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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건영

좀 더 집중할 순 없었을까?

한 인터뷰에서 작가 최인호는 “소설의 소재로 쓰라며 자기이야기를 들려주러 찾아오는 이들이 부지기수다. 파란만장하기 이를 데 없고 다른 이들은 절대 상상할 수 도 없는 인생이야기라면서. 하지만 막상 듣고 보면 그 정도는 누구나 한 번쯤 겪는 흔한 고생담에 불과한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토로한 바 있다. 또 영화 <호로비츠를 위하여>에서 피아노를 배우러 온 아이의 부모는 하나 같이 자신들의 아이가 절대음감을 가졌다고 말한다. 하긴 초등학교시절만 해도 교실 뒷벽에는 내가 그린 그림이 떡하니 붙어있었으니까.

아무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뛰어난 재능을 가졌겠냐마는 대게는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그 재능이 별것 아니었음을 깨닫게 되고 이를 이겨내면서 성장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지금부터 이야기하려고 하는 영화의 주인공 ‘수연’은 남달라 보인다. 그러니까 재능이라고는 손톱만큼도 없으면서도 자신이 재능 없음을 인식하거나 인정할 줄 모를 뿐더러 오히려 콤플렉스덩어리로 가득 차있다는 것. 게다가 특별한 노력도 않고 그렇다고 포기하지도 않으며 오직 자기의 꿈을 상대에게 설득하고 지원하도록 강변하는데 만 급급한 인물이다. 언젠가는 유학을 갈 것이라고, 단지 남처럼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끊임없이 최면을 걸며 하루를 소비해나가는 이 대책 없는 청춘. 이처럼 뭣 하나 내세울 것 없는 청춘이 열정 하나에 의지해 세상 밖으로 나간다는 것, 얼마나 힘든 일인가. 아무도 인정하지 않는 재능임에도 스스로를 독려하며 이 험난한 세상과 부딪혀야 할 때 그 두려움은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과연 그녀의 꿈은 이루어질까?

단편 <난 그런 사람 아니에요>로 알려진 이승영 감독은 장편 데뷔작 <여기보다 어딘가에>를 통해 바로 이러한 청춘의 이야기를 담아내고 있다. 영화는 책임감도 확신도 없이 탕진하다시피 소비되는 일상을 읊조리듯 담백한 음악을 통해 매끈하게 묶어내고 있는 데, 때깔만 보자면 독립영화의 틀을 훌쩍 넘어설 정도로 만족스럽다. 또한 핸드헬드와 트래킹 사이의 적절한 선택은 몇몇 장면에서 탁월함을 보여주기도 한다.

이처럼 외양에서 만족스런 만듦새를 보여주었으니 이제 남은 것은 주인공이 어떻게 세상과 맞서 자기의 꿈을 이뤄내는지 혹은 실패하는 지를 보여주는 과정일 터. 그러니까 성공과 실패에 대한 결과론적 탐구에 치중한다면 20대 청춘을 소재로 한 것이 무의미할 테고 원인과 배경에 지나치게 집착한다면 무게감에 짓눌려 독립영화의 한계에 봉착할 것이라는 말이다. 하지만 <여기보다 어딘가에>가 선택한 것은 어느 쪽도 아니다. 다시 말해 영국 유학에 목을 맨 영화 초반과는 달리 어느 샌가 주인공의 꿈은 현실에 경착륙해버리고 마는데, 이는 러닝타임의 절반 이상을 세 명의 캐릭터를 (너무 디테일하게) 설명하는 데 허비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감독에게 던지는 질문 하나. 동호의 학교생활에 그토록 많은 시퀀스를 할애할 필요가 있었을까? 현의 동거녀를 두 번씩이나 등장시킨 이유는, 그의 이중성을 알리기 위해서였는가 아니면 수연의 절박함을 설명하기 위함인가. 이도저도 아니면 둘 다 껍데기만 남은 비루한 인물들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싶었기 때문인가? 이렇다보니 영화가 끝날 무렵이면 수연과 동호와 현이 어떤 사람이었고 이들 사이에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는 명확한 반면 수연의 꿈은 온데 간데 사라져버리고 만다. 솔직히 말해 수연의 행위들이 누구나 공감할 만한 구석이 충분함에도, 영화가 보여주는 것은 그녀가 꿈을 향해 가는 과정이라기보다는 하루하루를 버텨내는 궁여지책을 알려주는 것에 더 가깝다는 생각이다.

영화에서 수연은 경제적 도움을 주지 못하는 부모를 떠나 홀로서기를 택하고 있는데, 이를 지속시키기 위해 그녀가 하는 일이라고는 자신을 좋아하는 동호의 옥탑 방에 얹혀살면서 친구에게 푼돈을 빌리는 것뿐이다. 이처럼 사소한 노력도 성취도 병행되지 않는 수연의 행동으로 인해 꿈이 멀어지는 것은 당연해 보인다. 때문에 유학을 꿈꾸고 음악인이 되기를 간절히 원함에도 재능은 고사하고 기본기조차 갖추지 못한, 게다가 이기적이면서 히스테리로 뭉쳐진 그녀의 행동을 보고 있노라면 감독의 의도가 어디에 있는지 의심이 될 정도다. 그러니까 번번이 패배하고 좌절하는 주인공의 꿈과 현실이 머물러야 할 곳이 어디인지를 자문하도록 만듦으로써 동시대 젊은이들의 공감대를 얻어내려 한 시도가 엿보임에도 불구하고, 자칫 무기력하고 나태한 청춘의 자화상을 드러내는 것 같아 아쉽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재능이 없음에도 죽도록 노력하면서 작은 성취를 맛보며 앞으로 나아가던 <아스라이>의 상호나 남루한 현실 속에서 자신이 원하는 그 무엇을 발견해가는 여정을 그린 <나의 노래는>의 희철과 비교해볼 때, 영화의 주인공 수연은 낙천주의자도 아니고 노력파도 아닌 단순한 몽상가에 지나지 않음이 발견된다는 말이다. 이는 소재가 가진 충만한 에너지를 십분 이용하지 못한 채 인물들의 문제를 내부가 아닌 외부에서 찾으려한, 그러나 충분히 보여주지 못한 것에서 비롯된 게 아닌가 싶다. 시종 자기합리화로 일관하는 수연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난 그런 (재능 없는) 사람 아니에요’를 외치는 것 같아 안타까울 정도다.

만약 수연이라는 캐릭터에 좀 더 집중하면서 홀로 영화를 견인토록 했더라면 어땠을까? 예컨대 동호는 지나치게 관대하고 현은 필요이상으로 음울하며, 수연을 둘러싼 중심인물들의 이야기에 곁가지처럼 끼어든 동호를 짝사랑하는 여학생과 현의 동거녀 설정은, 청춘의 꿈을 다루고자한 영화인지, 음악인들의 삶과 애환을 그린 영화인지 모호하게 만들고 있다. 매끄러운 화면과 중독성 가득한 소규모 아카시아밴드의 음악은 더 없이 좋았지만 여기에 치중하다보니 결기를 놓쳐버린 아쉬움. 한편으로 이러한 것들은 최근 독립장편영화에서 곧잘 발견되곤 하는데, 얻는 만큼 잃어가는 것들에 대하여 한 번쯤 되돌아 볼 때가 된 듯하다. 즉 상업영화 못지않은 품질과 독립영화정신 사이에서 한정적 결단이 요구되는 시점이 도래했다는 말이다.

글을 다 쓰고 나서야 다른 이들의 평을 읽어보았다. 대체로 영화에 대하여 호의적이었으나 구체적으로 왜, 무엇이 좋았다는 얘기는 없었다. 독립장편영화라는 것의 강조를 통해 면피하려는 태도로 밖에 보이질 않는다는 것이다. 이럴 때면 고민스럽기 짝이 없다. 젊은 감독의 장편데뷔작 그것도 불과 1억을 가지고 만든 독립영화 앞에 너무 무거운 숙제를 던져놓은 것이 아닌가 하는 마음이 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로 이 때문에라도 상호부조성 칭찬은 경계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무엇보다 독립영화에서 1억은 결코 적은 액수가 아닐 뿐더러 영화는 감독의 작업이라는 점에서 영화에 보내는 응원과는 별개로 영화 자체에 대한 냉정한 판단이 병행되어야 한다는 생각에서이다. 실망스러웠다기보다는, 너무 세밀하게 그려내려 했던 시도로 인해 더 잘 만들어질 수 있는 여지를 감독 스스로 봉쇄한 것 같아 더욱 아쉬운 영화 <여기보다 어딘가에>, 선택과 집중의 묘미를 어떻게 풀어낼 것인가. 감독에게 남겨진 숙제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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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사'로 이야기하는 '아름답다'

'아름답다'는 동사가 아니라 형용사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영화 제목은 '동사'의 느낌이 든다. 그래서 '아름답다'라는 제목은 동사의 특징을 그대로 가져와 단정적이라는 느낌이 든다. 영화 역시 품사로 말하자면 '동사'의 옷을 입고 있다. 비유와 상징적인 표현이 더러 있지만 너무나 직접적이어서 낯설어 보이기까지 한다. 그렇기에 <아름답다>는 '형용사'처럼 수식이 강한 영화가 아니다. 원작이 김기덕인만큼 <아름답다>의 시놉시스는 김기덕 작품을 닮아 있다. 아마도 먼저 아름다움이 독이 되는 여자를 생각했을 것이고, 그 다음에 그로 인해 처절하게 파멸되어 가는 과정을 떠올렸을 것이다. 그러니 영화는 미처 완성하지 못한 여인의 마네킨고 같다. 탐스럽고 우아한 몸을 가졌지만 옷을 입지 못한채 제 구실을 못하는. 그러므로 당연히 이야기가 위태로울 수밖에 없다. 모든 이들이 동경하는 '아름다움'을 역으로 이용할 줄 아는 소재나 파격적인 엔딩이 인상적이긴 하다. 하지만 그게 다라는 것이 문제다. 그것을 더 풍성하게 해줄 수 있는 최소한의 '수식'도 이 영화엔 없다.


 

스타일 없는 답습

다른 무엇보다 이 영화의 맹점은 신인 감독 전재홍의 스타일이 부재하다라는 것이다. 영화를 보고 글을 쓰기 전, 어떠한 일이 있어도 '김기덕'의 이야기는 배제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기덕'을 이야기할 수 밖에 없는 것은 이 영화에서 아직은 서툰 감독 '김기덕'의 흔적이 고스란히 베어 있기 때문이다. 순간, 난 이 영화를 전재홍에게 물려주지 않고 김기덕 자신이 찍었으면 어떠했을까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잠시 동안 어지러웠고 나의 결론은 '김기덕이 찍지 않았기 때문에 다행이다'였다. 감독보다 먼저 더 나아가는 관객이 되어서는 안되겠지만 <아름답다>는 기대를 철저히, 쉽게 제어할만큼 김기덕에게는 새로운 면이 없기 때문이다.


 

육지로의 착지가 불가능한 세련된 여성

그의 최근 작품을 난 전혀 폄하하지 않으며 그런 적도 없다. 하지만 <아름답다>의 은영이 <빈집>, <시간>,<숨> 등에 등장하는 부유한 집에 사는 세련된 여인의 이미지를 그대로 이어 받고 있다는 점에서 별다른 매력을 못 느꼈다. 물론 여성 캐릭터 구축이 워낙 약한 감독이기 때문에 이해가 되지만, 오히려 난 그의 최근작에 등장하는 그런 세련된 여인들의 모습이 <야생동물 보호구역>,<파란대문>,<나쁜남자>등의 초기작에 나타난 여성들만큼 생동감이 없다고 단정지어 말할 수 있다. 캐릭터가 비현실적이기 때문에 다분히 '은영'이라는 인물도 공중에 붕 떠서 육지에는 도무지 착지할 수 없을 것만 같다. 더불어 김기덕이 최근 이용하는 로케이션 장소인(물론 제작비 절감 차원에서 사무실이 가깝다라는 장점을 이용한 것일테지만) 도시적 이미지가 강한 '일산'이라는 배경도 매마른 이미지를 부각시켜 줄 지는 몰라도 어색하게 느껴지는 것이 사실이다. 장소 활용에 있어서도 김기덕만큼 전재홍 또한 정성을 보이지 않고 있는듯 하다. 같은 비현실적인 공간이지만 <아름답다>의 은영이 사는 오피스텔과 <파란대문>의 '새장여인숙'이 주는 느낌이 차이는 엄청나 보인다. 살아있고 현실적인 공간에 환상으로 붓칠을 하는 김기덕이 요샌 가끔 그립다.


 

다행 그리고 기다림

다시 돌아와서, 그리고 한번 더 말하지만 <아름답다>는 김기덕이 직접 찍지 않았기에 다행이다. 생산적인 감독답게 그는 주머니 속에서 아직 꺼내지 못한 작품들이 많다. 그가 가진 많은 시놉시스 중에 '권총'을 주인공으로 한 이야기나 유럽으로 입양된 캐릭터가 등장하는 이야기와 같은 여러 편의 작품이 있을 것이다. 더러는 포기한 작품도 있을 것이고. 제작일을 하고 있으므로 앞으로 더러 몇 작품은 다른 사람의 손을 거쳐 재생산될 수도 있다. 하지만 난 그 조차도 별반 바라지 않는다. 그것은 <아름답다>가 그 이유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단지 조금 궁금한건 많은 작품 중에서 왜 <아름답다>를 수제자 전재홍에게 주었을까 하는것이다. 이제 기다려야 할 일은 두가지. 처음은 김기덕의 자장에서 벗어나 '전재홍'이라는 이름을 확실히 각인시켜주어야 하는 전재홍이 조만간 촬영할 <인형>이라는 작품. 그리고 톱스타를 말 그대로 '이용'해서 철저히 자기 스타일로 변주할, 하지만 조금은 변화의 기대가 되는 김기덕의 15째 작품 <비몽>의 개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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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인용식탁]에서 연이 말했던 것처럼 사람들은 무조건적인 진실을 원하지 않는다. 그들이 받아들이기를 원하는 진실이란 그들이 감당할 수 있는 것들에 국한된다. 왜? 진실을 정면으로 응대하는 것은 심각한 고통을 수반하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무언가를 말하고 싶은 이가 진실을 직선적으로 드러내는 것은 최선의 선택이 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런 경우 가장 손쉽게 사용될 수 있는 방법은 판타지이며, 이는 판타지가 늘 가장 잔혹한 이야기로 귀결될 수 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미스테리 멜로라는 정체를 알기 어려운 수식어로 치장된 이 영화의 실상은 멜로영화가 아니다. [별빛속으로]라는 영화는 판타지라는 세련된 화법으로 우리가 겪어온 것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혼란스러운 이 세상에 대한 경각심을 유발시키기 위한 작품이다. 내 정서가 메말라 있다고? 뭐, 그렇게 받아들여도 좋다. 어쨌거나 운을 뗀 이상 나름대로 내가 본 것에 대해 이야기해보도록 하자.


그들은 어떻게 죽었는가?

하늘에 대공사격을 행했을 때 사람들은 그것이 불꽃놀이인줄 알고 구경을 나갔다고 한다. 세상은 눈에 보이는 것과는 이다지도 다를 수 있는 것이다. 시민들이 받아들인 아름다움에 비교할 때 그것의 실체는 한참이나 거리가 먼 것이 아닌가. 이 대공사격 중의 총탄 하나가 노란샤쓰(수영, 김C분, 주인공과 구분하기 위해 노란샤쓰로 언급할 것이다)의 몸을 파고 들었다. 그는 죽었다. 군부의 총질이 무엇을 향했는가는 상상에 맡긴다고 하더라도(대충은 짐작 가능하리라 믿는다만), 확실한 것은 그가 억울하게 죽었다는 사실이다. 정부에 의해서.


노란샤쓰의 연인이었던 삐삐소녀는 그의 죽음 이후 줄곧 방황한다. 그러고는 죽은 연인의 이름과 같은 수영을 만나고 마음의 결심을 내린다. 진정한 사랑이란 죽음까지 쫓아가는 것. 그녀는 자신의 연인을 죽음에 이르게 한 국가에 야유를 하고 반항하다 투신한다. (그렇다고 노란샤쓰가 민주화운동에 적극적으로 가담한 인물이라는 뜻은 아니다. 그는 오히려 히피적인 인물이고, 시대와는 조금 벗어난 듯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하필 그런 노란샤쓰가 시대에 의해 희생된다는 것도 아이러니하다.) 하지만 그 죽음이란 거기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전태일의 분신이 세상을 조금 정도는 바꿀 수 있었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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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수영에게 죽은 이들이 나타나는가?

삐삐소녀가 죽고 난 후에 수영에게 이상한 일들이 생기기 시작한다. 죽었을 것이 분명한 삐삐소녀가 자꾸 그에게 나타나는 것. 왜 하필 귀신들이 수영에게 나타나는 것일까? 그것은 수영이 삐삐소녀의 죽음을 보았기 때문이다. 삐삐소녀의 죽음은 수영에게 하나의 트라우마가 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며, 그 이후로도 그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물론 생전의 그녀와의 경험들도 수영이 조금씩 세상에 눈뜨도록 만들어가는 무엇이었다. 아름다운 연애질 같아 보였던 비밀의 공간에서의 장면. 실은 그 곳은 그녀가 죽기 전에 뿌려댔던 삐라를 만들었던 장소였을 것이다. 그래서 그 장면은 그가 시위로부터 자유롭지 않았다는 암시였으리라 생각한다. 그녀는 죽기 전 그에게 진실한 사랑은 죽음까지 쫓아가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 말은 실제로 자신을 따라 죽어줄 것을 부탁하는 것이 아니라, 그녀를 죽음으로 이끌었던 의지를 계승해 달라는 의미로 탈바꿈한다. 그녀는 자신의 뜻을 이을 사람으로 수영을 택했던 것이지, 그를 사랑하는 연인 대신으로 삼았던 것이 아니다. 그가 맺어진 사람은 노란샤쓰의 동생이며, 삐삐소녀의 귀신은 항상 노란샤쓰와 함께 한다. 또한 삐삐소녀는 계속하여 시골쥐 수영에게 각성할 것을 재촉한다.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다고.


왜 그들은 수영에게 여동생을 부탁하는가?

꿈을 꾼 후 무턱대고 수지를 찾아간 수영은 흡사 시월애에서의 한 장면처럼 이렇게 말을 던진다. 긴 이야기가 될 것 같다고. 하지만 영화의 말미에 그는 자신이 겪은 그 비밀에 대해 자신의 아내와도 제대로 소통하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누군가가 함께 있는 것 같다고 말하자, 당연히 오빠의 이야기일 것임에도 - 관객이 보기에는 - 그녀는 더 이상 말하지 못하게 그의 말을 막는다. 그의 경험은 단지 그녀를 만날 수 있도록 한 매개였을 뿐이다. 그런데 왜 귀신들이 수영에게 동생을 부탁하는가?


동생의 의미를 생각해보자. 꿈을 통해 삐삐소녀의 49제를 함께 경험한 수영은 그 환상 속에서 오빠가 아니라 똑같은 방식으로 죽어버린 그녀의 모습을 보게 된다. 어째서? 아무 것도 변하지 않는다면 억울하게 죽은 선배들처럼 역시 이 세상에 의해 또다시 희생될지도 모르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수지는 자신들의 죽음으로 인해 차마 지켜지지 못하고 남겨진 무언가를 상징하게 된다. 이런한 맥락에서 귀신들이 수영에게 나타난 목적은 의지의 계승, 그러니까 쉽게 말해 자신들이 지켜주고 싶었던 무엇을 대신 보호해주는 것임을 확신하게끔 만든다.


현실과 꿈, 그리고 경계

삐삐소녀의 죽음을 함께 경험했던 마지막날, 수지는 하늘에 당구공을 던지며 "이 나쁜 놈들"이라고 외친다. 그러자 하늘에 별이 환하게 나타난다. 그러나 잠시 후 무수히 쏟아진 대공사격은 그 별빛을 가려버린다. 70년대, 아니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우리가 살고 있는 곳은 그런 곳이다. 교묘한 폭력이 언제라도 별빛(진실)을 가려버릴 수 있는 곳. 너무나도 교묘해서 보는 이가 오히려 그 폭력에 동조하게끔 만들어버릴 수도 있는 곳. 이렇게 혼란스러운 곳을 살아가고 있는 한, 우리의 삶이라는 것도 마찬가지로 애매할 수 있다. 달리 말하면 사람들은 현실 속에서도 꿈 속처럼 헤맬 수 있다. 70년대를 재현하기 위해 주도적으로 사용되었던 조명들은, 플롯과 함께 이 영화를 좀 더 몽롱하게 느껴지게끔 만들고 있다. 삶의 실체가 무엇이냐에 대한 질문은 결국 자신이 죽었다라는 사실을 인지하는 것과 동일한 문제이다. 물론 삶과 죽음의 이분법이란 너무 순진한 것임을 모르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우리가 봐야할 진정한 현실이란 존재하기 마련이다. 영화의 제목 '별빛속으로'가 결국은 그러한 진실에의 접근을 의미하는 것 아니겠는가.


점차 자신의 흔적이 사라지기 시작하자 수영은 스스로가 죽어있음을 알게된다. 영화에서 경계를 헤매는 것은 수영 뿐이지만,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있는 곳이 어디인지 알지 못한다. [영혼의 카니발]을 떠올릴 법한 공중전화부쓰씬. 사람들은 아무런 생각없이 그저 사전적으로 살아 있을 뿐이다.


영화가 요구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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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에서 깨어난 수영이 시를 쓰게 되었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영화에서 수영은 주위의 운명에 이끌리듯 수동적인 형태로 각성을 요구받는 대학생 캐릭터로 읽힌다. 그가 시를 쓰는 행위, 즉 창조적이고도 주도적으로 말을 할 수 있도록 변했다는 사실은 바로 수영이 세상에 대한 눈을 깨우쳤다는 각성의 증거이다. 어른이 된 수영. 그가 하는 일이 무엇인가? 생과 사의 기로에서 헤매고 있는 학생들 - 교통사고로 죽기 직전인 청년들 - 에게 이러고 있을 틈이 없다며, 진실한 현실로 귀환하기를 요구하는 것 아닌가.


그가 지식인이라 말할 수 있는 직업을 가졌다는 것은 정말 희망적인 설정이다. 자본과 권력에 휘둘리지 않는 진정한 삶을 가르치는 선생이 얼마나 있던가? 영화는 어른이 된 수영의 입을 빌어 교통사고를 겪은 그들과 마찬가지로 우리에게도 눈을 뜰 것을 요구한다. 최근의 많은 한국영화들이 응석부리는 남자들을 그려놓고 자신들은 이 험한 세상에는 아무런 책임이 없다는 식으로 회피하는 것을 감안하면, 이 영화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그보다 서너발짝은 앞서 나간 것이다. 젊은 자들에게 일깨워줄 의무. 그것을 이행하지 못하는 기성세대의 반성 역시 이루어져야 함을 영화는 느끼게끔 한다. 동시에 우리는 이름을 알지 못하는 과거의 인물들에 대해 감사함을 느껴야 한다. 합당한 역사 없이 세상이 갑자기 우리에게 무언가를 던져주는 경우는 드물다. 귀신들의 가호는 우리들에게도 미치고 있는 것이다. 이제는 우리 차례다. 의지는 이어져 왔고, 또 이어져야 한다. 모른 척하거나, 징징거리고만 있을만큼 시간이 넉넉한게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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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여기, 내 방 한쪽 벽에는 언제부터 거기에 존재했는지 모를 액자 하나가 걸려있다. 검푸른 색채로 넓게 펼쳐진 우주공간과 그 구석구석을 누비는 사이좋은 나비 한 쌍, 그리고 위쪽으로 무수히 박힌 반짝거리는 작은 별들이 그려진 그림. 나비들은 어두운 공간에 놓여있지만, 그들을 향해 꾸준히 내려오는 별빛 덕에 길을 잃어버리지는 않을 듯하다. 게다가 그들에게는 빛의 입자를 잔뜩 머금은 채 그 푸르름을 과시중인 날개가 있지 않은가. 둘이 함께하니 외롭지 않아 좋을 것이고, 노닐기 알맞은 조명이 비춰주니 지루할 틈도 없을 테다.

그런데 놀랍게도, 지금 막 그림으로부터 어떤 강렬한 시선이 내게 건네지기 시작했다. 그림이 제 몸을 액자 너머로 흘려보내기 시작한 것이다. 마치 기체가 된 듯 내 방 곳곳으로 스며들어오는, 그림의 선명한 잔상들. 내 몸을 살짝 보듬은 별빛이 바닥으로 유유히 떨어지고, 춤추던 나비들은 속삭이듯 내게 말을 건네고는 이내 다시 자유로운 궤적을 그린다. 액자와 방 사이의 물리적 경계는 그렇게 지워졌다. 나는 지금, 그림이 쳐놓은 어떤 마법적 자장 안에 놓인 셈이다.

때마침 나비 한 마리가 내려와 내 어깨 위에 살며시 앉는다. 그러더니 이 녀석, 내 눈을 뚫어져라 쳐다본다. 나도 따라 고개를 돌려 녀석을 쳐다보기로 한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나비의 얼굴이 어쩐지 낯익다. 녀석의 얼굴, 내 얼굴과 닮았다. 아니 얼굴만이 아닌 모든 부분이 나와 같지 않은가. 이 나비는 지금, 곧 나다. 그렇다면 내가 바로, 나비였던가. 앗! 눈이 떠진다. 방금 전의 마법 같은 공간이, 나비가, 별빛이, 스르르 사라진다. 벽에 걸린 그림은 묵묵함으로 일관한다. 나는 그저 낮잠을 즐기고 있었을 뿐이다. 모든 게 꿈이었나. 하지만 꿈치고는, 너무도 선명한 꿈.

이상. [별빛 속으로]를 본 후 몹시도 ‘꾸고 싶어진’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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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속 이야기, 그리고 그 속이야기 속 이야기. 또 다시 그 속으로의 이야기. 그렇다. [별빛 속으로]는 명백히 중층의 액자구조로 이루어진 영화다. 여기서 꼭 짚고 넘어가야 할 점. 이 영화에 등장하는 액자 안 그림들(각 이야기들, 또는 꿈, 초현실)은 방 한쪽에 걸린 채 감상되기만을 기다리는 그런 종류의 그림이 아니라는 것. 대신에 [별빛 속으로]는 ‘감상되기’라는 경로를 거스르는 역동적 틀 안에서 그림들을 이해하려 한다. 자체적인 시선을 지녔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바깥으로 자유롭게 흩날릴 줄도 아는, 일종의 살아있는 존재로 말이다.

이를 통해 [별빛 속으로]가 드러내고자 하는 것은 초현실과 현실 사이의 쌍방향적 소통 가능성이다. 물론 관건은 소통을 대하는 개인의 태도에 있다. 가상세계가 침투할 만한 공간을 내 안에 마련하면 할수록, 이른바 ‘꿈과의 대화’가 실현될 가능성은 더욱 커지는 셈이다. 초현실적 상상과의 부단한 만남이 삶 속에서 어떤 유연한 리듬으로 환원될 수 있다고 믿는다면, 그렇다면 내 몸에 ‘틈’을 열어두는 데 보다 관대해지자. [별빛 속으로]에서처럼, 꿈은 스며들만한 틈이 있는 곳을 향하기 마련이니까.

꿈과 나와의 은밀하되 즐거운 동거. 기적을 피워 올리기 위한 첫 단추는 거기서부터 꿰인다. 예컨대 죽음마저 함께한 사랑이야기가 한 남자의 잠재된 정념을 흔들어 깨우고, 그 깨워진 정념이 시와 사랑의 긍정적 역량을 믿게끔 해주며, 이 일련의 과정이 나아가 실재적 구원으로까지 이어지게 되는, [별빛 속으로]의 마법들처럼 말이다. 자, 이제 이 모든 것을 ‘영화’라는 액자 안에 담아두게 된 당신에게 기적이 찾아올 차례다. 시멘트를 비집고 땅 위로 기어이 올라선 한 송이 꽃의 힘을, 당신이 믿는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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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오이마주(neoimages)와 영화 깊게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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