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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건영


하나.
한 때, 영화보기만큼이나 영화음악 음반 수집에 천착한 시절이 있었다. 영화음악의 전성기라는 시대적 환경에 편승한 결과이기도한데, 당시 FM라디오 프로그램과 빌보드 차트 상위에는 언제나 영화음악이 포함되곤 했기 때문이다. 사실 OST 음반이 빌보드 앨범차트에 장기간 랭크된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그러니까 대게는 <오클라호마> <웨스트사이드 스토리> <메리 포핀스> <사운드 오브 뮤직> 등이 오랜 인기를 얻은 것으로 알고 있고, 사실이 그렇기도 하다. 하지만 영화음악 음반의 진정한 지존은 따로 있었으니 핑크플로이드의 명반 [Dark Side Of The Moon]이 나타나기 이전까지를 호령한, 오스카 해머스타인과 리처드 로저스가 음악을 맡은 <남태평양>이 그 주인공이다.

둘.
한 번도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음에도, 가끔은 내게 영화음악을 사용할 권리를 준다면 ‘이런 음악을 넣고 싶다’는 생각은 할 때가 있다. 다름 아닌 전쟁영화에 말이다. 하필 처참한 전투와 무차별 폭격이 난무하는 끔찍스런 전쟁영화라니. 생각의 시작은 20여 년 전 공군비행장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러니까 1980년대 중반, 공군하사관으로 복무하는 친구를 만나기 위해 경기도 송탄엘 간적이 있는데, 밤새 술을 마시고 난 다음날 새벽 그는 기막힌 광경을 보여주겠노라며 나를 비행장으로 데려갔다. 동틀 무렵의 검푸른 하늘을 마주하고 앉은 내 시야에 들어온 것은 격납고에서 나와 활주로를 향하는 팬텀기 한 대였고, 그때 관제탑 스피커에서 흘러나온 것은 반젤리스가 만든 <불의 전차 Chariots of Fire>의 메인테마였다. 이때 문득 떠오른 것은 전투 신에 부드럽고 몽환적인 사운드를 넣는다면 어떨까? 라는 생각이었다. 전쟁영화라고 오케스트라 풍의 웅장한 음악을 써야 할 이유가 없다는 말이다.

물론 <지옥의 묵시록>에서 전쟁의 광기를 극대화시켜준 바그너의 격정적이고 장엄한 선율 ‘발퀴레’는 적절한 선곡이었다. <더 록>에서 험멜 장군이 아내의 무덤을 찾아 다짐할 때 흐르던 한스 짐머의 장중한 곡도 더 없이 좋았다. <블랙호크다운> 또한 디지털전쟁에 적합한 음악이 돋보인 사례였다. 그럼에도, <플래툰>에서 일라리어스의 죽음 앞에 흐르던 사무엘 바버의 ‘현을 위한 아다지오’는 얼마나 처연했던가. 스탠리 메이어스가 만들고 존 윌리엄스가 연주한 <디어 헌터>의 Cavatina는 또 어땠는가. 아니면, <굿모닝 베트남>에서 흐르던 멀 해거드의 Okie From Muskogee의 흥겨움과 루이 암스트롱의 What A Wonderful World가 들려주는 전쟁의 아이러니도 기억해보자. 전쟁영화가 영화기술 발전에 기여했음을 감안한다면 전쟁영화 음악 역시 다양한 실험과 변주를 통해 영화음악의 지평을 한 뼘쯤 넓혀놓았다는 것에 이의를 달지 못할 것이다. 이런 이유로 내가 전쟁영화에 잔인한 살육전이나 폭격 신에 음악을 넣는다면 꼭 넣고 싶은 곡이 있으니, 가끔은 이 음악이 흐르는 영화 속 전쟁 신을 상상해본다. 빗발치는 폭격을 피해 공포에 질린 아이들과 절망한 얼굴의 부녀자들이 필사의 탈주를 감행하고, 도시총격전에 참가한 군인들의 중화기가 불을 뿜는 순간, 아비규환의 지옥을 휘감는 어구스틱 기타소리와 더불어 노래가 흘러나온다. 다름 아닌 아트 가펑클의 노래 Mary Was An Only Child 다. 이 노래는 한 시대를 풍미했던 불세출의 듀오 사이먼 앤 가펑클에서 독립한 아트 가펑클이 첫 번째로 낸 솔로음반(Angel Clare, 1973)에 수록된 곡이다. 기막히다는 자아도취에 빠져 혼자 미소 짓는다.

셋.
베트남전쟁을 배경으로 한 또 하나의 영화 이준익의 <님은 먼곳에>에서 인상적인 것은 커다란 눈망울로 말없음을 대신하던 수애의 표정연기였고, 남편에 대한 애증이 가중됨에 따라 변하던 그녀의 의상이었다. 온몸을 꽁꽁 감쌌던 그녀가 하나씩 옷을 벗어던짐으로써 전근대적 여성으로부터 탈주를 감행하더니 엔딩에 이르러 다시 순이의 형상으로 회귀하는 것이 흥미로웠다는 얘기다. 하지만 정작 나를 지배한 것은 써니가 부르는 노래들이었다. 그러니까 영화에는 몇 곡의 노래가 써니의 입을 통해 불려 지는데, 지긋하게 눈을 감고 부르던 ‘늦기 전에’에서 시작하여 이역만리 향수와 불안을 단숨에 날려버리는 ‘수지 Q’와 ‘월남에서 돌아온 김상사’에 이르기까지. 이처럼 하나 같이 단조로운 스코어들로 채워진 것은 국익 때문에 명분 없는 전쟁에 뛰어들어야 했던 젊은이들과 스테레오타입의 시대를 소환하기위한 장치로 보인다. 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압권은 김추자의 노래 ‘님은 먼곳에’가 들려오는 장면이었으니, 울창한 정글 위를 비행하는 헬리콥터와 살육전이 벌어지는 전장의 모습이 번갈아 보여 질 때 들려오던 ‘님은 먼곳에’는 정녕 꿈이었으면 좋았을 현실을 반추하는 꿈속의 멜로디처럼 내 가슴을 헤집고야 말았다.

솔직히 영화를 보기 전에도 노래 ‘님은 먼곳에’가 위문공연 장면에서는 절대로 나오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왜냐하면 흥겨운 것과 거리가 먼 멜로디에 속칭 ‘아미 댄스’용으로 부적합한 박자로 이뤄졌다는 점에 기인하지만, 무엇보다 이준익이라면 이 음악을 공개된 장소에서 선보이지 않을 것이라는 일종의 믿음 같은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만일 써니가 ‘님은 먼곳에’를 위문공연장에서 불렀다면 야유와 아우성이 쏟아졌을 테니 영화는 신파로 흘러갔을 게 뻔하고 그것은 감독 스스로 자신의 영화를 정면으로 배반하는 것 일터. 게다가 흥미로운 것은 남편에 대한 만감을 담아 부르던 이 노래를 다시 부르는 장소가 베트콩의 은신처라는 점이다. 천진난만하게 뛰놀거나 공부하는 아이들과 한 곳에 모여 노래를 듣는 가족들의 평온함이 깃든 은신처는 지상의 전장과는 사뭇 다른 풍경이 펼쳐지는 장소라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결국 월남에 온 후 처음으로 환한 웃음을 지었던 헬기 장면과 어느 때보다 평온한 모습으로 지하은신처에서 부르는 노래가 ‘님은 먼곳에’라는 점은, 남편을 찾아 나선 순이가 스스로에게 묻는 질문에 대한 이준익식 대답이 아닐까 싶다. 요컨대, 전쟁은 참혹하지만 그 속에서 피어나는 삶의 연속성마저도 끊임없이 나를 찾아가는 여정의 일부임을, 이준익은 노래 ‘님은 먼곳에’를 통해 들려주고 있다는 말이다. 계속하다가는 영화가 좋은 건지, 음악이 좋은 건지, 아니면 전쟁이 좋은 건지 구분이 안 될 지경이니 정신 차리고, 극장으로 나서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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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닫힌 교문을 열며>를 처음 봤을 때가 생각난다. 당시의 나는 <파업전야>를 ‘대수롭지 않게’ 대할 수 있는 천연덕스러운 얼굴을 가진 중학생이었다. 철부지 중학생이던 나에게 아주 어렵게 찾은 것이라며 <닫힌 교문을 열며>의 조악한 복사본을 건네던 운동권 출신의 한 아저씨. 나와 꽤 친한 친구였던 아저씨의 얼굴은 어느 때보다도 상기되어있었고, 나는 의아한 눈빛을 보내며 그가 건넨 영화를 받아들었다. 이제야 필름으로 편안한 상영관에 앉아 이 영화를 관람하며 하는 이야기지만, 아저씨가 그때 나에게 주었던 <닫힌 교문을 열며>는 화질, 음향 모든 것이 영화를 감상하는 관객의 입장에서는 최저의 상태였다. 제대로 소리도 들리지 않는 테잎을 보며 고개를 갸우뚱 거리는 나를 보며 아저씨는 ‘그래도 이것은 정말 필요하다’라는 말을 쉴 새 없이 쏟았었다. 꼭 7년 전의 이야기이다.

한창 입시에 열을 올려야 했던 나는 ‘학교’라는 울타리를 비평의 시선으로 가려내기에 적절한 위치에 서있지 못했다. ‘합격’이라는 선의 상위권에 속하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 했고 때문에 오로지 고등학교 진학을 위해 하루하루를 힘들게 살아남아야했다. 내가 다닌 중학교는 자연스레 예술 고등학교와 연결되어 있는 곳이었고, 매년 최고의 합격률을 자랑했던 만큼 낙오라는 것은 용납되지 않았다. 그런 나에게 <닫힌 교문을 열며>에서의 치열한 투쟁의 모습은 당연히 어색한 것이 아닐 수 없었다. 정진영이라는 배우도 생소했던 나의 머릿속에 <닫힌 교문을 열며>가 주었던 의문은 ‘왜?’ 라는 생각이 전부였다. 영화의 마지막,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굳게 잠긴 교문을 열어젖히는 교사의 비장한 눈을 뒤로하며 학생들은 하나 둘씩 웃음과 눈물을 섞는다. ‘왜 저들은 스스로 교문을 열지 못하는 것일까?’, ‘도대체 어째서 학생들은 저렇게 싸워서 이겨내야만 하는 눈빛을 가진 공격적인 야수의 모습을 보여주어야만 하는 것일까? 왜 선생이 학생을 저렇게 무차별적으로 억압해야만 하지?’ 그리고 <닫힌 교문을 열고>의 관람 직후 가방에 묻은 흙먼지를 툭툭 털면서 일어나는 나의 마지막 질문은 이것이었다. ‘이 영화가 나에게 진실로 하고 싶은 말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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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흘러 나는 바라던 대로 무난하게 고등학교에 합격했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에 막 올라왔을 때 합격의 기쁨을 가득 누리며 온 세상을 다 가진 듯 친구들과 교정을 누비며 뛰어다녔다. 하지만 입학 직후에 누린 달콤한 즐거움은 결국 1년이 되지 않아 자연스럽게 회수되어져야만 했다. 만년 고등학교 1학년이고, 만년 십대로 남아있을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의 모든 고등학생이 그러하듯 나도 역시 이십대로 향하는 첫 발판인 대학입시를 위한 시간을 대비해야했다.

<닫힌 교문을 열며>의 주제는 성적순으로 판단되어질 수 없는 ‘노동’과 ‘교육의 괴리’에 있지만, 영화가 말하는 궁극적인 목표는 ‘자유’다. 학생들은 대학 진학반과 취업반으로 분류되어 각자의 학교생활을 수행하며 적절한 타협점을 찾는다. 흥미로운 것은 ‘서로 다름’을 이미 충분히 인식하고 있는 아이들을 대하는 교사들의 태도다. <닫힌 교문을 열며>는 학교 내에서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노동자(혹은 조금 다른)로의 삶을 택한 학생들의 이야기에 비중을 두되 그들을 둘러싼 사회・정치적 갈등을 조금씩 흘려 보여준다. 대학교에서는 혼란을 바로 잡기 위한 시위가 한창 진행 중이고, 간접적으로 선배들의 투쟁을 바라보는 고등학생들은 학교에서 배운 ‘자유’라는 것의 가치를 바탕으로 서로를 마주보게 된다.

학생들은 자유를 위해 싸운다. 자유의 뒤에는 차별받지 말아야 하는 신성한 ‘노동’으로의 삶이 존재하지만 일차적으로 <닫힌 교문을 열며>에서의 그들이 원하는 것은 교지의 검열에 제재를 가하는 손들을 막는 것이다. 학생을 위해, 학생에 의해서 만들어져야만 하는 교지를 정치적인 상황으로 억누르는 탄압의 기운을 느낄 때 그들은 스스로의 생존을 걸 만큼의 분노를 느낀다. 단지 ‘편파적이고 차별적인’ 기사를 써내려가지 않기 위해, 또한 한 가지만 바라보는 담론의 형성을 막기 위해 싸움을 시작하는 학생들의 눈빛에 소수의 교사들이 커다란 방어막을 세워줌으로 인해 아이들의 ‘싸움’은 세상을 향한 ‘투쟁’으로 확장된다.

제작 된지 10년도 훨씬 넘은 <닫힌 교문을 열며>의 이야기와 지금 시대의 학생들이 오르고 있는 가파른 언덕은 제법 많은 부분을 공유하고 있다. 그때의 상황, 그때의 현상 그리고 그때의 환경과 같이 외부적인 변화는 과거를 생각할 수 없을 만큼 발달되었으나 아직 그들의 ‘투쟁’이 종결되어졌다고 단정 짓기는 너무 이르다. 물론 <닫힌 교문을 열며>를 보며 눈물을 참지 못하시던 한 교사분의 경험을 직접적으로 이해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내가 그분들과 동시대를 살지 않았으므로, 시대적인 시간차에서 오는 이질감은 당연히 작용될 수 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하다’라고 말 할 수 있는 것은, <닫힌 교문을 열며>의 두 번째 관람을 통해 잠시 잊고 지냈던 나의 학창시절의 기억이 아주 소량의 눈물과 함께 흘러내리는 것을 스스로 인식했기 때문이다.

나의 고등학교 시절을 잊을 수 없다. 특목고에 지원해서 어렵게 들어간 곳이기 때문에 모교에 대한 자부심은 아직까지 깊게 뿌리박혀 있지만 그곳은 더러운 사리사욕이 존재하는 엄청난 모순의 공간이었다. 대한민국에서 예술을 꿈꾸는 고등학생들이 모인 최고의 엘리트 고등학교. 나는 그 속에서 ‘자본’을 위해 ‘투쟁’하는 대다수 교사들의 사회적 흐름을 읽지 않을 수 없었다. 예술에 대한 갈망과 친구들, 그리고 나를 이끌어주셨던 소수의 선생님들이 아니었다면 아마 고등학교 시절의 기억은 아프고 상처받은 시간으로 함축되어 가슴 속에 앉아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곳은 답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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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학교의 교지는 철저히 교사의 손에 의해 만들어졌다. <닫힌 교문을 열며>의 학생들의 상황과 대입시키기는 어렵지만 적어도 학생의 손에 의해 만들어 지는 것은 소수의 기사들뿐이었다. 교지를 움직이는 신문부는 교내 동아리 중 가장 복잡하고 공정한 절차를 통해 선발되는 인재들을 ‘육성’하는 우수 집단이었고, 편집부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엄청난 노력이 필요했다. 하지만 그 뿐이었다. 예술이라는 것을 모토로 많은 담론을 형성해야만 했던 교지는 어느 정도 제 구실을 갖춰나간 때도 있었지만 한 치의 실수도 용납되지 않은 채 완벽히 교사의 통제로 인해 굴러가는 허수아비와도 같았다. 신문부에 들어가 나의 실수-인지 그렇지 않은지 진상을 밝히기도 전에 내동댕이쳐져야 했던- 때문에 그곳에서의 1년의 시간을 보내고 밖으로 나오게 되었을 때야 비로소 완벽히 물러나 학교를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그때 어줍잖은 정치적 분노로 똘똘 뭉친 나를 ‘객기의 중심’이라고 불러도 그것을 부인할 만큼의 타당한 주장이 없음은 명백한 사실이었다. (이제서야 고백하지만)나는 학교의 시스템에 정말 가슴 깊은 짜증을 느낄 때마다 늘 퇴학의 두려움을 함께 고려해야만 했다. 어렵게 들어왔던 학교이고 적어도 졸업 후 동문을 통해 몇 가지의 안정된 삶은 보장되어있다는 생각에 선뜻 내 생각을 누구에게 꺼내 보여주기가 쉽지 않았다. 몇몇 교사들의 태도와 더불어 어째서 참교육을 생각해야하는 고등학교(그것도 예술 고등학교)가 대통령을 포함한 온갖 정치인들에게 둘러싸여 운영되어져야만 하는지에 대해서도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런 것들을 토로하며 작은 주장을 펼치기에 나는 한낱 ‘학생’일 뿐이었으며, 좋은 ‘인상’을 토대로 점수를 주는 사람들은 학생이 아닌 교사들이었기에 나는 학교가 아닌 바깥의 정치적 화두에 열을 올릴 수밖에 없었다. 그때 처음으로 교복을 입고 광화문에서 ‘집회’라는 것에 참석했었다. 물론 나의 정치적 입장은 <파업전야>를 무심코 지나치던 중학생 때와 크게 달라지지는 않았지만, 당시에는 어떻게든 응어리진 무언가를 풀고 싶은 마음이 너무 간절했었다.

내가 졸업한 이후 서울 예술 고등학교는 ‘붕당정치’에 열을 올렸다(혹시나 나의 모교에 근무하시는 학과 선생님들이 이 글을 발견하여 엄청난 논리를 바탕으로 비판에 비판을 가해도 그분들은 여전히 ‘옳다’는 것을 밝힌다. 다만 ‘나의 눈’으로 그들은 ‘그렇게’ 보였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학생의 눈’으로). 신문과 뉴스에 이니셜로만 오르내리는 고등학교의 모습은 대번에 나의 모교라는 것을 알 수 있게끔 친절하게 보도되어지고 있었다. 나에게 모교의 추억은 사계절이 뚜렷한 아름다운 교정과 친구들, 혹은 혼자서 방랑하며 고뇌하던 예술을 위한 축배가 전부다. 수업시간에 자신의 사회적 이념을 실현시키려 노력하셨던 소수의 교사들, 그리고 학생의 인권은 안중에도 없이 물을 가르고 벽을 쌓아올리던 학과 선생님들. 우리가 모르는 어딘가에서 진행 되었을 또 다른 ‘신선한’ 가치논쟁들. <닫힌 교문을 열며>에서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 라고 말하는 학생들은 실제로 아무런 힘이 없다. 그리고 나도 그곳에서 그저 하나의 학생일 뿐이었다. ‘그 아이가 뭘 잘 하던데’라고 학생들을 기억하기보다는 ‘그 아이가 어느 대학에 갔더라?’로 기억되는 구성원일 뿐이었다.

내가 걸어온 고등학교 시절이 <닫힌 교문을 열며>에서의 투쟁처럼 격렬하고 힘들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그때의 기억이 너무나 뚜렷하게 생각나 영화 앞에서 한참동안 고개를 숙였다. 지금도 여전히 진행되고 있을 우리들, 혹은 아이들의 투쟁. 여러 아이의 입시를 맡았던 과외 선생으로 역할을 수행했던 나 자신도 아이들에게 잘못된 방법으로의 행복을 추구하게 만들지는 않았나 새삼 생각해본다. 변해야만 하는 것은 아직도 명백하게 존재한다. 하지만 이것을 변화시키는 것은 '너무나' 힘들다. <닫힌 교문을 열며>에서 아이들을 위해 마지막 싸움을 벌이는 배우 정진영씨의 모습과 아직도 뜨거운 스크린쿼터 논쟁에서의 정진영씨의 모습이 오버랩된다. 씁쓸하다. 우리 모두는 알고 있지만 언제, 그리고 어떻게 변할지는 기약하기 힘든 왜곡된 진실들. ‘닫힌 교문’은 언제쯤 활짝 열릴 수 있을까. 그래도 우리가 아직 꿈을 꿀 수 있는 이유는, 억압받는 현실 속에서도 교육의 주체는 ‘교문’이 아니라 교사와 학생들이기 때문이다. ‘교문’이 없어도 어디서든 소통은 가능하다. 그리고 그 ‘교문’을 고발하는 눈, 그것이 독립영화 혹은 영화가 가진 커다란 긍정적인 힘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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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9.13


결코 달콤하지 않았던 [달콤한 인생]과 우아할 수 없었던 [우아한 세계], 그 반어적 화법으로 꼬여버린 인생을 우린 본 적이 있다. 하지만 이준익 감독은 에둘러 가지 않는다. [즐거운 인생]은 정말로 ‘즐거운 인생’그 자체를 그리는데 공을 들인다.“사는게 어떻게 즐거울 수 있니.”“이 빌어먹을 현실을 보라구.”“ 에잇, 더러운 세상.” 물론 ‘인생’ 혹은 ‘세계’, 이 참을 수 없이 진중한 단어에 부과된 가치관은 제각각 자유다. 그러니까 [즐거운 인생]이 즐거운 인생을 그리려는 시도를 애시 당초 받아줄 용의가 없으신 분들은, 이 글을 읽을 필요도, 이 영화를 볼 필요도 없다.

영화는 2시간짜리 판타지 놀이다. 앤딩 크레딧이 오르고 극장 밖을 나설 때 얄밉게 전해오던 그 이질감으로 영화 속 세계를 애타게 그리던 경험은 누구에게나 있다. [즐거운 인생]은 이러한 극장에서 영화보기 체험과 맞닿은 부분이 있다. 킬링타임용 영화라는 게 아니다. 뭐랄까. 현재진행형 영화라 할 수 있겠는데, 꿈과 행복 등 ‘즐거운 인생’에 관한 가장 중요하고도 기본적인 질문을 던지고 영화 속에서 그에 관한 이야기를 끝낸다. ‘그리고 삶은 계속된다’ 식의 사려깊은 배려는 이 영화에서 찾아보기 힘들다. 영화 속 밴드 ‘활화산’이 무대에서 내려왔을 때, 이 영화가 갖는 힘은 신기루처럼 서서히 사라진다.

이 영화를 지탱하는 두 가지 요소에 대해 살펴보자. 첫째, 영화 속 남자들의 환상. 하고 싶은 걸 하고 사는 바로 그때, 즐거운 인생을 살 수 있다는 그들의 외침. 그리고 “나이들면 마누라보다 친구야” 라는 남성 연대의 끈끈함. 임순례 감독의 [와이키키 브라더스]에서도 ‘활화산’만큼 촌스러운 작명센스를 보이며 ‘충고브라더스’ 라는 밴드가 등장한다. 그들 역시 중년이 되어 다시 모이는데 그 중 단 한명만이 지방 밤무대를 전전하며 음악을 한다.

다시 만난 친구들은 그에게 “넌 행복하니?” 라는 질문을 하지만 그는 대답하지 못한다. 다른 상황, 그러나 같은 결론. [와이키키 브라더스]에서는 밴드를 떠나는 이들을 붙잡을 수 없지만 [즐거운 인생]의 인물들은 밴드를 구성하기 위해 서로를 붙잡는다. 두 영화가 놓인 지점이 다름을 알려주는 상황들.

둘째, 이 영화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건 장근석이 연기한 현준이다. 현준이 없다면 이 영화는 앞으로 나갈 수 없는 태생적 한계를 안고 있다. 영화관을 나오면서 불안한 느낌이 어쩔 수 없이 드는 것도 바로 현준의 존재 때문이다. 중년 상대의 나이트 클럽에서도 받아주지 않았던 밴드 ‘활화산’은 오로지 현준 덕분에 홍대 클럽으로 레벨 업! 한다. (‘현준빠’ 들이 이미 죽치고 있을 정도로 그의 외모, 연주.보컬 실력은 진작부터 홍대 클럽에서도 통한다) 현준과 죽은 아버지 사이에 어느 정도의 교감이 있었는지는 정확히 알기 어렵다.

하지만 현준이 ‘활화산’이라는 곳에서 보컬로 활동하는 이유는 아비에 대한 일종의 ‘제의’ 때문이다. 게다가 기존의 활화산 멤버들도 친구 잃은 죄책감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친구 영정사진 앞에 멍하니 서 있는 기영의 모습은 마치 하늘에 떠 있는 친구의 시선처럼 부감으로 찍혔다. 그 시선 앞에서 기영은 절대적으로 무기력하다. 불타던 기타는 그런 그에게 결정적인 구실로 다가오면서, 무기력함에서 벗어나게 해준다. 그러니까 현준과 활화산 멤버 사이의 암묵적인 제례의식.

덧붙여 이 영화에 등장하는 여성들에 대한 이야기를 안 할 수 없다. 말 그대로 이 영화에서 여성들은'덧붙여' 얘기되고 있다. 김호정이 연기한 기영의 처가 그 중 조금 독특한 위치에 있다. 경제력과 가장의 권위를 가진 그는 기영을 주눅들게 한다. 하지만 이게 조금 애매한 게 그가 기영을 그렇게 만든 것인지, 아님 기영이 그렇게 요령있게 포지셔닝하고 있는지 잘 모르겠다는 것.

하여튼 그는 바람피는 기영에겐 철썩! 뺨 한대를, 음악하는 기영에겐 짝짝! 박수를 보낸다. 후회와 피곤함은 내 몫이니, 그대라도 꿈꾸소서? 환상 속의 그대를 보는 건 다시 내 몫이 될테니. 혁수와 성욱의 처에 대한 캐릭터는 설명이 부족하거나, 설명이 쉬워 다소 아쉽다.

남,녀의 환상과 제례 의식으로 이들의 영화 속 삶이 어디까지 나아갈 수 있을까? 라는 질문은 여기서 하지 않기로 한다. 이 영화는 이런 종류의 질문을 요구하는 영화가 아니라고 이미 서두에서 밝혔다. 어느 인터뷰에서 이준익 감독은 [즐거운 인생]이 말이 안 되는 이야기라고 ,자기는 그걸 말이 되게 만드는데 애썼다. 라고 했다. 그렇다. [라디오 스타]도 그렇고, [즐거운 인생]도 그렇고, 말이 안 되거나 혹은 같은 의미로 너무 뻔한 이야기지만, 클라이막스 지점에 가선 분명 울컥! 하는 순간이 존재한다. 혁수는 마치 유언을 남기듯이 어린 아들에게 말한다.

“레드 제플린, 딥 퍼플, 너바나, 신중현, 사랑과 평화, 시나위 는.... 꼭 들어야 한다” 물론 아들은 그들이 누군지 모른다. 이건 아들에게 하는 말이 아니라 거의 혼잣말에 가까운 읊조림이다. 이 읊조림은 20년 전 그가 락을 모르는 대학후배에게 했을법한 말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바로 여기서 더 이상 나이 들기를 거부하는, 선형적인 시간의 흐름에서 자유롭고 싶은, 오로지 즐거이 살고 싶다는 욕망이 진행형으로 드러난다.

[즐거운 인생] 은 판타지로서의 꿈을 무조건 지지하는 영화가 아니다. 그들이 꾸는 꿈이 한낱 백일몽에 불과할지언정 그 백일몽이 그려지는 과정을 무책임하게 쓱쓱 그리진 않는다. 그리고 꿈은 꾸는 게 아니라 지금 하는 거라고, 행동하는 행복론을 거슬리지 않게 설파하고 있다. 인생 뭐 있어. ‘active' 하게 놀다 가면 그뿐인 걸. ‘아, 나도 기영의 생글거리는 웃음처럼 즐겁게 살아야지.’ 라는 다짐이 어린 시절 일기 끄트머리에 습관적으로 덧붙었던 ‘참 즐거웠다’ 식의 무심한 감상이 아니라는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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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9.04
하성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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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익 감독이 돌아왔다. 딱 1년 만이다. <왕의 남자>의 1000만 동원을 거쳐 <라디오 스타>로 자신만의 인장을 꾹 찍었던 그가 40대 아저씨들이 록 밴드에 도전하는 음악 영화로 귀환했다. 바로 오는 13일 개봉을 앞둔 <즐거운 인생>이다.

최근 SBS <스타킹>이란 프로그램에 40대 '동방신기'가 등장해 주목을 끌었다면 영화 속에는 록밴드 '활화산'이 부활했다. 20년 전 대학가요제 3년 연속 탈락이라는 화려한(?) 기록을 세우고 자진 해체한 록밴드 '활화산'. 리더인 상우의 죽음을 계기로 멤버들이 한 자리에 모이고 소주잔을 기울이던 와중 은밀한 눈빛이 교환된다. '그래, 까짓 것 다시 한번 해보는 거야!'

은행에서 명퇴한 후 주식으로 퇴직금 날려먹고 선생님인 아내 선미(김호정)의 눈칫밥을 먹고 사는 리드 기타 기영(정진영), 초등학생 아들 둘의 교육비를 마련하기 위해 낮에는 택배, 밤에는 대리 운전을 하는 열혈 가장 베이스 성욱(김윤석), 중고차 판돈으로 캐나다로 떠난 자식과 마누라를 부양하는 기러기 아빠 드럼 혁수(김상호)가 그 얼굴들이다. 여기에 유일무이한 활화산의 노래 '터질거야'를 요즘 감각으로 불러 제낀 상우의 아들 현준(장근석)이 합세 하며 밴드는 활기를 띠게 된다.

한 일간지와의 인터뷰에서 "수많은 비주류들 합치면 주류보다 훨씬 많다. 비주류들이여, 주류의 음모에 놀아나지 말자. 주류가 부러워하는 비주류가 되자는 거야"라며 록과 마이너리티, 유희 정신을 설파한 바 있는 이준익 감독. 세련된 영화 언어보다 대중들의 감수성을 자극하는 '촌스러운 준익씨'의 최신작이 <라디오 스타>에 이어 관객들의 심금을 울릴 기세다.

재가동된 '이준익표' 감수성

투덜이 L : "우리 오랜만인데? 꼭 '활화산' 멤버들이 다신 뭉친 기분이야."

시니컬 H : "우리도 이제 영화 속 현준이 처럼 스무 살이 아니잖아. 먹고 살다 보니 바빠져서 그런 것 아니겠어? 아, 영화 보면서 이런 감정 느끼는 관객들이 하나 둘이 아니겠구나."

투덜이 L : "선배는 작년에 <라디오 스타>에도 감동 먹었었잖아. 눈물 쏟는 거 옆에서 다  봤다고. 우리 준기 씨랑 우성 오빠가 빛났고 1000만 관객이 인정했던 <왕의 남자>는 그렇게 탐탁치 않아 하더니 말이야."

시니컬 H : "그건 개인의 취향과 기호라고! <라디오 스타>에서 '형이 와서 좀 비춰주라'라는 대사가 아직도 잊혀지지 않아. 올해는 더 치열하다는데 작년 추석 개봉작 중 호평을 얻었는데 흥행은 가까스로 200만을 넘겼잖아. 기자들끼리 흥행 예측 내기 했었는데 지는 바람에 아까운 돈만 날리고 말이야."

투덜이 L : "올해도 기자 시사회 반응은 좋지 않았어? 아무래도 이준익 감독은 먹물들한테 인기 인가봐. 하긴 확실히 울리고 웃기거나, 영상이 세련됐거나, 잘나가는 스타들이 나오는 영화는 아니니까."

시니컬 H : "<라디오 스타>랑 겹쳐지는 부분만 봐도 그렇지. 한물 간 록스타랑 매니저와 록밴드를 결성하는 40대 아저씨들. 이준익 감독도 전작보다 '더 확장된 이야기'라고 하더라고. 하긴 주인공의 숫자도, 그 주변부 인물도 늘어난 데다 무엇보다 스타가 아닌 우리 주변에서 흔히 찾을 수 있는 인물들이니까."

투덜이 L : "아무래도 공감대를 형성할 관객층은 <라디오스타>와 비슷할 거 같지 않아? 지식인, 남성, 20대 중후반 이상 관객층 말이야."

시니컬 H : "그럴 수 있지. 하지만 당신이 언급한 것처럼 <왕의 남자>를 봐. 장생과 공길 외에도 연산군이나 처선의 시선을 확보하면서 폭넓은 관객을 끌어 들였잖아. <라디오 스타>의 그 짠한 정서나 '이준익표' 감수성이 그대로인데다 이 30, 40대를 위한 응원가는 어쩌면 보편성을 공유할 가능성도 적지 않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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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울 것 없는 이야기, 그럼에도 불구하고

투덜이 L: "아무리 그래도 이야기는 그다지 새로운 것이 없는 것 같아. 무기력했던 아저씨들이 친구의 죽음을 계기로 다시 뭉치고, 우여곡절 끝에 결국 자그마한 성공을 일궈낸다는 거. 최석환 작가가 이번에도 3일 만에 후다닥 시나리오를 썼다지?"

시니컬 H : "예쁘게 본다면 그런 순발력이 장점이고 까칠하게 본다면 독창성을 접어두는 거겠지. 사실 내러티브만 놓고 보면 여느 할리우드 장르 영화와 다를 것이 없거든. 올해 미국에서 히트한 영화 중에도 존 트라볼타가 나온 <거친 녀석들>도 아저씨들이 모터싸이클 타고 미국 횡단하는 이야기거든. 비슷한 소재의 <브라보 마이 라이프>도 일본 원작이라잖아. 중년들의 꿈을 응원하고 일탈을 그린 영화들은 차고 넘치지."

투덜이 L : "자꾸 아저씨, 아저씨 하는데 당신도 얼마 안 남았거든? 중요한 건 우리가 공감할 만한 감수성이고, 또 소재로 록 밴드를 다뤘다는 차별점이 아닐까?"

시니컬 H : "그 놈의 한국적인 정서 좀 그만하자. 할리우드 대중 영화들이 전세계에서 힘을 발휘하는 건 물론 그간의 물량공세에 길들여진 탓도 있겠지만 그 만큼 인터내셔널한 보편성을 지녔다는 의미도 간과할 수는 없거든? 전체적인 흐름이 무난하다는 건 미덕이지만 충분히 예상 가능한 것들로만 채워져 있다면 쌍수 들고 환영하기에는 무리가 있다고 봐."

투덜이 L : "이 아저씨, 또 딴지 거시긴. 난 두 명의 실업자와 한 명의 기러기 아빠가 자기 꿈을 되찾으려는 노력이 우리 상황 안에 딱 대중영화 만큼의 현실성을 담보하고 있다고 봐. 김윤석 아저씨가 아이들에게 매몰되어 있는 아내에게 '애들이 다야? 하고 싶은 거 있으면 하고 살아'라고 말할 때 울컥 하던걸."

시니컬 H : "그래. 이준익 감독이 관객을 울컥 하게 만드는 건 촌스러운 내러티브나 화면 구성은 아니니까. 라스트 공연을 앞두고 세 아저씨가 아카펠라로 록 연주를 하는 일종의 판타지 신은 누구라도 응원할 수 없게끔 만드는 끈끈한 정서로 가득 차 있으니까."

전략적인 '꽃미남' 장근석, 촌스러운 연주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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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덜이 L
: "아무래도 중년 배우들로만 이뤄진 캐스팅이 약하지 않느냐는 말들이 많던데 우리 근석이가 영화를 살려놨어. 10대나 20대 초반 여자 관객들을 위한 팬서비스랄까? 자기 반영의 개그기는 하지만 오디션 볼 때 나이트 상무의 은근한 눈빛을 봐. 딱 관객들이 스무 살 장근석을 바라보는 시선 아닐까?"

시니컬 H : "그렇게 좋았어? 그런 점에서 이준익 감독은 영악하기도 해. <라디오 스타>에서 '노브레인'이 담당했던 활력을 장근석과 트랜스픽션이라는 인디밴드가 맡았으니까. 노브레인이 카메오로 등장하는 신은 은근히 웃기던데. 감독 자신이 더 잘 알고 있는 거지. <라디오 스타>와 비슷하지만 그게 다는 아니라구!" 

투덜이 L : "다른 이야기인데 여성관객들에게 얼마나 어필할지는 모르겠어. 현실 반영 차원인지 해석의 문제인지 세 명의 아내들은 악녀까지는 아니더라도 걸림돌처럼 느껴지거든."

시니컬 H : "뭐, 남자들이 철이 없으니까 구박받아도 마땅한 거 아닐까. 여성관객들이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미지수지. 여성, 남성을 떠나서 늦더라도 '니 꿈 찾아 맘대로 살아봐'라는 이 지극한 판타지에 얼마나 공감하느냐의 문제겠지."

투덜이 L : "역시 아저씨도 철이 없으시군요. 그나저나 공연 장면은 조금 부족한 느낌이었어. 연습 장면은 가볍게 넘어간다고 하더라도 무대에서 공연하는 장면은 여타 음악 영화에 비해 쾌감이 적더라고. 경쾌한 록 음악이 울려 퍼지는데 불구하고 말이지."

시니컬 H : "응. 연습 장면의 대사나 표정들은 밴드 경력 있거나 음악 좋아하는 친구를 둔 관객들이라면 쉬이 공감하겠지만, 록 공연의 활력을 화면으로 전달하는 데는 성공하지 못한 것 같아. 비루한 인생에 대한 응원, 즐거운 놀이 같은 인생, 이런 모토는 충분히 공감하지만 그에 걸맞은 영상이라면 더 좋았을 것을 하는 아쉬움."

투덜이 L : "그걸 상쇄하는 게 아무래도 배우들의 몫인 거 같아. 특히 구수한 아저씨 김상호는 최대 수혜자이자 <즐거운 인생>의 발견이야. 이준익 감독이 어찌나 편애하던지 클로즈업에 애정이 뚝뚝 묻어나오던데? 혁수 캐릭터도 셋 중에 가장 인간적이고 말이야. 드럼 칠때나 아이들과 통화할 때 짓던 그 환한 미소가 어찌나 귀엽던지 말이야."

시니컬 H
: "난 '아귀' 김윤석과 정진영씨 아내로 나온 김호정. 위의 그 김윤석씨의 대사도 좋았지만 판타지 신이라든지 소주 잔 기울이는 장면에서 특유의 너털웃음이 잘 살아있더라고. 김호정은 <플란더스의 개> <모두들, 괜찮아요> 등을 통해 바가지 긁는 아내 전문배우가 되어 버린 것 같지만 그 만큼 넉넉하고 현실감 있는 연기가 없었다면 선미 캐릭터는 스테레오 타입으로 전락했을 거야, 아마."

투덜이 L : "추석 시즌 개봉 작 중 어떤 작품이 흥행적으로, 작품적으로 살아남을지 미지수이지만 <즐거운 인생>이 관심이 가는 몇몇 작품 중에 하나인 건 사실이야. 이준익 2년 연속 안타를 칠 수 있느냐도 궁금하고."

시니컬 H : "그러게. 기획이나 인물, 영화 자체는 참 뻔하고 촌스럽다는 생각이 드는데 완성품을 보면 왠지 정감이 간단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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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운 인생] 촌스러운 준익씨

필진 리뷰 2007.08.27 18:23 Posted by woodyh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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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8.27


이준익 감독의 영화는 촌스럽다. <황산벌>에서 계백의 아내가 목숨을 내놓기 전에 울부짓을때나, <왕의 남자>의 그 신파성이나, <라디오 스타>에서 최곤이 와서 좀 비쳐달라며 울먹일 때, 모두 다 마찬가지다. <즐거운 인생>도 오십보 백보다.

이 40대 남성들, 386 형님들을 위한 응원가는 사실 유치찬란하기가 이를데 없다. 여성 캐릭터들은 그들을 응원하거나 좌절케 하거나 바가지를 긁는 지극히 대상화된 캐릭터들 뿐이며, 밴드 공연장면은 의도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촌스럽기 그지없다(요즘 만들어지는 뮤직비디오에 비할데가 못된다). 고작해야 할리우드 장르 영화를 뛰어넘지 못하는 내러티브도 별 볼일 없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중간중간 심금을 울리는 장면들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게 감독이 충분히 감정이입을 해 낸 캐릭터들 탓인지, 김상호나 김호정을 비롯한 배우들의 호연 때문인지, 1년 만에 후딱 각본을 써낸 최석한 작가의 중간중간 감칠맛 나는 대사빨 덕분인지 모를 일이다.

그러니까 이 노골적인 동시에 직선적인 응원가 중간중간 읽혀지는 정치성, 한국 사회에 대한 직설법, 무엇보다 순진할 정도의 우직함은 또 다시 지식인/남성/20대 후반 이상/밴드 경험 혹은 그런 친구를 둔 관객들에게 먹힐 가능성이 높아보인다. 일종의 판타지인 아카펠라 록 연주 장면처럼 왠지 모르게 그들을 응원해야 할 것 같은 순진함. 이걸 위험하다고 판단할지, 봐줄만한 낭만으로 평가할 지는 순전히 당신의 몫이다.

단, <라디오 스타>의 스타성이나 인물에 대한 집중도는 분명 떨어지니 유의하시길. 사족 하나. 이 영화로 가장 이득을 볼 배우는 이준익 감독이 정이 뚝뚝 묻어나는 클로즈업을 안겨준 김상호 임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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