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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영화, 여성 좀 그만 괴롭혀!

필진 리뷰 2007.11.05 00:38 Posted by woodyh98
  여성을 가학으로 몰아가는 남성 판타지


최근에 나는 많은 편수의 한국 영화를 보지 못했다. 아니, 못 본게 아니라 볼 영화가 없어서 안본 것이지만 최근에 본 <행복>과 <엠>은 정말 형편없었다. 이 영화들을 비판하는데에는 다른 어떠한 관련 지식이나 거창한 수식이 필요없이 그냥 영화적으로 비판하면 된다. 왜 자꾸 말도 안되는 영화들을 글로써 포장하려고 드나? 형편없는 영화를 말이 되게 하기 위해 그 사람은 자꾸만 거짓말을 하거나 말들을 지어낸다. 이것은 그 사람의 영화보기에도 발전을 저해할 뿐만 아니라 비평가로써의 자격을 제대로 가추지 못하는 것에서 오는 안타까움이라는 말 밖에는 달리 할 말이 없다.

특히 이 두 영화가 불편했던 이유는 상업적, 형식적인 과장된 포장에 있어서 그것을 사랑이라는 이름하에 여성을 남성적 판타지의 영역 안에 봉인해 버림으로써 자신의 의도를 정당화화려는 영화적 제스추어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나는 이 영화들에게서 적지 않은 실망과 당혹감을 받았다. 이것이 <행복>에서는 서사적으로, <엠>은 작가적 목적 자체가 결여된 것에서 비롯되는데 우선 <행복>에 짧은 첨언을 해보자. 나는 이미 이 영화에 대해 비교적 긴글을 썼으며, 그 안에 이 영화에 대해 할 수 있는 얘기는 모두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허진호가 서사를 진행시키는데 있어서 관객이 그것을 알아 차리지 못하도록 교묘히 짜놓은 간교의 기술에 대해 보다 핵심적인 설명이 필요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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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행복>을 보면서 가장 섬뜩했던 순간은 영수가 은희의 유골을 뿌리고 그들이 살던 시골집에서 영수가 참회(?)의 눈물을 흘리며 마치 속죄의 의미로 은희의 사진을 부여잡고 대성통곡하는 장면이다. 이 장면이 불편한 것은 그저 장면에서 드러나는 센티멘탈리즘이 아니라, 영수가 마지막 요양원으로 바로 들어가지 않고 왜 그전에 그들이 살던 집을 거친 후에 비로소 요양원으로 들어가는가? 라는 점에 있다. 그때 영수 돌아온 그 집은 1년전 그가 떠나기 직전 상태 그대로 유지되어 있다.

이것은 마치 은희가 병원에 입원하기 바로 전까지에도 혼자 그 집에서 생활했을 것이라는 추측을 불러 일으킨다. 다시 말해서 모두가 의아해 하는, 영수가 다시 서울로 돌아가 마치 단죄를 받듯이 철저하게 망가져가는 모습을 노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불편한 게 아니라, 영수가 그러는 동안 생략된 은희의 서사는 마치 시골의 단둘이 행복했던 그 집을 죽기 직전 끝까지 영수가 돌아오기를 간절히 기다리며 그 둘만의 공간을 홀로 지키고 있었을 거라는 잉여를 만들어 내는 순간, 영화가 굉장히 섬뜩해지는 동시에 역겨워지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그것을 확인한 후에 비로소 요양원으로 들어가는 영수를 보여주는 씬의 배치는, 남성의 판타지 안에 여성을 지나치게 도구화시켜버리고 그것을 정당화하기 위해 요양원에 돌아가는 영수의 모습으로 끝내버림으로써 판타지가 실제로 전이하기 이전에 그 세계 자체를 아예 완전히 봉인시켜버리는 굉장히 나쁜 결론을 만들어 낸다. 이런 점에서 보자면 <행복>은 올해 최악의 한국 영화 중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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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대해서 <엠>은 애초부터 영화적 목적 자체가 결여된 영화이다. 다른 사람들이 이 영화를 좋아하는 것을 막을 생각이 없지만 이 영화를 보고 굉장하다, 영화란 매체에 입각한 영화다, 이명세는 대가이다. 라고 말할때 나는 속된 말로 식겁한다. 이것은 영화에 대한 취향이나 바라보는 시각이 다르다는 것과는 전혀 다른 얘기이다. <씨네 21>의 김혜리 기자도 지적하였지만 <엠>을 비판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이야기가 없는 것이 아니라 그 이야기가 너무 뻔하다는 것이 문제이다. 이야기를 묻어버리는 이미지의 과잉, 이건 과잉이 아니라 과시한다. 라는 게 맞다.

어떻게 해서든 현란한 영상으로 영화를 채워 넣으려는 과욕, 그리고 그것을 흥이나듯 자랑하는 이명세를 바라보아야 하는 우리의 민망함, 그 민망함을 무마시키기 위해 한다는 얘기가 또 결국은 그 고색창연한 첫사랑에 대한 사연, 여기에는 <행복>과 마찬가지로 남성의 판타지를 유지시키는 방법으로 반드시 여성의 죽음을 거쳐야만 한다는 일종의 가학이 존재하지만 <엠>은 그 보다 더 나아가 한국 남자들이 갖는 첫사랑에 대한 철저한 환상, 자기 연민을 유치함으로 오히려 드러내 놓고 보여줄 때 자신의 영화 안에서 이야기만으로 풀어낼 수 없는, 스스로 창조해낸 그 세계가 실제적 세계라는 믿음을 관객에게 제시하지도 못하는 감독의 무능을 감추려는 안쓰러움이 존재한다.

이 영화에서 꿈과 현실이 경계가 불분명하다라는 것은 정확한 논점이 아니며, 그렇게 될 수도 없다. 이 영화 안의 세계 자체가 아무런 생기도 없는데 이런 논쟁이 가당키나 한가? 당신은 정말 <엠>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그 세계 안에 살아있는 인물들이라고 느껴지는가? 또 그들의 삶이 실제라고 믿어지는가? 그냥 스타들의 육체만 가지고 와서 소리지르고 과장된 제스추어를 한다고 그것에 없던 감정이 생기나?

그렇지 않으면 영화에서 무엇하러 배우들을 데리고 와서 연기를 시키고, 또한 그들의 연기를 무엇때문에 우리는 보는가. 말 그대로 다 그것이 관객으로 하여금 영화라는 세계 안에 몰입시키기 위해 이제껏 영화라는 매체가 만들어 낸 역사가 아닌가. 왜 이명세는 영화가 만들어 온 역사를 부정하려고 드는가. <엠>이 영화적이라고 말하는 사람들한테 나는 뭐라고 답해 줘야 하나. 나는 지금 논쟁을 하자는 것이 아니다. (앞서 말했듯이)그저 안타까울 따름이다.

이 두 영화는 영화 자체로도 나쁘지만 그것이 어떤 남성의 판타지를 작용시키고 그것을 유지시키기 위해 여성을 도구화하고 영화적으로 과장한다는 점은 몹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물론 아예 서사의 기승전결을 포개놓은 곽경택의 <사랑>을 거론한다는 것은 구차한 일이다. 여기에선 (당연히)여성은 죽고 그것에 더해 남자도 기꺼이 그 길을 택한다. 영화에서 주진모의 마지막 제스추어와 그 순간을 붙잡아 두려는 곽경택의 프리즈 프레임, "이 환상에서 깨져버릴 바에는 차라리 죽음을 선택하겠다."는 남자의 저 처절한 몸부림. 이것을 영화 바깥에서 보면 마치 너도 죽고, 나도 죽는 거의 한국 영화의 자멸을 보는 듯 하다.

물론 최근 한국 영화가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정기적으로 작품을 발표하는, 영화계에 중심에 있는 중견감독들의 신작들이 하나같이 전작에 비해 미학적으로 한발짝도 나아가지도 못하고 더군다나 같은 얘기를 비슷하게 변주해 나간다는 점은 관객의 한사람으로 거의 절망적이라 할 만하다. 영화를 만드는 사람의 입장에서 더이상 할 얘기가 없다면 나 역시도 그에 대해 뭐라 할 말은 없지만, 이것이 관객을 현혹시키고 또한 그것을 소비하게 만드는 하나의 방편으로 이용한 것이라면 이제 더이상 그들의 새로운 영화를 볼 일은 아마 없을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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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ddd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런걸 글이라고..ㅉㅉㅉ

    2007.11.05 14:26
  2. ddd2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렇게 따진다면 온 세상은 남성을 도구화한 영화로 가득차 있습니다. 남성이란 이유로 그냥 당연시 되는 것들..너무 많지 않습니까.

    2007.11.05 15:33
  3. ddd3  수정/삭제  댓글쓰기

    어휴.....................................ㅜㅜ
    너무나 소중한 글입니다. 왜 아직 우리 남성 감독들은 케케묵은 여관방 감수성에서 나오지 못하고 있는지.. 답답할 따름이에요. 지금 세상이 어떤 세상인데. 심지어 새로운 남성성 모델이라고 매스컴이 그렇게 떠들어대는 강동원이 M에서 사용되는 방식만 봐도 한국 영화계는 여전히 답보중이라는게 아이러니하게 드러나네요. 글 잘 읽었습니다. 너무 답답해요..

    2007.11.05 18:00
  4. hdfkg,d  수정/삭제  댓글쓰기

    M에대해선 할 말씀이 없으셔야 할 듯....중요한걸 이해하지도 못하고 글을 쓰다니...ㅠㅠ M에서 강조하고 있는것만 빠뜨리고 얘기를 하고 계시니 저야말로 답답하네요...ㅠㅠ

    2007.11.05 22:18
  5. 흠..  수정/삭제  댓글쓰기

    글에서 언급된 영화를 모두 보지 않은터라 내용에 대해서는 말씀드릴 게 없네요..ㅎㅎ 다만 영화를 너무 여성적인 시각으로만 바라보셔서 많은 남성분들이 불만을 토로하실 것같은 느낌이 듭니다. 별거가지고 다 따진다고 하는 분들도 분명히 계실 것 같지만 영화든 무엇이든간에 다양한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어야한다고 생각하기에 저는 맘에 드네요~
    다만 전체적으로 글이 너무 딱딱하고 어려워서 쉽게 읽히지는 않는군요. 그래서인지 우디님에게 그 영화가 왜그리도 끔찍했는지 공감하기가 힘듭니다. 아..역시 영화를 보지 않아서겠죠?^^;; 아무튼 잘 읽고 갑니다~좋은 글 많이 쓰세요~

    2007.11.06 01:11
    • Favicon of https://neoimages.tistory.com BlogIcon woodyh98  수정/삭제

      제가 쓴 글이 아니지만 대답을 드리자면요, 남성적 시선에 갖힌 판타지에 대한 문제제기를 류태희 필지가 제기한 것이지요. 또 두 영화 다 전작과 미학적으로 발전한 것이 없지 않느냐에 대한 우려이기도 하고요. 말씀하신 대로 다양한 시각 중 하나라고 생각하시면 될 것 같네요.

      2007.11.06 03:03 신고
  6. 쩝.  수정/삭제  댓글쓰기

    어딜가도 패미가 문제구만. 왜 사람과 사람의 일로 보지 않고 남자와 여자로 양분해서 세상을 보지? 이게 흔히 말하는 여자들의 패거리 문화인가? 주인공의 성별이 서로 바뀌었다면 그건 남자에 대한 폭력인가? 편견에 사로잡힌 인간이 얼마나 비논리적인가를 보여주는 글.. 페미들은 정말 지겨워 페미야 말로 남녀차별의 원흉이지.

    2007.11.06 01:18
  7. ddd4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 여자라서 공감가고 남자들은 공감이 안가는가보군요. 흠님 댓글읽고 써봅니다. 이 글이 너무 여성적인 시각으로 본다라.. 단지, 영화에서 너무 남성의 판타지만 강조한다는 생각을 쓰는 것만으로 시선이 여성적인건가..? 그것이 패미라는건가? 이게 편견인가? -_-; 나 참.

    2007.11.06 01:21
  8. 쩝.  수정/삭제  댓글쓰기

    마치 이글에 반대하는 의견은 남자라서 그렇다는 원천봉쇄를 하고 있네요. 남성적인 판타지? 이 영화 어떤 부분이 남성적인 판타지인지? 자기를 지고지순으로 사랑하고 기다려주는 여자가 있다는게 남성적인 판타지인가? 만약 지고지순하게 기다려주는 남자였다면 이건 여성적인 판탄지라고 욕할라나? 그냥 자기가 기분나쁘면.. 자기랑 비슷한 사람이면, 자기랑 같은 성이면 즉 손해좀 보는것 같으면 상대성의 판타지이구만.. 그걸 모르고 꼭 남성과 여성으로 이분해서 보는것 그게 페미. 사람과 사람의 일로 보시오.

    2007.11.06 01:38
  9. Kirk  수정/삭제  댓글쓰기

    죄송한데 각종 드라마나 영화의 단골 소재로 쓰이는 신데렐라 스토리는 여성적인 판타지죠? 쓰레기같은 여성적 판타지에 대해서 문제의식을 가지고 비판할 의향은 없는지 궁금합니다. 어떤 가치관과 비판의식을 갖든 그건 개인의 자유입니다. 다만, 편협하고 편향적인 시선으로 어느 한쪽만의 일방적인 문제로 치부하고 이야기를 풀어나간다면 거기서부터 공감을 얻기가 힘듭니다.

    2007.11.06 07:27
  10. 관객  수정/삭제  댓글쓰기

    둘 다 나름 재밌게 본 관객으로서 다소 불쾌하네요. 물론 전 여자.. ㅎㅎ 이 글 쓰신 분은 아마도 여자분이시겠죠?? 이 글은, 같은 여자로 하여금 불쾌감과 수치심을 느끼게 하는 글입니다. 참으로 답답하네요.. 왜 세상을 꼭 남성과 여성으로 나누어서 보시는 건가요?? 그리고 <행복>에서.. 글쎄요.. 전 은희가 그 집에서 혼자 계속 살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지 않던데요?? 제가 영화를 잘못 본 건가요?? 전, 은희가 그 뒤로 어떻게 살았을까.. 아마도 희망원에 다시 들어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그리고 그 집에서 살았던들 그게 무슨 대순가요? 여자, 남자를 떠나서, 사랑하는 사람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것, 단지 그것뿐인데.. 부디 '여성'의 시각에서 벗어나시길 바랍니다. '여성'이 아닌 '우리'로서 공생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할 때 비로소 남성으로부터도, 또한 같은 여성으로부터도 진정으로 인정 받는 패미니스트가 될 수 있을 것 같네요.

    2007.11.06 09:52
    • Favicon of https://neoimages.tistory.com BlogIcon woodyh98  수정/삭제

      이 글의 필자는 남자입니다. 페미니스트도 아니고요. 필자가 비판을 하는 건 소재나 주제가 아니라 감독이 영화 안에서 여성을 가둬두기 위하 파놓은 형식들이랍니다. 오해 없으시기 바랍니다.

      2007.11.06 20:00 신고
  11. 뭐라는거야  수정/삭제  댓글쓰기

    어떤 영화의 소재나 주제를 가지고 딴지건다는게 말이 되는가?
    어떤 소설의 소재나 주제를 가지고 딴지건다는게 말이 되는가?
    수많은 예술이나 과학 들의 소재나 주제를 가지고 따지는 건 종교주의자들과 님같은 페미들이다.
    예술은 있는 그대로 봐주면 되는 것이다. 거기에서 명작도 있고 졸작도 있다. 하지만 아무도 당신처럼 소재나 주제를 가지고 비평하지 않는다. 그 자체가 예술의 원동력이기 때문이다.

    2007.11.06 10:25

[행복] 남겨진 자의 고백성사

필진 리뷰 2007.10.20 16:54 Posted by woodyh98

허진호 영화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인물들은 아픈 사람들이다. <8월의 크리스마스>에서의 정원은 시한부 선고를 받은 인물이고, 세번째 작품인 <외출>역시 주인공들의 배우자가 교통사고로 병상에 누워 있다. 이번 <행복>에서는 애초부터 주인공들이 병에 걸렸음을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하지만 겉으로 들어난 외적인 '병'보다 허진호의 영화 속 인물들은 항상 '사랑'에 아파하고 시름한다. 짧지만 강렬한 사랑을 하고 난 이후의 이별, 그 상처속에서 성장하는 인물들. 그가 그리는 주인공들의 모습이다. <행복>에서도 예외없이 '사랑'에 아파하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얼마 남지 않은 생에서 선물처럼 찾아온 남자로 인해 행복해하는 은희. 하지만 다시 그를 떠나 보내야함으로 아파한다. 그 남자, 영수. 그는 과거에 사랑했던 사람 수연과 새로 자신에게 찾아온 사람 은희와의 미묘한 갈등 속에서 자신이 놓여있는 현실의 간격이 얼마나 큰 것인가에 대해 고민한다. 그래서 그는 매번 자신이 하고 있는 '사랑'을 난도질하는 인물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당연히 '사랑'에 아파할 수밖에 없다. 지고지순히 영수를 사랑했던 은희는 그녀가 필연적으로 '죽음'을 맞이할 것임을 알면서도 너무나 홀연히 생을 떠나보낸다. 그러므로 남겨진 자, 영수는 자신의 과오에 대해서 반성할 수 밖에 없다. 그리곤 지나온 길을 돌아 은희를 처음 만났던 '희망의 집'으로 귀환하는 것이다. 영화가 끝나고 난 이후 얘기는 남겨진 자의 고백성사이다. 우리는 왜 그가 고백성사를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궁금하기 때문에 돌아간 필름을 되돌리고 되돌려야 한다. <행복>은 되돌려진 필름이 다시 돌아가는 것에 대한 기록이다. 거기에는 우리 인생에서 필연코 찾아오는 죽음과 성장이라는 고개가 있음을 알게 된다.

죽음을 맞이하는 방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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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은 '삶'과 정확히 그 지점을 대립할 수 없을만큼 갑작스럽게 다가온다. '희망의 집'은 '죽음'을 순응적으로 기다리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공간이라는 점에서 허진호의 전작 <외출>에서 등장했던 '병원'이라는 공간과는 많은 차이를 보인다. 오히려 자연의 내음새가 살아있는 '희망의 집'은 영수가 사랑과 명예에 실패했던 인공적인 '도시'보다 사람 사는 숨결이 느껴지는 공간이다. 이 아이러니는 또 다른 느낌을 창조해 내는데, 도시에 살아가는 사람들은 '죽음'을 기다리지 않는다. 그래서 누가 죽거나 그런 일이 생기면 갑작스러울 수 밖에 없다. 하지만 ‘희망의 집’에 사는 사람들은 ‘죽음’에 대해서 담담하다. 일례로 <봄날은 간다>에서 상우의 아버지로 출연했던 박인환이 연기한 석구의 죽음에 대해서 요양원 사람들이 받아들이는 모습은 지극히 일상적이다. 오히려 그것을 직접 목격한 도시에서 온 남자 ‘영수’만이 충격에 휩싸인다. 사람이 ‘죽음’을 두려움 없이 받아들이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난과 아픔을 겪어야 하는지 허진호는 말하고 있는 것이다. 고난과 아픔을 초월해서 ‘죽음’을 자연스레 순응하기까지를 말이다. 그러므로 그의 영화 속 주인공들은 성장하고 또 성장해야 한다. ‘삶’을 살아가면서 ‘죽음’을 기다리는 사람들의 이야기이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진실한 사랑 앞에 눈먼 자

영수는 자신의 간호를 위해서 스스로의 몸을 희생하는 은희를 이해하지 못하고 떠난다. 매일같이 죽음을 조용히 받아들이는 그녀가 지겨워졌거나, 요양원에서 함께 생활했던 석구처럼 자기 앞에서 죽을까봐 겁이 났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은희를 떠나서도 그는 자유롭지 못하다. 오히려 이것도 인생일까 할 정도의 지긋지긋한 삶이 그 주변에 거미줄처럼 달라붙어 있을 뿐이다. 가장 행복했던 순간. 은희와의 사랑, 그 진실한 사랑 앞에서 그것을 버리고 떠나온 자, 영수는 그러므로 눈먼 자이다. 사랑 앞에 눈먼 자, 그는 끊임없이 자신의 과오에 대해서 반성해야만 한다. 사랑을 버린 자 곁에 이제 아무도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홀로 남겨진 자의 고백성사는 그래서 더욱 애뜻하고 소음으로 가득 찬 도시에서 무한히 속삭이는 자연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떠나야 함을 ‘사랑’을 버린 자들에게 종용하는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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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의 방법론에 관한 이야기

필진 리뷰 2007.10.20 16:52 Posted by woodyh98
시내 큰 서점에서 책을 둘러보고 있는데 한 남자가 다가와 내가 보고있는 책 위에 얇은 종이 한 장을 얹어두고 서둘러 지나간다. 지하철에서 흔히 어떤 사람들이 나누어주는 손바닥만한 종이쪽지다. 광고인 줄 알고 버리려다가 문득 제목이 눈길을 잡길래, 훑어본다.

행복하게 사는 방법 몇 가지

(1) 6:21, 12:47, 7:30 식사 사이 물 외 아무것도 먹지 말고 보신탕, 술, 차, 파랑약 먹지 말 것
(2) 10:45, 4:00 산속 샘물 마시고 앉아 쉴것
(3) 3~4 냉이, 칡4취, 9개암 밤 복숭아 다래 딸 것
(4) 검정, 파랑, 회색 옷 입지 말 것
(5) 여자는 항상 치마 입을 것 <짧은치마 입은 여자가 더 예쁨>
(6) 귀걸이, 눈썹 화장 하지 말고 개 기르지 말고 좌측통행, 물병 휴대, 산에 쓰레기 버리지 말 것
....

이 외에도 몇 가지가 더 있고 뒷장에는 동서고금의 금언들이 적혀 있는데, 나는 한편으론 웃음이, 한편으론 경탄이 흘러나와 가방에 담아가지고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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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사람들은 행복하게 살고 싶어 한다. '행복하기 위해 산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지만, 아주 솔직히 말하자면, 사는 것을 스스로 결정할 수 없기 때문에, 어차피 살기로 결정된 것이라면 불행하기 보다는 행복한 편이 좋다는 말이 더 맞을 것이다. 어느 쪽이든 '행복'을 마다할 사람은 없다.

저 어이없는 유인물이 내게 얼마간의 경탄을 불러일으킨 이유는, 누구나 행복하게 살고 싶어하지만 사실 또렷한 방법론이 있느냐 하면 (대부분의 사람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그 방법론이 무엇이든 간에, 그리고 저 유인물의 몇 가지 지침들처럼 헛웃음이 비져나오는 것일지라도, 자신에게 더없는 확신을 줄 만큼 뚜렷한 행복의 지침이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대단한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유인물을 통해 내게 돈을 구걸하거나, 도나 기를 권하는 것도 아닐진대, 그 남자는 분명 타인들에게 값없이 전파하지 않고는 못견딜만큼, 자신이 나름대로 오랫동안 세워온 행복의 지침들에 분명 큰 기쁨과 확신을 가졌을 것이다.

이 영화의 제목은 '사랑' 이 아니라 '행복'이다. 은희가, 이미 자신으로부터 마음이 떠난 영수의 짐을 싸며 그에게 하는 말, "나 행복하게 살고싶어." 아직도 영수를 사랑하는데 더이상 어떤 행동도 소용없다는 것을 깨닫고 은희는 손수 짐을 싸 그를 내쫓아버린다. 우리는 은희가 애써 냉정한 척 한다고 생각하지만, '행복하게 살고싶다'는 말은 어쩌면 거짓말이 아닐지도 모른다. 행복은 이기적이다. 자기 우선이다. 은희가 스스로의 몸도 편치 않으면서 영수를 극진히 간호한 것도, 자기 희생적인 것으로 보이지만, 결과적으로 자기 희생을 함으로써 자기 만족을 얻는 행복의 한 방식이 아니었을까.

허진호의 [행복]은 그래서, 넓게 봐서, '행복하고 싶은' 몇가지의 방법론을 보여준다. "그래, 너는 어떨 때 행복할 것 같니? 이렇게 하면 행복할까? " 하고 영화는 어떤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려보인다.

이 영화에서 객관적으로 가장 불행한 사람은 은희다. 8년이나 요양원에서 살았다는 말로 미루어 20대의 대부분을 시골구석에서 이렇다 할 일 없이 아픈 몸을 이끌고 살았으며, 지금도 그녀는 밤마다 기침과 씨름한다. 심지어 언제 죽음이 찾아올지 알 수 없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이 영화에서 '행복'을 위해 가장 적극적으로 돌진하는 사람이 바로 그녀다. 영수에게 '같이 살자'고 먼저 말하는 것도 그녀고, 감기에 걸리면 얼마나 위험한지 알면서도 영수에게 먹일 약초를 캐러 다니는 것도 그녀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데 하루하루 잘 살면 그만" 이라고 말하는 것도 그녀다. 심지어 그녀는 영화 속에서 고아다. 가장 손에 쥔 것 없는 사람이 가장 용감하다는 진실은 '행복'의 방법론에서도 마찬가지인 것인가.


각자 술집에서 그렇고 그런 의미없는 밤을 보내고 돌아온 영수와 수연.
서로 재미있었니, 없었니 의미없는 문답을 주고 받는다.
"넌 이렇게 사는게 재미있냐?"
"아니."

분명 어제밤 재미있었다고 말한 수연인데, 버럭 화를 내며 묻는 영수의 물음에 수연의 답은 "아니" 다. 시골구석에 처박혀 있는 은희에 비하면, 이 두 사람은 더할 나위 없이 화려하고 역동적인 삶을 누리고 있을텐데도 둘은 사는 게 재미없고, 더욱이 무엇이 재미있는지, 재미없는지 조차도 제대로 모르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영화는 영수에게 가장 반대되는 삶을 던져준다. 그가 도저히 어울리지 않는 장소, 어울리지 않는 사람을 그 앞에 데려다준다. 평온하고 소박한 시골생활, 언제 삶을 마감할 지 모르는 아픈 여자. 이것이 과연 너에게 행복을 주겠는가, 물으며.

영화에서 영수는 매우 쉽게 은희와 사랑에 빠지고 시골생활을 꾸려나간다. 이미 그런 생활에 익숙한 은희와 달리 영수가 농사를 짓고 경운기를 몰 때, 나는 점점 불안한 마음이 커져간다. 전원생활에 대한 낭만적 동경이 깔려있는 장면들인데도 어쩐지 영수의 과거를 이미 알고있는 관객인 나는 그 '행복'이 곧이 곧대로 수긍되지 않는다. 그 행복은 찰나의 최면인 것만 같고, 곧 끝이 보일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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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수가 은희를 저버리는 것은 '사랑'이라는 표현으로는 다 포함하기 어렵다. 쉽게 말하자면 '재미', 넓게 말하자면 '행복'. 그것에 대한 갈망 때문이다. 물론 '사랑'이라는 것도 그 속에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수연과 은희, 도시와 시골 사이를 오락가락하면서 어느 편에도 마음을 두지 못하는 영수는 스스로에 대한 행복의 방법론을 전혀 모른다고밖에 할 수 없다. 순간의 감정과 흥미를 따라 가보지만 영화는 영수에게 모진 후회의 순간을 던져준다.

어린시절, 과학시간에 보았던 빛이 통과하는 검은 상자가 생각난다. 작은 구멍으로 빛이 들어와 다른 구멍으로 나오는 상자. 영화 [행복]은 마치 그 속에 여러가지 거울을 설치하고 빛을 굴절시키는 것 같다. 어떤 사람을 만나고, 그것을 사랑이라고 생각하면서 원하고, 그 관계로부터 만족 또는 불만족을 느껴 또 다른 곳으로 갈망의 대상을 찾아 떠나고... 그런 굴절을 통해 우리의 삶의 경로는 예상할 수 없는 각도로 나아간다. 너도, 그리고 나도, 그도 그녀도, 행복하고 싶은 마음은 같은데 서로의 존재에 가 닿아 굴절되는 각도가 모두 달라서 우리들의 경로는 빗나가고 만다.

그러고보니 서점에서 본 그 남자의 행복지침에 '사랑'이란 말은 없다. 모두 혼자 하는 일들 뿐이다. 사랑과 행복은 역시 함께 가기 어려운 것일까. 마치 인생을 달관한 도사처럼, 자신의 확고한 행복의 신념을 전파하러 다니는 그 중년의 남자도,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어떻게 행복을 찾아야 하는지는 적어놓지 않았다. 물론 그랬다면 허진호처럼 영화를 찍었을테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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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진호의 반가운 귀환 [행복]

필진 리뷰 2007.10.12 07:56 Posted by woodyh98

바람을 휘모는 여자

은희(임수정)는 ‘바람을 휘모는 여자’다. 그리고 그녀는 폐가 제 기능을 다하지 못하는 중증 폐질환자다. 일반인의 40% 정도의 기능밖에는 쓸 수가 없다. 마음 놓고 뜀박질 한 번 할 수 없다. 대신 은희는 바람을 휘몰이할 수 있는 아름다운 마법을 가지고 있다. 스크린 앞 관객인 우리는 그녀의 마법을 ‘볼’ 수 있는 귀한 행운을 선사받는다. <행복>에서 은희의 바람/바램은 어느 순간 훨훨 한판 춤사위를 펼친다. 그 바람은 어느 순간 우리 눈앞에서 목격되더니 또 어느 사이 우리의 피부 속으로 들어와 박혀버린다. 그 바람을, 영화 속 이미지에 불과한 바람을, 지각할 수가 되는 것이다. 기이한 체험이다. 또, 그것은, 진귀한 체험이다.

영수(황정민)와의 첫 읍내 나들이. 그 둘은 ‘함께’ 버스를 탔으며, ‘함께’ 자장면도 먹었고, 또, ‘같이’ 영화도 보았다. 요양원으로 돌아오는 언덕길 중턱. 숨이 차올라 어느 돌 위에 걸터앉은 은희가 영수와 첫키스를 하던 그 순간, 은희 주위 바람의 미세한 결들이 자르르 춤을 춘다. 바람의 소리도 덩달아 스스스 들린다. 그리고 느껴진다. <봄날은 간다>에서도 그랬다. 허진호는 영화 속 이미지를 구체적으로 우리 몸에 각인시키는 데 탁월한 재능을 지닌 이다. 어느 순간 저도 모르게 영화 속 환경을 바라보던 내 몸이 움찔움찔 무조건적 반응을 보이는 것이다. 그리고 새삼 느끼게 된다. 일상의 지극히 단조로운 편린들이 어느 순간 표면 위로 떠오르는 순간을. 그 순간은 허진호의 마법이 펼쳐지는 순간이다. 그 순간 무-의미는 의미가 된다. 존재는 탈-존재(ex-sistence)가 된다.

하지만 변한 건 없다. 은희 주변의 바람은 그제나 저제나 항상-이미 그 곁을 지키고 있던 것이다. 내 삶을 채우던 내용물은 어제나 오늘이나 달라진 게 없는 것을. 마찬가지로 미래에도 내 삶의 내용물은 별반 달라질 게 없다. 물론 지금은 급변하는 소위 ‘현대’다. 현대(modern)라는 말로도 모자라 그 앞에 ‘탈/후기’(post)라는 접두어까지 갖다 붙이는 세상인 것이다. 언제 어느새 무엇이 변할지 모른다. 우리의 일상을 채우는 사물들은 지금 현재에도 이른바 ‘영구 혁명’을 겪고 있는 중인 것이다. 하지만 어쨌든 적어도 허진호는 ‘상품’의 영구혁명을 믿지 않는 ‘보수적인’ 사람이다. 영수가 서울에 올라와 머무는 예전 여자친구인 수연(공효진)의 고층 오피스텔 창밖으로 펼쳐진 도시의 정경을 보시길. 요양원이 있는 시골 한적한 풍경보다도 어찌나 단조롭고 무미건조하게 묘사되어 있는지. 그에 비해 계절이, 환경의 변화가 느껴지는 시골의 모습은 외려, 어쩌면 역설적이게도, 어찌나 다채로운지.

때문에 삶의 내용 ‘그 자체’는 새로울 것이 없다,고 허진호는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 삶의 내용을 채우는 형식 ‘그 자체’야말로 시시각각 얼마나 다채롭고 풍성하냐고, 허진호는 말하고 있는 것이다. 첫키스를 나누던 그 때 그 순간 은희와 영수 곁을 휘돌던 바람의 존재감은 그 이전의 그것과 얼마나 그 존재론적 위상이 다르냐고, 허진호는 말하고 있는 것이다. 둘의 첫 읍내 나들이 때 같이 먹던 자장면은 또 얼마나 다르냐고 허진호는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은희의 느린 밥 먹는 속도가 언제는 ‘지겹게’ 돌변하는 것이고, 노후 자금 몇 십억의 존재감이 또 언제는 제 삶의 가장 확실한 (것‘처럼’ 보이는) 지향점으로 다가와 내 삶을 결정짓는 것이며, 영수와 은희 둘의 존재감으로 꽉 채워지던 그들 살림집의 저 충만함이 언제는 또 은희 하나만으로도 채워져야만 하는 것이다, 라고 허진호는 반복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 매번 변하는 사랑의 마음, 그것의 내용도 새로울 것이 없는 거라고, 도대체, 맙소사, 제길헐, 허진호는,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말하고 있는 것이다.


무-의미에서 의미로

어떤 삶의 내용(물)은 의미가 되고, 또 어떤 삶의 내용(물)은 무-의미가 된다. 의미에서 무-의미에로의 전이. 그 사이에는 간극이 있다. 빈 공간이 있다. <행복>에는 삶과 죽음의, 시골과 도시의, 그리고 행복과 불행의 간극이 존재한다. 그리고, 영수를 찾아온 수연의 도시적 패션감각과 은희의 수더분한 시골 패션감각이라는, 이번엔, 서울로 올라간 영수의 손에 어울리지 않게 들려진, 은희가 건네준 분홍색 꽃무늬 곶감 보따리와 그 보따리를 저 위에서 휘두르는 깜깜한 도시의 빌딩숲이라는, 사이-간극이 존재한다. 간극이 있다는 것이다. 메울 수 없는 심연이 있다는 것이다. 이 간극을 어찌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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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읍내 나들이를 마치고 돌아오던 요양원 언덕길에서 은희는 말한다. “영화관에서는 남녀 연인이 손도 잡고 그런다던데.” 영수도 화답한다. “이렇게 한적한 오솔길을 남녀가 걸을 땐 뽀뽀도 한다던데.” 은희는 손을 잡자고 말하지 않는다. 영수는 뽀뽀를 하자고 말하지 않는다. 바로 그날이던가? 비가 내리는 요양원의 밤에 은희는 영수에게 또 이렇게 말한다. “이 방에서 귀신 나온다던데.” 은희가 말하지 않은 건 귀신이 나오는 방이니 함께 있자,라는 말이다. 은희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간극의 언어’는 서로에게 전달된다. 그리고 또, 마법같이, 그 빈 공간이, 간극이, 빈틈이 메워진다.

영수의 요양원 룸메이트 아저씨 석구(박인환)가 쪽지 한 장을 남기고 요양원 식구들과 ‘작별’하던 날. 쪽지에는 짤막하게 이렇게 적혀 있었다. “나는 잘 죽는다. 너는 잘 살아라.” “너는 잘 살아라”라고 했건, “너‘도’ 잘 살아라”라고 했건 문자적 표현이 중요한 게 아닐 것이다. 석구의 진의는 “너‘도’ 잘 살라”는 것일 게다. 못나게 죽고 폼나게 잘 살라는 것이 아니라, 저는 잘 죽고 너는 잘 살자는 것이었을 게다. 놀라운, 이번엔, 석구 아저씨의 마법. 죽음과 삶의 간극이 허물어진 것 아닌가! 삶과 죽음이라는 대립물이 일치(!)한 것이다. 그러니까 헤겔의 ‘대립물의 일치’.

행복과 불행이라는 대립물의 일치도 마찬가지 아닐까. 대립물의 일치는 곧 세계의 균열을 뜻한다. 변심하여 마음이 흔들리는 영수가 이렇게 말하지 않던가. “아, 미치겠다”고. 왜 미치겠다는 걸까. 해결책이 보이지 않으니까, 도무지 알 수가 없으니까, 자신의 마음이 분열되어 있으니까. 도무지 이 세상을, 자기 마음을 알 수 없겠으니까. 나도 모르겠다. 당신은 아시는지. 알면 부디 이 미약한 나에게도 선처해주어 알려주시길.


한대수의 <행복의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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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삽입곡으로 한대수씨의 <행복의 나라>가 쓰인다. 엔딩 크레딧 때 이 곡이 흐른다. 그리고 어쩌면 당신은 한동안 이 곡의 여흥에서 헤어 나오기 힘들지도 모른다. 어떤 영화는 음악이, 삽입곡이 마음 한 켠에 오롯이 박혀버리곤 하는데 <행복>이 그렇다. 허진호 감독 또한 <행복>의 시작이 <행복의 나라>였다고 밝힌다. “무엇보다 내가 <행복>을 만들게 된 건 한 대수 버전의 노래 ‘행복의 나라로’를 영화 속에 꼭 넣고 싶었다는 것, 그리고 앞서 말했듯 아프고 아무것도 없을지라도 외딴 곳에서 둘만 살아가는 사람들이 행복해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니 영화관 암등이 켜지고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더라도 끝까지 조금만 더 자리를 지키고 앉아계시길. 감독의 마지막까지의 배려에 끝까지 화답해주시길.



좋은 멜로드라마

멜로드라마는 그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신파적일 수밖에 없다. 허진호의 눈부신 전작들과 비교해봤을 때, <행복>의 중반 이후 역시 다소 신파적으로 다가온다. 하지만 허진호의 <행복>은 그럼에도 ‘좋은’ 멜로드라마다.

좋은 멜로드라마는 충분히 예상 가능한 신파적 서사의 빈틈을, 그것을 지켜보는 수용자-관객-독자 자신의 서사로 채워 넣을 여지를 제공해준다고 나는 생각한다. <행복>이 그랬다. 영수의 변심, 그것에 뒤이은 작별의 순간 앞에 직면한 은희는, 한 번도 원 없이 해보지 못했던 뜀박질로 자신의 폐를 자극한다. 은희는 예전 첫키스 때의 바람의 마법을 다시 한 번 불러일으키고 싶다. 차가운 비포장 도로 위에 나둥그러진 은희의 몸 주위로 바람의 마법이 다시 한 번(!) 찾아온다. 하지만 예전 그 때의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다. 바람의 마법은, 이번엔, 건조한 낙엽의 휘몰아침만을 불러일으켰을 뿐이다. 이 순간 나의 서사는 ‘언제 어느 때’로 점프한다. 자정을 전후로 한 흑석동 미로의 골목 사이사이를, 어디가 어딘지 알지도 못한 채, 엉엉, 꺼이꺼이 곡소리를 내던지며 휘젓고 다니던 그 때 그 언제로. 한 대수씨의 <행복의 나라>와 함께 스크린 위를 오르던 엔딩 크레딧 때도 나의 서사-기계는 또 한 번 작동한다. 여러 스탭들의 이름 사이에서 어느새 나의 이름과 그의 이름을 발견해버리고 마는 것이다.

허진호의 <행복>은 우리에게, 자신의 잊고 싶었으나 결코 잊고 싶지 않았던 개인적 서사와 마주 대면할 기회를 제공해줄 것이다. 그리고 기이하게도 그 때 소환되는 서사는 ‘행복’의 서사가 될 것이다. 우스꽝스럽기 짝이 없던 요양원 체조를 하던 영수와 은희의 서사처럼 말이다. 그러니 허진호의 <행복>은 ‘좋은’ 멜로드라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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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 이 남자, 홀로 설 수 있을까

필진 리뷰 2007.10.12 07:46 Posted by woodyh98
2007.10.10


[행복]은 허진호 영화 중에 가장 불행한 결말로 끝맺는다. 그동안 그의 영화에서 마지막은 곧 새로운 시작을 의미했다. 이런 순환의 윤리는 관객에게 ‘위안’이라는 커다란 선물을 전해주곤 했다. 그의 영화는 결과적으로 늘 혼자를 가리킨다. 혹은 마주보지 않는다. 그는 자칫하면 황량할 수도 있는 단독의 정서를 따뜻한 온기로 환원시키는 재주를 보여 왔다. 단독 숏, 혹은 마주보지 않는 투숏. 이 두 윤곽은 허진호 영화가 연애를 통해 결국 말하고자 하는 삶의 태도다. [8월의 크리스마스]에서 다림은 액자에 걸린 자신의 사진을 보고 웃음을 짓는다. [봄날은 간다]에서 상우는 갈대밭에서 소리를 채집하며 홀로 선다. [외출]에서 서영과 인수는 눈 내리는 봄날, 운전을 하며 어딘가로 떠난다. 이들은 하여튼 기꺼이 다시 시작한다. ([외출]의 마지막 장면은 이런 ‘기꺼워함’의 범주에 넣기에 좀 애매한 구석이 있다.) [행복]의 결말은 비참하다. 은희는 죽어 떠나고, 영수는 홀로 요양원에 다시 들어간다. 롱 숏으로 잡힌 쓸쓸한 뒷모습은 위안의 순간이라곤 요만큼도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절망적이다. [행복]에서 볼 수 있는 순환은 의미상으로는 시작이지만, 그 시작은 생의 시작이 아니라 죽음의 시작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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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진호 영화에 ‘어머니’가 처음으로 등장한다는 점에 주목해보자. 늘 그의 영화에는 아들들의 어머니가 부재했다. [8월] [봄날]에서는 아버지만이 등장했고, [외출]에서 주인공의 가족은 묘사되지 않는다. 그런데 [행복]에서 영수의 가족 중 오로지 어머니만이 등장한다. 1년 반 만에 영수는 어머니를 찾아가 무릎을 베고 눕는다. 영수는 함께 살게 된 은희의 가슴팍에 머리를 파묻고 눕는다. 여기서 은희의 두 대사는 그래서 중요하다. “ 내가 낫게 해줄게요” “그런게 있어요” 난 이 대사가 곧바로 영수의 어머니가 예전에 내뱉었을 법한 “내가 키워줄게” (너도 자식 낳아봐라) “그런 게 있다” 로 치환되어 들렸다. 여기에 “그런게 어딨어?” 라고 코웃음 치는 수연의 대사까지 더해보자. 다시말해 자애로운 어머니와 어리둥절한 아들과 쌀쌀맞은 며느리와의 관계. ‘젤소미나’와 ‘마츠코’와 ‘은희’가 한자리에서 만났다면 동시에 내뱉고 서로를 쳐다보면 고개를 끄덕였을 그 대사 “그런게 있어요.” 하지만, 먼저 죽을 수밖에 없는 어머니는 살아남은 아들을 구원할 수 있을까.

허진호의 이야기에는 두 남녀가 중심에 있다. 당연히 투숏이 많이 등장한다.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보자. 그의 영화에서 둘이 마주보는 장면은 그리 많지 않다. 그보다는 서로 정면을 바라보는 숏이 빈번히 등장한다. (혹은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을 지그시 바라보는 장면을 통해 그들은 상대에게 호감을 느낀다.) 특히 그들이 심리적으로 처음 가까워지는 순간은 둘이 함께 앞을 바라보며 앉아있을 때다. [8월]에서 다림과 정원은 더운 날 선풍기 바람을 쐬며 그들 사이에 부는 설레임을 처음 느낀다. [봄날][외출]은 단도직입적으로 둘이 함께 앉아있는 의자에서 관계가 시작된다. [행복] 역시 마찬가지다. 그들은 시골매점 앞 탁상에서 서로를 처음 인지한다. 하지만 [행복]에서의 투숏은 같은 곳을 바라보는 사랑의 윤리를 말하기보다, 동상이몽에서 오는 절망감을 표현하는데 주목한다. 물론 허진호는 늘 그 시선의 엇갈림에서 오는 연애의 유한함에 주목했지만, 이 영화는 이전 그의 영화들과 달리 투숏에서 한 명을 지워버리려 한다. 어찌할 수 없는 그리움이, 어찌할 수 없는 절망감으로 넘어가는 바로 이 지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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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수연이 영수와 은희의 시골집에 등장한다. 네 편의 허진호 영화에서 가장 달력사진스러운 매끈쭉쭉한 장면. 시골에서 자동차 광고를 찍는 듯한 이 숏으로 관객은 이야기의 끝을 가늠하게 된다. 이 장면 이후 이야기는 마치 3류 느와르 영화의 한 장면처럼 재빠르고 느슨하게 전개된다. 그런데 이후 등장하는 파멸의 과정은 굳이 인과의 전개로 보지 않아도 될 듯 싶다. 오히려 지루한 앞 뒤 반복에 불과하다고 보는 게 낫다. 영화의 첫 장면, 영수는 뭔가 불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담배를 피며 운전을 한다. 우린 이 장면이 수연과 헤어지기 전의 상황이란 걸 다음 장면을 통해 알 수 있다. 영화의 중반부 첫 장면, 영수는 선글라스를 끼고 룰루랄라, 운전을 한다. 이 이후의 이야기는 언제인지 명확하지 않다. 정말로 은희와 헤어지고 난 후인지, 혹은 은희와 만나기 전의 상황인지, 혹은 은희의 상상인지 알 수 없다. 그러니까 은희와 헤어지고 나서 보여주는 영수의 도시 생활은 선형적 시간에 구애받아 볼 필요가 없다. 프롤로그이자 에필로그. 그러니까 무한한 반복에서 오는 끔찍함.

영수는 변하지 않았다. 은희에게 구원받지 못했다. 여기에 이 이야기의 끔찍함이 있다. 영수는 “그런게 있긴 있어”와 “그런 게 어딨냐.” 사이에서 “그런게 있긴 있구나” (하지만 난 알 수 없어)를 읊조리며 관찰자로 머문다. 즉 둘 사이를 뜨뜨미지근하게 왔다 갔다 한다. 황정민은 이 중탕의 연기를 절묘하게 해낸다. 이런 그에게 “태양만 비춘다면 나는 살겠소.” 의 비장한, 혹은 소박한 각오의 다짐이 드리워질까. 죽음의 학습효과 덕분으로 그는 다시 살아갈 수 있을까. 그는 다시 요양원에서 딸랑딸랑 댄스를 출 수 있을까. [행복]의 카메라는 인물에 더 살갑게 다가갔지만, 덕분에 그간 가려졌던 허무의 우물은 더 깊어졌다. 그야말로 살아남은 자의 슬픔만이 거기에 덩그러니 놓여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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