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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IFF 2009] [쉬린] 얼굴을 읽다

필진 리뷰 2009.05.08 09:54 Posted by woodyh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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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


“이 영화, 무슨 내용이야?”라고 묻는데 영화가 무슨 내용인지 선뜻 답을 할 수가 없다. “여자들 얼굴만 나와”라고 답하기에는 ‘쉬린’이란 여자에 대해 많은 걸 알고 있는 것 같기도 하지만, 영화 상영 시간 내내 내가 본 얼굴이 누구였는지 딱히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새 영화 [쉬린]은 보는 영화가 아니라 체험하는 영화다.

영화가 시작되면 12세기 페르시아의 서사시 “코스로우와 쉬린”에서 영감을 받았다는 자막과 함께 “코스로우와 쉬린”의 이야기가 그려진 그림들이 보여진다. 그리고 극장에 앉아있는 여자의 얼굴이 클로즈업 된다. 이 영화에서 볼 수 있는 것은 그게 다다. 극장에 앉아서 무언가를 보는 여인들의 얼굴들의 나열. 그 얼굴의 서사시를 읽지 못한다면 이 영화를 견뎌내기가 힘들지도 모른다.

이 영화의 소개 정보에 의하면 줄리엣 비노쉬를 비롯한 이란의 유명 여배우 114명이 연극을 보고 있다는 설정이라고 한다. 관객은 소리만으로 그들이 보고 있는 극의 내용을 추측할 뿐 무대를 볼 수가 없다. 이 영화는 다큐멘터리가 아니다. 우리는 소리로만 알 수 있는 ‘쉬린’의 이야기에 따라 변화되는 표정을 감독의 임의대로 편집하고 정교하게 배치한 퍼즐과 같다.

영화를 보다보면, 영화 속 관객들이 ‘쉬린’의 행복에 웃고, 그녀의 불행에 우는 모습을 보게 된다. 앞의 무언가를 집중해서 보고 있는 그 많은, 다양한 표정들을 보다보면 그녀들이 우리를 보는 것인지 내가 그녀들을 보는 것인지 이상한 기분에 사로잡힌다. 그녀들이 얼굴을 찌푸리거나 놀랄 때, 그녀들이 보고 있는 것을 같이 보고 싶어지기도 한다.

어쨌거나 모든 사람들의 사랑을 받던 아름다운 공주 쉬린은 이웃나라 왕자 코스로우와 운명적인 사랑에 빠지지만, 그 사랑 때문에 쉬린은 평생 외롭고 고통스러운 삶을 살았다는 이야기다. “자매들이여, 나를 위해 울고 있는가”라는 쉬린의 목소리가 들리고 여인들의 눈물짓는 모습을 보다보면 스크린에 보이는 그녀가 쉬린이고 내가 그녀의 자매가 된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그 극장 안에 여자만 앉아있는 것은 아니다. 앞줄에 클로즈업 된 여자들의 얼굴 뒤로 남자들의 모습도 보이고, 다른 여인의 얼굴도 보인다. 우리는 볼 수 없는 그들 앞에서 뿜어져 나오는 조명의 밝기에 따라 한 여인의 얼굴 좌우로 보이는 얼굴들이 나타났다, 사라졌다를 반복한다. 그렇다면 감독은 왜 여인의 얼굴만을 보여주는 것일까.

쉬린의 불행에 하나같이 눈물짓고 있는 그녀들은, 진정으로 그들이 보고 있는 쉬린과 동화가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이 영화가 다큐멘터리가 아니고 감독이 임의대로 배치한 결과물이라는 걸 생각하면, 작품이 먼저가 아니라 관객이 우선인 이 영화의 미스터리가 배가된다. 이런 식의 작업이 작품이 될 수 있다는 것이야말로 놀라운 일이고, 사실 더욱 놀라운 것은 우리가 영화 속 관객들의 반응을 보고 짜맞춘 ‘쉬린’의 감동이 진짜라고 느낄 수도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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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장원


역시 신동일이었다. 어쩌면 홍보된 것처럼 이주노동자와 여고생의 로맨스라는 말랑말랑하고도 얄팍한 소재주의의 노선을 따라갔다면 이 영화에서 찾을 수 의미는 무엇이었을까? 과연 의미를 찾을 수는 있었을까? 누군가는 선정적이며 확 끌리는 것들을 기대했겠지만 감독은 철저하게 그들의 기대를 배반하며 자신이 그동안 닦아왔던 노선을 확장시킨다. 그것이 바로 감독의 힘이고 그를 혹은 그의 영화를 애타게 기다렸던 관객이 받을 수 있는 감흥이다. 그래서 신동일의 세번째 영화 <반두비>는 혼란스럽고 불만가득한 이 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이 꼭 봐야할 작품이다. 누구도 말 못하지만 누군가는 말하여야만 하는 이야기를 용기있게 감독은 풀어내었고 소재주의에 함몰될 수 있는 유혹을 당당히 떨쳐 내고 자신의 말을 분명히 한다. 그와 같은 노선을 달리는 관객은 그의 열렬한 응원자가 되어 함께 행동하며 그처럼 자신들이 하고 싶은 말을 해야 한다. 그 이유는 이 영화가 우리들이 분출하고 싶은 감정들을 무수히 끌어내는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신동일 감독은 전작에서 보여진 것과 같이 '관계'를 표현하는 데 있어서 탁월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 소수종교를 믿으며 전쟁을 거부하는 청년과 사회적으로 타락한 대학강사의 관계를 그리는 데뷔작 <방문자>에서나 부인보다도 더 강렬한 '관계'를 맺고 있는 한 남자와 그의 친구의 이야기를 그린 <나의 친구, 그의 아내>를 보면 그가 사람과 사람을 연결시키는데 있어서 상당한 에너지를 가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세번째 작품 <반두비>도 예외일 수 없다. 그의 장기를 십분 살려 민서와 카림이라는 인물의 '관계맺음'을 그리고 있다. 그가 보여주는 인물들의 '관계'는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는 너무나 어울리지 않는데,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서로가 그들에게 꼭 필요한 존재임을 각인시켜준다. 어떤 여고생이 말도 피부도 다른 외국인 노동자를 좋아할 수 있을까? 하지만 그의 영화 안에서는 불가능은 곧 가능이 되고, 소수자의 시선이 곧 다수의 생각이 된다. <방문자>와 마찬가지로 이 영화에서도 감옥에서의 면회장면이 등장하는데, 두 장면 모두 이루어질 수 없는 것처럼 보였던 인물들의 관계가 이제는 서로에게 한쪽 구석을 채워주는 관계로 발전했음을 잘 보여주는 부분이다. 그래서 그 장면은 이 영화에서 엔딩장면만큼 값지고 감동적인 부분이라고 말할 수 있다.

감독은 <나의 친구, 그의 아내>에서부터 세심하게 매만져 왔던 '계급'에 관한 문제도 인물들의 '관계맺음' 못지않게 이 영화에서 부각시키고 있다. 달콤하며 씁쓸함 가득한 상류사회로의 진입 욕망을 그렸던 전작과 달리 이 영화에서의 상류사회의 모습은 모순, 그 자체이다. 상류사회의 모습은 다층적으로 표현되는데 부패한 정치인, 타락한 교사, 외국인 노동자를 부려먹는 공장 사장등을 통해서 변주된다. 하지만 하나같이 제대로 된 모습은 존재하지 않는다. 감독은 그것을 직접적으로 비판하며 정치적,사회적 시선에 두 눈을 치켜 뜨고 마주선다. 그것을 모두 아우르는 감독의 시선은, 물론 인물을 묘사하는 것처럼 따스하고 온화한 배려가 느껴지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더 나아가서 감독은 불온함을 받아들이고 적극적으로 저항하는 소녀의 모습을 통해 '계급'이 생김으로써 파기되는 모순덩어리의 모습 역시도 세밀하게 관찰해 낸다.

민서는 대부분의 여고생과 다를 바 없는 것처럼 보인다. 영어학원에 등록하고 싶어하고 아버지의 부재를 쉽게 인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녀가 '행동하는 인물'이라는 것을 생각했을 때, 민서는 특별한 인물이 된다. 방법이 옳다라고 볼 수는 없지만 스스로 학원비를 마련하고 정당하지 못한 정치와 언론, 정권에 쓴 소리를 내뱉으며 자신에게 찾아온 사랑을 즐길 줄 안다. 생각없이 말하지 않으며 '왜'를 통해 '어떻게'할지를 결정하는 소녀이다. 이것은 정권에 아부하는 인물들(카림의 공장사장)과 정권에 저항하지 못하며 스스로 포기하려는 인물들(민서의 어머니와 의붓아버지, 그리고 어쩌면 카림까지)을 비판하면서 그것을 바라보는 관객들이 적극적으로 행동으로 실천할 것을 요구한다. 민서는 그래서 이 시대에 꼭 필요한 인물을 대변하는 '메타포'처럼 느껴진다. 여고생으로 분하긴 했지만 민서는 혼란기에 처한 우리 누구라고 해도 사실 무방하다. 다만 민서가 가치를 가질 수 있는 인물인 것은 아무도 쉽게 건드릴 수 없는 부분을 건드리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민서는 또한 영화를 만든 신동일 감독의 '메타포'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데뷔작부터 그려온 그의 정치적 올바름을 향한 비판적 시선은 영화를 통해 관객이 가질 수 있는 것이 단지 감동뿐은 아니라는 것을 직설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뉴타운 건설의 페해를 말하는 술주정뱅이나 시급 3500원의 억울함을 토로하는 아르바이트생 모두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초상이다. 하지만 시대는 억울함을 받아줄만큼의 포용력을 가지고 있지 않다. 오히려 갖지 못한 자를 가진자의 테두리에서 더 멀리 내쫒을 뿐이다. 수많은 노동자들, 이주민들을 그 테두리 밖으로 내쫒은 것은 것은 어쩌면 우리 자신이 아닐까? 힘없다고 소리내어 말하지 못했던 우리 때문은 아닐까?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MB정권에 현명하게 대처하는 방법을 어린 소녀를 통해서 보여주는 <반두비>는 정말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영화임에 틀림없다. 분명 웃음지을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 민서가 카림이 전에 만들어주었던 방글라데시 음식을 먹으며 슬며시 웃음지은 그 모습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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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


“나는 단지 남들이 원하는 것을 원했을 뿐이다”라는 글자들의 스톱 모션 애니메이션으로 시작되는 [상영중]을 보러 간 건 순전히 우연이었다. Raya Martin그날 보고 싶었던 영화를 예매하지 못해서 남는 것들 중 골랐던 게 하필 러닝타임이 280분이나 되는 이 영화였다. 영화 상영 시작 전, 쉬는 시간에 대한 공지를 듣기 전까지 나는 이 영화가 이렇게 긴 영화일 줄은, 이렇게 강렬하게 남을 줄은 미처 알지 못했다.

[상영중]을 보고 난 후, 필리핀 영화계의 신동이라고 알려진 84년 생 라야 마틴 감독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상영중]이 [다음 상영작]과 함께 ‘극장 3부작’의 첫 번째 작품이라는 것을 알고는 흥분했다. 그래서 필연적이게도 나의 전주에서의 마지막 영화는 [다음 상영작]이 되었다.


그녀에 대해 알 수 있는 것

어린 소녀 리타는 카메라 앞에서 쇼를 한다. 말 그대로, 그 또래 아이들이 혼자만의 시간에 엄마나 이모의 옷이나 화장품을 멋대로 써가며 해봤을 만한 그런 행위. 그런데, 그 아이가 마이크를 잡고 열창을 하는데 노래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그렇게 한참을 혼자 놀더니 그 아이가 침대에 눕는다. 이게 무슨 일일까. 그녀의 우울함이 전달해지는 것 같다.

어느 밤, 집 앞의 골목에서 리타가 동네 친구들과 신나게 뛰논다. 정신없이 흔들리는 카메라와 고르지 않은 불빛 속에서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소음들. 리타는 발을 다쳤나보다. 친구들에게 나중에 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발을 절뚝거리며 집으로 들어온다. 집에는 아무도 없다. 자기 방 침대에 올라가 다리를 끌어안은 체 웅크리고 눕는 리타. 그녀의 우울함이 전달해져 온다.

[상영중]은 그런 영화다. 리타의 일상을 쉼 없이 길게 보여주고는 노래 소리를 지우고 알 수 없는 리타의 우울함에 젖어들게 한다. 영화의 마지막까지도 그녀의 슬픔의 정체는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그저 그 기분을 느끼게 될 뿐이다. 설명하지 않는 영화, 4시간이 넘는 이 영화를 본다고 해서 주인공 리타에 대해 많은 걸 알게 되지 않는다. 그저 리타의 우울함을 같이 체험했다는 표현이 어울린다.


이 영화를 포기할 수 없었던 이유


리타의 곳곳에 우울함이 포진된 일상을 지켜보다가 얼마나 흘렀을까. 리타가 졸린 눈을 비비며 일어나 엄마와 함께 이모의 차를 타고 바닷가로 떠났다. 동이 트지 않은 바닷가에서 리타가 우는 것 같다. 워낙 흔들리는 카메라는 그녀의 얼굴을 또렷하게 응시하지 못하게 하고 파도소리는 그녀의 울음소리를 삼켜버렸다. 그리고 극장에 불이 켜졌다. 극장 로비에서 영화의 거리를 내려다보며 나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이대로 나가 예르지 스콜리모프스키의 [안나와의 나흘 밤]을 볼 것인가, 아니면 이 영화를 끝까지 볼 것인가. 이미 내 앞에 앉아있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라진 지 오래다.

이 영화를 포기할 수 없었던 이유는 세 가지이다. 첫째, ‘설마 이런 식으로 끝까지 가진 않겠지’라는 생각. 둘째, 리타의 일상을 보여주다가 리타가 혼자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 장면에 삽입된 스톱 모션 애니메이션 장면, 그리고 마지막으로 영화 속에서 모두 지워 버린 노래 소리 때문이다. 이 영화의 앞부분에는 리타가 노래하는 장면, 리타의 사촌들이 크리스마스 파티에서 노래하고 춤추는 장면 등이 나오는데 관객은 그들의 노래를 들을 수 없다. 그 의미는 무엇일까에 대한 생각.

쉬는 시간이 끝나고 극장에 들어간 나는 놀란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왜냐면 전반부에서 봤던 영화랑은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흑백무성영화가 나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꽤 길게 나오는 흑백무성영화를 보면서 계속 생각했다. 이 장면의 의미는 무엇일까. 도대체 무엇과 연관이 된 거지? 자막도 거의 없는 이 무성영화의 내용은 무엇일까? 더욱 흥미로웠던 것은 그 흑백무성영화가 세 가지 방식으로 거꾸로 상영되고 있었다는 것이다. 먼저 흔히 필름을 거꾸로 돌리는 방식, 사람이나 자동차가 뒤로 가는 것처럼 보이는 방식, 두 번째로 필름의 좌우를 뒤집은 방식, 세 번째로 필름을 상하로 뒤집은 방식이다. 1937이라는 숫자, 등장하는 꼬마 아이와 여인들. 그리고 알 수 없이 전달해져오는 슬픔이 그 영화를 보고 난 후 알 수 있는 전부였다.

흑백무성영화가 끝난 후, 젊은 여자가 등장하고 영화는 갑자기 전반부와는 전혀 다른 방식의 보여주기를 시도한다. 전반부와 달리 고정된 카메라와 훨씬 좋아진 화질은 이제 어른이 되어버린 리타를 가만히 응시하고 있다. 영화를 보고 난 후 영화정보를 통해 알게 된 사실, 라야 마틴 감독은 이 영화를 찍을 때, 리타의 성장 과정을 따라, 아날로그 비디오 카메라로 시작해서, DV카메라를 거쳐 16mm 카메라로 촬영 기종을 바꿨다. 리타가 성장하는 그 당시에 가장 많이 사용되던 기종을 택했다는 것이다.

불법 DVD를 파는 일을 하는 리타는 더욱 무료해 보인다. 엄마와는 할 얘기도 별로 없고, 남자친구는 징징대고, 친구들하고도 즐겁게 지내지 못한다. 한밤중에 일어나 물을 마시러 나왔다가 엄마의 흐느낌을 듣고, 한밤중에 공동묘지를 헤맨다. 남자친구와 여관에 갔다 온 후, 관객은 그녀가 임신한 사실을 알게 된다. 그녀는 어릴 때부터 자라온 집을 떠나 버스를 탄다. 버스에 오르기 전 어디론가 길게 통화를 하는 그녀가 계속 울고 있다. 그녀는 왜 혼자 있는 것일까. 어디로 가는 것일까. 우리는 알 수가 없다. 버스에 올라 버스가 출발하자 창밖을 응시하던 그녀가 꾸벅 꾸벅 졸기 시작한다. 그걸 보고 있는 나도 슬그머니 잠이 온다. 그리고 영화는 끝이 났다.

[상영중]은 관객이 절반 넘게 채워나가는 영화다. 이 영화에 대한 소개글을 쓴 알렉시스 A. 티오세코는 라야 마틴의 영화들 중 내러티브에 가장 충실한 영화라고 쓰고 있지만, 이 영화에서 내러티브는 그 시간 상 일어나는 단순한 사실의 나열을 의미한다. 이 영화에 술자리 씬이 두 번 나온다. 첫 번째는 어린 리타가 동네 슈퍼에 음료수를 사러 갔을 때 그 앞에 테이블에 앉아서 술을 마시는 남자들과 어른이 된 리타가 친구들과 술을 마시는 장면이다. 그들이 하는 대화는 리타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이렇게 저렇게 짜 맞추게 되는 것이다. 리타의 슬픔은 아버지의 부재 때문이 아닐까. 엄마의 슬픔도 그 때문이 아닐까. 중간에 나온 무성영화는 리타의 할머니가 출연한 영화가 아닐까. 리타의 엄마와 이모는 할머니의 물건을 팔아 생계를 꾸려온 것처럼 보인다. 리타의 아버지는 어디에 있을까.

뭐, 어떤 생각이던 상관없다. 이 영화는 그런 영화니까. 리타를 알 수는 없지만 그녀의 슬픔만은 정갈하게 느낄 수 있는 영화니까. 리타가 미혼모가 될 것 같다는 생각에 짜증이 나기도 하지만, 그녀가 엄마의 품에서 라디오에서 나오는 귀신 이야기를 듣다가 잠드는 장면이 생각나 다시 뭉클해진다. 우리는 누구나 남들이 원하는 것을 원하면서 살고 있으니까.


영화, 그리고 진짜 이야기

라야 마틴은 영화라는 매체에 대한 고민이 왕성한 감독이다. [상영중]을 통해 인물의 성장과 함께 영화 매체에 대한 성장을 체험하게 한 것도 그렇고 [다음 상영작]은 대놓고 영화 작업의 매커니즘에 대해 보여주고 있다.

[다음 상영작]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눠진다. 앞부분은 영화를 만들고 있는 메이킹 필름에 가깝고 뒷부분은 앞에서 찍었던 작품을 보여준다. 첫 장면은 한 여자가 뒤뜰로 나와 의자에 늘어져 앉는 모습을 길게 보여준다. 뭔가 아주 서정적인데 이상한 장면이다. 왜냐면 뒤 문 앞에 조명이 켜져있기 때문이다. 메이킹 필름은 이런 식이다. 촬영 공간에 설치된 카메라와 감독의 모습을 있다, 없다의 모습으로 보여준다.

현장에서 세트를 준비하는 동안, 어둠속에서 들리는 영화 세미나에 대한 대화, 배우들이나 스텝들끼리 농담하고 장난치는 모습들, 그리고 더 절실하게 느껴지는 건, 영화를 찍는 작업이 전혀 영화적이지 않다는 것. 통제하고 꾸미고 가리고 연기하는 사람들. 카메라 감독과 스텝들이 기념촬영을 한 후 감독은 자신의 집으로 들어와 이를 닦고 침대 위로 쓰러진다. 밖에는 비가 내리고 있다. 그리고 두 번째 타이틀이 뜬다. [다음 상영작] 그 밑에 ‘진짜 이야기’

16mm 무성영화로 만들어진 영화는 라야 마틴 감독이 침대 위로 쓰러질 때 들렸던 빗소리를 사운드로 진행된다. 신기한 건, 엄마와 아들이 싸우는 장면을 찍을 때 소리로만 들었던 이야기가 기억에 남아 무성영화 속 갈등을 분명하게 인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동성애자인 아들과 어머니의 갈등, 그리고 아들과 그 애인의 관계. 영화는 아주 서정적이다. 짧아서 아쉬울 정도다.


흔히, 다큐멘터리와 극영화를 말할 때, 다큐멘터리가 더 진짜에 가깝다고 생각하게 된다. 영화 [벌집의 정령]에서 안나의 언니가 프랑켄슈타인이 왜 꼬마를 죽였냐는 동생의 질문에 “프랑켄슈타인과 꼬마는 죽지 않았어. 영화는 다 가짜거든.”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라야 마틴은 극영화 앞에 “진짜 이야기”라는 부제목을 달았다. 그가 하고 싶은 진짜 이야기는 이런 것이다. 자신의 작업의 결과물인 극영화가 “진짜 이야기”인 것이다.

흑백무성영화를 너무 너무 좋아한다는 그는 자신의 작품에 롱테이크와 롱샷과 함께 흑백무성영화의 요소를 가미하는 것을 즐긴다. 이제 25살이 된 그는 첫 번째 장편인 [필리핀 인디오에 관한 짧은 필름]과 [오토히스토리아]로 필리핀 역사와 영화의 역사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현재적으로 축적해나가는 자신의 역량을 알렸다. 2008년 한 해 동안 4개의 작품을 만들어내는 놀라운 활동을 보이고 있는 라야 마틴은 이번 전주국제영화제에서 내가 발견한 보물 같다. 그의 마지막 극장 시리즈를 하루 빨리 만나볼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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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흥기


보통 영화제는 영화제 기간 첫 주말에 그 정점을 찍는다. 사람들이 가장 많이 모이는 날에 좋은 프로그램과 유명 게스트들이 몰리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이렇게 한 차례 힘을 빼고 나면, 영화제는 이상하리만치 차분하게 가라 않는다. 흡사 평일 오후 2시의 시네마테크 모습이랄까? 그곳에는 조용히 영화가 시작되기만을 기다리는 관람객의 모습이 다만 하루 전의 왁자지껄 했던 모습과 대조를 이룬다. 5월 5일 전주영화제는 이제 막 일정의 절반이 지났지만 아직까지 그런 차분해 질 기색조차 없다. 한 주 동안 두 번 맞이한 휴일. 게다가 이 징검다리 휴일은 우리를 이곳에 묶어두기에 충분히 좋은 조건이었다. 전주 국제 영화제는 살짝 들뜬 기분을 유지한 채 기분 좋게 전진중이다.

중간 점검 리포트를 해보자면, 이번 영화제의 동남아시아 영화에 대한 관심이 부쩍 높아졌다는 사실을 첫째로 꼽을 수 있다. 우선 스리랑카 특별전이 한 섹션을 차지하고 있으며, 여러 섹션에 걸쳐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태국 영화들이 두루 포진중이다. 특히 두드러진 특징은 이번 영화제에서 필리핀 영화들이 대거 약진했다는 점이다. 3인 3색에 초청된 라브 디아즈 감독을 비롯하여, 약관의 나이를 막 넘어 일약 천재 감독으로 발돋움한 라야 마틴 감독(1984년생) 특별전과 2006년 전주영화제에서 소개되어 다시 돌아온 브릴란트 멘도사 감독, 국제 경쟁에서 상영되고 있는 쉐라드 안토니 산체스 감독(1984년생)의 <하수구>, 시네마 스케이프에서 소개된 아우라에우스 솔리토 감독의 <소년> 그리고 영화보다 낮 선 부분에서 소개된 카븐 드 라 크루즈 감독(1973년생)의 <짙은 어둠속의 마닐라>까지 모두 총12편의 필리핀 영화가 이번 영화제에서 절찬리 상영 중에 있다.

비단 이것이 프로그램 구상에서만 끝나고 있는 현상은 아닌 듯하다. 5월 4일자 데일리에서는 이미 이 점에 관하여 역점을 두고 한 차례 기사로 다뤘던 적이 있으며, 필리핀 영화를 관람한 관객들의 반응이 매우 좋다는 후문이 심심치 않게 들려오고 있기 때문이다. 필리핀 영화가 주목받는 이유에는 우선 그 형식의 자유로움을 근거로 들 수 있다. 이미 필자가 한 차례 다루었던 라브 디아즈 감독의 경우 상영 시간에 대한 압박에서 자유롭게 벗어나 영화를 제작하고 있으며, 특히 라야 마틴 감독의 경우 이색적인 형식과 아이디어를 통하여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 또한 필리핀의 근현대사의 정치적 현실이 영화를 예술적 표출구로 삼고 있다는 사실도 주요하다. 라브 디아즈 감독을 필두로 여하의 필리핀 인디펜던트 감독들이 영화들 통하여 일종의 정치적 투쟁을 이어나가고 있음은 그들의 영화에서 어렵지 않게 포착된다.

한 편 이번 영화제에서 다소 아쉬운 부분이 있다면 바로 중앙 무대의 이전이다. 해매다 중앙무대를 전주영화의 거리 중심 부분에 꾸며진 것이 올해는 중앙 주차장을 확보하지 못하고 중심에서 멀리 떨어진 외곽에 작은 무대를 설치하여 중앙 행사를 치러야 했다. 각 종 지프 센터를 중앙으로 집결시켰던 것 까지는 좋았지만, 중앙 무대가 주변부로 옮겨진 것은 유동적인 관객들을 흡수하기에 다소 무리였던 것으로 보인다. 아예 중앙행사를 보러 온 관객이라면 상관없지만, 영화와 영화 사이에 잠시 휴식을 취하는 관객에게 이번 중앙 무대는 찾아가기 다소 먼 곳에 위치했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중앙 무대가 멀어진 대신 게릴라 공연 형식의 무대가 여기저기서 생겨 관객들을 또한 즐겁게 해주었다. 특히 민환기 감독의 <소규모아카시아 밴드 이야기>의 주인공이기도 한 소규모 아카시아 밴드는 예정에 없던 공연을 주차장 부근에서 펼쳐 보여 관객들에게 그 어느 공연보다 높은 호응을 이끌어 내기도 했다.

중간 점검 리포트로 영화제의 흥망성세를 예측하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지금의 전주는 비교적 성공적이란 사실을 어렵지 않게 가름 할 수 있다. 작년과 비교해 보아 높은 예매율이라 던 가, 더 많아 진 매진작들 같은 산술적 근거보다, 더욱 깊게 다가왔던 근거는 <멜랑콜리아> 인터미션 도중에 예순이 넘어 보이는 어느 노회한 영화광께서 스물 남짓의 젊은이와 함께 그 잠시 사이 샌드위치를 함께 먹으며 영화에 대해 열정적으로 토론을 펼치고는 다시 잔뜩 기대에 찬 표정으로 극장을 향해 들어간 장면을 보았을 때, 나는 이 영화제가 여전히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을 함께하게 해주며 희망을 나누어 주는 괜찮은 곳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곳을 아무리 마땅치 않은 단점이 있다 하더라도, 실패라고 평가 할 수 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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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민영

아소카 한다가마 감독의 [이것은 나의 달]


<이것은 나의 달>은 인물이 사회, 사회가 국가를 대신하는 매우 상징적인 영화다. 영화는 한 마을의 해체를 통해 전쟁의 폐해를 고발하고, 그 속에서 아무런 의심 없이 부조리에 동화되어가는 마을 주민들에 초점을 맞춘다. 마을 사람들의 갈등을 일으키는 것은 전쟁이었고, 전쟁통에 우연히 흘러 들어온 적군(타밀)진영의 여성은 불화의 씨앗이 된다. 타밀 여성은 목숨을 살리기 위해 우연히 숨게 된 벙커에서 스리랑카 국군의 군인을 만나고, 군인은 그녀를 겁탈한다. 여자와 하룻밤을 보낸 뒤 군인은 탈영을 결심하고, 겁탈당한 타밀 여성은 무작정 군인의 뒤를 좇는다. 군인이 낯선 여자와 고향에 돌아오자 마을은 혼란으로 뒤덮이고, 마을 사람들은 적개심과 호기심에 찬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본다.

영화는 원초적이고 본능적인 힘에 기대어 이야기를 전개한다. 영화가 초점을 맞추는 것은 전쟁 국민들의 가난한 삶이나 전쟁을 직시하는 시선이 아닌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 일어나는 욕정의 움직임이다. 전쟁의 절대적인 지배로 인해 군인이 되는 것을 가장 명예롭게 여기는 마을 사람들은 자신의 친구, 자신의 형제가 죽어서 돌아오는 것을 겪으면서도 국가와 군대에 대한 환상을 버리지 못한다. 힘과 권력의 철저한 노예가 되어버린 마을 사람들에게, ‘다른 나라’에서 온 ‘여성’의 존재는 복선의 시작이 되는 역할을 한다. 남성과 관계를 맺은 여성은 반강제로 남성에게 예속되는 풍습이 자리 잡고 있는 토속적 사상 때문에, 마을 사람들은 겁탈된 타밀 여성이 군인과 결혼할 것이라 예상하며 그녀를 지켜본다. 이렇게 군인에게 속해짐을 당한 타밀 여성은, 군인의 마을 사람들에게 숨겨두고 있던 정욕을 불러일으키는 계기를 제공하고 만다. 황폐해진 숲과 말라버린 농토는 이웃의 눈을 피해 정사를 벌이는 욕망의 장소로 변모하고, 마을 남녀들은 서로에게 정욕의 눈길을 보내기 바쁘다. 끊임없이 쾌락과 욕정을 갈구하는 마을 사람들에게는 마을을 지키는 승려의 존재도 그리 큰 위안을 얻지 못한다. 승려는 마을에서 가장 신성한 곳인 절을 지키는 지주 역할을 하며 마을 사람들에게 지혜와 조언을 아끼지 않지만, 승려 자신도 전쟁 국가의 국민이라는 사실을 지울 수 없었던 것이다. 신을 모시는 동시에 전쟁을 옹호하는 승려는 군인의 군복과 승려의 승려복은 아무런 차이가 없다는 말을 서슴지 않게 마을 사람들에게 말한다. 그런 승려 또한 갑자기 마을에 찾아든 타밀 여성으로 인해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 던진다.

영화는 극단적인 전개와 정적인 카메라 워킹을 통해 전쟁이 인간의 삶 자체를 위협하고 있다는 사실 또한 놓치지 않고 있다. 반복되는 클로즈샷과, 독백으로 진행되는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상대방을 배려하지 않는 인물들의 투 샷은 원초적인 욕구 외에 아무 것도 남지 않은 마을의 모습을 놀랍도록 효과적으로 담아내고 있다. 타인에게 손을 내밀기를 주저하지 않으면서도 정이 떨어질 정도로 냉정하게 자신을 방해하는 마을 사람들의 모습은, 영화의 후반부로 달려 갈수록 광적으로 서로에 대한 사랑을 갈구한다. 필사적으로 정사를 벌이고, 결혼을 하고자 하는 주민들의 기이한 태도는, 종말을 앞두고 종족 번식을 위해 다급하게 관계를 가지는 세기말적 경향을 아이러니하게 보여준다. 이렇게 끊임없이 분열과 갈등을 자초하고 앞을 향해 달려가는 인물들의 모습 때문에 영화의 희망적인 결말은 제대로 빛을 발하지 못한다. 마을 여자들의 잇따른 임신과 결혼, 그리고 출산의 과정을 통해 태어난 아이들은 장성해 군대에 입대를 신청한 남성들의 빈자리를 채운다. 전쟁으로부터 국가를 보호하기 위해 국민을 방패로 쓰는 군대와, 군대 지원을 통해 가난한 삶을 끝낼 수 있다고 믿는 주민들의 악순환은 결국 끊기지 못하는 셈이다. 영화는 마지막 시퀀스에서 천진난만한 아이의 눈을 비추며 또 다른 생명의 숭고한 가치를 보여주지만, 그것 또한 마을 사람들에게는 평생 끊을 수 없는 운명의 한계로 작용하고 있다.

(전주국제영화제의 온감 데일리에 송고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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