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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건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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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면서

이준익 감독의 영화 <님은 먼곳에>를 본지 두 주나 지났음에도 명확하게 정리된 것이 없었다. 그러니까 순이가 월남으로 간 이유는 무엇이며 그녀를 둘러싼 남성들은 무엇을 기능코자 함이었을까? 이준익은 무엇을 말하려고 순이를 사내들의 소굴로 집어넣었을까? 라는 의문에서 헤어나지 못했다는 말이다. 그런 가운데 접한 많은 평들은 여성캐릭터에 관하여 이야기하고 있었으며 대게는 순이라는 캐릭터를 도구화된 여성으로 바라봄으로써 생각의 단초를 잡아내고 있었다. 재미있게도 여성의 관점에서 이 영화를 비판한 거의 모든 글에는 영화의 엔딩 신에 대한 내용이 빠지지 않았는데 이는 순이를 특정 목적으로 형상화시킴으로써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키려는 연역적 도출방법 때문으로 보여 진다. 거칠게 말하자면 꿰어 맞추기에 가까운 논리전개라는 것이다. 물론 이 영화가 여성을 값싸게 소비시키는 면도 없지 않다. 이를테면 매달 면회를 가고도 푸대접 받은 며느리에게 여필종부를 강조하며 “첩과 정실이 같나?”라던 시어머니, 아내가 있으면서도 서울의 애인을 잊지 못하다가 월남으로 줄행랑친 남편, 돈벌이를 위해 순수한 의도를 악용하는 정만에 이르기까지 하나 같이 가부장적 사고로 똘똘 뭉친 인물들이라는 점에서 순이의 삶은 무한소비의 대상으로 격하되는 것처럼 보인다, 게다가 공연이 거듭될수록 과감한 의상에 도발적인 몸짓으로 무장하고 무대를 누비는 써니를 보고 있노라면 전장에 홀로 선 여성을 위협하는 시선의 폭력의 섬뜩함마저 느낄 수 있을 정도다. 그렇다고 순이의 월남 행이 “남편 사랑은 첩에게 넘겨주고 너는 아들 낳아 내 사랑 받을 생각이나 하라”는 시어머니의 뜻을 받드는 것이고, “니 내 사랑하나?”라던 상길의 질문에 대답하기 위함일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순이는 주체적인가

어쨌거나 <님은 먼곳에>와 관련해 글을 쓰고 싶어진 것은 아주 사소한 질문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다름 아닌 ‘나는 영화에서 순이를 보았는가, 아니면 수애를 보았는가?’ 이다. 뒤에서 이야기하겠지만 이 질문은 유치하기도하고 우습기도 하지만 대단히 중요하다. 많은 이들이 거론하는 ‘여성캐릭터의 도구화 또는 희생’의 알고리즘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결론지어 말하자면 <님은 먼곳에>는 여성의 육체를 전시함으로써 남성을 구원하거나 그들의 가부장제에 함몰시켜 종국에 여성의 소멸을 일궈내는 영화가 아니다. 만약 당신이 순이를 객체화되고 대상화 되어 의미 없이 소비된 여성캐릭터로 판단했다면, 단지 이런 이유만으로 <님은 먼 곳에>를 마초의 영화라고 단정 지었다면 그것은 섣부른 판단이라고 말해주고 싶다. 따라서 여성 또는 여성캐릭터라는 젠더이데올로기를 꺼낸 만큼 이에 상응하는 논리를 펼쳐볼 요량이다. 먼저 혹자들의 주장대로 순이를 대상화된 여성캐릭터로 규정하기 이전에 몇 가지를 확인할 필요성을 느낀다. 예컨대 순이는 어떤 틀을 통과하여 영화에 등장하며, 그녀의 서사와 시간은 자주적이고도 독립적인가. 라는 질문이 그것이다.

먼저 틀에 대한 이야기다. 역사적 사실을 토대로 만들어진 영화일수록 여성의 존재는 희미하기 마련이고 설사 그들이 보인다 해도 그것은 부록에 다름 아닌 정도였다. 때문인지 페미니즘의 이름을 빌려 만들어진 영화에서 다수의 여성들이 서로를 호명하고 소환하는 과정을 거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이에 반해 여성캐릭터를 소비하고 역사의 객체로 전락시킨 영화들에서 여성은 남성의 입을 빌려서야 수면 위로 부상하거나 남성캐릭터의 서브플롯을 끌어가는 수동적 위치에 머물고 말았음을 알 수 있다. 쉬운 예로 <박하사탕>에서 김영호의 첫사랑 순임은 김영호의 회고를 통해 즉 남성캐릭터의 기억과 입을 빌려야 비로소 등장하게 되는데, 더 정확하게는 자살을 앞둔 김영호를 찾아온 그녀의 남편의 간청을 통해 김영호는 순임을 기억하게 되며 이 과정을 거쳐 영화에 등장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여성캐릭터가 소비되고 대상화되는 과정을 거치게 될 때 영화에서의 여성의 잔재는 쉽사리 소멸되기 일쑤이니 <박하사탕>에서 순임을 독립적인 캐릭터로 인식하기 힘든 것도 이 때문이다. 또한 주목할 것은 여성의 시간이 남성의 시간에 편입되어 일종의 미장아빔(mise-en-abyme)을 이루곤 했다는 점이다. 즉 대게의 한국 멜로드라마는 여성의 시간을 남성의 시간 속에 격자구조로 구축함으로써 여성의 주체성을 봉쇄하고 폐쇄시키게 된다. 예컨대 <파이란>에서 여성인 파이란의 시간은 강재의 시간 안에서 펼쳐지고 있는데, 이는 파이란을 통해 강재의 인생을 성찰하게 만듦과 동시에 남성주체의 완성을 위해 희생되는 기제로 사용하려는 목적에서이다. 어느 리뷰어의 글대로 <님은 먼곳에>의 순이가 상길과 만나지 못하고 죽었다면 아마도 그녀는 남성에 의해 호명되고 거룩한 희생양으로 승화될 수 있었을 것이다. 이 경우라면 여성 스스로 주체가 되지 못하고 남성이라는 매개를 거침으로써 영화에 개입할 수 있다는 논리에 들어맞는다. 그렇다면 <님은 먼 곳에>에서 순이는 어떠한가. 순이가 남성의 서사를 통해 호명되거나 그들을 매개로 공간 속으로 편입되고 있는가?


그녀의 서사 그녀의 시간

다음 질문은 그녀의 서사와 시간은 자주적인가? 아니면 봉쇄되고 있는가이다. 영화가 시작되면 동네 아낙을 앉혀놓고 노래를 부는 순이가 보이고 이내 시어머니의 곱지 않은 시선이 이어진다. 여기까지만 놓고 보자면 영화의 주인공인 순이는 적어도 독립적이고 능동적으로 움직이는 캐릭터임에 분명하다. 그렇다면 많은 이들이 문제 삼는 여성의 대상화가 발생하는 지점은 어디일까. 아마도 1970년대 가부장제를 포괄하는 시어머니의 한숨과 한탄에 떠밀리듯 월남 행을 결심하면서부터일 것이다. 순이가 월남으로 갈 수 있는 길은 위문공연단에 들어가는 것뿐인데 그녀는 남성밴드의 홍일점 가수 ‘써니’가 되어 갖은 수모와 조롱을 마다않고 배에 오르게 된다. 이로써 순이는 월남으로 향하고 그녀의 거침없는 행보는 순이를 써니로 탈바꿈시키기에 충분해 보인다. 이 과정에서 써니가 보여주는 모습들, 그러니까 장병의 애간장을 녹일 듯한 수줍은 미소와 춤으로 한껏 분위기를 달구면서 공연에 임하는 태도와 미군 관사에서 하룻밤을 보내는 장면을 보고 있노라면 위태로운 마음이 드는 것이, 과연 순이가 무사히 월남을 떠날 수 있을까 싶을 정도이다.

여기서 순이가 왜 월남으로 가야 했는가를 묻지는 말자. 상길의 질문에 대한 뒤늦은 대답을 위해서건, 시어머니의 성화 때문이었던 간에 그것이 중요하지는 않으니까 말이다. 정작 중요한 것은 순이가 월남에 간 것이 아니라 살아서 남편을 만났다는 사실이다. 남편을 만나겠다는 일념으로 육체를 전시했고 남성들의 욕망에 불을 지폈으나 결국에는 남편을 만남으로써 고난의 여정에 방점을 찍었다는 것이다. 앞서 말했듯이 순이가 살아있음으로 해서 영화는 여성캐릭터의 소비에 제동을 걸 수 있었다는 말인데, 영화는 이 모든 과정을 각기 다른 공간에 펼쳐내고 있다. 그러니까 이준익은 순이의 공간과 상길의 공간을 철저하게 나누어놓고는 월남이라는 공통의 지리적 공간과 1970년대라는 시대적 특수성을 겹겹이 씌움으로써 순이의 여정에 명분을 심어놓았다는 말이다. 이는 순이와 상길의 시간 즉 여성과 남성의 시간이 서로 다른 공간에서 펼쳐지는데다가 시간의 사용목적을 서로 다르게 설정함으로써 상길의 하위서사에 순이가 편입되지 않도록 기능하고 있다. 결국 순이가 남성성과 싸우는 동안 상길 역시 적과 싸우면서 각자의 시간을 만들어갔으니 순이의 서사를 희생을 위한 과정으로 바라보는 것은 과잉해석이라 하겠다.


이미지에의 과잉집착

일각에서는 남성을 구원하는 女神 이미지로서의 순이에 집착하면서 여성캐릭터의 과다소비를 이야기하고 있다. 또한 남성의 구원을 위해 한 없이 희생하는 여성을 거론하고 이것을 빌미로 남성을 위한 영화라고 단정 짓기도 한다. 아마도 마지막 장면이 주는 이미지의 착시현상에 현혹된 때문일 터이다. 그러나 이것이야 말로 과잉일반화의 오류이다. 영화의 엔딩을 숭고한 이미지의 발현으로 보는 것까지 타박할 마음은 없지만, 이것을 놓고 여성을 소비하던 영화가 얼토당토않은 결말을 택했다고 보아서는 곤란하다. 순이의 이미지를 숭고한 대상으로 보려는 시도 자체가 시대착오적이기 때문이다.

초기 페미니즘 비평이 주력한 것이 바로 ‘이미지의 재현’ 과정이었다. 즉 영화 속에서 여성이 ‘어떻게’ 보여 지는가에 집중하여 ‘이미지 도상학’과 연계했다는 말이다. 이 시기의 비평가들은 여성캐릭터가 가부장제의 도전자로 규정되었다가 몰락하는 과정을 여성의 이미지와 연관 지어 탐색함으로써 비평적 자산으로 축적하게 된다. 반면 현재의 페미니즘비평은 여성과 남성의 성차를 인정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그러니까 여성 이미지의 진위여부보다는 가부장적 문화 속에서 여성의 억압의 징후들인 텍스트의 모순들을 읽어내고 밝혀내는 것에 치중하게 되었다는 말인데, 이는 가부장적 구축물을 유지시키고 지지하는 영화 텍스트의 책략뿐만 아니라 그러한 구성물들의 약점과 실패까지도 이해하게 해준다는 장점이 있다. 그렇다면 왜 이러한 변화가 필요했을까? 초기의 페미니즘비평은 어떤 고정불변의 정체성이 본질과 그것을 연결 짓고 있다는 사실을 회피함으로써. 즉 가부장적 이데올로기의 폐해를 드러내는 데만 치중함으로써 모든 잠재적인 여성적 정체성들을 부정하는 결과를 가져왔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페미니즘 분석은 차이의 부정과, 여성을 부재, 결핍, 혹은 파괴적 부정성으로 규정하고 위치시키는 담론적 전략들을 폭로하는 것이 그 주 임무라고 볼 때, 차이를 바라보기, 성차에 대한 낡은 이해를 교정하기, 차이들을 다중화 하기를 모색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님은 먼곳에>를 여성의 육체를 전시함으로써 남성담론의 하위 텍스트로서의 여성캐릭터가 활보하는 영화라고 단정 짓는 것은 1970년대 페미니즘비평 양식을 21세기에 적용한 때문이며 시각의 어긋남은 여기에서부터 비롯된다고 하겠다.


구원이 아닌 이미지를 통한 서사 봉합

덧붙여 <님은 먼 곳에>에서 구원 받은 것은 남성이 아니다. 설사 남성이 구원받았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여성(순이)의 희생을 담보로 한 것은 아니다. 적어도 당신이 이제껏 본 영화에서 남성이 구원 받는 경우가 얼마나 있었던가. 「영화 속 구원 대상은 절대 남성은 될 수 없다」던 앙드레 바쟁 Andre Bazin의 말을 굳이 인용할 필요도 없이, 영화 속에서 보여 지는 모습이거나 또는 관객의 뇌리에 남아있는 이미지이거나 둘 중 어느 한쪽으로라도 여성이 구원에 가까이 서있음을 주지해야 한다. 예컨대 창녀이거나 귀부인이거나 여염집 아낙이거나 영화 속 구원과 회생의 대상은 항상 여성에 국한되어 진행되어왔다는 사실 말이다. 그러므로 <님을 먼 곳에>를 놓고 남성을 위한 남성 영화라고 주장하는 이들은 어쩌면 김기덕의 영화 공식을 먼저 떠올렸는지도 모르겠다.

주지하다시피 김기덕 영화의 대부분은 여성을 통해 남성이 구원을 받는 독특한 행태를 가지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관객에 눈에 그렇게 비춰졌던 것이었지만) 김기덕이 영화 속 여자들을 창녀와 성녀의 이분법 구조로 그려냈거나 여성의 비하를 노골적으로 드러냈다는 식의 비난을 퍼붓던 이들도 여성이 악인으로 그려질 수 없는 영화사적 논리까지 염두에 뒀을까마는, 그의 영화 속 여인들은 앙드레 바쟁의 주장에 한 치 어긋남 없이 구원되었다. 다만, 구원의 방법에 있어 영화의 서사나 묘사가 아닌 관객에게 남겨진 이미지와 연민 가득한 사고 또는 지독한 페미니즘에 근거해서라는 점이 차이가 있을 뿐이다. 또한, 남성폭력과 비장미 가득 찬 김기덕식 내러티브 구조로 인해 여성은 한 없이 억압받고 비참한 모습이었으므로 그런 여성의 몰락을 기반삼아 남성이 구원 받은 것으로 보여 졌을 뿐이다. 때문에 나는 <님은 먼곳에>를 둘러싼 담론의 한켠에 과거 김기덕 영화 속 여성담론이 재현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을 받았고, 그렇다면 애초에 논점을 잘못 짚은 것이라 말하고 싶다. 단언컨대 구원 받은 것은 상길도 순이도 아니다. 그런 점에서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월남이라는 특수공간에서 고군분투하던 남녀의 서사와 각자의 시간이 이미지를 통해 봉합되는 지점이면서 가부장이데올로기에 일격을 가하는 순간의 포착으로 봐야한다. 빛바랜 사진 같은 이 장면이 숭고하게 느껴졌던 것은 두 남녀의 모습 때문이 아니라 둘 다 살아서 만났기 때문이다. 나는 정말로 순이가 전설이 되지 않고 역사가 되었음을 다행스럽게 생각한다.


순이와 수애, 누구를 보았는가?

글의 서두에서 나는 내가 본 것이 수애인지 순이인지 모호했다고 고백한 바 있다. 이는 <님은 먼곳에>에서 순이가 변하는 과정 때문이라 할 것이다. 남편을 찾아 월남으로 간 순이가 써니로 이름을 바꾼 이후 위문공연에서 보여 지는 그녀의 변신. 이처럼 순이가 남편에게 가까워지는 만큼 그녀의 노출은 과감해지며 무대의 흥겨움도 배가되지만 정작 영화를 바라보는 입장에서는 불편한 무언가가 올라오고 있었다. 뭔가 일이 벌어질 것 같은 위태로운 그 무엇 말이다. 때문인지 이를 두고 여성캐릭터의 대상화라고 말하는 이도 있는 반면, 여성을 무한소비하며 고된 시간을 이겨낸 남성들이 뒤늦게 여성에게 바치는 헌사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었다. 이는 아마도 여성캐릭터인 순이가 써니로 변신하고 사내들의 카니발의 여신처럼 등장해 해갈시켜주는 위문공연장면에서, 또는 남편을 만나기 위해 어떤 짓이라도 불사할 것처럼 보여 진 써니의 행위에서 그리고 무엇보다 남편을 찾기 위해 미군과 하룻밤을 보내야 했던 장면에서 보여준 순이의 행동에서 비롯된 것일 터이다. 그러나 이마저도 이준익 재능이 아닐까 싶다. 즉, 수애라는 배우를 사용해 영화의 배경인 1970년대로 인도하는 한편 관람자의 정서 역시 그 시대로 치환시켜버리는 재주 말이다. 이를 테면 이준익 영화들의 배경이 하나 같이 과거임에도 불구하고 당대의 관객은 시대적 괴리를 느끼지 못하는데, 이는 시공간을 초월하도록 배우의 연기를 리얼하게 세공한 감독의 능력과 무관치 않다는 것이다. 그러니 남성가부장제의 희생자로 그려지면서 뭇 사내들의 눈요깃감으로 전략해가는 1971년의 순이를 보고 안타까워하지 않을 관객이 있겠는가? 그래놓고는 영화의 마지막 포연 가득한 전장에 우뚝 세우다니! 영화 중 거의 유일하게 이준익의 배짱과 호기가 빛을 발하는 순간이다.


닫으면서

이글은 <님은 먼곳에>를 놓고 여성의 대상화 혹은 도구화를 논하는 여러 글들을 읽으면서 분기탱천한 마음으로 쓴 것이 아니다. 게다가 이 영화를 지지하려는 의도 또한 전혀 없음이니, 엄밀히 말해 <님은 먼곳에>는 이준익의 영화 중 드물게 서사의 미학을 던져버린 작품으로 기억될 것이다. 이준익의 이전 영화들에서 드러난 ‘마이너리티와 놀이’ 또는 ‘변두리 잡종문화 미학’과는 거리가 멀뿐더러 근접하려는 의도조차 보이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서사가 묘사를 압도했으며 곰살맞은 인물들을 잡은 카메라는 기교보다는 기본에 충실하곤 했다. 그러나 <님은 먼곳에>는 적은 예산을 가지고도 맘껏 주무르면서 허허실실 이야기를 풀어갔던 이전 작들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자유분방함으로 흥겨움을 주었던 것이 그의 영화였건만 절제되고 단정해지니 제 맛이 살아나질 않았다는 말이다. 이준익조차 70억 원의 제작비와 동남아 로케이션이라는 물량 부담 앞에서 제 특질을 놓쳤던 것일까? 내가 여성의 전시와 소비에 치중하며 이 영화를 본 평자들의 시각에 이의를 제기하고자 한 것은, 논점이 잘 못 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논리의 전개과정에서 오류를 범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글의 말미에 이르러 당신에게 다시 묻는다. 당신은 순이의 고군분투가 안쓰러웠던 것인가? 아니면 수애가 뭇 남성들에게 휘둘리는 모습이 안타까웠던 것인가? 그래도 살아서 남편을 만났으니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영화야 어찌되었건 두 사람을 살려놓은 건 백번 잘한 일이다.



백건영


하나.
한 때, 영화보기만큼이나 영화음악 음반 수집에 천착한 시절이 있었다. 영화음악의 전성기라는 시대적 환경에 편승한 결과이기도한데, 당시 FM라디오 프로그램과 빌보드 차트 상위에는 언제나 영화음악이 포함되곤 했기 때문이다. 사실 OST 음반이 빌보드 앨범차트에 장기간 랭크된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그러니까 대게는 <오클라호마> <웨스트사이드 스토리> <메리 포핀스> <사운드 오브 뮤직> 등이 오랜 인기를 얻은 것으로 알고 있고, 사실이 그렇기도 하다. 하지만 영화음악 음반의 진정한 지존은 따로 있었으니 핑크플로이드의 명반 [Dark Side Of The Moon]이 나타나기 이전까지를 호령한, 오스카 해머스타인과 리처드 로저스가 음악을 맡은 <남태평양>이 그 주인공이다.

둘.
한 번도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음에도, 가끔은 내게 영화음악을 사용할 권리를 준다면 ‘이런 음악을 넣고 싶다’는 생각은 할 때가 있다. 다름 아닌 전쟁영화에 말이다. 하필 처참한 전투와 무차별 폭격이 난무하는 끔찍스런 전쟁영화라니. 생각의 시작은 20여 년 전 공군비행장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러니까 1980년대 중반, 공군하사관으로 복무하는 친구를 만나기 위해 경기도 송탄엘 간적이 있는데, 밤새 술을 마시고 난 다음날 새벽 그는 기막힌 광경을 보여주겠노라며 나를 비행장으로 데려갔다. 동틀 무렵의 검푸른 하늘을 마주하고 앉은 내 시야에 들어온 것은 격납고에서 나와 활주로를 향하는 팬텀기 한 대였고, 그때 관제탑 스피커에서 흘러나온 것은 반젤리스가 만든 <불의 전차 Chariots of Fire>의 메인테마였다. 이때 문득 떠오른 것은 전투 신에 부드럽고 몽환적인 사운드를 넣는다면 어떨까? 라는 생각이었다. 전쟁영화라고 오케스트라 풍의 웅장한 음악을 써야 할 이유가 없다는 말이다.

물론 <지옥의 묵시록>에서 전쟁의 광기를 극대화시켜준 바그너의 격정적이고 장엄한 선율 ‘발퀴레’는 적절한 선곡이었다. <더 록>에서 험멜 장군이 아내의 무덤을 찾아 다짐할 때 흐르던 한스 짐머의 장중한 곡도 더 없이 좋았다. <블랙호크다운> 또한 디지털전쟁에 적합한 음악이 돋보인 사례였다. 그럼에도, <플래툰>에서 일라리어스의 죽음 앞에 흐르던 사무엘 바버의 ‘현을 위한 아다지오’는 얼마나 처연했던가. 스탠리 메이어스가 만들고 존 윌리엄스가 연주한 <디어 헌터>의 Cavatina는 또 어땠는가. 아니면, <굿모닝 베트남>에서 흐르던 멀 해거드의 Okie From Muskogee의 흥겨움과 루이 암스트롱의 What A Wonderful World가 들려주는 전쟁의 아이러니도 기억해보자. 전쟁영화가 영화기술 발전에 기여했음을 감안한다면 전쟁영화 음악 역시 다양한 실험과 변주를 통해 영화음악의 지평을 한 뼘쯤 넓혀놓았다는 것에 이의를 달지 못할 것이다. 이런 이유로 내가 전쟁영화에 잔인한 살육전이나 폭격 신에 음악을 넣는다면 꼭 넣고 싶은 곡이 있으니, 가끔은 이 음악이 흐르는 영화 속 전쟁 신을 상상해본다. 빗발치는 폭격을 피해 공포에 질린 아이들과 절망한 얼굴의 부녀자들이 필사의 탈주를 감행하고, 도시총격전에 참가한 군인들의 중화기가 불을 뿜는 순간, 아비규환의 지옥을 휘감는 어구스틱 기타소리와 더불어 노래가 흘러나온다. 다름 아닌 아트 가펑클의 노래 Mary Was An Only Child 다. 이 노래는 한 시대를 풍미했던 불세출의 듀오 사이먼 앤 가펑클에서 독립한 아트 가펑클이 첫 번째로 낸 솔로음반(Angel Clare, 1973)에 수록된 곡이다. 기막히다는 자아도취에 빠져 혼자 미소 짓는다.

셋.
베트남전쟁을 배경으로 한 또 하나의 영화 이준익의 <님은 먼곳에>에서 인상적인 것은 커다란 눈망울로 말없음을 대신하던 수애의 표정연기였고, 남편에 대한 애증이 가중됨에 따라 변하던 그녀의 의상이었다. 온몸을 꽁꽁 감쌌던 그녀가 하나씩 옷을 벗어던짐으로써 전근대적 여성으로부터 탈주를 감행하더니 엔딩에 이르러 다시 순이의 형상으로 회귀하는 것이 흥미로웠다는 얘기다. 하지만 정작 나를 지배한 것은 써니가 부르는 노래들이었다. 그러니까 영화에는 몇 곡의 노래가 써니의 입을 통해 불려 지는데, 지긋하게 눈을 감고 부르던 ‘늦기 전에’에서 시작하여 이역만리 향수와 불안을 단숨에 날려버리는 ‘수지 Q’와 ‘월남에서 돌아온 김상사’에 이르기까지. 이처럼 하나 같이 단조로운 스코어들로 채워진 것은 국익 때문에 명분 없는 전쟁에 뛰어들어야 했던 젊은이들과 스테레오타입의 시대를 소환하기위한 장치로 보인다. 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압권은 김추자의 노래 ‘님은 먼곳에’가 들려오는 장면이었으니, 울창한 정글 위를 비행하는 헬리콥터와 살육전이 벌어지는 전장의 모습이 번갈아 보여 질 때 들려오던 ‘님은 먼곳에’는 정녕 꿈이었으면 좋았을 현실을 반추하는 꿈속의 멜로디처럼 내 가슴을 헤집고야 말았다.

솔직히 영화를 보기 전에도 노래 ‘님은 먼곳에’가 위문공연 장면에서는 절대로 나오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왜냐하면 흥겨운 것과 거리가 먼 멜로디에 속칭 ‘아미 댄스’용으로 부적합한 박자로 이뤄졌다는 점에 기인하지만, 무엇보다 이준익이라면 이 음악을 공개된 장소에서 선보이지 않을 것이라는 일종의 믿음 같은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만일 써니가 ‘님은 먼곳에’를 위문공연장에서 불렀다면 야유와 아우성이 쏟아졌을 테니 영화는 신파로 흘러갔을 게 뻔하고 그것은 감독 스스로 자신의 영화를 정면으로 배반하는 것 일터. 게다가 흥미로운 것은 남편에 대한 만감을 담아 부르던 이 노래를 다시 부르는 장소가 베트콩의 은신처라는 점이다. 천진난만하게 뛰놀거나 공부하는 아이들과 한 곳에 모여 노래를 듣는 가족들의 평온함이 깃든 은신처는 지상의 전장과는 사뭇 다른 풍경이 펼쳐지는 장소라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결국 월남에 온 후 처음으로 환한 웃음을 지었던 헬기 장면과 어느 때보다 평온한 모습으로 지하은신처에서 부르는 노래가 ‘님은 먼곳에’라는 점은, 남편을 찾아 나선 순이가 스스로에게 묻는 질문에 대한 이준익식 대답이 아닐까 싶다. 요컨대, 전쟁은 참혹하지만 그 속에서 피어나는 삶의 연속성마저도 끊임없이 나를 찾아가는 여정의 일부임을, 이준익은 노래 ‘님은 먼곳에’를 통해 들려주고 있다는 말이다. 계속하다가는 영화가 좋은 건지, 음악이 좋은 건지, 아니면 전쟁이 좋은 건지 구분이 안 될 지경이니 정신 차리고, 극장으로 나서야겠다
2007.09.24


즐거운 인생은 지금의 40대들이 처한 공통의 위기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자식 교육을 위해 죽어라 돈버는 기러기아빠에서부터, 회사에서 짤린 힘없는 가장과,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아버지의 모습. 사연이라면 하나같이 대단히 공감가는 것들이고, 영화는 그것을 파고 든다. 우리나라 40대 아버지들이 이렇게 힘들게 살고 있어요. 여러분들도 모두 응원해주세요.라는 메세지를 달고서 말이다.

그리고 그 메세지의 가운데에 현준이라는 인물이 있다. 즐거운 인생이 유쾌한 386세대의 끝자락이야기에서 뭔가 끄집어낼 것이 있는 것은 바로 이 현준이라는 인물 때문이다. 사실, 그닥 아버지 같지 않은 아버지의 친구들과 밴드를 결성하고, 또 그 밴드를 나름의 궤도에 안착시키는데 가장 큰 공헌을 하는 인물이 바로 현준이다. 비주얼 되고, 노래 되고, 연주실력에 인맥까지. 스무살정도의 어린 나이로는 재주가 비상하다 여겨질 정도로 출중한 인물이 별 볼일없는 386세대를 완벽하다 싶을 정도로 서포트 하고 있는 것이다.

대체 이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걸까? 김영하의 말처럼, 386세대에게는 화염병이라도 있었다. 그때 그 시절 그들은 화염병이라도 들고 노땅들을 위협했다. 그러나 지금의 20대들에게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죽어라 공부하고, 대학가서도 공부하고, 취업하기 위해 또 공부한다. 지금의 20대들에게는 음악을 할 열정도,시간도 없다. 취업이라는,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절박함만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40대들에게는 한때나마 그들이 좋아했던 음악이란것을 할 수 있는 열정이 있었고, 취업의 기회도 주어졌으며 토끼같은 자식과 여우같은 마누라를 적어도 가져볼 수는 있었다. 그런데 이혼하기 위한 결혼마저도 할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를 현준이 앞에서 사는게 힘들다고 칭얼거리고 있는 40대들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 걸까? 이혼한 친구 앞에서, 절망에 찬 늙은 남자의 고통앞에서,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던 현준의 시선. 그리고 기타를 잡고 그를 위로하는 현준. 꼭 이렇게 어린 아이의 어깨까지 빌려가야 되었던 걸까?

사는게 힘든 가장의 고통을 모르는바 아니지만, 그 고통이 어느날 문득 하늘에서 떨어진것은 아니지 않은가? 분명, 40대들에게도 책임은 있다. 제발 최소한의 책임앞에서도 투덜거리지는 말아 주기를. 적어도 현준이의 세대는 어깨에 놓여진 짐을 어딘가에 내려놓을 궁리만 하지는 않는다. 40대가 내려놓는 짐들은 결국 현준이 세대의 몫으로 돌아올 뿐이다. 직무유기는 그만. 적어도 당신들 문제는 당신들 손으로 해결해주길 바랄 뿐이다.

기러기 아빠가 왜 될 수 밖에 없었는지, 왜 자식들의 학원비가 청정부지로 치솟아버렸는지, 어째서 부인으로부터 존경받는 남편이 될 수 없었는지, 좀더 치밀하게 생각하고 행동해야 하지 않을까? 문득, 살다보니 그렇게 되어 있더라. 이젠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라는 안일한 답따위는 더는 듣고싶지 않다. 그저 사는게 힘드니, 이 땅의 아버지들을 응원좀 해 달라는 것은, '아빠 힘내세요'라는 노래가사로 충분하지 않을까? 영화가 부각시키고 있는 40대들의 힘겨운 인생보다는 그 뒤에 가려져 보이지 않는 현준이 세대가 더 안쓰러워 보일뿐이다.

전혀 즐겁지 않은 [즐거운 인생]

필진 리뷰 2007.09.19 14:41 Posted by woodyh98

2007.09.18
김시광

[즐거운 인생]을 보고 나오면서 나는 조금도 즐겁지 않았다. 아니 극 속의 활화산처럼 즐거워지고 싶은 생각도 별로 들지 않았다. 어째서였을까? 밴드를 동경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니다. 나도 한 때 베이스를 다룬 적이 있었고, 그래서 극중 김윤석의 대사에 백퍼센트 이상 동감했다. 지금도 음악을 들으면 베이스를 가장 먼저 듣는다. 내용이 너무 뻔했기 때문에? 그것도 아니다. [라디오스타] 역시 단순하고 전통적이고 어찌 보면 진부한 구석이 많았다. 그럼에도 나는 [라디오스타]를 작년 최고작 들의 하나로 언급한 바 있다. 여성이 제외되었기 때문에? 일부는 사실이다. 하지만 그 역시 그의 전작들과 별반 차이가 없어보인다. 그런데 어째서 [라디오스타]는 즐거웠고, [즐거운 인생]은 즐겁지 못했던 것일까.


너무 정당하지만 불친절한 이야기

젊을 적 하던 밴드의 보컬이었던 상우가 죽은 후 그들은 삶에 대해 회의하기 시작한다. 그러고는 그의 아들이 불태우려던 상우의 기타를 계기로 밴드를 재결성하기에 이른다. 이후는 뻔하다. 밴드를 하면서 그들의 삶은 또 다른 국면에 접어든다. [즐거운 인생]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명확하다.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는 무언가 하는 것이 낫다는 것, 그리고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이니 스스로를 돌보라는 것. [즐거운 인생]은 정말 착하고 정당한,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이야기를 하고 있다. 너무 착한 이야기에 환멸을 느낄 이도 있겠지만, 그것은 크게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그려내는 과정일 뿐.

이렇게 단순한 이야기가 불친절하다고? 그렇다. 나는 그렇게 말했다. 그러니까 전작들을 통해 세세한 감정들을 잘 잡아냈던 모습과는 달리, 이 작품에서는 많은 부분들을 그냥 넘겼다는 생각이 든다. 여인들에 얽힌 이야기를 과감히 생략해버리는 것이야 애당초 남성의 판타지에 치중하기 위해서라고 치부해버릴 수도 있겠지만, 친구의 죽음에서 밴드의 재결성으로 넘어가는 고리가 약하다는 것은 분명 무리가 있다. 물론 그들이 밴드를 가슴 한 켠에 묻어뒀다는 사실을 상상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반말을 해대는 손님에게는 침묵을 지키지만 음악을 모른다는 손님에게는 발끈하는 성욱이나, 혁수의 책상 한 켠을 채우고 있는 드럼모형을 보면. 하지만 유일하게 경제력을 갖춘 아내를 둔 탓에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기영이야 뭔가 하나라도 하는 편이 낫다고 치더라도, 다른 이들은 밴드를 위해 결코 작지 않은 것들을 포기해야 한다.

그렇기에 다시 밴드를 시작할 계기를 비루한 현실 탓으로 돌리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내부 - 상당한 비중을 두어 - 에서 끌어올 필요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어떻게 보면 기영의 땡깡에 장단 맞춰주다가 덩달아 신나버린 친구들 이야기로까지도 볼 수 있지 않은가. 땡깡을 마음 놓고 부릴 수 있는 관계, 그것이 친구라는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일까. 그래서 나이들면 아내보다 친구가 낫다는 뜻이었을까. 게다가 자신에게 해준 것 하나도 없는 아버지의 친구들과 밴드를 함께 하는 준석의 심리상태도 관객의 상상 - 아주 작은 고리, 음악이라는 부분만 던져준 채 - 에 맡겨버린다. 나라면 내게 아무 것도 해주지 않은 아버지의 친구들 따위, 거들떠도 안 볼텐데.


열정은 삶을 즐겁게 만든다

나이가 적당히 든 사람들에게 인생이 즐겁지 않냐고 말한다면, 아마도 쓴웃음이나 혹은 철들어라라는 답변이 돌아오기 쉬울 것이다. 기영의 처처럼 "나는 하루하루가 힘들어."라는 것이 아마 적잖은 사람들의 반응일터. 그렇다고 그들이 처음부터 인생이란 힘든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들은 왜 그렇게 인생이 고단해졌을까? 책임때문이다. 그때문에 그들은 자신이 정말 하고 싶었던 것들을 마음 한 켠에 숨겨두고 살았다.

따라서 인상적이었던 영화의 마지막 장면 - 조개구이집이라는 액자 속에 무대를 온전히 집어넣은 씬 - 처럼, 그들의 행복은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있는 무엇이다. 아마도 그것을 추구한다면 인생은 즐거워질 수 있을게다. 여기까지는 정답이다. 그리고 그것은 늘 그렇듯 이준익의 드라마가 꿀꿀함에도 불구하고, 그의 드라마를 즐겁게 느끼도록 만들었던 부분이다. "열정은 삶을 즐겁게 만든다."

그런데 한 가지 질문. 그들은 과연 자신들이 눌러놓았던 열정을 터뜨림으로써 즐거워진 것일까, 아니면 즐겁지 못한 현실로부터 도망갔기 때문에 즐겁다고 생각하게 된 것일까? (종이 한 장 차이에 불과할) 열정과 도피에 대한 이 혼동의 극히 일부분은 앞서 말했듯 밴드재결성의 고리가 약했다는 것에서 나온다. 그리고 나머지 대다수는 이 영화가 삶에 대해 보이는 태도에서 나온다.


삶이 제거된 즐거운 인생

이준익 감독의 [즐거운 인생]이 과도한 책임에 시달려온 중년남성들의 응석을 다룬 영화라 한들 크게 무리는 없으리라 생각한다. 그리고 그같은 응석들은 감정적으로 충분히 받아들여질 수 있는 무엇이다. 낮에는 택배를 하고 밤에는 대리기사를 하며 뼈빠지게 돈버느라 정신 없는 성욱, 죽어라 일해서 외국에 나간 가족들에게 돈을 보내주지만 그 무엇도 찾을 수 없는 혁수. 그들이 응석 좀 부린다고 야멸차게 거부할 관객이 누가 있겠는가.


성욱이 밴드를 한다고 하자, 그의 아내가 묻는다. "그걸 왜 해?" 그러자 성욱이 대답한다. "하고 싶으니까." 아주 감동적인 대사였지만, 그 대답에 대해 돌아오는 것은 아내의 가출이다. 죽도록 일하다가 고작 하나 하고 싶다고 했다고 곁을 떠나버리는 매정한 아내에게 화가 치민 이들도 있겠지만, 입장바꿔 생각해보자. "왜 가출해?" "하고 싶으니까." 아이들이 등교하기까지의 분주한 시간을 보낸 후 집안 꼴을 보면 알겠지만, 엄마가 없는 집이란 그런 것이다.

물론 모든 것을 놓아버린 아내의 행동은 옳지 않다. 그와 마찬가지로 모든 것을 놓아버린 남자의 행동도 옳지 못하다. 적당한 응석에는 공감을 던질 수 있지만, 맞는 말만 한다해도 응석이 지나치면 꼴불견이 되고 만다. 이 영화가 그 짝이다. 삶을 제거한 채 즐겁던지, 그렇지 않던지 간에 인생을 논하자고? 영화 속의 남성들이 아무리 현실감각이 뒤떨어진다한들(멤버들 중 현실감각을 가진 이는 그나마 성욱뿐이다), 이 영화가 판타지를 자처한다고한들 그것은 어불성설이다.

즐거운 인생이란 삶 속에 있어야 하는 것이다. 밴드가 아무리 잘 나간들, 아버지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면 그들은 여전히 즐겁지 않을 것이다. 언제까지고 그렇게 살아갈 수는 없다. 이런 의미에서 '그의 영화 속의 인물들은 진짜 삶으로 나가기 직전까지의 힘을 비축하는데만 힘을 쏟고 있는건 아닌지도 모르겠다' 라는 백건영 평론가의 지적은 지극히 정당해보인다. 열정이 자신의 고단한 삶에 대한 태도를 바꾸게 만들 수는 없는 것일까? 다소간 포기하는 부분이 없지 않다고 해도, 삶과 열정은 얼마든지 병행이 가능하다. 때로는 시너지 효과도 일으킨다. 정말 즐거운 인생을 그리고 싶었다면 그러한 부분들을 보여줘야 하지 않았을까?


마치며

[즐거운 인생]이라는 제목을 반어적 표현으로 받아들이고 간 사람에게 이 영화는 기대에 걸맞는 작품이겠지만, 만약 문자 그대로 생각하고 들어갔던 관객에게 이 작품은 그다지 유쾌하지 않은 작품일지도 모른다. 만약 이 작품이 유쾌하게 느껴졌다면, 그것은 능구렁이같은 이준익 감독의 연출에 넘어간 결과일지도 모른다고 한 번 쯤은 의심해 볼 필요가 있다. 그 이유는 이 작품이 인생 별 것 없다라는 관조적인 입장과 동시에, 어떤 대책없는 낙관론을 펴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을 보고 나온 누군가가, 자신을 보다 뜨겁게 해줄 무엇인가를 찾는다면 - 도망가버릴 도피수단이 아니라 - 조금은 더 즐거워질 수 있다는 지당한 사실까지 부정할 수는 없다. 그래서 그의 판타지는 어느 정도 유효하다. 나는 여전히 그의 차기작을 기대한다

- 정통성을 조롱하는 마이너리티 찬가


프롤로그

2005~2006 겨울시즌의 최종승자로 [왕의 남자]가 화려하게 등극했을 때 많은 이들은 이 영화가 1,200만 관객을 동원하며 당시로서는 한국영화 흥행기록을 세운 것에 대하여 도무지 이해하기 힘들다는 평가를 내리곤 했다. 평단 일각에서는 [왕의 남자]의 신드롬을 병리적 현상으로 규정하면서 한국인 특유의 쏠림현상의 결과라는 그럴 듯한 진단도 내놓았다. 그도 그럴 것이, 2003년 [황산벌]이 290만 명을 동원하며 상업적 가능성을 보여주기는 했으나, 이준익이라는 감독에 대한 관객의 인지도가 낮을뿐더러 톱스타를 내세운 영화가 아니었다는 핸디캡을 안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동시대의 영화감독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박찬욱, 홍상수, 김기덕 유의 작가주의 감독과 김지운과 류승완, 봉준호 같은 장르영화 기능공에 가까운 스타감독들이 대중에게 널리 알려진 반면, 이준익의 경우는 [왕의 남자]의 흥행 당시만 하더라도 그다지 인지도를 확보하지 못한 축에 속한다.

앞선 감독들이 나름의 성과를 거두며 이어달리기 하듯 자신들의 이름을 관객과 평단에게 각인시켜 왔다면 이준익의 경우는 3년의 시간을 (그의 말대로) 빚 갚고 [왕의 남자]를 만드는 데 전력해왔다고 볼 수 있다. 때문에 [왕의 남자]의 예기치 않은 성공에 대하여 평단의 당혹감은 역력했다. 무엇보다 몇 작품 찍지 않은 감독을 어떤 위치에 상정해야 하느냐는 평론가들 각자의 고민도 한 몫 했을 것이다. 이를테면, 작가가 아닌 상업영화의 맥을 잘 짚어내는 장인에 가까운 감독인가, 아니면 비록 극작가와 협동작업을 함에도 불구하고 영화의 정체성이란 측면에서 작가주의 감독으로 분류할 것인가 라는 규정에의 모호함이 그것이다. 그런데 싱겁게도 이러한 우려를 말끔하게 해결해준 것은 다름 아닌 이준익 감독 자신이었다.

즉 “상업영화의 목숨이 그건데. 상업영화 감독과 작가의 차이가 뭐냐면 작가주의 감독은 자기가 보여주고 싶은 걸 찍어. 그리고 상업영화 감독은 관객이 보고 싶은 걸 찍는다고. 난 내 생각이 별로 중하지 않아. 같이 일하는 사람들의 생각이 관객인데. 촬영감독은 최초의 관객이라고. 그런 그 사람의 생각이 관객일 가능성이 높잖아. 배우도 마찬가지지. 배우이면서 한명의 관객인 거야. 나는 다 물어봐서 찍어. 나도 한명의 관객”이라는 말로써 자신의 정체성을 천하에 공표했다는 것이다. 이는 의심할 바 없이 관객과 평단의 호의적 평가를 동시에 회득하는 몇 안 되는 감독의 자리에 이준익을 올리도록 하는 단초가 되었다. 또한 2006년 추석에 개봉한 [라디오 스타]를 통해서 그는 장르영화의 명실상부한 장인의 위치를 점하게 된다. 천만 관객을 동원한 [왕의 남자]보다, 역사를 통해 오늘날 한국사회를 패러디한 [황산벌]보다 더 가볍지만 진일보한 동시대성으로 관객의 마음을 쥐락펴락함으로써 이준익의 이름을 확실하게 각인시키기에 이른 것이다.

그럼에도 이준익 영화에 대한 평가가 ‘놀이’라는 단어에 함몰되어 너무 쉽게 판단되었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다. 그의 영화에 담긴 한바탕 신명나는 놀이가 중요 기제가 됨은 의심할 나위 없지만, 그의 영화에서 위치하는 놀이의 비중만큼이나 주목해야 할 것은 정통성을 상실한 자들의 등장이다. 달리 말하면 주류에서 밀려나고 역사에서 잊혀진 것(자)들, 이제는 변두리와 저잣거리에서나 만날 수 있는 무용담 같은 이야기가 이준익 영화를 구성하는 컨벤션이라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신나는 놀이를 통해 세상을 조롱하고 자신의 욕망을 분출한다. 과연 마이너리티의 찬가를 보는 듯한 느낌이 이준익 영화의 면면을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부터 이준익의 영화세계를 통해 놀이 하는 인간을 둘러싼 다양한 층위의 텍스트를 탐구함과 동시에 발전적 비판을 가하게 될 것이다.


마이너리티 : 정통성을 상실한 자들

언제부터인가 우리사회에 마이너리티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기 시작했다. 다른 분야는 차치하고 영화나 TV드라마를 보더라도 잘 생긴 주인공만큼이나 조연배우의 인기 역시 동반 상승하고 있다. [슈퍼스타 감사용]은 마이너리티에 대한 사회적 현실을 잘 보여주는 사례이다. 만년 꼴찌 야구팀에서도 패전처리로 선수생활을 끝낸 그를 오늘에 불러낸 것은, 일류와 1등, 메이저와 다수가 지배하는 사회 속에 면면히 숨쉬며 사회의 한축을 이뤄온 마이너리티에 대한 공식인정이자 존재증명이었다. 또한 불과 몇 년 전 까지만 해도 모든 광고마케팅의 키워드는 ‘1등’ ‘선두’ ‘최고’라는 수식어였다. 어떤 식으로든 자사제품이 최고라는 분야를 찾아내어 이를 집중 부각시키는 데 몰두를 해왔지만, 지금은 2등주의 전략으로 선회한 광고를 심심치 않게 만날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맛있는 밥집’ ‘지금은 1등이 아니지만, 언젠가는 1등 하지 않겠습니까?’ 등등 머리를 숙이고 겸손주의 전략으로 변화하는 저변에는 마이너리티 혹은 소수자에 대한 배려와 더불어 그들의 입지가 얼마나 수직상승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 (주 1)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마이너리티 리포트]를 기억해 보자. 영화에서 등장하는 미래의 경찰관들은,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범죄까지 미리 예측할 수 있는 비밀스런 첨단장비를 갖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미리 범죄를 저지를 것으로 예상되는 범죄예정자들까지 찾아내 이를 추적, 단죄한다. 그런데 검거된 용의자의 범죄를 판결하는 세 명의 평결관들 중 이견을 제시한 한 명의 의견이 무시되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영화의 마지막은 다수에 묻혀 소수의 의견이 무시되면서 발생되는 오류가 당초 목적과는 전혀 다른 결과로까지 이어질 수 있다는 줄거리를 끝으로 다수결 혹은 다수가 갖고 있는 맹점을 꼬집는다.

우리가 몸담고 있는 세상도 영화에서처럼 마이너리티 리포트가 무시되면서 생겨나는 오류가 숱하게 많다. 평결에 영향은 고사하고 대화의 테이블에도 올라오지 못하며 아예 대화의 상대도 되지 못한다. 다수는 모여 집단을 이루고 그 집단은 무시할 수 없는 세력으로까지 커지게 된다. 세력화된 집단은 사회 모든 부문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때론 사회적 약자로 불리던 집단이 다수가 되며 내는 목소리 때문에 국민전체가 고통 받는 일도 심심치 않게 발견된다.

그럼에도 아직 우리사회의 소수자는 약하고 설 땅이 비좁기만 하다. 숫자로 구분된 다수와 소수의 차이는 ‘다르다’가 아닌 ‘틀리다’로 간주되어왔다는 점에서 시각의 전환은 가장 우선되어야 할 과제이다. 마찬가지로 마이너리티들은 주류사회가 내지 못하는 목소리를 전파하고 올곧은 양심의 외침을 통해 사회적 오류를 지적하거나 새로운 문화보급과 발전에 동참하는 모습을 띌 때, 비로소 소수자의 역할을 다 하는 것이다. 어차피 우리 모두다 이 세상의 마이너리티들이 아니던가? 모름지기 주류에서 밀려난 이들은 변경에서 중심을 꿈꾸기 마련이다. 중심에서 밖을 동경하는 것의 발로가 호기심으로부터 시작된다면, 외부에서 중심을 욕망할 때는 체념과 오기가 추가로 동반하게 된다. 이것이 이준익 영화 서사의 출발점이다.


[황산벌]의 시작에서 고구려의 연개소문은 의자왕과 김춘추와 당 고종이 함께한 자리에서 이렇게 말한다.

“여기 정통성 있는 놈 누가 있어? 김춘추 너 반쪽짜리 왕족이라서 김유신하고 짝짝쿵 해서 권력 잡은 거 아녀? 의자왕, 니 아버지도 서자라며.” “정통성 없는 놈들이 정통성 확보하려고 하는 게 전쟁이야”

정통성이 없는 이들은 전쟁을 통해서라도 정통성을 확보해야 한다. 그것은 비단 전쟁이라는 수단을 통해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현대사회에서 벼락부자가 된 이들이 갖은 명품으로 치장하여 상류사회의 일원이 되고자 애쓰는 것도, 무식한 졸부가 명망가와 혼담을 성사시키려는 것도, 또는 학벌이 부족한 기업가가 최고경영자 과정을 통해 인맥을 구축하고 사회적 입지를 공고히 하려는 것이나 재벌가의 정략적 결혼 따위의 행위들 모두가 정통성을 구축하거나 공고히 하려는 수단에 다름 아니다. 정통성 확보를 통해 보다 위상상승과 부귀영화의 지속하려는 목적이 있음은 물론이다. 그렇다고 해서 정통성 확보가 쉬운 일이던가. ‘삶이 전쟁, 전쟁 같은 삶’이라는 표현을 쓰는 것도 이 때문이다. 따라서 정통성에 목마른 이들과 그것조차 부질하다고 여기는 이들 사이에서 균열이 벌어지는 것은 당연할 터이다. 그러니 삼국통일을 위해 당나라를 끌어들였던 김춘추나 서자의 아들로 왕위를 물려받은 의자왕이나, 쿠데타를 통해 집권한 연개소문이나 모두 정통성 없기는 마찬가지인 것이다.

신라의 침공을 목전에 둔 상황에서 열린 백제의 어전회의는 정통성을 상실한 왕의 허약함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다. 수색병의 보고를 받은 의자왕이 “나하고 태자들이 사비성을 지킬 테니, 귀족들은 자신의 군사를 데리고 기벌포를 막으라”고 하자 좌평은 “개뿔, 왕이라고 해준 것도 없으면서 맨 날 군사를 내놓으라고”한다면서 대놓고 거부의사를 밝힌다. 이렇듯 정통성이 확보되지 않은 자리는 불안하다. 언제 누가 반기를 들지 모를 일이니 의문의 눈초리를 거둘 날이 없고 모두가 적으로 보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오로지 믿을 만한 휘하 계백을 부르게 되니 ‘황산벌 전투’의 시작이다.

[황산벌]의 시작을 장식했던 정통성의 문제가 [왕의 남자]로 넘어오면 보다 복잡하게 작동하게 된다. 감독은 이 영화를 통해 연산이 폐비윤씨로 인한 트라우마에 사로잡힌 패륜적 폭군이라는 일반적 역사평가와는 달리 집권초기 훈구대신과의 끝없는 싸움을 통해 개혁을 이루려 했다는 긍정적 측면을 보려주려 시도하는 듯 보인다. (주 2) 이때 연산의 실정과 훈구세력과의 갈등이라는 연산의 고민을 해결해주는 사람은 환관 처선이다. 마지막까지 연산에 대한 충심을 유지하는 처선의 모습을 통해, 연산을 보좌하고 민심의 동향을 살피는 한편 조정중신들에 대항하려는 연산의 개혁의지에 힘을 싣고자 그가 광대를 불러들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처선의 의도와는 달리 연산의 악행이 극에 달하고 모반의 기운이 싹트자 그는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대신 자결을 택한다.

돌이켜보자면 광대패들과 공길과 장생은 물론이요 처선과 연산 모두가 당대의 사회와 제도 앞에서 몸부림치다 실패한 채 역사의 기록에서조차 소외된 이들이다. 개혁과 트라우마에서의 자유를 통해 왕조의 법통을 지키고 싶었던 연산이나 그러한 왕의 아픔을 돕고자 했던 처선이나 정통성 없는 자의 설움이 깃들어 있음에는 차이가 없다. 배불리 먹고 편안한 잠자리면 만족했던 광대패들 또한 마찬가지다. 왕의 총애를 받음에 따라 욕심을 부렸던 공길도 그러한 모습을 보며 위험을 경고했던 장생도 따지고 보면 설움 받은 지난날에 대한 보상심리 이상의 것, 즉 가져봐야 오래 지속될 수 없는 것에 대한 허망함의 희생양일 뿐이다.

이와는 달리 [라디오 스타]의 최곤은 88년 가수왕이라는 무시 못 할 이력을 지닌 인물이다. 하지만 그는 동시대와는 멀어진 퇴물가수일 뿐이다. 그런 그가 어쩔 수 없이 선택한 공간은 영월이다. 영월이 어딘가, 어린 단종이 유배되어 한 많은 생을 마친 곳이다. 조선왕조의 법통을 이은 정통성에서 수양대군(세조)을 앞서는 단종이 최후를 맞이한 그곳에 퇴물 가수 최곤 역시 유배당하듯 내몰린다. 달리 보면 서울을 향한 최곤의 몸부림과 단종의 그것이 맞닿아 있고 최곤의 희망은 단종 복위의 희망으로 치환될 수도 있다. 입만 열면 “88년도 가수왕 최곤”이라며 정통성을 강조하려는 멘트가 괜히 나오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즐거운 인생]에서도 변함없이 강조된다. 비록 대학가요제 3년 연속 예선 탈락의 고배를 마셨을지언정 활화산 멤버들에게 록의 전성시대를 관통했다는 자부심은 있다. “계속 음악을 했으면 넌 내 음악 듣고 자랐을 거”라던 대리운전기사 성욱의 항변이 이를 입증한다.

이렇듯 이준익의 영화는 과거로부터 정통성문제를 끊임없이 소환한다. 그래서 그의 영화는 영화적 현재 만큼이나 인물들의 영화적 과거가 중요한 사안으로 대두되는 것이다. 이 모든 것들은 정통성의 획득과 복구라는 화두 안에서 움직이며 인물들은 그것을 무기 삼아 웃고 떠들고 놀고 슬퍼하며 삶을 위무한다. 따라서 정통성에서 멀어진 자들이 벌이는 한바탕 놀음은 이준익의 영화를 구성하는 중요한 코드가 된다.

사실 [왕의 남자] 때까지만 해도 이준익의 영화는 인물중심 사건중심으로 진행되곤 했다. 계백과 김유신의 대립관계와 서기 660년이라는 역사적 시간이 그러했고, 장생과 연산, 공길과 녹수의 대립각 아래 피어오르는 중종반정의 기운이 영화의 중심축을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던 것이 ‘밴드 3부작’ 즉 [라디오 스타]에 이르러 공간의 역할을 확대하기 시작한다.


인물과 사건에 스며든 공간으로

대도시 혹은 중심구역이 모든 것을 빨아들임으로써 사물을 객체화 일체화시킴에도 불구하고 정작 그 공간에 대한 기억을 남겨주지 못하는 반면, 변두리는 일시적으로 모였다가 흩어지기 십상인 공간임에도, 주체화를 유지하게 만들고 동시에 그 시간을 잊지 못하게 만드는 묘한 힘이 있다. 이것은 단번에 빨려 들어가 자신을 잃어버리고 공간과 제도에 함몰될 수밖에 없는 중심에서의 삶의 양상과는 달리, 변두리에서는 자신의 정체성을 비교적 온전히 지킬 수 있다는 점에 기인한다. 이런 이유로 영화 속 변두리에 또는 변두리의 삶이 보여주는 진정성과 소박한 정서에 대중들이 더 공감하는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러하기에 영화는 곧잘 소박한 민심과 자연이 풍겨내는 위대한 힘을 캐스팅하며 영화의 한축을 맡겨버리곤 했다. (주 3)

[라디오 스타]의 공간인 영월과 [즐거운 인생]의 반월은 누가 봐도 중심에서 멀어진 곳이다. 단종의 유배지면서 강원도에서도 오지에 속하는 영월이나 경기도 끝자락에 위치한 반월과 안산 일원은 물리적 심리적 거리감에서 주류와는 거리가 먼 곳임에 틀림없다. 이를테면, 이준익의 감성과 딱 맞아떨어지는 공간이라는 것이다. 이런 때문인지 이준익은 [라디오 스타]에서 영월이라는 주목할 만한 공간을 선택한다.

단종의 유배지이면서 동강으로 인한 환경운동의 중심이 되었던, 그러나 여전히 지역성을 면하지 못하는 이 강원도의 소도시는 영화의 공간이 되고, 시간이 흐름에 따라 한 물간 스타 최곤의 부활을 예비하는 양 생명력을 부여 받는다. 가히 변경의 부활이라 불릴 만한 독특하고 가치 있는 시선이다. 그러므로 영화에 놓인 두 개의 얼개, 즉 가수와 매니저 관계에 대한 이야기와 소박한 진심이 빚어낸 이야기는 영월이라는 지역성과 맞물릴 때 제 기능을 다하게 된다. 반면 [즐거운 인생]의 공간인 반월과 시화호 주변은 [라디오 스타]에 비해 공간적 특징이 구체적으로 드러나지 않는데, 기껏해야 기영이 다니던 새마을금고의 간판과 버스의 노선푯말로 희미하게 보여 질 뿐이다. 그럼에도 (과도하게) 의미를 부여하자면 반월과 안산이라는 기형적으로 밀집된 공단도시는 중심부를 향해 발버둥치며 변두리를 탈출하려는 아내들의 욕망(주 4)과 등가를 이룸으로써 잃었던 꿈을 되찾으려는 남성들과의 갈등기제로 기능하고 있다.


한국사회의 패러디

어떤 영화라고 사건과 인물과 공간이 등장하지 않는 것이 있을까. 결국 이러한 요소들이 단순히 배치되는 것만으로는 영화가 만들어질 수 없거니와 완성도를 보장받을 수 없음은 자명한 일이다. 그래서 감독의 세계관이 중요한 것이고 농익은 연출력이 뒷받침되어야 하는 것이다. 좋은 영화, 재미있는 영화들은 대체로 이러한 질료와 형식을 고루 갖춘 것들이다. 그런 점에서 이준익 영화의 대부분은 재미있다는 평가를 받아왔다. 영화가 재미있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가. 당연한 말이지만 관객과 가까이 할 수 있다는 첫 번째 기준 됨을 의미한다.

흥행할 수 있는 잠재력이 있다는 것이다. 특별한 톱스타도 없고 문제적이거나 첨예한 이슈를 거론하지 않는 그의 영화가 재미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단순히 마이너리티를 옹호하고 위무하며 변경의 서있는 자들을 대변해서인가. 물론 무시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이준익의 영화는 언제나 당대 한국사회를 패러디 해왔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니까 동시대를 살아가는 대중적 감수성을 정확하게 포착하여 ‘놀이’와 ‘마이너리티’라는 자신의 세계관으로 덧씌워 즐거움과 카타르시스를 동시에 제공했다는 것이다.

이준익은 [황산벌]을 통해 한국의 현대사를 유쾌하게 패러디해낸다. 삼국을 식민지로 취급하며 조공과 전후처리의 주도권을 쥐려는 당나라와 외세에 의존하려는 김춘추와 그의 아들들, 특히 “나는 신라 왕자보다 당나라 관직이 우선”이라던 사대주의에 찌든 김인문과 국가 위기 상황에서도 내분과 반목을 일삼는 백제 조정의 중신과 왕자들의 모습은 모두 한국근현대사에서 눈에 익은 장면들이다.

또한 신라 군영에서 벌어지는 성골, 진골, 가야출신 장군들의 족보 논쟁은 학연과 혈연에 노예가 된 우리사회의 패거리 문화를 조롱하고 있다. 이준익의 패러디는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숭고한 죽음으로 기록된 화랑 관창의 출정 이면을 계백 입장에서 그려냄으로써 처자식을 죽이고 전쟁에 나온 그의 잔인성을 완화시키고 있다. 게다가 2003년이 중국의 동북공정이 본격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한 해라는 점에서 같은 시기에 만들어진 [황산벌]이 주는 의미는 더욱 커진다. 국난의 위기 앞에서도 사리사욕에 눈이 멀어 싸우고만 있을 것인가, 언제까지나 작은 이익을 위하여 대국의존 정책을 펼칠 것인가 라는 역사적 중압감마저 읽혀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왕의 남자]에 이르면 역사책의 각주로 기록될 법한 인물들을 내세우고 동성애라는 코드를 삽입시키면서 보다 구체적인 집단을 대척에 배치하게 된다. 즉, 훈구대신이라 불리는 보수 세력과 연산과 처선의 손을 잡은 개혁세력이 그것인데, 중종반정을 일으킨 집단 역시 수구세력에 다름 아니라는 것을 통해 마이너리티의 가능성과 한계를 동시에 보여주고 있다. 그러니 “인생 뭐 있어? 그냥 놀자”고 하는 얘기가 이준익의 입에서 나오는 것도 전혀 무리가 아니다.

또한 [라디오 스타]는 최곤의 음악방송을 홍보하는 방법으로 인터넷 홈페이지를 선택함으로써 가히 네티즌의 힘을 보여주고 있으나, 그런 와중에도 청취자의 사연을 들려주는 생방송 스튜디오 장면으로 청취자와 관객의 심금을 울림으로써 아날로그의 힘을 과시하기도 한다. 이제 이준익의 패러디는 [즐거운 인생]에 이르러 좀더 사적영역으로 들어가게 되는데, 중년남성의 무기력과 정체성 문제는 기본이고, 사교육과 기러기 아빠에 이르기까지 당대 한국사회에 팽배한 사회문제를 조목조목 거론하고 있다. 이렇듯 동시대성과 밀접한 코드를 대거 차용하는 이준익의 영화가 사회드라마까지 도달하지 않은 것은, 언제나 인생은 놀이라는 난장 위에서 이야기들이 펼쳐진다는 것과 무관치 않을 것이다.

때문에 관객은 1400년 전 역사를 통해 동북아 정세 속에 어정쩡하게 놓인 21세기의 한국을 보고, 조선의 저잣거리와 궁궐 속에서 벌어지는 암투를 보면서 보수와 진보의 대립이 극에 달한 오늘의 한국사회를 목도할 수 있으며, 88년 가수왕인 한 남자의 눈물 속에서 아날로그와 변두리의 질박한 삶을 (아주 편안한 마음으로) 만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준익 영화가 일정부분 흥행을 보장 받아왔다는 점에서 본다면 우선 거론되곤 하는 오락성이라는 강점을 포기할 수 없을 테지만, [즐거운 인생]에서 확인시켜준 그의 능력과는 별개로 진부해질 수 있다는 위험징후 또한 감지되고 있다. 많은 이들이 언급했던, 여성 캐릭터의 부재와 ‘놀이’에 집중함으로써 평탄하다 못해 예측 가능한 서사구조가 그것인데, 앞으로 이준익 영화의 진일보를 위해 짚어봐야 할 대목이다.


남겨진 것들 : 포기와 체념의 미학을 넘어

이준익 영화의 특징 중 하나는, 인물과 사건을 배치하여 재미있게 끌고 나가다가, 마지막에 가서 ‘슬그머니 놓아버린다’는 것에 있다. 부연하자면, ‘슬그머니 놓아버린다’는 표현은 특정 쇼트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러닝타임 내내 끌고 온 영화서사에 대하여 모호한 입장을 취한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99%의 주도권을 가지고 달려온 감독이 마지막 1%를 관객의 상상과 입장에 맡겨버린 채 포기한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 도 있다. 그렇다고 이것이 히치콕이 말한 ‘관객의 정서적 참여’와 동일한 것은 절대 아니다. 오히려 정교하게 기획된 극적효과라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이러한 특징들은 영화의 결말부에서 곧잘 드러나곤 하는데, 의도적으로 여운을 남기는 결말과 순간을 포착하는 극적인 카메라 워크는 [황산벌]을 비롯한 그의 모든 작품에 공통적으로 적용되고 있다.

[황산벌]의 마지막은 계백에 의해 남겨진 역사의 산증인 ‘거시기’가 모내기하는 들판으로 달려와 엄니와 해후하는 장면이다. 이준익은 황산벌의 결사항전을 후세에 전파하는 임무를 이름 없는 민초의 대변자인 거시기에게 맡기고 있다. 이를테면 제 아무리 전란 중일지라도 (모내기하는 시골의 하늘은 더 없이 파랗고 어머니의 품은 한 없이 넓기에) 그래도 삶은 계속된다. 고 말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바로 앞 장면에서 “전쟁이든, 나발이든 니가 뭔데 내 새끼 다 죽인다냐.”며 악다구니를 쓰던 계백의 처의 모습이 무릎 굻린 패장 계백의 회상을 통해 보여 진 후, 느닷없이 등장하는 평화로운 농촌 하늘과 거시기의 달음박질은 감정의 괴리를 메우기 힘들 정도다. 무엇보다 전쟁은 나당 연합군의 승리로 끝을 맺었고 신라에 합병된 후 백제 백성의 삶이 어떻게 펼쳐졌을지는 모를 일이나 이름 없는 병사의 삶이 녹녹하지 않았으리라는 것은 분명한 사실일 테다.


이준익은 한 잡지와의 인터뷰에서 “무조건 빨리 포기해야 즐거워져요. 그걸로 인해서 많은 부분이 자유로워”진다고 말했다. 계백이 “나는 오늘 거시기를 너를 남기겠다”며 도망칠 것을 명했을 때, 한 치의 주저함 없이 도망치던 거시기의 모습이 이준익의 자화상은 아닐까. 결국 즐거운 인생을 위한 이준익식 놀이의 철학은 [황산벌]의 마지막 장면을 거쳐 [왕의 남자]에서도 어김없이 이어진다.

[왕의 남자]는 중종반정의 반란군이 궐문을 열고 진입하는 순간, 공길과 장생이 하늘로 치솟아 오르는 역동적인 쇼트로 끝을 맺는다. 영화는 공길과 장생의 후일담을 이야기하지 않지만 그들은 여전히 광대로 살아갈 테니 이 또한 민초의 영속성을 대변하는 것일 터이다. 다만 역사의 현장마저 두 남자의 줄 위 교접처럼 처리한 앙각쇼트가 우선될 정도로 이준익은 라스트 신을 통해 놀이와 소수자의 화려한 한 때를 극단적으로 부각시키고 있다. 이는 [라디오 스타]의 박민수와 최곤을 스냅 사진 찍듯이 프레임 처리한 것으로 입증되더니, [즐거운 인생]에서는 정점의 순간에 아예 카메라를 공연장 밖으로 빼냄으로써 현실세계와의 거리감을 유지시키는 도구로 사용된다.

즉, 활화산 밴드의 공연장이 성별과 세대를 넘어 록과 꿈으로 공감하는 중년 남성의 판타지가 꽃 피우는 공간, 불화했던 아내와 남편이 화해하는 공간, 무능력 가장의 이면이 발견되는 공간, 결별의 아픔을 딛고 새 삶의 터전이 되는 공간이라면, 카메라가 빠져나가 멈추는 공간은 현실의 공간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활화산의 멤버들을 기다리는 진짜 삶은 공연장 밖에 놓인 현실의 삶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이준익 영화의 인물들은 진짜 삶으로 나가기 직전까지 여분의 힘을 비축하는 데만 힘을 쏟고 있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삶의 메인이벤트는 전혀 다른 양상으로 펼쳐지기 마련이다. 이상과 현실이 다르기 때문이고 꿈과 삶은 같이 가기 힘든 것인 때문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박민수의 삶이 나아질 것이라 보지 않고, 최곤이 하루아침에 신세대가 좋아하는 톱 가수가 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익히 알고 있다. 활화산 멤버들의 삶 역시 크게 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가수왕과 대학가요제 본선진출이라는) 내세울 만한 경력과 주류 편입이라는 목표에서 한 발 물러나 즐겁게 놀고 살아가는 것이 즐거운 인생임을 깨달았을 때, 최곤은 소중한 것들의 의미를 알고 다시 태어나게 되며 활화산 멤버들은 현실에 더욱 충실하게 살아가리라는 것을 믿(고 싶)을 따름이다. 설사 그렇다고 해도 감독 스스로가 ‘인생 뭐 있느냐’는 식의 허무주의와 낙관성에 너무 몰입함으로 인해 극중 인물들의 비현실적인 삶을 과장되게 찬양하는 것은 아닌지 우려된다. 이준익의 영화가 뻔한 습속에 안주해버릴 가능성마저 보이기 때문이다. 이는 현실에 안주해버린 자의 삶이 희망적이지 않다는 점에서도 그러하다.

이준익의 영화가 관객과의 접점을 찾아내어 가려운 곳을 잘 긁어줌으로써 흥행과 비평 양자 모두의 사랑을 받았던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주지하다시피 290만 흥행을 이룬 [황산벌]에서 가능성을 타진했고 [왕의 남자]의 1,200만을 거치더니, 184만의 관객과 만난 명품 드라마 [라디오 스타]를 통과하면서 그의 연출 능력은 경지에 오른 듯 했다. 그런 점에서 [즐거운 인생] 역시 여전히 유쾌하고 매끈한 장르영화임에 분명하지만, 이준익의 한계를 보여준 작품이라는 점도 간과할 수 없다. 보다 적극적이고 공격적으로 삶과 마주할 수는 없는 것일까?
 
제 아무리 ‘제국이 사멸해도 놀이는 지속 된다’ (주 5)지만 노는 것도 정도 나름이다. 본지 필자인 이영의 지적대로 ‘반쪽짜리 이야기’로 영화를 만드는 것이 이준익의 장기라고 단정 짓기에는 무리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객의 변덕스런 취향을 고려할 때, 놀이하는 인간의 이야기가 언제까지 호응 받을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자칫 고만고만한 영화로 진열장만 채워 놓는다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물론 그 재주도 함부로 평가할 것은 아니지만 이러한 재능 위에 미학적 접근이 더해진다면 얼마나 좋을 것인가!



에필로그

[즐거운 인생]에서 ‘즐거운 인생’의 가사를 본 기영의 아내는 말한다. “나는 매일 힘들고, 매일 후회해!” 매일 같이 힘들고 후회하는 삶. 따지고 보면 이것이 인생의 본질이다. 그렇다고 후회만 하고 살 수는 없을 터이니 무어라도 안간힘 써보는 것이 중요할 것이고 어차피 한 번 살고 가는 후회 가득한 인생이라면, 이왕이면 즐겁게 웃으면서 살자는 것이 이준익의 세계관일 듯싶다. 때문인지 이준익 영화의 인물들은 현실감각이 젬병이다. 일반적 삶의 양상에서 비껴서 있기 십상이라는 얘기다.

결국 힘들고 후회하는 것이 삶의 일반적 모습이라면 기영을 포함한 세 남자의 삶은 한 발을 허공에 딛고 있음에 분명하다. 비단 [즐거운 인생] 뿐 아니라 이준익의 영화의 인물들은 하나같이 한 발을 허공에 두고 있다.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전장에서도 모내기를 걱정하는 거시기와 목숨을 담보로 왕과 담판 짓는 장생이 그러하며, 여전히 왕년의 명성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최곤이 그러하다. 그럼에도 이러한 인물들이 관객에게 매력적으로 보일 수 있었던 것은, 이들의 일탈적 행동이 고단한 우리네 삶을 탈주선 너머로 인도하기 때문이다. 즉 욕망의 분출구를 열어 놓으면서 맘껏 나가보라고 권유하고 있다는 것이다. 설사 그렇다고 해도 현실의 삶을 외면할 수 는 없을 터. 언젠가 되돌아 와야 할 일이라면 그것은 빠를 수 록 좋을 것이다. 문제는 어떤 모습으로 돌아오느냐 일 테지만.

요컨대 이준익의 영화는 요즘 보기 드물게 좋은 품질을 자랑하고 있다. 그가 삶의 양식을 영화로 만드는 인물이자 자기반영적 영화를 감칠맛 나게 만들어내는 몇 안 되는 우리시대의 장인이라는 것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 이제껏 거론한바, 마이너리티의 힘을 보여주고 놀이를 통해 극중 인물의 삶을 개선시켜온 그의 영화가 여기서 멈춰서는 안 될 일이다.

주문하건대, 이제껏 천착해온 놀이와 소수자를 통한 동시대의 패러디와는 다른 서사를 가진 영화를 차기작에서 만나게 되길 바랄 따름이다. 밴드 3부작’의 마지막 이야기인, 게다가 수애가 타이틀 롤을 맡았다는 [님은 먼 곳에]가 기다려지는 것은 비단 필자만은 아닐 것일 터이니, 또 한번 놀이의 미학에 천착하여 멈춰 설 것인지, 아니면 놀이와 현실의 고민 사이에서 새로운 미학적 시도를 품어 주저함 없이 밀고 나갈 것인지. 자못 궁금하다.

주 1 : 졸저 《영화에게 길을 묻다》 생각의 바다. 2005
주 2 : 졸고 <삼각구도가 빚어낸 격정적 로맨스 [왕의 남자] 그 매혹과 한계>
주 3 : 졸고 <[라디오 스타] 시공간을 오마주하는 이준익의 힘>
주 4 : [즐거운 인생]에서 “지금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나이 먹어서도 이렇게 살 거”냐는 기영의 아내의 푸념과 “다른 건 괜찮은데, 수학이 문제야, 이번에 선생 하나가 애들 둘 만 가르치는데...”라며 사교육에 열 올리는 성욱의 아내의 호소는, 변두리의 삶을 사는 이들의 한결 같은 중심으로의 수직상승 욕구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주 5 : 로제 카이와 《놀이와 인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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