에서 영화를 배웠다”라고 말을 하기도 한다. 이처럼 서울아트시네마는 단순한 영화관이 아니다. 사당동에서 소격동을 거쳐 오늘에 이르기까지 숱한 영화지망생들이 꿈을 키워온 성소(聖所)에 다름 아닌 곳이다. 비록 당연하게 여겨졌던 것들이 손바닥 뒤집히듯 바뀌는 격변의 시기일지라도 시네마테크전용관사업의 주체만큼은 특정집단의 입김과 이념의 제물로 전락해서는 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따라서 영진위의 시네마테크전용관 사업자 공모 계획은 전면 백지화 되어야 한다.

시네마테크는 문화헤게모니의 거점이 아닌 문화유산이요 영화의 거처이고 기억의 장소이다. 이것이야말로 단순하지만 거대한 진실이다. 정녕, 문화관광체육부와 영화진흥위원회는 앙리 랑글루아를 시네마테크 프랑세즈 관장 직에서 해임했던 앙드레 말로의 전철을 밟겠다는 것인지, 지켜 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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