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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인'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09.11.11 비스콘티가 카뮈를 만났을 때 (1)
  2. 2009.11.01 Orson Wells에 관한 두 개의 노트 ② (1)

비스콘티가 카뮈를 만났을 때

필진 리뷰 2009.11.11 14:00 Posted by woodyh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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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시원

카뮈와 비스콘티의 시간


1.
비스콘티 특별전 기간에 있었던 <이방인>(1967)에 대한 영화사 강좌에서 불문학자인 정의진씨는 카뮈의 이방인과 비스콘티의 이방인을 비교하는, 아니 그보다는 비스콘티가 카뮈의 무엇을 어떻게 재현했는지에 대한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카뮈의 『이방인』은 사르트르의 『구토』와 함께 나치시대의 대표적 실존주의 소설이자 복합과거의 시점을 적용한 효시적 작품으로 일컬어진다. 복합과거시점에서는 '나'라는 서술주체가 있고 그 '나'가 '나'의 내면심리를 해명하지 못하기 때문에 심리묘사가 아닌 행동과 분위기 위주의 묘사가 주를 이룬다. 이것은 문학가이자 저널리스트였던 카뮈의 특성(당대 미국의 소설들로부터 영향받은 것으로 보이는 사실주의적인 문체, 작가 레지스탕스 운동을 주도한 경력이 반영되었을 반사회적인 성향의 인물들)을 잘 드러내준다. 카뮈의 『이방인』은 인과론적 서술을 거부한 '영화적인 소설'로서 이는 비스콘티가 카뮈에 매혹되어 만든 영화 <이방인>을 이해하는데 있어 중요한 작용점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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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인』은 정오(正午)의 서사로서 완벽한 노출상태의 진리의 사상이다. 여기서 진리란 철학적, 추상적 진리가 아닌 감각적 진리, 즉 국가적, 도덕적 층위와는 다른 층위에 존재하는 진리이다. 과다 노출된 정오의 빛은 역설적으로 죽음의 색이다. 뫼르소 어머니의 죽음과 관련한 묘사가 특히 그러한데 햇볕을 투과시키는 양로원의 투명유리, 시체보관소의 지나치게 밝은 형광등, 장례식장과 해안가에서 동일하게 내리쬐는 빛 아래서 뫼르소는 강렬한 현기증을 느낀다. 카뮈의 알제리, 알제리의 정오, 카뮈의 정오는 과거가 없는 시간이자 권태의, 낮잠의, 슬픔이나 우수가 존재하지 않는, 꼼짝할 수 없게 만드는 정열의 시간이다. 이 정열의 빛은 매일을 잠들게 만드는 과도한 쾌락과도 같다. 뫼르소의 살인에 대한 스스로의 변명처럼 정오의 살인 주범은 실제로 '(우연적) 태양'이었던 셈이다.

『이방인』은 크게 1부와 2부로 나뉘는데 1부가 앞서 언급한대로 인과적 서사가 아닌 정경의 묘사에 치중한다면 살인사건 후의 2부는 과거를 재구성한다. 부조리함은 이 과거 재구성의 과정에서 발생한다. 1부가 뫼르소 1인칭의 기록적 내레이션으로 일관한다면 2부는 재판을 통해 뫼르소의 성찰을 강요한다. 동기가 충족되어야 하는 법정의 재판은 살인사건에 대한 인과론적 대상을 소환한다. 어머니의 장례식, 눈물을 흘리지 않고 슬퍼하지 않았던, 연인과 해수욕을 즐겼던 사실 등이 살인을 저지른 부도덕한 동기로 소환된다. 그러면서 이로부터 1부에서 설명되지 않았던 뫼르소의 가치관이 구체화된다. 이는 국가, 인종, 식민주의로부터 자유로운, 뫼르소적 자유의 정체성이다. 시대와 국가와 전통과 이데올로기로부터의 이방인, 낯선 자로서의 정체성이다. 뫼르소는 실존주의자를 대표하는 인물로서 현실의 가난함 속에서도 감각적 층위의 행복을 이끌어낼 수 있었던 능력을 가진 사람이었다. 이 행복은 최후에서 보자면 역설적인 개념으로 재탄생한다. 결국 뫼르소는 역설적 진리의 순교자였던 셈이다.

무신론자인 카뮈는 전통적으로 보자면 로마 그리스 신화의 다신교적 사상과 신을 인격화한 르네상스 시대로부터 영향관계를 짐작해 볼 수 있다. 반면 비스콘티는 예술에 대한 문명론적 이해를 가졌던 전통적 부르주아로서 서구 가톨릭의 영향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것은 이상주의자로서의 막시스트와 사실주의자로서의 네오리얼리스트였던 이중적 정체성의 모순과 연관하여 그의 영화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모티브가 된다. 계급 혁명의 실패와 정치적 이념에 대한 실망은 그를 19세기 문화예술에 심취하게 했고 그 문화예술의 근간인 기독교의 신화가 그의 후기 걸작들에 재현되고 있다. 그러나 비스콘티는 여타의 감독들과 달리 스스로를 이 성상화로부터 구원하지 않는다. 그는 네오리얼리스트로서의 정체성을 결국 마지막까지 유지한 셈이다. 그는 죽음을 향하는 스스로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밀지 않는다. 정신이 죽은 시대에도 그는 끝끝내 형이상학적 관념을 거부한다. 비스콘티는 철저한 리얼리스트였다.

"내가 보기에 뫼르소는 표류물과 같은 존재는 아니다. 그는 가난하고 가식이 없는 인간이며 한군데도 어두운 구석을 남겨놓지 않는 태양을 사랑한다. 그에게 일체의 감수성이 결여되어 있다고는 결코 말할 수 없다. 집요하기 때문에 그만큼 뿌리가 깊숙한 정열이 그에게 활력을 공급한다. 절대에 대한, 진실에 대한 정열이 그것이다. 이것은 아직 소극적인 진실로 존재한다는 진실, 느낀다는 진실이다. 그러나 그 진실이 없이는 자아와 세계에 대한 그 어떤 정복도 가능하지 못할 것이다. 그 어떤 영웅적인 태도를 취하지 않으면서도 진실을 위해서는 죽음을 마다하지 않는 인간, 나는 내 인물을 통해서 우리들의 분수에 맞을 수 있는 단 하나의 그리스도를 그려보려고 했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신성모독의 의도는 없다. 한 예술가가 스스로 창조한 인물에 대해 느낄 권리이자 아이러니한 애정이다." -『이방인』 영문판 서문 중

*이상은 강연에 대한 주관적 편집을 거친 글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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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정당함이 인정될 죽음의 새벽

비스콘티의 <이방인>은 판사 앞에서 변호인(진리의 대변인)이 필요하지 않다고 중얼거리는 뫼르소의 진땀 흘리는 한낮의 장면으로부터 시작하여 독방에 갇힌 채 자신의 삶의 유일한 변호인으로서 당당히 죽음을 맞이하겠다고 외치는 새벽의 시간으로 마감된다.

"참으로 오랜만에, 나는 처음으로 어머니를 생각했다. 왜 만년에 어머니는 '약혼자'를 정했는지, 왜 새로운 삶을 꾸며 보려고 했었는지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곳 생명들이 꺼져 가는 양로원 근처에서도, 저녁은 서글픈 휴식 시간처럼 느껴졌었다. 그런 죽음 근처에서, 어머니는 오히려 생의 해방감을 느끼고, 모든 것을 새롭게 살아 보고 싶었던 것일 게다. 어머니의 죽음을 슬퍼할 권리는 어느 누구에게도 없다...(중략) 표적과 별들이 드리운 밤을 지켜보며 나는 난생 처음으로 이 세상의 다정스런 무관심에 내 마음을 열었다. 이 세상이 그처럼 나와 동일하며 형제 같다는 생각에 나는 행복했으며, 또 지금도 행복하다고 느꼈다. 모든 것이 완성되기 위해서, 그리고 내가 외롭지 않다는 것을 느끼기 위해서, 내가 바라는 마지막 소원은 내가 사형을 당하는 날 보다 많은 구경꾼들이 나를 증오의 함성으로 맞아주었으면 하는 것뿐이다." -『이방인』 본문 중(김병일 옮김)

카뮈의 시간이 여행자의 정오, 그 낯설고도 어지러운 시간이라면 비스콘티의 시간은 추방자의 밤 혹은 새벽이다. 카뮈 시간의 최후에 들어선 <이방인>의 뫼르소(마스트로얀니)가 비스콘티 시간의 최후, 즉 <가족의 초상>의 교수(버트 랭가스터)나 실은 그보단 <루드비히>의 루드비히(헬무트 베르거)의 죽음의 형상을 불러들인다. 좀 더 묘사하면 새벽 별빛의 광휘에 쌓인 채 결연하게 사형장을 향하여 들어가겠다고 고백하는 독방의 마스트로얀니의 얼굴이 역시 푸른 새벽에 발견된 루드비히의 익사체, 그 훼손되지 않은 죽음의 미학적 결정체로서의 얼굴을 불러들인다. 이들의 죽음은 발견되기 위한 죽음이거나 구경꾼들을 염두한 죽음이다. 이것은 충분히 의식적인 죽음이다. 그렇다면 과연 무엇을 위한? 생의 고통을 내면화하지 않았음으로 이 육체는 구원이 필요 없었던 것임을, 즉 사후세계의 부활이 없다고 하는 것을 육체로서 증명하는, 혹은 이미 육체화 된 영혼에 대한 시각적 증명을 꾀하기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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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이 가기 전과 아침이 오기 전의 새벽, 죽음에 막 이른 육체는 세계와 생의 모순적 결정체이다. <가족의 초상>(1974)에서 구체적 대사를 통해 증명하듯 비스콘티에겐 (세상의) 풍경화가 곧 (생의) 초상화이다. 온갖 초상화들에 둘러쌓인 채 지내는 노교수는 부재하는 과거, 정치적 혁명의 시간과 성애적 사랑의 시간을 상상적 가족(인위적이고 억지스러운 비이상체로서의)을 통해 재현한다. 그는 밤의 시간마다 1층 침실에 누워 2층을 향해 자신의 이상을 스크리닝화 한다.


적막과도 같았던 밤의 시간이 떠들썩대기 시작하고 그 곳에선 혁명이 아닌 타락(근친상간과 테러가 난무하는)의 향연이 벌어진다. 2층은 거의 프롤레타리아화 된다. 교수는 이들을 자신의 1층, 즉 현실의 부르주아의 공간으로 초청한다. 교수는 이 시끄럽고 무질서한 부류에 대해 아이러니하게도 매력을 느낀다. 그는 고딕양식화 된 자신의 1층 침실의 시공간을 포기하지 못하면서 동시에 시공간적 질서라고는 없는 2층의 문란함에서 일종의 자유를, 혁명적 약동, 이것이 과장이라면 욕망의 분출감을 대리만족한다. 잠들지 않는 육체와 이로 인해 잠 못 드는 육체의 대비, 즉 능동적 삶과 피동적 삶으로서의 생. 비스콘티는 잠들어야 했던 시간에 '잠들 수 없었던' 시간을 재현하며 그 역사와 시대의 모순성을 드러낸다. 그 결정체는 앞서도 언급한 <루드비히>의 죽음의 시간, 그 암흑의 시간에 물속에서 발견되어야만 완성된다고 하는, 정치적 죽음을 미학적 죽음과 동일시하는 신념을 온 몸으로 실천한, 그리하여 그 육체를 상처 없이 죽음으로 이끌고 가야했던, 그럼으로써 역사적 죽음의 시간을 현상화시키고자 했던 그만의 정치미학적 사명에 대한 고뇌의 결과물로서의 그것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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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hitchwind.com BlogIcon 플린  수정/삭제  댓글쓰기

    알제리에서 가난한 청년이 소유할 수 있는 건 유일한 것은 파도와 태양 뿐이 없다고 했던 까뮈, 20세기의 초월적 인간상은 아마도 뫼르소의 그 투명한 의식 속에서 타오르지 않았나 하네요. 대학교 재학 당시 세 번 읽었던 '이방인' 아트시네마를 스케줄 상 가지 못했던 것을 아쉬워 했는데... 글 잘 읽고 갑니다.

    2009.11.20 16:14

Orson Wells에 관한 두 개의 노트 ②

필진 리뷰 2009.11.01 14:19 Posted by woodyh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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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석중

숙명론적 미궁- 개인과 세계, 그 내밀한 충돌


세계 영화사 혹은 영화 관련 서적들의 상석에 자리잡은 오손 웰즈의 데뷔작 <시민케인, Citizen Kane>(1941)은 기묘한 예지력으로 가득한 영화다. 마치, 웰즈의 또 다른 작품 <맥베스, Macbeth>(1984)가 이미 미래를 알아버린 인간의 비극을 보여주었던 것처럼. <시민 케인>은 웰즈의 그 이후의 삶을 거의 정확하게 예견하고 있다. 물론 이것은 사후적 해석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이론의 여지가 존재한다. 그러나 이왕 시작한 김에 좀 더 멀리 나가보자면, 웰즈의 지나친 명석함은 자신이 결국 어디에 이르게 될 것인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예견하고 있었던 것처럼 보인다. 웰즈와 스튜디오의 불화, 그럼에도 스튜디오 시스템이 반드시 필요했던 그의 프로젝트들. RKO의 전폭적인 지지를 통해 만들어진, 연극계의 신동이라 불렸던 젊은 감독의 데뷔작 <시민 케인>. 그리고 그 이후로 그를 기다리고 있었던 완만하고 어쩌면 필연적인 하락의 여정들.

거칠게 이야기해서, 웰즈의 영화들을 관통하는 주제는 개인과 세계의 접경지역, 그 지점들에서 벌어지는 격렬하며 내밀한 마찰과 충돌의 순간들에 관한 이야기들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경향은 그의 작품들 중 가장 스튜디오의 의도에 맞추어서 만들어 졌다는 <이방인, The Stranger>(1946)에서 확인 할 수 있다. 웰즈는 비범한 개인과 그를 둘러싼 세계가 부딪히는 과정을 주의 깊게 보여준다. 나치 전범인 찰스 랜킨 Dr. Charles Rankin / Franz Kindler은 종전 후 미국에서 평범한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그는 이중의 자아, 두 개의 이름을 가지고 있다. 그 중 하나는 세상에 드러나 있고, 또 하나는 자신만이 알고 있다. 어느 날 그에게 전쟁 중의 동료가 찾아온다.

자신이 묻어버린 과거 속의 누군가가 자신의 앞에 모습을 드러내는 것. 혹은 과거의 시간을 다시 마주하게 되는 것. 이러한 주제와 이야기 구조는 <아카딘 씨, Mr. Arkadin>(1955)에서 더욱 강화되고 반복된다. 숨기와 찾기라는 추적의 형식은 웰즈의 거의 모든 영화들 속에서 찾을 수 있는 공통점이다. 이러한 모든 사건들은 스크린 속의 빛과 어둠이 공존하는 세계 위에서 벌어진다. 영화사적 맥락에서 웰즈는 진정한 의미로서의 필름 느와르의 세계를 창시했다. 웰즈의 <악의 손길, Touch of Evil>(1958)은 필름누아르 장르의 완성형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내가 알고 있는 나 자신과, 세상이 알고 있는 나 자신 사이의 틈새. 그 사이에 웰즈의 영화들이 존재한다. 그의 영화는 나를 어디에 위치시킬 수 있는가에 관한 문제들을 다룬다. 과연 나는 어디에 존재할 수 있는가? 세계의 광장 한 가운데 인가? 아니면 가장 깊은 자신의 내부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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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 케인>은 케인의 죽음으로 시작된다. 당대의 언론 재벌이자 뉴스의 중심이었던 케인의 사망은 기자들의 관심을 끈다. 그들은 케인이 과연 누구였는지, 그가 마지막으로 남겼다는 ‘로즈버드’의 뜻을 알아내기 위해 생전에 케인을 알고 지냈던 사람들을 찾아간다. 그들은 케인에 관해 증언하지만, 증언자들의 기억은 케인을 설명하지 못한다. 영화는 친절하게도 로즈버드 라는 이름의 어릴 적 케인이 타고 놀던 눈썰매를 보여주는 것을 끝맺는다. 그러나 이러한 고의적인 드러냄으로 인해 진실에 대한 혼란은 더욱 가중될 뿐이다. 톰슨의 말: ‘그건 퍼즐의 한 조각일 뿐이야.’

종종 웰즈의 인물들은 숙명론에 심취한 고집쟁이처럼 보인다. 웰즈 자신이 직접 연기한 영화 속 인물들은 물론이고, 안소니 퍼킨스가 연기한 <심판, The Trial>(1962)의 주인공 K의 모습에서도 이러한 모습을 볼 수 있다. 모든 정황이 자신에게 불리할 것이 명백한 상황에서도 K는 물러서지 않는다. 그에게 세상과의 불화는 이미 준비 되어 있던 것처럼 보인다. 그는 용감하지만 무모한 돈키호테인가? 아니면 현명하지만 비극적인 자살자인가? 기관원들이 흘려버리듯 도망치며 던져 넣는 다이너마이트로 죽음을 맞이하는 K의 모습은 마치 폭사하는 시지푸스 같다.

그러나 웰즈는 인물들을 단순히 영웅적이거나 비극적으로 묘사하지 않는다. 그의 인물들은 평면적이거나 입체적이라는 단어로 쉽게 설명되지 않는다. <시민 케인>에서 케인의 충복인 번스타인은 전형적인 대중영화 화법의 조연 캐릭터처럼 보인다. 그러나 케인 재단을 운영하는 그의 늙은 모습을 보며 그가 혹시 현명한 광대는 아니었는지 생각해 보게 된다. 웰즈의 진정한 깊은 심도 deep focus는 공간이 아니라 인물들의 내면 묘사에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가 만들어내는 미장센은 종종 인물들의 내면이 거꾸로 뒤집혀 바깥으로 드러난 것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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웰즈의 영화 속 인물들은 '사이의 존재'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악의 손길>에서 웰즈 자신이 연기한 퀸랜 Hank Quinlan은 마지막 숨을 거두기 전에 손에 묻은 피를 씻으려고 강물에 손을 담근다. 그런데 강물에는 오물이 가득하다. 손에 묻은 피를 지울 수는 있겠지만, 정말로 그 손이 깨끗해질 수 있는지 우리는 알 수 없다. 그런데도 그는 아주 고집스럽게 손을 씻고 또 씻는다. 비대한 몸집을 지팡이에 의지한 채로 절룩거리며 걷는 그의 모습은 압도적으로 위압적이지만, 마치 덩치만 커다란 아이처럼 보이기도 한다. 오랜만에 그를 만난 타냐 (무성 영화 시절의 스타 마를렌느 디트리히가 연기했다.)는 그를 보고 '사탕과 초컬릿을 너무 많이 먹어 살이 찐 것 아니냐'고 말한다. 퀸랜이 동료에게 자신을 의심하는 사람들에 대해 불만을 토로할 때, 그는 마치 심통이 잔뜩 난 젖먹이 아이 같다.

웰즈는 인터뷰를 통해 찰스 포스터 케인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한다. "아마 그는 이들 모두를 사랑했을 것이다. 아니면 그 누구도 사랑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판단은 관객의 몫이다. 케인은 이기적이기도 하고 헌신적이기도 하다. 이상주의자이기도 하고 비열한 악당이기도 하며, 매우 위대한 인물인가 하면 별볼일 없는 하찮은 인간이기도 하다. 그를 이야기하는 사람에 따라 평가가 이렇게 다르다. 그는 한 작가의 객관성에 이해 판단되지 않는다."   - 앙드레 바쟁, 『오손 웰즈의 영화미학』 (p.88 현대미학사 1996)

웰즈에게 인간이란 고정된 개념과 말로 설명될 수 있는 단일하고 항상성을 지닌 존재로 이해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그의 평생에 걸친 셰익스피어에 대한 열정에서 우리는 그것을 유추해 볼 수 있다. 셰익스피어의 작품들이 지금까지 계속해서 재해석 될 수 있었던 생명력은 바로 끊임없는 갈등과 번민의 상황 속에 내 던져지는 인물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셰익스피어의 세계 속에서 인물들은 변절자, 제왕, 음모자, 가련한 희생자, 폭군 등의 역할을 수행한다. 그들은 그 나름의 자리에서 아주 격렬한 갈등과 번민을 겪는다. 이들은 마치 아주 짧은 구간을 눈이 볼 수 없는 속도로 왕복 운동을 일으키는 진자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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웰즈는 인물들을 숙명론적인 미궁 속으로 던져 넣는다. 그 안에서 갈등과 번민을 겪는 인물들은 그러한 과정을 통해 이제껏 드러나지 않고 있던 자신의 내적 에너지를 길어 올린다. 웰즈에게 비극의 탄생은 곧 인간 존재의 새로운 탄생과 맞닿아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것은 희망일까 아니면 정말로 새로운 출발이 될 수 있을까? 아마도 웰즈라면 둘 모두 가능할 수 있다고 대답할지도 모른다.

무언가 의미가 확실하고 고정된 것을 보게 될 때, 우리는 생각하기를 종종 멈춘다. 너무 확실한 것이기 때문에 그저 바라보거나 혹은 방관해도 될 것처럼 생각한다. 웰즈는 바로 이 순간, 진짜와 가짜, 믿음과 의심, 슬픔과 기쁨, 용감함과 무모함, 비천함과 고귀함을 한 자리에 슬쩍 놓아둔다. 보이는 모든 것들이 명확하다고 생각될 때 관객은 그저 스크린 밖에 방관자로서 게으르게 남겨진다. 웰즈는 이러한 모든 것들을 따분해서 견디지 못한다는 투로 모든 익숙한 것들을 슬쩍, 장난꾸러기처럼 흔들어 놓는다. 웰즈의 영화는 대단히 전형적인 인물 구도와 이야기 구조를 가졌음에도 흔한 전형성의 인력권을 너무도 가볍게 훌쩍 벗어나 버린다.

웰즈는 자신의 작품 속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불가사의한 숙명론적 미궁 저 건너편에서 스크린 밖의 관객에게 말을 건넨다. 왕과 협잡꾼, 비천한 거렁뱅이와 위대한 도망자들의 세계 그 안쪽으로 넘어오라고, 그들과 같은 공기를 호흡하고, 그들과 이야기를 함께 나누라며 당신에게 낮고 설득력 넘치는 목소리로 말을 건넨다. 이 초대를 받아들일 것인가, 말 것인가 ? 바로 이 지점에서 웰즈의 영화는 언제나 새롭게, 다시금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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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fungames.im/games/driving/ BlogIcon Driving Games  수정/삭제  댓글쓰기

    예 예 그 일을 사랑

    2012.08.29 1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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