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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흥기


음악 다큐멘터리는 마틴 스콜세지의 <샤인 어 라이트>같이 간명하게 음악 그 자체에 초점을 맞춘 영화가 있는 반면에, 김태용 감독의 <온 더 로드 투>와 같이 음악인의 행보에 그 초점을 맞춘 영화도 있다. <소규모아카시아밴드 이야기>의 경우, 어느 한 쪽에 치우치기 보다는 양쪽에 모두에 각기 한발씩을 걸쳐 놓은 그런 음악 다큐멘터리가 될 것이다. 홍대를 주 무대로 활동하고 있는 ‘소규모아카시아밴드’는 ‘민홍’과 ‘은지’로 구성된 혼성 2인조 밴드이다. 다양한 음악 활동을 위하여 객원 멤버들을 충원하고 프로젝트 그룹을 결성하기에 이르며, 객원 멤버 중에서는 소규모아카시아밴드를 통해 데뷔해 큰 인기를 얻은 여성 보컬 ‘요조’도 포함되어 있다. 장장 1년 6개월이란 시간동안 동거 동락하면서 정성스럽게 기록된 이 영상은 다큐멘터리의 기록성이란 측면에 일단 충실하다. 그런데, 이 다큐멘터리 좀 이상하다. 다큐멘터리치고는 드라마가 굉장히 세다. 물론 이를 통하여 극적인 재미가 상당히 쏠쏠하지만, 이것이 원래의 자연스러운 진행인지, 아니면 연출에 의한 결과인지에 대해서는 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워낙에 구구절절한 사연을 지니고 있는 휴먼 다큐멘터리에서도 볼 수 없는 진한 드라마가 풍겨 나온다는 것이 무언가 미심쩍다. (간단한 예를 들어보자, 인간극장 유의 TV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의 경우 내레이션이 첨가되면서 극에 깊숙이 개입하고 이를 통해 드라마를 파생시킨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는 이 조차도 불가능하다.)


이야기를 조금 더 확장해보자면, 일전에 <워낭소리>가 다큐멘터리의 진실성에 대하여 적지 않은 파장을 몰고 온 적이 있었다. 물론 <워낭소리>가 290만 대단위 관중 동원의 대박을 터트리지 않았다면, 이런 논란도 크게 부각되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논쟁이 단순한 일회적 이슈거리 차원에서 제기되었다고 보기는 힘들다. 이것은 관객과 영화 매체간의 일종의 장르적인 약속을 주지시키기 위한 경고인 셈이었다. 그러니까, 다큐멘터리라 명명해 놓고, 극영화를 보여주면서 이를 다큐멘터리로 인지하라고 강요한 연출자에게 보내는 일종의 구두 경고인 셈이다. (김충렬 감독은 따라서 정한석 기자가 지적했다시피 <워낭소리>를 차라리 다큐드라마로 표방하던지, 그렇지 않다면 다큐멘터리에 맞게끔 편집해야 했다.) 그렇다면, 다큐멘터리에서 극적인 전개를 이끌어 내기 위해 사용된 장치를 살펴보는 일 또한, 이를 통하여 볼 때 한 번쯤은 고려해 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 그리하여, 이에 대한 연장선상으로 <소규모아카시아밴드 이야기>를 이에 이입하여 이야기를 이끌어 나가보도록 하겠다. 그러니까 <소규모아카시아밴드 이야기>가 과연 극적인 효과를 이끌어내기 위해 조작 -그것이 카메라에 의한 조작이든, 편집에 의한 조작이든, 어떤 식의 이야기 조작이던 간에- 이 있는가를 따지는 것은 지금 우리가 다큐멘터리의 장르성에 대한 약속을 받아내기 위하여 매우 중요한 일이다. 이 영화는 앞서 얘기했다시피 드라마가 강하다.

 


이야기는 이렇다. 소규모아카시아 밴드가 음악적인 다양한 시도를 하기위하여 객원 멤버를 모집하고, 객원 보컬인 ‘요조’도 영입되면서 원래 팀 보컬이었던 ‘은지’의 입지는 계속 축소되어 간다. 결국 공연에서 객원보컬인 ‘요조’의 백킹(일종의 메인 보컬 보조)만 맡은 ‘은지’는 이를 참지 못하고, 팀의 리더인 ‘민홍’에게 불만을 토로한다. ‘민홍’은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에 당황하고, 때마침 팀 내 파트별 음악적 방향에도 트러블이 생기며, 상황은 악화 일로로 치닫게 된다. ‘민홍’은 팀의 객원 드러머와 베이시스트에게 잠시 휴식기를 권유하고, 팀의 보컬인 ‘은지’와 진솔한 이야기를 통하여 이를 풀어나간다. 그리고 결국 ‘은지’와 솔로로 데뷔한 ‘요조’는 한 번의 파열음을 이겨내고 대한민국에서 가장 큰 록 공연장이라고 불리는 펜타포트의 무대 위에서 같이 노래를 부르며 영화는 끝이 난다.

스토리 자체는 어디에서나 있을 법한 이야기인데, 문제는 이 방식이 너무 드라마 적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드라마적인 구성이 다큐에 차용되었다는 것에 대해서 한 번은 의심해 볼 필요가 있다. <워낭소리>의 편집 조작이 다큐멘터리가 가지지 못하는 극적인 효과 욕심 때문에 파생되었던 것처럼, <소규모아카시아밴드 이야기> 또한 이런 인물간의 대립을 드라마적인 장치로 치환하면서 극적인 효과를 노리지 않았는가에 대해서 확인 점검을 하는 일은 쓸데없는 일이 아니다.


이 영화의 진실성을 의심하게 하는 첫 번째 부분은 영화의 초반부이다. 그러니까 이 영화의 중심을 이끌어나가는 플롯은 뭐니 뭐니 해도 ‘은지’와 ‘요조’ 두 보컬간의 미묘한 대립과 갈등이며, 그것을 팀의 리더인 ‘민홍’이 조절해 나가는 것인데, 영화의 초반부에서 벌써부터 카메라는 ‘은지’와 ‘요조’사이의 불안한 공기를 포착한다. ‘은지’의 불만이 담긴 시선과 ‘요조’의 불안한 시선이 이어 붙는데, 여기서는 편집 조작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시선의 일치를 살펴볼 필요 없이 한 테이크로 간 화면이기 때문이다. 다만 은지의 시선이 요조 때문에 불만인 것인지. 요조의 시선이 은지 때문에 불안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것이 드라마적인 작법에 해당하는 암시 효과를 노렸다는 것이다. 여기서 일차적인 의문점이 발생한다. 이 질문에 대한 자문자답을 해보자면, 이 다큐의 충실한 기록성이 그 답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니까 그 많은 기록들 가운데, ‘은지’와 ‘요조’ 사이가 나빠 보이는 장면이 있을 수도 있다. 그것이 물론 두 멤버간의 와해를 부추기는 직접적인 원인으로 지목될 순 없지만, 일단 어떤 전조를 읽히도록 배치하는 것은 큰 문제가 없을 것이다. 이것은 편집에 의한 조작이 아니라 관객의 선택권의 문제로 넘어가기 때문이다. 이 장면을 배치한 것에 분명 감독의 의도가 명확하지만, 그 의도를 받아들이는 것은 어디까지나 관객의 몫이다. 여기는 그래서 연출자의 직접적인 개입이 없고 관객의 선택적인 문제만이 존재할 뿐이다. 하지만 두 번째 의문은 조금 다르다.


영화는 초반부의 이런 암시효과 이후에 ‘은지’와 ‘요조’ 사이의 불안한 관계를 점진적으로 밝히며, 종국에 가서는 둘 사이의 강렬한 파열음을 일으키며 발생하는 와해를 그대로 담는다. -‘요조’에 대하여 조금의 관심이 있는 사람이 있다면 알겠지만 이 장면이 바로 ‘요조’가 대중들에게 성공적으로 어필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 ‘EBS SPACE 공감’ 단독 무대였다. 여기서 논외적인 부분이지만, 이 장면을 통해 다큐멘터리의 또 다른 특성인 숨겨진 뒷이야기에 대한 흥미로운 지점을 제공한다― 여기서 발생하는 두 번째 의문은 영화가 이런 작법을 시도하면서 ‘요조’라는 실제 인물에게 주인공과 대립되는 드라마적인 캐릭터를 입혔다는 사실이다.

그러니까 <소규모아카시아밴드 이야기>는 시네마베리테의 형식에 가깝다. 간간히 화면 속으로 연출자가 개입을 시도한다. 직접 질문을 던지기도 하고, 인터뷰를 다큐멘터리에 적극적으로 활용하기도 한다. 그리고 편집을 통하여 연출자의 의지를 적극적으로 드러낸다. 그렇다면 연출자의 의지란 무엇인가? 음악에 대한 열정이란 콘텍스트 적인 면모도 있지만, 방식 적으로 봤을 때, 이 다큐멘터리에서 연출자가 추구한 것은 드라마적인 구성에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니까 아까 말 한 멤버들 간 의 불화가 최고조로 치달았을 때, 바로 인터뷰가 치고 들어오는데 이 인터뷰의 의도가 사뭇 의미심장하다. 팀 보컬인 ‘은지’의 인터뷰에 비중을 두고 기술하면서, 그 중간에 ‘요조’의 인터뷰가 인서트 된다. 이 인터뷰의 내용을 들어보면 불필요하게 ‘은지’의 편에 서있다는 느낌이 강하다. 그러니까 ‘요조’가 소규모아카시아밴드를 배반하고 자신은 성공을 위해 그럴 수밖에 없다는 말만을 인서트 시킴으로서 완벽하게 ‘은지’라는 인물에 영화가 기운다. 그럼으로써 이 영상의 조합이 ‘은지’라는 인물에게 ‘요조’가 상당히 부당한 일을 저질렀다는 인상을 주는데, 그 부당함을 해소시키는 일은 ‘은지’와 ‘요조’ 간 의 직접적인 대화가 생략된 채 팀 리더 ‘민홍’에 의해서 ‘은지’가 위로를 얻어냄으로서 해소된다. 그러니까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연출자가 장면을 선택적으로 취하여 인물간의 대립 구도를 구체적으로 부각시켰다는 점이다. 마이클 무어의 다큐멘터리 같은 경우도 사실 이와 마찬가지 방식이 쓰인다. 그 역시 선택적인 장면을 취하여 프로파간다에 비견되는 다큐멘터리를 연출하고, 직접적으로 대립 아니 그 이상의 대항적 대상을 직접 명시함으로서 자신의 목적을 분명히 밝힌다. 하지만, 이 둘의 차이는 마이클 무어의 지목한 대상이 명시적인 캐릭터가 아닌 주체가 불분명한 거대한 집단 혹은 현상이란 점이다. 그러니까 이것이 현실과 연결 고리를 갖는 것은 어떤 대상의 피상적인 비난이 아닌 자기 자신의 의지 발아(대표적인 것으로 투표)였던 것에 비해, <소규모아카시아 밴드>에서는 대립적 캐릭터로 다루어야 했던 대상이 실제 단일 인물로서 다루어진다는 것은 아예 얘기 자체가 틀려진다. 그것은 명백히 관객이 이 드라마를 즐기기 위해서 그 인물에 관해여 공격적인 행세를 취해야 하기 때문이다.


다큐멘터리는 어쨌거나 현실과의 접점을 가지는 장르이다. 따라서 어디까지나 자신이 다루는 인물에 대한 책임 의식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 극영화는 자신이 다루고자 하는 인물에 책임을 지 닐 필요는 없다. 영화에 아무리 흉악범이 나온 들 그것을 사회 문제로 치환하지 않듯이, 극영화 즉 만들어진 이야기 구조 안에서는 캐릭터의 성질에 대한 책임 의식 부재를 탓 할 필요는 기 때문이다. 오히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와 <데어 윌 비 블러드>같은 영화의 악인 캐릭터에서 풍겨져 나오는 이런 비인륜적 태도는 영화적 매력으로까지 꼽히기도 한다. 그러나 다큐멘터리가 다뤄야 할 인물은 다르다. 특히 그것이 생존 인물일 경우에는 더더욱 말이다. 다큐멘터리가 가진 일종의 약속. 그러니까 진실성에 기인하다 보면, 결국 다큐멘터리의 인물은 다큐멘터리 안의 인물의 표상과 직결될 수밖에 없는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이 다큐멘터리에서는 드라마를 위한 극적인 장치로 대립적인 캐릭터를 설정한다. 거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실제 멤버들 간의 이해관계가 형성된 것과는 별개로 적대적인 캐릭터로 묘사된 이미지를 요조라는 실제 인물이 그대로 현실에서도 떠 안아야 한다는 점이다. 이것이 가지는 진정한 문제는 이것이 실질적인 내용상의 문제 말고도 드라마적인 구성에서 파생되는 형식상의 조작 문제이기 때문이다. 만약 멤버들 간의 요조가 이해가 되었다 하더라도, 이 다큐멘터리의 극적인 장치를 통해 관객에게 호소하는 요조라는 인물을 이해시키기는 힘들 것이다.

그러니까 첫 번째 문제. 즉 드라마를 구현하기 위해 극적인 내러티브 구조를 채택한 것은 이 다큐의 충실한 기록성을 통해 편집이란 작업으로 시도된 일종의 다큐멘터리 연출로 이해 될 수 있다. 하지만, 두 번째 문제인 극적 구성을 위해 실제 인물에 캐릭터 설정을 덧씌워 파생하는 이미지의 불결함에 대해서는 결코 쉽게 용서될 문제가 아니다. 물론 나 역시도 성공을 위해 감사의 말도 없이 밴드를 박차고 나가 버린 요조라는 인물에 전적으로 동의 할 순 없다. 하지만, 이 영화의 극적 구성이 부여하는 캐릭터로 사용되어진 그녀의 이미지가 이 다큐멘터리라는 장르로 인하여 현실에 영향을 끼친다는 것은 상당히 이해하기 힘든 일이다. 영화적인 힘을 무시하지 말라. 영화도 일종의 미디어이다. 특히 다큐멘터리의 경우 그것은 명명백백하다. 맨 끝에 이를 어설프게 미봉하면서 은지와 요조를 같은 무대에 세워 그 이미지는 지워졌을지 모르겠지만, 결국 인상은 남고 관객은 그 인상을 토대로 사유하게 될 것이다. 나는 이 다큐멘터리가 실제를 전복 시킨 가짜라고 말하진 않겠지만, 다큐멘터리가 가지는 일종의 사회적인 책임을 회피했다고 말하고 싶다.

이 영화는 사실 다큐멘터리치고 매우 재밌다. 나 역시도 이 영화를 매우 흥미진진하게 본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한 가지 아쉬움으로 남는 것은 다큐멘터리란 장르가 가지는 관객과의 약속 즉, 진실성이란 측면에 의해 사료해 본다면, 여기서 나온 ‘요조’라는 인물에 대한 배려가 약간 아쉽다는 것이다. 요조라는 실제 인물은 드라마적인 구조를 위해 너무 쉽게 사용되어지고 버려진 느낌이 있다. 이것이 극영화가 아닌 이상 인물에 대한 배려를 해주었던 것이 필요했다. 아무리 사전에 조율되고 합의가 된 사항이라고 하더라도, 나는 이런 제작 배려가 다큐멘터리에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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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낭소리]와 어느 이상한 인터뷰

필진 칼럼 2009.02.18 10:59 Posted by woodyh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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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쁜 숨을 몰아쉬며 달려가 <다우트>를 본 지난 주말의 일이다. 극장을 나와 핸드폰을 켜니 몇 개의 부재중 전화가 남겨져있어 시네마테크문제와 관련하여 몇 사람과 통화한 다음, 모르는 전화번호를 눌렀다. KBS 텔레비전 프로그램 제작사의 직원이라는 사람이 전화를 받았는데, KBS로부터 외주를 받은 방송콘텐츠 제작업체의 작가 쯤 되는 것 같았다. 용건은 <워낭소리> 열풍에 즈음한 전문가 인터뷰를 하고 싶다는 것.

인터뷰를 요청하는 전화란 것이 대체로 자신의 소속과 이름을 먼저 밝힌 후 인터뷰 목적을 알리면서 가능여부를 묻는 것으로 진행되기 마련이다. 하지만 상대방은 아무런 이름이나 소속도 밝히지 않은 채 KBS 프로그램 명칭만 알려주며 인터뷰를 부탁해왔다. 게다가 자신이 작성한 원고 내용에 대하여 동의하는지를 먼저 물었다. 크게 잘못된 점이 없다고 여겼기에 대체로 동의한다고 대답했다. 갑작스런 한파가 몰아친 일요일 오후로 인터뷰가 잡혔고 장소는 집에서 가까운 홍대로 정해졌다.

다음날, 약속대로 인터뷰 장소에 나갔고, PD라는 나이 어린 남자가 방송용 카메라를 들고 나타났다. 이 친구 역시 자신의 소속이나 이름을 밝히지 않은 채 본론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오전에는 강남의 극장에서 관객을 취재했고, 독립영화 촬영장을 찾아 독립영화감독의 이야기도 들었다고 했다. 몇 마디 나누자 단박에 독립영화를 거의 보지 않은 사람임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이 친구가 <워낭소리>도 보지 않았을 거라고 확신했다. 물론 그는 영화를 보지 않았다고 했다. 정작 재미있는 일은 뒤에 벌어졌다. 그러니까 흥미롭게도 질문과 답변을 동시에 써와서는 내게 “대략 이런 내용이 포함된 말씀을 해주세요.”라고 부탁하는 것이다. 전날 통화했던 여자가 내게 물어보고 동의를 구했던 내용과 흡사했다. 그러니까 이런 식이다. <워낭소리>를 비롯한 독립영화를 지원해야 하는 이유로, 관객의 문화다양성 요구가 커지고 있으며, 어려운 시대에 감동을 얻고 싶어 하는 대중의 심리를 독립영화에서 찾을 수 있기 때문에 독립영화를 지원해야 한다는 식으로 말해달란 것이었다. 물론 크게 틀린 말은 아니지만, 나는 문화다양성이라는 말에 담긴 뉘앙스가 맘에 들지 않았다. 독립영화를 지원하는 일이 문화다양성 측면과 무관한 것은 아니지만 자칫 구색 맞추기나 어려운 사람 형편 봐주기, 더 심하게 말하면 불쌍한 놈 떡 나눠주기 쯤으로 가치하락 될 소지가 있기 때문이었다. 뉘앙스가 바뀌지 않는 범위 내에서, 그러나 PD라는 친구가 원하는 답을 살짝 틀어 대답하는 것으로 인터뷰를(아주 순식간에) 마쳤다.

예상대로 인터뷰는 편집되었고 방송에 나오지 않았다. 대신 내가 한 말들은 다른 원고와 자막으로 이용되었다. 방송 하루 전 미안하다는 전화가 한 통 왔을 뿐이다. 뭐, 전화까지나. 어차피 당신들이 누구인지도 모르는 판국에. 물론 그들이 제작한 콘텐츠는 화요일 아침 KBS 텔레비전 아침 프로그램에 방송되었다. 내 대신 문화평론가란 사람이 PD가 내게 요구했던 바로 그 내용을 앵무새처럼 반복하는 것으로 말이다.

이것이 현실이다. 독립영화가 한 편 흥행하니까 여기저기서 덩달아 난리다. 독립영화 한 편 본적 없는 사람들까지 독립영화이야기를 해대고, 훈수 두겠다고 설친다. 자신이 무엇을 얘기하고 있는 지도 모른 채 에둘러 독립영화의 중요성과 지원을 떠들어대고 있는 형국이다. 아는 게 없으니 콘셉트가 올바를 리 없고 기획단계에서부터 갈팡질팡하니 정작 중요한 것은 모두 수면 아래로 잠겨버리고 만다. <워낭소리>는 이 땅의 방송제작자들이 독립영화에 대하여 얼마나 무지하고 무관심했는지를 단적으로 알려주는 계기가 된 셈이다. 그날 오후 나는 얼음장 같은 몸을 두 팔로 감싸 안고 입버릇처럼 하던 말을 주절거리면서 집으로 돌아왔다.

“기타만 깁슨이면 뭐하나! 손가락이 따라주질 못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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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임임  수정/삭제  댓글쓰기

    오호,

    2009.02.18 16:00
  2. Favicon of http://www.moviejoy.com BlogIcon 무비조이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런 일이 있었군요...

    저도 이 글 읽으면서 반성하게 됩니다..

    앞으로 저 역시도 더 많이 노력해야될 것 같습니다..

    작은영화 살려야 된다고 입으로만 떠드는 것은 아닌지 스스로
    반성해봐야겠습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2009.02.18 18:44
  3. Favicon of http://lifedaegu.com BlogIcon JK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저 이슈일 뿐이겠죠. --;

    2009.02.18 19:35
  4.  수정/삭제  댓글쓰기

    매스컴에서 미리 시나리오 써갖구와서 대사연습 시키는거야 뭐 새삼스런 일도 아니죠.

    개콘의 "황PD의 소비자고발"이 그냥 과장된 개그만이 아니라는건 알만한 사람은 다 알고 있으니.

    2009.02.19 09:48
  5. Favicon of http://blog.mintong.org BlogIcon 하민혁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주 예전에 인터넷신문을 하던 때가 생각나는군요.
    엇비슷한 방식으로 진행된 인터뷰라는 걸 몇 번 한 적이 있는데, 그 몇 번이 지난 후에는 아예 요청 자체가 사라져버리더라는. 그 동네서도 이른바 블랙리스트라는 게 도는 듯.

    2009.03.03 1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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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40년을 함께 한 오래된 파트너가 있다. 한 평생을 ‘농군’으로 살아온 할아버지와 그의 발이자 충직한 일꾼이 되어 준 한 마리 늙은 소. <워낭소리>는 정직한 카메라와 시종일관 툴툴대면서도 이 둘의 관계를 이해할 수밖에 없는 할머니의 목소리를 빌려 우리네 소소한 삶의 위대함을 노래한다. 특히나 문자 그대로 ‘묵묵히’ 일에만 매진하는 아버지, 그리고 그 옆에서 또한 말없이 제 몫을 다하는 소의 이미지가 묘하게 겹쳐지며 여러 해석의 차원과 큰 울림을 가져다주는 작품이다. 특히나 속도전의 가치를 강요하는 이 시대에 할아버지와 소의 느릿하지만 묵직한 진정성은 아릿한 감동을 주기에 충분하다. 방송 다큐멘터리로 잔뼈가 굵은 이충렬 감독이 3년 넘게 할아버지의 삶을 기록한 <워낭소리>는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 최우수다큐멘터리 상을 수상한데 이어 2009 선댄스영화제 다큐멘터리 부문 경쟁부문에 진출해 있다. 이제 우리는 검증된 양질의 다큐멘터리를 직접 스크린으로 만날 일만 남았다. 그 전에 이충렬 감독이 직접 들려주는 작품의 뒷얘기에 귀 기울여 보자.


하성태: 곧 선댄스영화제에 참석한다고 들었는데, 요즘 인터뷰 때문에 정신없겠어요.

이충렬: 살다보니까 선댄스도 가고, 미국도 가보고. 20일에 가서 한 폐막에 맞춰 26일까지 있을 거예요. 제 선택이라기보다 선택을 받은 거라 모든 것이 당황스럽고 반신반의해요. 실감도 나지 않고요. 영화에 대한 열망이 없던 방송 PD였기 때문에 더 더욱 그렇고요. 가보면 또 달라지겠지만 지금은 생소하고 상당히 부담스러울 뿐이죠. 다만 <워낭소리>를 사람들이 좋아하고 호감을 가져주니까 좋긴 한데. 어떻게 표현을 못하겠어요.


할아버지는 건강하세요?

옛날보다 안 좋으시죠. 나이가 들어가시니까. 노환이라는 게 그렇잖아요, 치료가 되는 것이 아니니까. 일은 계속 지금도 하세요. 할머니가 건강이 좀 안 좋으신 거 같고. 젊은 소가 이명박씨를 닮은 것 같아요. 엄청난 속도전에 대단히 빨라요, 무식하고.


어린 소들이 일반적으로 그런 줄 알았는데 그 소 성격이 좀 더 그런가 봐요?

그 소가 성격이 그래요. 그래서 할아버지랑 잘 안 어울리죠. 할아버지는 소를 타고 간다는 느낌이 들었는데 지금은 배달된다는 느낌이 드니까. 역시 파트너는 정해지는 거 같아요. 그 할아버지와 소와 관계가 깨져버렸으니까. 영혼이 죽어버리면 육신이 남더라도 결과적으로 오래가지 못하겠죠.


영화 속에서 제일 짠한 장면이 할아버지가 술 한 잔 걸치시고 (늙은 소와)같이 죽고 싶다고 말할 때였는데요.

그 양반은 이렇게 보면 되요. 그 분을 신성화하거나 천연기념물로 볼 소지가 있어요. 농약을 치지 않고 사료를 안 쓰는 농법이 대단한 철학에서 나온 걸로 볼 수 있는데 그게 절대 아니에요. 불편한 다리를 가진 할아버지가 자기 일부이던 소가 없어지면 더 이상 살 수 없다는 걸 알기 때문에 본능적으로 매달리는 거죠. 그렇게 미화하면 안돼요. 제가 그 분들 삶을 ‘오픈’시키지 않은 것도 마찬가지 이유고.


아, 맞아요. 그랬다간 ‘기봉씨’처럼….

어휴. 기봉이 전에 <그 곳에 가면 영자가 산다>는 인간극장이 있었어요. 아버지는 피살됐고, 영자는 절로 들어가 비구니가 됐어요. 그럼 안 된다는 거죠.


다큐멘터리가 무서운 부분 중 하나가 그런 점 인 것 같아요.

조선일보에서 그 쪽에 사진을 찍으러 가겠다고 하더라고요. 왜 이렇게 사람들을 특화시키려고 하는지. 전 할아버지를 특화시키려고 한 적이 없거든요. 제가 오랫동안 할아버지를 괴롭혀 드렸잖아요. 저 때문에 소가 죽었을 수도 있었다고 생각하고요. 그 분 삶은 자신 뜻대로 가야지 구경거리가 되면 안 되잖아요. 그렇게 된다면 모든 원인은 저한테 있는 거고요. 아드님한테도 알려지게 하지 말라고 부탁드렸어요. 그런데 SBS에서는 벌써 내려갔다 왔다고 하더라고요.


다큐멘터리 작가들의 딜레마가 그런 부분 아닐까요? 카메라와 대상과의 거리 설정 문제랄까. 시간도 시간이고 얼마나 대상과 관계를 잘 맺는가도 문제고요.

제가 원래 방송으로 시작했는데, 방송 시스템은 작가들이 리서치를 많이 하고 PD들이 현장에서 찍은 걸로 협의해서 편집을 해요. 저는 사실 그런 시스템이나 제도에서 실패한 사람이에요. 그래서 혼자 작업을 하면서 실패도 많이 했어요. 방법은 깨지고 실패하면서 배우는 거 밖에 없어요. 그래서 더 많은 시간이 필요했고. <워낭소리>를 시작하던 당시는 멋있게 얘기해면 비장하고, 그대로 얘기하면 마지막 선택이었어요. 실패를 거듭하면서 돈도 많이 깨지고 울화병으로 얻은 공황장애 때문에 일상생활이 힘들었거든요. 그렇게 황폐해진 순간에 마지막 승부수를 건 거죠. 이전의 문법이나 화법으로는 안 되는구나 싶어서 과감히 방향을 틀었는데 다행히 성공을 한 것 같아요. 모든 감독들이 자기만의 세계에 매몰되는 경험을 한 번은 다 하거든요. <워낭소리>는 철저하게 나보다 관객들이 볼 때 어떤 작품이 될까를 염두에 뒀어요.


그럼 극영화 같다는 의견에 대해서는 조금 황당하겠어요. 어차피 다큐멘터리도 편집이 개입할 수밖에 없는데 말이죠.

우리가 말하는 독립이라는 것이 확고한 테두리를 가지고 있는 거잖아요. 원래 자기 땅이 있었는데 뺏겼으니 나라를 찾아 독립 운동을 하는 거고(웃음). 다큐 정신이라는 걸 잘 알고 거기에 충분히 동의해요. 그런데 다큐라는 이름으로 다 용서되고 재미없어도 된다는 건 아닌 거 같아요(웃음). 그렇다고 해서 ‘대중 추수적’으로 천박하게 기생하면서 비유를 맞추는 건 문제가 있겠지만. 날것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 다큐 본연에 맞을지 모르지만 ‘리얼’이라는 것에 대해 늘 고민을 많이 했어요. 있는 그대로 기록하는 것이 선택사항인지 의무사항인지 말이죠. 결국 삶을 훼손했느냐 조장했느냐의 문제겠죠. 있는 그대로의 원형질을 가지고 편집해도 날 것은 있는 그대로기 때문에 감흥이 없어요. 악센트도 없고. 전 표현하는 방식에 있어 내 문법이나 화법을 썼을 뿐이지 본질적으로 드라마다, 아니다 하는 건 아니라는 거죠. <워낭소리>의 포인트가 일하고 늙고 사라진다는 존재론적인 의미를 반추했다면, 근본적으로 사라짐에 모든 것이 걸려 있어요. 그래서 정서를 차근차근 단층들로 쌓아 올린 거죠. 할아버지와 늙은 소, 할아버지와 젊은 소, 젊은 소와 늙은 소,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관계, 할머니와 늙은 소, 젊은 소의 관계들을요. 그래서 촬영도 카메라 두 대를 가지고 리액션을 다 찍었어요. 계절도 그래요. 그저 관계에 집중하다 보니 봄이 가고, 여름이 가고, 가을이 오고, 겨울이 온 거에요. 그저 계절을 찍는 것과는 접근 방식이 좀 달라요. 그래서 좋은 풍경도 뺐어요. 단지 기계적으로 계절을 기록한 것처럼 보이기 싫어서요.


인물들의 감정을 자연스럽게 담는 것이 중요했다는 얘기로 들려요.

미디엄 숏, 롱 숏이 많은 이유도 딱 하나에요. 할아버지와 소의 걸음처럼 내가 그들의 일상에 템포를 맞춰야지 내가 빠르거나 느려버리면 이미 마찰음이 나고 자연스럽지 못한 거죠. 그래서 자연스럽게 카메라워크가 결정이 났고 그 형식이 최적의 작법이었던 거죠. 이야기를 가장 전달할 수 있는 방식을 택하다 보니 그렇게 편집을 한 건데 그게 죄라면…(웃음).


아버지와 소라는 주제 자체가 굉장히 설득력 있어요. 그 아이템을 잡은 시기가 2000년이라고 들었는데 꽤나 오래됐네요.

독립 방송PD들은 소재에 굉장히 민감해요. 방송은 아이템을 어떤 걸 잡느냐에 따라서 반은 승부가 갈리니까. IMF 시기에 가부장이 붕괴되면서 수난을 당하는 고개 숙인 가장의 이미지가 많았잖아요. 그래서 저 또한 아버지에 관심을 가졌고요. 전 세상에서 가장 슬픈 것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고 잊혀 지는 거라는 걸 독립 PD생활을 하면서 직감했어요. 꿈과 현실이란 부분에서 괴로워하며 줄타기를 했던 시기였거든요. 그러면서 고개 숙인 아버지와 그 슬픈 사라지는 일을 매치시킬 수 있었죠. 이충렬이란 사람이 꿈을 가졌지만 별 볼일 없이 명함도 못 꺼내고, 결혼도 못하고 있었는데, 그런 잊혀 진다는 위기감이 아버지에 대해 너무 이기적으로 살았다는 느낌과 맞물린 거죠. 전 무언가를 대비시킬 때, 가장 최악일 때 반대로 가장 최고였던 걸 보여주면 그 간극들이 이상하게 마찰을 일으킨다는 느낌이 들거든요. 그래서 유년 기억 속에 봉인되어 있던 아버지와 소, 그들의 전성기를 되살려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때 아버지의 느낌이 사금파리 같았거든요. 사금파리는 깨어진 그릇의 파편들이잖아요. 한때는 빛났으나 지금은 필요 없어진 사금파리와 같은 존재들이 아버지와 소라는 느낌이 들었던 거죠.


그럼 점에서 캐스팅이 정말 탁월하단 생각이 들어요.

그들의 교감과 헌신을 통해 소위 일한다는 것, 나이 든다는 것, 병든다는 것, 사라진다는 것의 존재론적인 의미들을 곱씹어 보자, 되씹어 보자는 측면으로 기획을 했어요. 그래서 바로 2000년도에 캐릭터를 찾아 나섰는데 조건이 필요했죠. 그 대상이 좀 ‘올드’해야겠다, 정상적인 거 보다 핸디캡이 있어야겠다. 그래야만 그들의 고난과 헌신이 빛을 발하고 사람들이 절실하게 느낄 것 같았어요. 쇠락한 고향에, 그 고향을 닮은 아버지와 그 아버지를 닮은 소. 그리고 불굴의 의지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제가 방송 출신이다 보니 뿌려놓은 곳이 많잖아요. 예전에 일했던 이장님, 농협, 우시장 이런 대 개인적으로 전화를 드려서 연락망을 확보하고 수시로 연락을 드렸죠.


그렇게 몇 년이 걸린 거죠?

2005년도에 봉화 쪽에서 연락이 왔어요. 대상에 대한 감은 왔지만 이 할아버지가, 할머니가 어떤 사람이고 소가 어떤지 몰라 정보를 리서치 할 시간이 필요했어요. 중요사항을 찍으며 생활해 보니 그 분의 일상이 보이고, 동선이 보이더라고요. 2005년 겨울에 젊은 소가 들어오면서 대결 구도가 보였고요. 그 관계들이 보이니까 밀어붙였죠. 2006년 12월에 소가 죽었는데 2007년 4월까지 젊은 소를 찍었어요. 햇수로 3년이 걸린 거죠.


촬영이 힘들었다는 것이 짐작이 가는 이유 중 하나가 촬영감독이 여러 명이더라고요.

더 많았는데 뺀 거예요, 너무 많아서(웃음). 제 돈으로 완성한 것이 아니니 그 사람들이 저를 기다려 주지 않잖아요. 한두 달 외국 나가는 것이 돈 더 되고 하는데 무작정 기다려줄 수는 없으니까요. 전체적인 기조는 명확했어요. 핸드핼드는 일체 말고 죽든 살든 지켜봐라! 특히 비디오는 못 찍어도 좋으니 오디오는 찍어라. 왜냐하면 카메라를 들이 대면 원형질이 안 나와요. 할아버지가 자꾸 의식하고 다른 말을 하니까. 그래서 “그림은 눈에 보이는 허상일 수 있다, 차라리 소리에 집중해라”고 했죠. 소리가 좋으면 그림은 별로 중요하지 않거든요.


제목도 워낭 ‘소리’잖아요. 자연의 소리와 화면이 매치되면서 사색의 순간을 제공한다는 점이 매력 있었어요.

그림은 다 똑같아요. 일상은 반복되니까. 아무리 예쁜 그림을 넣어도 사람들이 정작 느끼는 것은 자기 유년의 기억이나 아버지를 떠올릴 수 있는 소리에요. 주술 같은 거죠. 새소리, 소 울음소리, 아버지 헛기침, 신음 소리. 보는 것은 큰 감흥이 없어요. 눈 먼 사람이나 귀 먹은 사람이나 다 똑같이 진정성을 느낄 수 있는 것이 리얼리티라고 생각하거든요.


반면 촬영으로 강세를 준 부분도 있잖아요. 우시장에서 고속촬영으로 찍었다거나….

아, (우시장에서 소를 팔러 갔을 때)집으로 가라고 하는 장면이요? 그건 그렇게 생각했어요. 어떤 순간보다 당황스러울 때 귀가 먹먹하고 정지된 것 같잖아요. 그 땐 할아버지 생에 있어 가장 치욕적인 순간일 수 있어요. 소도 두 번 눈물을 흘리는데, 처음이 헤어짐의 눈물이라면 두 번째는 자존심의 눈물이죠. 그 장면은 그냥 기법이라기보다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예를 들어 젊은 소가 할아버지가 쳐서 쓰러뜨리는 장면에서 정지 컷이 있잖아요. 그건 제가 (화면 안으로) 뛰어 들어가서 제가 잡혔기 때문이에요. 그걸 잘라내기 위해서 정지 처리 한 거고요. 처음부터 지켜보는 것이 의도였기 때문에 과감하게 스틸을 걸었던 거지 다른 의도는 없어요.


하하. 저도 그렇고 관객들도 굉장히 놀랐는데 그런 사연이 있네요. 사실 그런 얘기들 있잖아요. 종군 사진기자가 급박한 상황에서 사진을 찍어야 하느냐, 사람을 구해야 하느냐 하는, 직업 정신에 관한.

위험할 때 사람을 구하는 게 우선이지, 아무리 직업이 좋아도 그건 나쁜 놈들이죠. 직업 정신은 무슨. 자기가 총 맞았을 때 카메라를 안 놓으면 직업 정신인데 남 죽을 때 좋은 장면 찍으려고 하면 나쁜 놈들이죠.


내레이션은 할머니 목소리로 대체했잖아요. 그건 할머니의 인터뷰 부분과 실제 화면과 겹쳐 놓은 목소리를 모두 사용한 거죠?

두 가지를 생각했어요. 할머니를 내레이터처럼 보이게 하자는 것도 있었고,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서로 대화하는 것처럼 보이려고 그런 기법을 쓴 거죠. 인터뷰 같지만 서로 주고받는 대화처럼 보일 수 있게.




개인적으로 욕심이 났던 장면은 없었나요? 이런 건 꼭 찍고 싶었다 하는.

초반엔 임팩트 있는 장면을 잡고 싶었어요. 송아지 낳는 장면도 그렇고. 그런데 며칠을 기다려도 안 나와서 출발했더니 3시간 있다 낳았다고 하더라고요. 외양간이 무너졌다고 해서 달려갔더니 불도저가 밀어버리고. 솔직하게 길 위에서 소가 쓰러져 죽기를 바랐던 마음도 있었어요. 일 하다가 처참하게 죽었으면, 하는 사악한 마음도 가졌었고.


다큐멘터리 작가라면 충분히 그런 욕심을 가질 수 있잖아요.

그런데 편집하고 관객 반응을 보면서 큰일 날 뻔 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 장면을 포착해서 넣었다면 영화가 잘 되지 않았겠다 싶어서. 예를 들어 늙은 소가 죽을 땐 제가 찍었더니 더 비장한 마음으로 거칠게 찍었어요. 그런데 그 부분 첫 장면이 할아버지가 넘어 진 늙은 소에게 일어나라고 욕하는 거잖아요. 사실 소가 넘어지는 장면이 있었다면 관객들이 저 할아버지 정말 잔인한 사람이다, 어떻게 소가 쓰러져 죽을 때까지 가혹하고 노동을 시키느냐고 했을 거예요. 뒤에 감동이 전혀 살아날 수 없다는 말이죠. 차라리 못 찍은 것이 더 좋은 효과를 내지 않았나 싶어요. 사람들은 매번 센 걸 원하지만 그것이 능사가 아니라는 걸 느꼈죠. 또 그런 쪽으로 승부하면 안 되겠구나, 쓸 때 없이 욕심내지 말고 있는 그대로 해야겠다는 교훈을 얻었어요.


굳이 소가 쓰러지지 않아도 그간 할아버지의 감정이 켜켜이 쌓여있고 전달이 된 거 같아요.

딱 하나에요. 감정을 켜켜이 단층처럼 쌓아갔잖아요. 지금 얘기한 부분들이 그걸 허무는 작업이었고, 그것이 관객들의 가슴을 치는 걸 원했죠. 그건 철저히 (카메라가) 관계 속에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 같아요.


그래도 놓친 장면 중에 아쉬운 장면이 있다면요.

할아버지와 소의 관계겠죠. 더 좋은 장면이 많았어요. 서로 교감하는 장면도 그렇고. 제가 상주하면 더 찍을 수 있었겠죠. 근데 또 너무 많으면 도식적일 수 있어요. 적당한 게 좋죠. 전반적으로 충만한 거 보다는 조금 허하게 비쳐졌으면 싶었어요. 커트도 너무 넉넉하면 사람들이 배부를 거 같아서, 간질간질한 상태에서 끊어버렸어요. 보여줄 때는 확실하게 보여줬지만. 머리로 인식하기보다 가슴으로 인식하는 것이 쉽지 않더라고요. 그래서 철저하게 어린 시절에 느꼈던 정서를 가지고 진행했죠.


그 장면은 일부러 연출한 건가요? 읍내에서 농민들이 FTA 관련 시위를 하잖아요. 그 앞에서 할아버지와 달구지를 끄는 소가 딱 멈춰 서자 관객들이 자지러지던데.

자기 고집대로 사는 할아버지가 세상에 나가 달구지를 탄다는 것 자체로 구경거리가 된다는 걸 알고 있었어요. 구시대의 질서와 새 시대의 질서나 풍경들이 부딪칠 때 어떤 문제가 나올까 고민했죠. 연출한 것이 아니에요. 할아버지와 어디서 만나자고 약속하고 전 차를 타고 와서 먼저 동선을 잡았죠. 시위를 하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그때 바로 저거다, 저 앞을 지나면 그림이다 하는 감이 왔는데 다행히 (소가) 서는 거예요. 게다가 카메라가 두 대였으니 너무 쉽게, 너무 자연스럽게 찍었죠. 감독의 정치적인 의도라기보다 할아버지가 스쳐지나가는 풍경이고 삶을 구성하는 요소라고 봐줬으면 좋겠어요. 관점에 따라 사람마다 다르게 봐야할 부분이고, 또 웃기려고 한 것도 아니고요.


만약 소가 안 죽었다면 영화가 어떻게 바뀌었을까요?

그랬다면 계속 찍었겠죠. 원래 의도한 것이 사라지고 늙는 것에 대한 기록이었으니까. 또 제가 방송 몇 년인데요. 소를 보니까 딱 심난한 거예요. 걸어가는 것 보니까 이미 다 죽어가요(웃음). 또 자주 넘어지기도 했었고. 중요한 건 그렇게 넘어지고 나서 소 얘기만 나오면 할아버지 얼굴이 진지해지는 거예요. 그때 갈 때까지 가도 되겠다 싶었죠.


가족들이 모두 모이는 추석 장면은 여러 감정들이 들더라고요.

부산국제영화제 버전은 좀 악의적인 편집을 했었어요. 자식들이 나쁘다는 걸 떠나서 할아버지 뜻 말고 자식들끼리 의사결정을 해서 소를 팔자고 하는 모습이 안 좋게 보였어요. 사실 모든 자식들이 그렇잖아요. 나도 저러는 구나 싶기도 하고. 우리 자식들의 모습을 초상해서 보여주고 싶었어요. <워낭소리>가 부모에 대한 헌사이기도 하지만 나에 대한 반성문이기도 해요. 할아버지가 쓰러졌다 일어나는 장면도 그래요. 우리네 아버지들은 저렇게 쓰러지면서도 고난을 딛고 꿋꿋하게 일어서는데 우리 자식들은 안 그러거든요. 그런 모습을 보면 자기가 부모님한테 무얼 했나 생각하게 되잖아요. 그런 느낌들을 바랐죠.


저도 많이 찔렸어요(웃음). 퓨전국악 그룹 ‘아나야’의 음악은 많이 쓰인 편은 아니지만 울림이 있더라고요.

오리지널 스코어하고 라디오 소리, 또 현장음이 있잖아요. 원래 라디오 소리로 음악이 많이 들어가는데 저작권 때문에 부득이하게 다 편집을 했죠. 의도와 다르게 뉴스 소리로 시사적인 내용을 넣을 수밖에 없었고요. 음악은 피아노와 대금 위주로 갔어요. 신파가 될 것 같아 이 친구들이 만들어 온 음악을 많이 잘라 냈어요. 그 보다 아쉬운 건 타이틀이 뜨고 소가 걸어갈 때 ‘봄날은 간다’란 노래를 쓰고 싶었거든요. 그 가사가 소의 인생을 표현한다고 생각했는데 현실적인 부분 때문에 쓸 수 없어 아쉬웠죠.


확실히 <봄날은 간다>가 대중적으로 명확하게 의도를 드러낼 수 있었을 것 같아요.

나중에 음악다큐를 해 보려고 했는데 안 되겠더라고요. 돈이 너무 많이 들어서. 안 되는 건 하지 말자 싶었죠(웃음)





좀 큰 얘기 해 보자면, 방송이지만 다큐멘터리 활동을 오래 해 왔습니다. 다큐멘터리에 대한 본인만의 자의식이 있다면요.


참 조심스러운 부분인거 같아요. 꾸준히 영화 쪽에서 다큐멘터리 활동을 해 왔던 감독도 아니고. 다큐의 본질은 같지만 역시나 표현 방법이 다른 거 같아요. 좀 더 원칙이나 본질을 확보하려는 쪽이 독립영화 진영이고, 좀 더 엄격하고 민감해 하는 것 같고요. 방송은 다큐라고 하지만 온갖 잡것이 다 들어가 있는, 돈으로 뿌려대는 테크닉이라고 할까요? 드라마 형식으로 촬영한다거나 CG를 쳐 바른다거나, 절대 그러면서 유익하지도 않고 재미도 없는. 그건 현상적인 측면일 수도 있겠죠. 전 실패를 하면서 그간 가져왔던 생각을 바꿔왔어요. 저도 운동을 했기 때문에 그 연장선상에서 다큐를 도구로 봤어요. 다큐가 보통 시대적인 요구에 의해서 프로파간다로 시작됐음은 분명하지만 세상은 변해 가는데 자꾸 칼이나 총으로만 쓰려고 하는, 변혁이나 비판으로만 편식을 하려는 부분이 없지 않아 있었어요. 저 개인적으로 그런 부분에 집착하다보니 실패했던 거 같고. 또 다큐는 치외법권 같았어요. 재미는 없어도 의미만 있으면 된다는. 그래서 특별히 관심이 없는 사람들한테서는 점점 멀어진 것 같고요. 너무 창작자만을 위한, 연출자만을 위한 다큐라서 그런 건 아닌가 싶고. 문제의식이 있고 철학이 잇는 건 좋지만, 관객들과 소통도 못하고 피드백이 없으면 안 돼요. 음식으로 비유하자면, 조리사가 이 음식이 건강에 좋으니까 맛이 없어도 일방적으로 먹으라고 편식을 시키는 건 안 되죠. 원형질이 보존되고 원재료에 리얼리티가 확보된다면 조미료를 뿌리더라도 사람들이 맛있게 먹어야 되는 거 아니에요? 저는 그것이 리얼리티를 손상시킨다고 보지 않아요. 원형질의 문제가 아니라 표현 방식의 문제죠. 우리 일상은 판타지가 없나요? 우리가 꾸는 꿈이나 상상은요. 눈에 보이는 것만을 리얼리티라고 규정해버리니까 그런 문제가 발생하는 거죠. 다큐멘터리도 판타지가 가능하다고 보거든요. 지금은 분명 다양성이 존재하잖아요. 저도 살아보니 구호나 이슈보다 나이 먹을수록 모든 게 내 마음으로 향하는 거 같아요. 자기성찰이라고 해야 하나? 일상으로 들어와서 내면으로 천착하는. 전 소소함의 위대함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할아버지나 소와 같은 무명씨들의 소소함, 위대함을 보여주는 것이 제가 앞으로 하고 싶은 다큐멘터리에요.


정리를 하자면 사적인 거에서 보편적으로 확장될 수 있는 그런 주제들 말인가요?

왜냐하면 저도 사적이지 않은 것들을 많이 고민해 봤지만 우리 사회는 운동가들도 그렇고 그런 분들이 너무 과잉이에요. 그래서 나 같은 사람들은 일정정도 사적인 부분을 긁어주면 더 좋겠다 싶은 거죠. 어떤 사람들은 다큐를 혁명이라는 마음으로 하는 사람도 있지만, 전 시인이라고 봐요, 사람들 마음을 바꾸는. 제가 하는 작업이 대단하지 않고 작은 부분이지만 인생을 살면서 사소한 것이 더 중요하다는 점이 눈에 들어왔어요. 일상을 가장 잘 전달하는 방법이 있다면 그게 극형식이어도 상관없을 것 같고요.


많은 분야를 섭렵하다가 내가 정말 하고 싶은 얘기를 해 봐야겠다 싶었던 건 언제인가요?

처음엔 애니메이션을 했는데 그림이라는 작업이 완전히 단순 작업공이에요. 그래서 내가 생각하는 세상을 만들어야겠다 싶어 연출 쪽으로 방향을 틀었죠. 일본에 가고 싶었는데 돈이 없어서 좌절되면서 그냥 사람 사는 이야기를 그리면 되겠지 싶었어요. 이것저것 다 해 보다 마지막에 만난 것이 다큐멘터리였어요. 전 비전향 장기수, 동성애자, 무당 같이 센 얘기를 주로 했었어요. <사이에서>가 나오지 않았다면 무당 이야기를 먼저 했을 텐데.


선댄스도 다녀와야 하고, 정신없겠지만 혹시 다음 작품을 구상하고 있다면요.

<워낭소리>보다 좋은 작품을 해야겠다는 생각밖에 없어요. 근데 사람이 간사해지더라고요. 이전 아이템들 다 파기해버렸어요. 당장 죽을 거 같았는데 살아나니까 예전 아이템들은 할 수 없더라고요. 사람들 잣대가 일단 <워낭소리>가 될 테니까 더 조심스러워지는 거 같아요.



진행.정리 : 하성태(편집스태프)
사진: 강연하(편집스태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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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장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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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비극이어라

사랑은 비극이다. 비극이기에 아름다울 수 있으며 눈물 흘릴 수 있는 것이다. <로미오와 줄리엣>은 비극으로 시작해 비극으로 결말 맺는 참으로도 몹쓸 사랑이야기다. 로미오와 줄리엣의 만남 자체가 비극이었듯, 그들의 사랑 또한 죽음으로마무리된다. 하지만 그 누구도 둘의 사랑을 아름답지 않았노라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송희일의 장편 데뷔작 <후회하지 않아>의 두 주인공은 서로를 만난 것에 대해 한 순간의 후회가 없다. 사회라는 거대한 통념아래에서 인정받지 못하는 사랑을 나누는 그들의 만남 또한 로미오와 줄리엣의 그것과 전혀 다르지 않다. 이렇게 사랑이란 고통받고 슬퍼해야하며 죽음마저 감당해야 한다. 사랑은 비극이기 때문이다.


 

유사 관계망을 지닌<워낭소리>와 <쌍화점>

비슷한 시기에 본 <워낭소리>와 <쌍화점>은 장르는 분명 다르지만 너무나도 유사한 관계망을 가지고 있는 작품이다. 그런데 두 영화에 나오는 삼각관계망은 기존 우리가 익히 보았던 것과 조금씩 틀려 오히려 매력있다. <워낭소리>의 할아버지의 애정의 집착은 그와 더 오랜 세월을 함께 했던 할머니가 아니라 그가 부리는 소이다. 할머니는 매일 소만 생각하는 남편을 원망하며 자신의 인생을 한탄한다. 그도 그럴 것이 할머니 고생하는 건 생각지도 않으시고 소의 곁에서 떠나지 않는다.

캐릭터가 다를 뿐 <쌍화점>의 구조 또한 비슷하다. 왕의 집착의 대상은 그를 보위하는 무사 홍림이다. 본연히 어여쁜 왕후가 곁에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남자를 사랑하는 운명을 안고 태어난 왕은 왕후보다 홍림을 먼저 생각한다. 그런 왕후는 왕과 홍림의 관계를 맹렬히 비판하고 집착해야 당연하건만 별로 그런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왜냐하면 홍림과 세자 만들기를 위한 합궁 후에 그를 사랑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음과 양이라는 육체는 속임도 없이 솔직하게 본연의 모습을 드러내고 둘을 사랑하게끔 만든다. 그로인해 오히려 질투하는 사람은 왕이다. 왕은 어쩌면 <워낭소리>의 할머니와 닮아 있다. 오래송안 사랑했건만 사랑한 대상은 자신을 돌보지 않고 다른 곳만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누구나 질투할 수 밖에 없는, 소를 바라보는 할아버지의 눈망울

<워낭소리>와 <쌍화점>은 그래서 비극적인 로맨스다. 이런 관계망 자체뿐 아니라 그들의 사랑이 죽음으로 귀결된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왕과 홍림의 처절한 최후는 마치 로미오와 줄리엣의 죽음처럼 처참하다. 하지만 난 그들의 죽음을 바라보다 왕후이 눈물보다 <워낭소리>에서 늙어 죽어가는 소를 바라보는 할아버지의 눈망울이 더 애잔하게 느껴졌다. 말도 못하는 소 앞에서 할아버지 또한 아무말 없이 바라볼 뿐이다. 그러니 불만 가득 넋두리를 늘어 놓는 할머니의 함숨이 왕이 왕후와 홍림의 관계를 향한 질투보다 더욱더 강하게 와 닿는다. 자신보다 더 낭만적인 로맨스를 즐기는 모습을 곁에서 지켜본다는 것이 얼마나 마음 아플까?



지독히도 비극적인, 그래서 아름다운 로맨스

소는 당연히 죽고, 남는 것은 할아버지의 사랑이다. 이 세상 어느 남녀, 불행하겠지만 어느 동성간의 사랑이 이보다 더 간절할 수 있을까? 할아버지는 '소가 죽으면 나도 따라 죽어야지'라고 말한다. 물론 그 말이 현실화되진 않는다. 현실은 현실이니까. 그래도 육은 살았지만 영은 죽어있으리라. 할아버지의 영혼은 소를 따라 저 세상으로 긴 여행을 떠났는지도 모른다. 소가 죽으면 나도 따라 죽겠다니? 생각해 보면 이 말은 멜로 영화 속에서 사랑하는 여인이 죽을 때 하는 대사다. 그것도 할아버지는 서스럼없이 진짜 사랑하는 사람을 생각하며 말하듯이 말하고 있지 않은가? 마치 로미오의 죽음을 보고 자신도 생을 마감하는 줄리엣처럼. 사랑은 이런 것이다. 그로 인해 아파하는 사람이 있고 설레여하는 사람이 있으며 종국엔 죽음도 있다. <워낭소리>는 감동을 주려는 다큐가 아니다. 인생을 보여주는 작품 또한 분명 아니다. 이것은 멜로 영화다. 지독히도 비극적인, 그래서 아름다운 로맨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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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낭소리

필진 리뷰 2009.01.09 15:38 Posted by woodyh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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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낭소리>의 힘은 단연 토픽의 선정에 있다. 신산한 삶을 함께 해 온 팔순 노인과 그의 마흔 살 먹은 소. 논과 밭을 가는 것은 물론이요, 다리가 부실한 할아버지의 달구지가 되어주는 이 소의 일상을 고정된 카메라로 잡아내는 것만으로 <워낭소리>는 단단하고 뭉클한 드라마를 만들어 낸다. 일중독에 가까운 할아버지와 그를 위해 평생을 소답게(?) 일 해 온 중년의 소, 그리고 이 두 사람을 애증(?)에 가깝게 지켜봐야 하는 할머니의 사연이 속도전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삶이란 무엇인가, 아버지의 존재란 무엇인가에 대한 묵직한
성찰을 유도해 낸다. 혹자는 너무 드라마틱하다고, 연출이 지나치다 타박할지 모르지만, 언제나 리얼리즘을 길어내는 다큐멘터리란 장르야 말로 편집의 미학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잊지 말도록 하자. 이충렬 감독의 <워낭소리>는 그러한 다큐멘터리의 장점이자 약점을 까맣게 잊게 하는 이야기와 영상미학의 결합을 시종일관 자랑하고 있다. 잠깐 동안의 휴식 동안에 담배를 물고 논을 바라보는 할아버지와 역시나 그렁그렁한 눈을 드러낸채 꼴을 먹는 소. 상징적인 이 컷만으로도 <워낭소리>의 가치는 차고도 넘쳐 보인다. 1월 15일 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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