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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쾌해야 재미있다. 복잡하면 어렵다. 개그 콘서트에서 박지선은 남자를 유혹한답시고 일장연설을 늘어놓는다. “참 쉽죠잉~!”라고 끝맺는 그녀의 말에는 뼈가 있다. 박지선이 연애를 한다는 게 웃기다는 것이 아니라, 남자를 유혹하는 일은 식은 죽 먹기라는 그녀의 말이 우습다. 박지선이라는 실재가 미인에 대한, 연애에 대한 환상을 깨뜨렸기 때문이다. 이와 유사하게 예술가들은 고정관념과 기존의 미학을 비틀어 전복의 미를 제시하기도 한다. 얼마 전 덕수궁 미술관에서 열렸던 페르난도 보테로 전을 생각하면 쉬울 듯하다. 보테로의 작품 중에는 명화들을 자기만의 방식으로 재해석한 그림들이 많다. 그의 손을 거치면 다빈치의 ‘모나리자’의 여인도, 얀 반 에이크의 ‘아르놀피 부부의 결혼’ 속 피골이 상접한 부부도 모두 고도비만자로 변한다. 이처럼, 종종 희극과 예술은 상식을 넘어서지 않는 소재들을 활용한다.


황철민 감독의 2002년 작 <팔등신으로 고치라 굽쇼?>는 상식이 통하지 않는 세상을 비웃는 영화다. 동시에 세상을 어지럽히는 모리배들에게 일침을 가하는 저항의 예술이다.

영화는 2001년 세종대에 재직 중이던 회화과 김동우 교수는 재임용에서 탈락한 사건을 다루고 있다. 김동우 교수는 학교 측에 대항해 1인 시위를 벌이게 된다. 세종대는 재임용 탈락 대해 뚜렷한 명분을 제시하지 않았다. 대학재단이 교수 한 명을 자르는 건 참 쉽다는 걸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다. 우리는 영화 제목에 비추어 이 사건이 웃지 못 할 촌극이자, 부조리극이자, 희대의 재앙임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실제로, 1999년 김동우 교수는 교정에 설치할 조각품을 제작한다. 교정에 설치하기 직전, 세종대 주명건 교수가 작품을 훑어보고는 “팔등신으로 고치라”고 말한다. 그 조각품은 어머니가 아이를 안고 있는 모습이다. 동양적인 미학에 가까우며, 푸근함, 인자함, 복과 덕을 풍기는 어머니 상이었다. 그러나 이사장의 취향에는 맞지 않았나 보다. 이사장은 한복보다는 비키니가 빛나는 여인상을 원했나보다. 페르난도 보테로도 웃고 갈 일이다. 팔등신으로 고치라니!

여기까지, 영화는 희극이다. 그러나 그 이후는 재난, 재앙, 인재라고 부르는 게 맞을 법하다. 청천벽력 같은 재임용 탈락통보에 깅동우 교수의 행동은 변한다. 그는 자신에게 닥친 불행이 예술계 전체와 학계전체에 닥친 불행으로 받아들인다. 과거 부르주아적 예술관을 가지고 있던 한 예술인이 정치에 적극 참여하게 되는 과정에는 서글픔이 뚝뚝 떨어진다. 김동우 교수에게 찾아온 재임용 탈락은, 우리 사회가 순수함과 그 가치를 고수하려는 강직한 학자를 아니꼽게 바라본다는 반증이다. 그래서 김동우 교수의 침묵과 시위는 서글프다.

영화 속에서 다루어지는 상식의 위반은 유머가 아니라 공포로 변한다. 예컨대 새우깡에 새우가 없다는 건 상식이다. 그러나 꼭 1년 전 새우깡에서 쥐머리가 나왔을 때, 대중은 웃기보다는 벌벌 떨었다. 불신지옥이라고 했나? 이제는 그 말이 바뀌어야 한다. 맹신지옥이다. 중앙대에서 진중권을 만날 수 없을 거라는 사실, 홍익대에서 진중권의 강의를 들을 수 없다는 오늘의 사실, 황지우 총장이 외압에 밀려 한예종을 떠났던 엊그제의 사실. 과거의 고통은 과거로 끝나지 않고 암세포처럼 증식해서 현재의 재앙으로 진화해 가고 있다. <팔등신으로 고치라 굽쇼?>는 타임머신처럼 봉인된 과거를 풀어 놓는다. 악순환의 연속이다.

이 영화는 현 사립대학의 과거이면서도, 다가올 대학들의 묵시록적인 비전이기도 하다. 전국 대학 곳곳에서는 시장경쟁의 원칙이 적용되고 있다. 학생들과 교수들은 흡사 어깨에 단두대를 짊어진 양 위태롭게 생활하고 있다. 여차하면 적법한 절차도 없이 서슬퍼런 칼날을 떨어뜨릴 기세다. 진중권 교수가 재임용에 탈락하고, 이에 반발한 30여명의 학생들이 총장실에 빨간 딱지를 붙였다는 이유로 징계를 받았다. 더 끔찍한 일도 있었다. 8월 말, 부산대에서 70명의 비정규교수들이 무더기로 해촉했던 가히 충격적인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 사건은, 비정규교수노조의 반발이 거세지자 부산대에서는 해촉 된 70명 모두에게 이번 학기에 5시간미만의 수업을 배정하는 걸로 일단락 지었다. 부산대 사건의 결과를 제쳐두고서 보더라도, 학문의 전당에서 신자유주의식 경쟁법칙과 그리고 정치적 놀음이 벌어진다는 일은 아이러니에 가깝다. 학문의 길은 멀기만 한데, 정치와 돈은 왜 이리 가까이 온 걸까.

상식을 비웃는 작태들은 가진 자들의 유머로 전락하고 있다. 그들은 학문의 장을 정치의 장으로, 또 경제의 장으로, 끝내는 사교의 장으로 바꿀 수 있다는, 자신들의 마법 같은 무소불위의 권력에 의기양양해 한다. 가진 자들은 늘 가진 자들끼리 웃는다. 신자유주의식 유머란 권력을 마법처럼 휘두르는 자들이 만들어 내는 그들만의 개그 콘서트다.

교수가 강단에 서는 것은 일반상식이다. 학교라는 울타리는 사제지간의 상호관계를 전제로 한다. 그러나 어제의 스승은 내일의 스승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사실, 그건 공포다. 우리의 믿음을 배신하는 공포. 다른 말로 신자유주의식 공포.



윤성호 : 지금 원래 저희가 많이 와요. 그런데 오늘 조금 조촐하게 됐는데 그건 영화랑 상관 없는거구요. 좋은 소식이 있다면 충무로 영화제가 한창인데 거기보다 관객이 많고, 화면상태도 양호한 편이고(웃음). 일단 세 분 소개를 부탁드릴게요.

박찬경 : 안녕하세요, 박찬경입니다.
황철민 : 영화 만든 황철민입니다.
김동우 : 김동우입니다.

윤성호 : 제가 추가로 소개드리자면 황철민 감독님은 방금 보신 <팔등신으로 고치라굽쇼?> 다큐를 만드셨고, 전에 <프락치>라든지 다른 극영화도 만드셨고, 이전에 조중동 프레임이 없을 때도 <옥천전투>같은 안티조선 다큐를 만드셨어요. 독립영화의 선배시기도 하고. 김동우 교수님은 소개 안 해도 충분히 영화에서 보셨을테고. 박찬경 선생님은 설치미술가시고 한예종에서 강의하고 계시는데요, 요새 문화예술에 대해 권력이나 정부가 전방위적으로 많이 개입하고 있는 상황에서 발언도 많이 하고 계시고 한예종 친구들을 응원하고 계셔서 특별히 초대했습니다. 영화에 대해서 일단 저희가 충분히 얘기를 나누고 관객에게 마이크를 돌릴께요. 감독님 오랜만에 영화를 보셨을텐데 소회나 그간의 경과를 얘기해주세요.

황철민 : 02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프리미어 상영을 했구요. 몇 년 동안 전교조 선생님들, 해직된 많은 교수님들을 위해서도 상영됐었고 여기저기서 상영이 많이 됐습니다. 그리고는 한동안 상영이 안됐다가 오늘 다시 보게 되니 감개가 무량하고요. 이 영화를 만든 다음에 2편을 만들어야 하지 않나 생각했어요. 영화를 보면 희망 없이 끝이 났거든요. 막연한 희망만 있고 끝이 났는데 사실 저희가 승리를 했었어요. 했었다,는 얘기를 했는데 여기 나오는 굉장히 이상한 이사장님은 교육부에서 해고를 시켰고, 너무 많은 비리가 드러나서. 학교를 떠나셨고. 여기에서 엄청나게 상처를 안고 투쟁을 하셨던 김동우 선생님은 복직을 하셨고, 저도 그 덕에 같이 복직을 했었어요. 이야기는 해피엔드로 끝나는 거 같았었는데요. 한국사회에서 이런 투쟁이 해피엔드가 되기 쉽지 않기 때문에 이걸 담은 영화로 2편을 만들어야 하지 않나 했는데, 그 기간이 그렇게 길지 않았습니다. MB정부 들어서고 1년이 지나니까 임시이사가 파견됐는데, 주명건 이사의 하수인으로 임시이사가 들어와서 총장님도 그 분의 하수인, 교무위원도 그쪽으로 배치되고. 1년 만에 다시 원상복귀 했습니다. 이제 2편을 찍으면 승리의 편이 아니라 고난의 편 2편이 나올 것 같다는 예감이 듭니다.

김동우 : 이 영화에 본의 아니게 주인공 역을 하게 됐는데 4년을 싸웠죠. 2002년도에 시작해서 4년 만에 학교에 교육부 감사가 나오고 이사장이 쫓겨나고 민주적인 임시이사들이 들어오면서 저희가 복직이 됐습니다. 저와 더불어 과거에 더 옛날에 부당하게 해직 당했던 분들까지 6명이 복직을 했어요. 황철민 선생님은 이 영화에서도 나오지만 말하자면 학교에서 해고나 쫓겨난 게 아니고 본인 스스로가 이 학교에서 교수를 한다는 것에 대한 지식인으로 양심의 고백으로 스스로 떠났기 때문에 해직교수는 아니죠. 자발적으로 사표를 냈기 때문에. 이분이 돌아올 수 있는 길은 우리는 억울하게 쫓겨났기 때문에 원상복귀지만 이 분은 사표를 내서 다시 돌아온다는 방식이나 절차가 그랬는데 그 당시에는 총장님이나 학교 교무위원 임시이사에 계신 분들이 특별채용으로 다시 모시자. 다시 재임용되는 절차를 해서 황철민 선생님도 들어왔습니다.


우리가 참 작은 승리감을 가졌던 게 4년이 지났습니다. 그리고 한 달 전에 완전히 다시 거꾸로 가는 세상이 돼서 황 선생님 말씀대로, 과거의 주명건 이사장이 얼굴은 안보이지만 그 사람의 하수인이 다시 학교를 장악하고 총장이나 교무위원을 바꾸고. 이 영화가 처음 시작할 때 상태로 갔습니다. 어쩌면 제가 또 쫓겨날지 몰라요. 2편을 만들면 더 고난의 영화가 되겠죠. 한국의 정권이 바뀐다고 해서 어떻게 이렇게 옳고 그름이 바뀌는지 어리둥절하고, 교육부에서 2년 전부터 세종대는 정상화하겠다고 해서 굉장히 희망을 갖고 있었는데 대통령이 바뀌니 정책이 바뀌고 비리로 쫓겨났던 재단 이사장들이 다시 돌아온 것이 우리 세종대 뿐 아니라 상지대, 조선대 등 기타 많은 대학이 또 이러한 반복을 하게 됐어요. 솔직히 아마 1년 전에 이 영화를 했으면 우리는 신나게 이야기를 할텐데. 아주 옛날처럼 고압적으로 교수들의 사상까지 통제하고 화합이라는 명분으로 우리같이 비판적인 사람들을 위협적으로 대하고. 하여간 더 큰 발전을 위해 역사가 잠시 거꾸로 갈 수 있겠구나, 거꾸로 간 것의 몇 배 더 발전할 것이라는 희망을 갖고 2편을 만든다면 주인공이 아니고 조연정도 하고 싶습니다.

윤성호 : 말씀 들으니까 생각나는데 저희가 월례포럼 기획하면서 2월에 튼 작품이 <박통진리교 뻑큐멘터리>라고 박정희를 숭배하는 이야기였는데, 그것도 8년 전 얘기였어요. 그것도 몇 년 전에 틀었으면 재밌었을텐데. 그분들이 지금 다 주역이어서요. 그래도 그렇게 보는 재미도 있더라구요. 이 영화가 어쩌면 사학재단 비리 얘기 뿐 아니라 문화예술에 권력이 개입하는 얘기기도 해서 싱크로율이 이만큼 높을 때가 없을 것 같아요. 박찬경 선생님이 관련 포럼도 참여하고 계셔서 관련된 소감을 여쭤볼께요.

박찬경 : 영화 재밌게 봤습니다. 다들 아실 거 같은데요, 영화계에서 벌어지는 일이야 여러분이 더 잘 아실 것 같고 영화 뿐 아니라 한예종으로 대표됩니다만, 한예종 이외에도 미술, 출판 등 전방위적으로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눈에 띄게는 ‘인디’자 붙는 것은 다 감사를 한다던가, 예산지원을 중단한다던가, 이런 식으로 활동을 차단하거나 주요 인물을 교체하거나. 인디음악 하는 사람들 인디레이블 지원 사업이라는 게 있는데 그런 것도 다 없어지고, 미술 쪽에서는 공간들이 없어지구요. 미술은 독립공간이라고 안하고 대안공간이라고 보통 써요. 만약 미술에서도 독립이라는 말을 썼으면 벌써 없어졌을텐데, 대안이라는 말을 써서 수명을 연장하고 있는 형국입니다. 그런 일들이 정권 바뀌면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는데요. 가장 큰 문제는 한국 문화의 변화라는 것이 그냥 진보에서 보수로 변하는 게 아니라 10여 년간 축적된 현장의 역량을 고갈시키는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다는 것. 아까 영화에서 봤을 때 김동우 선생님이 조각계 공헌한 일이 없어서 그런 사유로 얘기했다는 장면을 봤는데, 그런것처럼 행패에 가까운, 상식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 문화행정이라고 하는 게 실종됐죠. 잘못된 것도 물론이지만 행정 자체가 실종되는 걸 매일같이 새로운 사건을 통해 겪고 있습니다. 능력도 없고 관심도 없고 권력을 행사하는데만 관심 있는 사람들이 많이 남아있는 거 같아요. 그런 사람들이 대학 뿐 아니라 사회 전반에 재등장하고 있는 것이 굉장히 우려스럽고. 저는 가끔 문화전쟁이라는 말을 쓰지만 문화전쟁의 시기가 온 게 아닌가, 이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윤성호 : 이 자리에는 한예종 비상대책위원회 학생들이 초청 돼 있는데요 다큐를 보면서 사실은 저희가 왜 이렇게 반복될까 개탄할 것만이 아니라 타산지석으로 삼아 예․복습해야 할 거 같아요. 어떻게 싸움을 할 지. 그래서 아까 나온 말씀 중에 작은 승리를 사실 했었는데, 학교에서 문화예술에서 얻은 작은 승리들이 왜 긴 승리로 이어지지 않을까를 짚어봐야 할 거 같은데요.

황철민 : 안타까운 일인데 충분히 긴 승리가 될 수 있었어요. 예를 든다면 세종대가 굉장히 좋은 조건이었거든요. 다시 얘기하면 한국 사학의 대부분의 문제는 설립자들이 학교를 자기의 소유물로 생각하고 이를 통해서 사업을 하겠다는 의식이 많고 이걸 놓지 않으려는 게 심했는데, 세종대의 경우는 설립자가 나중에 진짜 악덕 설립자가 얼마나 사회악이고 패륜인가 하는 걸 몸으로 절실히 느꼈어요. 주명건 이사장이 학교에서만 패륜 짓을 한 게 아니라 설립자, 형제들에게도 했어요. 세종대를 사회에 환원한다, 저런 자식에게 학교를 주느니 환원하겠다고 생각도 했다고 했어요. 굉장히 조건이 좋았죠. 그때가 참여정부 시절이었는데 유감스럽게도 참여정부는 그런 뜻을 실현시킬 준비가 안돼있었어요. 좀 삼천포인데, 설명드리자면 평택 대추리 땅 십분의 1이 세종대 땅이에요. 참여정부 때 미군기지를 평택에 짓기 위해서 그 땅을 국유화해야 했는데 그 때 세종대 이사장이 비리를 저질러서 짤리는 상황이었죠. 다시 돌아올 구멍을 열어줄테니 땅 파는데 싸인해라, 이래서 싸인을 하죠. 그리고 그 당시에 이사장 이하 이사들이 그 당시 비리에 대한 책임을 지고는 학교를 떠나야 하는데 자유이사라는 명목으로 몇 명이 남았어요. 결국 정권이 바뀌면서 세종대학교가 다시 과거 비리 이사장의 수중으로 떨어지죠. 정책적인 부분이니까 정확히 짚고 넘어가면 참여정부에서 그렇게 하게끔 했던거죠. 제가 보기에는 참여정부에 있었던 분들이 나쁜 분은 아니었겠죠. 저는 한국의 대학이 갖고 있는 가치와 의미를 그분들이 잘 모르지 않았나. 한국에 있어서 정치적 민주주의의 중요성만큼 사학, 대학이 가진 중요성을 그분들이 잘 인식하지 못하지 않았나 해요.


최근에 한예종 사태와 함께 진중권 교수가 중대에서 쫓겨났어요. 너무 안타까워요. 우리나라 몇 안 되는 훌륭한 지성인이고 지식인이고, 교수가 되도 진짜 당연한 분인데도 저는 오랫동안 교수가 못 되는 게 희안하다고 생각하고. 박노자 같은 분은 왜 한국에서 교수가 못되고 노르웨이 가 있나. 멋진 사람인데 저 분은 왜 강사일까, 이런 생각 많이 하게 되는데. 여러분들이 잘 모르실꺼에요. 우리나라에서 대학 교수가 되려면 사상검증을 통과해야 하거든요. 그분들은 사상검증에 통과 못해서 교수 못되는거에요. 우리나라 대학교의 99%가 소위 얘기하는 보수 우익 대학교들이에요. 여러분들 한 번 생각해보세요. 다니는 대학들이 사상적으로 볼 때 어디에 서 있는가. 우익이 나쁘고 좌익이 나쁘다는 게 아니에요. 다 의미가 있습니다. 한 사회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다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우리나라는 99%가 치우쳐져 있어요. 그러다보니 유감스럽게도 개혁적이고 진보적인 사람이 생기는 게 우연히 생길 수밖에 없어요. 보수 우익 이런데는 조직적으로 재생산되는데 비해서 진보적이고 개혁적인 사람들은 우연히 만들어지고 있거든요. 이게 한국사회 문제점이고. 정말 괜찮은 교수들은 교수가 될 수 없어요. 제가 임용시 에피소드를 말씀드리자면 저는 사실 20대 초반에 독일로 유학을 갔다가 30대 후반에 돌아왔어요. 유학을 오래 한 편인데, 행운이라고 얘기 할 만큼 쉽게 임용이 됐어요. 아마 그 분들이 절 잘 몰라서 그랬을 거 같은데. 그 때 면접 하면서 설립자분이 그러더라구요. 생긴 게 착하게 생겨서 뽑는다(웃음). 자세히 보면 착합니다. 착하게 생겼다는 것이 무슨 뜻인가 하면 말 잘 듣게 생겼고 절대 학교에 반항하지 않고 시키는 대로 고분고분하게 생겼다는 의미입니다. 다시 얘기하면 사상검증을 한거에요. 저나 김동우 선생님은 그분들이 눈이 어두워서 잘못 해서 뽑힌 교수들이에요. 이렇게 해서 교수가 되는 사람들이 5~10% 아닌가 싶어요. 그나마 상아탑에서의 양심을 대변하고 있는 겁니다. 여러분들 주변에 그런 교수님 있으면 굉장히 귀하게 생각해야 해요. 진중권 교수처럼 아주 분명한 이런 분들은 우리나라에서 절대 교수가 될 수 없다. 우리나라에서 교수가 될 수 없는 분들을 교수로 만들 수 있는 대학이 세종대가 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국민의 정부, 참여정부 때 정책하는 분들이 잘 인식하지 못했기 때문에 가능성을 다 놓치지 않았나 싶어요.

윤성호 : 감히 거칠게 요약하면 저희가 민주화 정부라고 생각하는 시절부터 이런 문제가 잉태돼 있었고, 확실히 뿌리 못 뽑은 게 아쉬운 거 같고. 말씀하신 것 중에 와 닿았던 게 대부분이 보수우익 대학교잖아요. 저도 한예종 전문사 나왔는데, 여기는 보수우익 학교라고 생각했어요. 플랭카드에 각고의 노력으로 글로벌 리더가 되자(웃음) 이런 것도 있고. 이 정권이 되게 좋아할만한 학굔데. 우연히 진보지식인이 되버린 박찬경 교수님도 왜 우리가 어떤 기회를 놓치고 왔을까, 대안 같은 거 있으시면 말씀 부탁드릴께요.

박찬경 : 각자 할 수 있는 일을 잘 찾아서 해야 할 거 같습니다. 힘들어요, 지치고. 한 20년 싸웠으면 됐지 또 해야 되나 싶기도 하고. 다른 방법이 없는 거 같아요. 새로운 대안과 방법은 다 나온 거 같구요. 일종의 제로그라운드라고 해야 하나. 개개인에게 묻는 거 같아요. 뭐할래, 뭐 할 수 있을까. 각자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게 중요하고 거기서 연대하는 게 필요한 거 같아요. 문화예술은 한 10년 동안 각자 작업하느라고 바빴잖아요. 그간 좋은 환경에서 작업한거죠. 각자 바빴던 것이 있는데 이젠 좀 자기 예술만 하지 말고 주변의 다른 것들과 손잡고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보는 게 중요하다고 봅니다.




 

윤성호 : 아까 잠시 진중권 교수 얘기가 나왔는데, 그분이 한예종에서 외래교수 했는데 지금 나온 조치로는 마땅히 받아야 할 강사료를 다 환수하라고 판정이 나왔을거에요. 한예종에서, 많은 예술의 기관장, 단체에 대해 눈에 보이고 혹은 보이지 않는 탄압이 있는데, 제가 자꾸 예를 한예종으로 드는 건 한예종이 후안무치하고 첨예해서 그런가봐요. 한예종이 장기화되면서 약간 잠잠해진 느낌이 있어요.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는데. 김동우 교수님도 투쟁하셨는데 본인한테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문제임에도 싸움들이 조금씩 지칠 때가 있었을 거 같아요. 화면에서는 학생들이 도움이 됐는데, 그런 노하우, 경험을 들려주시면 좋을 거 같습니다.

김동우 : 글쎄 저는 부끄럽게도 세종대학에 오기 전에는 지금 생각하면 예술은 사회적 정치적 메시지를 너무 강조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했어요. 순수한 예술지상주의적 사고를 오랫동안 가졌던 거 같은데 예술이 정치적 프로파간다에 이용이 된다던지, 오랫동안 서양의 역사에서 보면 종교의 도구가 되는 예술을 많이 봐왔고, 그러면서도 예술은 발전해 왔지만. 저는 사회의식, 정치의식이 없다시피 한 그런 무색무취한 사람이었습니다. 사실 진보·보수 ·좌·우 등등의 논리에서 깊이 생각해보지 않았고, 사실 지금도 저는 그 말을 별로 적극적으로 사용안합니다. 옳고 그름을 이야기 하는데 굳이 그런 프레임으로 대는가. 무엇이 민주적이냐, 무엇이 옳고 그르냐를 얘기하는데 경우에 따라 좌다 진보다 이런 식으로 정치적 색을 입히는 게 우리 한국사회가 아닌가. 제가 재임용에 부당하게 탈락했다는 것이 예술가로서의 자존심이 엄청 상한거죠. 어쨌든 돌을 갖고 애를 써서 내 나름대로 만들었고, 그것을 평가하는 건 보는 사람의 자유죠. 좋게 보는 사람도 있고, 여자가 뚱뚱하고 정말 그렇게 보는 건 그 사람의 자윤데. 그걸 만든 사람에게 자기 권력을 이용해서 강압적으로 고치라고 할 때, 참 정말 난감했어요.


그리고 사실 교수가 뒤늦게 됐죠. 저는 외국생활 오래 하다가 40대 후반에 엉겁결에 그 당시 IMF오고 하니까. 그 전에는 전업 작가로 작품이 그런대로 판매가 돼서 생활을 했는데, 97년도에 작품이 팔리지도 않고. 유학을 했지만 대학교수는 생각 안 하고 유학을 했어요. 저는 대학만 두 번 다녔지 대학원 다닌 적도 없습니다. 예술가의 길과 교육자의 길은 분명히 다르다고 생각했는데, 늦은 나이에 경제적 상황에 의해 대학에 와서 오자마자 그런 일을 당하고 나니 분노를 느꼈고. 아주 단순한 얘기에요. 어떻게 예술가에게 이런 부당한 일이 벌어질 수 있는가. 선택을 했죠. 이 작품을 고쳐서 ‘이사장님 아닌 게 아니라 짜리몽땅하고 답답하네요, 제가 실력이 모자라서 그렇습니다’라고 말하고, 좀 더 날씬하게 고쳐서 그분의 기분을 좋게 해드리고, 학교에 편안하게 있는 길과, 내가 예술가의 자존심을 갖고 이걸 끝가지 주장해서 불이익을 감수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은 몇날 몇일 했습니다. 불현듯 내 자신에 대해서 내가 왜 이런 걸 갖고 고민하나, 내가 언제 교수였다고, 교수 자리에 연연하면서 내 작품 앞에서 떳떳하지 못한가 그런 생각에 크레인 불러서 손 하나 안대고 작품을 갖다 놨죠. 그 다음날 불려가고 시련이 오고, 결국 쫓겨나는 상황이 됐을 때 제 나름대로 두 가지 길이죠. 조용히 작업하면서 산속에 파묻혀서 작가로 살아가느냐. 근데 황 선생님 옆에 계셔서 싸울 수 있는 용기도 주시고 했지만 어쨌든 제 자신이 좌우, 진보 보수 떠나서 이건 말이 안되는거다 한 번 붙자. 속된 얘기로 한 번 붙여서 머리가 깨지도록 붙자. 아주 점잖은 방법으로 1인 시위를 택했고, 1인 시위가 제가 3년 반을 했는데 매일 그 자리에 서서 저는 무슨 생각을 했겠어요. 제가 예술가 그 이전에 한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는 계기가 됐고 많은 학생들이 큰 힘이 됐고. 그래서 지금은 이 영화를 보고 즐거운 마음이 아니라고 했지만, 저는 믿습니다. 역사의 진행이 결코 거꾸로만 가지 않는다. 제 인생에서 이 영화를 찍었던 몇 달은 굉장히 행복했던 시간이고. 그리고 황철민 선생이 스승의 날 학생들 앞에서 해주시는 얘기, 우리 둘이 희망을 만들 수 없지만 방향은 우리가 보여줄 수 있다고 한 훌륭한 말씀. 그건 아직도 저는 유효하다고 생각합니다.

윤성호 :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학생들과의 연대를 여쭤봤는데 학생들이 큰 힘은 안됐던 거 같습니다(웃음). 농담이구요. 질문을 마이크를 관객에서 넘길께요. 질문, 지지, 의문점을 물어도 좋으니까요 손 들면 마이크가 갈겁니다.

황철민 : 제가 덧붙여 추가로 말씀드릴게요. 이 싸움하면서 느꼈던 건, 싸움하면 공부를 해야 하잖아요. 공부하면 떠오르는 게 손자병법 시작해서 쭉 있는데 적을 알아야 싸움을 이긴다는 게 있는데 우리가 적을 알기 어렵죠, 사실. 학교에서 촬영금지 가처분 신청도 내고, 출입금지도 내고 어떤 분들은 이 영화 보면서 너무 일방적이다, 한쪽편만 나온다 이사장, 교무처장 인터뷰 따서 양쪽 이야기를 다 들어야 다큐 아니냐 하는데, 그렇게 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아요. 그런데 한국 사회에서 이런 영화를 찍는데 인터뷰를 해줄 이사장이, 그렇게 상식적인 이사장이면 이런 일을 벌이지도 않았겠죠. 한국사회가 그렇습니다. 우리가 얘기하는 상식이 있고, 옳은 것이 뭔지 다 아는데 그런 방법이 주어지지 않아요. 그럼 어떻게 해야 하냐. 믿는 방법대로 가야 하거든요. 제 생각에는 결국 여러분들이 싸워서 이기려고 한다면 의지가 무진장 중요해요. 김동우 선생님은 의지가 있으셨고, 그 전에 투쟁하진 않으셨지만, 한번 붙으면 끝까지 싸우겠다는 의지가 있으셨어요. 어느 날 저에게 전화를 하셨어요. 내가 이렇게 됐다, 사정을 얘기하시더라구요. 그래서 만나서 까페에서 선생님하고 얘기를 해봤어요. 제가 얘기 하면서 파악하려고 했던 건 이분이 의지가 있으신가, 몇 일 싸우다가 쪽팔려서 못하겠다, 교수가 이런 거 해도 되냐, 김동우 선생님 1인 시위 할 때 총장이 불러서 교수가 노동자같이 이게 뭡니까, 이래서 김 선생님이 내가 석공이지 무슨 교수였냐 하셨다고 하는데, 많은 분들이 투쟁에서 좌절하는 건 그런 사소한 거 같아요. 근데 이 분은 성질이 있으시더라구요. 한번 붙으면 포기할 분이 아니더라구요. 선생님 하신다면 제가 영화 찍는 사람이니까 다큐 만들어서 다큐로 투쟁의 종자돈 만들어봅시다, 라고 시작했습니다. 그 당시에는 막연했어요. 그냥 붙어보자, 더럽고 치사하니까 우리도 자존심 있는데 그렇게 한 번 붙은거에요. 근데 싸우다 보니까 그 적이 무진장 크고 무섭고 강했는데 붙어보니까 서서히 적의 약점이 보이기 시작하더라구요. 아주 강고해 보이는 적이지만 서서히 적 내부의 균열이 보여요. 여러분들이 차돌을 보면 안 깨질 거 같잖아요. 그것도 아마 현미경으로 들여다 보면 거기도 균열이 있을거예요. 결국에는 그 균열을 찾아내는 힘은 의지고, 여러분들이 한 번 붙어보겠다고 훅하고 달려드는 자세가 필요하다는거죠. 결국에는 세종대 싸움은 김동우 선생님 혼자 이긴 것도 아니고 도와주신 분들의 힘만으로 된 것도 아니에요. 적의 내부 균열에 의해 무너진거거든요. 제가 보기에는 여러분이 누굴 상대로 싸우던지 그 적에도 균열이, 약점이 있어요. 그 약점은 그냥 드러나는 게 아니라 시간을 정하지 않고 죽을 때까지 싸우겠다고 덤빌때 드러납니다. 여기도 나오지만 설립자 내부의 균열에 의해 세종대 싸움을 이기기 된거에요. 이사장을 고발할 수 있는 그런 자료를 어디서 얻겠어요. 비리의 자료는 비리를 저지르는 사람들이 갖고 있는거지 외부사람이 쉽게 가질 수 있는 게 아니죠. 근데 내부에 균열이 있을 때 우리가 얻을 수 있는거죠. 경우에 따라 우리의 것이 될 수 있는거죠.

윤성호 : 이 부분은 잘라서 편집해서 UCC로 회자가 돼야 할 거 같아요. 한예종 처음 시위할 때 학생들이 유인촌이 오니까 자기도 모르게 깍듯하게 인사하게 되잖아요. 근데 학생들도 점점 더 단단해지는 거 같더라구요. 그런 게 희망의 증거인거 같구요. 마이크 넘기겠습니다. 여담으로 한예종 만큼 인연있는 학교가 세종대거든요. 학교에 있는 예수님 상 보면서 신해철 닮았다고 생각했어요(웃음). 오늘 봐도 닮은 거 같아요.

관객 1 : 작업에 관한 감독님의 연출의도를 좀 더 여쭤보고 싶은데요. 우선 사학재단이 자본과 밀접하게 관련된 문제라고 생각해서 한예종이 적당한 비유는 아니라고 생각하구요. 여담이지만 제 친구가 건설회사 사장인데 이번에 4대강 수주를 받았어요. 1200억을 벌었다고 하더라구요. 그 친구는 그 돈을 벌어서 지방대 만 명 정도 되는 데를 인수해서 이사장을 하고 싶다고 하더라구요. 왜 그러냐 했더니 이사장을 해서 만 명 정도 인수하면 6개월마다 400억이 자기 통장으로 들어오는데, 그걸 갖고 다른 사업을 할꺼다, 하던데 결국 그런 사학재단이 자본의 문제와 밀접할 수밖에 없는데. 제가 보면서 작품을 보면서 궁금했던 건 결국 재단의 비리를 밝히는 데 있어서 김동우 교수님 같은 경우도 학자이자 예술가이지만 투쟁 과정을 거치면서 노동자나 계급의식도 많이 생겼을 거 같더라구요. 전반적이고 구조적인 얘기를 작업에서 확장시킬 수 있었는데 결말에서 이렇게 훌륭하신 분, 양심적인 분으로 얘기를 축소시켰던 점에 대해서 의아했던 점이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연출자의 의지 같아 보이기도 했는데, 작품 전반에 대한 연출도 그런 갈등이 있으셨는지 여쭤보고 싶어서요.

황철민 : 프로파간다를 하려면 교활해야 해요. 저는 이 작품을 하면서 관객에서 전달해야 하는 정보가 뭔가 생각했어요. 그 정보들은 여러 가지가 있는데 어떤 정보는 의식의 차원에서 전달해야 하고 어떤 정보는 무의식 차원에서 전달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결국에는 관객과의 만남이라는 것은 두 가지의 전달방법이 조화롭게 됐을 때, 이게 결국 음식을 한다면 소화가 잘 되는 음식이 되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합니다. 저는 관객에게 충분히 정보를 전달했어요. 이성적으로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정보를 전달했구요, 제가 관객들이 구체적으로 주제라는 측면에서 전달받게 하는 부분들은 축소를 시켰죠. 지금 얘기하신데로. 감성적인 부분으로 축소를 시킨거에요. 근데 이 안에서 자세히 본 관객이라면 한국사회, 한국사학의 문제가 뭔가에 대해서 이론적인 부분들은 접수를 하셨으리라 생각됩니다. 끝까지 갔을 경우에 이 영화가 흥행에 성공한 영화는 아니지만, 흥행에 더 실패하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있어요. 메시지가 강한 영화일수록 저는 감성적인 부분으로 접근해야 한다, 이런 생각을 합니다. 사실 관객들이 영화관에 오는 건 뭔가 보기 위해 오는거라 볼거리를 제공해야 하는데 볼거리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만들어지죠. 가장 쉽게 만드는 방법은 돈인거죠. 우리가 헐리웃 영화를 보면 기분 좋은 게 무진장 많은 돈이 투자가 됐고, 돈이 만드는 게 관객을 즐겁게 하는데 이런 영화는 그런걸 만들 수 없는 상황이고 담을 수 있는 내용이 제한 돼 있기 때문에 결국 다른 방법, 딱딱한 이야기만 전달하는 건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하구요. 제가 할 수 있는 사소한 부분들을 통해서 관객을 통해 서비스 하는, 서비스 정신이 저는 좀 많아요. 독립영화하기엔 좀 아까운데(웃음). 이 영화를 보시면 음악이 죽여준다고 생각하실텐데. 이 음악은 김동우 선생님이 음악을 하셨습니다. 저는 굉장히 좋았구요. 그동안 음악을 담당해주는 분이 없어서 고민했는데, 김동우 선생님이 음악을 해주셨어요. 굉장히 감성적인 음악을 골라주셨고. 전체적으로 딱딱함과 물렁물렁함이 잘 조화를 이룬 작품이 아닌가 하는 자화자찬을 하곤 합니다(웃음). 죄송합니다.

윤성호 : 저도 독립영화 진행하기엔 좀 아깝죠(웃음). 제가 이 영화를 2002년에 봤습니다. 이때 제가 카메라를 들기 시작했는데 저는 완벽한 작품 이런 건 아니겠지만. 이 작품을 경로로 해서 맑스의 저작을 읽어본 적 없다가 ‘존재가 의식을 규정한다’는 걸 처음 느꼈던 거 같아요. 싸워야 할 처지가 돼 보니 노동자를 이해한다, 이런 말씀을 하셨는데 저에겐 그런 정도의 경로가 됐던 거 같습니다. 다른 질문.

관객 2 : 저 역시 예술대학을 나왔는데 개인적으로 학교에 존경할만한 교수님이 안 계셔서 실망을 많이 한 학생이었어요. 김동우 교수님께 질문하고 싶은데, 영화 초반에 소위 브루주아 예술가라고 감독님이 말씀하시는데 이런 과정을 겪으시면서 생각이 바뀐 부분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오랜 시간동안 쌓아 오신 게 쉽게 바뀔 거 같지 않거든요. 어떤 생각의 변화 과정, 이런 걸 겪으셨는지.


김동우 : 아침 9시에 학생들 등교할 때 점심시간 까지 기본 두 시간, 서비스로 한 시간 더 서있기도 하고(웃음). 저는 많은 타자들의 시선에 노출돼 있죠. 그들이 나를 보고 내가 그들을 바라보죠. 그러면서 나는 많은 생각을 하죠. 가장 서글픈 건 동료교수였던 사람들조차도 나를 정문에서 피하기 위해서 다른 데를 보고 지나간다던지, 정문 앞에 영화 속에 나오지만 자동차 진입하는데 바로 그 앞에 있었습니다. 나중에 후문으로 다닌 사람도 있다고 하더만, 그래도 그 사람은 양심적이죠. 후문으로 다니면서 내 앞을 도저히 지날 수 없었다, 옆에 서줄 용기가 없었다는 분도 있었는데. 저는 잠시 차단기가 올라가면서 차가 서 있는 몇 초 사이에 다양한 인간 군상을 감상하게 돼요. 그 사람들과 나 사이에 차라는 공간적 차이는 있지만, 억지로 외면하려고 애쓰고, 열 명 중 한 명 정도가 눈인사를 고개를 살짝. 제가 이런 얘기를 드리는 건 지금 생각해보면 전 주명건씨가 고마워요. 이 세상을 보는 바른 시야를 갖게 해 준 거 같기도 하고, 잠시나마 세종대의 민주화를 4년 동안 좋은 선생님들 다시 모시고 민주적인 운영을 한 달 전까지 할 수 있었던 거. 질문의 답변이 빗나간 거 같지만. 그래요. 많은 철학책을 봐서가 아니라, 그런 당장 뜨거운 걸 만졌을 때 그야말로 ‘앗, 뜨거’ 하고 손을 놓는 동물적 반사작용에 의해서 저는 싸웠을 뿐이에요. 그 얘긴 봉변을 당하면 아까 맑스 얘기 나왔지만 그 얘기 맞기도 하지만 틀리기도 해요.


무슨 얘기냐면 고난이 왔을 때 의식이 생기고, 그 의식이 행동으로 옮겨가는 과정이 있겠죠. 누가 때리면 ‘아파요’ 혹은 ‘왜 때려’ 둘 증의 하나죠. 저항이냐 복종이냐. 저는 맑스처럼 존재가 의식을 규정한다, 쫓겨나고 보니 뒤늦게 이런 생각을 하는구나 해서 맞다고 생각했는데 한참있다 보니까 그건 반대의 경우도 되는거거든요. 의식이 존재를 규정하는거에요. 맑스가 살아있다면 당신 얘기도 맞지만 그 논리를 거꾸로 내가 무슨 생각하느냐가 내 존재를 규정하는거지, 교수 혹은 노동자라는 사회적 신분을 갖고 사람을 규정할 수 없다. 결국 존재가 아니라 의식이다라는 생각이 드는거죠. 많은 교수들이 해직 당했지만 저처럼 싸우진 않거든요. 다 아픔을 느끼지만 덤비지 않았거든요. 제가 1년 동안 안식년으로 나가있다가 들어 온지 10일 정도 됐는데. 한예종을 얼핏 알고 있는데. 정권이 바뀌고 나서 무식한 장관이 와서 횡포를 부리고 그런 정도 아는데. 훌륭한 교수님 많으시죠. 학생들이 필요하다면 따로 만나서 제 나름대로의 투쟁에 대해 필요한 말씀을 드리겠지만. 제가 한 가지만 얘기하자면 나와의 싸움인거거든요. 물론 적과 싸우지만 그 적이 사실은 보이지도 않고 세종대와 싸우지만 세종대가 어디 보입니까. 세종대가 어딨어요. 건물이 있죠. 저와 세종대 싸움은 사실 저와 대한민국과의 싸움이에요. 조중동, 사법부, 학교에 들어오지 못하게 가처분 신청해서 재판하고 명예훼손으로 대법원까지 가고 그런 일을 당하면서 저는 투사가 됐고. 솔직히 저는 이 싸움이 길었으면 분신 했을겁니다. 머릿속으로 와요. 절대로 포기하지 않는다면 희망이 없는 내 마지막 저항의 모습은 무엇이냐. 극단적인 게 아니라 나의 미래의 모습을 그렸었는데. 예를 들어 싸우다가 국회의원이 만나주겠다고 하면 9시부터 오전에 서는 걸 국회의원 약속 때문에 못하고 일보고 밤 9시에도 와서 섰어요. 자랑 같지만 누가 보든 안보든 나는 선다. 밤에 와서 서면 누가 봐요. 수위 밖에 없어요. 깜깜한 밤이에요. 그 때 내가 와서 섰을 때 난 이긴다. 여러분들이 싸울 때 물론 도와주는 분도 있죠. 도와주는 분들 믿고 싸우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내가 열정이 있을 때 도와주는 사람이 생기는거죠. 학생들에게 학교에서 이간질을 하고 김 교수 문제 있어 쫓겨난다고 할 때 너희들 가라 그랬어요. 나는 혼자 거꾸로 서서라도 돌아온다, 너희들 가라. 하여간 투쟁을 할 때는 나와의 싸움이고 하다보면 여러 연대 단체에서 도움을 줄 때는 눈물겹게 고맙죠. 그러나 내 스스로가 얼마나 이 싸움에 주역이 되느냐가 이게 가장 관건이라고 생각합니다.

윤성호 : 저희가 2월에 월례비행 처음 시작했을 때 경희대 이택광 교수가 왔는데, 그 이후로 한 번에 교수 3명 모셔놓고 하니까 3교대 강의 하는 거 같네요(웃음). 저희가 시간도 됐고, 광고 드릴께요. 주최한 인디포럼도 독립영화의 가장 오래된 커뮤니틴데 저희도 비슷한 고난을 겪고 있어요. 매년 1000만원을 지원받았었는데 그걸 이번에 당연히 짜르더라구요. 저희 뿐만 아니라 이런 데가 많아서 저희가 사실은 분노 보다는 실소가 나오는, 웃긴 거 거든요. 저희가 9월 12일 토요일에 인디포럼 채무파티를 할거에요. 올해 인디포럼 행사를 하고 채무가 있는데 영진위에서 지원금 들어오면 갚는건데 그게 없어져서 천만원이 빚이 됐거든요. ‘그렇다면 십시일반’ 할건데(웃음). 그런 식으로 즐거운 액션을 하려고 하구요. 작은 승리들이 큰 승리가 되도록 땅을 다졌으면 좋았을텐데, 충무로 활력연구소 같은 소중한 미디어센터가 관료주의에 밀려날 때 그 때 확실히 버르장머리를 고쳐놨으면 좋았을텐데, 미리미리 연대하지 않은 것들이 아쉬운 시절같고. 교수님이 주명건에게 고맙다고 했는데, 월례포럼이 매번 MB 요정론으로 끝나요(웃음) 예술이 정치에 관심 안 가지면 정치가 얼마나 예술에 많은 간섭을 하는지 깨닫게 되는 요즘인데요. 마지막으로 한 마디씩 듣겠습니다.

황철민 : 좀 늦었지만 이 자리에 우리 투쟁의 동지들이 와 계시는데요. 우리 투쟁의 리더역을 하셨던 분이세요. 우리가 승리한 다음에 사실은 재단 사무국장이 되셨어요. 그래서 지난 4년동안 민주적인 학교는 이렇게 해야 한다는 본때를 보이신 분인데 정권이 바뀌자마자 대기발령을 받으셨거든요. 지금 다시 야인이 되신 분인데 우리 사무국장님 잠깐 인사해주시죠. 앞으로 우리 투쟁의 중심이 되실 것 같습니다. 그리고 안은아라구요, 학생과의 연대를 얘기했는데 김동우 선생님 투쟁하는 내내 같이 투쟁했던 제자입니다. 이런 분들이 없었으면 어쨌든 지금 완전 끝난 승리는 아지니만 이런 승리도 이뤄내지 못했을거라고 생각합니다. 다시 고맙게 생각합니다.

김동우 : 제가 음악을 참 좋아하는데. 배경음악을 편안하게 아무 때나 듣고 싶은 음악을 듣다가, 영화에 음악이 들어가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처음 느끼면서 영화가 하나의 언어라는 걸 느꼈어요. 장면 장면에 음악이라는 게 사전이 없는 언어인거죠. 왜 이 장면에 이 음악이 들어가야 하는가. 그리고 기조적으로 전체적으로 처량하잖아요. 교수가 쫓겨나서 서 있고, 너무 신파적으로 흐르기도 그렇고. 나름대로 제 의도가 있습니다. 음악이 가진 문학적 요소가 있는데 제일 마지막 곡 에디트 삐아프가 부르는 ‘나는 후회하지 않아요’ 라는 게 엔딩에 이 영화가 우리가 이 영화를 만들 즈음에느 복직 꿈에도 못꿨어요. 솔직히 이기고 지고의 문제가 아니라, 말이 안되니까 싸우는거지. 무슨 힘이 있다고 그 거대한 조직을 이기겠어요. 마지막에 어떤 음악을 할까 고민하다가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에디트 삐아프 이 노래 가사가 과거의 내가 행복했던 슬펐던 다 잊고 제로에서 다시 출발한다는 거거든요. 활기참, 미래에 대한 꿈의 느낌도 있지만 좋다, 난 제로에서 다시 시작하겠다 하는 희망으로 이 음악을 썼거든요. 한예종 학생들이 민주적 투쟁을 하고 계신 거 같은데 우리 제로에서 다시 시작합시다.


글: 이도훈
녹취: 장일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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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민영


<각하의 만수무강>, <이제는 말할 수 있다>, <뉴스페이퍼맨>


요즘 버스를 타고 거리를 지나다 보면 지하철역을 끼고 있는 사거리에서 심심치 않게 만나게 되는 플래카드가 있다. “드디어 방송을 국민의 품으로 돌려드렸습니다!”라는, 다소 격양된 느낌이 드는 문구가 적힌 플래카드가 그것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장례는 벌써 3개월 전의 이야기가 되어버렸고, 그 3개월 동안 굳건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던 노무현 전 대통령을 추모하는 플래카드는 이제 좀처럼 찾을 수 없게 되었다. 하지만 변함없이 그 자리에는 갖가지 정치적 담론, 때때로 코미디에 가까운 수다가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탈모 걱정 끝’, ‘열흘 간 10kg 감량’ 따위의 ‘선정적인’ 광고가 잔뜩 기를 펴고 있는 바로 그 공간에 어떤 이들은 소수를 위한 다수의 희생 여론을 주장하고 있었다. 종로구 한복판에 큼직하고 푸른 색깔로 선정적 문구가 적어져 있는 플래카드 옆에 누군가 아주 작은 글씨로 ‘죄송합니다’라고 쓰여진 천 조각을 슬며시 붙여놓은 것이 눈에 띈다.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거짓인지 구분되어지지 않는 자신감들이 한 군데 모여져 아이러니한 광경을 선사한다. ‘24시간 노래방 도우미 대기’와 같은 3류 광고보다 훨씬 자극적이다.

7월 22일, 미디어법은 수많은 의혹과 문제 제기 속에서도 굳건하고 치밀하게 통과 선언을 외쳤다. 한나라당은 수개월 전부터 미디어법을 새로 개정해 시행해야만 한다는 강력한 주장을 외치며 결국 해당 사안을 국회 표결까지 끌고 갔다. 그리고 그들은 보기 좋게 대승을 거두었으며, 투표에 관한 온갖 부정행위에 대한 명확한 증거 자료에 대한 모든 것들을 부정했다. 미디어법이 개정되면 수 천, 수 만개의 일자리가 만들어져 민생에 결정적인 도움이 될 것이라 말하던 그들. 하지만 서민을 위한 정치를 몸소 실천해야만 한다고 말하던 그들이 민생과 동떨어진 미디어법에 목숨 거는 것은 결코 위와 같은 이유 때문이 아니다. 말장난으로 시작된 ‘뉴라이트’가 어느새 대한민국 보수언론의 중축이 되어 폭풍처럼 밀려온 것을 재현이라도 하듯 그들은 정식 법률안이 아닌 미디어법을 개정해 ‘비민주’를 ‘법’이라는 잣대로 짓밟아버리겠다는 흑심이 숨겨져 있다. 미디어법을 강제로 통과시키기 무섭게 그들은 말을 바꾼다. “서민이라고 무조건 보호해줘야 합니까?” 텔레비전 앞에 앉아 수박을 우걱우걱 깨물던 친구가 냉큼 한 마디를 던진다. “세상에 믿을 놈 하나 없다더니.”

재밌게도 지난 달 말 상영회를 가졌던 인디포럼 월례비행 7월의 프로그램은 ‘미디어’에 관련된 것이었다. 7월 월례비행은 미디어의 진실과 거짓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세 개의 단편을 연달아 상영했으며, 이 날 상영된 단편은 정승구 감독의 <이제는 말 할 수 있다>와 김경만 감독의 <각하의 만수무강>, 그리고 김은경 감독의 <뉴스페이퍼맨-어느 신문지국장의 죽음>이었다. 세편의 영화 모두 미디어법에 관한 ‘국회 전쟁’이 있기 전에 프로그래밍된 것이었지만, 흥미롭게도 그 시기가 정확히 맞아 떨어졌던 것이다.



이 날 차례로 상영되었던 세 단편들 모두 미디어 자체에 대한 서로 다른 시선을 공유하고 있었다. 하나의 극과 두 개의 다큐멘터리로 구성된 각각의 단편들은 장르를 넘나들며 다양한 관점에서 언론에 대한 냉혹한 비판을 아끼지 않았다. 세 가지 단편 중 유일한 극영화였던 <이제는 말 할 수 있다>는 ‘대박’을 건지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한 신입피디의 이야기이다. 피디는 우연히 춤을 추는 개가 있다는 제보를 받고 카메라맨과 함께 이 신기한 개를 취재하기 위해 급하게 제보자의 집으로 향한다. 하지만 막상 현장에 도착하니 그들을 맞는 것은 ‘진짜로’ 춤을 추는 개가 아니라, 평범한 개를 ‘가짜로’ 춤추게 만드는 호들갑스러운 주인이다. 그리고 피디는 자신과 비슷한 취재를 하기 위해 제보자의 집을 방문한 신사적인 풍채의 한 신문기자를 만난다. 개가 제대로 춤을 추지 않자 피디는 안달 내며 어서 개를 춤추게 해보라고 화를 내지만, 그런 피디를 지켜보고 있던 신문기자는 개가 춤을 추든 춤을 추지 않든 그런 건 중요하지 않다며 너털웃음을 짓는다. 현 대통령의 취임 시기와 전 대통령의 직무 기간 등을 꼼꼼히 따지던 신문기자는 다음 날 그가 취재한 개와는 전혀 상관없는 기사를 일반화하고, 춤추지 않는 개에 당황한 피디는 살아남기 위한 묘안을 생각해낸다.



극영화인 <이제는 말 할 수 있다>는 믿을 수 없는 황당한 이야기(그러나 반드시 존재한다고 생각되는)를 통해 현실의 미디어를 풍자한다. <이제는 말 할 수 있다>가 재치 있는 구성을 통해 살짝 뒤로 떨어져 미디어를 비판한 작품이었다면, 이에 연달아 상영된 <각하의 만수무강>과 <뉴스페이퍼맨>은 우리가 간과한 현실 그대로를 정확하고 강렬하게 파고든 다큐멘터리들이다. 이미 많은 영화제와 매체를 통해 소개된 바 있는 김경만 감독의 <각하의 만수무강>은, 한국의 초대 대통령, 그리고 초대에서부터 3대까지 대통령직을 맡았던 이승만에 관한 영상을 반복적으로 보여준다. 2009년 현재의 상황, 현재의 기억, 그리고 현재의 논점에서 역행해 1960년대 과거의 이야기를 제기하는 이 영화는 오래 전부터 이어져 왔던 언론 통제에 관한 문제를 환기시킨다. <각하의 만수무강>은 축하와 찬양에 둘러싸여 하루하루를 보내는 이승만에 관한 수 십 가지 ‘사실’영상들을 편집해 과거 한국 국민을 선동하던 ‘대한늬우스’의 형식으로 재구성했다. 절대 지도자로 군림하며 절대 복종을 신념 삼았던 이승만의 모습은 1960년대와 2009년 현재의 간극을 뛰어넘어 편집되어진 장면과 전환되는 이야기들을 통해 철저하게 풍자되고 무너져 내린다. <각하의 만수무강>은 과거로 자꾸만 역행하는 현 세태를 비판하기 위한 영화일 뿐 아니라, 과거를 잊어가고 과거에 대한 모든 사실관계를 외면하는 지금의 젊은 세대에게 일침을 가하는 영화다.



애초에 극영화로 제작되었으나 이후 다큐멘터리로 행로를 바꾼 <뉴스페이퍼맨>은 우연히 어떤 기사를 읽고 호기심에 잠겼던 김은경 감독의 개인적인 생각에서부터 출발한 영화다. 2006년 겨울, 그녀는 동아일보의 지국장이었던 한 남자가 신용불량으로 인해 자살을 택했다는 충격적인 기사를 접한다. 하지만 대한민국의 거대 언론을 자처하는 세 신문사에는 이와 같은 내용이 제대로 보도되지 않았다. <뉴스페이퍼맨>은 동아일보의 갈현지국장이었던 고 박정수씨의 죽음에서 시작되어 침착하고 차분하게 한국을 움직이는 가장 큰 여론을 담당하는 ‘신문’에 관한 이야기를 건넨다. <뉴스페이퍼맨>은 판매부수를 올리기 위해 일방적이고도 강압적인 마케팅을 명령하던 본사의 횡포에 떠밀려 지국장을 그만 두었던 사람들의 사연을 바탕으로 진행된다. 영화는 신문 판매 시장의 실제 운영이 얼마나 추악하고 공감할 수 없는 수법으로 이루어지는지를 묘사하며, 이러한 과정을 통해 쫓겨나야만 했던 전 지국장들의 아픔을 놓치지 않는다. <뉴스페이퍼맨>은 독립영화, 그리고 다큐멘터리만이 폭로할 수 있고 소유할 수 있는 장점을 여과 없이 표출하고 고발해낸다.

십 수 년에 이어 아직까지 대중에게 사랑을 받고 있는 ‘심슨 가족’이라는 폭스사의 시리즈 애니메이션이 있다. 이 심슨 가족은 때때로 선정적이고 폭력적인 표현으로 미국의 몇 기관으로부터 방영 제재를 받았던 적이 있었지만, 심슨에 등장하는 캐릭터들은 미국, 그리고 세계 각국의 세태를 비판하기 위한 안성맞춤인 도구로 존재하기 때문에 심슨 시리즈를 증오하거나 기피하는 ‘어른들’은 별로 없다. 심슨 가족에는 심슨을 괴롭히고 심슨이 사는 동네인 스프링필드를 궁지에 몰아넣는 악덕 회장 몬티 번즈가 등장한다. 그는 충분한 재산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자신을 알아주지 않는 스프링필드 주민들을 증오한다. 주민들은 몬티 번즈가 그릇된 행동으로 여론의 미움을 사기 때문에 그를 미워하고 그가 없어지기만을 손꼽아 기다린다. 자세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심슨 가족 중 세 편의 에피소드에서 몬티 번즈의 ‘미디어 길들이기’ 전략이 능수능란하게 전개되는 것이 풍자적으로 나오는데, 미디어와 여론을 자신의 편으로 만들기 위해 번즈 사장이 벌이는 수법은 혀를 내두를 만큼 황당한 것이다. 죽은 척 위장해 자신을 순교자로 떠받들게 만들고 종종 거대 자본으로 스프링필드의 모든 미디어를 사들여 자신에 대한 착하고 아름다운 광고를 내보내라는 명령을 내린다. 또한 그는 ‘멍청하고 둔한’ 심슨을 이용해 티끌만큼의 자선사업을 계획하여 모든 수익금을 빼돌리는 지나치게 정치적인 행동을 보이기도 한다.


몬티 번즈의 ‘미디어 통합 계획’이 문득 생각나 심슨가족의 일부 시즌을 재관람하면서 가장 먼저 들었던 생각은 심슨가족이 ‘현실’이 아닌 ‘허구’의 세계에서 존재하는 설정이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점점 발 디딜 곳을 잃어가는 작금의 사회는, 이제 심슨 가족이라는 애니메이션이 더 이상 그저 ‘만화’에 그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다수의 목을 조여 온다. 애니메이션 심슨 가족의 결말은 늘 선이 이기고 악이 패한다는 설정을 기본으로 한다. 하지만 현재의 대한민국은 이러한 희망을 거는 사람 자체를 바보취급하게 되는 것만 같아 가슴이 답답하다. 우리에게 그런 희망은 사치로 전락했을 뿐일까. 전국의 88만원 세대가 사회의 진통을 낳는 대한민국의 이데올로그들을 등지고 ‘스펙 쌓기’에만 치중하고 있을 때, 그들은 국민의 눈과 입을 닫아 소통 자체를 불허하는 광경을 머릿속에 그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정부와 대기업이 마리오네트 인형처럼 방송과 신문을 완벽하게 통제하고 조종하는 세상, 생각만 해도 끔찍한 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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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 예 그 일을 사랑

    2012.08.29 1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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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월례비행 [골리앗의 구조]+[행당동 사람들2]

‘칠, 팔 십 년대에서나 일어날 법한 일들이 공공연하게 벌어지고 있다.’ 최근 몇 달의 주요 뉴스들에서 가장 흔하게 접했던 말머리다. 어느 누구도 ‘공공연히 벌어지는 일’에 대해 설명하지 않지만 누구나 알고 있고 체험하고 있다. 마치 암시장의 뒷거래처럼 입을 닫은 채 행동으로만 전달되는 의사소통을 바라보는 심정이다. 이 상태로 몇 년 만 더 지속되면 한국은 세계 최고의 다큐멘터리를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이라는 농담이 쓰리게 들린다.

2009년 1월 20일에 일어났던 ‘용산 참사’ 100일 추모제를 앞둔 지난 4월 28일, 인디스페이스에서는 김경만 감독의 <골리앗의 구조>와 김동원 감독의 <행당동 사람들2>가 연달아 상영되었다. 제작 시기 순으로는 <행당동 사람들>에 이은 <행당동 사람들2>가 앞선 것이지만, 이 날은 <골리앗의 구조>를 먼저 상영했던 것이다. 두 영화의 상영에 맞춰, 극장 내의 분위기는 1부와 2부로 나뉘어졌다. 먼저 상영된 <골리앗의 구조>와 후에 상영된 <행당동 사람들2>는 서로 다른 지역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두 작품의 공통 주제는 철거구역이다. <골리앗의 구조>는 일산 풍동 철거민들의 투쟁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소름끼친 날 선 다큐멘터리이고, <행당동 사람들2>는 행당동의 철거 이후 주민들이 힘을 합쳐 또 하나의 마을을 만들어내는 ‘철거 이후’의 모습을 보여주는 영화다.

<골리앗의 구조(2005)>가 <행당동 사람들2(1999)>보다 먼저 상영되었다는 사실은, 영화를 보는 관객들에게 적지 않은 갈등과 의문을 불러 일으켰다. 원인과 결과가 맺어지는 과정을 다룬 <행당동 사람들2>는 <골리앗의 구조>보다 앞선 과거의 이야기로, 3년간의 투쟁 이후 쟁취한 행당동 철거구역에서 희망을 찾는 주민들의 아름다운 웃음을 주로 보여주고 있다. <행당동 사람들2>는 억압 속에서도 다시 일어나 서로 돕고 의지하는 세상 모든 ‘바른’ 사람들을 위한 것으로, 영화는 우리와 우리의 이웃들이 지향해야 하는 모습을 상징적으로 이야기한다. <행당동 사람들2>는 카메라를 잡고 있는 연출자나 행당동 주민 등 사건에 직접 뛰어든 인물이 아닌 제 3자의 나래이션으로 이야기를 열고 맺는다. 차분하게 타인의 시선으로 읽어 내려간 <행당동 사람들2>는 철거, 그리고 투쟁과 쟁취 이후의 대안에 대해 생각해보아야만 하는 중요한 지점을 다룬다. 하지만 이에 앞서 상영된 <골리앗의 구조>는 어떠한 희망도 없이 컨테이너 박스 안에서 생존권을 위해 하루하루를 싸우며 연명해야 하는 강제 철거민들의 현실을 말한다. 유리조각이 발사되고 화염병이 터지는 등 흡사 전쟁터를 방불케 하는 극한의 상황에서, 카메라는 철거민들과 함께 위협과 공격을 버텨낸다. <행당동 사람들2>이 희망의 이야기였다면 <골리앗의 구조>는 희망 뒤에 가려져 있는 또 다른 희생에 관한 이야기인 것이다. 반복해서 일어나는 끔찍한 이야기들, 그리고 군사 독재 시절에나 가능했던 파렴치한 일들이 아직까지 남아있다는 것을 유감없이 보여주는 작품이 바로 <골리앗의 구조>다. 두 영화는 약 10년의 시간을 두고 발표된 것이지만, ‘이후’의 이야기가 <행당동 사람들2>가 아닌 <골리앗의 구조>이라는 것을 감안할 때, 등골이 오싹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사실이 아닐까. <골리앗의 구조>에 이은 <행당동 사람들2>의 상영은, 영화를 보는 관객으로 하여금 안도의 한숨을 내쉬게 하는 동시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도 진전 없이 실려 나가는 무수한 인권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각인시켜주는 것이었다.

(편집자 주: 네오이마주의 [인디포럼 월례비행] 상영현장 기사는 대담 내용의 전부를 편집을 거치지 않고 싣는 것을 원칙으로 합니다. 다른 인터뷰와는 달리 앞뒤 맥락이 희미해질 경우 불필요한 오해나 상영 및 대담의 취지가 왜곡될 수도 있다고 판단되기 때문입니다. 상당히 긴 분량의 대담이 독자의 인내심을 자극할 지언정 분명 곱씹어 볼 가치가 있는 내용이니 일독을 권합니다.)


최진성 : 진행을 맡게 된 최진성이라고 합니다. 인디포럼 월례비행이란 행사구요, 매달 오시는 분들도 계시는 거 같은데 이번 달이 세 번째입니다. 원래 공지로는 <행당동사람들1>이 상영된다고 나갔는데, 2주전에 (김동원)감독님 요청에 의해서 <행당동사람들2>로 바뀌었구요, 김경만 감독님 <골리앗의 구조> 이렇게 두 편 상영했습니다. 일단 감독님들이 영화에 대해서 간단히 소개하는 시간을 갖겠습니다. 먼저 상영한 김경만 감독님 말씀해주세요.

김경만 : 네, <골리앗의 구조>를 만든 김경만입니다. 제가 여기 출연하신 채남병 위원장님과 같이 촬영했던 때가 2004년 11월이었어요. 그 전에 풍동에서 몇 년 동안 계속 철거싸움 하고 있는 와중에 침탈(2004년 5월 8일)이 들어온 게 계기가 됐어요. 제 친구가 이 분이 위험한 촬영을 다 했는데, 침탈 들어온 시점에 현장에 있다가 그 때 갖고 있는 카메라로 찍어서 촬영한 게 9시 뉴스에 나가는 게 계기가 돼서 협상이 들어오게 됐고, 그 결과로 풍동에 계신 분들이 임대주택을 얻고, 인터뷰 해주신 채남병 위원장님은 구속되는 걸로 결말이 났었습니다.

벌써 오래 된 일이네요. 2004년이었으니까요. 저는 풍동이 어딘지도 잘 몰랐습니다. 풍동이란 데가 이름그대로 바람이 엄청나게 불어대더라구요. 인터뷰 촬영 하던 도중에 너무 추웠어요. 저는 풍동이 어딨는지도 모르다가 친구가 거기 관심이 있어서 저도 덩달아서 가게 됐는데 그게 몇 년 동안 풍동 철거싸움에 막바지쯤이었어요. 하도 오래 끄니까 원래 결합했던 다른 연대단위 단체도 다 떨어져나간 상태였고, 가끔 가던 우리도 서로 하던 얘기가 '풍동 끝이 어떻게 날까' 뭐랄까, 정말 알 수 없다고 생각되면서 그런 말을 했던 게 기억이 납니다. 원래는 제가 이 영화를 만들려고 했던 게 아니었어요. 전혀 만들 생각이 없다가. 위원장님 구속되는 바람에 만들어야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부랴부랴 위원장님 인터뷰를 따서 만들게 됐죠. 11월 이후에 바로 사건이 정리되고 난 다음에 위원장님이 구속된 시점이었는데 마침 도망을 가셨었어요. 위원장님이. 그러다 잡혔죠. 오셔가지고 거의 1년 동안 이제 구치소에 계셨었고, 용역들은 구속이 안되고 바로 석방이 됐었습니다. 이게 간단한 사건의 개요입니다. 제가 너무 길게 얘기했나요. 오늘 길게 얘기하는 자리여서 길게 얘기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웃음)


김동원 : 저도 7~8년 만에 (영화<행당동사람들2>를)본 거 같아요. 굉장히 한편으론 여전히 감개가 무량했고요, 한 편으로는 김경만 감독에 비해서 너무 촌스러워서(웃음) 창피하기도 하고 그랬는데.

제가 <행당동 사람들2>로 바꿔달라고 했어요. 그 이유는 1편은 94년도에 완성이 됐는데, 2편도 별로 좋은 건 없지만 그 때는 VHS와 8mm로 찍어서 너무나 화질이 열악했고. 또 한편으로 김경만 감독의 <골리앗의 구조>가 철거투쟁 과정에 관한 거라는 걸 알았으니까, 같은 철거투쟁 장면을 보여주는 것 보다는 좀 '철거투쟁 후에 철거민들이 과연 어떻게 살아갈까, 어떻게 살면 좋을까' 이런 것들을 통해서 일반인들이 철거민들에 대한 선입관 같은 것을 좀 바꿀 수도 있다고 생각했고.

또 행당동을 찍었던 이유가 다른 철거지역도 많이 가봤지만, 가고 싶은 데가 있잖아요. 여러군데라도 발길이 향하는 철거 지역이 있는데, 그게 행당동이었거든요. 제가 상계동 때부터 철거촌에 있었는데 상계동 투쟁을 저는 절반의 승리라고 생각하는데, 상계동 주민들이 이루지 못했던 그런 꿈을 행당동에서 이뤄나간 것을 보았고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고 봤기 때문에 행당동을 자주 다니게 됐어요. 여기서 소개 됐던 그런 지역 공동체 운동, 사실 철거투쟁이라는 것이 소극적으로는 철거를 막아내는 싸움을 하고, 철거가 끝난 후에 임대아파트나 그런 상응하는 보상을 받아내는 투쟁이기도 하지만, 적극적 의미로서는 철거투쟁 중에 얻었던, 배웠던 그 에너지를 갖고 철거투쟁 후에 그 뭔가 대안적인 삶을 살아나가는 그런 투쟁이라고 그래야 한다고 믿고 있거든요. 그래서 <행당동사람들2>를 좀 고집 했습니다.

그리고 제 옆에 있는 분이 영화 속에 잠깐 보셨겠지만 유영우 회장님입니다. 지금은 회장님이 아니고. 장기집권 실패하셨군요(웃음). 사실은 저랑 동갑이에요. 제 아버지가 아니에요(김동원 감독에 비해 하얗게 샌 머리카락 때문에 오해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지금은 친구처럼 지내고 있는데. 영화에서 보셨겠지만 처음엔 머리가 새카맸잖아요. 아까 보면서 <행당동사람들2>에 나왔을 때 '저 땐 좀 검은머리가 있었네' 그런 말씀을 하셨는데, 아직까지도 빈민운동에서 중요한 역할들을 하고 계시고요. 제가 사회자는 아니지만, 여기 오신 소감이 어떤지 한 말씀 좀 여쭤봐도 되겠죠.


유영우 : 저도 몇 년만에 제가 나온 필름을 봤는데요. 굉장히 감회가 새롭고 그렇습니다. 사실 오늘 여기 오는 걸 김동원 감독님이 무작정, 그냥 막무가내로 오래요. 오면 안대요. 인연이 인연인지라 안 오면 안돼서 와봤더니 이런 행사가 있었네요. 행사 얘기도 안하고 무조건 오라 그래서.

요새 이제 용산 문제가 터지면서 우리 사회가 심각한 재개발 문제에 봉착해 있는데 답답하죠. 현 정부의 행태를 보면 전혀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려고 하고 있고, 사회적 분위기도 초창기에는 반짝하고 관심도 있고 그랬는데 지금은 전혀 여론도 형성도 안돼고. 언론매체도 별 관심이 없는 거 같고. 그 와중에 오늘 이런 개발의 문제 철거의 문제, 철거민들의 이야기들을 방영하는 걸 보면서 '오늘 누가 이 행사를 기획했는지 모르겠지만 참 잘하신 거 같다', 또 잘한 거는 '오늘 보니까 젊은 분들이 너무 많이 오셔서 좋은 거 같다'는 생각을 했어요. 나이 드신 분들이 오셨으면 별로 재미없었을 거 같은데. 현재 이 사회 분위기상 '젊은 분들이 이런 문제에 관심을 가져주는 것이 얼마나 큰 것이냐'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잠깐 회상을 해보면 뭣도 모르고 막 했어요. 93년에 철거싸움 시작할 때 하왕 2-1지구 세입자 대책위원장을 맡았었는데 그때 뭐 뭣도 모르고 뛰어 들어서 용역깡패들이랑 싸우고, 지명수배 당해서 도망당하기도 하고. 그러다가 <행당동 사람들2>에서 보여주고 있는 거처럼 무작정 권리를 찾아야 하기 때문에, 생존권을 지켜야 하기 때문에 싸워는 것도 중요하지만 가난한 사람의 문제는 고질적으로 우리 스스로가 풀지 않으면 안된다는 그런 생각이 있었어요. 그 문제를 어떻게 풀 것인가 하는 고민에 봉착하면서 철거싸움하면서 공부하고, 많은 것들을 보고 배우기도 하고, 선배들이 했던 걸 탐구하기도 하고 준비를 해 나갔어요. 주민들과 함께 했죠. 한 예로 저희가 신협을 만들었다고 아까 나왔잖아요. 그 때 3억으로 시작했는데 지금은 150억의 자산을 갖고 있어요. 그만큼 지역사회에서 컸죠. 철거민들이 만든거긴 하지만, 지금은 철거민 뿐 아니라 주변에 있는 온 주민들이 모두 부자건 가난하건 상관없이 다같이 이용하고 함께 하는 그런 은행으로 지역사회에서 발전을 했어요. 그런 것들을 꿈꾸면서 스스로가 삶을 좀 바꿔보자, 그리고 또 바꿔가는 과정 속에서 지역사회가 자연스럽게 발전하는데 기여해보자, 가난하기 때문에 뭐든지 못한다든가 가난하기 때문에 저 사람들은 이 부류에 속하지 못한다는 그런 편견이 존재하는 자본주의 구조에서, 그게 아니라 가난한 것은 우리 스스로의 노력이 부족해서 가난한 게 아니라 사회적 모순에서 오는 거기 때문에 그 모순 속에서 우리가 대안을 찾아가고, 그 대안을 통해서 할 수 있다, 한 사회 구성원으로서 충분히 훌륭한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기 위한 운동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운동이 후세에게 잘 전달된다면 우리사회는 좀 더 밝은사회로 가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어서 시작했고 지금도 지역에서 계속 여전히 하고 있습니다. 성공과 실패를 얘기할 단계는 아닌거 같고요. 지속해서 가야겠죠. 그게 나중에는 평가는 다른 사람이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저희는 할 수 있는 만큼 하는거고.

시사회 같은 거 하는 분위기에요(웃음). 영화 보여주고 나온 배우가 나와서 소감 말하고. 제가 오늘 갑자기 영화배우가 된 기분이에요(웃음).


최진성 : 오늘 월례포럼 제목이 <폭력 대 활력>이었는데. 유영우 선생님이 활력에 대한 좋은 얘기를 많이 해주신 것 같습니다.

용산사건이 1월 20일에 터졌고요, 내일이 100일(4월 29일)이 되는 날이죠. 지금 마침 용산4구역에서 직접 철거민 분들이 몇 분 오셨거든요. 잠깐 인사 좀 해주세요(노한나 용산4구역 철거대책위 총무부장 인사). 내일 100일이라 바쁘신 와중에 와주셨구요, 이따가 영화 얘기 마친 후 선생님께 용산 얘기를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지금 행당동 얘기를 봤고, 풍동얘기를 봤고 또 용산사건이 있는데. 저도 솔직히 그냥 제가 관심 있는 영화 많이 찍고 공부하고 이러다 보니까 우리사회에 철거가 이렇게 많이 일어나는지 잘 모르고 있었어요. 얼마 전에 인디다큐페스티벌에서 상영했던 <불타는 필름의 연대기 시즌2>라는 옴니버스를 했는데요, 저도 이번에 안티MB를 주제로 참여했고. 감독들이 3분짜리 영상을 만들었는데 거의 절반에 육박하는 작품이 철거에 관련된 얘기였고, 제가 몰랐던 사건들도 있어서 '내가 너무 몰랐구나' 생각이 들었는데.

일단 감독님들에게 여쭤보고 싶은 게 김동원 감독님은 상계동부터 워낙 철거전문가(웃음)잖아요. 또 봉천동 사셔서 비슷한 일을 당하기도 하셨지만, 철거가 과연 폭력이 어떻게 진행이 되는지, 또 되게 궁금한 게 유영우 선생님 나오셔서 좋은 얘기 해주셨지만 철거가 끝나면 철거 지역이 과연 어떻게 되는지, 그 이후의 상황들이 궁금하거든요. 그 부분에 대해서 감독님들에게 조금씩 들어보고 싶습니다. 먼저 철거전문가(웃음) 김동원 선생님 말씀해주세요.


김동원 : 상계동에는 보상계획이 전혀 없었어요. 그 때 얘기 들어보면 가옥주들이 이사비용으로 10만원 주면 굉장히 고마워하면서 이사를 나갔죠. 근데 투쟁이 길어지면서 안나가니까 보상을 50만원 줄게, 100만원 줄게 이러면서 보상 개념이 생기기 시작했지만 비공식적이었고, 그 때부터 임대아파트를 요구했거든요. 그 자리에서 만약 내가 1000만원에 월 10만원으로 살고 있었다, 그러면 최소한 그 정도 수준에서 살 수 있는 권리는 나에게 있지 않느냐는거죠. 보통 세입자에게 권리가 없다고 하지만 세입자가 그 동네에 살았기 때문에 그 동네가 개발될 수 있었거든요. 상계동만 해도 버스가 없었고, 수도도 없었고, 근데 동네가 형성되면서 전기나 이런 것들이 들어왔고 이게 개발로 이어지기 때문에 세입자에게도 권리가 있는 것이죠. 그게 90년대 돈암동 철거 때부터 임대아파트에 입주할 수 있게 됐어요. 그렇지만 지금 현재도 아파트 들어가기 되게 힘들구요. 지금도 단독 세입자 안되고, 동성동본 세대도 안되고, 굉장히 예외 조항이 많고 한 채라도 임대아파트 덜 짓기 위해서 많은 폭력을 행사하죠. 이주비라고 해서 300만원 500만원씩 그렇게 해서 이사 내보내거나 임대아파트 주고 그랬는데, 임대아파트를 한 채라도 덜 짓는 게 건설회사의 관행인데요. 아파트 짓기까지 몇 년이 걸리니까 행당동처럼 '가이주단지' 시설을 지어내라는 요구가 생기기 시작했고. 그래서 그 이후에 많은 지역에서 가이주단지를 짓고 있어요. 제가 살던 봉천동은 가이주단지를 짓지 못하고 1500만원씩 셋방을 얻을 수 있는 돈을 받았는데요.

그런 협상이 딱 끝나면 철거싸움이 끝났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럼 이제 가이주단지 들어가 살거나, 뿔뿔히 셋방 얻을 돈 갖고 흩어지거나, 그렇게 되는데 가이주단지 들어갈 때쯤이면 굉장히 뭐랄까요. 누적된 피로나 혹은 철거싸움 중에는 긴장이 있고 적이 있으니까 주민들이 잘 뭉치고 단결이 되는데, 사실 그러면서도 여러 앙금이 내재해 있게 되죠. 가이주단지 가면 대부분 그런 것들 때문에 공동체가 깨지게 되는 경우가 많아요. 어떻게 보면 행당동은 예외적 경우고 가이주단지로 더 단단해진 경우지만 여러 경우에 사실 철거투쟁 때 보였던 그런 힘이나 단결심이 없어지는 경우가 대부분이죠.

사실은 철거가 끝나고 보상을 받는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게 아니잖아요. 문제는 그때부터 시작인데, 그 철거 이후에 대한 대비를 하면서 철거투쟁이 가르쳐 주었던 혹은 철거투쟁 때문에 가능했던 그런 끈끈한 사람관계를 더 발전시켜서 사업을 벌이고(이런 게 중요하죠). 또 영화 속에서 보셨듯이 우리가 아무리 자본주의에 어떤 비인간화 등 여러 가지에 대해 얘기해도, 도시에서 사는 한 그걸 벗어날 수 있는 시스템이 없잖아요. (철거 이후의 관계가)적극적으로 그것이 빈곤의 문제를 해결하는 사람들 뿐 아니라 삶의 어떤 대안적 삶의 형태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굉장히 큰 가능성을 갖고 있다고 보는데, 거기까지 가기가 굉장히 힘든 거 같아요. 상계동도 그렇고. 위원장님은 잘 알지만 한 두군데 빼놓고는 거의 다 시도는 하지만 실패하는 경우가 많은 거 같아요. 그게 철거투쟁 과정에서 '증오' 같은 걸 같이 배우죠. 평범한 사람들, 평범한 아주머니들이 철거투쟁 과정에서 욕도 배우고, 어떤 미움이나 이런 것들을 할 수 없이 모든 투쟁에서 마찬가지겠지만 역으로 배우게 되는데, 그런 것들을 잘 순화시키고 그 에너지를 다른 데로 끌어가는 그런 것이 굉장히 중요한 거 같습니다.


김경만 : 풍동의 경우는 제가 들은 바에 의하면, 처음에 풍동에 오래 사시던 분들이 철거가 되니까 세입자분들이 정당한 보상비나 이주비를 받을 수 없는 형편이니까 그 분들이 안 나가고 버티는 게 철거싸움의 시작이라고 수 있어요. 근데 이제 철거업체가 가만있는 게 아니죠. 그 마을 자체가 철거되기로 결정이 났다고 한다면 건물을 하나하나 다 헐죠. 사람이 있든 없든 상관안하고. 거기 있는 세입자의 경우는 풍동도 마찬가지지만 각자 원래 살던 집에서 나와서 가장 튼튼하게 생긴 건물을 골라서 공동으로 들어가신 거예요. 맨 나중에 들어가신 게 소망빌라라는 건물이었구요. 거기가 가장 튼튼했으니까요. 거기서 공동생활을 하신거죠. 건물 하나를 하나의 성곽처럼 방어벽을 삼아서 방어탑을 만들고, 외부에서 쳐들어 왔을때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는 역할을 하는건데. 나머지 건물은 다 무너져 있으니까 그 일대는 폐허처럼 돼 있구요. 굉장히 이상한 것은 높이가 굉장히 높은, 높이가 거의 7,8미터는 되는 거 같았어요. 그 정도로 아주 높은 펜스를 치기 때문에 밖에서는 안쪽을 볼 수 없거든요. 안쪽은 사람이 있어서 포크레인이 밀고 들어오고 전쟁 상황인데. 바깥에는 멀쩡한 아파트들이 늘어져 있고 빵가게도 있고 그런 아주 이상한 풍경이라고 할 수 있죠.

공동생활을 하는 분들의 목적은 철거싸움이라는 게 공격이 들어오면 그걸 막는거거든요. 근데 그 때의 목적은 화염병을 던져서 포크레인을 태우는거에요. 왜 그러냐면 철거가 단순히 돈 문제만은 아닌 게 사실은 강제철거에 드는 비용이 세입자들 보상비용보다 더 크거든요. 사실 돈 문제면 세입자에게 돈을 줘서 내보내는 게 더 싼거예요. 근데 강제철거를 하는 이유가, 주택공사에서 직접 얘기를 들은건데 '선례를 만들지 않겠다'는거죠. 그런 선례가 만들어지면 '사람들이 보상비용 요구를 당연하게 생각할테니까'라는 대답을 하더라고요. 강제철거에 쓰이는 포크레인이 아주 고가의 장빈데, 거기 탑승하는 사람도 건설기사가 아니라 용역깡패에요. 용역 깡패 중에 전문적인 포크레인 운전사가 있는거고. 아까 보신 장면 중에 기억나실지 모르겠는데 방화복을 입고 있던 사람이거든요. 그 사람이 용역깡팬데 직접 운전해서 들어옵니다. 거기 쓰이는 포크레인은 간간히 등장한 일반적 건설현장의 포크레인과 달리 대형이고 규모가 좀 크죠. 거기에 용접을 해서 뿔처럼 만들어서 건물을 때려 부수는 거예요. 포크레인을 불 태우게 되면 비용이 올라가니까 협상이 그제서야 들어가요. 그전에는 협상조차도 해주지 않는게 주택공사의 작전인 거죠. 그런 일이 반복인데.

풍동의 경우도 굉장히 위험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죽은 사람이 없다는 게 다행이다 싶을 정도로 아주 위험한 상황이었던 거 같아요. 사실 용산의 일이 올해 일어난 일이긴 하지만 사실은 옛날에 벌써 일어났을 법 한 일이거든요. 훨씬 전부터 계속 그래왔고요. 일이 이렇게 되는 바람에 결국 사람들이 철거라는 게 어떤건지 알게 된 셈이 돼버렸죠. 풍동 때만 해도 사람들에게 이런 장면을 보여줬을 때 반응 중 하나는 '2000년이 지났는데 아직도 한국에서 이런 일이 있냐'는 반응이었는데요. 지금은 모두가 그런데 의문을 갖지 않게 된 거 같습니다.


최진성 : 유영우 선생님께 여쭤볼께요. 투쟁보다 공동체가 더 어렵다고 하는 말이 맞는 거 같습니다. 영화에서 다른 선생님이 '자체 브랜드를 갖는 게 소원'이라고 하셨는데, 어떻게 돼는지, 유지해오신 노하우가 궁금합니다.

유영우 : 브랜드를 갖고자 했던 희망은 '옷을 만드는 사람들' 이라고 해서 브랜드를 가졌었어요. 제가 지금 개량한복을 입고 있는데, 이 옷을 자체 브랜드로 만들어서 하다가 역시 자본주의 구조 속에서는 힘들죠. 시장진입이 어려우니까. 이런 옷들 하나 브랜드를 제대로 유통시키고 판매하려면 디자이너, 기본적인 자본부터 시작해서 판매, 유통구조 등 이런 시스템이 갖춰져야 하는데 이런 걸 가난한 사람들이 출자금이라든가 쌈짓돈으로 해나가는 건 어렵죠. 3년 정도 시도하다가 망했어요. 5년 전에. 망해서 지금은 여러 가지 다른 걸 좀 준비하고 있고, 생협이라든가 올해부터 다시 준비하고 있어요.

공동체가 힘들다 하는 것은, 모든 일이든지 사람이 하는 일이거든요. 공동체 운동이나 철거투쟁이나. 이 세상 모든 건 사람에 의해 움직이는거죠. 사람이 중심이 되는, 사람을 중심에 놓고 사고하는게 공동체 운동이죠. 그러려면 사람과 사람의 관계가 잘 이뤄져야 해요. 근데 이 관계가 잘 만들어지는 건 굉장히 어렵잖아요. 그거처럼 어려운 게 없어요.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게 사람이라고요. 그만큼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만들어가는 건 어렵습니다. 그게 녹아나 있어야지만 공동체가 되는데 말처럼 쉬운 게 아니죠. 여전히 갈등하고, 싸우고, 이러면서 또 다시 만나고. 또 싸우고 만나고...이렇게 비비면서 가고 있는 것이 공동체라고 생각해요. 목적했던 가치, 목표점을 분명히 두고 그런 갈등과 문제들이 계속 발생해서 좀 어렵긴 하지만 그 가치를 중시하고 중심을 잡고 목표를 향해 꾸준히 가고자하는 사람이 존재하는 한 그 운동은 계속 존재하는거라고 생각하고.

저희들도 이 필름 찍을 때가 10년 전인데 10년이 지금 지금도 여전히 운동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아동청소년과 관련된 활동과 신협은 꾸준히 성장 해왔고요, 생협 준비하고 있고, 다양한 사회복지 지원해주는 시스템도 만들었고, 단오제는 재작년에 끝났어요. 단오제 대신 지역문화제로 바꿨는데, 단오제 할 때는 철거민이나 어려운 사람의 참여가 많았어요. 지금은 지역문화제로 바꾸면서 우리(임대아파트) 옆 일반 분양 아파트가 6~7억씩 나가거든요. 그런 일반 아파트에 있는 에어로빅 댄스하는 아줌마들 불러서 공연하고(웃음), 일반주택에 살고 계시는 분 중에 알음알음 알아서 악기 등 특기가 있으면 불러오고. 한마당 속에서 모든 지역주민들이 같이 자기 장기를 뽐내고 어우러지는 그런 지역문화제로 바꿨어요. 자꾸 그런 걸 통해서 지역사회를 묶어가는거죠. 가난한 사람과 부자와 사이에 벽을 허무는 그런 것들을 시도하는거죠. 여러 방법을 통해서. 서로 배려하고 나누는 지역사회를 만들어가려고 하는거죠. 그런 노력을 조금 조금씩 하고 있어요. 변화는 금방금방 오는 건 절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십년이 걸리든 이십년이 걸리든 목적을 갖고 계속 간다면 언젠가 이뤄지지 않을까하는 그런 희망을 갖고 움직여가고 있습니다.


최진성 : 행당동 통해서 가장 놀라웠던 게 생협이나 신협같은 조직이 발생했다는 점인 것 같아요. 그리고 <골리앗의 구조>에서 굉장히 놀랍고 충격적이었던 것은 공권력이나 용역깡패가 아니라 온갖 공기업이, 한전이나 소방서 주택공사 등등이 네트워킹해서 가난한 사람을 폭력으로 밀어붙이는 점이었어요. 전 이게 이영화의 핵심이자 가장 충격이었던 거 같은데 이 부분에 대해서 말씀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김경만 : 글쎄요. 뭐. 더. 흔히 사람들이 작전회의를 하는거죠. 철거대책을 세울 때 모여서 회의를 하는데 일단 그 철거지역은 단전이 기본적으로 되고, 단수도 그렇고. 사람이 살고 있어도 개의치 않는 상황이어서. 물론 거기 계신 분들(철거민)은 철거싸움의 노하우가 있는 분들이라 알아서 연결을 하시더라고요. 인터넷도 그렇고 전기도 그렇고(웃음). 그런 게 굉장히 재밌는 광경이었고요.

(철거를 위한)대책회의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제가 본 적은 없어서. 다른 분이 몰래 찍은 걸 봤는데, 굉장히 고압적이죠. 당연히 그 사람들은 많이 하던 장사니까 전혀 거리낌이 없어요. 이런 식의 철거나 밀어붙이기가 사람을 죽을 지경으로 몰아넣는 거에 대해 미안함이나 불편함이 전혀 없는 사람들이에요.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니까요. 그게 젤 무서운건데. 경찰도 마찬가지고. 제일 무서운 게 사람 생각인 거 같기도 해요. 어떻게 보면. 자기가 계속 합리화를 하는 거죠. 거리낌 없도록. 소방서도 아까 보셨겠지만 불끄러 오는 게 아니라 오히려 포크레인에 불 붙으면 꺼주려고 오는 거죠.(웃음) 세입자 있는 소망빌라 불 붙었다고 끄는 게 아니라, 철거싸움에서 용역을 도우러 오는 사람들이죠. 화염병 싸움을 할 때, 소방서랑 경찰이랑 경찰은 뒷전에서 멀리 관전하는 입장이고. 마지막 장면에서 경찰이 왔던 건 누군가 112로 신고를 했어요. 경찰이 와서 도와달라고 신고하는 바람에 경찰 체계상 어쩔 수 없이 출동했던 거지, 지역지구대에 연락했으면 사실 안 오죠. 오면 멀리서 용역깡패들이 버젓이 돌아다니는데 멀리서 방송이나 하는거죠. ‘화염병 던지지 마시구요’ 등 하나마나한 얘기를 해요.

이게 어떻게 보면 철거싸움 문제 만은 아닌 거 같은 게 한국은 그게 전통인거 같아요. 힘이 없는 쪽에서 들고일어나거나 이러면 철저하게 짓밟는 거죠. '빨갱이다, 폭력적이다' 이래서 아주 그냥 초토화를 시키는 게 한국의 전통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요(웃음) 농담이 아닌 거 같아요. 한국역사 초기부터 그랬잖아요. 그게 면면히 쌓여온 거 같더라구요. 정부나 공권력이 하루아침에 만들어지는 게 아니니까 되게 오랫동안 형성된 거잖아요. 위에서 주입이 되고. 그런 과정을 보면 한국이라는 나라가 '징한 곳'이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제가 보기만 해도 그러네요.


최진성 : 정말 무서운 곳에 살고 있는 거 같고요. 김경만 감독님 원래 관객과의 대화하면 단답형인데 오늘 말씀 많이 해주셔서 감사합니다(웃음). 걱정했거든요.

용산 선생님(노한나 용산4구역 철거대책위 총무부장)에게 좀 여쭤보겠습니다. 1월 20일 날 알다시피 용산참사가 일어났고요. 내일이 100일째고, 여러 행사가 준비되고 있고, 아직 장례도 치르지 못하는 상황인데 현재 상황과 앞으로의 계획들 묻고 싶습니다.


노한나 : 제가 영화를 보니까 그때나 지금이나 변한 게 전혀 없어요. 제가 하고 싶은 말이 이 영화 속에 다 있었습니다.

저희는 주거가 아니고 장사를 하는 사람들이에요. 용산이라는 곳에 장사를 하신 분들이 전부 짧게는 2,3년이지만 2~30년 되신 분들도 있습니다. 용산이 맨 처음에는 상권도 굉장히 안 좋았지만 그 속에서도 진짜 지금까지 굉장히 많은 고생을 하면서 지금을 만들어놨는데 어느 날 쫓겨나는 입장이 됐어요. 개발로 인해서 저희도 뭔가 어떤 혜택이 있을 거라 생각하고 막연히 기대했어요. 근데 돌아온 게 3개월 영업보상이에요.

저희는 상권이기 때문에 자본주의의 그런 이익에 좀 앞장서 있던 사람들이잖아요. 그런 사람들인데도 이 논리가 너무 비합리적인 거예요. 그래서 대한민국이란 나라에서 행하는 법질서가 이런 것이면 그냥 조용히 나가야하나, 그럼 다른 곳에 나가서 또 다른 고생을 해야할텐데 생각이 많았어요. 사실 다시 이만한 상권을 만들려면 가진 재산의 대부분을 또 투자를 해야 지금 정도의 상권을 이룰 수 있는데 '이렇게 하는 게 옳은가, 아니면 여기서 한번 싸워봐야 옳은가' 제 경우에 그런 고민을 했어요.

나라와 법, 국가와 싸우는 건 굉장히 무서운 거잖아요. 거기에 대항하는 건 전부 나쁜사람이고, 빨갱이가 되는거고. 저도 사실은 굉장히 고민을 많이 했는데. 그런 것을 도와주는 곳도 없고, 하소연 할 때도 전혀 없었어요. 그러다 전철연을 알게 됐고 그 곳에 가입해서 활동을 하다보니까 여기까지 왔습니다. 지금은 (철거 문제에 있어서)주거는 굉장히 많이 좋아졌습니다. 4인 가족 기준으로 1250만 원 정도의 이주비가 나오고, 잘 모르는 분들이나 나이 드신 분들은 그것도 못 받고 이주비용 300만원도 고맙게 생각하고 받아가시는 분도 있고, 끝까지 자기 몫 찾아서 임대아파트 받아가는 상황도 있는데. 달라 그러면 주고 모르면 그냥 나가는 상황이죠. 그보다도 요즘은 상권에 대한 투쟁이 많아졌습니다.

아까 먼저 풍동의 사건(<골리앗의 구조>)을 볼 때 전 너무 심장이 떨렸어요. 왜냐면 20일 때를 다시 보는 거 같아서 굉장히 마음이 떨렸습니다. 돌아가신 분들 중에 같은 건물에서 장사하시던 양회성씨나, 또 도와주시러 온 분들도 같은 철거민으로 다른 지역에서 철거의 아픔을 겪으셨던 분들이 와서 도와주셨어요.

저는 이 나라 안에서 나이가 오십이 다 돼도록 살면서 교통법규 어기는 것조차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살았어요. 20일에 사건 발생하는 날부터 지금까지 100일 동안 그곳에서 지켜보면서 언론이나 정부에서, 경찰서에서 구청에서 모든 것에서부터 감독님들이 말씀하신대로 저희가 '불법을 저질렀기 때문에' 나쁜 사람으로 낙인이 찍혀버리고. 이에 항거하는 저희가 이상한 사람이 돼 버리고. 기본권인 전기와 물이 끊어져요. 화장실을 못 씁니다. 수도가 끊겨서 화장실을 쓸 수가 없어요. 이동화장실이 있었는데, 맨 처음에는 사람이 죽었으니까 누가 잘잘못이 가려지지 않은 상황에서 구청에 전화했더니 갖다 주더라구요. 근데 검찰의 발표가 '철거민들이 잘못했다‘는 여론은 얻고 나서부터는 화장실을 가져갔어요. 그렇게 철저하게 구청이나 경찰서나 모든 곳에서 다 저희를 배제하고 이상한 집단으로 만들어가는 상황입니다. 저는 전철연의 기조도 있지만, 사실 내가 여기서 머물러 '그만 둘 것인가, 말 것인가' 고민을 많이 합니다. 생각해보면 그동안 각자 자기 이익만을 위해서 살아왔어요. 장사하면서 이익내고 생활하고. 그러다 같이 모여서 행동하고 진짜 구속되는 것을 각오하고 싸움하다보니까, 거기서 이제 사람 사는 냄새를 맡게 된 것 같아요.

저희가 처음에 요구한 것은 개발이 될 때 '가상가'를 공동으로 할 수 있게 임시상가를 내달라는 거였어요. 4~5평정도로 장사할 수 있게 해달라는 소박한 꿈을 요구했습니다. 근데 건설회사와 조합의 머리 잘 돌아가는 사람들은 '어림없는 소리다, 꿈꾸고 있다' 지금까지도 그렇게 얘기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요구하는 게 합당하지 않은 아주 이상한 소리로 만들어버렸죠. 저는 (<골리앗의 구조>를 통해서)여기서 당했던 걸 보고, (<행당동사람들2>을 통해서는)저희가 나갈 해답을 보고. 문제점과 해결책을 다 보고 가는 거 같아서 마음이 좋습니다.

어제 영정사진을 들고 앉아있는데 수사과장이라는 사람이 3차 경고까지 하면서 구속하겠다고 했어요. 저도 경찰서 가서 조사를 받고 왔던 사람입니다. 죄가 4가지나 되더라구요. 집회 때 앞에서 발언한 죄, 남일당 건물에 들어가서 불법침입죄, 전경들 막아섰다고 공무방해죄, 포크레인 막았다고 업무방해. 이래서 4가지 죄를 조사받고 나왔는데, 어제 영정사진 들고 앉아서 그런 생각을 했어요. 남편에게 애들에게 하직인사를 했어요. 제가 알고 있는 모든 사람에게 잘 있으라고 인사를 했습니다. 저는 이 길밖에 갈 수가 없고, 여기서 구속돼도 더 이상 물러날 수 없다는 생각을 했어요. 지금 분향소에 있는 사람이 15명입니다. 구치소에 수감된 분들 포함해서 모두 26명이 남아있는데. 15명 중 한 명이 남자고 나머지가 여자에요. 노인들이 대부분이고. 진짜 말씀하신대로 욕할줄도 모르고. 생활비 벌어서 애들 학비 좀 더 보태고 이렇게 살려고 했던 사람들 입에서 용역들과 싸우면서 욕을 하면서, 이게 끝나고 나면 ' 정신과 치료를 받아야 하지 않을까' 할 정도에요. 돈이고 뭐고 떠나서 내가 여기까지 와서 왜 철거민으로 살아야 하는가 하는 슬픔도 많이 느끼고 그렇습니다.

그렇지만 여기서 그냥 물러서면 그냥 문제점을 인정하는 거예요. 끝까지 싸워서 내가 빈손으로 나가는 한이 있어도 이것만큼은 끝까지 뭔가를 규명을 해서 결과를 봐야겠다, 그리고 올라가신 분들의 목적이 어땠든 그날 그 사고현장에 제가 지켜보고 있었거든요. 제가 진압하는 걸 보면서 '아, 이 나라는 대항하는 자는 저렇게 죽이는 구나', 컨테이너 박스가 올라갈 때 이 나라의 공권력이라는 게 대화를 하자고 한 번도 얘기하지 않고 바로 (진압)시작하는 걸 보면서, 대한민국에 사는 거 자체가 힘들고, 버겁고, 무섭고. 아이들을 남겨두고 죽어야 하는 게 걱정스럽더라고요. 돈이 많으면 될지, 공부를 많이 하면 될지... 그런 고민을 했습니다.

여러 가지로 장황하게 말씀드렸는데 상황은 그렇고요, 내일이 100일이 되는 날이고 꼭 한 번 와서 봐주세요. 끝까지 남아있는 분들이 힘이 있고, 머리고 좋고, 잘 싸우는 사람이 아니고 전부 힘없는 사람들이에요. 15명이 90일 넘게 싸우니까 굉장히 강해졌어요. 경찰도 용역도 안두렵습니다. 하루라도 그냥 지나가면 조용하고 심심해요(웃음). 그 정도로 저희가 강해졌어요. 어떤 불의 앞에서도 싸울 수 있는 사람들이 됐습니다. 하여튼 이렇게 인사를 드리고 저희 용산에 대해 알릴 수 있는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내일 시청 앞에서 7시에 저희들 전부 나가서 저희들의 현재 상황을 알리려고 합니다. 지금 언론에서도 그렇고 어느 곳에서든 관심 안 가져줘도 저희가 포기하지 않으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용산이 굉장히 바람이 세거든요. 그렇게 추운 겨울을 지내면서 봄이 오는 이 시점까지 견딜 때, 보이지 않는 손길들로 인해서 라면이 떨어지면 라면을, 쌀에, 김치에... 전국에서 많이 보내주셨어요. 그것이 우리나라의 어떤 정이고 사람 살아가는 맛이라는 걸 저는 배웠습니다. 철거민이 되기 전에는, 돈이 많아야 행복해지는 줄 알았어요. 그래서 악착같이 하루에 10~15시간씩 일했는데, '아 돈이 없어도 이렇게 행복할 수 있구나' 요즘엔 돈 한 푼 없이 행복하게 살고 있습니다. 아이러니 하게도 용역 깡패와 경찰과 대응하면서, 제가 50년 살면서 사람답게, 그렇게 좀 인정을 느끼면서 산다는 걸 처음으로 배웠습니다.


최진성 : 말씀 감사드리구고요. 관객 분들의 질문이나 궁금한 거 받겠습니다. 앞에 있는 두 감독님, 유영우 선생님, 용산 선생님(노한나) 모든 분께 질문하셔도 괜찮습니다.

관객1 : 광명에서 서울로 회사를 다니는 일반 회사원입니다. 다름이 아니라 제가 요번 용산참사 문제 뿐 아니라, 옳고 그르고 비상식적인 것에 대해서 분노를 하게 되는데, 이번 용산 참사 때도 그런 생각으로 동료들과 참사현장에 여러 차례 현장을 방문했습니다. 고인이나 투쟁하는 분들의 그 슬픔을 전부 다 알 수 없지만, 비상식적인 일이 벌어진 거에 대해 분노하고 책임감을 느끼는데, 현장에서 그런 집회를 주도 하는 분들을 보면 저희들이 잘 모르는 용어를 갖고 얘기합니다. 예를 들면 투쟁이랄까, 일반 시민들이 이 문제에 대해서 당사자 문제는 아니더라도 옳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힘이 되게 위해 찾아갔는데, 막상 찾아가면 함께 하지 못하는 부분들이 생깁니다.

저희가 찾아갔을 때는 이 문제에 대해서 경찰의 과잉진압 부분하고 서울시의 무책임하고 무분별한 재개발 정책에 대해서 먼저 풀어나갔으면 하는데, 가보면 대부분의 구호라든가 요구사항이 정권퇴진에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이는 물론 결론적으로 해야 할 일이라면 해야겠지만, 지금 당장 유가족 등이나 투쟁하는 분들에게는 재개발 문제라든지 이런 거에 해결방안을 집중하고 조명해야 하는데 그거는 굉장히 약하게 비춰지고, 결국에는 정권퇴진과 가투라든지 경찰과 전경의 대치에 초점이 맞춰져서 일반시민이 한발자국 더 물러나게 됩니다. 효과적으로 풀어나갈 수 있는 방법을 못 찾고 답답해서 질문을 드리는데, 이런 점을 생각하고 계신지. 방향성에 대해 얘기 듣고 싶습니다.


유영우 : 어떻게 답변을 드려야 할지, 답변이 될지 잘 모르겠는데. 우선 제 얘기를 해볼게요. 철거싸움을 하고 가이주단지에 들어가고, 협동공동체 운동을 지역에서 주민들과 준비하면서같이 하는 운동이 주거권운동입니다. 용산문제도 저희 단체에서 실무자들이 파견돼서 범대위에 속해서 이런저런 역할들을 하고 있어요.

이게 좀 시대적 흐름이 있는 거 같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오랫동안 한 건 아니지만 한 20년(동안 철거 및 주거권운동을) 하다보니까, 제가 할 때만 해도 지금의 시대적 분위기와 많이 틀렸어요. 그때는 워낙 산동네, 달동네 철거를 너무 많이 하다보니까 일정정도 공권력이나 정부라든가 이런 쪽에서 인정해주는 분위기가 있었어요. 어찌 보면 운이 좋았던거죠. 그래서 가이주단지를 쟁취해냈고, 그게 전파돼서 수많은 지역에 가이주단지가 생기고, 주거안정을 이루는데 도움이 되고 그랬거든요.


지금 골리앗이 풍동 필름(<골리앗의 구조>)에 나왔지만, 골리앗이 생긴 게 90년대 처음 시작됐어요. 청량리에서. 그 다음에 두 번째가 저희 지역이었어요(행당동). 그 외 들불처럼 철거싸움에는 으레 골리앗이 올라가기 시작했고, 골리앗을 중심에 두고 철거용역과 거기 계신 주민들과 극렬한 대치가 시작된 게 2000년대 들어와서 양쪽간의 싸움이 심화됐어요. 그 과정에서 많은 분들이 돌아가셨고. 그 정점에 이른 게 용산참사에요. 용산참사는 그 동안의 개발지역에서의 골리앗 싸움의 중심에 있었던 철거깡패와 조합과 주민의 갈등이 아니라, 공권력 저지른 일이에요. 공권력이. 이건 다른 싸움과 틀려요. 기존의 싸움과 전적으로 틀립니다. 공권력이 직접 개입한 거거든요. 그래서 아까운 목숨을 잃었죠. 이건 정부가 책임져야 할 문제거든요. 그 본질을 잘 보셔야 한다는 말씀을 드리고.

둘째로 지금 질문하신 내용의 일반시민이 참여할 수 있게 해달라는 거. 심정적으로 행동적으로나. 그런 부분이 안타까운 게 현 정부가 워낙 본질적인 문제에 접근하려고 하지 않으려고 하니까, 세부적으로 넘어가기가 당사자 분들에게는 굉장히 어려울거에요. 저도 한 발 건너서 보면 말씀하신대로 하는 게 맞는데. 범대위도 그런 부분을 고민안하는 건 아니라고 저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근본적인 문제의 해결이 워낙 안풀리니까. 용산에서 싸운 분들에게 모든 책임을 떠 넘겼고, 명예회복을 안 시키고, 구속시키고... 워낙 이렇게 강경하게 나가는 기조가 있어서, 지금 지적하신 부분은 100% 맞다고 생각하면서도 전환되기가 쉽지 않은 국면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알고 있기로는 100일을 기점으로 해서 뭔가 좀 확산되는, 지적하신 부분처럼 변하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제가 아는 범위 내에서요.


최진성 : 시간이 많지 않은데요, 관객 질문 짧게 하나 더 받겠습니다.

관객2 : 질문은 아니구요. 질문하신 분이 함께 할 수 있는 게 뭐가 없느냐고 물으셨잖아요. 제가 용산 4구역 철대위 총무부장님(노한나)과 같이 왔는데 짧게 말씀드리고 싶어서요.

용산의 촛불미디어센터, 촛불방송국이라고 해서 남일당 건물 뒤에 고 이상림 씨가 운영하시던 호프집을 문화공간, 미디어공간으로 만들었거든요. 예전에 김동원 감독님 오셨을 때 드렸던 말씀에 예전에 상계동에는 그 당시 철거전문가인 김동원 감독님만 카메라를 들고 알리는역할을 하셨는데, 지금은 작년의 촛불국면에서 봤던 것처럼 (1인 미디어들이)직접 만날 수 있는 조건이 된다고 생각해서, 거기 공간을 마련해서 작업을 한 달 정도 진행하고 있어요. 지금 하는 게 생중계도 하고 있고, 철거민 뉴스를 만들고 있고, 라디오 방송도 만들고 있어요. 영상뉴스도 만들어서 인터넷으로 상영하고 있는데요. 이렇게 참여할 수 있는 방법이 많습니다. 다음 까페에 촛불미디어센터 치시면 나오는데, 가입하셔서 함께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서(웃음). 수많은 김동원 감독이 시민들 사이에서 나왔으면 좋겠다 싶습니다.


최진성 : 촛불미디어센터 분들 인사 좀 해주세요. 고맙습니다.

김동원 : 아까 질문하신 분 지적이 굉장히 중요한 거 같아서 말씀드리고 싶은데. 어떤 투쟁이든지 층위가 두 가지로, 거시적인 면과 구체적인 사안을 동시에 갖고 있잖아요. 예를 들어 대추리 경우에, 대추리 지키기와 더불어서 '미군 물러가라'는 구호가 같이 나오게 되고. 80년대 같은 경우는 '호헌철폐'와 '독재타도'라는 구호가 동시에 맞붙게 되거든요. 근데 이제 그거 때문에 사실은 소위 운동권과 당사자가 같이 결합할 수 있는 계기가 되는 반면에, 자칫하면 그게 분열할 수 있는 요지가 되기도 하죠. 강경파 온건파 이런 식으로. 그런 것들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실은 말씀하신대로 일반시민들이 참여할 수 있는 그런 장치들을 갖는 것도 중요하고, 일반시민들도 '아 저거는 어떤 의미에서 저렇게 강경한 구호가 나오고 있구나', 말하자면 운동이란 그럴 수밖에 없다는 걸 이해하는 게 필요하다고 보고요.

사실 용산 같은 경우도 얼마 전까지 살벌했는데 문정현 신부님이 3주전에 들어가신 후에 분위기가 굉장히 부드러워졌어요. 밥도 주고요(웃음). 매일 7시에 미사를 집전하시는데 아무런 부담 없이 참가하실 수 있고요. 사실 용산 분들 지금은 모르지만 곧 지쳐 갈 것 같아요. 이게 사실 철거싸움이라는 게 지난한 싸움이에요. 몇 년씩 걸리는데. 처음엔 모르죠. 한 두 달이면 끝나겠지 하다가 몇 년씩 가는데 그런 것들을 좀 뭐라고 할까요. 아무것도 없이 도울 수 있는 방법이, 방문하고 한 마디 나누고 이런 것들이 중요하다고 보거든요. 저는 용산 경우 분위기 자체가 불에 타죽었고 강성인 전철연이 있고 여러 살벌한 이미지가 있었는데 아마 문정현 신부님이 그거 때문에 들어간 거 같아요. 희석시키기 위해서. 말씀 들어서 알겠지만 풍동 위원장이나 행당동 위원장이나 다 평범한 사람들이었는데, 그런 지경에 놓이게 된거거든요. 거기 가시면 중요한 걸 얻어 가실 수 있어요. 다른데서 느낄 수 없는 걸 느낄 수 있는 거 같아서 적극적으로 방문하시길 권합니다.


최진성 : 관객과의 대화 많이 못해서 너무 아쉬운데요. 감독님 두 분에게 한 마디씩 듣고 오늘 마쳐야 할 것 같습니다. 아까 촛불미디에센터에서 오신 분이 말씀해주신 것처럼 예전에는 김동원 감독님이 만드신 <상계동 올림픽>이나 <행당동 사람들>을 저는 대학 때 보면서 '저런 데서 누군가 찍고 있구나', '영화는 참 촌스럽지만 정말 대단하다'(웃음)생각했어요. 오늘도 깜짝 놀라셨을거예요. 그 촌스러운 나래이션과, '우리 함께 소풍가지 않을래요'(웃음)같은 지금은 꿈도 꾸지 못할 놀라운 나래이션...(웃음) 그때 김동원 감독이 혼자 카메라를 들었다면, 지금은 굉장히 많은 카메라가 생겼죠. 너무 좋은 거 같구요. 이런 시대변화와 더불어서 감독님들 생각도 있을 거 같은데 간단히 듣고 정리하겠습니다.

김동원 : 사실 할 말은 되게 많은데. 제가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하는 게 삶의 본질적인,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의 문제가 철거 문제에 있다고 생각해요. 나에게 주어진 공간이 무엇인지, 내가 발 딛고 있는 우리집이나 이런 것들이 어떻게 내게 허용된건지, 혹은 내가 누구 것을 뺏은 건 아닌지... 저는 굉장히 여러 가지를 상계동에서 배웠는데, 상계동 속편을 만들고 있거든요. 글쎄 오늘 저도 이 자리에서 잊어버렸던 것들을 다시 좀 환기 했구요. 잘 만들어야겠다는(웃음) 의지를 다지게 돼서 굉장히 좋습니다.

김경만 : 영화라는 게 송구스럽고 민망한 일인 거 같아요. 영화 만든다는 거 자체가. 실제 사건 주인공인 채남병 위원장님은 여기 못오고 계신데 제가 이런 자리에 나와 얘기를 한다는 게 참 민망합니다. 무슨 말을 더 해야 할지... 고맙습니다.

유영우 : 삶의 자리라는 말이 있잖아요. 용산의 문제는 상권의 문제였습니다. 상권의 문제가 지금 우리 사회 전반적으로 큰 문제로 확대되고 있습니다. 특별히 더 말씀드리는 이유는 과거에는 조금씩 개발했기 때문에 상권이 별로 없었어요. 근데 지금은 대규모 사업을 통해서 대규모의 상권이 한꺼번에 철거되는데 거기에 대한 대책에 전혀 없는 상태죠. 근데 이게 용산을 통해 알려진거죠. 고귀한 목숨을 통해서요. 이런 문제들이 우리 삶에서 얼마나 소중한거냐면, 불행하게도 우리사회는 집이라는 걸 재산증식의 수단, 투기의 수단으로만 알고 있고, 이를 통해서 한 푼이라도 더 벌려고 하는 욕심을 가진 것이 대다수 국민의 의식이라고 생각합니다. 본질적으로 개발의 문제가 바뀔 수 없는 거죠. 여러분만이라도 삶의 자리의 본질의 문제에 좀 더 고민하고 중요하게 생각하셨으면 좋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최진성 : 월례포럼 네 번째 시간이 5월 26일에 있습니다. 이강현 감독의 <파산의 기술>을 같이 보고 얘기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했으니까 다음 달에도 와주시구요. 행사를 주최한 인디포럼이 매년 하는 영화제가 4월 29일에서 6월 5일까지 인디스페이스와 상상마당에서 하는데 많이 와주세요. 다음 달에 뵙겠습니다.

기사: 강민영
녹취: 장일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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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민영

지난 3월 24일 인디포럼 월례상영의 두 번째 비행이 시작되던 날 저녁, 극장은 유난히도 소란스러웠다. 상영시간인 8시가 가까워지자 영화를 관람하기 위해 모인 사람들이 저마다의 이야기를 시작했기 때문이다. 지난 번 최진성 감독의 <뻑큐멘터리-박통진리교> 상영과 비슷한 풍경이었지만, 특이한 것은 관객석을 채우고 있는 얼굴들이었다. 한 손에는 팝콘, 다른 손에는 콜라를 들고 앉아 조잘거리며 수다를 늘어놓는 수많은 아이들의 얼굴은 극장이 아닌 학교 교실을 연상시켰던 것이다. 아이들이 단체로 독립영화 전용관을 가득 채우고 있다는 것은 쉽게 볼 수 없는 진풍경이다. <푸른 강은 흘러라>의 상영은 아이들의 들뜬 목소리와 그런 아이들을 바라보는 어른들의 의아한 시선이 뒤섞인 가운데 진행되었다.


푸르름은 랑만이야.
푸르름은 광대무변이지.
그것은 숙원의 약속이고,
그것은 옥 같은 고백이야.

<푸른 강은 흘러라>의 상영이 시작되자마자 관객석에 앉아있던 아이들은 옆 친구와의 대화를 멈추며 스크린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소란스럽던 상영관은 아이들의 팝콘 씹는 소리와 콜라를 들이키는 소리만 남겨둔 채 잠잠해졌다. 철이가 책상 앞에 붙여놓은 초록 대지 위의 강물 그림, 그리고 숙이와 철이의 진중한 대화들에 아이들은 하나 둘 씩 속닥거리며 웃음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눈을 찌를 듯한 푸르른 그들의 이야기를 바라보는 아이들의 표정은 사뭇 진지했다. 숙이의 올바름이 깊어질수록, 혹은 철이가 때때로 다른 곳에 눈을 돌려 숙이를 등지는 장면이 나올 때마다 극장 안의 아이들은 자신의 일인 양 탄식하며 철이를 질타하기 시작했다. 시종일관 햇빛이 쏟아지는 스크린 속 인물들에게 어느 샌가 아이들은 마음을 주고 있었던 것이다. <푸른 강은 흘러라>는 지난 2008 서울독립영화제의 개막작으로 선정되어 인디포럼의 월례상영 이전에 이미 관객들을 만났다. 처음으로 <푸른 강은 흘러라>가 상영되던 서울독립영화제 개막 때의 풍경이, 인디포럼 월례상영의 풍경과 오버랩되었다. 상황도 다르고 관객층도 다르지만, 그들은-아니, ‘우리’는 똑같은 장면에서 눈물 흘리고 똑같은 장면에서 웃음 짓고 있었다. 순진한 마음으로 숙이와 철이를 걱정하는 아이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아이들이 마음속에 담아 넣기엔 너무 강하고 너무 잔잔한 영화가 될 것이라 예상했던 생각은 빗나갔던 것이다. 아이들의 관람을 옆에서 지켜보면서 새삼 그들의 전적인 관심은 손에 들린 팝콘만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오히려 아이들은 어른들보다 훨씬 심도 깊고 진심어린 눈으로 영화를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푸른 강은 흘러라>의 엔딩 크레딧이 올라간 후 영화에 집중하던 아이들은 다시 장난기 가득한 꾸러기들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대부분의 아이들은 <푸른 강은 흘러라>의 마지막, 그러니까 철이의 어머니가 죽은 소식을 듣자마자 눈물을 머금은 숙이의 얼굴이 클로즈업 되는 장면에서 영화가 끝을 맺는다는 것을 신기하게 여겼다. 한없이 푸르고 아름다운 영화가 다시 피할 수 없는 현실로 돌아오는 순간, 영화는 그곳에서 잔인하게 ‘컷’을 외쳤다. 아이들이 궁금해 하고 어른들이 의아해했던 <푸른 강은 흘러라>에 대한 이야기, 그 이야기는 얼마 지나지 않아 시작되었다. 어느 때보다 진솔하고 나지막하던 강미자 감독의 목소리, 객석을 가득 채운 아이들과 교사, 그리고 학부모들의 눈망울. 늦은 저녁, 인디스페이스에서 이루어졌던 실로 ‘아름다운’ 대화의 장면 전문을 아래에 싣는다.

양해훈 : 진행을 맡은 양해훈이라고 하구요. 독립영화를 상영하는데서 어린친구들이랑 보기는 처음이에요(이 날 현장에는 일제고사로 인해 해직당한 교사 두 분과 학생들이 함께 관람하기 위해 자리하고 있었다). (일단 패널) 소개를 좀 부탁드릴께요.


강미자 : 전 <푸른강은 흘러라> 연출한 강미자입니다.


모은영 : 전 모은영이라고 하구요. 감독님께 궁금한 게 너무 많아서 질문하러 왔습니다.


양해훈 : 감독님도 서울독립영화제에서 상영하고 오랜만에 상영하는 걸텐데, 소회가 어떠실지. 그리고 어린친구들과 영화를 보신 느낌이 어떠지 궁금합니다.


강미자 : 일단 다양한 연령층이 이렇게 모여서 영화를 봐서 기분 좋구요. 저도 제가 만든 영화를 세 달 만에 보는건 데 많이 떨리더라구요. 아직도 이 영화를 제가 많이 좋아하는 거 같아요.


모은영 : 제가 그동안 보통 사회자 역할을 많이 했기 때문에 이렇게 (패널로 나와)얘기하는 게 저한텐 낯선 경험인데요, 재밌게 얘기 나눴으면 좋겠구요. 영화가 볼 때마다 느낌이 많이 달라지는 영화인거 같아요. 지금까지와는 다른 관객층과 봐서 그런지 모르겠는데. 아까 상영 후에 잠깐 반응을 들어보니 어머니 잡혀갈 때 '왜 잡아가냐'는 말도 들리고, 다른 때보다 좀 더 영화에 대한 설명이 필요할 것 같아요.


양해훈 : 저도 아까 영화를 보면서 뒤에서 아이들의 즉각적인 반응을 들으면서 이렇게 영화를 보는 게 감독님도 생소한 부분이 있었을 것 같아요. 이 친구들이 좀 알아들을 수 있는 수준에서, 어떻게 만들게 됐는지 말씀을 듣고 싶습니다.


강미자 : 영화 내용에 대해서 자세하게 얘기하는 건 좀 그렇구요. 이게 연변 지역의 작가 분들이 쓰신 단편하고 중편 소설 세 개를 시나리오 쓰신 분이 각색을 해서, 완전히 새로 영화를 위한 시나리오를 쓰셨어요. 제가 그 시나리오를 처음 본 게 4년 전인데, 너무 좋더라구요. 너무 좋아서 '이런 영화 내가 한번쯤 만들고 싶다'는 얘기를 그분에게 했어요. 근데 보셨다시피 제작비를 어디서 많이 갖고 와서 만들 수 있는 성격의 영화는 아니었는데, 한 3년 만에 영화진흥위원회에서 제작비 지원을 받게 됐죠. 저희는 정말 생각을 못했었는데, 지원을 받아서 영화가 만들어졌습니다. 그리고 사실 제가 세 달 만에 영화 보느라고 주변반응에 신경을 못썼어요. 다른 분이 얘기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모은영 : 영화 속 말투에 독특함 이런 것들이 보고 나면 운율 식으로 해서 많이 남는 것 같아요. 이런 어투, 운율 이런 게 영화 전체에서 만들어내는 리듬이 생소한 거 같아요. 그런 부분들을 연출하실 때 어떻게 하셨는지 궁금해요.


강미자 : 20년 정도 됐을 것 같은데, 제가 부산 처음 갔을 때 처음 느꼈던 게 부산 분들의 말이었어요. 특히 여자 분들이 부산 말을 하는데 그 말이 몸에 와 닿으면서 '부산이란 곳에 왔구나'라는 걸 느꼈던 적이 있거든요. (그런 느낌 때문인지)한국에서 시나리오 읽었을 때부터 연변 말을 정말 잘 표현하고 싶었어요. 연변지역 돌아다니다보면 사투리가 굉장히 다양해요. 어떤건 굉장히 쎄서 어렵기도 하고, 좀 다양한데. 그 중에서도 운율을 좀 탈 수 있고 듣기 좋고... 연변 말이 예전 우리말과 비슷하다고 하는데 그런 말들을 많이 상기시키고 싶었어요. 배우 캐스팅부터 현장촬영 마지막까지 말에 대해서는 굉장히 연습들을 많이 하고 신경을 많이 썼습니다. 한국에서 간 배우든, 연변 배우든  그 말이 주는 느낌을 몸으로 전달하고 싶은 욕심이 있었어요.


양해훈 : 확실히 한국 상황이 있고 연변 상황이 있으니까 거기서 나오는 간극에서 저희들이 느끼는 감흥이 남다른 게 있었던 것 같아요. 저희가 달마다 월례비행을 진행하면서 특정 커뮤니티를 초청하거든요. 오늘은 해직교사 분들을 초청했어요. 해직교사 분들과 제자들, 학부모님들이 이 영화를 봤을 때 어떤 감흥이 있을까. 같이 연대하고 응원하고 싶은 마음이 있어서(초대했어요). 원래 저희 인디포럼이 내빈 소개하는 집단이 아니거든요. 근데 오늘은 특별히 어렵고 귀한 걸음 해주신 길동초등학교의 최혜원 선생님하구요, 거원초등학교 박수영 선생님 두 분이 오셨습니다.


최혜원 : 저기 제자들이 보이는데요. 반갑습니다. 민망하고 아직도 적응 안되는 이름이긴 한데요. 벌써 넉 달이 되어가네요. 이번에 일제고사 반대 문제로 해직 당했던 전 길동초등학교 교사 최혜원입니다. 반갑습니다. 저도 사실 내빈이라고 생각지 않고(웃음), 워낙 독립영화를 좋아해요. 영화제 같은 거 하면 여기 서 하루 종일 영화보고 밥 먹고 하는 곳이어서. 인디스페이스 트레일러 가사 노래까지 다 외울 정도로 굉장히 광팬이구요. 그래서 인디포럼에서 초청해주셨을 때 너무 기뻤어요. 이 자리에 설 수 있어서. 무엇보다도 오늘 이 영화가 지금 제가 교직에 있진 않지만, 제 졸업한 제자들, 이제 막 청소년이 된 풋풋한 14살 친구들과 영화를 보게 돼서 너무너무 기뻤습니다.


박수영 : 이런데서 이렇게 인사드리려고 하니까 뻘쭘하고 민망합니다. 전 거원초 교사 박수영이라고 합니다. 반갑습니다. 네 사실 오늘 조금 꿀꿀한 날이기도 합니다. 물론 저희 학교 저와 같이 싸워주시는 학부모님들과, 작년 우리 반 아이들과 함께 앉아있긴 한데요. 작년에 6학년 9반 저희 반이었다는 이유만으로 지금 아이들이 중학교에서 핍박을 받고 있습니다. 지금 중학교에 좀 찾아가서 교장선생님께 부탁드리려고 찾아갔는데 안 계셔서 만남을 연기하고 왔습니다. (영화가 끝난 후 박 선생님께 여쭤보니, 초등학교에서 일제고사를 반대하는 친구들의 명단을 작성하라고 하는 등, 6학년 9반이었던 아이들을 학교에서 구분하려고 하는 행동을 보이고 있다고 하더군요) 영화를 보면서 아까 나왔던 말이 인상적이었어요. 강물에 이상은, 영화에서는 '리상'이라고 했죠. 바다라고 했잖아요. 신영복 선생님이 말씀하셨잖아요. 바다라고 하는 것은 '모든 것을 받아주기 때문에 바다라고 한다'고 말씀하셨었어요. 그래서 '강물의 이상은 바다다'라는 얘기를 들으면서, 인간의 이상은 어떻게 되야하나, 도대체 뭘까 생각해봤습니다. 여전히 그걸 찾아나가야 하는 상황인거 같구요. 그리고 그 인간의 이상을 찾아나가기 위해서 최 선생님도 그렇고 저도 그렇고 교직에서 약간 한 발 물러나 있는 상태인거 같습니다. 지역과, 인종과, 상황과, 경제적인 차이 이런 걸 모두 버리고 모든 사람이 보다 더 평등하게, 모든 것을 함께 나눌 수 있는 그런 걸 추구하는 게 인간의 이상이 되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영화를 봤습니다. 이렇게 멋진 자리 초대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양해훈 : 본론으로 들어가서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더 하겠습니다. 저는 제 영화 취향이 좀 피가 난무하고, 그 비명이 난무하는 영화를 좋아하는 편인데요(웃음) 이 영화를 봤을 때 제가 좋아하는 영화들의 극 대척점에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더 쎈 영화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건 뭐지'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런 순함과 순수함이란 뭘까. 그런 부분에서 제가 이 영화를 좀 지지하게 됐고, 더 좋아하게 된 면이 있거든요. 전 솔직히 감독님이 어떤 자리에서 이 영화를 소개하시면서 '저희 영화 순한 영화에요' 이러실 때 일어나서 '아니에요! 이건 센 영화에요!' 라고 소리치고 싶었던 적이 있는데요. 개인적으로 그런 느낌을 받았구요. 감독님 어떻게 생각하세요.


강미자 : 단순무식. 저 이 영화 약간 그런 영화라고 생각하거든요. 돌아보지 않고 시작해서 끝나잖아요. 주변도 생각안하고. 영화 시작하면 그 단순함이 무식하게 가다 끝나는데 다른 돌아봄도 없고 그래서 그렇게 느끼셨나요. 전 영화가 여전히 순하다고 생각하는 편인데. 순한데(웃음). 어떤 분이 제가 이 영화보고 '니가 생각하는 이상이 순수냐'고 기분 나쁘다는 듯이 얘기 하시더라구요. 근데 저는 영화 시나리오를 보고 좋아했을 때부터 지금 이 순간 까지도 영화에서 순수를 표현하고 싶었던 것도 아니고, 영화도 순수는 아닌거 같아요. 순한데 그 안에 순한 걸 좀 드러낼 수 있는 그게 있다는 그거를 양 감독님이 그렇게 봐 주신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모은영 : 전 영화를 보면서 굉장히 믿음에 찬 영화라고 해야 할까요. 혹은 어떻게 생각하면 고집이 될 수도 있을 것 같구요. 제목 자체도 푸른강은 흘러라가 될수도 있고, 흐른다가 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이 영화는 '흘러라'잖아요. 뭔가 주장하는 영화라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그리고 이 영화에서 순수라고 누군가는 생각할 수 있지만, 누군가는 연변이든 한국이든 너무나 큰 변화 속에 있지만 그 변화가 영화에서는 '결국 그래도 돌아온다'고 하는 믿음을 갖고 계신거 같고. 영화가 그걸 굉장히 끝까지 밀고나간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그런 면에서 쎈 영화라고 할 수도 있는 것 같고. 착하고 선한 사람이 나와서 예쁜 이야기를 하지만, 영화는 큰 주장이 있는 느낌이 들었어요. 여기서 궁금해지는 게 감독님이 주장을 갖고 처음부터 끝까지 밀고갈 수 있고, 옳다고 생각할 수 있는 그런 믿음이라고 해야하나, 신념이 있으신 거 같아요. 그게 어디서 오는 걸까 궁금하기도 했구요.


강미자 : 이미 영화는 보여진거고, 그 영화를 보시고 생각하고, 반응하고, 받아들이는 감정들은 다 다른거겠죠. 저는 돌아가야 한다거나, 돌아올 거라든가 그런 다짐을 영화에서 얘기하고 싶진 않았어요. 전 돌아갈 수 있다고 생각안하구요,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하거든요. 제가 시나리오에서 정말 좋았던 건 주장하고 이런 걸 떠나서 '내가 정말 힘들 때 나를 살게 했던 힘은 뭐였나'였던 거 같아요. 제가 10대, 20대, 30대 지나면서 그런 질문을 가끔 했거든요. 나를 살게 했던 힘이 뭘까. 근데 나보다 좀 더 힘들고, 복잡해지고, 앞으로의 시간을 살아야 하는 학생들도 있고... 저도 비슷하게 겪어나가겠지만 그런 상황에서 사람을 살게 하는 힘이 뭘까, 나한테는 뭐였는데, 그런거였어요. 시나리오가 좋았던 건 그거였어요. 주장, 즉 흘러라 내지는 돌아가야 한다는 거하고는 상관이 없었습니다. 저의 영화는요. 돌아갈 수는 없는거죠. 계속 나아가야 하는데 어떤 힘으로 나아갈 수 있을까. 나도 그렇고 그리고 더 그런 힘들을 가려내기가 어려워지고, 약해지고, 복잡해지는데 뭘 하나를 잡고 가야 한다면 뭐가 될 수 있을까 생각해보는거죠.


모은영 : 궁금함이 더 증폭되는데요. 배경이라고 하는 부분이 어떤 분들은 한국의 80년대 쯤으로 생각할 수도 있을 것 같지만 전 그렇게 생각지는 않는데요. 연변이라고 하는 곳, 한국 밖에 있는 곳이지만 이 장소를 통해서 현재를 돌아볼 수 있는 곳이잖아요. 그 공간을 선택하셨던 이유들이 궁금했습니다.


강미자 : 영화 보면 많이 궁금해 하시는데 제가 멋진 대답을 할 수 없는 게 제가 연변 사회를 보고 고민한 게 아니고, 제 친구가 쓴 시나리오가 너무 좋았던거죠. 그래서 내가 만들어보고 싶었던거고. 그리고 시나리오를 영화로 만드는 게 정해지고 나서 시나리오 어느 부분을 살려서 만들건지 연변도 가보고 그 때부터 시작됐어요. 물론 그 시나리오 쓰신 분은 고민이 있겠죠. 그 시나리오 작업 때문에 연변에 간 건 아니고, 급격하게 변하는 연변 사회를 느끼고 싶어서 연변에서 가서 체류를 하면서 연변을 보고, 연변문학에 실린 작가들의 글도 읽으면서, 그 분이 느낀 걸 시나리오로 구성하신 거거든요. 그분에겐 그게 있었겠죠. 그걸 제가 좀 갖고 온거구요.


양해훈 : 영화 안에서 선생님 두 분이 나오는데 저로서는 놀랄 정도의 캐릭터를 가진 선생님들이었거든요. 저런 선생님들이 존재할까. 거의 뭐 이상적인 선생님의 상처럼 보이는 게 연변을 바라보는 우리 타자의 입장에서 그리니까 저렇게 하는 게 아닐까 했는데, 알고 보면 원작이 있잖아요. 원작가들은 연변에 계신 분들이고. 영화화 되기까지 과정을 말해주세요.


강미자 : 학교 교실 장면은 담배 피우는 설정 제외하고는 시나리오를 거의 다 새로 쓴거죠. 교실장면들, 우돌이, 왕선생님 등 기초상황은 있었지만 씬은 저희가 만들었는데. 소설을 쓰신 량춘식, 김남현 선생님이 연변에서 활동하는 작가세요. 그분들이 현직 고등학교 선생님들인데, 이 분들이 써서 연변문학에 발표했던 작품들을 시나리오 쓰신 분이 시나리오로 재구성하신거고. 그 시나리오를 들고 연변에 찾아가서 연변의 학교와, 학생들과, 선생님들, 살고계신 분들 만나면서 처음에 연변에 갈 때는 연변의 모습을 어떻게 담아낼 것인가 고민했어요. 저희 시나리오를 읽었던 많은 분들이 다큐 같은 영화, 굉장히 사실성의 특징이 강한 영화를 많이 상상하셨는데, 저는 애초부터 그렇게 안 느꼈고. 특히 연변에 가서 보고 실체, 겉모습의 일부를 재현하는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제가 거기서 몇 달을 살면서 그 상황을 어떤 지점을 완전히 재현할 수 있다면 모르겠는데, 애초에 접근자체가 그렇지가 않았고. 그렇게 수정했다면 제가 시나리오에서 좋았던 부분들을 상당히 살리기 힘들었을 것 같아요. 각색해서 다른 시나리오가 나왔거든요. 근데 제가 그 시나리오를 보고 '이건 아니다' 싶더라구요. 그래서 연변에서 본 느낌, 그 에너지만 영화에 많이 불어넣으려고 노력을 했습니다.  



양해훈 : 관객 분들도 궁금한 사항이 많을텐데요. 관객분과 이야기를 해봤으면 좋겠습니다. 혹시 영화 보고 궁금한 점이나 소감 같은 걸 편안하게 말씀해주세요.


관객 1 : 전체적으로 영화 정말 잘 봤구요. 영화 보면서 선생님들이 궁금했어요. 전에 <우리학교>에서도 학생과 선생님들의 관계가 돈독하고 달랐거든요. 이 영화도 그런 분위기가 나더라구요. 저는 그게 특수성이라기보다 조선족이고 재일교포잖아요. 그걸 제 시선으로 봐서 그런건지, 그 상황의 특수성으로 그런 느낌이 나는건지... 지금 우리 현실에서 봤을 때 학교 이야기는 굉장히 영화적이라는 느낌이 들었거든요.


강미자 : 말씀드린 것처럼 교실을 완전히 재현한건 아니었고, 물론 어떤 부분은 그렇구요. 어떤 부분은 빠르게 지나가버린 모습이기도 한 거 같아요. 연변에도 한족이 다니는 학교가 있고 조선족이 다니는 학교로 나눠져 있는데, 조선족 학생들이 비교적 그래요. 칠판에 '이상' 이런 말을 자연스럽게 쓰더라구요. 훈춘지역을 처음 가서 칠판을 보고 좀 놀랐어요. 거기 보면 말을 정확히 재현할 수 없는데, '지금 힘들어도 이상을 향해 어떻게 하자'는 걸 칠판 가득히 적어놨더라구요. 그걸 교무실에서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학생들이 그때그때 자기가 원하는 내용을 적더라구요. '우리에게는 코매디와 티비와 뭐가 있으니 여름방학이 즐겁다' 이런 것도 자연스럽게 써있구요. 그런 모습도 있고 한편으로는 연변에서 고등학교를 다닌다는 것은 학생들이 부모들이 벌어주는 돈으로 '어떻게든 공부해서 좀 사회로 나가고 싶다'는 마음을 다지고 온 학생들이에요. 그렇지 않은 친구들은 다 다른 데로 빠져나갔죠. 고등학교 다니는 학생들은 공부에 대한 집중력이 있죠. 그런 반면에 굉장히 우리나라 드라마 영화 많이 보는데 굉장히 재밌데요. 근데 왕따 같은 것들은 그쪽친구들은 이해가 안된다고 하더라구요. 그런데도 굉장히 빠르게 변하고 있어요.


관객 2(최혜원 선생님) : 저는 영상이 너무 좋았어요. 빨리빨리 지나가는 요즘 영화들, 눈을 사로잡는 자극적인 게 아니라 자연의 색이라던 가 이런 게 영상으로 그리는 시 같이 느껴졌어요. 말도 흐르는 노래처럼 들렸고. 무엇보다 마음을 사로잡은 게 색이었어요. 엄마의 옷, 숙이의 초록색 옷, 오토바이, 푸른 강, 산 이런 것들이 너무 아름다워서 정말 다른 건 모르겠는데 두만강에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구요. 보면서 그런 생각을 했어요. 아까 제목을 말씀하셨는데 흐른다가 아니라 흘러라는 약간 뭔가 안 맞는듯 한 말, 제목을 붙인 이유가 뭘까 라는 생각을 해봤구요. 순한 영화라고 했지만 마냥 순하지 않은 현실이잖아요. 방황하는 청소년의 모습들 이런 걸 보면서 제가 여행다닌 지역 중에 티벳, 라오스의 청년들과 닮아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티벳 같은 경우에는 넘어오지 못한 부모들이 보내준 돈을 갖고 자기 혼자만 히말라야에서 살고 있는 아이들, 라오스는 이제 막 관광지가 되면서 콜라텍이 생기고 물드는 청년들을 봤는데, 보면서 마냥 순수하고 순하지 않다는 생각을 했구요. 특히 마지막 부분에 엄마가 돌아오지 못하고, 숙이가 엄마와 같은 색의 옷을 입고 찾아와서 눈물을 흘리잖아요. 이후에 철이와 숙이의 삶은 어떻게 될까 생각을 했어요. 감독님이 영화를 만들면서 흐르는 감정이라든가, 청소년을 그려내면서 감정의 기복이라든가, 앞으로의 철이와 숙이 인생에 대한 예상을 어떻게 하시는지 궁금해요.


강미자 : 뭐에 초점을 맞춰서 대답을 해야 할까요. 어...

양해훈 : 일단 나중에 어떻게 되는지(웃음)


강미자 : 전 굳이 영화 주인공을 따지면, 철이가 아니라 애초에 시나리오 읽었을 때부터 숙이가 주인공이라고 생각했어요. 그 친구들이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겠는데, 제가 영화에서 좋아하는 장면이 숙이가 백두산에 가잖아요. 철이랑. 근데 철이가 저기 앉아있는데, 가서 철이야 만나서 좋아하는게 아니라 철이를 보고 자기 혼자 산을 올라간단 말이죠. 자기만의 산을 올라가는데, 저는 개인적으로 그 장면을 좋아하거든요. 그 친구들의 삶이 앞으로 어떻게 될진 모르겠지만, 어머니 돌아가신 거처럼. 그 친구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는 또 자기 만의 산을 오르느냐, 아니냐, 느끼느냐 아니냐에 따라 차이가 있을 것 같아요. 저는 그 정도밖에 얘기를 못하겠고. 앞으로 어떻게 된다고 말할 수 있다면 제가 또 다른 삶을 살 수 있겠죠.


관객 2 (최혜원 교사) : 등장인물들을 바라보는 마음이 궁금했었구요. 자기만의 산, 네 오르겠습니다. (웃음)


강미자 : 조금 보태보면 그런 거 같아요. 제가 이거는 어떻게들 느끼셨는지 모르겠는데 저는 살아오면서 기쁨보다는 슬픔에 많이 기대서 살아온 거 같아요. 저라는 사람이. 근데 그 슬픔이 삶에 힘이 되는거죠. 그리움이나 슬픔이나. 언제나 행복해야지, 즐거워야지, 기뻐야지... 삶을 그렇게 추구한 게 아니라 주로 슬프고 아픈 일이 많이 있는데 그런 것들이 저한테는 힘이 됐고, 그런 거에 기대서 사는거죠. 그러면서 어떤 순간의 건강함과 맞물려서 서로 힘이 되는 경험들을 했던 거 같아요. 후천적인거죠. 원체 건강하지 못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슬픔이 건강함을 껴안는다고 해야하나. 진짜 슬프거나 진짜 건강하거나 이런 것들을 온전하게 한 번 몸으로나 마음으로나 느낄 수 있으면, 그런 것들이 조금씩 힘이 돼 가는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을 좀 했었어요. 시나리오 보면서.


관객 3 : 영화 잘 봤구요. 영화 보면서 영어 자막을 조금씩 보게 됐는데, 대사 중에 철이 엄마를 hero라고 표현했거든요. 숙이가 철이의 어머니에게 히어로라고 했는데 그 부분이 어떤 의미에서 표현했는지 궁금했어요.


강미자 : 아, 영어자막 보시는군요. 자막이 좀 문제가 있어서 볼 때마다 안타까웠어요. 원래 대사에 '아, 나의 우상 수연아제' 이런 게 있어요. 근데 그거는 제가 수연이(철이엄마)에게 노란 옷을 입혔던 걸 받아서 나중에 숙이한테 노란 옷을 입히고 싶었던 것과 맥락이 닿는 거 같아요. 두만강에 대한 이야기도 그렇구요. 그런 면에서 히어로라기보다는 내 앞에서 나에게 어떤 걸 보여줬던, 어떤 걸 몸으로 먼저 앞서 간 사람인거죠. 그런 거라고 생각했는데 히어로라고 하니까 좀 이상하네요.


모은영 : 우리의 과거에 관한 향수를 이야기하는 부분도 있는 거 같은데. 근데 그거 보다는 완전히 다른 체제, 변화하는 삶의 모습들 이런 걸 많이 보여준다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이게 완전히 다른 이야기라고 해야할까요. 거기도 여기도 마찬가지로 다 잃어버리고 있는 거고, 그걸 다른 형식의 방식으로 이야기를 했다는 생각을 하구요. 드는 생각이 이곳에 있는 감독들은 청춘을 이야기할 때 키워드가 회색이잖아요. 우울함이라든가. 좌절, 절망 이런 식의 청춘을 풀어가는 데, 이 영화에서는 청춘을 얘기할 때 푸름이라고 하는 부분들이 이제 이상적이기도 했구요. 그게 감독님의 중심을 두는 부분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어요.


양해훈 : 저도 사실은 청춘영화를 만들었는데. 정반대였거든요. 피가 난무하고. 잘 수습하려고 제 얘기 하는거구요. 다음 질문 받겠어요. 아이들도 떠들다가 '질문있습니까' 하면 조용해지네요. (웃음)


관객 4 : 영화 속에서 '강의 이상은 바다다'를 여러 번 강조하신 거 같은데요. 연변학교 학생들이 피씨방 같은 데 빠지거나, 자기네들이 받았던 체제에서 변화된 환경들 속에서 방황하는 모습들이 제가 느끼기에는 조금 설명이 부족하다 싶었어요. 감독님이 그냥 부분적인 것만 보여주지 않았나라는 생각을 했거든요. 집을 나간 아이들이나, 다시 돌아왔을 때의 설명이라든가, 주인공이 갑자기 바이크를 사고 싶다는 욕구를 일으킨 것과, 바이크를 타면서 그동안 숙이에 대한 마음이 처음에 보여줬던 마음과 상관없이 다른 여자친구를 사귄다거나... 이런 것들이 그동안 제가 관객에서 친절히 설명하는 영화를 봐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학생들의 감정의 변화를 너무 제3자적인 입장에서 바라보지 않았나, 관객에게 설명을 하지 않았던 것 같아요.


강미자 : 영화에서 내러티브를 끌고 가는 방식은 굉장히 다양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지금 말씀하신 부분을 고민을 안한 건 아니에요. 근데 그런 식으로 어떤 관계나 감정의 결을 만들고 인간관계를 구축하고 제가 철이면 철이, 숙이면 숙이 이렇게 한 사람의 시점으로 감정을 깊게 들어가 영화를 만들고자 했으면, 제가 그 시나리오에서 봤던, 정말 저에게 중요했던 것들을 담아내기에 그 방식이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처음 시나리오 수정 작업할 때는 말씀하셨던 부분을 염두에 둬서 좀 더 내러티브의 결을 만들고, 관계를 만들고, 에피소드들을 현실과 주인공들의 주관적인 것들을 드러내는 쪽으로 시나리오를 수정하다가, 아 이러면 내가 정말 시나리오에서 표현하고 싶었던 것들이 담아내지 않겠다, 다른 영화가 될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가지 않았어요. 아마 말씀하신 부분들을 제가 영화에서 끌어안으려고 했다면 다른 영화가 됐을 것 같아요. 전 아주 단순함을 드러내는 영화를 만들고 싶었거든요.


관객 5 : 아까 어떤 질문에 대해서 감독님께서 지금 연변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것보다 연변에서 느낀 에너지를 저 영화 속에 담기를 원했다고 말씀하셨는데 어떤 에너지를 느꼈는지.


강미자 : 부정보다는 긍정을, 물론 그걸 조장하는 건 아닌데(웃음) 긍정이 몸이나 생활 속에 드러나는 부분들이 있어요. 이 친구들도 돈과 좋은 옷이 점점 더 중요해지는데, 그런 와중에서 인간과의 관계를 맺을 때나 이런 게 부정보다는 긍정이, 아직은 그게 머리로가 아니라 몸으로 좀 남아있어요. 전 그런 것들이었고. 좀 적절한 표현이 아닐 수도 있는데, 일단 영화가 시작하고 끝나는 그 속에서 실제 연변을 그대로, 다큐적으로 재현하는 게 아니어도 영화가 충족하고 감당할 수 있는 세계를 만들면 될꺼라고 생각했어요. 이 영화 보시고 연변사회에 대한 궁금함과 질문을 많이 하시는데, 저는 그렇습니다. 여기 숙이과 철이가 둘이 자전거를 타잖아요. 집에 가면서. 거기보면 제가 소리지르는 게 들어가 있어요. '웃어~~~~~~~~!!!' 철이와 숙이가 자전거를 타는데 그냥 타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자전거를 어떤 느낌으로 타는지가 중요했어요. 진짜 달려보세요. 이런 데 말고, 고개 돌리면 나무도 있고 물도 있고 이런데서 자전거를 몸으로 타보세요. 몸으로 느끼고 겪어내는 것들이 나를 그렇게(웃게) 만들 때가 있거든요. 제가 그래서 웃으라고 소리 질렀는 데 거리소음에 묻혔어요. 그냥 안 뺐어요. 영화 속에 잘 들으면 나와요. 몸으로 그런 걸 표현하고 싶었어요. 이친구들을.


관객 6 : 감독님께서 중국 연변에 가서 받은 에너지를 표현했다고 했는데, 학생들에게서 관념적이거나 상징적이거나 비유적인 걸 많이 느꼈어요. 왜냐면 제가 영화를 보면서 느낀 게 그거였어요. 푸른강? 자체는 블루하고 우울하고, 영화 제목도 그렇고. 근데 영화는 순수하게 처음부터 끌고 나가지만 아빠 이야기와 엮으면서 어쩔 수 없는 고통이랄까, 되돌릴 수 없는 결과같은 게 밑바탕에 흐른다고 느꼈거든요. 그래서 이상도 그렇고, 바다도 그렇고, 푸른강도 그렇고... 굉장히 상징적이에요. 그래서 과연 감독님이 중국에 갔을 때 학생들한테도 그런 걸 느꼈는지. 제가 중국에서 왔거든요. 강미자 : 아, 아닙니다. 남자주인공 철이가 저희가 백두산 찍으러 갔을 때, 사는 곳에서 백두산이 멀지 않은데 처음 가봤다고 하더라구요. 실제 백두산에 그렇게 많이 가지 않아요. 우리에게 백두산이 동경이고 이상이고 잊어버린 무엇인데, 그 친구들한테는 마음만 먹으면 한 두 세시간 차 타고 가면 갈 수 있거든요. 근데 한 번도 안가봤다는 거에요. 그래서 여기가 그렇게 좋다고, 자기 여자친구하고 나중에 가겠다고 하더라구요. 그니까 백두산이나 두만강 같은 상징들은 그 학생들에게서 따 온 건 아니에요.


관객 6 : 저는 중국에서 공부하고 한국에 유학중인데요, 내가 중고등학교 다닐 때도 이상을 크게 얘기안했거든요. 중국은 80년대부터 시장경제가 시작됐기 때문에 이데올로기 같은 것이 많이 희석됐다고 할 수 있거든요. 영화 속 철이랑 숙이랑 채팅하는 거나, 철이 집이 어려워 보이는데도 컴퓨터를 설치하고 인터넷을 하는 거보면 분명 2005년 전후일 것 같아요. 그리고 철이 어머니가 위장결혼이 아니고 밀항을 통해서 한국에 왔잖아요. 그걸 보면 시간이 꽤 오래 지난 거 같은데요. 두 서사가 시간상에 잘 안맞는 거 같아요. 제 느낌에. 철이랑 숙이랑은 2005년 시점인가, 2000년 이후의 시점이고 아빠 이야기는 그 전인거 같아요. 제가 너무 사실적으로 얘기하는 거 같은데, 어머니가 마지막에는 잡히고 그런 게 나오잖아요. 죽게 돼는. 근데 2005년부터는 한국의 정책이 많이 풀렸어요. 불법체류 문제에 있어서요. 두 서사가 시간 상 엇갈리는 게 아닌가 하는 면도 있고. 그리고 지금 철이 이야기는 순수한 풋풋한 첫사랑 얘긴데, 아빠 얘기는 무거우면서도 인생의 무거움이나 어쩔 수 없음에 대해서 얘기하는 거 같아요.


강미자 : 일단은 수연이 부분 아버지 세대 부분하고 철이 숙이 세대 부분이 시간 상으로 안맞는다는 지적이 맞습니다. 왜냐하면 이 소설들은 이미 2002년에 나온 소설이었고, 이걸 저희가 2008년에 시나리오 작업을 하면서 2002년을 재현하고 있는 게 아니거든요. 이런 시간 상의 문제가 있는데, 저는 애초에 출발부터 그게 시간 상의 문제라고 생각을 안한거죠. 연변사회를 시사적인, 현실적인 문제들을 짚고 들어가려고 했던 게 아니기 때문에 만약 이 시나리오가 연변이 아니라 다른 곳을 배경으로 한다고 하더라도 별로 다르지 않았을 거 같아요. 저희가 중국에서 계속 촬영허가가 안나와서 그럼 한국에서 다 찍어버리자는 말까지 했거든요. 찍으려고 하면 찍을 수 있겠더라구요. 그 얘기는 제가 시나리오에서 중요하게 욕심을 내고 있었던 것이 연변 사회는 아니었던거죠. 그리고 어머니와 철이의 두 이야기의 현실적 시간 차가 있을지 몰라도 어느 시대나 수연부부와 철이, 숙이가 있을 것이고, 앞으로 10년 후에도 있을 것 같아요. 그렇기 때문에 그런 시간 상의 문제를 중요하게 생각안했던거죠. 그리고 그것이 두 개가 둘 중의 하나가 빠지고 나머지 하나로 남는 영화였다면, 그건 그냥 이야기였을 뿐이었을 것 같아요. 저에게는. 철이와 숙이의 연애얘기거나, 아버지와 수연이의 아픈 얘기거나 두 가지가 서로 따로 떨어진 독립적인 이야기였다면 나름대로 이야기가 꾸며지겠지만, 우리가 지금 사는 공간이 얽혀 있기 때문에 그걸 다른 이야기로 분류할 수는 없었어요.


양해훈 : 현실이나 시사적인 얘기를 적나라하게 하는 건 다른 데서도 만들 수 있을 거고, 강미자 감독님은 아마 감성을 표현하고자 한 거 같아요.

강미자 : 저를 보호내지는 지지해주시는 거죠?(웃음) 저는 세 달만에 영화를 보면서 어떨까, 세달 전 그 때와 오늘이... 그리고 좀 두렵더라구요. 내가 만든 영화를 본다는 게. 근데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영화도 굉장히 많고, 소설도 많고, 노래도 많고, 보고 즐길 것들이 굉장히 많잖아요. 제가 만든 영화를 100명이 봐서 굉장히 다 '너무 좋아'하면 좋겠지만, 만날 수 있는 가능성이나 지점이 있는 거 같아요. 여기 모인 분 중에 제 영화와 누군가가 만났다면 서로가 필요해서 만난거라고 생각해요. 그분들과 영화는 서로 필요했던거고, 저는 그게 부정적임보다는 앞으로 나아가는 데 약간의 힘이 될 수 있는 그런 것이 제가 이 영화에 바란 것이고. 이 영화가 저에게 준 것도 그랬고. 영화 한 편 만들어놓고 사람들이 보고 이야기를 하니 참, 제가 앞으로 저한테 다른 영화적인 가능성과 내게 남아있는 시간이라는 것들이 좀 다르게 다가오는 거 같아요.


관객 7 : 연변 사람들이 두만강에 대해 끊임없이 그걸 이상으로 삼고, 두만강을 닮아가고자 하는 모습에 대해서 연변에 가서 보신 감독님의 느낌이 궁금하구요. 영화를 보면서 강한 여자, 강한 모성을 느꼈어요. 학교에서도 여자선생님이 학생들을 찾으러 다니고, 철이 어머니가 떠나실 때 아버지께서 철이를 다독이면서 어머니는 강한 여자라고 하잖아요. 숙이도 어머니를 히어로라고 했구요. 그것도 연변에서 일어나는 일인지 궁금해요.


강미자 : 첫 질문은 두만강은 조선족 중에서도 연배 있으신 분들에게는 비슷한 정서로 남아있는 상징적인 것 같아요. 실제 두만강에 대한 이상 부분은 소설에 나와 있는 부분을 영화적으로 갖고 온거. 두만강이나 백두산이 주는 것은 같은 민족으로 느끼고 그리는 것과 많이 닮아있는 거 같구요. 두 번째는 여성, 모성보다는... 지극정성이라고 했을 때, 저는 어머니가 떠오르거든요. 그런 것과 맞닿아서.


모은영 : 감독님께서 10년 만에 연출 하신 거잖아요. <현빈>에서도 여성에 관한 부분, 정체성을 강하게 얘기하셨던 거 같은데. 그런 부분들도 궁금해요. 여성 감독으로서 주인공 역시 여성으로 생각했다고 하시고. 10년 만에 하신거긴 하지만, 이 영화에도 여성에 관한 부분들이 있지 않을까.


강미자 : 제가 여성성과 관련된 것들을 소리 높여 얘기하자면 일단 부담스럽구요. 제가 10년 전에 16mm로 <현빈>이란 20분짜리를 영화를 만들게 된 게, 일 년동안 제 꿈을 계속 기록했습니다. 영화를 한 편 만들고 싶어서. 전 항상 꿈에 민감한 편이었기 때문에 기록을 했는데. 어느 날 이건 제 실제 경험인데. 저희 아버님이 오래전에 돌아가셨어요. 어머님이 오랫동안 혼자 사셨는데. 제가 그렇게 착한 딸이 아니었던거죠. 만날 술 먹고 밤늦게 들어가고. 근데 어느 날 새벽에 집에 들어갔는데 불이 다 꺼져있어요. 근데 울음소리가 들리는 거예요. 어머니가 혼 자 방안에서 울고 계신거죠. 그 어둠속에서 엄마 혼자 울고 있는데 제가 그 순간 엄마 옆에 가서 누웠어요. 누워서 엄마를 안고 엄마 몸을 계속 쓰다듬어 줬거든요. 근데 아무 말도 안했는데 그 순간 제가 엄마도 한 사람의 여자고, 나의 손짓 때문에 엄마가 위로 받고 있다는 걸 실제로 느낀거죠. 실제 저의 경험과 꿈의 이미지가 만나더라구요. 그걸 갖고 영화를 만들고 싶었고, 그게 여성성,모성과 연관된 부분이었어요. 그게 제 경험에서 나왔던 건데 그런 것들이 알게 모르게 이 영화에 묻어있을 것 같구요. 그리고 숙이가 산에 갈 때 치마를 입고 가잖아요. 그래서 어떤 분들이 그러는거에요. '너는 왜 여자라고 치마를 입혀서 산에 가냐'고. 우리 연출부들도 여자가 산에 갈 때 치마를 입어야 하냐는 거예요. 근데 저는 내가 치마를 입는 게 좋고 내 배우가 치마를 입는 게 보기 좋은거죠. 저는 나이 마흔 될 때 까지는 상가 집에 가든 결혼식에 가든 만날 옷이 티셔츠하고 청바지밖에 없었어요. 근데 제가 마흔이 되면서 뭘 할까 생각 하다가 어느 날 귀를 뚫어버렸어요. 귀에서 귀걸이가 찰랑대는데 기분이 좋더라구요. 그리고 어느 날 인사동에 갔다가 치마들을 세일하길래 우연히 산거에요. 사서 입어보니 치마가 너무 기분이 좋아. 만날 청바지에 티셔츠 입다가 어느 날 검은색 치마를 입으니 보라색 치마를 입고 싶어지고, 보라색 치마를 입으니 분홍색 윗도리를 찾게 되고. 내가 좋아하는 색과 디자인을 찾게 되더라구요. 저한테는 그게 또 저를 느끼는 경험이었죠. 주로 저렴한 소비를 하는 편이긴 한데. 그 전에는 누가 청바지 주면 입었는데, 지금은 제가 스커트를 사는거죠. 전 그걸 잘 몰랐어요. 근데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그게 알게 모르게 엄마하고 연결이 되더라구요. 어느 날 엄마 꿈꾸고 나서 엄마가 그렇게 수박색을 좋아했지, 엄마가 좋아하는 수박색은 어떤거였지 생각하고 있는데 길을 지나가는 데 수박색 치마가 보이더라구요. 그걸 보면서 엄마 생각이 나서 그걸 사는거죠. 비쌌으면 못샀겠죠. 그게 제가 특별히 여성이라기보다, 제 삶에서 제가 여성이고, 어떤 나만의 어떤 경험이나 이런 것들이 제 영화고. 계속 찾아가지는 거 같아요. 저는 그걸 좋아해요. 좋더라구요. 그런 식으로 내가 깨어나고 나아가는 것들이. 제가 얘기하니까 사람들이 다 가네요. 재미없었나봐. 미안합니다. (웃음)


양해훈 : 아이들이어서 장시간 동안 얘기하는게... 저도 어렸을 때 뭐. 질문 하실 분 또 있으세요?


관객 8 : 원작에서 가장 좋았던 부분이 어떤거고, 관객들하고 어떤 부분을 공유하고 싶으신지.


강미자 : 두 번째 질문은 제가 말하기는 어려운 거 같고, 첫 번째 질문은 저는 숙이를 굉장히 사랑했어요. 영화에서. 아직까지도 영화 속 숙이를 보면서 웃고 있는데... 하지만 영화 속에 나오는 모든 인물 중에서는 지영 선생에 대해 애정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을 잘 표현하고 싶었어요. 표현이라는 면에 있어서는 지영 선생 에피소드 상황을 많이 애정을 갖고 촬영했고 인물은 숙이를 좋아했어요.



양해훈 : 영화를 보면서 전진하기에는 어떤 장애물이 많잖아요. 물론 연변도 그렇고. 그걸 우리에게 대입했을 때 정치하는 사이코패스도 많고. 어떤 마음을 갖고 전진을 하려고 해도 장애물이 있는데, 영화 안에도 그런 장애물이 있을 거 같거든요. 건강함 같은 에너지를 가로막는 것들이 영화 안에 표현됐다고 생각하는 데, 그게 어떤 건지 말해주세요. 혼탁함에 빠지는 그런 점들이요.


강미자 : 대신 말씀해주신 거 같아요.(웃음) 너무 많다 그래야 하나. 우리 현재 삶을 규정하는 아주 많은 부분들이 긍정보다는 부정이 더 많잖아요. 그냥 저는 좀 생활적으로 얘기하면 저 아는 사람이 김밥천국에서 일하는데 하루 12시간 일하고 한 달에 두 번 쉬어요. 도착해서 일할 준비하고 12시간 일해야죠, 그거 마무리하고 집에 오면 자기한테 하루 남는 시간이 9시간인데, 왔다 갔다하고 다른 거 없어요. 그냥 먹고 자는 거예요. 그렇게 한 달 30일 중에 28일을 일하는데 그게 완전히 일상이죠. 그런 것이 문제처럼 생겨지지도 않지만. 아주 단순한 옌데 그게 우리 사회의 모습인거 같아요. 아주 정말 작지만. 그래서 제가 게으른 편이라서 신문을 안보고 지냈거든요. 근데 푸른강 끝나고 나서 신문을 구독해서 보고 있습니다. 제가 혼자산지 20년이 넘었는데 신문 구독해서 본건 처음이에요. 만날 비슷비슷한 얘기지하고 덮지 않고 그래도 꼼꼼하겐 아니어도 신문을 열심히 보고 있습니다.


모은영 : 한 얘기의 반복이겠지만, 영화가 그런 힘을 주는 거 같아요. 혼탁함에서도 돌아올 수 있다는 믿음과, 그 힘을 받고 공감한다는 생각을 하는데요. 그 쪽이나 지금 우리 사는 곳이나 정말 얼마나 지금 힘들고 그렇습니까. 우리 삶을 혼탁함으로 만드는 것에 가득 차 있는데 그럼에도 계속 나가야 한다고 하시는데.


강미자 : 제가 좀 더 말씀드리면. 혼탁함에서 벗어나야하고 그런 얘기를 하고 싶지 않았는데. 제가 영화에서 부족했던 면이겠죠. 현실보다 그걸 감싸안을 수 있는 게 뭔지를 보여주고 싶었고. 내가 느낀 걸 표현하고 싶었던 건데. 영화를 보고 영화가 보여주는 구체적인 현실을 많이 얘기들을 하세요. 어쩔 수 없이 제 얘기기도 하지만 좀 더 제가 보여주고자 했던 것과 다른 부분을 많이 보시는가 싶기도 하고... 저는 영화적인 표현이라고 여러 곳에서 해놨는데, 그런 표현보다는 내용을 많이 생각하시고... 그래서 조금 영화를 좀 더 편하게 보셔도 되지 않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모은영 : 약간 의문이 드는 부분이 말씀과 관련해서 한국으로 넘어왔을 때 부분인데요. 영화 안에서 불협화음이라고 느껴지는 부분이기도 했는데요. 극명하게 대조가 되죠. 연변과 한국에서가. 카메라의 움직임 같은 것도. 그 부분이 영화에 반드시 들어가야 했을까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거든요. 영화 안에서 이 부분이 충돌한다는 점이 의미를 만들어내는 충돌이 아니라 다른 식의. 그 부분이 들어가서 과해지지 않았나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강미자 :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한국장면과 연변장면이 만나서 의미를 만들어내지 않지만, 삶을 형성하죠. 저는 그래서 있어야 했던거죠.


양해훈 : 일단 오늘 시간이 다 돼서 대담은 끝마칩니다.


기사: 강민영
녹취: 장일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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