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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건영


천재가 사라진 자리에 남겨진 스타일인가?

웬만한 사람들은 다 보았고 두 번이나 본 사람도 심심치 않을 정도로 논쟁의 중심에 선 영화 <박쥐>를 이제 서야 보았다. 박찬욱으로 말하자면 ‘복수 삼부작’에 관한 글을 썼을 정도의 개인적으로 애정과 호감을 가진 감독 중 하나였고, 또 적지 않은 평자들이 ‘장난질’이 지나쳤다고 비판한 <친절한 금자씨>마저도 그간 한국영화에서 보기 드문 오프닝 신과 정교한 미장센을 이유삼아 호평의 대상에서 놓지 않은 인물이기도 하였다. 그런데 <박쥐>의 경우는 달랐다. 한마디로 실망스러웠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순간까지도 도무지 아무런 감정이 생기질 않았다는 것이 주된 이유인데, 그 배경은 간단하다. 영화에서 인간이 실종되었고, 자기복제마저 실패했으며 죽음을 너무 가볍게 다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그것은 박찬욱의 영화라는 점에 기인한다.

언제부터인지 몰라도, (아마도 박찬욱이 <올드보이>에서 보여준 이후가 아닐까 한다.) 극한의 이미지가 영화미학의 하나의 준거가 되고 있다. 이는 내러티브가 아닌 시각적 효과의 극대화에 의지한다는 점이 문제로 지적된다. <친절한 금자씨>에서 자기복제의 위태로운 전조를 보일 때까지도 이러한 경향이 현실이 될 거라 생각하진 않았다. 그러나 <박쥐>에 이르러 그것은 현실이 되었다. 망치로 이빨을 뽑고 상대의 머리를 깨부수는가 하면 가위로 혀까지 잘라 심장 약한 관객을 힘들게 만들었던 박찬욱의 영상미학. 박찬욱의 영화가 장도리로 머리를 내려치고 이빨을 뽑아서 칸의 그랑프리를 차지한 거라 생각한다면 대단한 오해다. 그러한 장면이 꼭 필요한 상황에 등장하면서 심리적, 정서적으로 잔혹함을 느끼게 한 드라마구조가 바닥에 깔려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그런데 정작 감독 자신이 서구의 관객이 열광한 영화적 근본을 너무 빨리 망각해버린 건 아닌지 모르겠다.

적어도 박찬욱의 영화라면 잔혹성이 선정성과 상징성 사이를 줄타기하며 인간 본성에 대한 성찰로 연결되는 과정을 통해 미학적 가치를 확보했어야 했다. 다시 말해 ‘이미지의 과잉’이 주인공들의 ‘내부 과잉’과 균형을 이뤄야 하고, 박찬욱이라면 이 정도는 능히 해낼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박쥐>는 시각적 물리적 잔혹성 수준에 머문 영화가 되고 말았다. 심리적 정서적 잔혹성에 충실해야 한다는 대명제를 외면한 채 오로지 잔혹함과 유희 사이에서 키치적 감성으로만 승부하려는 우를 범해버린 것이다. 혹자는 상현과 태주의 대극으로 라 여사로 상징되는 부르주아 집단을 놓음으로써 계급성을 고수한다는 말로 박찬욱의 화법을 옹호하지만, 그런 이들이라면 클로드 샤브롤의 <의식>에서 잔느와 소피에게 일가족이 몰살당하는 장면을 먼저 보아야 할 것이다.

또 다른 문제는 영화에 인간이 실종되었다는 점이다. 흡혈귀가 된 상현과 태주는 물론이고 라 여사와 강우, 그의 마작 동료들 역시 사람다움을 갖추지 못한 이들이다. 거칠게 말하자면 <박쥐>에서 사람이라 불릴 만한 이는 찾아보기 드물다는 것이다. 이는 죽음을 가볍게 대하는 태도에서 비롯된다.

사실 영화 초반 순교와 자살을 혼동하지 말라는 의사의 충고를 듣는 순간까지만 해도, 삶과 죽음, 성과 속의 꽤나 진중한 드라마로 흘러가지 않을까 기대했었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한 대사에 불과했다. 그러니 순교는커녕 살인을 일삼다가 끝내 자살로 마감하는 불꽃같은 삶, 그 틈새에 로맨스가 스며들었다고 해서 이것을 B급 멜로드라마의 코드라 오인해서는 안 된다. 순교를 이루지 못하고 흡혈귀가 되었기 때문에 자살로 생을 마감할 수밖에 없다는 식으로 죽음을 낭만적으로 미화시키지 말란 얘기다. 대체 낭만적 죽음이란 게 있기나 한다는 말인가. 거칠게 말해 <박쥐>의 마지막 장면은 노을 진 바닷가를 배경으로 클라렌스와 알라바마를 앉혀놓은 <트루 로맨스>의 엔딩 신을 뒤집어놓은 것에 불과하다.

대체로 <박쥐>에서 관객에게 웃음을 선사하는 지점은, 죽음의 이미지가 비추는 장면들이다. 예컨대 상현은 “인터넷 자살사이트 사람들을 찾아 그들을 도와주면서” 흡혈을 한다는 말로 자신의 행위가 태주의 살인과는 격이 다르다고 주장한다. 그 지점에서 관객은 폭소를 터뜨린다. 박찬욱 특유의 유머가 빛을 발하는 순간인가? 그러나 제 아무리 장르를 비틀고 전복시키고 이종교배를 단행할지라도 삶과 죽음을 다룸에 있어 최소한의 엄숙함은 유지되어야 한다(고 나는 믿는다.) 적어도 죽음이란 희희낙락거리면서 논할 정도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쥐>에 드러나는 죽음은 단순한 흡혈의 결과로 전락할 뿐이다. 상현과 태주의 흡혈은 생존의 문제도 아니고 순교의 때를 기다리기 위한 것도 아니요, 오로지 그들의 욕망을 지속시키기 위한 유희에 다름 아니라는 것이다. 한 인간의 숭고한 죽음이 아닌 죽어 마땅한 인물의 객체화. 이는 박찬욱이 즐겨 쓰던 수법인 동시에 논란을 피해하기 위해 영리하게 사용된 기제의 다른 이름이다.

생명의 탄생은 인간의 의지로 억제할 수 있지만 죽음은 인간 의지 밖의 영역이고 그래서 죽음은 탄생보다 인간적이면서 방법과 행태에 있어 탄력적이다. 때문에 많은 예술 분야에서 그래왔듯이 탄생은 하나의 아이콘으로 고착된 반면 죽음은 그것을 다루는 작가에 따라 다양한 이미지로 변형되거나 심하게는 풍자의 대상으로까지 다루어지곤 했다. 그런데 <박쥐>에서 박찬욱은 넘어선 안 될 선을 보란 듯이 넘어가버린다. 그것들을 희석시키기 위한 현란한 미장센을 가림막 삼아서 말이다. 무릎으로 박박 기면서 포월(匍越)까지는 아니라도 좀 더 조심스럽게 넘을 수는 없었을까?


<싸이보그지만 괜찮아>가 나왔을 때, 김영진 평론가의 주관으로 황진미와 박찬욱이 격론을 벌인 일을 기억해보자. 이름조차 반가운 『필름2.0』의 특집기획이었는데, 나름 까칠하게 조목조목 물고 늘어졌음에도, 이 대담은 황진미의 영화적 안목의 한계와 비평적 자산의 빈곤함을 실토하는 엉뚱한 결과를 낳고 말았다. 황진미가 박찬욱을 상대한다는 것 자체가 무리였고 수읽기에서 비교가 되질 않았다는 것이다. 느닷없이 지나간 얘기를 끄집어낸 이유는 <박쥐>를 두고 호불호가 갈리는 이 상황을 박찬욱은 어떻게 느끼고 있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가 이 상황을 천천히 느긋하게 즐기고 있을지 어떨지 알 수 없는 노릇이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제 아무리 비판과 비난에 악평을 쏟아낸다고 한들 박찬욱의 영화화법이 쉽사리 변할 것 같지는 않아 보인다. 그것이 그의 스타일이고, 감독에게 스타일이란 필요에 따라 갈아입을 수 있는 옷이 아닌 피부와도 같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박찬욱이 개별적 비평에 일희일비할 인물은 아닐 테니까 말이다.

영화에는 메시지와 메타포, 이미지가 있다. 그것들은 영화 밖 세계관과 상호 영향을 주고받는다. 세계관이 불안정할 때 재현된 삶은 온전하게 설득력을 얻기 힘들다. 거듭 말하지만, 모름지기 분출하는 힘을 붙잡아 절제미를 구하는 사람만이, 어떤 참혹한 상황일지라도 인간에 대한 애정이 깃든 작품을 만들 수 있는 사람만이 대가의 반열에 오를 수 있다. 위대한 작품은 이성이 분별없는 환상을 누르고, 형식이 소재를 누르며, 천국이 지옥을 누른다. 여전히 박찬욱의 영화는 관심의 대상이고 흥미롭지만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그것들에 대한 총체적 판단을 유보한 채 다음 작품을 기다리는 일일 테다. 천재가 죽으면 스타일이 남고, 시대성이 사라지면 풍속만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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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blog.naver.com/amireal BlogIcon Kei  수정/삭제  댓글쓰기

    묵은 글에 묵은 리플 하나 남겨 봅니다.

    글을 읽어나가는 도중에 "적어도 죽음이란 희희낙락거리면서 논할 정도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라는 말씀이 눈에 들어오더군요.
    반대로 저는 죽음을 희희낙락거리면서 장난질을 쳐대는 그게 너무 재미있었는데 말입니다 ^^

    박찬욱에게 우리는 너무 많은걸 기대하고 있었는지도 몰라요,
    그를 참 좋아하고, 그의 영화를 참 좋아하지만 세계적인 거장이라고 칭송받을 정도의 위치는 아니라고 생각하거든요. (박찬욱 감독도 그런 부분을 스스로도 억울해하는거 같고.. 좀 즐기는거 같기도 하고..)

    어쨌든, 거장이 아닌데 마치 거장인양 포장된 박찬욱의 껍데기를 벗겨놓고 생각한다면, 박쥐는 그의 씁쓸한 유머가 제대로 기능한 몇 안되는 영화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좋은 글 감사하게 잘 읽고 갑니다.

    2009.11.14 12:18

박찬욱의 [복수 삼부작] 다시 읽기

필진 리뷰 2009.04.22 10:04 Posted by woodyh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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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건영

프롤로그

폭력이 준동하는 인간 내면의 욕망 속에 사회적 불신과 냉소를 가득 채워놓은 박찬욱의 ‘복수 삼부작’이 대단원의 막을 내린지도 4년의 세월이 흘렀다. 각각의 작품에서 보여준 한국영화사에서 그 유래를 찾기 힘들 정도로 전편에 넘쳐나는 비장함과 유려한 미장센은 박찬욱을 미래의 거장으로 올려놓기에 충분해보였다. 그러나 이어 내놓은 2006년작 <싸이보그지만 괜찮아>의 상업적 실패는 천하의 박찬욱도 관객과 평단의 칼바람 앞에서 안전할 수 없음을 확인시켜주었다. 혹자는 쉬어가는 영화가 아니었냐고 반문해댔으나, 감독에게 쉬어가는 영화란 게 어디 있으며 그렇게 영화를 찍는 작가가 있을라고. 모름지기 천재가 사라지면 스타일만 남고, 시대정신이 사라지면 풍속만 남는 법이라지만 박찬욱의 경우는 어느 한쪽도 잃지 않고 후일을 도모해왔다는 점에서 기대감을 배가시키기 충분했다. 그리고 다시 3년, <공동경비구역 JSA> 당시 기획한 10년 숙원의 프로젝트 <박쥐>가 드디어 그 베일을 벗었다. 감독 스스로 “내 영화 중 최고”라고 자긍심을 드러낼 정도이고 보면 영화에 대한 기대감은 한층 커질 수밖에 없을 터. 벌써부터 ‘한국영화의 구원투수’ 라는 식상한 용어로 덧칠된 박찬욱의 컴백 기사가 넘쳐나는 이즈음, 오히려 지금이야 말로 ‘복수 삼부작’을 복기해보는 절호의 시점이 아닐까, 하는 마음이다.


바그너와 박찬욱 영화

바그너는 독일이 낳은 위대한 음악가이다. 그의 사유에는 게르만 전승이 깔려있고 낭만주의로 덧씌워진 무대연출에 비중을 뒀다는 점에서 여느 독일의 음악가들과 궤를 달리한다. 영화가 없던 19세기의 블록버스터는 바그너의 그랜드 오페라였다고 말하면 정확하다. 그러나 그의 음악이 나치즘과 선동정치의 준거가 되고 히틀러에게 영감과 불씨를 제공했다는 점에서 오늘날까지도 독일국민에게 껄끄러운 존재로 자리하고 있다. 한 때 바그너를 동경했다가 훗날 혹독한 비판을 가했던 니체 역시도 바그너의 음악 뒤에 숨겨진 선동과 지나친 인기의 위험성을 경고하곤 했다. 무엇보다 바그너에게서 문제 삼았던 것은 ‘데카당스의 문제’였다. 즉 삶의 요소가 줄어들고 거대한 피로감이 몰려오는 것, 헌신과 잔인함과 인위적인 순결함이 합치되는 현상에서 삶과 사랑의 에너지를 누르고 이념과 순결을 따라갔다는 것이다.

나는 박찬욱 영화에서 바그너의 음악을 본다. 비록 바그너와 같은 이념의 추구는 없을지라도 의도하지 않은 컬트화가 낳은 세몰이식의 마니아를 양산했다는 점은 상당부분 유사하다. 바그너의 음악은 음악자체가 아니라 언어가 되고 도구가 된다. 동시에 작은 요소들로 디테일을 표시한다는 점에서 대단히 뛰어나다. 극소 공간 안에 감각과 그림자, 색, 스러져가는 빛의 은밀함 등을 표현하는 다채로움과 풍요로움에 있어 바그너를 따라갈 사람은 없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박찬욱의 영화는 시간이 갈수록 소도구를 이용한 절묘한 미장센을 만들어내고 있으며 디테일한 묘사와 테이크 간 연결기법은 정점에 오른 느낌이다. 하지만 미학적 기술적으로 따라올 자가 없다는 자신감의 과잉은 종종 모든 장면을 클라이맥스로 만드는 오류를 범하기도 한다. 이는 바그너의 음악이 종결부 없이 무한선율로 이어지는 것과 맥을 같이 한다. 그것은 하나의 주제에서 다음으로 넘어가고 모티브들이 한데 섞이는 방식을 말한다. 그러니까 전체를 유기적으로 조직하는데 필요한 분절 없이 작은 단위들이 모두 동일한 가치를 지닌다는 것이다. 이것이 데카당스 양식의 특성이다. 박찬욱이 의도했건 아니건 그의 영화는 바그너의 음악양식과 닮아 있다.

거칠게 말하자면 바그너의 음악은 언뜻 왕의 진수성찬 같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영리한 주인이 손님에게 제공하는 경제적인 만찬일 뿐이다. 이처럼 최소 비용으로 제후의 밥상을 모방하는 재주, 그것은 몇 번은 배가 부르겠으나 과시적인 메뉴는 식상하기 쉽다는 단점이 있다. 박찬욱의 영화가 넘어야 할 산이 있다면, 바로 이것이다. 자기복제를 피하고 관습과 형식미의 절제를 통한 적절한 변주만이 그의 영화를 사랑하는 이들에게 끊임없이 에너지를 제공하는 길이 될 것이며 한국영화계를 위해서도 바람직한 일일 것이다.



불신과 냉소


박찬욱은 자신의 영화를 통해서 반사회 반인류적 대상의 공멸을 통한 사회냉소주의와 인간혐오주의를 내보여온 감독이다. 그것은 차가운 냉소주의적 기류 속에서 사회를 움직이는 불건전한 논리를 머리로만 인식하면서, 가슴을 훈훈하게 만드는 온정주의적 인간의 실종을 목도하게 만든다. 이는 B급 영화정신으로 무장된 그의 영화적 사유와 평론가 시절부터 보여준 주류영화계에 대한 미온적 태도와도 무관치 않다. 이미 <복수는 나의 것>을 통해서 노동자계급과 자본가의 갈등을 드러냈고 장기밀매와 동진의 딸을 유괴하는 과정 속에서 거짓과 가식으로 얼룩진 온정주의가 아닌 진심이 담긴 온정주의적 인간의 실종을 보여주면서 ‘진정한 온정주의’, 그런 건 이 세상에 없다고 단언했던 감독이었다. 그는 <친절한 금자씨>에서도 사회구조에 대한 불신과 냉소를 가득 담아내고 있는데, 이를테면 유괴당시 미온적 태도를 보였으나 복수의 적극적 가담자로 탈바꿈시켜놓은 형사와 마음속으로는 복수를 준비하면서도 거룩한 얼굴로 참회기도를 하는 금자의 모습과 왜곡된 욕망으로 가득 찬 전도사를 통해 한 치의 오차 없이 인간의 이율배반적 본질을 까발리기게 이른다. 이처럼 감독은 불온한 욕망으로 가득 찬 성직자와 공적의무를 상실한 형사의 모습을 통해 사회의 법과 규범에 대한 조롱을 한껏 퍼붓고 있다.

<복수는 나의 것>에서 장기 판매업자들은 류를 속여 그 누이를 죽게 했기에 류에게 죽임을 당한다. 그리고 류에게 신장을 먹혀버린다. 류와 영미는 유괴를 했기에 아이의 아비에게 죽임을 당하고 그 아비는 노동자를 착취한 자본가이기에 노동자들에게 살해당한다. 이같이 박찬욱 영화에 나오는 인물들은 미시적으로는 무죄이나 거시적으로는 모두 유죄인 자들이다. 때문에 그들은 사회적 관계 안에서는 필연적으로 유죄가 될 수밖에 없다. <올드 보이>에서 ‘웃어라. 세상이 너와 함께 웃을 것이다. 울어라. 너 혼자 울게 될 것이다’라는 말이나, ‘모래알이나 바윗돌이나 가라앉기는 마찬가지’라는 말은 인간이 불가항력적으로 사회적 관계를 수용할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암시한다. 이는 박찬욱 영화 속 사회적 불신과 냉소주의를 이해하는 첩경이 된다.

박찬욱은 그의 영화 속에서 사회적 관계를 인간의 존재 조건으로 받아들이곤 했다. 인물들은 모두 관계 속에서 숨 쉬고, 그 관계는 개인의 의도나 의지와 상관없이 얽히고 충돌한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무의미한 말이나 행동, 선의에서 비롯된 악행도 결과적으로 죄악이 될 수 있으며 아무리 평범한 사람도 <올드 보이>의 오대수처럼 ‘악행의 자서전’을 대여섯 권 쓰는 일이 가능하게 됨을 말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완강하게도, 그리고 냉정하게도 박찬욱은 사회적 관계 속에서 ‘짐승만도 못한 놈의 살 권리’는 인정하지 않는다. 이것이 박찬욱의 영화가 여타 스릴러나 복수극과의 차별을 이루는 지점이다.


유괴 혹은 납치에 스며든 자본주의

박찬욱의 복수 3부작에 어김없이 등장하는 소재는 ‘유괴와 납치’이다. 먼저 그리스 신화를 잠시 살펴보자. 추수의 여신 데메테르에게는 하나 뿐인 딸인 봄의 여신 페르세포네가 있었다. 명부의 신 하데스가 그녀를 칠흑처럼 검은 수레에 태워 지하세계로 데려간다. 데메테르가 아흐레 동안 슬피 울다가 태양을 만나고서야 진상을 알게 되었고 제우스의 도움을 빌어 간신히 딸을 지상으로 데려왔다. 이미 명부의 흙을 먹은 그녀는 1년 중 4개월은 어둠 속에서 지내야 한다. 어둠을 이기고 지상으로 올라오는 그녀는 사람들에게 경외감 자체였다. 바야흐로 봄의 시작이다. 이렇듯 계절의 순환을 이야기하는 메타포의 시작은 유괴와 납치에서 비롯된다.

의심할 바 없이 <친절한 금자씨>는 개인적 원한을 복수의 파노라마 속에서 펼쳐내는 영화이고, 그 사건의 발단은 유괴이다. 복수 3부작 속 인물들은 저마다 개인적 복수나 이기적 욕망을 유괴와 납치 감금을 통해서 해소하고 있다. 하지만 영화마다 등장하는 유괴와 납치는 양태와 목적에서 차이를 보인다. 예컨대 <복수는 나의 것>의 류와 영미가 동진의 딸을 유괴하는 것은 자본주의 메커니즘에 대한 원초적 불신과 악순환의 고리를 재촉하는 행위였다. 다만 자신의 신장을 강탈당해 누나의 수술이 막연해진 노동자 빈곤계층이 유괴를 통해 수술비를 마련하려 했다는 것은 (영미의 입을 통한) ‘좋은 유괴’와 ‘나쁜 유괴’의 자기합리화를 가능케 한다는 점에서 박찬욱의 영민함이 빛나는 대목이다. 그러니까 유괴범의 행위 자체는 용서할 수 없으나 심정적으로 동정할 만한 여지를 남겨놓음으로써 유괴가 가져오는 공멸의 기운 속에서 양가성(兩價性)을 함유하고 있는 것이다. 반면에 <올드 보이>속 오대수의 납치 감금은 이우진의 경제력이 사적 복수의 수단으로 사용된다는 점에서 차이를 보인다. 이렇게 자본주의가 낳은 경제력은 <복수는 나의 것>에서 유괴의 동기가 되지만, <올드 보이>에 이르면 납치 감금의 수단으로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친절한 금자씨>의 유괴는 애초에 백 선생이 아이들을 싫어했다는 금자의 설명을 통해서 부의 축적을 위한 동기 말고는 어떠한 이유로도 해석되기 힘들다. 이것은 <친절한 금자씨>가 <복수는 나의 것>의 유괴와는 다른 차원에서 읽혀져야 하며, 배금주의의 병폐가 만연된 당대의 현실과도 무관치 않은 이유가 된다. 결국 <친절한 금자씨>속 유괴는 앞선 두 편의 중간쯤에 놓이는 안전주의 노선을 택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금자의 복수극을 통해서 무사히 안착하며 백 선생 납치 역시 ‘사필귀정’이라는 단어 안에서 어떠한 제제도 받지 않고 암묵적 동조를 얻어내기에 이른다.


감사와 은덕의 Bella Vendetta

르네상스시대의 복수는 언제나 고민의 여지를 남겨놓곤 했다. 그것은 ‘인간 자신의 힘으로 행할 것이냐, 신의 섭리에 맡기고 울분을 참고 견딜 것이냐’의 고민이었다. 근세가 도래하고 법과 규범이 등장할 때 까지 그 역할은 제사장이나 성직자들이 대리해왔다. 그런데 복수의 심판주체가 인간이냐 신이냐의 문제는 결말의 확연한 차이를 가져온다. 인간이 심판하고 복수할 때 그것은 살인을 불러오며 그것으로 인해 자신 역시 복수의 대상이 된다는 점에서 복수의 연쇄고리에서 벗어나기 힘들기 때문이다. <복수는 나의 것>의 장기강탈과 유괴가 불러온 복수의 순환 고리는 인간의 복수가 갖는 한계를 극명히 보여준다. 하지만 복수란 것이 사회적 갈등의 해소 차원에서 보면 현실은 그리 간단치가 않다. 이때 개입하는 것이 샤머니즘이다. 사회적 지위가 낮거나 소극적일 수록 죽어서 복수하는 형태를 잠재우는 방식으로서의 샤머니즘. 말하자면 무속의 힘을 빌린 복수극이 공포영화의 소재로 자주 등장하는 것은 여기에서 비롯된다. <올드 보이> 역시 심령술사를 동원해 오대수의 기억을 조작하는 복수의 단편을 보여주는 반면, <친절한 금자씨>의 복수극은 조금 다른 방향으로 변형되기 이른다.

박찬욱의 삼부작을 관통하는 ‘복수’라는 단어를 단순하게 접근해서는 숲 만보고 나무를 지나치는 우를 범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이탈리아인들의 오랜 관습으로 자리한 복수방식은 하나의 징표가 된다. <친절한 금자씨>의 이금자는 13년 전 사건으로 13년간 복역하는 동안, 교도소에서 자신의 동조자를 하나 둘 씩 만드는 동시에 자신의 복수를 치밀하게 기획한다. 그녀가 간증하거나, 정상인은 이해하기 힘든 친절함으로 재소자를 감화시키는 동안 자신의 행동을 비웃는 사람까지도 자기편으로 만드는 수준까지 도달하게 되는데, 이는 자기가 당한 부당함을 기억하는 사람일 수 록 자기가 받은 은덕을 더 깊고 오래 기억하기 때문이다. 감독은 금자의 대극적 이미지로 뚱뚱한 죄수 마녀를 배치함으로써 조력자로서의 명분을 제공하고 있다. 살인을 저지른 창녀와 꽃뱀과 은행 강도였던 이들이 하나 둘씩 금자의 복수극에 참여하는 것은 금자의 친절함과 대비되는 마녀의 폭력적 행동에 대한 반발 심리이자 금자에 대한 보답이다. 따라서 복수욕의 정당화를 위한 금자의 친절과 베풂의 나날은 이탈리아인들의 복수 방식인 ‘벨라 벤데타 (Bella Vendetta)’와 절묘하게 상통한다. 금자라면 자신의 출소까지 기다리지 않더라도 얼마든지 복수가 가능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오래도록 복수를 미루는 까닭은 좋은 복수(벨라 벤데타)란 오랫동안 기다려온 모든 상황들이 맞아 떨어져야 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복수욕의 정당화를 위해선 이에 상응하는 감사와 미덕이 있음을 입증해야하는 영화적 스토리의 개연성과 무관치 않다. 많은 평자들이 의문을 품었듯이 <친절한 금자씨>가 복수극 3부작의 완성치고는 싱거운 감이 없지 않은 것은 이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이상적 복수의 완성

<친절한 금자씨>에서 금자는 백 선생을 어느 폐교에 가둔다. 그리고는 법과 인간의 감정 사이에서 갈등하는 유괴아동의 가족들을 불러내 동참하게 함으로써 성대한 복수의식을 치른다. 바야흐로 개인의 복수가 공공의 복수로, 사적 감정이 공적응징으로, 죄인에게 조차 보장되어야 할 인간의 존엄성이 짐승만도 못한 놈의 살 권리의 실종으로 바뀌는 순간이다. 이 과정에서 박찬욱은 인간 내면에 숨겨진 폭력성을 본격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하는데, 이때 감독은 피해자 가족의 잔인한 응징이 연상되는 장면마다 시점의 전환을 통해 잔혹성의 논란을 피해가는 영리한 연출을 시도한다. 이를테면 백 선생에 대한 유괴아동 가족들의 복수장면에는 가해 장면의 직접적 표현 대신 결과만을 보여주고 있으며, 무수한 응징을 당했음에도 마지막 까지 백 선생을 살려두는 설정이 그러하다. 이유는 영화적 시점(백 선생의 시점이 아닌, 가해자의 시점)의 차이 때문이다. 즉, 가족들의 원한이 너무도 크다보니 백 선생이 받는 고통의 무게가 상대적으로 작아 보여야 하고, 마지막 응징자가 들어갈 때 까지 그의 목숨은 붙어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유괴아동의 가족이 하나 둘씩 들어가 사적인 복수를 거행하는 동안 그들 손에 들려진 무기는 각양각색이지만, 이 부분에서도 응징도구를 통한 힘의 논리가 포착되고 있다. 그들 대부분이 칼을 들고 있던데 반해, 가장 형편이 어려운 부부에게는 가장 큰 무기(도끼)를 들려줬고, 상대적으로 가장 부유해 보이지만 노쇠한 할머니에게는 작은 가위를 주었을 뿐이다. 그럼에도 백 선생을 절멸시키고 직접사인을 제공하는 것이 마지막으로 들어간 할머니의 가위였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것은 자본가 또는 부르주아의 모습에 나약한 육체를 가진 노파에게 최종응징을 허락한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백 선생이 아이들의 몸값으로 받은 돈을 축재의 수단으로 사용한 부르주아라는 점에서 보자면, 반인륜적 범죄를 저지른 대가로 획득한 부의 종말은 동질의 부유층인 할머니의 손에서 결말지어 져야 마땅하다고 감독은 생각했는지 모른다. 만약 빈곤층의 열등감과 분노가 과잉 표출된 응징의 결과로 백 선생이 죽었다면 아마도 이 장면을 참아내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영리하게도 박찬욱은 자본가의 손으로 절멸시키고는 자본가의 종말을 목도케 함으로써 자신이 일관되게 추구해온 사회적 불신과 B급 영화의 정신을 합일 시키고 있는 것이다.


힘의 구도 재편

아울러 <친절한 금자씨>가 남성위주의 복수극에서 탈피해 여성의 복수극으로 변형되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복수는 나의 것>과 <올드 보이>에서의 남성은 피해자인 동시에 가해자의 모습이었던 반면 여성은 순수한 피해자로만 그려졌다. 류의 누나, 동진의 딸, 우진의 누나와 대수의 딸이 모두 피해자인 여성을 대변하고 있었다. 게다가 근친의 집착을 통한 금기시된 사랑을 내포하면서 ‘하지 말아야 할 것’에 대한 벽을 넘어서려는 위험한 시도를 병행해왔다. 그러나 <친절한 금자씨>에 이르러 박찬욱은 강하고 카리스마 넘치는 금자에 비해 너무도 가냘프고 여성적인 모습의 남성을 만들어낸다. 그것은 박찬욱 영화 속 어디에도 존재 하지 않던 남성의 모습이었다. 비록 비열하고 내면적 열등의식으로 가득 찬 인간이었을지언정 박찬욱의 남성은 마초의 광포함을 공공연하게 드러내곤 했기 때문이다. 결국 폭력의 과잉으로 얼룩진 남성성의 허영을 조롱하는 도구로 여성성과 남성성의 역할변경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절묘한 타협과 해결책이 찾아낸 독특한 변주

한국형 하드보일드 고어영화의 효시를 이룬 <복수는 나의 것>에서 보여준 계급 간 갈등이 빚어낸 공멸하는 인간의 모습은, 박찬욱식 냉소주의와 맞물려 대단한 반향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또한 상업적으로 성공했던 <올드 보이>는 대답과 함께 질문을 찾아야 하고, 반전의 속임수를 끊임없이 읽어내야 하며, 충돌과 어긋남에서 비롯되는 아이러니를 분석해야 하는 영리한 영화였다. 그러나 <친절한 금자씨>는 표면적으로 현란해 보이는 구성, 구도, 장치, 심지어 화려한 소품에 이르기까지, <올드 보이>와는 사뭇 다른 기교와 작법으로 완성시킨 영화이다. 딸과 함께 접어든 골목길의 눈 내리는 장면 등의 스타일리시한 영상은 이명세의 냄새가 진동하고, 일정한 무게감 없이 시퀀스마다 파편을 이어붙인 것 같은 내러티브는 잔혹복수극을 기대한 관객 앞에 컬러풀한 블랙코미디로 화답한다. 한마디로 <복수는 나의 것>과 <올드 보이>의 경계를 넘나들며 관객과 평단의 입맛을 맞출 줄 아는 영민한 감각과, 철저하게 기획된 소품과 세트가 주는 매력이 장르적 관습과 전작의 변주를 통해서 허허실실 구동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차라리 콜라주에 가깝고 역하거나 불편하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친절한 것과는 거리를 달리한다. 이렇게 볼 때 <친절한 금자씨>는 부분은 뛰어나나 전체가 부분을 넘지 못하는 독특한 실험의 결과물처럼 보인다. 요컨대 이우진이 실패한 길에서 절묘한 타협과 해결책을 찾은 이금자의 복수극이 <친절한 금자씨>이다.


에필로그

시간이 흐를수록 성숙한 모습과 영혼의 깊이를 지닌 균형 잡힌 화법으로의 변화를 모색해왔다는 점에서 박찬욱은 여전히 독보적 위치를 점하는 감독임에 틀림없다. 그의 영화는 언제나 인간을 향했으며 관계와 사회문제를 제기하는 데 뒤쳐짐이 없었다. 사실 이것은 매우 중요하다. 한 편의 영화를 통해 문제를 제기하는 감독이 있는 반면 남이 제기한 문제를 환기하는 데 그치는 감독도 있고 더러는 돌출된 문제를 절묘하게 포착해 해답만 내놓는 감독도 있기 때문이다. 과연 <박쥐>가 ‘복수 삼부작’을 능가하는 새로운 영화문법을 보여줄지, 뱀파이어라는 소재가 사회문화적으로 어떤 파장을 몰고 올지는 아직 미지수이다. 각종 수사를 보탠 언론의 호들갑이 마뜩치는 않지만, 박찬욱의 영화가 지닌 고유의 힘과 스타일만으로도, 그 이름 석 자만으로도 아드레날린이 샘솟는 것은 부정할 수 없으니 극장으로 가서 눈으로 확인할 밖에. 드디어! <박쥐>가 날개 짓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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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군가 쓰지 않을까 싶었던 글을 쓰셨군요.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박찬욱 감독의 영화는 '영화' 자체를 연구해서 만든다는 느낌이 강하게 듭니다.
    워낙 공부도 많이하고, 작품도 많이 보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그냥 보는게 아니라 자신이 만들 영화에 흡수시켜 반죽하고 자신이 원하는 것, 보여주고 싶은 것을 만드는 재능이 뛰어난 사람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박쥐는 정말...기대 만빵

    2009.04.23 14:04 신고

신태균



 


예전에 무슨 바람이 들어서였는지 소설 비슷한 글을 아주 어설프게 써서 올렸던 적이 있었다. 인터넷 문학사이트에 연재를 해보려다 사람들 반응이 없어서 딸랑 1회 연재에 그치고 만 불발탄인지라 확실한 장르를 구분 짓기에도 민망할 정도의 형편없는 글이었더랬다. 분명 머리 속에는 기가 막힌 로맨스 소설 한번 써내서 읽는 사람들의 가슴을 뒤흔들어 보겠다는 야심 찬 그림이 완성되어 있었는데 그것이 문자의 형태로 배출되어 나오니 영 허전하기 그지 없는 것이다. 하긴, 처음부터 걸작을 마구 양산해내는 예술가가 어디 있을까? 제 아무리 위대한 천재에 대가라 할지라도 때로는 습작을 찍어내기도 하고 실패를 경험하기도 하는 법이다. 그렇게 완성의 단계에 한발자국씩 다가서다가 성공작도 탄생하고 걸작도 만들어지게 되는 것일 터. 우리가 보아온 예술과 문화의 위대한 유산들은 결국 무수한 습작과 실패의 토대 위에서 이뤄진 것 아니겠는가? 만약에 내가 글쟁이로 이름을 알리게 되는 상황이 벌어지게 된다면 과거에 썼던 저 소설 비슷한 요상한 글도 완성을 향한 무수한 시도의 기록 중 하나로 나름의 가치를 지니게 될지 모를 일이다.


누구나 현재를 중요하게 여긴다. 바로 ‘지금’이 있어야 미래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나온 과거 없이는 현재도 존재할 수 없다. 몇 백만 명의 관객동원, 수십, 수백만 달러에 달하는 해외 수출 및 판권계약들, 거기에 이름난 해외 영화제에서의 수상경력까지. 많은 이들이 현재, 혹은 비교적 근래에 거둬온 한국영화의 성과들에 주목하고 있다. 그러나 정작 그렇게 되기까지의 과정에는 무심하다. 한국 영화는 너무도 빨리 과거의 유산들을 잃어버렸다. 오래된 고전들 뿐만이 아니다. 지금 이 순간도 현역으로 활동하고 있는 어느 중견감독의 데뷔작이 소리 소문 없이 자취를 감추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 식으로 찾기 어렵게 된 영화 중에 박찬욱 감독의 초기작 두 편이 있다. 물론 그의 이름을 대중에 널리 알린 것은 [공동경비구역 JSA]이지만 오직 성공작만이 예술가의 이력에 대해 말해주는 것은 아니다. 깐느 영화제 심사위원 대상 수상 이후 TV 광고에 나와 ‘나는 나를 뛰어넘었다’고 자신 있게 말하던 그 감독의 다소 서툴렀던 초창기를 목도한다는 재미도 그렇거니와 대한민국 영화광 세대의 대변자가 어떻게 감독으로 단련되어 왔는지를 가늠할 수 있는 지표로써도 저 두 편의 영화는 충분한 가치를 지닌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영화는 우리의 첫사랑이었다, [달은 해가 꾸는 꿈]

[달은 해가 꾸는 꿈]은 여러모로 민망한 습작 수준에 그치고 만 나의 유일무이한 소설을 연상시키는 영화이다. 내 글이 그러했듯 박찬욱의 데뷔작도 머리 속의 설계도는 옹골차나 그것을 매만지는 손길은 아직 덜 여물어 있었다. [복수는 나의 것]과 [올드보이]에서처럼 화면을 꽉 채워 나가는 박찬욱의 스타일은 아직 태동되기 전이었고 [공동경비구역 JSA]에서 처럼 관객을 쥐락펴락하는 상업영화 감독으로서의 정체성도 확립되어 있지 않은 상태였다. 말 그대로, 멋진 영화 한번 만들어 보겠다는 의욕은 넘쳐 났으나 연출력은 영 서툴렀다. 마음만 앞설 뿐 무엇을 어찌해야 할지 도통 감을 못 잡는 첫사랑 같은 그런 영화였다고나 할까? 송승환을 제외한 배우들의 연기는 영 심심하기 그지 없었으며 플롯은 갈팡질팡 하는 데다 영상은 애매모호한 이미지들로 가득했다. 여기에 배우 따로, 성우 따로의 후시 녹음이 주는 그 어처구니 없는 느낌이라니. 그러니까 지금에 와서 이 영화, [달은 해가 꾸는 꿈]을 본다는 것은 거물이 되어버린 스타 감독이 만들어낸 품절 직전의 데뷔작을 본다는 감흥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닐지도 모른다는 얘기다. 좀더 심하게 말하자면 이 영화는 당시 인기 상종가였던 가수의 인기에 영합한 이승철 뮤직 드라마라 불러도 무방하다 싶을 정도이다. 그러나 조악한 영화이긴 해도 [달은 해가 꾸는 꿈]에는 데뷔작에서만 맛볼 수 있는 울컥하는 감정이 스며있다. 아직은 미미했던 박찬욱 감독의 영화적 정체성을 보완해 주는 것은 이때부터 남다른 기미를 보였던 그만의 간담 서늘한 유머감각과 필름 곳곳에 스며든 영화라는 매체에 대한 애정 고백이다.

피투성이가 된 무훈을 구하기 위해 형 하영이 애타게 병원을 찾는 순간에 뜬금 없이 가축병원을 소개해주는 장면은 박찬욱이란 감독의 될성부른 떡잎을 알아볼 수 있는 에피소드이기도 하다. 데뷔작에서 느와르 풍의 B급 장르 영화를 표방하고 있긴 하지만 박찬욱은 특유의 비장미까지 받아들이지는 않는다. 가축병원의 침상에 누워 피를 토하며 죽어가는 무훈의 입에서 "인생은 정말 잔인해, 평생 개처럼 살아온 나를 이런 데서 죽게 하다니"라는 대사를 흘리게 함으로써 "개처럼 살기 보단 영웅처럼 죽고 싶다"라는 카피로 대변되던 홍콩 느와르 적 비장미에 카운터 펀치를 꽂아버리는 것이다. 거장들이 대를 이어 작성한 컨벤션에는 경의를, 그러나 그들이 묘사한 역사에는 냉소를 (박찬욱 저 "영화보기의 은밀한 매력 : 비디오 드롬" 128페이지에서 인용) 보내고자 하는 신예다운 패기라고나 할까. 물론 [달은 해가 꾸는 꿈]은 날카로운 기억만을 남기고 사라져버린 상처뿐인 첫사랑에 불과한 작품이다. 기록적인 흥행참패와 비평적으로도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했던 데뷔작에 관심을 기울이는 이 누가 있겠는가. 하지만 이 작품은 평생 단 한번뿐일지도 모를 애틋한 감정을 품고 있는 첫사랑, 첫경험이기도 하다. 머리 속을 떠돌기만 하다 손끝을 떠나버린 이미지로써의 영화에 대한 무한한 연정. 그 잡을 수 없는 감정에 대한 애틋함이 무훈과 하영 두 남자가 동시에 사랑한 은주라는 인물로 육화 되어 표현된다. 무훈의 장례식 이후 떠나버린 은주가 대중의 스타가 되었음이 하영의 나레이션을 통해 설명되는데 남몰래 그녀를 사랑했던 하영은 그저 은주의 이미지만 뒤쫓을 따름이다.

어느 어두운 극장 안. 무훈이 그러했듯 하영도 결코 오지 않을 여자를 기다린다. 스크린에 환영처럼 펼쳐지는 여인의 모습. 살포시 눈물 짓는 그녀. 끊임없이 복제를 거듭하는 허구의 이미지. 그리고 어둠 속에서 남몰래 바라보던 관음적 행위의 완성. 은근한 곁눈질과 카메라 렌즈를 통해서만 바라볼 수 있던 여인은 마침내 스크린 위의 천사가 되어 사진작가 하영 앞에 재림하게 되는 것이다. 하영은 비로서 바라보기만 할 뿐 만질 수는 없었던 여자 은주를 껴안는다. 그리고 그녀의 이미지가 투사되는 스크린에 손을 대고 그녀를 느끼기 위해 애쓴다. 이때 영사실을 향해 고개를 돌리는 하영의 얼굴 위로 나름대로 고뇌에 차서 데뷔작을 완성했을 신출내기 입봉 감독 박찬욱의 얼굴이 겹쳐진다. 당시의 그에게 있어 영화란 깨어지기 마련인 첫사랑, 결코 만질 수는 없었던 여인과 같은 존재가 아니었을까. 이후에 만든 영화들에 비한다면야 민망하기 그지 없는 작품이지만 이 영화가 흥미로운 건 여과되지 않은 채로 터져 나오는 서투른 감정들 때문이다. 다시 말해 [달은 해가 꾸는 꿈]은 자기만의 목소리를 찾지 못했던 신출내기가 쏘아 보낸 수취불명의 연애 편지이다. 그것은 메아리가 되어 울려 퍼지진 못했지만 어느 누구보다도 처절했던 외침이었다.


PLAY IT AGAIN CHAN WOOK – [삼인조]

[달은 해가 꾸는 꿈]이 이제 막 데뷔작을 찍은 영화광 세대의 대변자로서 그 특유의 감수성을 보여준다면 [삼인조]는 영화라는 매체와 그 속에서 섭취한 자양분을 통해 우리가 발 딛고 선 세상을 투시해 나가려는 보다 적극적인 시도를 보여준다. 박찬욱 감독은 [공동경비구역JSA]를 만들면서 메시지 전달을 위해 스타일을 버렸다고 했던 말한 바 있다. 그 말처럼 [삼인조]는 훗날 [복수는 나의 것], [올드보이], [친절한 금자씨]로 이어지게 될 그의 취향과 영화적 자양분에 더욱 가까이 다가서 있는 작품이다. 그것은 전형적인 B급 무비 스타일, 주류에서 소외된 아웃사이더 들이 이 사회에 반기를 들고 벌이는 강탈과 일탈의 도주를 테마로 한 갱스터의 외피를 두른 것을 뜻한다. 외형적 형태뿐 아니라 캐릭터들 또한 장르의 스테레오 타입을 대변하는 인물들로, 총기류를 탈취해 달아난 하드보일드 똘마니, 김민종은 전형적인 사회부적응 갱스터이고 가정에서 무시당하고 경제적 능력 조차 없는 이경영의 나른한 표정과 미지근한 태도는 (화끈한 김민종과 대비되어 더욱 수동적으로 보이는) 어딘가 필름 느와르의 주인공을 연상시키는 구석이 있다. 그리고 근친상간으로 나은 아이에 대한 모성을 보인 다는 점에서 [차이나 타운]의 페이 더너웨이를 연상시키는 정선경은 역시나 자신의 이익을 위해 두 남자를 이용하는 필름 느와르의 팜므파탈이다.

여기에 [고래사냥], [세상 밖으로] 등에서 등장했던 두 남자와 한 여자가 팀을 이루는 설정, 결정적인 순간에 흘러나와 묘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흘러간 우리 가요, 영화광적인 감수성이 엿보이는 인용과 전복의 오마쥬들. 결국 [삼인조]는 영화광의 애정으로 1990년대 후반에 재구성한 장르 탐방기로도 볼 수 있을 것이다. 비록 그것이 쿠엔틴 타란티노의 [저수지의 개들]에 비견될 혁명성과 파격성으로 치닫지는 못했지만 분명 [삼인조]에는 이야기꾼으로서 그리고 한국의 영화광 세대를 대변하는 인물로서 박찬욱의 특색들이 잘 드러나 있다. 물론 감독이 의도한 B급 무비적인 분위기에 적합한 매력을 발산한 배우들 또한 인상적이다. 김민종은 단순 무식하지만 때로는 가련하기도 한 문이라는 캐릭터를 맡아 배우인생 최고의 호연을 보여주며 이경영의 지치고 허무적인 연기와 정선경의 당찬 모습 또한 인상적으로 다가온다. 또 이 영화는 외형적인 면뿐 아니라 시대상을 드러내는 거울로써의 기능 또한 충실하다 할 수 있는데 그것은 바로 이 영화가 IMF 직전 위기에 처한 일종의 유사가족에 대해 이야기하는 작품이란 점에서 드러난다. 이들 세 인물은 하나같이 소외 당한 인물들이다.

안은 경제적으로 무능하고 아내에게도 무시당하며 마리아는 아버지에게 강간당한 아픔을 간직하고 있다. 그리고 문은 그나마 콩가루 같은 가정도 없는 고아이다. 가족의 의미가 퇴색되고 서서히 붕괴되는 시점에서 바로 그 붕괴에 의한 상처를 간직한 인물들이 다른 유대관계를 형성한다는 점에서 해피 엔딩을 예감할 수도 있지만 감독은 이러한 기대감마저 깡그리 부숴놓음으로써 가속되는 시대의 불안감을 표출해내고 있다. 애초에 문의 억지로 인해 이루어진 유사가족, 그리고 그 내부에서조차 불신이 횡행하니 오래 존속될 리 만무하다. 결국 안은 유사가족이 아닌 혈연으로 연결된 부권의 행사를 위해 떠나가고 남겨진 인물들은 붕괴 속의 붕괴, 소외 속의 소외라는 이중고를 맞는다. 신앙과 믿음의 상징인 성당이 바로 이 배반의 장소로 활용되는 것은 이래서 의미심장하다. 이에 반해 배반 혹은 비극의 장소로 활용되곤 했던 창고/폐공장은 남은 이들이 재결속을 다진 다는 의미에서 차라리 행복하다. 그 상태로 남아있는 자들의 유대만으로 결속을 이어갈 수 있다면 다행이련만 애초에 이름부터(문, 안, 마리아) 정체불명이었던 이들이니만큼 알 수 없는 운명의 풍랑에 내던져 지는 것 또한 숙명일터. 아이큐 80에 걸맞지 않는 기발한 방법으로 탈출에 성공하지만 문은 그가 여태껏 살아온 땅 위에 발 디디지도 못한 채 헬기 속에서 창공을 떠돌다 피를 흘리며 죽어가고 두 남자를 이용해 아이를 되찾고 살아보려 했던 마리아는 다시 아이를 찾을 수 있을지조차 불분명하게 된다.

그럼 이 유사가족을 붕괴시키고 부성애를 따라나선 안은 어떠한가? 우발적으로 결성되긴 했으되 나름의 신뢰가 있었던 유사가족을 붕괴시킨 그는 자신의 아내를 살해함으로써 친 가족마저 붕괴시킨다. 비록 자살을 기도하려는 순간에 그의 딸이 살아나긴 하지만 목에 줄을 건채 흔들리는 걸상에 몸을 의지한 위태로운 모습의 그가 딸을 제대로 지켜나가리라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을 장식하는 안의 위태위태한 모습은 분명 [석양의 무법자]에서 목에 줄이 걸린 채 블론디를 외쳐 부르는 투코의 모습에서 따온 것일 터. 허나 그 용도는 판이하게 다르다. 구해줄 이는 없고 까딱 잘못하면 목에 건 줄에 의해 질식사할지도 모르는 이 위기의 순간이 1990년대를 살아가는 아웃사이더의 자화상, 더 나아가 IMF로 붕괴되어버릴 빈민층 가정의 모습이었다고 한다면 너무 비약이 심한 것일까? 그러나 영화는 시대와 결부되어 해석되기 마련이고 박찬욱 감독이 추종하던 B급 영화는 단순히 대중의 통속적 취향만 쫓은 것이 아니라 그것을 향유하던 이들의 정서마저 대변하는 것이라 할 때 [삼인조]는 싸구려 문화들을 통해 싸구려 인생의 비애를 이야기한 훌륭한 케이스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마도 박찬욱 버전의 [비열한 거리]?


용만큼 개천도 중요하다.

누가 뭐라 했든 어차피 선택은 보는 이들의 몫이다. 특정 예술가의 전작을 꿰어야 할 의무 따윈 어느 누구에게도 없을뿐더러 그것이 의무처럼 되어서도 곤란하다. 어차피 예술은 취향과 선택이지 강요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도 가끔씩은 그런 생각을 해본다. 대한민국의 문화 예술적 토양이 누군가의 발전적인 변화를 지켜보는 소소한 재미마저 앗아갈 만큼 척박한 것은 아닌가 하고 말이다. 슈퍼 히어로의 기원만 되짚어 볼 일이 아니다. 유명 인물의 생가터만 보존 할 일도 아니다. 개천에서 용 났다는 말을 자주하는데 왜 정작 용을 잉태시킨 개천은 무작정 콘크리트로 덮어버리고 마는 것일까? 그것이 훗날을 위해 닦여진 또 다른 길이 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가능성을 너무도 쉽게 저버리고 만다. 창대한 나중만큼 미약한 시작 또한 중요하다. [달은 해가 꾸는 꿈]과 [삼인조], 이 두 편의 영화는 분명 미약한 시작에 불과했던 작품들이다. 그러나 그것은 오래지 않아 커다란 족적으로 연결되었다. 그리고 지금, 혹은 시간이 조금 더 흐른 뒤에 우리는 저 두 편의 영화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하게 될지도 모른다. 바로 이 영화들이 영화감독 박찬욱의 시작과 영화광 세대의 행동개시를 알리는 요람과도 같은 작품이었다고 말이다.


PS : 마치 '델마와 루이스'의 하비 키이텔처럼 이들 삼인조를 뒤쫓는 형사로 등장하는 장용, 그리고 불륜을 저지르는 안의 아내 역의 김부선 외에도 [삼인조]에는 또 다른 반가운 얼굴이 깜짝 등장한다. 안이 색스폰을 팔러 간 낙원상가 악기상 한쪽 귀퉁이에 자리를 잡고 앉아 있는 류승완 감독과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에 함께 등장한 그의 지기 박성빈이 바로 그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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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s://soulsdrain.tistory.com BlogIcon Samuel's  수정/삭제  댓글쓰기

    영화에 대한 지식이 너무 해박하신거 같아요. 높으신 내공에 고개가 절로 숙여집니다.
    두 영화를 보았음에도 별 느낌없는 1인...

    2008.04.29 02:03 신고

하성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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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민식이 잠잠했던 건 농을 섞자면 ‘이게 다 노무현 때문’이다. 한미 FTA와 스크린쿼터 투쟁의 일선에 나선 그에게 대중은 냉혹했다. <올드보이>를 통해 국민 배우의 자리에 우뚝 올라섰던 시간은 부지불식간에 ‘어제의 영광’이 되어버렸다.
 

황정민은 ‘무릎팍도사’에 나와 말했다. “배우 나부랭이가 할 일이 뭐있겠냐. 진실한 연기를 하는 거 밖에.” 하지만 대중들에게 최민식은 배우가 지켜야할 선을 넘은 것으로 인식됐다. ‘쌀투쟁’ 집회에서 농민들에게 사죄의 절을 하고, 집회에서 마이크를 잡고 구호를 외치고, 각종 매체와 이론가로서 한미FTA와 스크린쿼터 철폐의 부당함을 역설한 것이 그의 ‘활동’ 이력 전부다. 그 결과는 캐스팅 1순위, 연기파의 대명사였던 배우에 대한 철저한 망각으로 되돌아왔다. 

그러는 사이 참여정부는 수명이 채 한 달도 남지 않았고, 스크린쿼터는 관객들의 머릿속에 배부른 영화인들이 못 만든 영화를 구제하기 위한 핑계거리로 전락했으며, 단 한 번의 광고 출연으로 ‘사채 광고를 찍은 국민배우’로 전락해 버렸다.
 

그런 최민식이 신작 소식을 타전했다. 지난해 <검은 땅의 소녀와>를 선보인 전수일 감독의 <히말라야: 바람이 머무는 곳>이 그 신작이란다. 내용인 즉, “공장에서 사고로 사망한 한 네팔 노동자의 유골을 그의 가족에게 전해주고자 히말라야 고산마을을 찾아간 ‘최(최민식 분)’의 이야기”란다.

의미심장하다. 공장에서 사망한 외국인 노동자의 유골을 그의 가족에게 전해주고자 고향으로 찾아가는 또 다른 노동자. 이건 중국인 ‘파이란’의 유골을 들고 오열하던 강재와는 차원이 다르다. <검은 땅의 소녀와>에서 사북이후 잊어버렸던 탄광이란 공간을 동시대에 되살렸던 전수일 감독이 최민식을 선택한 이유가 단지 연기력과 유명세 때문일까. 그럴 수 있다. 예술영화가 숨을 튈 수 있는 방법 중 하나는 스타의 캐스팅이니까. <해안선>의 장동건을 떠올려 보라. <해변의 여인>의 고현정은.
 

하지만 이런 외적인 요인보다 먼저 떠오르는 건 한국 공장에서 사망한 네팔 노동자를 한국 사회와 한국 영화로 바꿔치기 해도 될 것 같다는 기시감이 든다는 점이다. 그토록 경고했던  한미FTA와 스크린쿼터 폐지를 관망했던 ‘우리=가족’에게 유골을 전달해주는 최민식이라니. 과도한 망상인 것이 분명하지만 섬뜩하면서 아릿한 감정이 드는 것은 왜 인지.

과연 영화가 어떤 꼴로 완성될지 모른다. 전수일 감독의 동녘필름과 <올드보이> <식객>의 쇼이스트가 제작비 4억을 투자한다고 하고, 네팔에서 한 달 가량 촬영할 거란 얘기도 들려온다. 이러저러해도 좋은 작품이 완성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변화한 의식에 따라 실천에 나선 한 개인이 이렇게 몰락하는 건 옳지 않다. 여론이 악화되기 전에 찍은 광고로 몰염치한 연예인의 선봉에 오르는 것도 과도한 돌팔매다. 경제만 살려도 된다, 는 세상이지만 이건 한국과 한국영화계의 손실이다. 최민식이 모든 걸 훌훌 털어버리고 스크린에 복귀하는 날, 제일 먼저 티켓을 끊고 발품을 들여 어느 극장에라도 향해야겠다. 최민식의 반가움 귀환을 축하하기 위해.

P.S 댓글을 보고 본문에서 빼 먹은 것 같아 덧붙인다. 최민식이 사채광고를 찍은 걸 고운 시선으로 보면서 면죄부를 줄 생각은 없다. 그리고 그가 거의 첫번째 타자였기 때문에, 개인으로서 정치적 활동을 한 인물이기에 더욱 타겟이 됐다는 것도 인정한다. 하지만 이건 형평성의 문제인 거다. 그후로도 오랫동안 사채광고에서 얼굴을 빼지 못했지만 친근한 이미지로 무마했던 탁재훈, 사채광고에 학력위조까지 문제가 됐지만 '태조왕건'과 '대조영'의 최수종 등 사채 광고에서 활약한 배우들은 수 없이 많다. 정치적 견해를 밝혔다고 해서 그에게 더 짙은 혐의를 씌우는 건 문제가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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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중용  수정/삭제  댓글쓰기

    언행일치가 안되는 배우, 진실한 연기가 되려나?

    2008.02.05 1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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