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다. 결국 올해도 간다. 그것도 6박 7일의 대장정으로 말이다. 뭐 시기가 시기인 만큼 뻔히 짐작하겠지만, 전주 국제 영화제에 대한 이야기이다. 벌써 4년째, 이 축제에 참가하고 있지만 올해는 사정이 좀 달라졌다. 왜냐하면, 영화제 측으로부터 프레스 아이디카드를 발급받아 참여하기 때문이다. 사실 요즘 이 프레스 카드 때문에 나는 적잖이 흥분해있는 상태이다. 그 동안 영화제에서 영화를 보는 것까지는 좋았지만, 고백하건데 솔직히 나는 좀 외로웠다. 좋은 영화가 넘쳐나는 곳이라면, 함께 그 영화에 대하여 이야기를 하며 즐거움을 배가 시킬 수 있어야 한다. 난 그렇게 믿는다. 하지만, 그런 즐거움은 내게 쉽게 다가오지 못했다. 매 해, 전주 영화제를 혼자 유량하면서 영화에 대해 할 이야기는 넘쳐나는데도 그것을 받아 줄 마땅한 창구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럴 때마다 속으로 그 마음을 삼키고, 터질 것 같은 가슴을 노트에 나열해야만 했다. 하지만 올해는 다르다. 난 내게 갇혀진 이 얘기들을 해방하기로 했다. 자유를 찾기 위한 이 담론들은 네오이마주라는 길을 통해 떠나보내 질 것이니 기대하시기 바란다.
그러기에 앞 서 내가 이번 영화제에서 무엇을 볼 것이며, 무엇을 계획하고 있는가에 대한 간략하게 일정 소개와 이번 영화제에 대한 소회를 밝혀보고자 한다. 일종의 사전 안내서인 셈이다. 그리고 어쩌면 이것은 대리 경험을 통한 즐거움의 전이일지도 모르겠다. 여행이 주는 가장 극명한 즐거움은 그 계획에 있기도 하다. 이 글을 읽을 분께서 전주에 가시지 못하더라도, 이 글을 통해 필자의 여행 계획에 잠시 동승해보시길 바란다. 실지로 그곳에 가지 못한다고 씁쓸해할 필요는 없다. 이미 당신은 설렘으로 충분히 즐거웠을지도 모른다.
5월 2일부터 폐막식인 5월 8일까지 필자는 총 이레 동안 전주에 머무를 예정이다. 유독 전주 영화제를 여타 다른 영화제보다 편애하는 이들이 많은데, 필자도 그 중에 대표적인 한 명이다. 이유는 전주가 다른 지역들보다 축제의 성격을 가장 잘 살린 영화제이기 때문이다. 옹기종기 모여진 극장들과 한 골목을 막아놓고 펼쳐놓는 영화의 거리에는 영화에 대한 애정이 넘쳐나는 사람들로 넘실된다. 또한 지근거리에 위치한 상영관과 중앙 무대는 상영관을 벗어난 우리를 유혹하기에 안성맞춤이며, 길거리 곳곳에서는 영화제 관련 행사가 수시로 벌어지기도 한다. 전주 영화제 기간 그곳은 잠시 별천지인 다른 세상이 된다. 부산/ 부천/ 충무로 등등 일련의 이제는 제법 성장하여 그 자리를 옹고하게 갖춘 영화제들도 이건 못한다. 가장 큰 부산 영화제도 극장을 벗어나 조금만 걷다보면 우리는 단순히 여행객이 되어버린다. 다시 영화제를 즐기기 위한 씨네필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우린 피곤한 몸을 버스 혹은 지하철에 던져버린 후, 잠시 숨을 골라야 한다. 그리고 다시 다른 상영관에 도착하면 우리는 숨겨왔던 영화 애호 환자들의 기질을 슬며시 끄집어 놓는다. 누군가는 영화제 카탈로그를 끄집어 놓고 이후의 스케줄을 짜기에 바쁘고, 또 다른 누군가는 노트를 끄집어 내어 열심히 무언가를 적곤 한다. 혹 피곤에 지친 어떤 이는 좁디좁은 플라스틱 의자에 기대어 칼잠이라도 자면서 잠시 달콤한 휴식을 취하기도 한다. 하지만 전주는 극장과 더불어 이 외부의 거리마저도 영화 애호 환자들을 위한 공간으로 존재한다. 그리고 그들을 격리시켜 그들의 중독성 질병이 퍼져 나가지 않도록 만드는 센스. 여하튼 나는 전주가 좋다. 음식과 잠자리까지 세심히 챙겨주는 이 영화제가 소중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이번 영화제에서 상영 시간이라면 또 둘째가라면 서러울 감독이 있다. 그가 바로 필리핀의 거장 라브 디아즈 감독이다.

말이 나온 김에 얘기해보자면, 나는 <해변의 연인> 이후의 홍상수와 <모리가리의 숲> 이후의 가와세 나오미의 행보가 무척이나 궁금하다. 노골적으로 변화를 강론한 <해변의 여인> 이후의 홍상수는 <밤과 낮>으로 변혁의 시동을 걸었고, 이제는 그 변화의 진실성을 보여줄 시점이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와 거의 동시에 진행된 이 영화를 통해 홍상수의 변화된 모습을 살펴볼 좋은 기회이기도 하다. 또한 <모리가리의 숲>을 통해 그녀 필모그라피 상의 정점을 새겨 넣은 가와세 나오미 감독이 또 어떤 고점을 그려낼 수 있을까 매우 흥미롭다.
참고로 필자가 이번 전주 영화제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할애하는 섹션은 다름 아닌 마스터 클래스이다. 해마다 다양한 영화 관련 장인(마스터)들을 초빙하여 강연을 열고 있는 마스터 클래스는 올해 그 화두로 평론가를 지목하고, 이에 세 명의 평론가들을 초빙하였다. 5월 3일 강연을 펼치는 프랑스의 레이몽 벨루와 5월 4일 각각 강연을 하는 미국의 리처드 포튼과 호주의 에이드리언 마틴은 모두 영화 잡지의 편집장을 맞고 있으며, 유명한 평론가들이기도 하다. 중요한 것은 이들의 강연 형태가 토론 포맷으로 진행된다는 점이다. 영화에 대한 글쓰기를 업으로 삼는 이들에게 해외 평론가들과의 담론 교류는 매우 유익하다. 또한 이 강연에서 만나게 될 평론에 대해서 관심이 많은 영화학도들과의 심심치 않은 이야기꽃을 피울 수 있다는 사실도 매우 뜻 깊다.
이상으로 필자의 개괄적인 영화제 일정 소개를 마칠까한다. 사실 언제부터인가 나는 영화제 관람 계획을 미리 짜지 않았다. 계획적으로 움직이는 것은 좋으나, 너무 욕심만 앞선 나머지 체력적인 안배를 하지 못하고 무리하게 스케줄에 맞춰 움직이다간 자칫 컨디션이 완전히 망가져 버리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에는 결국 하루를 통째로 날려버리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특히 술 약속이라도 잡히는 날이면 다음날 오전 스케줄은 공치는 게 다반사이다.) 그 때 그 때, 적당히 상황에 맞게 계획을 조정하는 일도 영화제에선 필요하다. 욕심만 너무 앞서 영화만 꾸역꾸역 보다가는 이를 채 소화 시키지 못하고 다 토해내 버리는 사태가 발생한다. 또한 너무 영화를 방기하고 즐기는 영화제는 영화제의 기존적인 취지를 모르는 의미 없는 여행이 될 것이다. 영화에 미친 환자들이여, 때론 적당히 즐기는 것이 필요하다. 자신의 애정을 표현하기 위해서 우선 자신이 그것을 어떻게 하면 잘 즐길 수 있는가에 대해서 생각해보자. 많이 보는 것이 능사가 아니다. 또한 사람을 만나고 흥청망청 취하여 즐긴다고 마냥 즐거운 일만도 아니다. 이후에 당신에게 남겨진 것을 생각해보자. 그리고 지금 이 순간을 아낌없이 투자하자. 이로써 필자의 개인적인 취향이 가득한 이 사전 안내서를 마친다. 비록 이 취향에 동의할 분이 많진 않겠지만, 적어도 나의 이 여행 계획서에서 여행에 대한 어떤 기대감이 느껴졌기를 바란다. 이 계획서는 내 취향에 대한 호소문이 아니라, 영화제를 기대하는 어느 영화 애호 환자의 비교적 소극적인 간증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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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 보러가야 겠어요..
2009.04.30 11:59 신고전주에 3년째 살고 있습니다.
2009.04.30 13:39회사내 동아리 게시판에 전주를 홍보하기 위해 옮겨가겠습니다.
혹 옮겨 가는것이 불편하시면 삭제하겠습니다.
미리 허락을 받는게 순서인데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잘 몰라 그냥 퍼감니다.
전 월요일에 떠납니다. 사실 처음 영화제에 참석하는거라 어떻게 일정을 짜야 하는지 몰라 이리저리 검색하다 여기까지 오게 됐는데 정말 좋은 정보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영화에 식견이 전혀 없는 관계로 어떤 영화가 좋은지 아무리 인터넷 검색을 해봐도 해답이 없네요.. 혹시 4일 5일 추천작 있으신가요?^^ 5일은 거의 매진이라 현장발권밖에 안 될듯 합니다..ㅠㅠ
2009.05.01 23: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