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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8.10.01 [동사서독] 시간의 잿가루, 기억의 잿가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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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태균


왕가위의 영화적 관심사는 늘 한정되어 있다. 인물들의 나레이션을 통해 뚝뚝 묻어 나오는 애처로움과 처연한 고독의 정서, 기억하는 자와 망각하는 자를 관통하는, 결코 끊어지지 않을 것 같은 순환의 고리로 연결된 그의 영화 속 시선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스쳐 지나감”에 대한 총체적인 관조의 시선으로 존재한다. 그의 영화를 매너리즘의 산물이라 말하는 이도 있지만 매번 열광하며 신작을 기다리는 지지자들 또한 만만치 않다. 어차피 인간의 외로움이란 항상 존재하기 마련인 것이고 그에 대한 해답은 언제까지 미지수로 남아있는 법. 때문에 궁극적인 외로움에의 집요한 탐구로써 채워지는 왕가위의 영화들은 늘 변함없는 정서와 무게감으로 다가왔다. 60년대 홍콩의 나른한 풍광과 90년대의 활기 넘치는 24시간 편의점, 또는 탱고음악이 흐르는 남미의 어느 도시에서도 그는 어김없이 특유의 정서를 구체화시켜 자신의 시공간을 창조해낸다. 이것은 시간, 공간적인 배경만 떼어놓고 본다면야 그의 필모그래피에서 가장 이례적인 영화라고 할 수 있을 [동사서독]에 이르러서도 마찬가지이다. 김용의 무협소설 [사조영웅문]에 등장하는 몇몇 인물들을 토대로 이야기를 발전시킨 이 작품은 “검”속에 깃든 인간의 내면을 투영시킨 전대미문의 예술적 무협 영화라 할 만하다. 확실히 이 작품은 우리가 흔히 보아온 무협물과는 거리가 있다.

[동사서독]에는 검술이 등장하긴 해도 검객이 행하는 무술 자체에 대한 언급은 나오지 않으며 백타산을 오가는 인물들이 지닌 각자의 사연과 그들이 빚어내는 갈등이 대두되긴 하여도 그것들이 의리나 정의 같은 무협 고유의 덕목에 의한 것은 아니다. 왕가위는 무武와 협俠, 그리고 무협의 공간을 자기방식으로 재창조하며 장르를 통해 사유하는 고유의 화두에 대해 털어놓고 있다. 영화 속의 등장 인물들이 공유하고 있는 것은 강호의 은원 따위가 아니라 해소될 길 없는 절대 고독이고 영화 속에서 보여지는 모든 행위는 고독감의 표출, 혹은 그것을 떨쳐내려는 행위로 귀착된다. 망각을 위해 마시는 술 취생몽사와 잠깐의 위안을 주는 낯선 이의 손길. 영원한 암흑에 빠지기 직전 그려보는 고향의 도화꽃. 각자가 꿈꾸지만 결국은 얻지 못한 것들. 여기에 존재와 부재의 어긋남에서 오는 공허함의 자취들로 이어진 것이 [동사서독]에서 읽어낼 수 있는 인간관계의 전부이다. 바로 이러한 것들이 일반적인 무협물의 갈등요인을 대체하며 백타산의 사막 위에 여타 작품들에서 볼 수 있었던 왕가위의 도시공간을 그대로 이식해 내는 것이다. 이러한 것들은 당연히 협俠이라기 보다 연烟이라고 해야 옳은 것이겠지만 무협 장르와의 접합을 통해 왕가위가 보여주고자 했던 것이 바로 중첩되는 연烟 속에서 얻게 되는 근원적인 고독과 그것을 안고 살아가는 인간의 숙명이었다고 할 수 있을 터.

애당초 검이란 외관상의 찬사와 함께 살생의 두려움 또한 함께 안고 있는 물체. 무협물의 검이 웨스턴의 총과 달리 검객 자신의 정체성마저 규정짓는다고 한다면 검객이란 벗어 던질 수 없는 고독의 무게를 짊어지고 가는 사람들인 것이다. 모두가 그 굴레를 벗어나지 못할 때 손가락을 절단 당해 다시는 검을 잡지 못할 것이라던 홍칠공만이 유일하게 낙천적 성격을 부여 받고 아내와 길을 떠나는 것은 이러한 맥락에서 해석 가능한 부분이 아닐까? 그리고 언제나처럼 왕가위의 영화에서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는 것이 바로 시간 관념이다. [아비정전]에서 영원성을 부여 받았던 1분이라는 시간, 또 [중경삼림]에서 아득한 지속성을 상징하던 만년이라는 시간. 허나 [동사서독]의 시간 관념은 기묘하게 뒤틀려있다. 순차적인 연대기 구성도 아니고 규칙성을 읽어낼 수 있는 재배열이라고 보기도 어려운 시간들. 오직 기억에 의해 배열시킨 뒤틀린 시간관념은 인물들의 절대고독을 상징하는 또 하나의 장치이다. 폴 토마스 앤더슨 감독은 [매그놀리아]에서 인물들 사이에 놓여진 비탄과 고통을 한 곡의 노래가 흐르는 동일한 시간 속에서 희망적인 공감대로 승화시키지만 [동사서독]에서는 각자의 기억에 따라 비틀린, 그 공유될 수 없는 시간 속에서, 어찌할 수 없는 고독의 비애감만이 더 할 따름이다. 여기에 각각의 인물마다 다른 방식으로 담아낸 검술 씬 또한 무의미한 칼부림이 아닌 내면을 표현하는 장치로써 분화된다.

무협 고유의 장르적 특색으로써 현란한 움직임 속에 나름의 품격과 인물간의 개성을 부여하던 무武는 왕가위의 세계 속에서 엇갈린 인연과 시공간 속에서 보여지는 안타까운 몸부림으로 재생되고 있는 것이다. 따로, 또 같이.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혼자일 수 밖에 없는 공간 속에서 품게 되는 감정이란 타인의 행복에 질투를 느낄 수 밖에 없는 씁쓸한 자조와 내가 가장 아름다웠을 때 사랑하는 사람이 곁에 있어주지 않은 것에 대한 안타까움 뿐이다. 끝없이 순환되는 연속선상에서 모든 것을 잊고자 취생몽사를 들이켜본다고 한들 더욱 더 강렬히 떠오르는 기억에의 자괴감에 빠질 수 밖에 없는 것이고 결국 남아있는 선택은 모든 것을 불태우고 떠나버리는 것 외에는 없다. 어느 하나 미련 둘 것도 없는 홀홀 단신으로 떠나는 것. 그러나 끝까지 떼어놓을 수 없었던 고독의 흔적인 양, 날카로운 검을 손에 쥔 채로 말이다.




소유할 수 없다면 떠나는 거야.

백타산의 객잔을 불태우고 떠나며 구양봉은 말한다. (극장 판에서는 위와 같이 번역되었으나 비디오 출시 버전에서는 ‘가질 수 없어도 떠나지 마라’ 라고 번역되었다. 어느 쪽이 정확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개인적으로 극장 판의 자막처리가 더 마음에 든다.) 왕가위 영화의 매력은 영상뿐 아니라 보는 이의 마음 속 깊은 곳을 쿡쿡 찌르는 듯한 대사의 묘미에도 있는 것. 그의 모든 영화들이 짙은 그리움의 두께를 간직한 듯한 음울한 대사들을 내뱉고 있지만 소유할 수 없다면 떠나는 것이라는 구양봉의 이 한마디만큼 더 깊은 울림을 준 적은 없었다. 이는 구양봉의 길 떠남 역시 이어지는 연烟의 한 갈래에 불과할 것이라는 예감 때문일까? 한가지 확실한 것은 우리 마음 속에 있는 그리움과 고독이 만들어낸 굴레 속에서 어느 누구도 쉽사리 빠져나갈 수는 없다는 것이다. 사람의 마음이 곧 강호이기 때문에 누구도 그곳을 떠날 수 없다던 어느 무협 영화 속 검객의 한 마디는 왕가위의 세계에 흘러 들어 또 다른 울림을 지니게 된다. 바로 이런 암울하고 난해한 분위기 때문에 [중경삼림]으로 달아올랐던 왕가위 신드롬이 이 작품에까지 이어지지는 못했지만 그의 집요함이 훨씬 더 잘 살아있는 작품이 [동사서독]이라는 것은 쉽게 부인하지 못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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