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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후죽순', 그러게 말이다. 이 좁고 작은 나라에서는 하루가 멀다 하고(정말?) 수많은 영화제들이 기획되고 상영된다. 그 수많은 영화제 중 인디포럼의 차별성은 뭐가 될 수 있을까? 이미 공개된 몇몇의 인터뷰들을 참고해보자. 인디포럼 2009의 세 명의 프로그래머 중 한 명인 윤성호 감독은 "영화제가 우후죽순 생겨난 가운데, 변별력을 갖추려고 노력했다"고 답하며 "새로운 등산로를 개척한 셈"이라고 '인디포럼 2009'의 정체성을 규정한다.

올해로 14회를 맞이한 인디포럼은 다가올 29일부터 6월 5일까지 일주일 동안 ‘주먹 쥐고 일어서’를 슬로건으로, 신작 60여 편을 포함 총 70여 편의 영화가 숨 가쁘게 상영될 예정이다. 물론 이 영화제에는 '몇 분 만에 예매가 매진됐다'는 등, 눈길을 확 끄는 뉴스는 ‘당연히’ 없다. 그러나 김숙현 프로그래머의 말처럼 인디포럼은 "지금의 젊은 감독들이 현실과 영화에 대해 어떤 고민을 갖고 영화를 만들어내고 있지는 확인할 수 있는 가장 따끈따끈한 자리"라는 점에서 의미를 획득한다.

아무리 비경쟁 독립영화 축제지만, 개‧폐막작은 모든 영화제의 '꽃‘ 아니겠는가. 그래서 만났다. 두 주먹을 '불끈'까지는 아니어도, 슬그머니 쥐게 만드는 개막작 <산책가>의 감독 김예영, <외출>의 서재경, 그리고 폐막작 <소년마부>의 박홍준 감독이 그 주인공이다. 이 영화들은 이 암울하고 비열한 시대를 관통해나가는 우리들에게 수 많은 질문을 던진다. ’앙팡테리블(무서운 아이들)‘이라는 수식어가 잘 어울리는 2, 30대 젊은 감독들이 수줍지만 재기발랄하게 당신에게 건네는 이야기를, 영화보다 먼저 만나보자!



개막작 1. <산책가>의 김예영 감독
"장애가 아닌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어요"




영화처럼 수줍고 맑았다. 대답 끝마다 햇살처럼 매달았던 해사한 웃음은, '착한'영화를 만든 감독답다 싶었다. 슬프지만 9학기는 요즘 대학가의 트랜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홍익대에서 애니매이션을 전공하며 9학기 째 학교를 다니고 있는 두 감독 김영근(27), 김예영(25)의 졸업작품이기도 한 <산책가>는 시각장애인의 영광이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실사와 각종 애니매이션 장르가 뒤섞인 작품은, 영화라는 시각적인 매체를 통해 보여 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촉각적'으로 상상력을 자극한다. 장애와 비장애의 경계를 횡단하며 시각적인 것에 익숙한 관객들의 감각을 자극한다는 점에서 훌륭하다.

영화 제목을 듣고 산책에 대한 노래(散策'歌')라고 해석하는 사람도, 혹은 산책길(散策'街')라는 해석도 있었지만, 원래는 '산책하는 사람'이라는 뜻의 산책가 란다. "어떻게 해석해주셔도 좋아요"라는 답변 끝에는 자신들이 만든 작품이지만, 해석은 온전히 ‘관객’의 몫으로 돌리는 의연함이 엿보였다. 개인사정 상 참석하지 못한 김영근 감독 대신 김예영 감독과 대화를 나눴다. 참고로 귀뜀하자면, 두 감독은 CC(캠퍼스 커플)이다.



개막작 선정 소식을 들었을 때 어땠어요?


좀 신기했어요(웃음). 되게 고마웠어요. 저희 작품을 알아봐주시고 개막작으로까지 선정해 주셔서 고마웠죠. 저희 작품(산책가)와 같이 상영되는 <외출>이랑 폐막작인 <소년마부>를 먼저 봤는데요, '와, 되게 잘 만들었다'고 생각됐어요.

'주먹쥐고 일어서'라는 인디포럼의 슬로건과 잘 어울리는 주제의 영화라는 생각이 들어요. 관객들에게 영화에 대해 소개 하신다면요?


시각장애인이 주인공이기 때문에 한편으론 장애에 대한 영화이기도 하지만, 저희는 장애를 부각시키기보다는 장애가 있든 없든 '사람은 서로 사랑할 수 있고 아껴줄 수 있는 존재'라는 걸 나누고 싶었어요. 보통 사람들이 장애인은 도움을 받아야 되는 존재라고 생각하잖아요. 그런데 영화에서 주인공 영광이 처럼 장애인도 자기가 사랑하는 누나를 위해 뭔가 하려고 노력하잖아요. 그런 걸 담고 싶었어요. 저희가 이 작품을 준비하면서 '에이블 아트'라는 장애인 미술에 관심을 갖게 됐어요. 영화 주인공인 영광이도 실제 시각장애인이고 도예가를 꿈으로 갖고 있는 친구에요.

의도하신 바가 충분히 담겨진 거 같으세요?


저희는 담으려고 노력했는데...그건 관객들의 몫이라고 생각해요.

영화를 보면 촬영 준비 기간이 많이 걸렸을 것 같아요. 수작업이 굉장히 많은 거 같더라구요.


시나리오 들어가기 전에 사전조사만 3개월 정도 했어요. 처음에 파트너(김영근 감독)는 시각장애인에 대한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의견이었고, 저는 감각에 관한 영화를 만들고 싶었는데 그 두 가지를 동시에 만족시키는 주제를 찾은 거죠. 그 과정에서 시각장애인에 대해 공부도 많이 하고, 그들이 가진 감각에 대해 표현하려고 노력했어요. 논문도 보고, 시설 같은 곳에 인터뷰도 가고. 말씀하신 것처럼 애니매이션 작업에도 시간이 꽤 걸려서 1년 정도 만들었어요.

시각장애인과 감각에 대해 말씀하셨는데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있었나요?


파트너(김영근 감독)이 예전부터 봉사활동을 많이 하다보니까 원래 관심이 있었어요. 저는 그 친구를 통해서 관심을 갖게 되었구요. 저희가 캠퍼스 커플인데, 만난 이후로는 꾸준히 같이 작업을 해오고 있어요(웃음).

영화 완성본을 보고 나서 아쉬웠던 점이 있다면 어떤 건가요?


너무 많아요(웃음). 사전조사를 하는 과정에서 시각장애인에 대해 다루고 싶은 주제가 정말 많았어요. 시각장애인들이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이 많이 다르더라구요. 그들의 눈으로 바라보는 세상의 재밌는 점이 많았어요. 그런데 시나리오가 있는 작품이다 보니까, 오히려 시나리오가 제약이 많이 됐어요. 저희가 생각했던 걸 충분히 다 표현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아쉬움이 많죠.

그럼 만족스러웠던 점이 있다면요?


제가 살면서 했던 작업 중 가장 큰 작업이었다는 점에서 많은 의미가 부여가 돼요. 무엇보다 영광이라는 재밌는 친구를 알게 돼서 지금도 잘 지내고 있어요. 남동생이 하나 생긴 것 같아서 너무 좋아요.

아름다운 영화였는데요, 사실 영화라는 것도 시각적인 매체잖아요. 어떻게 생각하면 영화 주인공인 영광이는 볼 수 없는. 그렇기 때문에 조금 객관적으로 보자면 시각장애인이 느끼는 세상을 아름답게만 그리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거든요. 감독님은 관객들이 이 영화를 어떻게 봐주셨으면 좋겠어요?


약간 의도적으로 그렇게 표현한 부분도 있어요. 그런데 저희가 시각장애인들을 직접 만나고, 영광이나 영광이가 다니는 학교에 가보면서 느낀 건, 분명 어려움이 있어서 그늘이 없진 않지만 항상 인생이 어두운 건 아니잖아요. 밝고, 순수하고, 꿈이 있고...이런 점들을 부각하고 싶었어요. 영상이 전체적으로 하얗거든요. 그런 점을 부각시키기 위해 의도한 게 있죠. 그런 단점을 말씀해주시는 분도 있는데, 저희가 신경 쓰지 못한 부분이라고 생각하신다면 할 수 없지만, 저희는 '아름답게'에 좀 집중했던 거 같아요.

영광이는 어떤 친군지 궁금해요.


첫 상영(졸업작품 상영)했을 때 영광이랑 같이 가서 봤어요. 영광는 부모님께서 낳으러 가는 도중에 사고를 당하셔서 '전맹(시력이 전혀 없는 시각장애인)'이 된 경우에요. 그런데도 인터넷도 하고, 컴퓨터로 게임도 하고, 저희가 하는 대부분의 생활을 다 하거든요. 작품을 만들 때 많이 신경 썼던 게 '앞이 안 보이는 친구들은 우리 영상을 어떻게 볼 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이었어요. 그래서 원래는 대사가 없이 영상만 보여주려고 했었는데, 영광이의 나래이션을 넣어서 스토리 전체를 들을 수 있게 만들었어요. 영광이는 나래이션을 더 멋있게 못해서 아쉽데요(웃음). 그밖에도 효과음에도 신경을 써서 상황들을 알 수 있게 했구요. 눈으로 영상을 볼 수 없지만, 그런 것들을 통해서 머릿속으로 더 재밌는 상상들을 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저희가 이렇게 영화제에서 상영도 하지만, 전시를 함께 하기도 해요. 5월 13일부터 4일동안 아주대에서 하기도 했는데요. 산책길(지도)은 영광이가 직접 기획해서 만들고 저희가 재료를 구해주고 하면서 함께 만들었는데요, 전시 때는 그 지도를 만지면 그 부분에 해당하는 영상이 나오도록 했어요. 눈이 보이지 않는 친구들이라도 직접 만지고 상상하면서 즐겁게 산책할 수 있도록요.

앞으로 계획이 궁금해요.


지금 당장은 <산책가>를 좀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은 욕심이 있어요. 딱히 다른 준비는 못하고 있는데 영화를 계속 만들고 싶어요. 이번 작품은 저희가 경험해 보지 못한 다른 사람 얘기를 다룬다는 점에서, 그걸 다시 우리들의 이야기로 만든다는 점에서 어려웠던 점이 있었던 거 같아요. 다음 작품을 만든다면 개인적인 얘기를 해보고 싶어요. 그걸 통해서 저를 더 잘 알고 싶기도 하구요.



개막작 2. <외출>의 서재경 감독.
"촛불이 의미 없어서가 아니라, 이미지로 만들어서 무화시키는 게 걱정됐어요"




"말 잘못하는데..."라고 뒷머리를 벅벅 긁으며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마주 앉아, 인터뷰어를 걱정시키더니 그야말로 '청산유수'였다. 그의 작품 <외출>의 상영시간은 10분 내외지만, 그 10분을 만들기 위해 수많은 고민을 반복했음을 반증하듯, 대화에서도 아직 풀리지 않은 숙제처럼 '작년 5월'이 그를 붙잡고 있는 게 느껴졌다.

작년 인디포럼은 촛불 속에 진행됐다. 그리고 1년. 인디포럼을 기획하며 수많은 출품작이 당시의 기억을 다룬 이야기로 채워지리라 예상했지만, 출품 된 500여 편의 영화중에서 그 흔적을 기록한 작품을 발견하기는 어려웠다. 인디포럼은 <외출>에 대해 "촛불의 기억을 불러온다는 사실만으로도 돋보였다"고 평했지만(물론 이 식상한 평가 뒤에는 "그 때의 기억을 재현할 때 갈 수 있는 전형적인 길을 선택하지 않았다"는 '괜찮은' 평가도 있었음을 밝힌다:D), 서재경 감독에게 '촛불'은 영화로 묶어내기 어려운 '무엇'이었다.

이 짧은 영화는 서 감독의 표현에 의하면 ‘촛불’이 아닌, 전경과 시위대의 '헤어짐에 관한 영화'다. 그 속에는 개인과 경계에 대한 고민이 녹아나 있다. 이제 막 영화를 선택하겠다고 의욕 있게, 그러나 여전히 현실이라는 벽에 부딪칠 수밖에 없는 스물 아홉의 청년에게는 너무나 아쉬운 게 많은 십분 이겠지만, 영화는 작년 5월에 대해 많은 것을 보여주지 않았기에 오히려 많은 것을 생각하게 했다. 촬영 중의 각종 에피소드들, 그리고 아직 채 정리하지 못한 사회에 대한 자신의 시선이 엉켜 부끄럽기만 한 듯 여러 차례 말을 다듬고 또 다듬던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짧은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굉장히 많은 생각을 하게 해 준 영화였어요. 이 영화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한 계기가 있으실 것 같은데, 그 때 이야기를 좀 나눠주세요.


학교를 가려면 광화문을 항상 지나야 했어요. 처음에는 그냥 ‘저런 일이 있구나’정도로 생각하고 시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거나 그러지 않았어요. 그러다 나중에 친한 사람이 한 에피소드를 얘기해 준 게 영화의 단초가 됐어요. 거리에 화장실들이 나와 있었잖아요. 그 옆에서 시위대가 공연을 하고 있는데, 전경들이 그 공연하는 사람들 옆으로 볼 일을 보러 들어가더래요. 그 얘기를 듣는데, '어?'하고 느낌이 좀 묘한 거예요. 그래서 그 이후로 거리에 나가봤어요. 처음에는 두 개의 축으로 얘기를 생각했어요. 시위를 촬영하고, 지금의 영화 완성본처럼 허구의 이야기를 붙여 넣자고. 동료들과 함께 세 대의 카메라를 돌리면서 계속 현장에 있었어요. 거리에 있으면서 저도 화장실에 가보니까 전경과 시위대가 섞여 있는 풍경을 저도 목격할 수 있었던 거죠. '아, 이게 완전히 허구는 아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재밌었어요.

인디포럼의 관객들이 영화를 어떻게 봐줬으면 좋겠어요? 관객들에게 자신의 영화를 소개하신다면.


'헤어짐을 전제로 한 만남'이라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하면서 만들었어요. 이 만남 때문에 헤어짐의 순간이 무력하다고 해야할까, 그 뒷모습의 무력함을 생각했어요. 기본적 정서는 슬픈거죠. 당시에 폭발했던 문제지만, 계속적으로 있어왔던 문제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그 안에 굉장히 많은 균열들이 있죠. 영화 속 주인공은 한국적 상황에서 일종의 대리자라고 생각해요. 시위대와 전경이 일 대 일로 대응되는 관계도 아니죠. 참 힘든 작업이었던 게, 이 영화가 지금의 상황들과 밀접한 관계를 맺는다는 거였어요. 제가 어떤 포지션을 취해야 하나 고민이 되죠. 저는 영화에서 다룬 시위에 대해 ‘촛불’이라는 단어는 일단 사용안하기로 했어요. 그게 의미가 없어서가 아니라, 이 문제를 일종의 이미지로 만들어서 무화시키는 게 될까봐요. 촛불의 이미지가 강력해서 다른 얘기를 할 수가 없는 거예요. 사실 시위 안에서는 굉장히 다양한 층위가 존재했고(보수와 진보, 기독교와 반기독교 등 굉장히 다양한), 그만큼 다 미묘하게 다른 얘기를 하고 있는데, 어쨌든 촛불은 이걸 하나로 만드는 이미지잖아요. 그런 이미지화를 피하고 싶었어요. 이 극영화는 굉장히 짧은 소극인데, 시위에 담긴 균열들을 다 담기에는 형식적인 문제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고, 저 자신에 대한 정리도 미흡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10분이라는 짧은 시간이어서 영화가 더 효과적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데 저는 퀄리티 면에서 아쉬운 느낌이 많이 들어요. 디지털로 촬영했는데, 촬영 중에 분명히 찍은 데이터가 사라지기도 하고. 그래서 툭툭 튀는 부분이 있는 것 같아요. 영화 보면 화장실 안의 또 다른 공간이 있잖아요. '절대 열지 마시오'라고 적힌. 그 공간은 일종의 영화적 판타지라고 할 수 있어요. 이 문을 열고 나가면 다시 대치해야 하는 상황이죠. 시위대와 전경이라는 이분법적 대치를 비롯해서, 개인적으로 느끼게 되는 수많은 모순들을 맞이할 거라는 점에서 효과적인 공간이라고 생각했는데, 그 부분의 촬영에 있어서 (데이터가 사라지는) 아쉬움이 있었죠.

개막작 선정 소식 들었을 때 어떠셨어요.


전혀 예상 못한 일이었고, 조금 부담스러운 것도 있어요. 이 부담감엔 여러 가지가 포함 돼 있어요. 기본적으로 이렇게 말을 해야 할 일들이 있고(웃음), 앞에 말했다시피 작품에 대한 아쉬움도 있죠. 저는 시위에 관련된 작품이 많이 나올 거라고 생각했어요. 현장에 카메라가 많았거든요. 그래서 좀 의아했어요.

감독님이 말씀하셨던 것처럼 시위가 함의하고 있는 여러 층위들 때문에 작품을 만드는데 어려움이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어요.


촛불을 영상에 담지 않겠다고 생각하거나 전경을 주인공으로 한 것도 그런 이유였던 거 같아요. 촛불에 대해 얘기할 때 거의 대부분 촛불 쪽에서 접근하게 되잖아요. 저까지 그럴 필요가 있을까, 싶었어요.

저 또한 전경의 이야기였기 때문에 효과적이라는 느낌을 받았어요.


촬영하면서 시위대와 전경의 틈바구니에 항상 있었어요. 중간적 입장이 되고 싶었던 게 아니라 어느 한 쪽으로 들어가는 것 보다 그 사이에 있는 게 가장 첨예한 순간을 목격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아쉬움이 없을 수 없겠지만, ‘아, 이건 내가 찍었지만 좋았다’라고 생각하시는 점이 있다면요.


카메라가 계속 화장실 안에 머물다가 마지막 장면에서 화장실 밖 유리창으로 넘어가요. 결국 그 순간을 위해서 앞의 이야기들이 필요했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다시 이 전경은 익명의 존재가 되는거죠. 그 장면에서 유리창에 균열만 가 있는데, NG예요. 사실 박살내는 게 원래 시나리오였어요. 뻥 뚫리고 공간의 경계가 없어지는거죠. 근데 현실적 여건을 말씀드리면 깨진 유리창을 만들려면 돈이 들기 때문에(웃음). 완전히 박살난 건 아니지만 그 역시 일종의 균열이잖아요. 그냥 이걸 살리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영화 내내 긴장감이 드는데, 확 풀어지는 재밌는 장면이 있었어요. 시위대가 나가서 팽팽하던 화장실의 긴장감에서 놓여진 전경이 안심하고 있는데, 다시 깃발을 가지러 들어오는 장면이요. 재밌었어요.


잘 표현이 안 된 것 같아요. 슬픈거 같아요. 화장실에서 긴장하지 않아도 되는 타인들이 자기가 입고 있는 옷, 상황 때문에 긴장하는 거잖아요. 원래는 더 정치적 색채가 짙었어요. 가편집본을 여러 번 만들었는데, 마지막 장면에 이순신 동상이 있는 사거리에서 카메라 줌을 땡기면 청와대가 보여요. 그걸 넣을까 하다가 너무 노골적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영화의 매력이 떨어지는 거 같더라구요. 아쉬운 점이 많지만, 지금이 저한테는 최선인 것 같아요. 영화의 전체적인 분량은 짧은데 시위 촬영 분량을 다 짤라내긴 했지만, 시간이 오래 걸리는 작업이었어요.

촬영하면서 재밌었던 에피소드 있었나요?


극영화를 하루 동안 찍어야 하는 상황이었어요. 그 전에 화장실을 되게 많이 알아보러 다녔어요. 생각보다 마땅히 찍을 만한 장소가 없었어요. 그렇게 돌아다니다가 마음이 급해져서 친구한테 스쿠터를 빌려서 타고 나갔는데(원래는 잘 타지 않아요), 친구가 사고 난다고 걱정하는거예요. 괜찮다고 안심시키고 난 후 3분 만에 사고가 났어요. 쇄골뼈가 뿌러졌죠. 그것도 코메딘게 제가 서울대 병원 앞에서 사고가 났어요. 그데 넘어진 바로 옆에 119 구급요원들이 담배를 피우면서 쉬고 있었거든요. 재밌는 에피소드라고 하긴 뭐하지만, 중간에 그런 몸 문제 때문에 촬영도 늦어지고...지금 쇄골뼈가 약간 튀어나왔어요(웃음). 그리고 제가 영화보면서도 웃겼던 건 전경 복장 자세히 보셨어요? 실제 지금 전경들이 입는 복장하고 차이가 좀 있을 거예요. 요즘 세련되게 바뀌었는데 그걸 제가 연락할 수 있는 곳에서는 대여가 안되는거예요. 어쩔 수 없이 지금과 좀 차이가 있는 복장을 빌렸어요. 나중에 화장실에서 밖으로 나가기 전에 헬멧을 쓰잖아요. 뒷모습에서 카메라가 들어가면 다스베이더 같은, 그런 느낌이 나더라구요(웃음). 중간에 스타워즈 음악이라도 넣어야 하나...웃기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영화를 어떻게 보느냐는 관객들의 몫이지만 그래도 어떻게 봐줬으면 좋겠다 싶은 바람이 있으시다면요.


참 어려운 질문인데요. 헤어짐에 대해서 생각해봤으면 좋겠어요. 결국 그거 때문에 만든거니까요. 이렇게 양자의 대립에 대해 다른 영화들을 봤을 때, 명확히 화해라고 인식되는 순간이나 혹은 그 정도의 뉘앙스를 보이게 되는데 저는 거기서 이야기를 화해시키는 건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집단이 아닌, 개인의 차원에서 이야기를 바라봐 주셨으면 좋겠어요. 헤어질 때의 무력감이라고 해야할까요. 전경과 시위대 모두가 느끼는 무력감이죠. ‘아, 저새끼 나가면 또 봐야겠지’라는. 뻔히 알면서 둘 다 화장실을 나가야 해요. 어쩔 수 없이. 화해의 느낌을 내고 싶지 않았어요. 절대 평화롭게 볼 일을 본 게 아니죠.

앞으로의 계획은 어떻게 되세요.


영화를 만들고 싶죠. 그러고 싶은데, 워낙에 힘든일이니까요. 일단 지금 아카데미를 다니고 있는데 중편영화를 하나 만들어야 해요. 주제는 비밀입니다(웃음). 대단한 건 아니구요, 지금 너무 후져서 스탭들한테 욕 먹고 있어요. 걱정이죠.



폐막작 <소년 마부>의 박홍준 감독
“제게 영화는 보여지지 않은 것에 대해 보여주고, 같이 소통하는 거예요”




소년은 '마부'다. 포장'마차'를 끄는. 원래 그 마차는 소년의 아버지 것이었다. 아버지가 병원에 누워있는 지금, 소년은 그 마차의 마부가 돼야했다. 그러나 소년이 만나는 세상은 아버지가 몸에 불을 질러야 했을 만큼 녹록하지가 않다. 박홍준 감독은 그렇게 남겨진 사람들에 대해 넘치지 않게, 신중하고 담담하게 보여준다.

절차적으로 얄팍하게 성취한 민주화와 압축적 산업화에 여전히 취해 있는 세상은, 아직까지도 엄연히 존재하는 누군가의 가난과 불평등에 대해 더 이상 알려고 하지 않는다. 작년 3월에도 떡볶이 노점을 하던 전 모 씨는 몸에 불이라도 붙여 자신의 억울함을 세상에 얘기하려고 했지만, 그런 이야기들은 사람들에게 심각하게 회자되지 않았다. 우리가 보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것들을 박홍준 감독은 자신이 갖고 있는 최선을 다해 보여주려 애쓴다. 그의 카메라를 통해 그 불편한 죽음은 따뜻한 배려의 옷을 입었다.

'진정성'이라는 수사가 실체도 없이 너무도 쉽게 쓰이는 시대지만, 박홍준 감독과 대화하는 내내 그 단어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카메라를 들고 있는 자신에 대한 반성과 성찰은 겸손했고, 그래서 아름다웠다. 그냥 잊혀지고 마는 사회적 약자의 무수한 죽음 중 하나를 또렷이 상기시키면서도, 영화적 미학까지 포기하지 않은 이 재능 있고 욕심 많은 감독의 다음 작품이 벌써부터 기대된다.


인디포럼 폐막작으로 선정됐다는 얘기를 듣고 어떠셨어요?


상당히 놀랐어요. 부담도 됐구요. 사실 개‧폐막작이라는 게 영화제의 성격을 드러낸다고 보통 생각하잖아요. 그랬을 때 제 영화가 인디포럼의 성격에 맞는건지, 혹시 누가 되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에 걱정이 됐죠.

'주먹 쥐고 일어서'라는 이번 인디포럼 슬로건과 굉장히 어울리는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나중에 슬로건 보고서 '아, 혹시 그래서 선정하셨는가‘하는 생각은 했어요. 제가 그런 의도로 만든 영화는 아니지만, 어쨌든 슬로건에 맞다는 생각은 들었어요(웃음).

아직 영화를 보지 관객들에게 감독님 영화를 소개하신다면 어떻게 소개하고 싶으세요?


간단히 얘기하자면, '살아남은 자의 생존에 관한 이야기'라고 말하고 싶어요. 그 고민을 나누고 싶었어요. 특히 사회에서 보듬어 주지 않으면 자생력이 떨어지는 어린아이들이 어떤 식으로 사회에서 살아갈 수 있을까에 대해서 모두가 한 번쯤 생각해봤으면 좋겠다 싶었죠. 그런 부분에 집중해서 영화에서 최대한 보여주려고 노력했어요.

영화에서 소년의 가족 이야기를 취재하는 피디가, 어쩌면 감독님을 얘기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예상 질문인데요(웃음). 원래 처음 만들려고 했던 영화는 복수극이었어요. 더 정치적이었고, 주인공은 용역 철거반원이었죠. 다행히도 <똥파리>가 나왔죠(웃음). 그에 비해 제가 생각했던 영화는 너무 피상적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러던 차에 노점상 하시던 분이 분신자살을 시도했다는 대한 얘기를 접했어요. 작년 3월이었는데 떡볶이 노점 하시던 전영걸씨라는 분이었어요. 다행히 부인께서 옆에 계셔서 불을 잘 꺼서 중화상만 입고 목숨은 건지셨어요. 그 동영상을 포털에서 봤는데, 뭐랄까...아직도 '진행형 이다'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당시에 서울 디자인 거리라고 지금 한참 바뀌고 있는 게 가시화 되는 시기였어요. 전국노점상연합회도 찾아가 인터뷰하고, 사무처장님도 뵙고 하는 과정에서 반성을 했어요. 반성이라고 하면 좀 그렇지만, 이걸 우리가 더 얘기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카메라를 들고 다니던 영수라는 인물의 설정은 방송국 피디는 아니고, 독립다큐 단체에 있는 거라고 설정했어요. 내가 제대로 알거나 접근하려는 노력도 없으면서, 그냥 무작정 찾아가서 카메라를 들이대는 식, 그런 거 많잖아요. 제가 꼭 그랬다기 보다는, 저도 그랬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 그런 인물을 넣어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영화 속에서 피디의 등장은 소년에게 아버지의 분신을 떠올리게 하는, 그래서 소년을 더 힘들게 하는 역할로 배치한 거예요.


영화 촬영하시면서 어려운 점은 없었나요?


배우 구하기가 힘들었어요. 원래 지금 배우보다 더 어린 고등학생을 원했어요. 제가 켄 로치 영화를 좋아해요. 혹시 <스윗 식스틴>이란 영화 보셨어요? 거기 나오는 남자주인공을 되게 좋아하는데 그런 얼굴, 그런 나이대를 원했었어요. 생각처럼 쉽지가 않더라구요. 실제 일반인을 캐스팅을 하기도 그렇고 해서 계속 여러사람을 만나보고 하는 중에 다행히도 그 친구(소년 역 한주완)을 만나게 됐어요. 예대 영화과 다니는 학생인데 다행이도 처음 영화를 찍는 친구였어요. 연기도 연기지만, 어떤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그런 걸 찾았기 때문에 주인공 캐스팅이 힘들었던 거 같아요. 그래도 제일 어려웠던 건 아파트 앞에서 노점을 벌여서 촬영해야 했던 거예요. 부녀회장님 허락도 받고 했는데도 두 번 정도 구청 관계자가 왔었어요. 한 번은 영화촬영인 걸 모르는 주민 분이 신고해서였고, 한 번은 구청 단속차가 지나가면서 본 거예요. 물론 영화촬영이라고 설명드리고 허락받았다고도 말씀드려서 잘 넘어갔죠(웃음).


감독님의 영화에서 아쉬운 점이 있다면 어떤 부분이예요?

 

영화가 길어요(웃음). 보충촬영까지 17일 정도 필름으로 촬영했는데, 긴 시간이었죠. 물론 제 욕심에 비하면 짧은 시간이었어요. 제가 이렇게도 찍고 싶고, 저렇게도 찍고 싶고...여러 가지 많이 해보고 싶었던 장면이 있었는데 시간적 제약 때문에 많이 못해서 아쉬웠죠. 무엇보다 배우들에게 많은 시간을 주지 못했던 게 아쉽고 미안해요. 더 좋은 연기를 끌어낼 수도 있었을 거 같은데, ‘시간이 없으니까 빨라하자’ 이런 게 몇 번 있었거든요. 예를 들면 물 맞는 장면이요. 살수차를 동원했었는데, 물에 밀려서 나가 떨어지는 걸 찍고 싶었어요. 그런데 배우가 위험할까봐 걱정되기도 했고, 그 날 촬영분량이 많아서 재촬영을 못했던 게 아쉬웠던 거 같아요. 배우에게도 미안하고. 뭐, 결국 보충촬영을 다시 하긴 했어요.

다른 분들 작품(개‧폐막작) 보셨다구 들었어요. 어떻게 보셨어요?


재밌었어요. <외출> 같은 경우는 반대의 경험을 한 적이 있어요. 물론 제가 시위자인 티는 안내니까(웃음) 전경들은 몰랐겠지만, 종로 쪽에서 화장실을 갔는데 전경들이 있더라구요. 속으로 좀...그 때 생각이 났어요. 아이디어도 좋았지만, 그 순간의 긴장감 같은 것들이 좋았구요. <산책가> 같은 경우는 두 번을 봤어요. 장면 장면이 새로웠어요. 재기발랄하고 상상력이 대단하신 거 같았어요. 느낌들이 좋았어요.

감독님 영화 대사 중에 노점상 아저씨가 소년에게 "나 목숨 걸고 하는 거야"라는 대사가 있잖아요. 감독님에게 영화도 그런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어떻게 영화를 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건가요.


글쎄요. 원래 전공은 전혀 다른 거였어요. 법학 전공 했어요. 공부는 안했구요(웃음). 내가 법을 하지 않으면 뭘 할 수 있을까 고민하던 차에, 영화가 생각났어요. 영화를 워낙 좋아했어요. 특히 켄 로치 영화를 보고 '나도 하면 좋겠다' 생각만 하다가 뒤늦게 시작했죠. 지금 34살이예요. 다니던 회사도 있었는데, 회사를 그만두고 학교(한예종)에 들어가 공부를 시작했어요. 저한테 영화는 보여지지 않는 것들에 대해 보여주는 거고, 말할 수 있고, 같이 소통할 수 있는 매개체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렇지만 목숨까지 되면 변질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해요. 지금도 영화하고 있다는 핑계로 부모님이나 가족 등 내팽겨치고 있는 게 많아서(웃음).


목숨까진 아닌 거 같아요. 그렇게 되면 영화를 하는 게 변질될 거 같아요. 주변을 돌아보기 위해서 하게 된 일이니까요. <소년 마부> 준비할 때 두 사건(07년 10월 고양시청 노점상인 고 이근재씨의 자살과 작년 3월 전영걸 씨 분신자살 시도)를 보니까 공교롭게도 두 분 모두 자식이 두 명씩 있었어요. 무엇보다 이 아이들이 어떻게 될까, 이 아이들이 사회에 나왔을 때 누가 케어할 수 있을까...이런 거에 대해 많이 고민하고 싶었어요. 평상시에도 가족에 대한 고민이 많아요.

<소년 마부>라는 제목이 되게 인상적이에요. 제목만으로는 연상하기 힘든 영화 내용이었어요.


말 나오는 영화 아니냐고, 지도교수님은 제목으로 먹고 들어간다고 얘긴 하셨는데(웃음). 제목을 고민하던 차에, 마차잖아요. 포장마차니까. 실제 노점상 하시는 분들도 포장마차라고 안 부르고 마차라고 부르거든요. 마차를 끄는 사람이니까, 끄는 사람은 마부니까. 그래서 원래는 ‘마부’라고 하려고 했는데, 그게 베를린 영화젠가 은곰상 받았던 한국영화가 있더라구요(웃음)

영화의 결론이 명확하지 않다는 느낌을 받았는데요, 감독님의 의도인가요?


잘 안됐던 부분이라는 생각은 드는데요, 제가 마무리를 어떻게 지어주고 싶진 않았어요. 사실 그래서 영화가 심삼한 측면도 있죠. 좀 떨어져서 바라보고 싶었어요. 주인공 소년이 고등학교 2학년 설정인데, 여러 가지 상황을 생각해 볼 수 있겠죠. 다시 학교를 다닌다거나, 노점상 회원들이 모아준 돈을 갖고 아버지를 대신 해 포장마차를 한다던가, 동생을 데리고 어디론가 떠난다는 가 하는 등등이요. 근데 그건 중요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결론을 열어놓고 싶었죠. 결론이 중요하지는 않고 상황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된다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애매하게 느껴지는 건 제 부족한 역량 때문이겠죠.

앞으로 계획이 있으시다면요?


구체적으로 시나리오를 쓴 건 아닌데,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 사이에서 방황하는 인물에 대한 장편을 준비하고 있어요. 블랙코미디로요(웃음)



인터뷰, 기사: 장일호
교열: 강민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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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름 위에 흐르는 떡무비 기획전 제1탄>


<외출>을 봤다. 그 어느 할리우드 스타보다 열도를 심하게 뒤흔드는 욘사마 배용준이 주연인 데다, 대수롭지 않은 사랑에 관한 보편적 소재를 대수로운 사랑의 애틋함으로 전이시켜 던져주는 허진호의 작품이니 한참 뒤늦었지만 갑작스레 땡겨 마주하게 됐다. 물론 불륜이라는 선정적 소재와 그에 부합하는 쌍수 들고 반길 만한 배용준 손예진의 격정의 정사 신마저 나온다 하니, 매사 잿밥에 열 올리며 몸을 던지는 본 필자의 사고체계로서는 응당 당연한 행동방식이다.

여하튼 봤더만...... 아쉽게도 기대와 달리 당 영화, 심히 싱겁고 밋밋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마치 장조림에 간장이 덜 배어 있는 느낌이라고나 할까? 아니면 간장게장에 간장이 덜 배어 있는 허전함이랄까? 그 이유야 웬만한 매체에서 다들 거론한 마당이니만큼 굳이 구구절절 들먹이지는 않겠다. 단, 이것만큼은 웬만하면 한번 쯤 거들떠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싶어 이렇게 누가 시키지 않았음에도 지가 알아서 분연히 일어나 마우스와 모니터를 벗 삼아 오밤중에 글을 쓴다. 미처 우리가 눈여겨보지 못하고 간과한 <외출>의 그 비범한 미덕을 널리 고하기 위해.


● 단추 따고 지퍼 내리는 사운드를 통해 상상의 권능은 만개하고 쾌감은 극락에 도달한다

먼저 일본 아줌마와 한국 사내들의 애간장을 태우며 세간의 화제가 된, 9시간의 기나긴 촬영 후 파김치가 됐다는, 배용준 손예진의 침실노동 그러니까 살맛나는 베드신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멜로를 말하되 몸으로 말하지 않는 허진호 감독의 사려 깊은 관조적 스타일과 울기는 울되 온몸으로 울지 않는 손예진이라는 청춘 멜로물의 풋풋한 헤로인을 떠올릴 때 사실 농도 짙은 몸의 뒤섞임 신을 기대하는 어렵다. 허나, 18세 이하 관람불가라는 등급과 인터넷 곳곳을 후끈한 정사신에 관한 에피소드로 장식했던 여론은 숱한 남정네들의 “에이 설마....”에 엄한 날개를 달아주고 혹시나 하는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데 크나큰 일조를 했던 만큼, 나름 발기탱천한 기대감을 품고 극장으로 향한 사내들 꽤나 됐으리라 사료된다. 하지만....

아니나 다를까 결과는 역시나였다. 단, 분위기고 나발이고 ‘보이는 게 다!’라는 물리적 벗김의 수위에 모든 걸 올인 한 수컷 관객에 한해서다. 다시 말해, 당 영화의 베드신은 노출상태로만 보자면 정작 보여줄 건 안 보여주고 엄한 데, 특히 ‘등’만 보여준다 하여 명명된 그 옛날 쌍팔년도 ‘등짝’무비의 법통을 잇는 천인공노할 분을 불러일으키기에 부족함이 없는 훌라덩 수위에 그친다. 비통한 마음, 금할 길 없다.

그렇치만서도 욘사마를 향해 지극한 순정을 눈물겹도록 쏟아 붓는 일본 아줌마들을 위한 세심한 배려 차원인지 그의 잘 다듬어진 빨래판스런 상반신은 그들의 눈 시선에 맞추어진 카메라에 의해 오롯이 포착된다. 반면 톡 대면 터질 것 같은 손예진의 육체는, 볼 건 봐야 직성이 풀리는 남성들의 염장을 지르기라도 하는 듯 그들의 공명정대한 시선과 숨바꼭질하며 허진호식 앵글에 따라 보일랑 말랑 몸을 숨긴다. 열통 터져 죽는 줄 알았다. 안타까운 순간이라 아니 말할 수 없음이다. 그나마 손예진의 몸매가 예상외로 풍만해 꼴깍 참고 넘어갔지 그마저 아니었다면.......

그런데 이게 천우신조의 뜻인지 아니면 본 필자 같은 사내들을 긍휼히 여긴 허진호 감독의 속 깊은 의중에서 비롯된 것인지 영화는 예기치 못한 화법을 통해 관객의 의표를 찌른다. 벼랑 끝에 내몰린 두 남녀가 마음을 넘어 몸으로써 서로를 비벼대며 위무하는 불꽃놀이 직전! 손예진의 청바지를 벗기려는 찰나! 카메라는 그녀의 하반신을 무장 해제시킬 살 떨리는 배용준의 손과 그에 부응해 심하게 파르르 떠는 그녀의 허리부분을 바짝 다가가 들여다 본다.

"앗~아싸!"

조는 놈들마저 죄다 일어나 기다린 보람이 있었다는 듯 사내들은 스크린을 향해 달아오른 광선을 뿜으며 숨소리마저 내지 않는다. 영화로 우정을 나누고 연대가 이뤄지는 찬란한 순간이다. 허나, 어렵사리 앙양된 사기는 이내 곤두박질친다. 배우들의 몸에서 근거리를 위치하며 서성이던 카메라가 부끄럽다는 듯 살짝이 이동해 다른 곳을 응시하는 철딱서니 없는 행동을 범한 것이다.

"에게! 이게 다야!"

충분히 나올 법한 소리 없는 아우성이다. 관객의 기대를 저버린 셈이다. 극심한 절망에 휩싸인 사내들은 모든 걸 잃은 듯 아연해했다. 그러나 그게 다가 아니었다. 맥 풀린 긴 한숨이 땅에 떨어지기 찰나, 구원의 메아리가 저 멀리서 울려 퍼지니....

"또오~옥 딱!, 찍이~~~익... "

숨 막히는 정적을 가르며 객석을 파고든 이 소리, 다름 아닌 손예진 하반신을 공략하기 위한 청바지 단추 따는 소리와 지퍼를 내리는 허리하학적 사운드였던 것이었더랬다. 할렐루야!


은은하면서도 청명하기 그지없는 ‘또오~옥 딱!’ 이어, 보는 내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찍이~~~익!’ 원초적 시각의 쾌감에 목말라 있는 이들에게 부족하나마 단비와 같은 존재로 다가온 이 영롱한 사운드는, 보이는 것 이상의 흥분됨과 야릇함을 전해준다. 극락에 도달할 수 있는 상상의 권능이 만개하는 순간이라 볼 수 있으리라. 끝장을 보지 않고 결정적 순간에 앵글을 엄한? 데로 돌려버림으로써 애틋함과 여운을 극대화시키는 허진호 감독의 스타일과 영화에 있어 이미지 못지않게 사운드 역시 실로 중차대하다는 진실이 동반상승하며 빚어낸 공감각적 장면에 다름 아니다. 이는, 장선우 감독 <우묵배미 사랑>의 또 다른 불륜커플 길도(박중훈)와 공례(최명길)가 남의 눈을 피해 오밤중 비닐하우스에서 ‘떡’을 치기 전 급한 마음에 지가 알아서 박중훈이 후다닥 지퍼를 내리는 신과 대구를 이룬다. 십 수 년이 지났건만 요런 장면만큼은 절대로 까먹지 않는 본 기자! 내가 생각해도 기특하다. 하여간, 여운이고 나발이고 일단 내 망막에 뽀얀 여체의 나신이 맺히는 것만이 진정한 황홀경이라는 분들에게야 뭐라 드릴 말씀 없지만, 그게 아니라면 보는 이를 압도하는 가공할 만한 필살의 저 사운드! 꼭들 염두에 두셨다가 허리 쫙! 귀 쫑긋!하여 직접 확인하길 권고한다. DVD로 감상시 저속으로 보시면 그 또한 새로운 경험이다. 아차~하면 부지불식간 놓칠 수도 있으니 절대 한 눈 팔지 말고 분투하시길 바란다.


● 자신의 위상을 환기시키며 재정립한 기특한 녀석 ‘콘돔’

고대 이집트 벽화에서도 콘돔의 흔적이 발견될 만큼 녀석의 역사는 유구하다. 인류 공영에 이바지함은 물론이요, 남녀 애정행각에 무한한 가능성과 성의 굴레로부터 해방을 앞당기는 견인차 역할을 했음 역시 두말 할 필요가 없다. 때문에 녀석은 역사의 도도한 흐름과 함께 늘 우리 곁에 머물렀고, 당장이라도 약국, 편의점, 숙박업소, 화장실 입구, 너희 집 등 맘만 먹으면 손에 넣을 수 있도록 지천에 깔려 있다. 그럼에도....

한국 사회의 근간을 이루며 21세기인 이 마당에 아직까지 맹위를 떨치고 있는 그 놈의 유교적 사상과 윤리관으로 인해 콘돔을 바라보는 시선은, 많이 나아지긴 했지만, 여전히 곱지 않다. 명랑 성생활 확립을 위해서는 없어서는 안 될 녀석의 가치가 평가 절하되고 있는 개탄스러운 현실이 지속되고 있다. 이러한 가식과 내숭은 인류발전을 저해하고 하등의 도움이 안 되기에 박멸해야 함은 주지의 사실이거늘, 거개가 뒷짐 지고 수수방관하고 있으니 참으로 우울하기 짝이 없다.

사설이 좀 길었다. 아무튼, 본 필자의 애기인즉슨 상황이 이럴진대, 문화의 총아라 일컬어지는 영화 역시 그간 녀석에 대해 별반 신경 안 썼음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는 거다. ‘나와도 그만! 안 나와도 그만!’이라는 나 몰라라! 하는 발로에서 비롯된 방관자적 자세!. 빈번하게는 아니더라도 오다가다 한번쯤은 건드려줬어야 했다. 한데, 여관방을 재조명하는 범국민적 숙원사업에 동참한 홍상수 영화라면 모를까? 사랑의 생성과 소멸을 줄곧 끌어안으며 보듬어온 허진호의 영화에서 콘돔의 떨어진 위상과 권리를 다시금 복권시키는 장면이 등장했으니, 어찌 놀라지 않을 수 있겠는가? 요는 이렇다.

자신들의 배우자가 교통사고를 당한 후 경찰서에 들려 바구니에 놓인 지갑 디카 등 그네들의 소지품을 챙기는 와중, 서영(손예진)과 인수(배용준)는 짐짓 손을 멈칫거리며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표정으로 서로의 흔들리는 시선을 교차한다. 칼라풀한 콘돔 한 개! 녀석이 버젓이 바구니에 자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흐! 말은 안 해도 이 두 사람! 대퇴부와 가슴을 둔기로 후려 맞은 듯 전율이 온 몸을 들쑤시고 다녔을 것이다. 외양이야 크나큰 흐트러짐 없이 영화 성격상 고매함을 견지하고 있다만 사람 속이 어디 그러겠는가?

“아니 이 새끼가....설마”
“아니 이 뇬이.....설마”

조건반사적으로 이런 욕지거리가 나오는 게 사실 인지상정 아닌가? 자신의 배우자들이 우연찮게 눈 맞아 서로 안고 자빠지는 그렇고 그런 사이가 아닐까 하는 강한 의구심을 불러일으키는데 도화선이 된 그리고 결정적 물증으로 부족함이 없는 ‘콘돔’. 딱 봐도 세심하게 공을 들인 티가 팍팍 묻어나는 이 장면은 <외출>의 그 어떤 순간보다 인상적이다.

알지 않나! 그간 한국영화가 불륜의 관계가 뽀록날 때 혹은 그 징후를 어떤 식으로 묘사해왔는지. 떡에 일로매진하며 총력을 기울이고 있을 때 바로 현장을 덮쳐 바람 피는 그네들의 머리채 혹은 고환을 무자비하게 움켜잡고 나오는 볼썽사나운 비상사태가 참으로 많이도 애용됐다. 가까운 예로 <박하사탕>이 있으니 함 참조하시고. 아니면, 팬티를 뒤집어 착용한 흔적, 뻘간 립스틱 자국 그리고 낯선 향수 냄새 등 약발 떨어진 진부한 시츄에이션만이 남편을 의심하는 촉매제로 답습했을 뿐이다. 빼도 박도 못하는 확실한 물증! 콘돔이 있음에도 녀석의 쓰임새를 우습게 봤거나 영화의 퀼리티를 떨어뜨릴지도 모른다는 시대착오적 사고방식이 배태한 산물로 상상력이 고갈돼 밑천이 떨어졌음을 반증하는 대목이다.

이뿐이 아니다. 녀석은 사후 처리적 징후에서도 뒷전이었지만 불륜 관계의 남녀가 작업 모드로 들어가기 전 취하는 예비 자세나 본격적으로 황홀경에 빠져드는 뜨거운 작업의 열기 속에서도 찬밥신세였음은 마찬가지다. 다만, 비디오 에로물에서만 왕왕 그의 존재감이 드러났을 뿐이다. 실례를 들어 주인공 남녀가,

‘끼네 마네’
‘끼면 감이 오네 마네’
'안 끼면 너랑 안 한다’는 둥!




콘돔의 실존적 문제를 해학성에 빗대 결코 남 일이 아님을 본의 아니게 설파했다. 하지만 녀석의 중요성은 세태에 묻혀 그 이상 거론되지 않았고 목하 그게 우리네의 지리멸렬한 현실이다. 이런 지난한 상황에서 <외출>이 보여준 콘돔 클로즈업 장면은 때문에 나름 재조명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제 몸을 온전히 드러내지 않고 겹겹이 주름이 잡힌 단아한 자태로 자그마한 투명 비닐하우스에 기거한 녀석은 그간의 고충과 오욕을 뒤로한 채 <외출>에 이르러 스크린 전면에 나섰다. 단발성 우정 출연이 아니라 영화 전체 얼개에 걸쳐 파장을 미치는 밀도 높은 참신한 캐릭터로 분해, 서영과 인수를 벼랑 끝으로 내모는 단초를 제공해줌과 동시에 이 둘의 관계 역시 녀석을 매개삼아 맞불 작업에 들어 섦을 예고하는 복선작용을 톡톡히 해낸다. 기특한 것! ‘콘돔을 스치며’ 파국을 예감하는 이들의 찰나는, 불륜을 소재로 한 또 다른 영화 <화양연화>에 등장하는 좁디좁은 복도 길에서 장만옥과 양조위가 ‘옷깃을 스치며’ 즉감적으로 뭔가 교감하는 그 장면과 대구를 이룬다.

또한, 구차하게 이런 저런 대사나 오만가지 추상적 장면의 들이댐 없이 직접성을 띤 물건, 성인이라면 빈번하게 마주할 생활밀착적 상비품목인 콘돔을 집약적으로 한 장면에서 보여줌으로써 녀석은 영화에 리얼리티를 부여한다. 이거, 별 거 아닌 거 같지만 절대 별스럽지 않은 가장 일상스런 행동양식을 스크린을 통해 선보임으로써 역설적으로 별스러운 가치를 획득하는 계기가 된다.

다시 말해, <아이즈 와이드 샷>의 니콜 키드먼이 소변 후 휴지 3칸으로 마무리하는 감동의 장면과 박신양 이수아 이경영의 <쁘아종>에서 목도된 이경영과의 동물적 섹스 후 이수아가 3칸도 아닌 물경 10칸으로 뒷마무리 하는(게다 뒤에서부터 앞으로 쓸어 올리는 위생학적 측면까지 고려한 리얼리티의 정수를 보여준다) 다 알지만 말하지 않는 일상성을 세세하게 길어 올린 이 두 신과 견주어도 당해 장면은 손색이 없다. 거듭 말하지만 사사롭기 짝이 없는 무용(無用)한 설정처럼 와 닿는 장면, 다른 관점에서 보면 영화에 사실성을 높이는데 지대한 공헌을 한다. 결국, 이런 전차로 콘돔 이라는 존재는 <외출>를 통해서 자신의 위상을 환기시키며 재정립, 유야무야됐던 자신의 서러운 입지를 다시금 다지는 생산적 계기를 마련한다.

지금까지 두서없이 <외출>의 베드신과 콘돔에 대해 장광설을 늘어놨는데.......아무래도 별 같잖은 소재로 핏대 세운다고 핀잔 받지 않을까 조금 걱정스럽다. 허나, 때로는 개똥도 약이 된다고 이왕지사 지금까지 읽은 거, 혹 영화를 안 본 독자께서는 꼭들 요점 참조하여 관람에 임해보시길 권한다.

그나저나 쪽팔린 이야기지만 초장부터 끝물까지 주구장창 섹스랑 콘돔에 대해 얘기했더니 갑작스레 작업의 의지가 불타오른다. 그럼 알아서들 스텝 밟으시고 본인은 이만 음란한 마음으로 작업의 열기가 들끓는 광장으로 나가보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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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죽지않아  수정/삭제  댓글쓰기

    나도 대략 이 영화가 그렇게 묻혀 버린 게 참 아쉬웠다는! 비범한 매력이 있는 영환데.

    2008.02.21 17:32
  2. cy  수정/삭제  댓글쓰기

    공감가는 얘기네요~~
    실컷 웃고 갑니다~
    글 정말 재밌게 잘 쓰시네요~~ ㅋㅋ

    2008.02.21 20:21
  3. 슬픈열대  수정/삭제  댓글쓰기

    글 정말 잘쓰시네요~
    잘 읽고 추천하고가요 ^^

    2008.02.21 20:23
  4. 흐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영화자체가 좀 그런 맛이 있었으나
    김형경씨가 쓴 소설을 읽으면
    주인공의 심리묘사가 자세하게 되어 있어 매력을 느낍니다
    한 번 책을 읽업보시길~ 영화보다 정서적인 면이 더 와 닿아요 ㅋ

    2008.02.21 21:34
  5. 햄미니  수정/삭제  댓글쓰기

    오우..대단하신 필력!!
    존경스럽군여..
    그나저나 작업은 성공하셨나여?
    외출..아주 좋은 영화죠...

    2008.02.21 22:12
  6. 2탄 외박 안나오나...3탄으로 휴가..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런

    2008.02.22 0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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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행복>의 허진호 감독, 그의 멜로는 전진한다


"어떻게 저렇게 사람이 변할까. 사람이 변하잖아요. 어느 순간, 냉정해질 수도 있고. 그 다음에 또 놀러 가자고 하고. 그럴 수밖에 없는. 그 느낌이 좋았어요."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고 하지 않던가. 사랑할 때처럼 인간의 감정 변화가 급격할 때가 또 있을까.


조근조근 신중하게 말을 건네는 허진호 감독을 한 발짝 떨어져보니 그의 영화 스타일이 자연스레 이해된다. 왜 그가 멜로 영화를 고집하는지, 사람의 변화하는 감정을 집요하게 파고드는지.


한석규·심은하의 <8월의 크리스마스>, 유지태·이영애의 <봄날은 간다>, 배용준·손예진의 <외출>. 모두 허진호 감독이 인장이 깊숙이 박힌 멜로 영화들이다.


1998년 <8월의 크리스마스>로 대중과 평단의 호평을 고루 받고 데뷔한 지 10년. 그 허진호 감독이 황정민·임수정과 작업한 <행복>을 들고 나왔다.


도대체 사람이란 존재는 왜들 그럴까


술과 담배·여자에 찌든 남자 영수(황정민)가 망가진 간 때문에 요양원을 찾는다. 거기서 폐가 아파 8년간 요양원 생활을 해 온 여자 은희(임수정)을 만난다. 사랑에 빠지고 동거에 들어가는 두 사람. 이어 연애의 쓴맛 단맛을 모두 보여줘 온 허진호 감독다운 결말이 기다리고 있다.


<행복>은 원래 전작인 <외출>보다 먼저 떠오른 기획이었다. 하지만 이런저런 사정으로 두 영화의 순서가 바뀌었다. "그저 나이를 더 먹었다는 정도?"로 변화를 설명하지만 그 사이 허진호 감독은 결혼을 하고 네 번째 작품의 편집을 맞췄다. 다시금 죽음에 가까이 간 기승전결 뚜렷한 이야기를 들고 나온 이유가 궁금해졌다.


- 데뷔작을 빼고는 공교롭게도 다 가을 개봉이에요. 모두 멜로 장르라 그럴까요.


"그러고 보니 그런데, 딱히 이유가 있는 건 아닌 것 같고. 시간 경과가 있는 영화들을 하다 보니까. 9~11월까지 찍어서 2월이나 5월에 개봉하는 게 맞는데 이번엔 좀 더 늦어졌네요."


- 전작들이 아이디어에서 출발했다면 이번 <행복>은 이야기에서 시작됐다고 들었어요.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그러니까 몸이 아프고 가진 것 없는 두 사람이 만나서 가난하지만 행복하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그러다가 병이 나으면 어떻게 될까, 이런 생각에서 출발했던 것 같네요."


- 전작 <외출>은 허진호 작품세계의 변화라는 평가가 주를 이뤘었는데요.


"이야기의 선택이 달랐던 거 같고요. <외출>은 두 사람의 심리적인 부문에 초점을 맞춘 반면 이번 이야기는 제 영화 중에 사람도 제일 많이 나오고 요양원이란 공간이 생기면서 따뜻한 기운도 느껴지고 거기서 웃음도 주고요. 이 쪽에서의 행복한 생활과 도시로 떠나간 후에의 대비되는 효과가 있었던 거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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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무래도 요양원 장면들이 유머도 있고 정감있게 느껴집니다. 감독님 영화에서는 시골이 자주 등장한다는 점도 흥미로워요.


"시골이라(웃음). 이번엔 완전 시골이고(웃음), <8월의 크리스마스> 같은 경우는 군산이니까 지방이고요."


- 네, 시골 말고 지방(웃음). 뭐랄까, 농담을 섞자면 지방 선호사상?(웃음)


"제가 지방을 선호하는 이유 중 하나는 촬영하기가 참 좋아요. 서울에선 계속 출퇴근하느라 집중도가 떨어지는 부분이 있는데 지방에서는 계속 영화 생각에 집중할 수밖에 없거든요.


이번 <행복>은 아픈 사람들이 외딴 곳에 집을 짓고 행복하게 살아가는 모습이 좀 더 전원적이랄까요. 의도적으로 이 쪽의 생활·공간, 우리가 흔히 시골 가서 농사짓고 살고 싶다 그런 걸 표현하고 싶었어요. 이 말은 분명히 살아가면서 부족하고 무언가 바라는 것이 있으니까 그런 얘기를 하는 거겠죠. 현실적으로 봤을 땐 그것 또한 힘들다는 것도 다 알고 있고. 그런 어떤 평온함 삶과 이 쪽에서의 부딪히는 삶의 대비를 보여주고 싶었어요."


- 확실히 양쪽의 삶의 대비가 두드러져요. 특히 관객들 중 다수도 도시에 살고 있을 테니. 어떤 통속적인 이상향이라기보다 아프다는 구체적인 설정 탓에 더 공감이 갔던 것 같고요.

"요양원이란 공간이 어떻게 보면 (도시에서) 치료를 받다가 실패한 사람들이거나 현실적으로 치료받을 돈이 없거나 규칙적인 생활의 변화를 통해서 치료하는 곳이잖아요. 처음엔 굉장히 어두울 것 같다는 생각을 했었어요. 그런데 실제로 취재를 하고 인터뷰를 하면서 느낀 건 (그 사람들이) 밝더라고요. 병에 대해서 자체적으로 인식도 하고, 또 잊어버리기도 하는 그런 공간이었어요."


- 전작들을 보면 항상 죽음이 어른거린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8월의 크리스마스>의 정원(한석규)이나 <외출>도 그렇고, <봄날은 간다>에서는 할머니의 죽음이 있었고요. 이번 캐릭터들은 병도 있고 죽음에 한 발짝 다가서 있는 인물이라 더 직설적으로 느껴져요.

"은희는 언제 죽을지 모르는 인물이라 죽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이지만 그것 때문에 어떻게 보면 인생을 더 충실하고 솔직하고 적극적으로 사는 것 같아요. 어떻게 보면 더 현명하게 될 수 있는 거고."


- 허진호 영화의 특징은 연애의 쓴맛, 단맛을 다 보여주는 거라고 생각해요. 그렇게 현실적이라 더 좋아하는 관객들도 있고, 쓴맛은 보기 싫고 '아, 너무 아프다' 하면서 싫어하는 관객들도 있고요.


"<행복>은 원래 '둘이 만나서 행복하게 산다'라는 걸로 시작했어요. 그러다가 한 사람이 병이 나으면 어떻게 될까라는 생각을 가지면서 슬픔도 밝게 찍고 싶었고 둘이 행복하게 사는 모습은 밝게 그리고 싶었어요. 둘이 만나는 과정들은 웃음을 주고 따뜻하게 그리면서 결국 행복하게 산다는 걸로 끝내고 싶었는데, 다시 몸이 나으면 어떻게 될까라는 질문을 하게 되면서 떠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취재하면서도 실제 영수와 은희 같은 케이스도 있었어요. 사람들이 분명히 한 번 경험을 했고 죽을 수도 있지만 또다시 넘어가는 건 뭔가, 왜 그럴까? 사람이 원래 그런 게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면서 한 번 더 반복을 줬죠. 그 반복에 있어서 이 행복한 시간이 얼마나 소중했나란 얘기를 해 보고 싶었어요."


- <행복>은 전작인 <외출>보다 분명 친절해졌다는 느낌이 강한데요.


"<외출>은 당시 공간도 한정되어 있었고 생략을 많이 했던 것 같아요. 하지만 <행복>은 생략보다는 뭐랄까요, 설명들이 필요할 수 있을 것 같네요. 좀 친절하게 갈 필요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행복>은 기승전결이 있는 이야기이니까 설명이 필요하리라 생각했죠."


- 후반부를 보면 은희를 떠난 영수에게 벌을 내린다 싶을 정도로 쓸쓸한 느낌이 나는데요.

"네, 그런 생각이 있었어요. 영수가 미워서 좀 벌을 받았으면 좋겠다 싶었던 것 같아요. 그게 다시 망가지게 한 가장 큰 이유고. 원래는 전혀 망가지지 않는 결말이었는데, 아까도 얘기했듯이 행동을 다시 반복하고 또 후회하면서 어떻게 보면 자학하는 게 있지 않을까. 감독이 응징한 게 아니라 영수 본인도 그 상처를 가지고는 잘살지 못했을 거다."


"<행복>은 연기자들의 몫이 큰 영화"


'삼촌과 조카 사이 아냐?' '황정민과 임수정이 베드신을?'. <행복>의 개봉 소식이 들려오면서 네티즌들이 보였던 반응들이다. 남성 관객들의 황정민에 대한 시기와 질투는 끝이 없었고 그러는 사이 영화에 대한 기대치는 높아만 갔다. 게다가 멜로의 계절 가을이 아닌가.


<행복>은 항상 남녀 주인공의 앙상블을 중시해 온 허진호 감독의 작품답게 황정민과 임수정의 익숙하면서 전혀 다른 모습을 엿볼 수 있다. '나쁜 남자' 영수와 '당찬 여자' 은희의 사랑 속에 황정민과 임수정은 완전히 몰입한 듯 보인다. 그 중간에서 세심한 배려와 대화로 연기를 이끌어 낸 허진호 감독의 속내가 궁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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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번 영수 캐릭터는 <봄날은 간다>의 은수(이영애)와 대구를 이룬다는 느낌도 얼핏 들던데요.


"글쎄요, 은수와의 대구는 아닌 것 같은데(웃음). 캐릭터만 보면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네요(웃음). 그럴 수도 있지만 전 또 다른 인물 같아요. 예를 들면 <봄날은 간다>에서는 어떻게 보면 사랑이 식어가잖아요. 식어가면서 느슨해지고 일상화되고 그러면서 한 사람은 변하지 않는 그런 이야기고. 이 사람은 왜 변할까 하는. 반면 <행복>은 정확하게 떠나가는 거에요. 전 영수가 떠나가는 순간에도 은희를 사랑했다고 생각해요, 그 사랑이 변한 것이 아니라. 물론 변하지 않겠다는 새빨간 거짓말도 있지만(웃음). 해석에 따라 다르겠지만 변했다는 느낌보다는 어떻게 보면 잘못된 선택이랄까?"


- 카메라와 인물과의 거리를 보면 전작들과 비교해서 굉장히 좁혀졌단 생각이 들거든요. 행복한 모습을 강조하기 위해서 그런 건가요?

"가까이 가서 보고 싶었어요. 특히 행복한 부분에서 그런 모습이 많이 나오는데요. 행복해 하는 모습과 느낌들, '왜 뽀뽀를 했는데 또 뽀뽀하고 싶지' 라는 것이 말이 안 되는 대사인데 느낌은 전달되잖아요. 전 은희다운 대사라고 생각을 하는데 그런 느낌들이나 '너 아프니까 내가 죽을 것 같다'는 영수의 모습들? 그 느낌들을 좀 더 가까이서 보여주고 싶었어요."


- 좀 다른 얘기를 해 보자면 전작들 경우 남자 주인공의 직업에서 사진이나 소리·무대라는 어떤 매개체가 있었다면 <행복>은 죽음이나 요양원에 집중한 것 같아요. 


"이번에도 직업은 고민했는데 그렇게 중요하진 않았어요. 직업으로 어떤 얘기를 하기보다  재미있게 사는 사람들 있잖아요. 가라오케 같은 거 경영하면서 월급사장이 됐든 클럽도 다니면서. 인물을 설정하면서 가라오케 사장이면 어떨까 그런 생각을 먼저 했던 것 같아요."


- 그런데 영수는 전작의 소심형 남자들과는 분명 다른 느낌이었어요.

"O형이 활달한 성격이죠? 황정민이란 배우가 굉장히 활발하고 동적인 친구에요. 인물이 전작에서는 굉장히 정적인 느낌이었다면 동적으로 바뀐 것에는 황정민이란 배우가 있었기 때문이에요. 그런 부분들이 찍으면서도 재미있었고 좀 더 황정민에 가깝게 간 것 같아요." 


- 일부에서는 은희 캐릭터가 남성의 판타지가 개입된 인물이 아니냐는 의견도 있더라고요. 반면 여성의 심리를 잘 그려낸다는 평가도 있고요.


"항상 그랬어요. <8월의 크리스마스> 때도 그랬고. 제가 적극적인 여자를 좋아해서 그럴까요(웃음)? 저 혼자가 아니라 여러 사람들이 모여 나눈 얘기들과 실재 인물들로 캐릭터를 가져오고 그걸 대사로 썼기 때문에 그렇지 않을까요? 사실 여자 심리 잘 몰라요(웃음)."


- 임수정씨는 <싸이보그지만 괜찮아> 때와 달리 촬영기간 동안 굉장히 가라앉아 있었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행복>은 연기자들의 몫이 커요. 각자 영수가 되고 은희가 된 부분이 있거든요. 편집을 하면서도 저 역을 임수정이 아니었으면 누가 했을까, 그냥 임수정이다란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 아픈 병을 가지고 있고, 그런 상태에서 어떤 밝음을 표현할 수 있는 배우가 누구일까 생각을 해 봤을 때 그건 바로 임수정이었던 것 같아요. 인물에 깊게 들어갔기 때문에 현장에서도 은희의 느낌을 많이 받았어요. 실제로 배우들이 굉장히 친했고 서로 또 잘 아는 사이였어요. 진짜 둘이 사귀는 거 아니냐 라고 스탭들이 농담을 했을 정도니까. 근데 헤어지는 장면을 찍을 때 실제로 황정민이란 배우가 임수정에게 말도 잘 안 붙일 정도였어요. (배우들이) 정말 좋았던 거 같아요."


- 영화 속에서 인상적으로 쓰인 한대수씨의 노래 '행복의 나라'는 참 좋다 싶으면서도 좀 튄다 하는 양가적인 감정이 들었는데요.


"시작부터 생각했던 노래에요. 제가 참 좋아하고 넣고 싶었고. '행복의 나라' 자체가 가사나 느낌은 경쾌하지만 그 안에 슬픔이 있어요. 그런 감성을 옛날부터 좋아했고요. 실제로 한대수 선생을 만나서 물어보니까 자기가 열여덟 살이던 고등학교 2학년 때 만들었다고 하더라고요. 참 힘들 때 만들었고 이민자의 슬픔이 담겨 있구나 싶었죠."


"언제까지라도 관객과 소통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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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데뷔작인 <8월의 크리스마스>로 화제의 감독이 된 지 10년이나 됐어요. 그동안 어떤 점이 가장 달라진 것 같나요? 개인적으로 혹은 외적으로.

"그전에도 그랬지만 관객들이 더 중요해지는 것 같아요. 또, 그 때도 영화 만들기는 쉽지 않았고 영화는 항상 어렵게 만들어지는 거고. 어떻게 하면 자기가 하고 싶은 이야기로 대중들이 좋아하는 이야기를 어떻게 가져갈 것인가, 이런 고민은 전에나 지금에나 마찬가지인 것 같아요. 시장 상황이 바뀌었지 영화를 만드는 감독들이나 제작자들은 영화 정신이랄까요? 그런 마인드는 항상 가지고 있는 것 같고요."


- 곽경택 감독은 방송에 나와서 흥행이 좋냐, 상이 좋으냐란 질문에 '빚이 많아서 상금이 제일 좋다'라고 농담을 하던데요. 감독님은 어떤가요?


"그럼요. 관객이 많이 들고 흥행이 잘됐다는 건 모든 감독들이 원하는 거죠. 왜냐하면 영화에 들어간 자본의 문제도 있는 거고, 영화라는 게 결국 많은 사람들을 보여 주려고 하는 작업이니까요. 제가 판단을 하는 건 아닌 것 같고요. 제가 하려는 이야기를 얼마나 많은 관객들이 재미있게 볼까가 가장 중요한 것 같아요."


- 그런 점에서 전작 <외출>은 조금 아쉬웠겠어요?


"이번엔 좀 소통하게 도와주세요(웃음)."


허진호 감독은 차기작으로 이상문학상을 수상한 김훈의 단편 소설 <화장>을 각색 중이다.


아내를 뇌종양으로 먼저 떠나보낸 화장품 회사 중역인 남자가 아내를 화장하면서 중간 중간 회사의 젊은 여직원을 떠올리는 짤막한 이야기다.


죽음·감정·관계 등 허진호 감독의 전작들에 익숙한 코드들이 언뜻 떠오른다. <행복>에서와 마찬가지로 허진호 감독은 죽음에 관한 성찰을 보여줄 셈이지만 주인공의 남자의 외양은 분명 또 다른 변화를 예측하게 한다.


사랑과 죽음이라는 두 가지 화두를 일상적인 시선으로 녹아내온 '멜로 영화의 작가주의' 감독의 작품세계는 지금도 전진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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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s://differenttastes.tistory.com BlogIcon 신어지  수정/삭제  댓글쓰기

    차기작으로 <화장>을 준비 중이시라니. 역시나 하면서도 맙소사 하게 되는군요. ^^

    2007.10.10 11:43 신고
  2. Favicon of http://kr.blog.yahoo.com/itoshii00 BlogIcon 무플환영  수정/삭제  댓글쓰기

    임수정과의 러브모드... 이럴땐 정말 배우가 하고싶어요. 머 아무나 시켜주진 않지만... ^^
    당장이라도 극장가서 영화 보고 난 뒤 다시 이 글을 읽고싶어 지네요. ^^

    2007.10.10 16:11
  3. Favicon of https://lyhaz7.tistory.com BlogIcon 길위에서있다.  수정/삭제  댓글쓰기

    글 잘 읽었습니다.

    2007.10.10 17:07 신고
  4.  수정/삭제  댓글쓰기

    으 또 눈물 나와 ㅠㅠ

    2007.10.10 18:01
  5.  수정/삭제  댓글쓰기

    영화 너무 마음 아펐어요 ..즐거운인생이랑, 행복 두편 같은날 봤는데.. 마음 동요가 심했어요 ㅋㅋ

    2007.10.10 18:02
  6. 우웅  수정/삭제  댓글쓰기

    ..................
    전왜 그닥
    슬프지안앗져;;
    그래도 잼잇엇어요~~

    2007.10.10 18:08
  7. 정말..  수정/삭제  댓글쓰기

    재밌었어요.. 눈물 줄줄 나더라구요
    수정언니 연기 너무 잘해요~

    2007.10.10 19:01
  8. 흠..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닥 ,,,, 밍~~~~~~~~ 밍~했던 ,,,,

    2007.10.10 21:23
  9. 나두  수정/삭제  댓글쓰기

    생각보다 안슬프고;;
    별루던데...
    울긴했지만;ㅅ;

    2007.10.10 22:12
  10. Favicon of https://bbcoen.tistory.com BlogIcon BB코엔  수정/삭제  댓글쓰기

    잘 읽었어요^^ 제가 감독님이 의도한바대로 영화를 잘 이해한 것 같은 생각이 들어 흐뭇하네요 ㅋㅋ;; 트랙백 겁니다^^

    2007.10.11 11:05 신고
  11. 똘똘이  수정/삭제  댓글쓰기

    허구헌날 조폭에 멜로, 불치병 솔직히 볼게없다. 스크린쿼터 폐지해라

    2007.10.11 11:10

멜로 서사로 회귀한 허진호

필진 리뷰 2007.09.14 11:41 Posted by woodyh98
2007.09.13


[화양연화]의 차우는 앙코르와트 사원 구멍에 무언가를 말한 후 진흙으로 막는다.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의 밥은 샬롯에게 귓속말로 말하고 샬롯은 웃는다.
그러나 [외출]의 마지막, 인수와 서영은 차 안에서 서로 소통하고 공감한다.


들어가는 말.

요컨대 허진호 감독의 세 번째 작품 [외출]은 허진호식 사랑의 전범을 뒤집는 영화다. 그는 이전 작품들, 즉 [8월의 크리스마스]에서는 죽음을 앞둔 남자에게 새로운 사랑의 탄생을 선사하면서 완성되지 않은 사랑도 아름다울 수 있음을 알려주었고 [봄날은 간다]에서는 시간을 개입시키면서 사랑의 담론을 탈신화화 작업으로 풀어내는 놀라운 기운을 보여줬다. 그러나 [외출]은 한마디로 끔찍한 작품이다.

영화는 전반에 걸쳐 왕가위의 [화양연화_ In The Mood For Love]와 소피아 코폴라의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_ Lost In Translation] 두 작품 중간에 다리를 걸친 어정쩡한 모습으로 일관하고 있다. 좀더 냉혹하게 말하자면, [외출]은 [화양연화]의 형식을 답습하고 변형시키는데 만 몰두한 영화라고 규정지을 수밖에 없다. 아마도 감독은 마지막 까지 고민했을지 모른다.

인수와 서영의 관계를 어떻게 처리해야하는지에 대해서, 어쩌면 이 부분만 [화양연화]로부터 자유로웠을 뿐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러한 결과가 나왔는지에 대해서 설명이 필요할 것 같다. 따라서 이 비평은 [외출]이 어떤 방식으로 [화양연화]의 관습과 형식을 답습했고 어떻게 변형시켰는지를 찾아가는 이야기가 될 것이다. 또한, 오는 10월에 개봉 예정인 허진호의 신작 [행복]과의 만남을 앞둔 시점에서 전작의 오류를 복기해보려는 목적이 있기도 하다.



 

하나. 낯선 장소

[외출]은 교통사고를 당한 불륜남녀의 배우자가 병원에서 만나는 것으로 이야기가 시작된다. 남자는 조명감독 인수(배용준 분)이고 여자는 평범한 주부인 서영(손예진 분)이다. (영화에서는 분명 서영이 자신의 입으로 살림을 한다고 말하고 있는데, 영화사이트마다 그녀의 직업을 중학교 교사로 표기하고 있음은 황당한 일이다.) 그 둘은 삼척이라는, 병원이라는 낯선 공간에서 만나게 된다. 또한 피해자의 장례식이 있는 낯선 마을에도 함께 하고 있다.

[화양연화]속 차우(양조위 분)와 리첸(장만옥 분) 역시 각각 낯선 공간으로 이사를 오면서 둘의 관계가 시작되고 있다. 그렇다고 이것만으로 두 영화의 친연성을 말하는 주장하는 것은 억지일 것이다. 공간이란 사람의 감정을 낯설게도 하고 익숙하게도 만든다. 비록 처음만난 사이일지라도 공간이 주는 의미는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낯선 공간에서 만난 남녀를 지배하고 그들을 환기시키는 것은 그들이 놓여진 공간이 갖는 상징성이다.

두 영화 속 주인공이 낯선 장소에서 서로를 만난다는 것을 동질성으로 인식하기 위해서는, 이후에 펼쳐지는 내러티브 방식까지 감안할 때 가능한 것이다. 그런 점에서 [화양연화]의 남녀와 [외출]의 남녀는 동일한 방식으로 감정의 변화를 일으키면서 스토리를 끌어간다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이것은 카메라와 미장센, 음악까지 모두 한 패가 되어 협조하고 담합하는 것으로 완성된다. 두 영화 모두 소통불능과 거리두기를 낯선 공간 안에 집어넣음으로써 사랑의 서사를 이어가고 있는 것이다.


둘. 소통의 부재

리첸과 차우는 각각 자신들의 배우자와 소통의 부재를 겪는 사람들이다. 영화 속 그들의 배우자는 목소리만 들려지거나 뒷모습으로 표현될 뿐이다. 마찬가지로 [외출]의 두 남녀 역시 배우자와의 오랜 시간 소통불능을 겪어온 사람들이다.

인수와 인영의 배우자들은 서로 문자메시지를 통해 교류해왔고, 대학서클에서부터 소통해온 관계였다. 그들은 사고 이전부터 수 없이 만나 밀회를 즐겨왔을 것이다. 영화는 이들의 밀회장면을 찍은 모습만 보여줄 뿐, 인수와 서영이 각자의 배우자와 행복했던 시절의 어떤 단편도 플래시백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들이 배우자와 오랜 시간동안 소통의 불능을 겪어왔다는 점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소통의 불능은 거리두기로 이어진다. [화양연화]에서 리첸과 차우는 상대 배우자의 역할을 연기하면서 감정의 수위를 조절하고 있다. [외출]의 인수와 서영 역시 한 동안을 감정의 절제를 통해서 수위조절을 하려 애쓴다. 병원과 모텔에서 수 없이 마주치지만 눈인사를 주고받는 정도에서 그칠 뿐이다.

그러나 이글거리는 욕망은 애초에 예견된 대로 변곡점의 등장만을 기다리는 듯 하다는 점에서는 차이를 보인다. 그래서 서영은 횟집에서 본색을 드러내며 이렇게 말한다. “우리 그냥 사귈래요?” “복수하게요” 이렇듯 [화양연화]가 욕망을 연기하고 앙코르와트에 진흙으로 막았던데 반해 [외출]은 욕망을 연기하지 않고 당당하게 현재화시킨다는 차별화를 통해서 결말을 미리 암시하고 있다.


셋. 미장센 또는 벽

[화양연화]에서의 미장센은 등장인물을 한쪽 공간에 배치시키는 의도적인 프레임 안에 있었다. 다시 말해서 등장인물 뒤에는 벽이 있었다는 말이다. 벽을 배경으로 한 미장센으로 인해 인물들의 고독은 더욱 깊게 다가왔고 이때 벽은 소통하기 힘든 대상의 은유로 사용되었다. 마찬가지로 [외출]에서도 비슷한 미장센을 다시 만나게 된다. 인수와 서영이 처음 만나는 장면을 보면 그들은 수술실 벽을 배경으로 나란히 앉아있다.

또한 식물인간인 채로 누워있는 각기 배우자들 병상에 앉아 있는 장면이 거듭나오고, 일반병동으로 옮겨진 이후에도 계속된다. 또한 피해자에게 조문을 다녀오던 날, 서영은 들판을 바라보며 통곡한다. 인수 역시 한쪽 곁에 서있을 뿐이다. 낯설고 생경한 땅, 삼척이 주는 모든 기운들은 그들을 더욱 고립되고 소통불능의 상태로 몰고 가고 있다. 벽과 말 못하는 중환자와 낯선 땅이 주는 의미는 동일하게 사용된다. [화양연화]가 이러한 미장센을 통해 욕망의 연기를 가져왔다면, [외출]은 정반대로 기능하고 있다. 즉, 소통불능의 절박한 상황에서 간절한 소통의 욕망을 환기시키면서 둘의 관계를 급진전하도록 개입하는 장치로 쓰이고 있는 것이다.


넷. 카메라 기법

[외출]이 [화양연화]의 영화작법을 차용한 흔적이 가장 농후하게 나타나는 것은 카메라 기법이다. [화양연화]에서 카메라는 편심초점_ Shallow Focus를 (두 명의 등장인물이 있는 경우 한쪽은 분명한 클로즈업을 사용하고 한쪽은 흐리게 처리하는 방식) 번갈아 사용하면서 소통의 부재와 욕망을 표현했다. 또한 남녀가 나란히 있는 장면에서도 수평적 위치를 고수하는 카메라는 인물의 심리를 대리하면서 완전한 소통의 불가능을 환기시켰다.

[외출]에서 카메라 역시 편심초점을 사용하면서 그들의 소통부재를 표현하고 있다. 인수와 서영이 가까워지기 이전까지는 계속 편심초점을 유지하고 있지만 그들이 욕망을 실현한 이후에는 오히려 수평위치에서 촬영된 장면이 대부분이다. 이것 역시 그들의 불안한 심리상태에서 오는 불완전한 소통을 읽게 만드는 카메라 연출방식이다.


다섯. 욕망의 연기(延期)와 사랑의 서사

[화양연화]에서 리첸과 차우는 호텔 2046호에서 함께 무협소설을 쓰며 삶을 이야기 하고 있지만 결국 그들은 욕망을 연기하고 사랑의 서사를 탈신화화 시켜버린다. 기존 사랑의 서사가 무엇인가. 남녀가 만나 사랑에 빠지고, 장애물을 만나지만 이를 극복하고 사랑을 완성하는 관습을 통해서 영화는 사랑의 서사를 낭만적이고 극적으로 그려왔다. 대체로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멜로드라마는 이러한 서사적 관습을 유지하고 있다.

하지만 왕가위를 비롯한 몇몇 감독들은 사랑서사의 탈 신화 작업을 계속해왔다. 이것은 허진호의 이전 작품에서도 발견되는 현상이었다. 즉 완성되지 않는 사랑, 장애에 막혀 사랑을 이루지 못한 주인공들을 등장시킴으로써 영화는 사랑이 변할 수 있음을 환기시켜왔다는 것이다. 그리고 완성되지 못한 사랑은 좌절된 사랑이 아닌, 연기된 사랑으로 해석될 수 있음도 일깨워주었다. 그러하기에 [봄날은 간다]에서 유지태가 말한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 라는 대사는 참으로 어리석은 소년의 이야기일 뿐인 것이다. 그것은 낭만적 사랑의 신화를 믿는 순진한 청년의 질문이다. 한국영화 속 어린남자는 여자에게 부담스런 존재라는 소리가 나오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당대의 사랑은 변한다. 변하기 때문에, 절정에 순간, 손에서 미끄러지기 때문에 더욱 매혹적인 것이다. 그러나 끊임없이 떨어지는 바위를 굴려 올려야 하는 프로메테우스의 운명을 가진 이들은 사랑의 변심에는 아랑곳 하지 않고 여전히 사랑이 목마르다고 외치고 있다.


여섯. 신화로의 회귀 규명과 배용준

그러나 [외출]에서 허진호는 전작에서 보여준 탈신화화를 포기하기에 이른다. 마지막까지 고집하던 방식을 영화 엔딩에 이르면 슬그머니 내려놓으면서 항복을 하고 만다. 그렇다면 사랑의 담론을 풀어내는 방식이 탈 신화에서 신화서사로 회귀한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그것은 감독만이 알 수 있는 일이겠으나, 명백한 것은 주인공인 배용준을 배제하고 이 숙제를 풀기 힘들 것이라는 점이다.

배용준이라는 연기자는 영화와는 썩 적합지 않은 인물이다. 대사와 동선에서 영화배우보다는 탤런트에 가까운 모습을 보여 왔기 때문이다. 그는 배우라기보다는 스타에 가까운 인물이다. 게다가 그의 트레이드마크인 부드럽고 달콤한 미소와는 거리가 먼 내면의 연기가 필요했던 이 영화에서, 사랑과 증오와 분노와 욕망이 교차하는 표정을 짓기에는 각인된 그의 이미지가 너무 강했다.

물론 이를 극복하기 위해 상당히 노력하는 흔적은 곳곳에 보이지만 오히려 감정의 과잉을 낳으면서 내러티브가 엉성해지는 결과를 가져오고 말았다. 또한 이유 없이 롱 테이크로 처리해야 하는 장면이 많아지면서 단발로 튀어나오는 어정쩡한 대사의 반복은 감정의 연결고리가 끊기는 결과를 가져왔다. 결국 지나치게 긴 호흡을 감당하기에는 배용준과 손예진의 연기력이 턱없이 부족했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다. 아니 애초에 캐스팅미스라는 것이 올바른 표현일 것이다. 게다가 많지 않은 대사들 중 결정적 대사들을 의미 없는 장면에서 심각하게 쏟아냄으로써 스스로 스포일러를 유포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서울서 다시 만난 두 사람이 강변을 걷던 장면을 보자. 여기서 서영은 “너무 멀리 온 것 같다.” 라고 말하면서 마치 둘의 관계가 씁쓸하게 끝날 것처럼 암시하지만, 봄이 오고 화분을 산 그녀는 인수에게 화초를 건네는 장면에서 “이거 죽이면 안 돼요” 라고 말함으로써 자신의 마음이 인수에게 있음을 전달함과 동시에 둘의 관계가 허망하게 끝나지 않으리라는 믿음을 갖게 만들고 있다.

아마도 배용준의 팬들은 인수가 두 번 씩이나 같은 아픔을 겪게 되길 원치 않았을 지도 모른다. 인수와 서영이 최종승자가 되어 서영의 말대로 달콤한 복수극에 성공하기를 원했을 수 도 있다. 하지만 95%를 지배한 드라마구조를 한 순간에 뒤집는 엔딩 신은 어떤 이유로도 이해하기 힘들다. 그것이 허진호식 사랑의 담론이라면 더욱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외출]은 강원도 삼척이라는 바닷가의 외진 병원과 모텔을 오가면서 변두리가 보여주는 느낌을 담아내고 있다. 불륜의 배우자를 둔 남녀의 사랑을 표현함에 있어 첫사랑의 떨림 같은 순수함을 배가시키기 위해서였다면 오히려 도회지보다는 변두리의 정경이 설득력 있을 수 있다. 그러나 80년대의 재현방식을 통해서 21세기 코드를 풀어내려 했다는 것은 전혀 허진호 답지 않거니와 이해하기 힘든 대목이다.

영화의 배경은 갓등이 있는 오래된 모텔의 객실, 메모지가 덕지덕지 붙어있는 1980년대 인테리어 방식을 차용한 ‘자전거도둑’이라는 카페, 죽서루 근방의 횟집 등이 주 무대이지만 그들의 화법은 80년대 대학미팅에서 오가던 대사와 크게 다르지 않다. 묻고 대답하고 다시 같은 질문을 상대에게 묻는 반복질문 방식을 도입하면서 마치 사랑에 눈뜬 초심자처럼 인물들을 포장시켜 놓는 것이다. 체로키 지프로 이동하고 핸드폰으로 소통하는 시대를 사는 그들에게 가슴 떨리는 사랑을 빙자한 어설픈 화법은 영화를 완전히 망쳐버리고 말았다. 차라리 대사가 없었더라면 더욱 좋았을 영화이다. 분명, 대사가 불필요한 영화였다.

나가는 말.

낭만적 사랑이던 불륜의 사랑이던 금기된 사랑이던 사랑은 사랑 그 자체로 의미를 지닌다. 허진호는 [봄날은 간다]를 통해서 ‘낭만적 사랑은 허구’라고 외쳤다. 그런 그가, 전작의 상처를 이기고 새로운 외출을 시도한 [외출]속 주인공을 통해서 ‘이런 사랑도 있다’라고 설파한다.


 봄 눈
      정 호 승

봄눈이 내리면 그대 결코
다른 사람에게 눈물을 보이지 말라
봄눈이 내리면 그대 결코
절벽 위를 무릎으로 걸어가지 말라
봄눈이 내리는 날
내 그대의 따뜻한 집이 되리니
그대 가슴의 무덤을 열고
봄눈으로 만든 눈사람이 되리니
우리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사랑과 용서였다고
올해도 봄눈으로 내리는 나의 사랑아


하지만 이 영화는 두 사람의 사랑을 애써 정당화하려는 우를 범해버렸다. 어차피 극복될 수밖에 없는 장애요소로 인수의 장인을 등장시키고, 아내를 병상에서 일으켜 세우며 서영의 남편을 하늘나라로 보낸다. 게다가 영화의 영어제목(April snow)처럼 4월에 눈을 내리게 하더니, 그 둘을 다시 강원도행 지프 속으로 밀어 넣는다. 굳이 그러지 않아도 됐다. 장애와 난관을 극복하고 사랑의 완성을 이루기에는 그들의 처한 현실이 너무도 절박했고 소통의 필요성과 욕망의 해갈이 시급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들을 가로막는 장애라는 것은 거의 없었다. 둘만 잘 하면 그만인 환경 아니었던가. [외출]은 갖은 카메라 기법을 동원해 한껏 긴 호흡으로 감정의 순간을 포착하려 애쓴 것 말고는 도무지 생각할 여지를 남기지 않는다. 배용준에게 치중된 장면 위로 의미 없는 대사가 흩날리는 ‘이발소 그림’ 같은 영화가 되어버리고 만 것이다. 그럼에도 허진호 감독의 차기작품을 기대하는 것은 [봄날은 간다]에서 보여준 사랑의 담론이 한 귀퉁이서나마 여전히 가쁜 숨을 내뱉고 있음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것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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