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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호와 이명세의 ‘첫사랑’

필진 칼럼 2007. 11. 12. 15:40 Posted by woodyh98

‘아저씨’ 김성호의 ‘빛나는’ 머리와 ‘소녀’


가수 김성호를 아시는지. 그를 떠올릴 수 있으려면 아마도 그의 이름 뒤에 ‘회상’이란 수식어를 붙여야할 것이다. ‘김성호의 회상’, 이렇게. 가수의 존재감보다 그가 부른 노래의 멜로디나 곡 이름이 먼저 떠오르는 경우가 있는데, 김성호가 꼭 그렇다. 사람들은 방송 출연이 거의 없었던 그의 얼굴을 알지 못한다. 실제로 그의 곡 <회상>은 TV가 아닌 라디오를 통해서 대중에게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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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얼굴 없는 가수’ 김성호의 얼굴을 <콘서트 7080>에서 볼 수가 있었다. <회상>을 부를 때 처음 본 그의 모습 자체도 감동이었지만, 뒤이은 <당신은 천사와 커피를 마셔본 적이 있습니까> 때의 그의 얼굴이 잊혀지지 않는다. 정확히는, 그의 머리, 아니, 머리 중에서도 그의 이마다. 이마가 ― 송구스럽지만 ― 훤히 벗겨져 계셨던 것이다. 그날 난 그의 이마에서 빛을 보았다. 꽤나 강렬한, 쉬 잊혀지기 힘든 어떤 광채를.

<당신은 천사와> 때 김성호는 ‘소녀’를 노래하고 있었다. 상상이 되시는지. 벗겨진 그의 광채 나는 머리와 함께, 소녀를 조곤이 불러대는 그의 모습이 말이다. 천사의 마음을 가졌다는 그녀를, 자기의 더러운 것이 묻을까 보아 가까이 다가가기조차 망설여졌다던 그녀를, 단 한번 커피를 같이 한 기억에 그만 병이 들어버리고야 말았다던 그녀를, 김성호가, 머리가 벗겨진 ‘아저씨’ 김성호가 노래하고 있었던 것이다.

<당신은 천사와>를 부르던 김성호의 모습 ― 이마 ― 에는 확실히, 감동을 넘어선 무언가의 울림이 있었다. 약간의 충격을 동반한 어떤 울림의, 지워지지 않는 상흔이. 과거 어느 때의 어느 첫사랑을 떠올리던 ‘아저씨’ 김성호의 모습에 말이다.


이명세, 기어이 다시 불러낸 첫사랑

또 한명의 ‘아저씨’ 이명세도 마찬가지다. 그 또한 오랫동안 잊었던 혹은 묻어두었던 ‘첫사랑’을 영화 [M]에서 이야기했다. 93년 그가 찍었던 영화 <첫사랑>으로도 모자라 그는 기어이 다시 한번 ― 앙코르! ― ‘첫사랑’을 소환해냈다. 왜일까. 최근 인터뷰에서 이명세는 말했다. “삶이든 사랑이든 스러져 가는 기억으로만 남는다는 게 슬퍼. 애통하고 가슴이 미어져.”

그래, 문제는 ‘기억’이다. 그리고 그 기억을 가능케 하는 전제조건인 ‘시간’이다. 결국 ‘시간’과 ‘기억’의 문제인 것이다. 이명세는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폭풍의 언덕> 등 첫사랑과 관련된 수많은 문학작품들이 이 땅에 존재함과 관련해서는 또 이렇게 말했다. “첫사랑에 대해 쓴 사람이 많은 이유는 그 안에 비밀이 있기 때문이야. 우리가 잃어버린, 지금은 돌아가려야 돌아갈 수 없는 시간이 첫사랑엔 있어.”

첫사랑에는 ‘비밀’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첫사랑의 비밀은 우리가 ‘잃어버린’ 어떤 무엇이라는 것이다. 그 잃어버린 무언가가 하도 원통하고 안타까워 벗겨진 머리의 아저씨(김성호)에게마저도, 머리가 희끗희끗 센 아저씨(이명세)에게마저도 느닷없이 다가와 말을 걸어버리고 마는 것이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첫사랑’에는, 보다 정확하게는, ‘첫사랑의 기억’에는, 이명세의 말처럼, 근본적으로 어떤 감당하기 힘든 ‘슬픔’이 있다. 그건 ‘재현’할 수 없다는 데서 오는 슬픔이다. 그저, 단지, ‘기억’할 수밖에, ‘추억’할 수밖에 없다는 데서 오는 슬픔이다. 기억과 추억은, 안타깝게도, 과거라는 원본을 일백 퍼센트 충실히 복제해낼 수 있는 메커니즘을 결여하고 있다는 인식론적 결격사유를 가진다. 그래서 슬픈 것이다. 슬플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저 과거를 더듬어 그것의 근사치와 조우할 수 있다면 그것에 그만 만족해야 하므로 슬프다는 것이다.

[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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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가장 아름다운 장면은 민우(강동원)와 미미(이연희)의 첫사랑을 보여주던 과거 씬들에 있다. 미미의 미용실을 방문한 민우, 그의 머리를 감겨주던 미미, 자전거를 타고 데이트를 나가던 두 연인, 같이 보았던 영화, 그리고 함께 머리를 맞대고 목격한 해지던 어느 저녁노을의 기억들. 특히 미미를 자전거 뒷자석에 태운 채 ‘방구차’의 연기를 뚫고 서서히 시야에서 사라지던 민우의 자전거 장면이 매혹적이었다. 미용실 안쪽에서는 미미의 어머니가 “어디 가니?”라고 물었다. 미미는 대답한다. “네. 어디 가요.” 정말이지 그 둘은 어디론가 가고 있었던 것이다. 애써 ‘잊혀낸’ 기억의 근원을 기어코는 찾아내려 어디론가 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 이전 장면에서 미미는 루팡 바(bar)에서 창작력의 고갈로 힘들어하던 민우에게 담배를 건넸던 것으로 기억한다. ‘성냥’과 함께, 그 순간, 그어진 성냥의 마찰력과 함께 민우의 시간은 과거 어느 때로 튀어 올랐던 건지도 모르겠다. 이 순간, 우리가 믿는, 과거-현재-미래로 이어지는 선형적 시간관은 해체된다. 현재에서 미래가 아닌 과거로, 시계의 바늘이 휘어버리는 것이다. 시간이 돌연 미쳐버린다.(들뢰즈의 ‘순수과거’)

이 때 소환된 과거는 과거를 온전히 ‘재현’하지 못한다. 재현할 수 없다. 미미는 잊혀지는 것이 두려워 민우에게 “네가 슬픈 영화를 볼 때가 아니라 기쁜 영화를 볼 때마저도 나의 부재를 슬퍼했으면 좋겠어”라고 말했다. 자신을 온전히 기억해달라는 말일 것이다. 하지만 불가능한 일이다. 그저 불완전하게 기억하고 추억할 수 있을 뿐이다. 그 과거가 이미 현재와 부지불식간에 얽혀 있기 때문이다. 현재라는 필터를 거친 과거가 온전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세 번이나 반복-변주되는 횟집 씨퀀스를, 루팡 바를 찾아 헤매는 민우의 여러 번 반복되는 방황을, ‘10월 28일’이라는 특정 날짜가 민우의 기억 속에서 어떻게 소환되고 있는지를 떠올려보시길.) 그래서 이명세는 슬픈 것이다.


이명세의 ‘미쳐버린 시간’

다시 한번 물어봐야 한다. 이명세는 왜 ‘첫사랑’으로 회귀했을까. 그가 ‘스타일리스트’이기 때문이다. 그가 ‘내용-주의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것이야말로 이명세가 왜 에서 첫사랑의 문제를 다루었는지, 그 해답을 푸는 결정적 단초가 되지 않을까. 흐르는 시간, 불완전한 기억.

“특별한 이야기를 하지도 않았는데 좋았던 느낌이 있잖아. 꼭 내용이 좋아서 좋은 건 아냐. 그날 햇빛이 좋았을 수도 있고, 바람이 간지럽게 잘 불어줬다든지, 흔한 얘기였는데 참 편안했다든지 그런 느낌이 있지. 기억은 그렇게 남는 거 같아. 인생의 구조가 그래.”

이명세는 인간-기억의 메커니즘을 근본적으로 결정짓는 것이, 내용이 아닌 스타일 ― 형식 ― 임을 굳게 믿고 있는 사람이다. 그의 표현을 빌자면 ‘유니트 오브 액션’이 아니라 ‘유니트 오브 이펙트’. ‘행동(액션)’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사후적으로 초래하는 ‘효과(이펙트)’야말로 ‘인생의 구조’라는 것이다.

민망하지만, 창피하기 짝이 없지만, 나는, 벗겨진 머리의, 소녀를 노래하던 <당신은 천사와>의 김성호 앞에서 그만 엉엉 꺼이꺼이 곡소리를 내고 울어버리고는 말았다. 세상에, 맙소사. 뜬금없이, 맥락 없이, 내 ‘첫사랑’ R이 화르륵 내 눈앞에, 내 머리 속에 불려와졌던 것이다. 도대체 왜, 무엇 때문에? 나는 내 첫사랑 R과의 구체적인 ‘내용’을 떠올리고 곡소리를 냈던 것이 아니었다. 다만 그저 내 첫사랑이라는 순수‘형식’이 있었을 뿐이다.
이명세는 언젠가 한 영화지 기자로부터 전화를 받았다고 한다. 93년도 당시엔 심드렁하게 흘러 넘겼던 그의 영화 <첫사랑>이, 이유도 모르게(!) 갑자기 생각이 나서는 울고 말았다는 한 통의 전화를. 아마 그 기자는, 김성호와 <당신은 천사와>가 느닷없이 내게 소환시킨 내 첫사랑 R의 ‘형식’과 비슷한 경험을 했던 것이 틀림없으리라. 그러니 이명세는 젠체하는 스타일리스트도, 현실감각 없는 완고한 에고이스트도, 그리고 가장 결정적으로, ‘거짓말쟁이’도 결코 아니라는 것이다. 지금 이 땅 위에서 이명세는 적어도 어느 측면에서 심하게 과소평가되거나 오해받고 있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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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 부산국제영화제 최고의 화제작 중 하나였던 이명세 감독의 [M]이 공개되었다. 예상대로 호불호가 명확하게 갈리는 형국이고 의외로 비판의 칼을 든 평자들이 많은 듯한데, 비판과 호평의 간극이 워낙 크다보니 관객입장에서는 생각을 정리하는데 적지 않은 곤란을 겪는 듯하다. 그런데 특정 영화에 대하여 비판과 상찬이 동시에 벌어질 때면, 대게의 경우 비판 쪽이 우세승을 거두기 마련이다. 웬만큼 명쾌한 논증을 펼치지 않은 한, 작심하고 비판하는 쪽을 이기기에 어렵기도 하거니와 칭찬보다는 비판의 잣대가 더 엄격하고 자극적이며 현란한 언술을 동원하기 때문이다.

[M]을 둘러싼 많은 논쟁 글을 보면, 대체로 전통적 영화의 재현방식과 서사에 대한 논의가 대종을 이루고 있음에도, 호불호에 대한 명확한 논증이 뒷받침 되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그렇다 보니, 주로 이야기가 약하다거나 비주얼로 허술한 이야기를 가리려했다 것이 논점으로 부각되고 있는 실정이다. 아쉬운 대목이다.

이렇게 생각해보자. ‘첫사랑’에 관한 그림을 그린다고 할 때, 피카소처럼 그로테스크하게 그릴 수 도 있고, 장욱진처럼 점묘화법의 동화적 분위기를 낼 수 있으며 몬드리안이나 칸딘스키 유의 추상적 이미지로 채울 수 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어느 것이 더 사실에 가깝게 묘사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첫사랑’에 대한 명확한 규정이 있기는 한 것일까?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이명세의 근작들은 오히려 19세기 영국화가 윌리엄 터너 William Turner의 빛과 색채의 마술에 가깝다. 터너는 일찍이 "내가 눈보라를 그린다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것을 이해하게끔 그림을 그리는 것이 아니다. 나는 그 장면이 어떤 느낌이었는지를 보여주고 싶을 뿐이다." 라는 말을 미술학도들에게 남겼다.

이명세는 [M]에서 ‘첫사랑’의 느낌을 담아내는 데 주력했고, 영화근본주의자라고 기꺼이 천명한 바 있다. 그렇다면 이명세가 비주얼에 목을 매건, 빛과 소리에 천착하건 엄밀히 말하자면 관객이 왈가왈부할 일은 아니다. 또한 감독이 영화에 따라 비판의 대상이 되듯이 비평하는 이들 역시 자신의 글로 평가받아야 한다면, 이야기가 없다거나 내러티브가 단조롭다거나 하는 식의 단편적 서술을 비평도구로 사용해서는 곤란하다. 이는 비평가 자신의 비평적 자산이 빈곤하다는 것을 드러낼 따름이다. 구체적이면서 확실한 논거를 제시해야 하고, 전통적 서사에 대한 이해가 있은 후에 영화비판의 도구로 사용할 때 비판은 설득력을 가지게 되고, 누구라도 귀 기울일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초기 영화에는 영화적 이야기라는 것이 애초에 있지 않았다. 최초로 영화가 상영되었던 1895년 12월 28일로 돌아가 보면, 뤼미에르 Lumiere 는 그저 ‘시오타 역에 기차가 도착하고’ ‘공장 노동자들이 돌아가고’ ‘카페에서 차를 마시는’ 모습을 찍었을 뿐이다. 여기에는 어떠한 이야기도 들어있지 않다. 일상적인 장면을 재현한 것 외에는. 그것은 멜리에스 Georges Melies 가 우연한 순간에 발견한 몽타주를 파악하지 못한 채 마술공연에 사용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다시 말하자면, 재현된 영상이 이야기를 가지지 않았으므로 감독의 연출이 무의미했다는 것이 아니라 애초에 발생가능성을 염두에 두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관객들은 달려오는 기차를 피해 허겁지겁 지하 카페를 빠져나가야 했다. 영화적 재현과는 달리 관객 스스로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있었던 것이다. (기차가 보이고-나를 향해 돌진할지 모르며-위험한 상황이니-나는 피해야한다)

이렇게 초기 영화는 이야기의 발생 가능성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것의 완성은 관객을 통해서 이루어졌다. 즉, 영화는 현실을 재현하는 도구였으나 그 자체에 이야기를 품고 있지 않았다는 얘기다. 이명세가 스스로 근본주의자라고 했던 근간에는 초기영화가 보여준 이야기의 자연발생가능성에 대한 믿음이 내포되어 있었는지도 모른다. 때문인지 몰라도 [M]에는 운동-이미지가 부재하고 있다. 이를테면 인물들의 행동이 영화에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는 것인데, 오히려 이명세는 시간-이미지의 개념을 빌려와 시공간을 해체하고 현실과 꿈의 경계를 무너뜨림으로써 자신의 영화가 예술임을 증명하려는 듯 보인다. 그렇다면 비평가는 이 지점에서 발생하는 모순, 그러니까 고전영화의 ‘이야기 없음’과 현대영화의 특징인 ‘시간-이미지’의 이종교배가 뒤엉킴으로 인해 발생하는 관객과의 거리감 또는 이질감을 짚어내는 것이 올바른 태도라 할 수 있다. 결국 [엠]에 대한 비판은, 단순히 비주얼에 집중한 안일한 연출기법을 문제 삼기보다는 감독이 영화를 인지하는 관념자체를 파헤침으로써 보다 본질적 문제까지 도달해야 한다고 믿는다.

[M]은 빛과 어둠의 공간을 지배하고 분할하는 전지자로서의 이명세의 역할이 확연하게 드러난 작품이다. 과거와 현재, 현실과 꿈의 교차로에 서성거리는 민우와 미미를 만날 수 있는 이 영화에서, 필자는 다른 공간과 확연히 비교되며 몇 차례나 등장하는 일식집에 흥미를 가지게 되었다. 혹자는 일식집 시퀀스가 일종의 맥거핀이 아니냐고 했지만, 그렇지 않다. 민우 일행이 언제나 ‘다금바리’를 주문했던 이 공간에서 [형사 Duelist](2005)가 보여준 농염한 화려함이나 [인정사정 볼 것 없다](1999)의 투박한 낭만 따위는 찾아보기 힘들다. 일과 돈과 결혼과 집 같은 일상적 화제가 쉼 없이 부상하는 가운데 민우의 현재상태가 드러날 뿐이다.(이명세는 지독하게도 이 장면에서 조차 목소리를 왜곡시키며 현실감각을 마비시키려 한다)

민우의 아파트와 ‘뤼팡’ bar와는 달리 평범한 조명에 단출한 장식이 전부이면서 오로지 일상적 대화가 오가는 장소인 일식집은, 잡지사 편집장과 은혜 아버지 등을 번갈아 만나 같은 이야기를 쏟아내는 동안에도 외적 변화가 없다. 결국 일식집은 민우의 혼란스런 현재를 반영하는 도구이며 시공간이 멈춰버린 현실의 상징이다. 그러나 그곳을 벗어나자마자 엄습해오는 옛사랑의 그림자. 추억. 공포들. 그러므로 이야기란 애초부터 없었던 것이 아니라, 마음먹기에 따라서는 얼마든지 유발시킬 수 있었으며, 단지 잠재태에 머물러 있는 것이라 보아도 무방하다. 이렇게 영화의 가장 많은 소재로 쓰였던 사랑과 죽음, 에로스와 타나토스, 현실과 꿈이 변주되는 동안 이명세는 가장 보편성에 기댄 ‘첫사랑’의 기억을 떠올려가며 끝없이 빛과 어둠을 관객에게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을 가지고 관객 각자의 기억과 경험을 떠올려가며 ‘첫사랑’을 완결시켜보라는 듯 말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 영화가 일부 혹은 다수의 관객에게 불편함을 안겨주고 있다는 점이다. 자의식의 과잉이요 비주얼에 목맨 자기도취 필름이라고 말한다. 충분히 이해 가능한 주장들이다. 대체 어디에서 기인하는 것일까? [M] 스스로 이야기를 만들어내지 못했던 것일까? (다수 관객은) 이야기 발생 가능성조차 발견할 수 없었던 것일까. 만약 그렇다면, 무조건 관객의 무지함으로 몰아세울 일 만은 아니다.

빛과 어둠의 조화로움이 아련한 첫사랑의 추억과 만나 황홀한 미장센을 만들어낼지라도, 정말로 그! 첫사랑이 애초부터 가공된 것이라면 우리는 이 현실을(아니면 환상의 세계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앞서 현실과 맞닿은 장소로써의 일식집을 이야기 했지만, 우리의 현실과 영화 속 세계의 괴리감은 차지하고라도 영화 안에서조차 고의적으로 현실이 왜곡되는 것은 우려할 수준이라 여겨진다.

이명세의 근작들에서 나타나는 일종의 경향들, 이를테면 실재와 가공, 현실과 꿈의 경계를 해체함으로써 그리고 이를 가능케 하는 방법으로써의 매혹적 영상을 선택한 것을 탓할 마음은 없다. 다만, 영화관을 나와서도 현실과 환상을 구분하지 못해 어지럼증을 호소하는 관객이 적지 않다면 그것은 명백히 감독의 책임인 것이다. 이명세 감독의 영화를 오랫동안 좋아했던 이들에게 [M]은 현기증을 유발하는 영화임에 확실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명세는 영화근본주의자로서의 행보를 더욱 공고히 가속화하게 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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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0.24

(스포일러를 언급할 영화는 아니지만 여하튼 만땅입니다.)

“[M]의 키워드는 백일몽, 일상의 기이함, 그리고 첫사랑의 감성이다”
“관객의 마음은 갈대와 같고 연애 상대와 비슷하다.”

그러니까 이 두 발언은 이명세 감독의 지향점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M]이 지향하는 바와 지금, 여기 이명세 감독이 서 있는 지점. 자신만의 키워드를 밀어붙인 극단의 형식 실험과 그 안에서 관객을 끌어안고자 하는 노력들 말이다.

근질거리는 입과 손을 주체 못하고 결론부터 꺼내자면 과잉의 수사학 또는 이미지의 황홀경쯤 되겠다. <형사 Duelist>의 연장선상에서 비주얼리스트로서의 자의식을 한껏 더 뽐냈지만 영화-운동 이미지를 실험했던 그가 이번엔 빛과 어둠을 들고 나왔다.

빛과 어둠? 조명으로 먹고 들어가는 영화의 광학적인 기본 원리 아니냐고? 그렇다. 이명세는 점점 영화 근본주의자로서의 자의식을 공공히 해나가는 중이다. 강동원과 이연희, 공효진을 내세워 지극히 상업적인 홍보 전략을 취하는 이율배반적인 예술 영화를 내놓은 셈이다. 어찌됐건 1시간 50분을 취하게 만드는 잔상들이 쉽사리 떠나지 않는 것만큼은 분명한 사실이다. 근데 개봉 전까지 일반 시사는 극도로 제한되어 있다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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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들어와 이명세는 이야기 구조를 무시하고 있다. <인정사정 볼 것 없다>와 <형사 Duelist>, 그의 최근 두 작품 모두 스무 자 사이에서 간단하게 요약 가능하다. < M >도 ‘결혼을 앞두고 첫 사랑의 기억과 마주하는 소설가 민우(강동원)의 백일몽’ 쯤 되겠다.

요약한 스토리와 달리 전통적인 문법으로 < M >을 따라잡기란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찾는 격이리라. 전작 <형사 Duelist>가 이미지와 운동감을 화면으로 구현하기 위한 목표의 일환으로 조선시대 여형사 남순(하지원)과 범인 슬픈 눈(강동원)의 추적과 사랑이란 대강의 이야기를 드리워 놓은 것과 같은 방식이다.

<인정사정 볼 것 없다>는 또 어떤가. 우직한 형사(박중훈)가 말 없는 살인범(안성기)을 쫓아가는 기본 얼개 요소요소에 에피소드별 시퀀스를 채워 넣은 단순한 구조였다. 언뜻 두 영화를 떠올려 보라. 극적 감동이나 이야기의 재미보다 감탄할 만한 이미지와 장면들이 더 선명할테니. 비지스의 ‘홀리데이’를 배경으로 한 계단 살인신, 박중훈과 안성기의 철로 옆 격투신, 강동원과 하지원이 달 빛 아래 검투를 벌이던 액션신 말이다.

< M >은 여기서 한 발짝 더 나아가고 또 한 발짝 양보한다. 우선 이명세 감독의 미장센과 빛과 어둠을 스크린으로 투영하는 영화적 실험은 사극이었던 전작보다 진일보 했다. “빛나는 어둠을 표현하고 싶었다”는 감독의 의도는 부담스러우리만치 200% 전달되고도 남는다. 남순과 슬픈 눈의 사랑이 생뚱맞았다는 전작과 달리 첫사랑에 기억에 미혹되는 민우의 이야기는 감정이입의 정도는 각자 다를지언정 그 감정의 연원만큼은 분명하게 설명해 놓았다. 이 점에 있어 ‘친절한 명세씨’란 별명은 분명 영화와 일치한다.

이명세 감독은 “꿈에서 깨어나기 전 빛나는 어둠의 상태”를 그리고 싶었단다. < M >에서 꿈은 그 시작이요 출발이다. 민우를 쫒는 미미의 나레이션과 미스테리가 꿈인지 현실인지, 루팡바에서 미미를 만나는 것이 실제인지 환상인지는 중요치 않다. 민우는 아침이면 언제나 전화벨 소리에 잠을 깨어 일어나고, 여지없이 어제 자신이 무엇을 했는지 기억하지 못한다. 그렇다, 이건 첫사랑에 관한 ‘백일몽’이다.

이를 관객에게 체험케 하는 것은 몽환적이고 황홀한 비주얼이다. ‘빛과 어둠’을 구현하는 홍경표 촬영감독의 카메라와 최철수 조명감독의 빛은 고전 느와르 영화를 21세기에 버전업 시킨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그야말로 매혹적이다. 또 한 낮의 거리 장면도 자신의 장기인 세트에서 처리한 이명세 감독만의 감각은 영화가 빛의 예술이라는 걸 다시 한번 인지시킬 만한 자신감으로 충만해 있다.

그럼 세 가지 키워드를 가지고 < M >의 구석구석을 요리조리 뜯어보자. 전작이 <지독한 사랑>과 <인정사정 볼 것 없다>를 사극으로 찍었다라면 은 ‘괴로운 남자’가 유령 소녀와의 ‘첫사랑’을 경유해 히치콕 이전의 고전 느와르로 빚어낸 백일몽이다. (여기서 이 백일몽은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하지만 이 백일몽은 비주얼리스트 이명세답게 지극히도 인공적이고 인위적인 디제시스와 조명으로 수놓은 꿈이다.

이명세 감독이 친절히 달아놓은 주석인 세 키워드를 가슴 속 깊이 받아들이고 체험하기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우리를 홀리는 비주얼이 계속 시신경을 자극하지만 가슴까지 전달되는 감흥으로 받아들일 관객들이 얼마나 될까. 확실히 < M >은 고수들의 영화이거나 영화에서 내러티브란 아무 상관없다고 솔직히 고백할 관객들의 영화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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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첫사랑. 아무리 곱씹어 봐도 < M >은 재앙과도 같았던 흥행 실패작 <첫사랑>의 부연이거나 14년 뒤 이야기다. 기술적 업그레이드거니와 미미의 시점에서 보자면 <사랑과 영혼>과도 같다.

구닥다리 미용실, 빙글빙글 도는 자전거, 극장과 바닷가, 처음으로 손을 잡을 때의 미세한 떨림까지. 2007년 이연희의 미미는 1993년 김혜수의 영신에 다름 아니다. 순수한 소년, 소녀가 처음으로 사로잡힌 사랑이라는 감정을 잡아낸 그 떨리는 순간. 구체적 현실은 거세한 채 향수로 가득 찬 이 회상신은 어쩌면 촌스러울 정도로 정화된 정서를 세련된 영상 언어로 구현해 내는 이명세의 영화관과 맞닿아 있다.

현실을 탈색시킨 노스탤지아의 공간으로서의 플래쉬백. 학교를 찾아가 기억을 떠올린 오대수처럼 민우는 고등학교 동창의 결혼식 뒷풀이에서 미미를 떠올린다. 그리고 재현되는 <첫사랑>의 오버랩. 연극반 강사는 소설가가 됐고 미대 1학년생이던 영신은 구천을 떠돌다 민우에게 찾아온 소녀 미미로 남았다.

그러니까 기억을 되새김질 하는 민우의 혼돈, 그 꿈과 현실의 경계를 관통하고자 하는 < M >의 욕망은 첫사랑으로 귀결되고 있는 셈이다. “나는 나중에 당신이 아주 많이 많이 슬퍼했으면 좋겠어”라는 미미의 나레이션으로 시작하는 영화는 이것이 누가 꾸는 꿈인지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모호하게 구성되어 있다. 하지만 경계를 지우고자 하는 작업에서 세 인물의 내레이션이 반복적으로 재생된다 한들 무슨 상관인가. 혹은 혹시 민우와 함께 있는 ‘그녀’가 민우인지 은혜인지 헷갈리게 촬영됐다고 한들 별 다른 차이가 있을까?

만약 전통적이고 단선적인 내러티브로 읽는다면 이건 결혼을 앞둔 잘나가는 남자의 불안과 강박증에 관한 아주 나이브한 보고서로 볼 수도 있다. 부유하고 아름다운 약혼녀와의 결혼이 왠지 순수했던 ‘첫사랑’의 기억을 훼손하는 것만 같은 신경쇠약 직전의 남자에 관한 이명세식 대답. 감정의 원형질의 탐구자답게 이명세가 첫사랑을 다시 불러온 이유는 명백해 보인다. 화려한 이미지에도 불구하고 보고나면 허탈한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알고 봤더니 결혼직전의 불안을 도무지 설명할 길이 없는 소설가가 창작에 매달리고, 첫사랑을 불러오고, 술을 마셔대는 이유가 <사랑과 영혼> 혹은 <천녀유혼>이었다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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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백일몽. 어찌됐건 이 꿈을 시각화하는 이명세의 비주얼에 대한 감각은 정말이지 형용하기 어려울 정도다. 고전 느와르의 세계에 도착한 꽃미남 강동원의 매력 또한 거부하기 힘들다. 쉴새 없이 등장하는 페이드 인과 페이드 아웃의 효과는 그야말로 관객들 또한 꿈꾸고 있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키고, 고, 저속 촬영과 스톱모션 등 현대영화와 이명세 감독이 지속적으로 실험해온 기법들이 빼곡히 스크린을 채운다.

영화의 출발이 미미이며 미미를 쫒는 저승사자가 등장해 우리를 혼란스럽게 만드는 점 또한 이 백일몽의 아우라에 일조한다. 전체적으로 강렬한 조명의 콘트라스트 또한 세트와 함께 이명세 감독의 장기이자 < M >에서 방점을 찍은 부분 중 하나다. 여름날의 강렬한 빛이 도드라지는 건 어둠이 있어서고 이 빛과 어둠에 대한 강조는 현실과 꿈, 현재와 과거의 대비와도 맞닿아 있는 부분이다.

도저히 세트라고 믿어지지 않는 거리신이나 과도할 정도로 어두운 민우의 집은 이러한 분위기를 북돋우는 이명세식 미장센의 결정판이다. 이건 또 ‘미스터리’의 ‘M’을 따왔다는 < M >의 맥거핀 과도 같다. 혼돈과 미스터리의 시각화는 갖가지 촬영 기법과 이 블랙 & 화이트의 강렬한 대비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고 화려한 색감으로 운동 이미지를 극대화했던 <형사 Duelist>와 갈라지는 지점이다. 어쨌건 압도적 비주얼인 것만큼은 틀림없다.

마지막으로 기이한 일상. 과장을 좀 섞자면 민우의 절반은 창작의 고통에 시달리는 <바톤핑크>의 바톤핑크이자 금발 여인을 쫒아 시계탑에 오르는 <현기증>의 제임스 스튜어트다. 여기서 <바톤핑크>에서 붉은색 주조의 화면은 블랙으로 대치하고 타자기는 컴퓨터 자판으로, 또 현기증의 두 여인은 미미와 은혜로 치환하면 흥미로울 법 하다.

어쨌건 민우의 심리상태를 은유하는 과장법은 세 번에 걸쳐 반복되는 일식집 장면으로 대변된다. 원고 독촉을 하는 것이 나인지, 출판사 사장인지, 나를 괴롭히는 것이 나인지 장인인지, 여기에 내가 왔었는지 내가 꿈꾸는 것인지 민우로서는 알 길이 없다. 한 논객은 여기서 ‘장자의 꿈’을 끌어들이는 나이브하고 오독에 가까운 해석을 써내려갔지만 이 장면들은 제목도 그럴싸한 <남자는 괴로워>를 연상시킨다.

초현실주의 작풍의 그림이 걸려 있는 이 일식집 세트는 마침내 세 번째에 그 안으로 들어가는 이중, 삼중의 화면 구도를 통해 중첩되고 반복되는 민우의 혼란함을 극명하게 드러낸다. 창작과 결혼직전의 불안감의 엄습은 이명세식 과장 연기법을 나름대로 소화해낸 강동원의 새로운 연기 덕에 더욱 더 도드라져 보인다. 그리고 연결 장면으로 시끄럽게 울리는 전화벨 소리와 함께 ‘블랙아웃(필름 끊김)’ 현상을 겪은 민우를 잡아냄으로서 꿈인지 현실인지의 모호함을 강조한다. 과연 민우는 미미와의 뒤늦은 추격전과 로맨스, 그리고 은혜와의 일상을 모두 공유하기는 한 걸까? 뭐, 세 사람의 꿈이어도 상관없다는 듯 영화는 흘러가지만 말이다.

역시 중요한 건 이 모든 질문에 해답은 중요치 않다는 것이다. 그저 우리는 비주얼리스 이명세의 전적으로 시각적인 텍스트에 초대된 손님일 뿐이다. 영상으로 느끼면 그 만일뿐. 소화불량에라도 걸릴 것 마냥 과도한 이미지의 황홀경과 형식 실험을 통해 그 혼란함과 신경증, 그리고 첫사랑에 대한 노스탤지어를 대리체험하면 되는 것이다.

촬영과 조명, 사운드의 삼위일체를 완성한 < M >은 그러나 그 끝에 도달하고 나면 왠지 모르게 허무해 진다. 첫사랑에 대한 회상에 젖거나 고단한 현실을 둘러볼 여유는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는다. 한마디로 내러티브는 액션의 실험을 거쳐 기이한 로맨스로 마무리했던 <형사>보다 친절해졌지만 이미지의 황홀경으로 빈약한 알맹이를 가릴 수는 없어 보인다.

어차피 글 초반에 이명세는 근본주의자라고 밝힌 바 있다. <디워>가 800만 관객을 긁어 모으는 나라에서 이야기가 중요하다는 고답적인 주장을 펼칠 생각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 M >은 매혹은 될지언정 감동이나 충격을 전해주는 성질의 작품은 아닌 것처럼 보인다.

90년대 초반, 이명세의 비주얼은 리얼리즘에 경도된 충무로 지형도에서 기술적으로는 촌스러울지언정 분명 새로웠다. 그러나 갈수록 이명세의 영화에는 점점 사람 냄새가 나지 않는다. 사람이 발 딛고 있는 현실이 보이지 않는다. ‘무엇을’이 빈약해진 자리를 차지한 화려한 ‘어떻게’가 소화불량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과연 이미지에의 경도와 실험이 과연 어떤 영화적인 ‘무엇을’에 복무했는지에 대한 문제제기 말이다. “시나리오를 쓸 때 항상 관객이 우선이다. 우직하게 당신을 사랑한다고 연애편지를 꾸준히 쓸 뿐”이라는 이명세 감독의 발언은 어쩌면 의도된 수사이거나 순결한 근본중자의 구애일 것이다. 또 팬으로서 그의 영화에 대한 애정에는 감탄하고 차기작을 평생 기다릴 것이다. 그럼에도 자신만의 인공적인 세계에서 헤어 나올 생각이 없는 이명세 감독의 행보에 전폭적인 지지를 보내기 보다는 우려의 감정이 드는 건 나만의 착각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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