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터데스크 관리자

도움말
닫기
적용하기   첫페이지 만들기

태터데스크 메시지

저장하였습니다.

'인정투쟁'에 해당되는 글 1건

  1. 2009.03.13 폭력은 어떻게 발현되고 인간을 지배하는가?
사용자 삽입 이미지


네오이마주 6차 세미나가 3월 6일 저녁 렉시테크에서 열렸다. 발제자 백건영 편집장을 비롯해 7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세미나에서는 박기형 감독의 <폭력써클>을 중심으로 ‘폭력은 어떻게 발현되고 인간을 지배하는가?’에 대한 토론이 펼쳐졌다. 다음은 세미나 발제문의 일부와 토론 내용이다.


0. 텍스트 선정 배경

오늘날 사람들은 폭력 속으로 가라앉고 그 속에 빠져들고 있다. 폭력은 끝없는 우물과 같다. 수많은 영화들이 폭력 속으로의 추락을 보여주고, 증오의 터널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이러한 폭력에서 벗어날 수 있는가?

폭력 속으로 추락한다는 느낌. 이 말은 근본적으로 사람들은 개인들의 폭력처럼 역사의 폭력도 그것을 무력화시킬 수 있는 역류장치를 만들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벗어난다는 것은 거의 생각할 수 없는 폭력에 사로잡혀 있다는 말이다. 때문에 폭력은 영원토록 재생되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가 폭력의 수인(囚人)이라는 생각과 폭력 없는 세상이라는 이상 사이에서 드러난 세계. 이 세계에서 폭력은 지속적으로 변형되고 재생된다. 여기에서 발생하는 폭력의 이미지 문제, 그러니까 어떤 이미지는 폭력을 보여주면서 폭력을 끔직한 것으로 만들고 다른 이미지는 폭력을 재활용하고 변화시키고 심지어 제동을 걸려고 시도한다.

<용서받지 못한 자>에서 왕년의 살인자 ‘윌리엄 무니’가 다시 총을 잡게 되는 것은, 돈이 필요했던 표면적 이유도 있지만, 그를 용서하기는커녕 녹슨 솜씨마저 과대평가하며 여전히 과거의 명성을 기억하려는 사람들이 빚어낸 폭력의 순환 고리 안에서 빠져나올 수 없음을 스스로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한 가지, 우리가 ‘용서 받지 못한 자’로 해석한 원제 Unforgiven 의 또 다른 의미는 ‘수배가 해제되지 않은 자’이다. 두 해석 사이의 간극. 즉 용서를 받아야 하는 대상으로서의 무니와 그럼에도 수배가 되지 않은 자 무니가 존재한다. 그러나 영화 속 인물들은 용서하지 않고 그에 대한 경계를 늦추지 않는다. 상대가 용서하지 않는데, 그러므로 수배가 해제되지 않은 인물이 어떻게 총을 놓을 수 있다는 말인가?

<폭력써클>을 이번 세미나의 중심텍스트로 선정한 이유는, 폭력이 빚어낸 비극적 결말을 내놓으면서 아이들이 어떻게 폭력 속으로 들어가고 폭력과 하나가 되는지를 가뿐하게 돌파하고 ‘과연 우리가 폭력에서 벗어날 수 있는가’라는 근원적 고민까지 하게 만든다는 데 있다. 영화제작사의 보도 자료에 따르면 <폭력써클>이 <비트> <친구> <말죽거리 잔혹사>를 잇는 영화라고 표현하고 있지만, 나의 생각은 전혀 다르다. 오히려 이 영화는, 폭력에 대한 성찰과 스타일까지 두루 갖춘 김영빈 감독의 <테러리스트>와 <나에게 오라>에 이어지는 좀처럼 보기 드문 스타일리시한 폭력물이라는 생각이다. 박기형 감독의 많지 않은 작품 중에서도 오로지 <폭력써클> 단 한 편으로 텍스트를 한정시킨 이유가 여기에 있다.

본 발제문을 통해 상대의 폭력이 멈추지 않는 상태에서 나의 폭력을 그칠 수 있는가, 라는 문제와 폭력은 어떻게 발현하고 인간을 지해하는가, 과연 인간은 폭력으로부터 빠져나올 수 있는가, 라는 문제를 같이 고민해보고자 한다.





1. 폭력은 어떻게 자신을 세상에 드러내는가?

폭력과 폭력에의 공포를 스타일의 과잉으로 잠재우거나 분출시키려는 박기형 감독의 비범한 연출력이 돋보이는 영화 <폭력써클>의 배경은 91년 봄이다. 노태우가 대통령이 되어 ‘보통사람들의 시대’를 선포하고 스스로 보통대통령이 되기를 자처한지 3년이 지난 때, 세상의 어른들은 범죄와의 전쟁을 치루고 있었으며 나라밖에서는 걸프전이 벌어지던, 그 시대는 본격적으로 이미지의 힘이 세상을 지배하는 시절(TV속 걸프전 장면을 본 아이들은 “오락게임 같다”고 말한다)이었다. 이렇게 과대 포장되거나 왜곡되어 허상이 실재를 압도하는 이미지의 폭력과 마주하기 시작하던 그 시대를 배경으로 영화는 시작된다. 죄수복을 입고 수사관과 마주 앉은 상호와 불과 4주전 모범생이었던 상호 사이에 놓인 간극은 헤아릴 길 없이 크기만 한데, 도대체 이들에게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폭력은 남들에게 알려지기 위한 투쟁과 동일하다. 실재 삶에서 벌어진 폭력은 세상에 얼굴을 드러내려 하지 않는다. 범죄자가 잡히지 않기 위해 도주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그러나 인정받기 위한 투쟁이라면 달라진다. 이 싸움은 폭력을 종결시키지 않는다. 어떤 경우든 폭력의 재생은 일어나기 마련이다. 미리 도피하는 것은 뒤로 돌아오는 것의 원인이 된다.

영화의 주요등장인물인 모범생 상호와 주먹 꽤나 쓰는 재구를 비롯해 경철과 창배, 홍규는 초등학교 또는 중학교 동창지간인 고등학교 1학년생들이다. 이들은 축구를 하다 사소한 일로 시비가 붙어 체육관에서 최초의 폭력을 경험하지만, 이내 그것에서 빠져나온다. 축구도 하고 우정도 다지기 위해 ‘타이거’라는 모임을 만들기로 했기 때문인데, 하지만 폭력으로부터의 탈출을 위해 시작된 모임은 아이들로 하여금 새로운 폭력세계로의 여행의 출발점에 세우는 결과를 낳게 된다. (이것은 마틴 스콜세즈의 <택시 드라이버>에서 트래비스가 월남전이라는 폭력의 세계를 탈출하자마자 뉴욕의 거리에서 새로운 폭력의 세계에 발을 딛는 것에 비유될 수 있다. 즉 폭력에서 빠져나오는 것은 다른 폭력으로 편입됨을 의미한다.) 타이거의 회장 상호가 인근학교의 불량서클인 TNT의 리더 종석의 여자 수희와 가까워졌다는 이유로 이둘 사이의 싸움은 끝 모를 결말을 향해 치닫는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이 모든 사건들이 불과 한 달 사이에 벌어졌다는 점이다. 너무 짧지 않은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폭력은 더 이상 새로운 경험의 대상이 아닐 때, 폭력이 획일적으로 펼쳐질 때, 곧바로 개입되는 결렬을 제시하게 된다.





2. 인간은 어떻게 폭력에 지배당하는가?

축구와 우정이라는 목적과는 달리 양아치와의 싸움에 열중하는 아이들의 행동이 개연성을 획득하는 것도 폭력의 작동원리와 지배방식 하에서라면 가능해진다. 때문에 감독은 배경이 되는 시대상이나 폭력을 통해 자신들을 막아선 장애물을 돌파하려는 아이들이 아닌, 폭력이 지닌 특질 그 자체에 주목하고 있는 것이다. 이로써 영화는 평범했던 아이들이 4주라는 그 짧은 시간 동안 어떻게 폭력 앞에 노출되고 폭력을 받아들이며 그 속에서 비참한 결과를 맞고 있는지를 알려주게 된다. 결국 서사는 지극히 공시적이며, 이들이 축구를 위해 모임을 만들었음에도 축구보다 싸움에 치중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렇다면 폭력의 이미지가 아이들을 지배하는 방식에 대하여 감독은 어떻게 그려내고 있는가.

먼저 마티유 카소비츠의 <증오>를 거론하고 넘어가자. <폭력써클>이 4주간의 기록이라면 <증오>는 하룻밤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는데, 두 영화 모두 사소한 사건으로 시작해 전쟁 상황으로까지 확산되는 과정에 개입한 폭력의 지배적 역할을 묘사 한다는 점에서 상통한다. 빈츠와 상호가 최종 선택을 앞두고 갈등하는 것도, 그것의 단초가 아랍소년 압델의 죽음과 재구의 죽음에서 비롯되었다는 점도 이를 뒷받침해준다.

상호의 친구들이 타이거를 호명하는 것은 단 한차례, 선배의 질문에 “우리 타이거인데요.”가 전부이다. 중국집 액자에서 힌트를 얻은 타이거란 명칭은 남성적이고 용감무쌍함을 상징하며, 아이들의 말대로 그럴 듯하고 뭔가 있어 보이기도 한다. 타이거나 TNT라는 명칭에서 알 수 있듯이 이는 남성성의 과잉을 드러내려는 의도로 보이지만 결국 이미지에 사로잡힌 것에 다름 아니다. 그러하기에 이들은 조직의 이름을 걸고 싸우는 법이 없다. 즉 이들의 싸움은 타이거와 TNT라는 조직 간의 다툼이 아니라는 것이다. 조직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싸움이 아닌, 개인의 싸움. 조직의 이름을 건 싸움이 아니라 각개전투에 가까운 백병전이며, 이러한 싸움은 이미 조직의 명분이나 존재이유를 망각한 채 각자 생존본능에 의거해 치고받을 뿐이다. 이렇듯 명분과 실리를 포기한 채 폭력의 노예가 될 수밖에 없는 인간의 나약함과 폭력의 지긋지긋한 힘을, ‘이미 거기에 있는’ 폭력을, 감독은 두 세력 간의 싸움과 그로인한 세력의 결렬과 개인의 몰락을 통해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3. 인간은 폭력으로부터 빠져나올 수 있는가?

폭력이 격렬하게 나타날수록 개인은 점점 무감각해지면서(자신의 경험을 거부하면서) 멀리 떨어져 스스로를 보호하게 된다. 이는 스스로는 폭력의 주체가 될 수 없다는 환상으로 이끈다. 스크린에 휘몰아치는 폭력으로부터 거리두기가 불가능하지 않은 것은 이 때문이다. 다시 말해 격렬한 폭력이 더해질 수 록 자신을 방어하는 방법을 터득해가는 것이 인간이다.

그러므로 이미지의 폭력이 자연스러워 보일 때, 점진적이거나 단계적 상승의 느낌은 사라지게 된다. 마찬가지로 폭력의 수위가 시간의 경과나 싸움의 횟수와 맞물려 증가하는 것이 아니라 단번에 정점까지 이른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평범했던 아이들이 4주 만에 몰락하는 것을 설명하기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아이들은 점진성의 제거를 통한 폭력과 폭력이 인간을 지배하는 방식에 ‘단번에 익숙해졌기’ 때문이다. 다만, 선의로 만든 축구모임에서 단 한 번의 시합도 하지 못한 채 오로지 싸움의 장으로 불려나가던 이들이 애초부터 폭력에 지배당한 것은 아니었다. 학교도 중요하고 친구도 소중하며 예쁜 여학생과의 관계도 지속시키고 싶은, 적어도 시작은 남성으로서의 소박한 존재증명을 위함일 뿐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상대의 폭력이 도를 넘고 방어의 한계를 느끼면서 이들은 점차로 폭력에 사로잡히게 되며, 1:1의 싸움에서 집단싸움으로, 맨주먹에서 무기를 손에 쥐는 등 폭력의 광기가 아이들을 지배할 때, 과연 이들은 한없는 나락으로 추락하고 마는 것이다.

폭력이 10대들의 우정을 희롱하고 잠식해가는 동안, 상호가 폭력에 의해 사로잡힌 주체로 변해가는 동안, 단조로운 내러티브에 노출된 캐릭터들 이마위로 땀방울이 흐르고 피가 솟구치게 만들면서 비극적 결과와 순수한 동기의 와해를 감독이 방치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영화를 구성하고 풀어가는 기법을 충분히 터득한 흔적이 발견되는 것도 이 지점이다. 이를테면, 평범한 인물들이 폭력적으로 변해가는 상황은 스토리구조로도 충분히 풀어낼 수 있겠으나, 폭력이 인물들을 변질시켜가는 방법에 대한 영화적 구성은 좀처럼 탄탄하고 세밀한 연출력이 아니고서는 쉽게 묘사해내기 힘들기 때문이다. 그러하기에 학생들의 폭력서사라는 소재의 진부함을 이겨낸 형식미만으로도 충분히 재론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다.

<폭력써클>에 드러난 폭력은 돌이킬 수 없는, 기성세대와 사회제도에 의지할 수 없고 의지할 의도조차 보이지 않는 아이들의 추락 속에서 마음껏 발현되고 있다. 그렇다고 그들이 폭력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자 하는 노력을 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아이들은 폭력 속으로 더욱 침잠해간다. 폭력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은 곧 ‘타이거’의 탈퇴와 해체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박기형 감독이 영화 속 폭력을 집단전이 아닌 백병전 형태로 그려내면서도 이들을 끝까지 ‘타이거’라는 그룹범주 속에 묶어두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결국 그들을 불러낼만한 안식처가 존재하지 않는 한, 하다못해 거짓말 같은 화목한 가정을 만들어내지 않는 한, 그보다 근본적인 정의가 구현되지 않는 한 아이들은 폭력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평화보다 정의가 우선되어야 하는 이유, 정의 없이 일시적으로 찾아온 (거짓)평화가 폭력으로부터 안전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4. 남겨진 질문

학원폭력물을 다룬 이전의 영화들에 사용된 폭력들이 노스탤지어를 불러일으키거나 폭압의 시대를 상징하는 서브텍스트로 기능하고 있었다면, <폭력써클>의 폭력은 주체적인 모습을 띄고 있다. 지극히 평범한 아이들이 폭력에 노출됨에 따라 그 속으로 빠져들고 기어이 빠져나오지 못하는 과정 동안 폭력은 아이들을 서서히 지배하기 이르는데, <폭력써클>이 다른 영화와의 차별되는 지점이다. 보다 세련된 폭력을 보여주는 다른 영화와 비교해 원초적이고 다듬어지지 않은 싸움에 불과한 폭력으로 가득함에도 리얼리티가 넘치는 것은, 인물들을 사로잡은 폭력의 본질을 파악하고 이를 주체적 위치로 작동시킨 박기형 감독의 연출 덕분이다.

<폭력써클>은 결말에 이르러서도 상호와 그의 친구들의 선택에 대한 입장을 표명하지 않는다. 그들의 행동을 옳고 그름의 문제로 재단하는 것이 아니라 폭력의 순환 고리를 제거하기 위해, 폭력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위해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라는 질문을 남겨놓고 있을 따름이다. 그렇다면 인간은 폭력의 굴레에서 영원히 벗어날 수 없는가?

법은 악당이 변하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들이 무기를 버리지 않았기 때문에, 사람들이 과거의 악행을 용서하지 않는 이상 그들이 무기를 버릴 수 없을 것이기 때문에 그들은 악당인 것이다. <용서받지 못한 자>의 윌리엄 무니는 말한다. “나는 평범한 사람이다. 다른 사람들과 다르지 않다” 그러나 누가 그 말을 믿을 것인가? 이것이 폭력이 인간을 지배하는 하나의 방법이다.


이번 세미나에서 발제자인 백건영 편집장은 <폭력써클>의 실질적 주인공은 상호와 그의 친구들이 아니라 ‘폭력’ 그 자체이며 이로써 유사 학원폭력물과의 차별성을 획득한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스펙터클한 효과를 배제한 날것의 부딪힘을 통해서 극단의 리얼리티를 보장받을 수 있었다고 말한다. 몇 번을 보아도 폭력의 둔감효과는커녕 더욱 생생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는 것이다. 한편 ‘폭력은 폭력에 의해서만’ 없앨 수 있다는 르네 지라르의 견해에 따라, (폭력은 피할 길이 없고 한 번 시작된 폭력은 확대 재생산되기 마련이데, 폭력에의 욕구를 충족해주기 위해 폭력을 허락해주되 확대를 막는 장치가 ‘희생제의’라는 점에서) 재구의 죽음과 희생양의 상관관계를 논의해보자고 제안하였다. 이번 세미나 참석자들 저마다 의미 있는 의견을 내놓았지만, 지면 상 모두 싣지 못하고 핵심만 요약한다. 다음은 참석자들의 의견이다.



김시광 씨는 재구라는 캐릭터가 당초 타이거의 조직화를 매개한 인물이라는 점과 그의 죽음이 전쟁의 단초가 된다는 점에서 희생양이라고 볼 수도 있다고 말하였다. 또한 영화의 시작 원을 그려놓고 싸우던 아이들이 금 밖으로 나가는 순간, 즉 써클을 조직하고 싸움에 뛰어든 순간 폭력의 시스템이 작동하기 시작했으며 재구의 죽음은 비극적 결말을 위한 장치로 볼 수 있다고 하였다. 한편 아이들의 폭력 행위가 존재증명으로 보인다면서, 박기형의 전작 <여고괴담>과 <아카시아>에서 인물의 행동양식 역시 존재증명으로 볼 수 있다고 밝혔다.

최용진 씨는 <폭력써클>이 실재 세계에서 벌어지는 청소년의 폭력을 세밀하게 그려냈다고 운을 떼면서, 폭력에 대처하는 방식으로의 집단화는 그 시절 아이들에게 필연적이었다고 말한다. 즉 폭력의 공포로부터 자신을 지키는 방식으로 조직을 만들어 세력화를 꿈꿨다는 것인데, 그런 점에서 영화가 보여주는 폭력의 방식 역시 판타지와 거리를 두려는 수단으로 리얼리티에 치중한 게 아니냐고 말했다. 당초 이 영화를 너무 힘들게 보았고 볼 때마다 일주일간 악몽을 꾸었을 정도로 자신에겐 힘든 영화라고 고백하였지만, 근래 보기 드물게 빼어난 영화라는 점에는 기꺼이 동의하였다.

장진실 씨는 영화의 시작부터 아이들이 검은 옷에 검은 넥타이를 맨 교복을 입고 나와 죽음을 예감했다면서, 귀에 착착 감기는 음악이 영화만큼이나 좋았다고 밝혔다.

박정숙 씨는 학원물이고 아이들의 폭력이 등장하는 영화라고 해서 그저 그런 영화가 아닐까 싶었지만 막상 보고나니 상당히 잘 만든 영화로 느껴졌다고 말하면서, 아이들의 싸움이 따지고 보면 '인정투쟁'의 한 방편으로 보인다고 하였는데, 덧붙여 결국 영화 제목인 폭력 ‘써클’에서 circle이 갖는 중층적 의미가 폭력의 순환고리와 잘 맞아떨어짐을 알 수 있었다고 하였다.


신태균 씨는 영화에서 특히 주목한 캐릭터로 김혜성이 연기한 ‘개깡’을 들었는데, 왜소한 체구에 혈기가 앞서지만 정작 싸움은 잘 못하고 그럼에도 짱의 힘을 믿고 큰소리치는 아이들이 실재 학교에도 한 둘은 꼭 있었다고 말했다. 한편 재구는 아버지의 폭력을 증오하며 자랐으나 결국엔 그 자신도 폭력적인 인물이 되었기에 폭력의 피해자이면서 가해자로 볼 수 있다고 하였고, 피가 피를 부르고 결국 피로써 마무리 짓게 되는 폭력의 순환 고리를 가장 극적으로 체화해내는 인물로서 재구를 규정지었다.


댓글을 달아 주세요

BLOG main image
네오이마주(neoimages)와 영화 깊게 읽기
영화 비평 매거진 '네오이마주'의 공식블로그입니다. 더 많은 글은 http://neoimages.co.kr 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by woodyh98

카테고리

분류 전체보기 (521)
필진 리뷰 (260)
필진 칼럼 (149)
사람과 사람들 (55)
문화와 세상 엿보기 (10)
그리고... (41)

달력

«   2019/11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 3,158,689
  • 53

네오이마주(neoimages)와 영화 깊게 읽기

woodyh98's Blog is powered by Tattertools.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