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터데스크 관리자

도움말
닫기
적용하기   첫페이지 만들기

태터데스크 메시지

저장하였습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시네마테크를 향한 연애편지

올해로 4회를 맞는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가 막을 내렸다. 서울아트시네마는 이제 새로운 프로그램을 위한 준비에 분주해 질 것이다. 서울아트시네마의 1년 중, 그 어느 때보다 분주하고 그 어느 때보다 활력 넘치는 한달여의 시간은 또다시 내년을 기약한다. 그리고 동시에 ‘친구들 영화제’의 일원으로 속해있던 나 또한 내년에 돌아올 ‘친구들 영화제’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3월의 첫날, 나는 ‘친구들 영화제’의 폐막과 동시에 개강을 준비해야 한다. 서른 편 남짓의 영화들에 둘러싸여 정신없는 방학을 보냈던 나는 이제 온전히 영화로만 이루어진 달콤한 꿈을 잠시 접어야 한다. 그 어느 때보다 기다렸던 2009년의 겨울은 어느새 봄을 준비하라는 다그침으로 바뀌어 있다.


한국에서 겨울을 맞이하는 건 2년, 정확히 횟수로 따지면 3년 만이다. 3년에 걸친 시간 동안 나는 인도에 잠시 둥지를 틀고 있었다. 인도와 한국, 두 나라는 모두 뚜렷한 사계를 가지고 있지만 실제의 기후는 조금 차이가 난다. 한국에 강한 햇볕이 내리쬐는 여름, 인도는 하루 종일 비가 퍼붓는 우기를 준비한다. 인도의 최북단 지방은 겨울이 되면 영하 2,30도 안팎으로 떨어지곤 한다. 한국의 30배에 달하는 인도의 거대한 땅덩어리는 북부와 중부, 그리고 남부에 걸친 다양한 기후를 가지고 있다. 인도를 여행하고자 하는 대부분의 한국 사람들은 비교적 날씨가 안정적인 겨울을 택한다. 나도 좀 더 쾌적한 여행을 위해 겨울이라는 계절을 선택했고, 그렇게 매년 겨울마다 인도에 머무는 ‘못된’ 습관을 들였다. 인도에서 생활했던 시간들은 더없이 값진 것들이었지만, 그러다보니 자연스레 생긴 기회비용은 바로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였다. ‘친구들 영화제’는 시네마테크의 1년 중 가장 큰 행사이며 평소 보고 싶었던 감독들과 배우들을 만나는 행복을 제공하는 것이기도 하다. 2006년 처음으로 ‘친구들 영화제’의 북적거림에 맛 들린 나는 이후 두해의 겨울을 인도에서 보내며 늘 아쉬움을 안고 살아야 했다. 작년 겨울, 네팔의 안나푸르나 등반 중에 지인들에게 부쳤던 엽서는 온통 ‘시네마테크’라는 단어로 도배되어 있었다. 까맣게 그을린 ‘정글소녀’의 몰골로 3월이 시작될 즈음 한국에 돌아오자마자 가장 먼저 확인한 것 역시 지난 ‘친구들 영화제’의 프로그램이다. 지난 몇 년 간 나에게 겨울이라는 단어는 곧 시네마테크를 의미했다.

그렇게 기대하고 기대하던 ‘친구들 영화제로의 귀환’을 무사히 마친 후, 문득 떠오르는 것은 처음 시네마테크를 만났던 순간의 기억이다. 고등학교 3학년에 진학하던 겨울, 시네마테크라는 난생 처음 보는 공간 안에서 만났던 영화는 아마 구로사와 아키라의 영화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런저런 전시회를 둘러보던 나는 우연히 아트선재 밑에 극장이 있다는 정보를 들었고, 그 길로 내려가 영화를 관람했다. 고등학교 시절에는 거의 인사동에서 살다시피 했으므로 그때 이후 시간이 날 때마다 종종 시네마테크를 찾곤 했다. 그렇게 혼자만 다니던 시네마테크에 친구 손을 붙잡고 온 것은 그 다음해, 그러니까 대학교 입시가 끝난 해의 겨울이다. 프랑소와 오종의 자극적인 단편들을 보며 스트레스를 해소하곤 했던 나는 그때 만해도 시네마테크가 내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공간이 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나는 예중, 예고를 거쳐 자연스레 미대에 진학했기 때문에 영화에 관련된 과나 학원과는 꽤나 거리가 멀었다. 때문에 좋은 영화나 좋은 비평을 발견해도, 그것을 나눌 수 있는 친구들은 지극히 한정되어 있었다. 영화에 관한 농담을 나눌 수 있는 친구들은 있어도 영화가 던져주는 텍스트나 감정들에 대해 이야기할 친구들은 거의 없었다. 화가가 되고 싶은 꿈은 학교 내에서도 충분히 해소할 수 있었지만 영화를 나누고 싶다는 꿈은 어디에서도 해소될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시네마테크에 더욱 안착했고 뜻 맞는 동창들 몇 명이 모여 시네마테크에 대한 이야기를 줄기차게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시네마테크는 나에게 결국 ‘방과 후 수업’과 같은 존재다. 그 곳에 가면 많은 사람들이 반짝이는 눈빛으로 영화 보는 진풍경을 감상할 수 있고 평소에 듣도 보도 못한 영화들을 경험할 수 있었다. 서울아트시네마가 지금의 공간으로 이사하기 직전, 그러니까 소격동 시절에 마지막으로 상영했던 차이밍량의 <안녕, 용문객잔>은 평생에 걸쳐 잊을 수 없는 아련함을 안겨주었다. 서울아트시네마가 낙원상가로 이사한다는 사실을 모른 채 극장이 아예 사라진다고 착각했던 나는 아주 차분히 아트선재의 계단을 쓸며 올라왔었던 것 같다.

극장이 없어지지 않고 예전 모습 그대로 낙원상가 4층에 새둥지를 틀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날 나는 영문 모르는 친구의 팔을 붙잡고 종로 한 복판을 길길이 뛰어다니기도 했다. 돌아보면 그때의 철없던 애정이 결국 지금까지 종로 어귀를 전전하게 만드는 원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아주 어릴 때부터 좋아하던 한 감독의 영화를 극장을 통해 다시 만났을 때의 희열, 그 기쁨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아름다운 순간들이다. 최근에는 시네마테크를 향한 개인적인 욕심도 하나 생겼다. 2년 전, 시네마테크에서 한 러시아 감독의 특별전을 상영했는데 그때 이후 지금까지 그 감독에 대한 커다란 애정을 고스란히 이어오고 있다. 그 러시아 감독의 다른 영화들을 지속적으로 찾아보았지만, 역시 극장에서 보았던 그대로의 느낌은 나지 않았다.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그의 모든 작품을 시네마테크에서 관람하고 싶다. 더불어 ‘관객’으로서가 아닌 ‘감독’으로서 그의 영화를 소개하고 싶다는 당돌한 소망도 가져본다. 매우 뜬금없는 소망이지만, 그 어느 곳에도 이야기해본 적 없는 시네마테크에 대한 조심스러운 고백이자, 시네마테크와 함께 자라온 철부지 꼬마의 ‘장래희망’이다. 나에게 좋아하는 영화, 사랑하는 영화를 함께 나눌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은 시네마테크뿐이다. 영화를 보기 위한 단 하나의 공간만을 허락한다면 나는 주저 없이, 너무나 당연하게 시네마테크를 선택할 것이다. 나의 ‘당돌한’ 소망이 이뤄지는 그날 그리고 그 이후로도, 시네마테크가 영원히 살아남기를 간절히 바란다.




댓글을 달아 주세요

사용자 삽입 이미지

"당신은 창작 없는 예술가지"

[밤 그리고 도시(The Night and the City, 1950)]에서 해리는 영화의 주인공이요, 메리는 해리에 대한 지고지순한 사랑이 있지만 매번 일확천금을 얻으려는 해리에게 희생을 하는 인물이요, 아담은 그런 메리에게 애심을 품었다. 일을 저지르고 난 해리가 메리에게 5만 파운드를 요구하자 메리는 아담에게 돈을 빌리러 가서 해리의 '예술성'을 핑계삼는다. 아담은 메리의 부탁을 들어주나 촌철살인과도 같은 한 마디, "그래. 해리는 창작없는 예술가지.(Harry's an artist without an art.)"라고 말한다. 걸작이다.

영화는 오늘날까지 두어번 리메이크되고 최근 서울아트시네마의 <2009 친구들 영화제>에서 박찬욱 감독과 오승욱 감독의 선택으로 관객들에게 선보이는 등의 예술성을 거뒀다. 극에서 '창작없는 예술가'는 일종의 비극이며 영화 전체를 이끌어갈 수 있는 잠재된 가치인 셈이다. 여기에서 관객들은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것일까. 바로 어제, 2월 10일에도 유사한 형태의 예술은 있었다. 그것은 눈뜨고 일어나보니 검색어 순위에 올라와 있었다. 충격인지 파격인지, 그 경계를 세우지 않은 신해철의 입시학원 광고가 바로 그것이다.

이 글을 쓰는 나는 그것이 '똘끼'로 똘똘뭉친 퍼포먼스의 일종이기를 바랬다. 왜 그렇게 생각했느냐면 광고에서 발견한 문구가 자녀교육과 입시교육이 서로 맞는지 여부를 묻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평소 신해철이 말하던 것이다. 그리고 보이는 것은 성적을 촥! 올려드리겠다는 화살표와 신해철의 '포스있는' 몸짓이 이미지로 들어가 있다. 강한느낌의 화살표이긴 하지만 평면인쇄임을 감안할 때 보는 사람의 반대방향으로 제시돼 있다. 그래서 그것이 총체적으로는 격렬한 반어일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나는 포털사이트를 통해 모자이크 지워진 광고를 접했으므로 어느 학원 이름이 나왔는지는 모른다. '시간이 나면 내가 글을 올리든가 할테니 읽어보시라'라는 신해철의 '쿨한' 혹은 의중을 알 수가 없는 해명을 읽었다. 그것을 읽은 뒤 나는 신해철은 어쩌면 정말로 머리가 좋은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연이어 떠오른 것은 르네 마그리트의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거나 뒤샹의 '샘물'이었다. 광고 표면에서 어떤 이미지를 우리는 봤는가.

우리가 화두로 삼아야 하는 것은 "신해철이 입시학원 광고에 나왔다더라."가 아니다. 오히려 신해철이 왜 입시학원 광고에 나왔으며, 광고 자체에서 '우리 학원으로 오세요'를 말하는 것인지 (혹은 숨겨두었다고 믿고 싶은) 다른 메세지를 담고 있는 것인지, 광고 자체에서 문제가 될 수 있는 문구 혹은 타이틀은 무엇이었는지에 대한 것이다. 기존의 입시학원 광고가 우리에게 준 전형성대로 그 광고를 인식하지는 말자는 얘기를 하고 싶다.

나는 신해철이 '시간이 없어서' 자신의 해명 글을 조금 더 늦게 발표해줬으면 한다. 광고의 붉은 색 처럼 이 문제가 더 달아오르길 바란다. 어쩌면 우리 사회에서 입시교육에 대한 직언적인 난투는 극에 달해 더이상 타협점을 찾지 못하는 한계일 수도 있겠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신해철의 광고를 일종의 예술로 보고 싶은 것이다. 해명글이 발표됐을 때, '내가 돈에 눈이 멀어서 그렇게 됐수다'식의 글이라면 이 글을 쓴 나는 망연자실할 것이다. 허나, 그는 그렇게 '개념없는' 사람은 아닐 것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Favicon of http://blog.mintong.org BlogIcon 하민혁  수정/삭제  댓글쓰기

    세상 만물과 세상 만물이 작동하는 데는 다 이유가 있지요. 어린아이의 옹알거림 하나에도 우주의 이치가 들어 있다는 말도 그래서 나오는 말일 겁니다. 그런데, 아무리 그렇기로 신해철의 학원 광고에서 르네 마그리트를 찾고 뒤샹을 찾고 예술씩이나를 찾는 건 오버겠다는.

    2009.03.03 14:48

사용자 삽입 이미지


Bigger Than Life. 우리가 별 문제 없다고 생각하는 일상의 많은 것들은, 사실 안에 엄청난 독을 품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것들은 때론 인생보다 더 크게 폭발되어 결국엔 인생을 잠식해 버린다. 2009년 한국, 우리들 일상의 바램은 그저 '조금 더 잘 살기'다. 참 소박해 보이는 이 소망은 현재 우리에게 얼마나 큰 대가를 담보로 하고 있는가. 대가가 한 사람 뿐 아니라 한 가족을 잠식해 버린 일화가 50여년 전의 이 미국영화에 있다.

영화의 주인공은, 다들 지루하게 살고 있다고 생각하고 우리만큼은 지루한 삶이 아니라 생각하고 싶지만 그걸 인정하는 게 쉽진 않은, 적당히 화목한 중산층 가정이다. 가장 에드 애버리는 초등학교 선생을 하면서 '조금 더 잘 살기 위해' 택시회사에서도 일한다. 그러던 중 에드는 희귀병을 얻어 쓰러지게 되고, 의사들에게 처방 받는 약 코티존에 중독되면서 미쳐간다. 이 미쳐가는 과정을 영화는 정말 무시무시하게, 동시에 흥미롭게 그려낸다.

퇴원하고 처음 약을 먹었을 때 에드는 약간의 조증 증세를 보인다. 쉰만큼 더 열심히 일해야 한다는-현재 우리에게도 참 익숙한-생각과 함께. 퇴원도 했겠다, 다시 힘도 얻었겠다, 아내 루와 아들 리치와도 더 돈독해졌겠다, 이제 영화가 어떻게 흘러갈까 싶어질 때 에드는 약병을 열다가 '아 참, 아까 먹었지' 혼잣말하고 프레임 아웃한다. 특별히 눈에 띄게 찍힌 장면은 아닌데, 이상하게 오싹하다. 중독 증세를 의심하게 하는 시작은 언제나 중독 이후를 상상하게 한다. 그래서 두렵다.


에드의 정신이상은 심각한 자기도취와 함께 가는데, 그 시작으로 보이는 장면이 화장실 장면이다. 자줏빛 가운을 입고 거울을 보는 에드의 표정은 서서히 조금씩 변해간다. 거만한 눈빛을 짓고 얼굴근육에 힘을 주며 그런 자기 모습에 점점 빠져든다. 그는 이제 예전의 선하고 다정했던 가장의 눈망울을 가지고 있지 않다. 잠시 후 거울이 깨져 금이 가면, 모든 것은 명확해진다. 거울에 비친 조각난 에드의 모습은 분열된 자아 그 자체다. (요즘엔 너무 흔해져 버린 일명 '깨진 거울 장면'. 그래도 이 영화에선 군더더기 없이 빛을 발한다.)

그의 광기는 아이들이 가지고 있는 아동성에 대한 혐오로 이어지고 급기야 아들 리치를 해하려 하는데 까지 이른다. 혐오의 대상이 유년기의 아이라는 것이 흥미롭다. 필립 아리에스의 "아동의 탄생" 을 보면, 중세까지는 아동이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았다고 한다. 근대로 접어들면서 아동이라는 개념이 세워지고 어른의 사랑으로 보살핌 받아야 할 존재들이라는 생각이 정립되었다고 한다. 그러면서 아이를 중심으로 한 가족주의가 발달했다. 영화에 등장하는 50년대 미국 중산층의 가정도 이 형태의 모범답안적인 모습을 가지고 있다. 중산층가정의 유지가 파멸의 덫이 되어버린 가장의 무의식 속에, 아이와 자식에 대한 불안과 증오가 자리 잡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영화는 시종일관 터질 것 같은 불안감을 가지고 2.35:1의 시네마스코프 화면을 장악한다. 영화의 첫 장면. 카메라는 조금씩 서서히 한 건물의 문 앞으로 다가간다. 문이 홱 열리고, 수많은 아이들이 깔깔대고 뛰쳐나온다. 음악은 경쾌하고 아이들은 웃고 있지만 긴 가로 화면을 터질 듯 채우는 얼굴과 웃음소리는 왠지 기괴하다. 에드가 환자를 마치 실험대상 다루듯 하는 의사들과 대화할 때, 그는 대부분 텅 빈 가운데 홀로 있는 원 샷을 부여받고 의사들은 늘 두셋씩 짝을 지어 프레임을 꽉 채운 후 에드에게 이것저것 지시한다. 에드가 미친 상태로 아들 리치에게 수학문제를 풀게 하는 장면에서, 문제 푸는 리치를 중앙에 두고 왼쪽 끝엔 에드가, 오른쪽 끝엔 아내 루가 자리 잡고 대립한다. 이 때 에드에게 스탠드로 인한 커다란 그림자까지 등에 짊어지게 함으로써 한층 광기를 자아낸다.

영화에서 코티존은 중산층 가장의 무의식을 폭발시키는 일종의 맥거핀이다. 영화의 줄거리는 실화에서 유래했다고 하는데, 이것 참 남 일이 아닌 것 같다. 현재 우리의 삶에 코티존과 같은 맥거핀이 침범했을 때 미치지 않고 온전하게 살아남을 자가 얼마나 있을까. 영화는 갑작스런 해피엔딩으로 끝난다. 마지막 웃음에 소름이 돋는 것을 막을 수 없다. 그들의 '오싹한' 해피엔딩은 결국 아직도 끝나지 않고 지속되는 삶을 나에게 각인시킨다.



댓글을 달아 주세요

사용자 삽입 이미지


 

백건영



막강한 할리우드 제작자이자 MGM 총수였던 루이스 B. 메이어는 1950년의 어느 날 한 남자에게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너는 지금의 널 만들어주고 먹여살려준 산업을 욕되게 했어!” 메이어를 분노케 만든 것은 다름 아닌 <선셋 대로 Sunset Boulevard>와 감독 빌리 와일더였다.

할리우드는 1949년을 기점으로 관객이 급격하게 감소함에 따라 스튜디오 종사자의 감축을 가져오게 된다. 또한 할리우드는 TV라는 기술적 도전에 직면해야만 했고 미학적으로도 이미 구태를 반복하며 고루한 도식에 안주하고 있었다. 이렇듯 영화와 TV사이에 전쟁이 한창이던 시기에 빌리 와일더는 자신의 영화 필모그래피를 통틀어 가장 완성도 높은 작품을 선보이게 되는데, 할리우드를 둘러싼 위기들, 즉 경제적, 기술적, 미학적 위기를 다룬 자기반영적 영화 <선셋 대로>가 그것이다.

왕년의 대배우의 저택에서 살인사건이 발생하고 수영장에 떠있는 남자의 시체인 할리우드의 무명 시나리오작가 조 길리스의 내레이션으로 시작되는 <선셋 대로>는, 저물어가는 할리우드 황금기를 반추하고 한 시대를 풍미한 스타를 조명하며 이제는 TV에 밀리고 새로운 영화사조와도 맞서야 하는 할리우드를 이야기하는 영화이다.

흥미롭게도 와일더는 왕년의 무성영화스타로 하여금 자신의 처지를 연기하게 만듦으로써 할리우드를 근거지로 살아가는 이들의 인생을 패러디하며 재구성하고 있다. 이를테면, 사라져가는 모든 것들에 대한 두려움을 여배우 노마에게, 새로운 물결에 대한 할리우드 감독의 집단적 위기감을 몰락한 감독 맥스에게 투사시킨다는 것. 계단을 내려오는 노마를 위해 카메라를 준비시키고 “액션!”을 외치는 그의 표정이 노마만큼이나 비장한 것도 이런 때문일 터이다. 이처럼 <선셋 대로>는 한 때 최고의 성공을 거뒀던 여자와 한 번도 정상에 서 본적 없는 남자가 만나 벌어지는 로맨스에 스릴러가 보태져 자기반영이 다다를 수 있는 극한의 성취를 이뤄낸다.

영화에서 놓치지 말아야할 것은 노마와 친구들의 카드게임 장면에 등장하는, 밀랍인형 같은 무표정으로 일관하며 단 한마디도 하지 않던 버스터 키튼의 모습인데, 서글프고 잔인한 영화산업의 현실 반영이라는 점에서 깊은 인상을 남겨준다. 이렇듯 무성영화의 쇠락과 득의양양하던 유성영화 역시 TV의 보급과 더불어 위기를 맞게 되는 아이러니, 이것이 빌리 와일더가 <선셋 대로>를 통해 바라본 전후 할리우드의 자화상이요, 오늘까지도 <선셋 대로>를 회자시키는 동력이 아닐까, 싶다.



댓글을 달아 주세요



최근 수년 동안, 정확하게는 나이 마흔을 넘긴 이후로 잠자리에서 꿈꾸는 적이 드물어졌다. 어떤 이는 말하기를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꿈이 소멸되기 때문”이라고 한다. 제법 설득력 있는 주장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뇌의 활동이 왕성하지 못한 때문일 수 있겠다는 생각도 해본다. 어쨌거나 꿈은 현실에서 못 다 이룬 아쉬움의 찌꺼기이자 억압된 욕망의 부산물이라는 것이 일반적 정의다. 위기일발의 순간에 안도의 한숨을 쉬게 되는 것도, 결정적 순간을 놓쳐버려 장탄식을 해대는 것 모두가 꿈에서 깨어남으로써 벌어지는 일 들이다. 꿈꾼다는 것, 이 얼마나 매혹적이고 경이로운 체험인가!

‘영화적’이라는 표현이 있다. 해석하기 나름이겠으나 애초에 영화라는 것이 판타지라고 본다면, 정형화된 삶으로부터 탈주를 꿈꾸는 관객의 오감을 만족시키는 장면과 이야기를 두고 하는 말일 터이다. 되돌려 보면 예전의 영화들에서는 어김없이 영화적 요소들이 발견되곤 했다. 그러니까 비단 신데렐라 스토리나 영웅 신화 서사를 내세우지 않더라도 고단한 삶을 위무하는 짧지만 빛나는 장면들로 인해서 영화는 관객의 마음과 애정을 얻을 수 있었다는 말이다.

좋아하는 영화 목록을 꼽자면 버스터 키튼의 [셜록 주니어 Sherlock Jr.](1924)를 빼놓을 수 없다. 버스터 키튼이 얼마나 위대한 배우인지를 재삼 확인시켜준 이 영화에서, 감독은 탐정이 되고 싶은 영사기사를 영화 속 세계로 들여보내게 되는데, 놀라운 것은 이미 그 시대에 허구적 상황을 통해 꿈에서와 마찬가지로 (개인의 소원을 성취시켜주는)영화의 특질을 재현해냈다는 사실이다. 꿈을 꾸는 것과 영화 속으로 들어가는 것 모두가 영화적 행위들이라는 점은 새삼 거론할 나위가 없다. 감독의 카메라가 주인공과의 동일시를 거쳐 관객과 등장인물 사이에 동일시를 이뤄내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런 와중에 벌어지는 슬랩스틱은 더 없이 즐겁고 경쾌하다. [셜록 주니어]가 빼어난 작품으로 여전히 영화광들 사이에서 회자되는 주된 이유 역시, 영화와 꿈의 친연성이 빚어낸 찬란한 백일몽이란 점 때문일 것이다.

이 영화를 처음 보았던 때를 기억한다. 아담한 상영관에 모인 사람들 사이에서는 한숨과 탄식이 흘러나왔고 거침없는 웃음과 쾌재의 환호성도 이어졌다. 그렇게 한 편의 영화를 두고 낯선 이들이 하나가 될 수 있는 기회는 흔치 않다. 이러한 감흥은 극장 밖에서도 이어지기 마련이다. 삼삼오오 무리지은 이들은 방금 전 본 영화를 이야기 하고 있었으니, 아마도 그들은 밤을 새워 버스터 키튼과 무성영화를 예찬했을 런지도 모른다. 또 그들 중 어떤 이는 처음 접한 고전영화의 마력에 사로잡혀 문턱이 닳도록 영화관을 드나들었을 테고 현재도 진행형일 게 분명하다.

고전이란 그런 것이다. 고전영화의 명성은 애초에 열정적인 소수에 의해 만들어지고 그 소수에 의해 유지되는 것이다. 고전영화의 작가들은 항상 열정적인 소수의 열의에 의해 힘을 얻어 왔다. 그런 점에서 우리시대의 고전이란 영화에의 열정과 영속적인 관심을 보유한 소수에게 즐거움을 주는 작품들의 목록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중요한 것은 고전은 어떤 윤리적 이유 때문에 살아남지 않는다는 점이다. 키튼과 히치콕을, 르누아르와 웰즈를, 트뤼포와 고다르와 오퓔스를 우리가 만날 수 있는 것은, 열정적인 영화광들이 그것을 절대로 소홀히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시네마테크를 찾아가고 그곳의 기억을 영화수첩에 쌓아야 한다면, 그것은 단지 그곳의 영화들이 뛰어나서가 아니다. 시네마테크의 고전이 뛰어난 까닭은, 열정적인 소수가 그리고 당신과 내가 그것을 좋아한다는 이유만으로도 충분히 설명될 수 있기 때문이다. 고전은 바로! 그런 것이다.

지금 당신이 고전영화에 흥미를 느끼지 못한다 해도 전혀 부끄러워할 일이 아니다. 천천히 시작해도 늦지 않다. 고전영화와 친해지는 방법을 조금만 터득한다면, 추진력 강한 당신의 영화 인자들이 촉수를 세우고 고전 앞으로 도열하게 될 테니 말이다. 하지만 이왕이면 지금부터 고전영화와의 첫 만남을 시작해보는 것은 어떨까? 아니면 이번 주말에 낙원동으로 발길을 옮기는 것은 어떨까. ‘2008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를 통해 꿈 꿀 수 있는 영화를 만나고, 그 영화를 통해 또 다른 꿈을 꿀 수 있다면 더 없이 행복할 터이니 말이다.

댓글을 달아 주세요

BLOG main image
네오이마주(neoimages)와 영화 깊게 읽기
영화 비평 매거진 '네오이마주'의 공식블로그입니다. 더 많은 글은 http://neoimages.co.kr 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by woodyh98

카테고리

분류 전체보기 (521)
필진 리뷰 (260)
필진 칼럼 (149)
사람과 사람들 (55)
문화와 세상 엿보기 (10)
그리고... (41)

달력

«   2019/11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 3,158,684
  • 03

네오이마주(neoimages)와 영화 깊게 읽기

woodyh98's Blog is powered by Tattertools.
All rights reserved.